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큰아들 윤인미(尹仁美)에게 준 훈계[寄大兒書]

2015. 8. 12. 20:50잡주머니

 

 

 

 

 

      9. 가문의 흥망이 이 종이 한 장에 달렸다 가훈과 유언 / 옛사람 내면풍경

 

2011.10.29.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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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큰아들 윤인미(尹仁美)에게 준 훈계[寄大兒書]

 


   네가 금산의 과거에서 지은 세 편 글을 보니, 부(賦)가 제일 낫더구나. 비록 높은 등수에 두더라도 괴상할 것이 없겠다. 하지만 떨어지고 말았으니 안타깝다. 하지만 서술한 내용 가운데 ‘납약(納約)’ 이하의 내용은 사실을 풀이한 것이 너무 지나치게 소략한 것이 흠이었다. 대책(對策) 또한 좋았다. 하지만 조목에 따라 뜻을 펼친 것이 너무 소략하고 알맹이가 없어 흠이 똑 같았다. 대개 과거 시험장의 답안은 지나치게 상세할망정 너무 소략해서는 못쓰는 법이다. 너무 꼼꼼할지언정 지나치게 성글어도 안 된다. 이러한 뜻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장차 모름지기 마음을 쏟아 고금의 문자를 찬찬히 살펴 문맥을 전환하고 이어 받는 묘리를 얻은 뒤라야 글을 지어도 흠이 없게 된다. 만약 옛 사람의 글쓰는 법에 침잠하지 않고, 한갓 문자의 사이에서 사소한 재기만 부리려 들면 반드시 노망하여 지리멸렬하게 되는 폐단이 있게 된다. 특히 이점을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매번 방이 붙을 때마다 모두 떨어지고 마는 것은 진실로 부지런하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 근원을 살펴보면 하늘이 돕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다. 하늘의 도움을 얻는 것은 다만 선행을 쌓는 데 있을 뿐이니 너희가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물며 자손들이 거의 다하여 길러지지 않으니 제사마저 끊길까 염려된다. 평소의 두려움을 어찌 이루 말로 다 하겠느냐?


   희는 몸을 닦아 삼가 행하고, 선을 쌓아 인(仁)을 행함을 제일 가는 급선무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는 또한 일찍부터 여기에 생각이 미쳐본 적이 있느냐? 한나라 때 문제(文帝)경제(景帝)는 근검절약에 힘써 여러 번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 주었는데, 자손 삼대가 크게 일어났다. 가만히 역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었다. 비록 우리 집안 선대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고조께서는 농사일에 부지런하셔서 종들에게 취함을 가장 가볍게 하셨다. 때문에 증조부 형제께서 크게 일어나 한 집안이 안정되게 흥성할 수 있었다. 조부이신 영광군께서는 비록 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셨으나, 부자가 되는데 마음을 쏟으신 듯 하다. 그래서 살림살이가 쇠퇴해졌다. 행당공(杏堂公)과 졸재공(拙齋公) 등 두 분 집안 증조께서도 모두 고조의 집안 법도를 체득하지 못하셨던 까닭에 자손이 모두 쇠퇴하고 말았다.

    하늘의 보답이 분명한 것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고조와 증조께서는 절약과 근검으로 일어나셨는데, 후대의 일은 시속을 좇아 화미함에 힘써 점차 선대의 가풍만 같지 않게 되어 쇠퇴하였다.《주역의 이치는 달이 보름이 막 지난 16일을 가장 경계하였다. 가득 참은 덜어냄을 부르고, 겸손은 유익함을 준다는 등의 말은 지극한 가르침이 아님이 없으니,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안에서 마땅히 덜어내야 할 바의 것을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니, 너는 두려운 마음으로 소홀히 여기지 말라.


    하나. 의복이나 말안장 등 여러 가지 몸을 받드는 물건은 모두 마땅히 습속을 고치고 폐단을 줄여야 한다. 음식은 주림을 채울 만큼만 먹고, 옷은 몸을 가릴 정도면 된다. 말은 걸음을 대신할 정도면 그만이고, 안장은 단단하면 그뿐이다. 그릇은 쓰기에 알맞으면 충분하다. 탈 것은 다만 멀리 갈 수 있는 놈 한두 마리를 구해 행로에 대비할 뿐이다. 어찌 반드시 잘 달려야 하겠느냐? 풀을 벨 때는 비록 집에서 기르는 소도 써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하인 집이나 동네 사람의 농사짓는 소를 쓸 수야 있겠느냐? 한갓 사람들이 반드시 괴롭게 여길 뿐 아니라, 사리에도 크게 맞지 않는다. 이 같은 일은 지금부터 절대로 하지 않도록 해라. 다만 한두 마리 짐말에다 실어 오는 것은 괜찮다. 나는 50 이후에야 명주옷과 모시옷을 처음으로 입어 보았다. 시골에 있을 때, 네가 명주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았다. 대개 이 두 물건은 대부의 복장이다. 대부이면서도 입지 못하는 자가 오히려 많은데, 하물며 보통 사람이 대부의 옷을 입을 수 있겠느냐? 이 같은 복식은 모름지기 물리쳐서 가까이 하지 말고, 검소한 덕을 숭상함이 옳을 것이니라. 대개 이 같은 물건은 모름지기 박실(樸實)함에 가까워야지 사치스러워서는 못 쓰는 법이다. 여기에 비추어서 구할 것 같으면 하나로 열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제갈무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담박함이 아니면 뜻을 밝게 할 수 없고, 고요함이 아니고는 원대함을 이룰 수가 없다.” 아름답구나 이 말이여. 이를 경계하여 잊지 않도록 해라.《단서(丹書)》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다.공경으로 나태함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나태함으로 공경을 이기는 자는 망한다.” 소홀함 또한 나태함이다. 나태함의 폐해가 망함에 이른다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느냐? 모름지기 공경함을 마음에 지녀서 감히 잠깐 사이라도 여기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녀자의 복식은 나이가 늙어서 명주를 쓰고, 젊어서는 명주와 무명을 섞어서 쓴다. 채색 비단은 쓰지 않은 것이 좋다.


하나. 노비의 신공(身貢)은 고조 때는 한 사람마다 상목(常木) 한 필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에는 혹 더하기도 하고 덜기도 해서 일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떻게 법식을 정했더냐? 사내종은 35자의 촘촘히 짠 평목 두 필이고, 계집종은 한 필 반이다. 가난한 사람으로 노역이 많은 자는 양을 감해주되, 부유한 자도 더 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을 정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하나. 집에 두고 부리는 노비에게는 후하게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모름지기 위를 덜고 아래를 보태는 방법을 써서 주인집에서 쓸 것을 더욱 줄여 노비의 먹고 입는 것을 넉넉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를 보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힘들고 괴로워하면서 원망을 품게 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또 날마다 일을 시키는 것도 모름지기 그 힘을 다 쓰지 않도록 제한을 두어 정해진 법식에 따라 시키도록 해라. 또 노비가 비록 실수가 있더라도, 작은 것은 가르치고 큰 것은 대충 매질할 뿐이다. 매번 자신을 어루만지는 느낌을 갖게 해서 자신을 학대한다는 원망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윗사람의 도리는 다만 관대함을 위주로 함이 마땅하다. 아녀자들은 성품이 편협하니 형벌 주는 권한을 맡겨서는 안 된다. 볼기를 치는 것도 기준을 정해 감히 지나침이 없게끔 해야 한다. 감히 손수 일처리를 뒤섞어 하지 않고 또한 모름지기 잘 타이르고 엄히 경계해야 한다.


하나. 간혹 크게 힘쓸 일 외에 그 밖의 사소한 잡일이나 일상적인 심부름 등의 일이 있으면 다만 집안의 노비에게 맡기고 호노(戶奴,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사노비)에게는 시키지 않도록 해라. 편안히 지내며 스스로 본업에 힘쓰게 하여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야 한다. 동네 사람은 특히나 자주 부려서는 안 된다. 이 같은 일은 모름지기 유념하여 살펴서 참고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 기사(祈嗣, 아들 낳기를 비는 일)의 일은 모름지기《의학입문(醫學入門)》의 ‘구사조(求嗣條)’와《기사진전(祈嗣眞詮)》을 위주로 해서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 지인(至人)의 말씀을 믿지 않고서 소경이 가리켜 보이는 것을 믿겠느냐? 도에서 어긋나는 점쟁이의 말은 귀를 막아 배척하여 아녀자들이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기사진전》 10편 중 말편은 기도에 관한 내용인데, 이른 바 기도라는 것은 니구산(尼丘山)에서 공자의 부모가 기도했던 뜻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의 어머니인 안씨 같은 쌓은 덕도 없이 기도하면, 또한 신의 노여움을 더하지 않겠느냐? 하물며 무속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따라서 기도하겠느냐? 한갓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또 해롭게 된다는 것이 이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니, 단지 가소로울 뿐만이 아니다.《기사진전》에서는 개과천선(改過遷善)을 제일 가는 급선무로 꼽았으니, 위에서 언급했던 일들이 모두 이 같은 종류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도록 해라. 후사를 구하는 데는 기도가 중요한데도 오히려 할 수가 없으니, 하물며 다른 신을 섬기겠는가? 일체 물리쳐서 끝어 집안의 도리를 바로잡고, 모름지기 더욱 격앙되어 실추하지 않도록 해라.


하나. 전부터 원근의 노비들은 매번 시장에 나가 물건 팔고 사는 것을 걱정하곤 한다. 승노(僧奴) 처간(處簡)이 있을 적에 힘써 내게 말했는데, 내가 즉시 고치라고 명하지 못했으니 무척 후회스럽다. 내 분부로 담배를 사올 때도 전부터 시가(時價)에 따르게 해서 받아오는 자가 손해 보는 일이 없게 했으니, 나중에도 또한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지금 만약 서울로 보내게 된다면 더욱이 주고받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이밖에 일체의 장사 일은 네가 먼저 하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내말이라 하여 여러 자제들의 집안에 엄히 금해서 일체 하지 못하게 하여라. 너는 모름지기 형제를 위한다며 부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하나. 이제 비록 배로 짐을 실어 나를 때 노비를 부려 선격(船格, 배를 부리는 곁꾼)으로 삼더라도, 집에서 부리는 종 이외에는 모두 때에 맞게 가감해서 선격의 품삯을 지급해야 한다.


하나. 성현의 경전의 가르침은 너희가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내가 귀를 당겨서 가르쳐온 것이다.《소학》은 사람 꼴을 만들어주니, 배우는 자라면 마땅히 이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 또한 일생의 언어와 문자 사이에서 너희들이 부지런히 애써야 할 것이다. 이제는 모름지기 번거롭게 얘기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따금씩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붙여 한가롭게《소학》을 본다면 반드시 새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또 장차 경전을 되풀이해서 찬찬히 음미하면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는 모두 일생토록 마땅히 힘쓸 것이요, 죽을 때까지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 우리 가문의 흥망이 이 한 장의 종이에 달려 있다. 절대로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된다. 장차 손자들에게도 명심하여 읽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라.

汝之錦山三製見之, 賦最勝. 雖居異等, 無足怪也, 而至於見屈, 可歎. 然鋪敍中納約之下, 解題事實, 略之太過, 是欠也. 策亦好矣. 而逐條題意, 太略而沒實, 同一欠也. 大槩場屋程文, 寧過於詳而不可過於略, 寧過於密而不可過於疏, 此意不可不知也.
且須着意細看古今文字, 得其轉換承接之妙, 然後乃可作文無欠. 若不沈潛於古人文法, 徒使些少才氣於文字之間, 則必有鹵莽滅裂之弊, 尤不可不知也. 每榜皆落莫, 固是不勤之致, 而原其本, 則出於天不佑也. 得天佑, 惟在積善, 汝曹不可不知也. 況兒孫幾盡不産育, 絶祀可慮, 尋常恐懼, 可勝言哉.
汝曹不可不以修身謹行積善行仁爲第一急務也. 汝曹亦曾念及乎此否. 漢之文景, 節儉爲事, 屢蠲民租, 而子孫三興. 細思歷代靑史, 則無不皆然. 雖以吾家先世言之, 高祖勤於稼穡, 取於奴僕最薄. 故曾祖昆季勃興, 一門鼎盛. 靈光祖父主雖不爲不義之事, 似留心於爲富. 故生育衰絶. 杏堂拙齋兩族曾祖皆不能體高祖家規. 故子孫皆陵替. 天報之昭昭, 此可知也. 高曾祖以節儉而興, 後代之事, 隨俗華美, 漸不如先世之風而衰. 易理以月旣望爲大戒, 及滿招損謙受益等語, 無非至敎, 可不銘心刻骨. 吾家所當損者, 思而錄之于左, 汝其惕念毋忽.
一. 衣服鞍馬, 凡百奉身者, 皆當改習省弊. 食取充飢, 衣取蔽體, 馬取代步, 鞍取堅牢, 器取適用, 可也. 所騎只求可以涉遠者一二頭, 以備行路而已. 何必要能步也. 靑草刈時, 雖家牛隻, 不可用也. 況可用奴戶及洞人之農牛耶. 非徒人必苦之, 大不合於事理. 如此等事, 自今絶勿爲之. 只庀一二卜馬載取, 可也. 吾於五十後, 衲紬衣苧裌衣, 始試爲之. 而在鄕時, 曾見汝服衲紬衣, 心甚不悅. 蓋此兩物, 大夫之服, 而大夫而不爲者猶多. 況笠下之人而可衣大夫之服乎. 如此服飾, 須斥去不御, 以崇儉德, 可也. 大槩此等物, 須近於樸, 毋近於侈. 稱此以求, 一可知十. 諸葛武侯之言曰, 非澹泊, 無以明志, 非寧靜, 無以致遙. 旨哉言乎. 戒之勿忘. 丹書曰. 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忽亦怠也, 怠之害, 乃至於滅, 豈不寒心. 須以敬存心, 毋敢斯須有忽於斯. 婦人之服, 則年老則用紬, 年少則雜用紬綿, 勿用綵段, 可也.
一. 奴婢之貢, 高祖時, 則每名常木一疋定式, 而其後或加或減, 無常矣. 今則定式如何. 奴則卅五尺平木密織者二疋, 婢則疋半. 貧者役多者則量減, 富者勿加. 以此爲定式, 可也.
一. 仰役奴婢, 不可不厚恤. 須用損上益下之道, 益減主家自奉. 而每優奴婢衣食, 使仰活於我者, 無所艱苦而含怨, 至可. 且逐日所役, 須限不盡其力, 定式敎之. 且奴婢雖有所失, 小則敎之, 大則略笞. 每令有撫我之感, 無虐我之怨, 可也. 在上之道, 惟當以寬爲主. 婦人性偏, 不可付刑杖之權. 笞亦定式, 使無敢過. 不敢爲手自雜打事, 亦須善喩嚴戒也.
一. 或有大運力外, 其他細小雜役及尋常使喚等事, 只任家內奴婢, 勿使戶奴. 使其優游, 而自盡於力本, 有生之樂. 洞人尤不可種種使之. 如此等事, 須留念察之, 忍耐過了, 可也.
一. 祈嗣一節, 須以入門求嗣條及祈嗣眞詮爲主, 勤而行之, 至當至當. 不信至人之言, 而信盲人之指示乎. 左道巫卜之說, 塞耳斥之, 使婦子毋惑也. 眞詮十篇中末篇祈禱, 而所謂祈禱者, 不過尼丘山之意也. 無孔顔之積善而禱之, 則不亦益神之怒乎. 況從巫俗無稽之說而禱之乎. 非徒無益, 而又害之者, 此等之謂也. 不但可笑而已也. 眞詮以改過遷善爲第一急務, 上面所云之事, 皆此類也. 念之念之. 爲求嗣祈禱重也, 而猶不可爲之. 況其他神事乎. 一切斥絶, 以正家道, 更須激昂毋墮.
一. 自前遠近奴婢, 每以貿販爲悶. 僧奴處簡在時, 力言於我, 而我不卽令改, 悔吝可勝. 吾所命南草之販, 自前從時直, 俾無所損於受者, 後亦當然. 而今茲若得送京, 則尤無授受之弊也. 此外一應貿販, 汝先勿爲. 而以我言痛禁諸子弟家, 一切勿爲. 汝須勿爲兄弟而欺父兄也.
一. 今茲雖爲船卜, 而使奴輩爲格, 則仰役奴外, 皆准時加減給格價.
一. 聖賢經訓, 則自汝曹解語時, 吾所提耳而誨者也. 小學是做人底樣子, 學者, 當以此爲主者. 亦於一生言語文字間, 勤勤懇懇於汝曹者也, 今不須瀆告也. 但有時靜坐, 着意閑看小學, 則必有新得. 且將經傳循環細玩, 則無非懾伏身心之助. 此皆一生當務, 而至死不可變者也.
一. 吾家興滅, 在此一紙, 切勿泛視, 且令孫兒輩銘讀勿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큰아들 윤인미(尹仁美)에게 준 훈계서1660년 공의 나이 74세함경도 삼수(三水)의 귀양지에서 지은 것이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처지에서, 집안의 장래를 근심하여 편지 글에 하나하나 간곡한 당부의 내용을 담았다. 글의 형식은 편지지만, 항목별로 분장한 가훈이다. 현재 윤선도의 친필이 보물 제 482호로 지정되어 해남 녹우당에 남아 전한다. 윤선도의 문집인《고산유고(孤山遺稿)》에도 실려 있는데 친필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친필본에는 망아지를 길러 이익을 보는 것에 대한 경계와 손자 이석(爾錫)과 그 아내인 청송 심씨에 대한 경계 등 문집본에 없는 내용들이 다수 실려 있다. 처음 보낸 뒤, 나중에 문집으로 묶을 때 다시 손본 것이다. 여기서는 문집본을 따랐다. 글은 서설 외에 모두 9개의 별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들아! 멀리 귀양지에서 애비가 보낸다. 지난번 과거 시험에 제출했다는 네 글 세 편을 읽어 보았다. 부(賦)는 제법이더라만 나머지는 알맹이가 없이 지리멸렬하더구나. 과거 시험장의 답안은 좀 장황하더라도 자세히 꼼꼼하게 써야 하는 법이다. 글쓰는 방법을 터득하고 싶거든 고금의 좋은 문장을 가려서 꼼꼼히 연구해야 한다. 재주만 부리려 들면 차마 읽을 수 없는 글이 되고 마니 특별히 조심하거라. 해마다 네가 낙방하는 것은 네 공부가 부족한 탓도 있지만 하늘이 돕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의 도움은 어찌 구할까? 선행을 쌓는 것이 그 뿐이다. 이제 우리 집안을 돌아보니 후손이 많지 않아 자칫 제사마저 끊기고 말까봐 걱정이다.
나는 너희가 선행을 쌓고 어짊을 베풀어 하늘의 복을 받아 후손이 크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역대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는 어김없이 징험할 수 있고, 가깝게는 우리 집안의 일만 보더라도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다. 16일의 달은 보름달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로부터 급전직하 그믐달을 향해서 치닫게 되니, 사람 일도 늘 가득 찼을 때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하의 내용은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고, 행하(行下) 즉 아래 사람에게 베푸는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 경우에 따라 상세하게 논하였다. 그는 그 엄청난 재산에도 불구하고 50세 이후에야 비로소 명주옷을 입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노비에 대해서는 누누이 각박하게 대하지 말고 넉넉하게 베풀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끝에서 이 한 장의 종이에 가문의 흥망이 달려 있으니, 명심하여 그대로 지킬 것을 당부했다.


   당시 윤선도는 효종의 장지 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 삼수에 유배되었던 터였다. 7년 뒤인 1667년(81세) 7월에야 특명으로 해배되어 해남으로 돌아가게 된다. 윤선도의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616년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덕에 유배되었다. 1652년 복직하여 예조참의 등의 벼슬에 올랐지만 서인의 모략으로 벼슬을 그만두었고,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을 때 남인인 정개청(鄭介淸)의 서원철폐를 놓고 서인인 우암 송시열 등과 논쟁하다가 탄핵을 받고 관직이 삭탈되었다. 1659년 효종의 장지 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하여 함경도 삼수에 유배되었다.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지만,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과 복서(卜筮) 및 음양과 지리에도 통달했다. 특히 시조 창작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시조는 송강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시가사(詩歌史)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윤선도는 1603년 선조 36년 계묘년에 열일곱의 나이로 남원 윤씨 판서 돈(暾)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정부인 윤씨는 공보다 1살 위로, 공 보다 17년 앞서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남은 인미(仁美) 차남은 의미(義美) 삼남은 예미(禮美)인데, 이 중 차남 의미는 공이 50세 되던 해에 25세의 나이로 죽었다. 문집에 의미의 죽음을 애도한 작품이 남아 전한다. 의미의 아들이자 윤선도의 손자인 이구(爾久) 또한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스물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먼저 떠나고 말았다. 후사 없이 딸 둘만 남기고 떠난 손자의 죽음 앞에서 일흔의 노인은 자신의 재앙이 손자에게까지 미쳤다고 한탄하며 슬픔을 토로하였다.


   고산은 측실과의 사이에서 순미(循美)와 직미(直美) 외 3녀를 두었다. 4남인 순미는 고산이 52세 나던 1638년에 태어났고, 직미는 57세 때인 1643년에 태어났다. 더하여 천출로 태어난 아들 미(尾)가 있었다. 미는 고산이 마흔여섯에 얻은 아들로, 뛰어나게 총명했던 탓에 귀천에 관계없이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미가 여섯 살이 되던 때부터 뱃길에 동행하게 했고, 계곡을 유람할 때도 앞세워 걷게 했다는 언급이 만시에 보인다.


   미는 고산이 53세 때인 1639년 기묘년 중춘(음력 2월) 초하루에 두창을 앓다가 죽었다. 고산은 영덕의 적소(謫所)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던 중 경주의 요강원에서 부음을 듣고 통곡하며 시를 지었다.〈도미아(悼尾兒)〉와〈견회(遣懷)〉두 편에 고산의 절절한 마음이 남아 전한다. 특히 3년 전에 죽은 아들 의미에 대한 슬픔이 다하지 않은 즈음에 다시 맞은 죽음이라 아픔이 더했던 모양이다. 아래 시는〈도미아(悼尾兒)〉의 부분이다.

汝沒斂不撫 너 죽어도 염하여 못 거둬주고
汝病藥不試 너 아플 때 약 한번 못 써보았네.
所以增我傷 그래서 내 상심 더욱 더 크니
痛悼無與比 애통함을 어디에도 견줄 수 없네.
臨湌涕垂匙 밥상에선 눈물이 수저에 지고
騎馬淚霑轡 말을 타니 눈물이 고삐 적신다.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이 슬프다.

 


 

[출처] 9. 가문의 흥망이 이 종이 한 장에 달렸다|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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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미 <다산을 찾아서> 새오늘 님의 자료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