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遇(지우)와 晤言(오언)

2015. 12. 26. 03:36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13년 03월 29일(金)
知遇(지우)와 晤言(오언)
 
                ▲  일러스트 = 이정학 기자 luis80@munhwa.com

 

 

 

 

심경호/고려대 문과대 교수·한문학

   최근 선배 교수이자 시인이신 분께서 내게 시를 주셨다. ‘아버지의 등’ 이란 제목으로 ‘시인수첩’에 실렸는데, 부제가 ‘심경호 선생에게’이다. 서너 해 전, 그보다 앞서 2004년 여름에 부친의 뒷모습을 보고 어쩐 일인지 부친의 죽음을 예견했던 이야기와 2011년 초 아우가 스페인 여행 후 비행기 안에서 돌연사해서 허무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분은 내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시다가 시를 써 주신 것이다. 그 마지막 단락은 이러하다.

‘한시 만 편을 읽어도 꿰뚫지 못했다는 삶의 이야기에 아버지의 등이 실려 사라지지 않는 이미지로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고독한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고 느꼈다.’

 



   두 죽음을 경험한 내 마음을 이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 학문 세계에서 내가 겪고 있는 좌절감을 이렇게 또렷하게 포착해 낼 수 있을까. 나와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분은 내가 이 대학으로 왔을 당시 출판부를 맡고 계셨는데, 신서본 출간을 계획하면서 내게 기회를 주셨다. 식견이 부족했지만 그 제안 때문에 어떻든 ‘한문산문의 미학’(1998년)을 출판할 수 있었다. 올해 수정본 ‘한문산문미학’을 간행하려고 준비하면서 당시의 일을 회상하고 있던 참이었다. 신서본 간행 이후 여러번 해외학술 발표 때 동행하면서 문학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내게 시를 써보라고 권유하셨고, 또 시 전문지에 한시 코너를 만들어 연재하게 해주셨다.

 



   선배나 어른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을 지우(知遇)라고 한다. 군주가 알아주는 것도 지우라고 한다. 옛날 선비들은 뜻밖의 분이 자신을 알아주면 감격해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들을 보면, 지우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서부터 이뤄져 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군신(君臣) 간의 관계도 대개 그러했다.

수년째 우리 문과대 교수들은 자신의 연구 분야를 소개하고 동료 교수들로부터 질정과 격려를 받는 모임을 매달 개최해 오고 있다. ‘논어’에 나오는 ‘이문회우 이우보인(以文會友 以友輔仁)’의 뜻을 따서 모임의 이름을 ‘문이회(文以會)’라고 붙였다. 이 모임에서 나는 몇 번인가 신간을 소개하고 학문적 관심을 다른 분들과 공유하며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을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진정을 토로하는 것을 오언(晤言)이라고 한다. ‘시경’ 진풍 ‘동문지지(東門之池)’에 ‘어여쁜 저 아가씨와 노래하고 싶어라’ ‘어여쁜 저 아가씨와 말을 하고 싶어라’ ‘어여쁜 저 아가씨와 얘기하고 싶어라’라고 하여 오가(晤歌)·오어(晤語)·오언(晤言)이라 나오는 것이 이 말의 어원이다. 오언은 남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해 전에 ‘접속의 두려움’이란 잡문에서 언급했듯이, 남다른 결실을 본 선인들은 대개 남들과의 오언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다산 정약용유배에서 돌아온 뒤 1819년 음력 8월 초, 강 반대편 사마루에 사는 석천 신작 찾아가, 귀양살이 19년에 다른 할 일이 없어 경전 연구만 했다면서 석천과 경전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적했듯이, 당시 다산은 시절의 어려움에 시야가 흐려 있는데다가 한 백성으로서 은택을 입지 못함을 상심하던 터이고, 석천은 경전의 남은 조각들을 보전하고 옛것에 집착하여 삼대의 옛일에 뜻을 높이 가져 집 밖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다산은 석천에게 특별히 시를 보내, ‘옛 주석은 벌레다리 지느러미마저 거슬러 탐구하고, 옛 제도 전장은 변두의 건밥 장조림까지 고찰하네’라고 했다. 석천은 다산을 형 신진에게 논평하여 “장구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무리가 아니며, 재주가 총명한 데다 문장도 뛰어나고, 주소에 대하여 꿰뚫고 있어 친구들 가운데 이 사람보다 나을 자가 없을 듯하다”고 했다.

다산은 석천과 교유가 잦아지면서 시운의 불리를 한탄하는 속마음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어느 해 겨울밤에는 석천의 처소에 가서 묵으면서 밤새워 토론하고는 돌아와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물론 다산과 석천이 서로 상대방의 학문 지향에 대해 온전히 수긍했던 것은 아니었다. 석천은 1819년에 ‘자서전’을 짓고, 다산은 1822년에 ‘자찬묘지명’을 지었는데, 각자의 생활 방식과 학문 지향은 상당히 달랐다. 특히 다산은 경세(經世)에 뜻을 두고 경전을 연구해 말투가 매서웠다. 석천은 다산의 저서가 고인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함축의 뜻이 없다고 비난했는데, 다산은 그 점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했고 그 끝에 서로를 이해했다. 인간적인 만남과 학문적 토론을 주저하지 않았던 두 사상가의 교류를 통해 우정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선배 교수의 지우를 입었듯이 나도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을지, 어떨지 그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 깨달은 것이 있다.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을 마주보고 하는 대화인 오언이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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