7.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아들 여벽을 훈계한 글[戒子如璧文]

2015. 8. 12. 17:44잡주머니

 

 

 

 

 

       7. 백성 부리기를 큰 제사 받들듯 해야만 가훈과 유언 / 옛사람 내면풍경

 

 

2011.10.2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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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아들 여벽을 훈계한 글[戒子如璧文]

 


   예전 한나라 명제(明帝) 때 일이다. 황제의 누이 관도공주(館陶公主)가 아들을 위해 낭관(郎官) 벼슬을 구했다. 황제가 말했다. “낭관은 밖에 나가 1백리를 다스리는 것이니 위로 하늘의 별자리와 상응합니다. 진실로 꼭 맞는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해를 입게 됩니다.” 백리의 소임이란 바로 옛날 제후의 직임을 말한다. 공자께서는 백성을 얻고 사직을 얻는 것으로 한 관리를 경계하셨다. 성인께서 삼가고 무겁게 여기는 바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한나라 선제(宣帝)와 당나라 선종(宣宗)은 수령 임명을 가벼이 하지 않고 혹 친히 이를 선택하기까지 하였다. 대개 임금과 재상이 무겁게 여기는 것은 백성의 일보다 다급한 것이 없다. 지난 날 선왕의 조정에서는 유일(遺逸), 즉 은거한 뜻 높은 선비를 천거하여 수령으로 삼은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육조(六曹)로 하여금 재주와 행실이 남보다 뛰어난 자를 선발케 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6품의 직분을 내리기도 했다. 조정에서 이름과 그릇을 삼간 것이 또 이와 같았다.


   너는 채 배우지도 않은 아이인데 임금의 은혜를 입어 갑작스레 주부(主簿)가 되었다. 또 겨우 몇 년도 안 되어 관서 고을의 원님에 제수되었다. 이것은 네가 해당 관서의 천거 없이 선왕조의 유일(遺逸)에 참여하게 된 것이나 진배없다. 내가 이미 나라를 저버리고 곳간을 훔쳐,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네가 또 내 음덕으로 백성의 수령이 되었다. 정령(政令)을 베풂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무어라 손가락질을 하겠느냐. 어버이를 욕되게 하고, 나라를 저버리는 것은 다만 네가 근면과 성실로 처신하느냐의 여부에 달렸을 뿐이다. 문을 나서거든 마치 큰 손님을 만난 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인께서 인(仁)을 행하는 공으로 권면했던 것이니라.


   네가 길을 나선 이후로 일에 임할 때마다 늘 이 말을 떠올린다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생각이 신중해질 것이다. 상관의 호령에는 조심스레 삼가며 좇아서 베풀되, 손님을 시켜 왕래하듯이 절도에 맞게 마땅함을 얻어야 한다. 백성들이 하소연하여 올린 글은 비록 밤이라 해도 신속히 결정하여 백성들의 괴로움이 비록 사소하더라도 꼭 살피도록 해라. 모든 일을 백성의 정리에 따른다면 관에 누를 끼치는 일이 조금도 없을 것이다. 민심을 얻은 뒤에야 이를 바탕으로 군량(軍糧)을 조처하고 관가의 기물을 갖추는 것이니, 이는 여러 가지 처리 하는 가운데 한 가지 일일 뿐이다. 옛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날을 헤아려 부족하면, 달로 헤아리면 남음이 있다.” 네가 능히 관직에 있으면서 직분을 다할 마음을 지녀 밤낮으로 경계하여 태만하지 않는다면, 비록 바로 체직되어 돌아오더라도 은혜를 갚으려고 힘을 다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위의(威儀)를 갖추는 일이나 음식의 절제 같은 것은 모두 관직에 있으면서 지켜야 할 큰 범절들이다. 《소학》에서도 “위의가 없이는 남의 위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의서(醫書)에도 “음식이 능히 수명을 재촉한다.”고 했다. 아랫 사람에게는 엄숙하게 대하고, 음식을 절제하여 때에 따르는 것을 특히 소홀해서는 안 된다. 정사를 돌보는 여가에는 부지런히 경서(經書)를 읽도록 해라. 밑바탕에 절로 배양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삼가고 두려워하여 반드시 술자리의 몇 줄짜리 글로 여겨서는 안 된다. 너는 이를 유념토록 해라.


   내가 늙으신 어버이와 떨어져 지낸 날이 오래인데, 또 너를 먼 길로 보내게 되니, 이 마음을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네가 대동강을 건널 때 동편 길을 돌아보면서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한 말을 떠올리도록 해라. 다 적지 못한다.

昔漢明帝時, 帝姊館陶公主爲子求郞, 帝曰, 郞官出宰百里, 上應列宿, 苟非其人, 民受其害. 百里之任, 卽古諸侯之任也. 孔子以有民人焉有社稷焉, 爲戒於一宰, 聖人之所愼重, 可想已. 漢之宣帝, 唐之宣宗, 猶不輕守令, 或親擇之. 蓋君相之所重者, 莫急於民事耳. 往昔先王朝, 擧遺逸爲守令. 繼而令該曹選才行過人者, 超敍六品職. 朝家之愼名器又如此矣.
汝以不解學之童子, 蒙上恩, 遽爲主簿. 纔數年而除關西縣宰. 是汝無有該曹之薦而與先王朝遺逸等也. 我旣負國竊廩, 尙叨匪據, 而汝又以我蔭爲民宰. 非有施爲政令之動於人者, 人皆指爲何哉. 辱親負國, 唯在汝處之以勤誠與否耳.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乃聖人勉以爲仁之功者.
汝自啓程以後, 臨事每思此言, 則心不放而思過半矣. 至於上司號令, 恪謹趁施, 使賓來往, 節適得宜. 愬狀雖夜速決, 民瘼雖微必察. 凡事順民之情, 一毫無累於官. 民心旣得, 然後以之措糧餉備官器, 乃其處置中一事耳. 古人云, 日計不足, 則月計有餘. 爾能居官而存盡職之念, 晝夜儆戒不怠, 雖卽爲遞還, 所報效者多矣.
若威儀之間, 飮食之節, 俱係居官大節. 小學不云乎. 無威儀則無以爲人上. 醫書亦謂飮食能促壽. 臨下以莊, 節食順時, 尤不可忽也. 聽政之暇, 勤讀經書. 本源自有培養之地. 竦然惕然, 必無待於酒次數行書矣. 汝其念之.
我違老親日久, 又送汝遠行, 此情有難向人道. 汝過浿江, 回望東道, 則想必瞿然於今日席中之言矣. 不能盡.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음사(蔭仕)로 관서 땅의 고을 원이 되어 나가는 아들에게 준 당부의 글이다.


   아들아! 지방관은 그 자리가 몹시 중하다. 오죽하면 황제가 누님의 부탁조차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았겠느냐? 그런데도 너는 지닌 덕도 없이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네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겠느냐? 어버이를 욕되게 하고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네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이를 명심하도록 해라. 언제나 전전긍긍, 어려운 손님 앞에 선 것처럼 근신해야 한다. 백성 위에 군림할 생각을 버리고 제사를 받드는 제관처럼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윗사람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절도에 맞춰 하면 될 일이지 지나치면 안 된다. 목민관의 모든 일은 백성을 위주로 하는 법. 백성의 편에 서는 것이 나라를 위한 것이려니 알아라. 그 밖에 군량을 조달하고 기물을 갖추는 행정 사무는 민심을 얻은 뒤의 일일 뿐이다. 매일 매일을 부족한 듯이 바쁘게 지내면, 한 달의 일은 여유가 있게 마련이다. 평소 게을리 있다가 일에 닥쳐서야 허둥지둥 해서는 못 쓴다. 백성을 자애로 대하더라도 윗사람의 위엄을 잃어서는 안 된다. 술 같은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면 건강을 잃게 되니 지나치면 안된다. 짬이 나거든 부지런히 경전의 글을 읽어라. 든든한 뒷심이 여기서 생겨나는 법이다.


   어린 너를 먼 길 떠나보내자니 애비의 마음이 미타미타하다. 대동강을 건너 관서 땅에 접어들 때 애비가 적어준 이 글을 꺼내 다시금 마음에 새기도록 해라. 부디 어진 정사를 베풀어 애비의 자랑이 되어다오.

 


   이덕형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58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된 후 많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가 충주에서 그와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이르렀을 때 왜적이 대동강에 도착하여 화의를 요청하자, 단독으로 적장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하였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 이후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는데, 전란 중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하는 것으로써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출신으로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이후 포천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이덕형은 한산 이씨(韓山李氏)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고, 측실과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다. 본문에 나오는 여벽(如璧)은 한산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로 은산현감(殷山縣監)을 지냈다. 본문에서 “관서 고을의 원님에 제수되었다.”고 했으니, 여벽이 황해도 은산현감에 제수되어 부임지로 떠날 때 지어준 경계의 글이다. 《조선왕조실록》광해군 5년 계축(1613) 5월 28일자 기사에, 사헌부에서 은산현감 이여벽을 파직시킬 것을 요구하자 광해군이 논하지 말 것을 권고한 내용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여벽의 은산현감 부임은 이덕형의 말년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자식들에게 가르침이 될 만한 인물들과 그들의 언행을 기록하여 첩으로 만들었다. 〈훈제자첩(訓諸子帖)〉이 그것이다. 주렴계, 정명도, 정이천, 장횡거, 소강절, 호무이, 주회암 송나라 유자들 본받을 만한 언행을 정리하였다. 이덕형은 이 첩의 끝에 “우연히 송나라 때 여러 노선생의 언행록을 보고,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뽑아다가 적어 보낸다. 아이들이 항상 이것을 보고서 양심을 감발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아. 부모의 마음을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무술년 가을 9월 4일.偶閱宋時諸老先生言行錄, 拈出其中切要者, 書送. 願兒輩, 常目在之, 以感發其良心. 噫. 父母之情, 爾其知矣. 戊戌秋九月初四.〕”라고 적었다. 38세 되던 1598년에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지은 글이다.


   이 해는 정유재란이 마무리 되는 시기로, 이덕형은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를 개성부(開城府)까지 따라가서 전송했고, 왕명으로 제독 유정(劉綎)을 따라 남정(南征)에 참여하기도 했다. 4월에는 우의정으로, 10월에는 좌의정으로 혼란한 조선의 정국을 이끌었다. 이러한 공무의 여가에 자식을 위해 시간을 나눠 적어나간 〈훈제자첩(訓諸子帖)〉에 담긴 가르침이 참 거룩하다. 첩 가운데 세 항목만 여기에 소개한다. 



   " 염계 주무숙 어려서부터 옛 것을 믿고 의리를 좋아하여 명절(名節)로써 스스로를 닦았다. 자신을 기름은 매우 검약하여, 봉록은 모두 종족과 분사(分司)에게 나눠 주고서 돌아왔다. 처자가 죽조차 대지 못하였지만, 시원스레 마음에 두지 않았다. 품은 생각은 시원스럽고 깨끗하였고, 우아하여 높은 운치가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산수를 즐겨 뜻에 맞는 곳을 만나면 혹 온 종일 서성이곤 했다. 황산곡은 “주무숙은 인품이 아주 높고 가슴 속이 깨끗하여(洒落)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고 했고, 주자는 “이른바 쇄락(洒落)하다는 것은 행동이 청명하고 고원함을 형용한 것이다. 만약 터럭 하나라도 사사로이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어느 곳에서 이 같은 기상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소자용(蘇子容)이 말했다. “인생은 부지런함에 달려 있으니, 부지런하면 다함이 없다. 문지도리는 좀먹지 않고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 이치다.”


   손신로(孫莘老)는 자식을 가르칠 때 행실을 중시하고 문예를 다음으로 여겼다.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선비는 마땅히 기식(器識)을 중요시해야 한다. 문인으로만 불려지는 사람은 족히 볼 것도 없다.”

濂溪周茂叔, 自少信古好義, 以名節自砥礪. 奉己甚約, 俸祿悉以周宗族及分司而歸. 妻子餰粥或不給, 而亦曠然不以爲意, 襟懷飄洒, 雅有高趣. 尤樂佳山水, 遇適意處, 或倘佯終日. 黃山谷曰, 茂叔人品甚高, 胸中洒落, 如光風霽月. 朱子曰, 所謂洒落者, 只是形容所行淸明高遠之意, 若有一毫私吝心, 何處更有此等氣象耶.
蘇子容曰, 人生在勤, 勤則不匱. 戶樞不蠹, 流水不腐. 此其理也.
孫莘老敎子孫, 先行實後文藝. 每曰, 士當以器識爲先, 一號爲文人. 無足觀矣.



   문지도리는 절대로 좀 먹는 법이 없다. 고인 물은 쉬 썩지만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왜 그럴까? 문지도리는 늘 움직이고, 흐르는 물은 정체됨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부지런한 것이다. 하지만 부지런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나는 너희가 시문이나 잘 지어 고작 문인 소리나 듣는 것을 원치 않는다. 듬직하게 행동하고 식견을 길러서 한 세상이 우러르는 우뚝한 선비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가슴 속에 호연한 기상을 길러야겠지. 성현의 말씀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여 광풍제월의 기상을 깃들이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