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김경여(金慶餘, 1596~1653)가 아들 진수(震粹)에게 남긴 유언[遺誡. 癸巳五月十一日]

2015. 8. 12. 21:08잡주머니

 

 

 

 

       11. 할 말은 많은데 기운이 다해가는구나 가훈과 유언 / 옛사람 내면풍경

 

2011.10.29. 19:00

 

복사 http://sambolove.blog.me/150122667143

전용뷰어 보기

 

 

 

- 김경여(金慶餘, 1596~1653)가 아들 진수(震粹)에게 남긴 유언[遺誡. 癸巳五月十一日]


   내 비록 어리석어도 죽고 사는 이치는 익히 알고 있다. 부쳐 살던 곳을 떠나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감에 무슨 한스러움이 있겠느냐? 다만 지하에서도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은 죄를 지음이 깊고 무거운 것이다. 평생 아버님의 얼굴을 알지 못한 채 홀로 어머니만을 모셨다. 효도로 봉양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성스런 뜻이 얕고 얇아 하루도 편안히 즐겁게 모시지를 못했다. 이제 연세가 여든이신데 급히 내가 먼저 돌아가게 되니, 내 마음의 아픔이 어찌 끝이 있겠느냐? 너는 모름지기 내 지극한 뜻을 알아, 온갖 일에 받들어 봉양하여 마땅함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사람은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를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 명보 송준길영보 송시열은 나의 지극한 벗이요, 너의 스승이다. 무릇 큰 일이 있거든 반드시 여쭈어 본 뒤에 행하여, 마을과 고을에서 죄를 얻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다행이겠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무덤을 이장하는 일은 뜻만 있었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내 죽은 뒤에는 이 일을 처리할 수 없을 듯하여 염려스럽다. 세월이 오래 지나고 보면 또한 낭패가 되고 말 염려가 없지 않다. 이 일은 모름지기 사징(士徵) 및 여러 형제와 더불어 상의해서 잘 처리하도록 해라. 무덤을 이장하는 일을 혹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석물을 세우는 것은 가장 시급하니, 너는 유념하도록 해라. 할 말은 많은데 기운이 다해가는구나.

吾雖蒙昧, 死生之理, 聞之熟矣. 謝寄就歸, 何恨之有. 但地下所不可瞑目者, 罪逆深重. 平生不識嚴父之顔, 獨侍所恃, 非無孝養之情, 而誠意淺薄, 殆無一日安樂. 年今八十, 遽爾先歸, 余懷之痛, 何可窮際. 汝須體余至意, 凡百奉養, 毋或失宜.
人生於三, 事之如一. 明甫英甫, 余之至友, 而汝之師也. 凡有大段之事, 必稟而后行, 毋得罪於鄕黨州閭, 幸甚.
先人遷厝, 有志未就. 余死之後, 恐不得辦此事. 年歲且久, 亦不無狼狽之慮. 此則須與士徵及諸兄弟, 相議善處. 遷厝之計若不行, 石物最急, 汝須惕念. 言無窮而氣有盡矣.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 1596~1653)1653년 5월 11일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아들 진수(震粹)에게 남긴 유언이다. 김경여는 자가 유선(由善), 호가 송애(松崖), 시호가 문정(文貞)이다. 이귀(李貴)의 사위요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 회덕으로 내려가 머물렀다. 당대의 대유(大儒)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과 친교가 깊었다. 후에 대사간이 되었으나 노모를 모시기 위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만년에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부제학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물러나 세상을 떴다.


   그는 위의 유언 외에 임금께 올리는 〈유소(遺疏)〉를 따로 남겼다. 송시열과 이희조(李喜朝) 및 이기홍(李箕洪) 등이 〈유소유계첩에 쓴 발문(遺疏遺誡帖跋)〉을 남겨 그의 뜻을 기렸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현감을 지낸 김진수(金震粹)와 측실 소생의 김진환(金震煥)과 김진병(金震炳)이 그 아들이다. 아들 진수〈가장략(家狀略)〉이란 글에서 부친의 죽음 당시 정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이때 우암 선생께서는 동쪽 고을에 계셔서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님은 여러 차례 선생이 돌아오셨는지를 물어보셨다. 마치 직접 대면해서 부탁하실 것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끝내 선생은 대어오지 못했다. 동춘 선생이 영결하는 자리에 오니, 아버님은 손을 잡고서 말씀하셨다. “내가 부족한 사람으로 무겁게 나라의 은혜를 입었건만 터럭만큼도 보답하지 못하였네. 죽는 것이야 유감이 없지만 이것이 부끄럽네 그려. 저 아이가 비록 재주는 없네만, 또한 가르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네. 내 죽은 뒤에 자식처럼 살펴주게. 그래서 저 아이가 허물이 적은 사람이 되도록 해준다면 참 고맙겠네.”
時, 尤菴先生在東郡未還. 府君累問其還否, 似若有面託者, 而竟未及焉. 同春先生就訣, 府君執手而言曰, 吾以無似, 重被國恩, 絲毫未報. 死固無恨, 而此爲可愧. 豚兒雖不才, 亦不至於不可敎. 吾死之後, 視之如子, 俾得爲寡過之人, 則幸矣.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다만 살아 아버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효와 어머님 봉양을 성심껏 못한 것이 참 부끄럽다. 게다가 80 노모가 살아계신데 먼저 세상을 뜨는 비통함을 어이 견디랴. 내가 다 못한 봉양을 네게 맡긴다. 내 두 벗을 너는 스승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을 여쭙고 행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내 아버님의 무덤을 이장하는 일을 네게 부탁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거든 우선 비석이라도 급히 세우도록 해라. 할 말만 많고, 붓 들 힘이 없구나. 다 적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렇게 유언을 마치고 나서, 임종을 지키러 온 벗에게 위와 같은 당부를 다시 남겼다. 여보게! 내 먼저 가네. 자네와 함께 건너온 한 세상이 참 고마웠네. 이룬 것 없이 가는 몸이 부끄럽네만, 저 아이를 다시 한번 부탁하고 가네. 자식처럼 거두어주게. 향당(鄕黨)에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잘 이끌어주게. 곁에서 자식은 또 그 말씀 말씀을 새겨서 기록으로 남겼다.

 

 

 

[출처] 11. 할 말은 많은데 기운이 다해가는구나 |작성자 새오늘

http://sambolove.blog.me/150122667143

- 블로그 미 <다산을 찾아서> 새오늘 님의 자료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