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정약용이 제목으로만 남긴 절경

2015. 12. 26. 03:26

 

 

 

 

 

       두물머리, 유유자적 살고 싶었던 다산 숨결 타고 흐르다

       3.정약용이 제목으로만 남긴 절경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2015년 09월 16일 수요일 제17면

 

 

 

    다산 정약용(1726~1836)은 유난히 배와 가까이 지냈다. 그의 집이 물가에 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도성에 가야 할 일이 있으면 집 앞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서울 동호대교 북단인 두모포에서 내려서 걷곤 했다. 선영이 있던 충주의 하담에 다니러 갈 때에도 노를 저었으며, 그가 천주교를 처음 접한 장소도 팔당 위를 미끄러져 가던 배 안이었다.

 

   그런가하면 집에 홀로 있을 때에도 강에 배를 띄워 낚시를 즐겼으며, 지인들이 찾아와 같이 노닐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배를 띄웠다.

 1783년의 어느 봄날도 그랬다. 정약용이 진사시에 합격한 후 고향으로 내려가려 하자 부친이 친구들을 모두 불러 즐겁게 노닐라고 했다. 그에 여러 지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 와 앵두연(櫻桃宴)을 벌인 그는 어김없이 강에 배를 띄웠다.

그의 합격을 축하하는 지인 한 명은 장구ㆍ북ㆍ피리ㆍ저ㆍ깡깡이를 연주하는 무리들을 보내 흥취를 돋우었으니 이틀을 흥겹게 놀았다. 그 후 정약용은 지인들과 함께 수종사로 향했다.

 

   그곳은 어린 시절 그가 공부한 곳이었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소나 노새 따위를 탔고 젊은 사람들은 걸어서 산을 올랐다. 마침 절에 도착하자 뭇 봉우리들은 노을에 물들어 빨갛게 빛났고, 더없이 아름답게 빛나는 윤슬이 그들이 앉은 방 안으로 스며 들 것처럼 반짝였으니 그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그렇게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의 다른 이름인 종산(鐘山)과 자신의 집이 있던 초수(苕水) 사이를 오가며 노닐던 청년 정약용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지은 「초상연파조수지가기(苕上煙波釣수之家記)」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설명하고는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是吾願也)"라고 했다. 그 꿈은 집을 한 채 짓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이 조금 별나다. ‘부가범택(浮家汎宅)’, 곧 물 위에 떠다니는 수상가옥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배를 타고 다니다 만나는 어부들을 부러워했다. 비록 쑥대 지붕 아래에서 갈대 이불을 덮으며 풍찬노숙을 할 지언 정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고 떠다니는 그 분방한 자유로움이 부러웠던 것이다.

 

 「초상연파조수지가기」에 밝힌 그의 꿈은 이렇다.

 

  … 나는 적은 돈으로 배 하나를 사서 배 안에 어망 네댓 개와 낚싯대 한두 개를 갖추어 놓고, 또 솥과 잔과 소반 같은 여러 가지 섭생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하며 방 한 칸을 만들어 온돌을 놓고 싶다. 그리고 두 아이들에게 집을 지키게 하고, 늙은 아내와 어린아이 및 어린 종 한 명을 이끌고 부가범택으로 종산과 초수 사이를 왕래하면서 …… 바람을 맞으며 물 위에서 잠을 자고 마치 물결에 떠다니는 오리들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때때로 짤막짤막한 시가를 지어 스스로 기구한 정회를 읊고자 한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 …

 

▲ 장태묵 작 ‘木印千江-천개의 강에 나무를 새기다’
  그가 이 꿈을 실천에 옮기려 하였을 때가 그의 나이 39세인 1800년 초여름이다. 그는 한양으로부터 가솔을 이끌고 소내로 낙향하여 배를 한 척 건조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배 위에 집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배의 이름을 지었으니 ‘초상연파조수지가’가 그것이다. 초상은 초천(苕川), 곧 고향 집이 있는 소내의 물 위라는 뜻이다.

 연파조수장지화의 호이며, 그는 8세기 중반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이자 물 위를 떠돌며 은거한 선인(仙人)이었다고 전한다. 다산은 그를 흠모하였다고 고백하며 그의 호를 빌려 자신에게 덧입힌 것이다.

 

 그러니 그 집의 이름은 ‘소내 물위에 떠 있는 연파조수의 집’이 되는 셈이다. 물론 연파조수는 다산 자신을 일컫는 것이고 말이다. 더구나 집으로 따지면 편액에 해당하는 ‘초상연파조수지가’라는 방(榜)은 이미 서너 해 전에 공장(工匠)에게 부탁하여 근사하게 새겨 놓았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방을 붙이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801년 2월 27일, 긴 유배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경북 영일의 장기와 전남 강진을 거치는 18년 7개월의 긴 유배생활 동안에도 부가범택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818년 9월 14일, 다시 초천으로 돌아 온 그는 여전히 배 타는 것을 즐겼다. 그러던 중, 1823년 4월 15일, 드디어 부가범택의 꿈을 이뤘다.

맏아들인 학연이 며느리를 맞으러 춘천으로 향하는 길에 동행하기로 하였다. 정약용은 이윽고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를 장만하여 마치 집처럼 꾸미고 ‘산수록재(山水綠齋)’ 라는 편액을 달았다. 30대 후반에 가졌던 꿈인 부가범택을 짓는 일을 60대 초반이 되어서야 이룬 것이다.

      ▲ 이종승 작 ‘움직이는 산-수종사’

 

 또 유배에서 돌아 온 후 부쩍 가까워진 승지 석천 신작(1760~1828)에게 부탁하여 단출한 두 개의 기둥에 주련을 달았는데 ‘張志和苕삽之趣(장지화가 초삽에 노닌 취미)’와 ‘倪元鎭湖 삼수변卯之情(예원진이 호묘에 노닌 정취)’라고 했다. 학연의 배에는 ‘부가범택ㆍ수숙풍찬(水宿風餐)’이라고 써 붙이고, 천막과 침구, 그리고 필기구ㆍ서적ㆍ약탕관ㆍ다관ㆍ밥솥ㆍ국솥과 같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싣고 초천을 떠났다.

그런데 당시 그의 배에는 또 다른 이가 한 명 타고 있었다. 그는 학연의 친구인 우산 방우도(1790~?)였다. 그는 문인화가인데 산수화에 능하여 3ㆍ4중첩의 깊고 얕은 경지를 잘 그렸다고 한다. 그런 그가 정약용과 함께 북한강을 거슬러 춘천으로 향한 까닭에 대하여 정약용은 이렇게 말한다.

 

  물이 다하고 구름이 일어나는 곳이라든가, 버들 그늘이 깊고 꽃이 활짝 핀 마을에 이를 때마다 배를 멈추고 그 좋은 경치를 가려 제목을 붙이고 그리게 하고 싶었으니, 그것은 이를테면 〈사라담에서 수종사를 바라보다.(沙羅潭望水鐘寺)〉라든가 〈고랑도에서 용문산을 관망하다.(皐狼渡望龍門山)〉등으로서 모두 그려둘 만한 절경이었다. - 〈산행일기(汕行日記)〉중에서-

 

  사실 정약용도 그림을 그렸다. 부인 홍씨가 강진 초당으로 보내 준 치마를 잘라서 그린 〈매조도(梅鳥圖)〉는 널리 알려진 그림이다. 몇 해 전 그의 <산수도〉가 공개되었지만 시는 그의 것이되 그림은 누가 그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 정약용 초상 전 초의선사 <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짐작 컨대 정약용은 산수화에는 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우도를 그의 배에 초청하여 동행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 싶다. 하지만 방우도는 한질(寒疾)에 걸려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배를 떠나고 말았다.

 

물론 붓은 들어 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자신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던 아름다운 정경을 그림으로 남기려했던 정약용의 작은 꿈 하나는 그렇게 이뤄지지 못했다. 아쉽게도 경기도의 빼어난 자랑거리인 두물머리 일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평생 바라보며 끄집어 낸 장면들은 우리들 앞에 남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제목만으로도 근처를 지날 때면 한 번 쯤 수종사를 올려다보고, 용문산을 바라보게 된다.

 

 

 비단 정약용이 아니더라도 지난 해 명승으로 지정된 수종사와 두물머리 일대의 풍광은 겸재 정선(1676~1759)《경교명승첩》〈녹운탄〉〈독백탄〉이라는 제목으로 그렸다. 또 현대에 들어와서도 수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제목으로만 남은 정약용이 정한 절경들이 눈앞에 가물거리는 까닭은 어린 시절부터 노닐던 강의 모습을 노년의 완숙한 눈길과 느꺼운 마음으로 바라 본 장면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산이 제목으로 남긴 그림들은 한 인간이 평생을 통하여 자연과 교감하며 스스로 일군 인문의 풍경 중 한 장면이었을 것이기에 더욱 아쉽기만 하다.

 

 

이지누<‘경기 팔경과 구곡: 산·강·사람’전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