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1] 제7권 / 다산시문집

2015. 12. 24. 00:36

 

 

 

 

 

      

시(詩)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1] 제7권 / 다산시문집

 

2011.01.18.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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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백이십 일 동안을 아파 누웠다가 마침 용문산 수종사에서 온 현계 영공을 만났는바,
 
   영공이 장차 남쪽으로 천진암에 가서 노닐고자 하므로 애써 영공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인하여 석천옹을 방문하여 함께 갔는데, 우리 세 집의 소년들과 계림ㆍ성구ㆍ규백도 따라갔다. 수남에 이르러 짓다[病伏十有二旬 適逢玄谿令公從龍門 水鍾而至 將南游天眞菴 勉而從之 仍訪石泉翁偕適 三家少年及季林聖九規伯亦從焉 到水南作] 열초(洌樵)
 
명사의 산구경하자는 이야기가            名士看山話
내 마음을 혼연히 감동시켰네              欣然動我心
지금 사정은 유랑하는 것뿐이려니와    時宜唯漫浪
더구나 천성이 산림을 좋아함에랴       天性況山林

 

백사장 따스하니 봄풀이 광활하고       沙暖春蕪遠
봉우리 조밀하니 송백이 푸르구려       峯稠晩翠深
근력 부친 것 걱정할 것 없어라           不愁筋力短
가는 곳마다 짙은 그늘 있다오            行處有繁陰
 
 
2.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次韻上天眞寺] 석천(石泉)
 
적막은 우리의 도가 아니기에               適莫非吾道
되는 대로 하고 마음을 정하지 않네      從他不住心
말고삐 나란히 하여 불일을 즐기고       倂騎貪佛日
뜻에 따라 절집에 앉아 있노니              隨意坐禪林

 

첩첩 벼랑은 옛 암자를 갈무리했고       疊崿藏菴古
높은 구름은 손을 깊이 끌어들이네       高雲引客深
서서히 다니다 늦게야 골짝 나오니       依遲出谷晩
어느덧 사방의 산들이 어두워졌네        不覺四山陰
 
[주D-001]적막(適莫) : 적(適)은 어느 사물에 열중하는 것을 말하고, 막(莫)은 그 반대로 싫어하는 것을 말함.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적하지도 않고 막하지도 않아서 의리를 따를 뿐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里仁》

 

[주D-002]불일(佛日) : 부처의 지혜. 불교의 진리. 법력(法力)이 널리 중생을 제도함이 마치 대지를 고루 비추는 태양과 같다는 말이다.

 

崿
낭떠러지 악 
1. 낭떠러지 2. 벼랑 3. 높고 가파르다 

 

 
 

3.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 현계(玄谿)
 
속연 끊는 건 내 본성이 아니요           絶俗曾非性
그윽함을 즐김은 이 무슨 마음인고      耽幽卽底心
병든 회포엔 수석이 꼭 알맞고            病懷宜水石
한가한 경계는 곧 구름 숲이로세         閑界是雲林

 

떠도는 자취는 삼신산을 편력했고       浪跡三山遍
맑은 술은 깊은 숲 속에 있어라           淸樽萬木深
심신을 수양코자 이틀을 묵노라니       神怡須信宿
말도 꽃다운 그늘에서 자누나             歸馬亦芳陰

 
4.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 양산(楊山)
 
보름 동안을 시원하게 잘 지내니        旬五冷然善
죽음이 다가옴도 서운치 않네그려      行休不悋心
우연히 넝쿨진 풀을 찾다가               偶因尋蔓草
거듭 총림에 들어옴을 깨달았네         重覺入叢林

 

넝쿨풀 위엔 연기와 놀이 잠겨 있고    苕上煙霞祕
언덕에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라         丘中歲月深
친구들과 덕을 강론하기는 어려우나   寅緣慙講德
서책은 시간 나는 대로 본다오           書帙見隨陰
 

 

[주D-001]보름 …… 지내니 : 전국 시대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원하게 잘 지내다가 보름 만에야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逍遙遊》
[주D-002]총림(叢林) : 승려가 모여 있는 곳, 즉 사찰을 뜻한다.
 
 

 

5.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 학연(學淵)
 
일찍이 붉은 잎에 시 쓰던 그곳을        紅葉題詩處
거듭 오니 나그네 마음 슬퍼라            重來愴客心
문에 드니 맛좋은 술을 권하고            入門勸芳醑
석양빛은 높은 숲에 가려졌네             落日翳喬林

 

부서진 물방아엔 샘물이 흩어지고       破碓泉聲散
쓸쓸한 집엔 풀이 무성하구려             荒寮草色深
스님이 이틀 밤을 묵게 허락했으니      伊蒲容信宿
해거름이 그늘어온들 무슨 걱정이랴    何事怕輕陰

 

 

[주D-001]붉은 …… 곳 : 당 희종(唐僖宗) 때 우우(于祐)가 어구(御溝)에서 시(詩)가 적힌 붉은 나뭇잎 하나를 주웠는데, 그 시에 “흐르는 물은 어이 그리 급한고, 깊은 궁중은 종일토록 한가롭네. 다정히도 붉은 잎새 작별하나니, 인간이 있는 곳으로 잘 가거라.[流水何太急 深官盡日閒 殷勤謝紅葉 好去到人間]” 하였으므로, 우우 역시 붉은 나뭇잎에다 “일찍이 나뭇잎에 깊은 원망 쓴 것을 보았나니, 나뭇잎에 시 써서 누구에게 부쳤던고?[曾聞葉上題紅怨 葉上題詩寄阿誰]”라는 시를 써서 다시 어구에 흘려 보낸 결과, 이 시는 당시 궁녀(宮女)였던 한 부인(韓夫人)이 주웠다. 그런데 뒤에 희종이 궁녀들을 풀어 시집을 보내게 되자, 공교롭게 우우와 한 부인이 서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떻게 비유한 말인지 자세하지 않다.

 

미주 서 
1. 미주() 2. 거른 술

 

 

 
6.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 종유(鍾儒)
 
강호에서 서로 잊은 지가 오래라          江湖相忘久
천석에만 유독 관심이 있다오              泉石獨關心
미진의 어귀를 다 함께 건너서             共渡迷津口
멀리서 기수림을 찾아왔나니               遙尋祗樹林

 

남은 꽃은 한 봄이 저물었고                殘花一春晩
새 소리는 만산에 그득하구려              啼鳥萬山深
뽕나무 밑 인연이 무어 그리 중해서     桑下緣何重
더디더디 어둔 골짝을 나오는고          遲遲出洞陰
 
[주D-001]강호(江湖)에서 …… 오래라 : 도에 뜻을 두었음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물고기는 강호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술(道術)에서 서로 잊는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미진(迷津) : 번뇌(煩惱)와 미망(迷妄)의 세계. 삼계(三戒)와 육도(六道). 현실의 세계. 피안(彼岸)에 대응한 차안(此岸)의 세계. 여기서는 절을 찾아가는 것을 차안의 나루를 건너서 피안의 세계로 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3]기수림(祇樹林) : 중인도(中印度)에 있던 기타 태자(祇陀太子) 소유의 수림(樹林)을 이르는데, 뒤에 여기에다 정사(精舍)를 지었으므로, 전하여 사찰의 뜻으로 쓰인다.

[주D-004]뽕나무 밑 인연 : 불자(佛者)는 은애(恩愛)의 정이 생길까 염려하여 뽕나무 밑에서 3일 밤을 계속 묵지 않는다는 데서 온 말이다.

 
 
7.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 명연(命淵)
 
우연히 사찰의 경내에 이르니           偶到招提境
조용하여 내 마음 맑아지누나           蕭然淨我心
좋은 때에 어른들을 시종하여           佳辰陪杖
조용한 놀음으로 운림을 찾아오니     幽事覓雲林

 

푸른 물은 멀리 홈통으로 끌어오고    碧水引筒遠
노란 꾀꼬리는 나뭇잎 뒤에 숨었네    黃鸝隔葉深
누가 능히 속된 생각 끊어 버리고      誰能割塵想
산그늘 가까이 집을 마련하려나        卜宅近峯陰
 
신 구  
1. 신(발에 신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짚신 3. 가죽신 4. 신다 5. 자주 6. 여러 번

 

꾀꼬리 리,꾀꼬리 이 
1. 꾀꼬리(까마귓과의 새)

 

 

 
8.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 민섭(民燮)
 
한가한 날에 남은 봄을 전송하니       暇日殘春餞
이 놀이가 내 마음에 상쾌하구려       玆游愜我心
옷자락을 떨쳐
화택을 뛰어넘고        拂衣超火宅
붓을 뽑아 구름 숲을 윤색하도다       抽筆潤雲林

 

나막신은 멀리 시냇가를 밟아 오고    蠟屐穿溪遠
새 소리는 깊은 골짜기로 인도하네    禽聲引谷深
좋은 경치를 서로 저버리지 못하여    名區不相負
나의 집도 산 음지 쪽에 있다오         家住又山陰

 

 

[주D-001]화택(火宅) : 불교 용어로, 번뇌(煩腦)가 많은 속세를 이르는 말이다.


쾌할 협 
1. 쾌하다(--: 마음이 유쾌하다) 2. 만족하다(滿--) 3. 맞다 4. 마땅하다 5. 합당하다(--) 6. 두려워하다 7. 무서워하다 8. 따르다

 

 

나막신 극 
1. 나막신(신발의 하나)
 

 

 

9.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 재굉(載宏)
 
산에 듦은 부처를 좋아함이 아니요     入山非喜佛
좋은 곳이 마음에 즐거운 때문일세     佳處卽怡心
나무꾼이 베는 통에 큰 나무 드물고    樵斧稀喬木
참선의 등불은 소림에 폐해졌네         禪燈廢少林

 

무너진 담장엔 늦은 꽃이 피었고        壞墻花發晩
몇 층 홈통엔 물이 깊이 내려오누나    層筧水來深
산수는 평소에 좋아하던 것이라         丘壑平生想
이리저리 배회하다 땅거미가 되었네   徘徊到夕陰
 

 

[주D-001]참선의 …… 폐해졌네 : 절에 참선하는 중이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소림(少林)은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절 이름인데, 옛날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이곳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여 참선을 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대 홈통 견 
1. 대 홈통(-: 물이 흐르거나 타고 내리도록 만든 물건) 2. 대나무의 이름

 

골 학 
1. 골, 산골짜기 2. 도랑(매우 좁고 작은 개울), 개천(-: 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길게 판 내) 3. 구렁(움쑥하게 팬 땅) 4. 해자() 5. 석굴(), 암굴()

 

 
10. 상천진사시에 차운하다 동석(東錫)
 

절은 퇴락했지만 오히려 절묘한데     寺破猶奇絶
맑고 한가함은 곧 내 본심이라오       淸閒卽素心
그윽한 새는 여름 나무에 깃들이고    幽禽棲夏木
급한 시냇물은 바람숲을 들레누나     急澗鬧風林


푸른 하늘엔 종소리 끊어지고            碧落鐘聲斷
황혼엔 그림 벽이 깊숙하도다            黃昏畫壁深
시 짓는 재주 졸렬하여 부끄러워라     詩才愧蕪拙
하음에게 응수할 계책이 없네그려      無計答何陰

 

 

[주D-001]하음(何陰) : 양(梁) 나라 때 시(詩)를 잘 하기로 명성이 높았던 하손(何遜)과 음갱(陰鏗)을 합칭한 말이다.
 

 

시끄러울 료,시끄러울 요,시끄러울 뇨,시끄러울 요 
1. 시끄럽다 2. 지껄이다 3. 흐트러지다 4. 성하다(--: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5. 난만하다(--: 꽃이 활짝 많이 피어 화려하다) 6. 함부로 a. 시끄럽다 (뇨) b. 흐트러지다 (뇨) c. 성하다(--:...  

 

 

[출처] 시(詩)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1]|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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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미 <다산을 찾아서> 새오늘 님의 자료 중에서 전재 ......

 

 

 

[김태준의 문향] <46> 정약용과 신작의 한강 문화

한국일보 | 입력 2010.08.22. 13:19 | 수정 2010.08.22. 21:45

   석천(石泉) 신작(申綽, 1760-1828)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2년 차이의 동년배로 다산이 귀양에서 돌아온 말년에 두물 머리[兩水]에서 이웃으로 지기(知己)로 교유했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옛날 광주(廣州) 마현리[마재]로, 천마산을 배경으로 남ㆍ북 한강과 초내[苕川]가 합류하는 경승이다. 다산이 태어나고 묻힌 고향이며, 석천은 강화도에서 정제두(鄭齊斗)의 강화학(江華學)을 이은 그의 사위 신대우(申大羽)의 아들, 50살 때 광주 사촌(社村)으로 이사하여 선영(先塋)을 지키며 크게 이룬 경학자(經學者)였다.

 

 

 

 

 

마침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반생의 원고뭉치를) 안고 온 지 3년인데 함께 읽어줄 사람 하나 없다(抱歸三年 無人共讀)"고 읊은 때 석천과 만나, 두 사람의 만남이 조선 후기 한강의 문명을 함께 이루어 갔던 모습의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속세의 생활 반평생에 바라는 것 없으나

유독 맑고 그윽한 그대의 거처를 좋아하네.

집에 전하는 옛 사업은 천 권의 경서이고

늘그막의 생애는 한 언덕의 보리밭일세.

짙은 그늘 꽃다운 나무엔 지나는 새를 보겠고

고요한 푸른 못에는 고기 노는 걸 알겠네.

아무 일 없이 흉금을 헤치고 서로 마주하니

저 강호에 둥둥 뜬 배와 서로 같네.

 

[半世塵寰無所求 喜君居止獨淸幽 傳家舊業經千卷 晩境生涯麥一邱

芳樹陰濃看鳥過 碧潭風靜識魚游 披襟共對虛無事 等是江湖泛泛舟][정약용,『다산시문집』 제7권, 시(詩)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다산의 이 시집에는 두 사람의 사귐의 모습들을 전해 주는데, 사촌은 지금의 초월읍 서하리(西霞里)로, 이곳 사마루 마을의 석천의 서재에는 4,000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천권의 경서"라고 한 석천의 가학(家學)은 이른바 강화학으로, 그의 경학은 일찍이 정인보 선생이 신석천과 정다산을 경학자[經師]와 경세가로 지목하여 그 학문적 지향을 함께 말한 뜻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사귐은 학문과 우의로 두 가문의 세교(世交)로 이어졌고, 세교로 이어진 정경은 석천의 아들 명연(命淵)이 다산을 따라 수종사(水鐘寺)를 유람하고 강 건너 천진암에 이르러 차운한 시에, "좋은 때에 어른들을 시종하여 조용한 놀음으로 운림(雲林)을 찾았다"고 한 글(<次韻上天眞寺>《의유당전서》1 <천진소요집>)에서도 뚜렷하다.

 

   그러나 이런 한강의 문화환경이 난개발 속에 크게 훼손되고 있다. 근기(近畿) 실학과 양근(陽根)의 서학(西學)과 여주ㆍ광주의 문학이며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실학 전통은 조선 후기의 학문과 문예와 사상의 한 중심이었다. 이 두물 머리 문화권의 문화와 사상을 뛰어난 자연 경관과 함께 총체적으로 보존 연구 발전시킬 한강 문화유산 특별계획이 절실한 시점이다.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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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석천 신작(石泉 申綽)-1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보면, 아들들이 부지런히 공부를 해서 아버지의 책을 읽고 해설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면 하는 바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배지에서 고통 속에서 저술한 500권이 넘는 연구서, 후세에 전해지기만 하면 반드시 활용될 날이 있으리라는 확신과 신념이 있었기에, 꼭 그것을 전할 책임을 아들들에게 지우곤 했습니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그런 호한한 서적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자, 한때는 매우 적막하고 외로워 가슴이 조일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책을 안고 돌아온지 3년인데 함께 읽어줄 사람 하나 없네(抱歸三年 無人共讀)”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자신의 학문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나 진실은 오래도록 묻혀지지 않는 것, 끝내는 당대의 대학자들이 다산의 저서를 읽어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 대표적 학자 중의 한분이 다름 아닌 석천 신작(1760~1828)이라는 분이었습니다. 본디 그는 강화도 출신으로 강화학파의 일원인 데다 다산과는 당론이 다른 소론계의 학자였습니다. 다산이 고향에 돌아온 무렵 석천은 다산의 고향 마을에 가까운 곳으로 이사 와서 살던 때여서 쉽게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석천은 아버지도 큰 벼슬을 지낸 학자였고 형제들도 모두 글 잘하고 벼슬도 높이 지낸 명문의 집안이었습니다. 승지의 벼슬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가 석천이었습니다.

석천은 신진(申縉)이라는 자신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의 예설(禮說)을 읽어보니 근거가 정확하고 조리가 밝으며 문장도 뛰어납니다. 근래 예(禮)를 논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에 비견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다산의 상례(喪禮)연구서를 칭찬했습니다. 

학설에 일치하지 않은 부분도 많았으나, 다산의 학문을 인정해준 석천은 안목이 높은 학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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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석천 신작(石泉 申綽)-2

 

높은 학문을 이룩해놓고도 그 학문을 이해하고 알아줄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18년의 모진 귀양살이 동안 전혀 좌절하지 않고 가장 열정적으로 학문을 연구하여 대업(大業)을 완성한 다산은 석천 신작과 같은 학자와의 교류로 쓸쓸하지 않았습니다.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해인 1819년부터 다산과 석천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석천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석천이 60세이고 다산이 58세이던 1819년 9월에, 다산이 고향집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던 석천의 집에 찾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9월에 정다산이 찾아왔다”라는 기록에 이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이어서 자신이 저작한 『상례사전』과 『매시상서평』을 보내와 석천에게 질정(叱正)해주기를 부탁하였고, 석천은 첨(籤)을 첨부하여 보내주었다. 그 뒤부터 부단히 왕래하고 빈번하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토론한 내용이 많았다.”

다산의 기록에도 1819년 9월부터 석천에게 보낸 편지가 있고 상례(喪禮)와 서경(書經)에 대한 학설 토론이 진지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1828년 5월 25일, 석천이 6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석천과 다산은 자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석천의 형제 및 친척들과 다산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이 함께 천진암(天眞菴)에 놀러가 인생을 즐긴 적도 있습니다. 소론인 석천과 남인인 다산, 당론이 다르고 학문적으로도 견해가 일치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으나, 서로의 높은 학문을 인정해주면서 두 사람은 즐거운 노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큰 학자였던 석천의 형님이나 판서(判書)의 벼슬에 오른 석천의 아우 등과도 자주 어울리면서 돈독한 우정을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당파와 당론이 다른 학자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았기에, 다산의 학문이 후세에도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요즘 당이 다르면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무조건 깔아뭉개고, 아무리 그른 말을 해도 제 당사람이면 무조건 추켜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날만 새면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석천과 다산에게서 좋은 시사를 받으면 어떨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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