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山夕詠井中月 - 산속 밤에 우물에 뜬 달을 읊으며

2016. 1. 1. 00:12

 

[고전명시감상]이규보의 山夕詠井中月/임보| 이규보(李奎報)

우물속의 달 | 조회 73 |추천 0 | 2015.11.17. 19:55

 

 

山夕詠井中月


 
山僧貪月色     산에 사는 저 스님 달빛을 탐내,
幷汲一甁中     물과 함께 한 병 가득 긷고 있소만,
到寺方應覺     절에 가선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甁傾月亦空     병 기울면 달빛조차 간 데 없음을.


산속 밤에 우물에 뜬 달을 읊으며ㅡ송준호 역


    평생 8,000수에 이르는 시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백운(白雲)거사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의 대문호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였으나 관운이 일찍 열리지 않아 젊은 시절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면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장편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동명왕편」을 위시해서 「개원천보유사시(開元天寶遺事詩)」와 같은 연작시도 유명하지만, 그의 기발한 착상과 풍부한 상상력은 절구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앞에 인용한 「산석영정중월」이 인구에 자주 회자되는 명작이다. 송준호 교수의 멋스러운 감상을 먼저 음미해 보도록 하자.


   산에 사는 스님이 병을 가지고 가서 우물물을 뜨러 갔는데 우물에 떠있는 달빛이 하도 고와서 달빛을 가져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달빛이 떠있는 우물물을 조심하여 떠서 병에 담았다. 물이 있는 곳이면 달빛이야 어디나 뜨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욕심 많은 스님은 절에 가서 동이에 물을 부으면 깨닫겠지. 병을 기울여 물을 따르면 병 속이 텅 비는 것과 동시에 달빛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시 또한 기발한 착상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깨달음이 시적 주제이다.

 


    밝은 달밤이다. 하늘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우물 속에는 그것이 비춰 있다. 시인은 산스님이 물을 긷는 것을 보고 달빛을 긷는다고 표현했다. 그것도 스님이 달빛에 취해서 그것을 욕심내고 있다고 했다. 달빛 비추는 공간도 아름답고 그것을 욕심내는 스님의 마음도 아름답다.


그러나 시인은 또 말한다. 아마도 그 물을 가지고 절에 가서 병을 기울이면 그 속에 달이 없어진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스님이 소중하게 욕심내었던 것은 물이 아니라 달이었다. 그러므로 스님은 자신이 가졌다고 믿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실은 작자가 산 속의 우물에 뜬 달을 보고 시를 쓴 것인데, 시적 주체를 산스님으로 바꾸어 거기에 때달음이라는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 여기서의 주제를 담은 시어는 색(色)과 공(空)이다. 색을 탐한 스님이 달빛을 통해 공을 깨우친다는 선가적(禪家的) 주제가 담겨 있다. 불가에서는 모든 현상을 공, 곧 헛된 것으로 생각한다.

 

 우물물에 비친 달빛 그것이 바로 현상이고, 하늘에 뜬 달이 진짜이다. 스님은 물에 비친 달이 탐나서 가져왔으나 물을 따르고 난 다음 없어진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보았던 현상이 헛된 것, 곧 공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달빛을 탐한 것이 탐욕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것부터 시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설정인데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이 공이라는 심오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아직 색공(色空)의 진리에 몽매한 채 있는 산스님을 등장시키고 그 몽매를 깨우치는 시적 화자(작자)를 내세워서 시적 해학미도 함께 살려내고 있다.
―송준호『한국명가한시선Ⅰ』(문헌과 해석사, 1999) pp.251~2


   탁월한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내 소견을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다.
'산승(山僧)'은 물론 산 속 절에 사는 스님이지만 이 작품 속에 등장한 중은 잠시 바깥 세상에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스님으로 보고 싶다. 앞의 감상에서는 물을 긷기 위해 절 밖 우물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렇게 읽으면 자연스럽지가 않다. 사실 절간에는 경내에 우물이 다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 스님은 온종일 탁발이라도 다니다가 늦게서야 산사로 돌아오는 길인지도 모른다. 밝은 달이 그의 험한 밤길을 환히 밝혀 준다. 우물이 있는 개천가에 이르자 문득 갈증이라도 느꼈을까. 스님은 한 모금 손으로 찬물을 움켜 마시다 문득 물 속의 달을 발견한다. 참 맑고 고운 달이다. 이윽고 스님은 휴대하고 있던 호리병을 우물에 담가 물의 달을 담아보려 한다.


이것이 제1,2행[起와承]의 내용인데 현재의 정황이다. 이어지는 3,4행[轉과 結]은 미래의 예측이다. 장차 절에 도착하게 되면 월색을 탐냈던 일이 부질없음을 알게 되리라는 예견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상상하면서 약간의 의역을 곁들여 이 시를 다음과 같이 옮겨 볼 수 있을 것 같다.

산길 가던 한 스님 달빛을 탐내
우물 달 병 속에 담아보지만
절에 가선 이윽고 깨닫게 되리
기울여도 병 속에 달이 없음을


   이 작품을 상징적인 구도(求道)의 시로 이해한다면 ‘산길’은 고행이요, ‘절’은 산길의 끝에 있는 득도의 공간인 도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득도란 무엇인가? 욕심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물 속의 달만 헛될까 보냐. 이 세상에 가득한 삼라만상이 다 그 실체를 붙들 수 없는 허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아름다운 이 ‘월색(月色)’을 어이한단 말인가. 헛된 줄 알면서도 병 속에 담아가고 싶은 것을….


   이규보의 시를 두고 최자(崔滋) 허균(許均) 김석주(金錫冑) 이엽(李燁) 등 역대 문인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남용익(南龍翼)은 이 시를 우리나라 오언절구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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