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걷다](37) 여유당

2015. 12. 26. 04:05

 

 

 

 

 

      

책과 삶                                                                                                                입력 : 2007-04-20 14:53:30
 
[한강을 걷다](37) 여유당
 
   다시 새벽이다. 먼 하늘은 붉은 기운이 가시지만 강에는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적막함 속으로 ‘텅텅’ 소리가 들리니 무엇인가. 안개를 헤치고 나온 것은 노를 젓는 어부의 작은 배였다. 걷어 올린 그물에서 고기를 털 때마다 그물이 뱃전을 울리고 모든 소리 잦아든 강에서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던 것이다. 다산 선생도 이 새벽을 거닐었으리라. 때로는 여유당(與猶堂)에서 일어난 이른 새벽이면 강가로 나와 어부들의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며 진절머리 나는 정치판을 떠나 강호에 묻혀 살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다산 선생이 태어나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숨을 거둔 여유당이다.

앞의 느티나무 왼쪽을 에돌아 산으로 오르면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는 1797년 여름, 물고기를 잡고 싶어 허가도 받지 아니한 채 도성문을 나서 소내에 다다르기도 했다. 다음날 강에 그물을 쳐서 잡은 농어가 족히 50마리가 넘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배가 강에 잠길 지경이었다고 하니 이미 어부였던 셈이기도 하다. 다산 선생은 어부들을 두고 제생(諸生)이라고 하며 노숙(老熟)한 유자(儒者)라고 하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견주어 볼 때 그들의 삶은 한가하며, 세상근심을 잊어버린 채 유유자적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지혜로운 그들의 모습을 엿봤기 때문이리라.

   ‘제생들이 그물 치는 것을 구경하다(觀諸生施고)’라는 시에서 “모래 위의 어부들은 모두 노숙한 유자라오. / 뜬 세상(浮世)에 세월 보내는 방법을 내 몰라서 / 이내 마음 영원히 강호에 누이고 싶어 / 시냇가 마을 막걸리에 취해서 잤더니만 / 단풍나무 숲을 찾는 저녁 까마귀 날아드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뜬세상’이라. 그는 강진의 다산초당으로 찾아 온 나산 처사(羅山處士) 나공(羅公)에게 써 준 ‘부암기(浮菴記)’에서 뜬세상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고기는 부레로 떠다니고 새는 날개로 떠다니며, 물방울은 공기로 떠다니고 구름과 안개는 증기로 떠다니며, 해와 달은 빙빙 돌면서 떠다니고 별은 일정하게 매여 떠다니며, 하늘은 태허(太虛)로서 뜨고 지구는 조그만 덩이로 떠서 만물을 싣고 억조창생을 실으니, 이렇게 보면 천하에 뜨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 떠다니다가 서로 만나면 기뻐하고, 떠다니다가 서로 헤어지면 씻은 듯이 잊어버리면 그만인데, 떠다니는 것이 뭐 불가(不可)한 일입니까. 떠다니는 것은 조금도 슬픈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인가. 다산 선생은 기어코 “나는 집을 물에 띄우고서 초계(苕溪)와 삽계 사이를 왕래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던 당나라의 장지화(張志和)를 흠모했다. 장지화는 당나라 숙종 때 금화(金華)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물 위에 달랑 가마니 한 장을 깔고 둥둥 떠 있을 수 있었으며 날마다 그 위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짓다가 학을 타고 승천하였다고 한다. 그가 어느 날 글씨로 이름을 드날린 안진경(顔眞卿)을 찾아 갔는데 그가 장지화의 낡은 배를 보고 그만 새것으로 바꾸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그러자 장지화는 자신의 소원은 집을 물 위에 띄우고 초계와 삽계를 오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산 선생 또한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是吾願也)”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니 그것은 부가범택(浮家泛宅), 곧 물 위에 뜬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1800년 초여름, 다산은 식솔들과 함께 이곳 소내로 내려와 드디어 그 집을 장만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떠난 것을 안 정조가 다시 그를 부르니 어찌 할 수 없이 일을 그만두고 한양으로 되돌아갔다. 당시의 일을 ‘초상연파조수지가기(苕上煙波釣●之家記)’에 남겼는데 그 대략이 다음과 같다.

 


   “나는 적은 돈으로 배 하나를 사서 배 안에 어망 네댓 개와 낚싯대 한두 개를 갖추어 놓고, 또 솥과 잔과 소반 같은 여러 가지 섭생에 필요한 기구를 준비하며 방 한 칸을 만들어 온돌을 놓고 싶다. 그리고 두 아이들에게 집을 지키게 하고, 늙은 아내와 어린아이 그리고 어린 종 한 명을 이끌고 물에 떠다니면서 살림을 하고 사는 배로 종산(鐘山)과 초수(苕水) 사이를 왕래하면서 오늘은 오계(奧溪)의 연못에서 고기를 잡고, 내일은 석호(石湖)에서 낚시질하며, 또 그 다음날은 문암(門巖)의 여울에서 고기를 잡는다. 바람을 맞으며 물 위에서 잠을 자고 마치 물결에 떠다니는 오리들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때때로 짤막짤막한 시가(詩歌)를 지어 스스로 기구한 정회를 읊고자 한다”고 했으니 그것은 호를 연파조수(煙波釣●) 혹은 연파조도(煙波釣徒)로 쓰던 장지화처럼 살기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다산 선생은 그 꿈을 진즉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터여서 그와 같이 부가범택을 장만하면 뱃전에 걸어 둘 참으로 목공장을 시켜 ‘초상연파조수지가’라는 방(榜)을 근사하게 미리 만들어 두었다고 했다. 초상이라는 것은 당연히 다산의 고향을 일컫는 것이리라. 초수 또한 마찬가지이며 종산이라는 것은 수종산(지금의 운길산)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의 양수리, 두물머리 일대에 배를 띄워 놓고 유유자적 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것은 지난 번 ‘양강에서 어부를 만나다’라는 시에서 뱃전에 발을 걸치고 누워 있는 어부와 줄풀을 삶고 있는 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부러워하며 읊은 시에서 이미 짐작됐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다산 선생 또한 그 꿈을 실현시키기까지의 시간은 더디고 또 더디기만 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부가범택을 만들어 강에 띄운 것은 1823년 4월15일이기 때문이다. 큼지막한 고기잡이배를 구해서 꾸몄다는 그 집의 이름은 ‘산수록재(山水綠齋)’였다. 산수록재라는 편액은 다산이 직접 썼으며 주련으로 ‘장지화가 초삽에 노닌 취미’ 그리고 ‘예원진이 호묘에 노닌 정취’라는 두 줄을 걸었는데 그것은 승지인 석천(石泉) 신작(1760~1828)이 썼다. 초삽이란 장지화가 노닌 초계와 삽계를 말하며 예원진이 호묘에 노닌 정취라 했으니 원진은 원나라 예찬(倪瓚)의 자이다. 시와 산수화에 능했다는 그는 만년에 조각배로 호와 묘를 오가며 한가로이 지낸 인물이다.

 


   드디어 다산 선생이 지은 산수록재에는 천막과 침구, 그리고 필기구, 서적에서부터 약탕관과 다관(茶罐)을 비롯해 밥솥과 국솥 등 살림살이에 갖추지 않은 것 없이 실렸다. 그때가 아들인 학연(學淵)과 함께 손자인 대림을 데리고 춘천으로 손자며느리를 맞으러 가던 때였다. 다산 선생은 아들인 학연이 탄 배에도 황효와 녹효 사이에서 노닌다는 뜻인 유어황효녹효지간(游於黃驍綠驍之間)이라 쓰고 기둥에는 각각 ‘부가범택과 물위에서 자고 바람을 먹는다는 뜻인 수숙풍찬(水宿風餐)’이라는 주련을 걸었다고 한다. 황효는 여주를 말하고 녹효는 강원도 홍천을 일컫는 것이니 이는 곧 남한강의 소내에서 북한강의 춘천 사이를 오간다는 말일 것이다.

   그 때 다산 선생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늘을 날 듯 했을 터이고 물위로 뜀박질을 할 듯 했으리라. 그러나 다산이 누구인가. 그저 헤프게 배를 타고 노닐기만 하지는 않았을 터, 그는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라는 글 한 편을 남겼다. 이는 자신의 고향인 소내 앞으로 모여드는 북한강의 물길에 대한 고찰이다. 그는 ‘사기(史記)’의 조선전(朝鮮傳)에 조선에는 산수(汕水)와 습수(濕水) 그리고 열수(洌水)가 있다고 한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몇 차례 춘천과 충주를 오가고 난 다음 그는 지금의 북한강을 산수, 남한강을 습수라고 했으며 이 둘이 만나서 열수가 된다고 봤다.

 



또 형과 함께 조카인 학순(學淳)을 데리고 춘천으로 조카며느리를 맞으러 다녀오면서 지은 시인 ‘천우기행(穿牛紀行)’의 서문에도 산수와 습수 두 물이 용진(龍津)의 서쪽에서 모이는데, 산(汕)이란 산곡(山谷)의 물을 뜻하고, 습(濕)이란 원습(原濕)의 물을 뜻하므로 북쪽 가닥을 산수라 하고, 남쪽 가닥을 습수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처럼 일대를 직접 답사하며 강의 본류와 지류를 상세하게 구분하여 쓴 글이어서 지금에 견주어서 봐도 길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보탬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다산 선생이 이처럼 두 물줄기가 만나 하나로 되는 지점에 살았기에 상공업에 중점을 둔 이용후생론의 북학파토지제도나 농업부문 개혁을 강조했던 경세치용학파라는 두 갈래의 실학을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굵고 큰 한줄기로 모아 놓은 것은 아닐까. 이곳을 두호(斗湖)라고 했던가. 그만 일어섰다. 선생을 기리며 생각에 잠긴 시간이 길었던 탓인가 아니면 호수와도 같이 넓은 강물이건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물결 때문인가.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여유당 뒷산인 유산(酉山)에 핀 산 벚꽃들의 유혹을 모른 체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묘소로 올라 인사를 드리고 꽃향기와 함께 뒤돌아서니 유장한 한강 줄기가 한눈에 들어 왔다.

 

   다산 선생이 “물에 비친 저 꽃가지 그림처럼 아름다워(照水芳枝화不如) / 단풍나무 뿌리에다 닻줄 매고 서성댔지(楓根繫纜故虛徐)”라고 노래했던 곳이 저곳일까. 먼 강에는 산 벚꽃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바람은 살갑기만 했다. 어찌 한 사람을 하나의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치열한 젊음의 열정을 불태우며 좌충우돌했던 다산 선생은 이렇듯 또 다른 하나의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그가 노래하지 않았던가. “서울만 벗어나면 모두가 즐거운 곳(재出漢城皆樂土) / 내가 지금 벼슬에 연연할 게 뭐란 말인가(吾今何必戀簪纓)”라고 말이다. 지금 내가 여유당을 뒤로 하고 돌아서면서 생각하는 것은 그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가 이루어 놓으며 겪어야 했던 일들이다.

 

〈이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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