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화 이론가와 작가

2016. 1. 3. 17:29美學 이야기

 

 

중국 서화 이론가와 작가 | 동양화

 

 

아놀드 2010.09.05 17:51

      

   노신(1881~1936) : 중국의 현대문학가이자 사상가, 혁명가. 중국의 근대개혁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그의 미술이론은 외국 미학의 합리적인 요소와 중국적인 특성을 관철한 것으로 그의 풍부한 변증법적 사상은 중국 현대미학과 예술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신의 미학사상은 오늘날 중국의 미학과 예술활동 등에도 여전히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개지(345~406혹은348~409) : 산수화론을 최초로 제기

         진대(동진)시대의 화가.

         중국 고대에서 화론을 최초로 집대성하였으며

                             대표적 화가이며 이론가이자 최초의 평론과 작가를 겸한 인물이다.

         조불흥, 육탐미, 장승요 등과 함께 "육조사대가"로 불린다. 

         그의 '천상묘득', '이형사신'등의 논점은 중국 전통회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그림에 살아있는 생동감과 정신을 주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 동안 무시 간략화 되었던 산천초목을 인물과 동등한 입장으로 표현하였다.

                                     또 묘사할 대상에 따라 용필(用筆)을 변화시켜 무었을 그리든지 간에

                                         대상의 성질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여 화법(畵法)의 기초를 세웠다.

         이후에 사혁육법론으로 계승하여 발전 시킴.
         화론으로는 '논화','위진승류화찬','화운대산기' 등이 있으며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여사잠도'는 초기의 모본으로 알려지고 있다.

 

종병(375~443) : 글씨와 그림, 거문고에 뛰어난 남북조시대의 화가이자 이론가.

                        저서로 '화산수서'가 있으며,

                        산수를 그리는 것은 대자연의 형사을 빌러 작가의 의경을 표현하는 한 과정이라 함.

 

사혁 : 중국 남조 제의 인물화가, 이론가.

        '고화품록'을 저술하였으며 이 책에서 최초로 '육법론'을 주창하였다. 

         육법론 인물화의 창작과 품평에 관한 기준이 되는 내용들을 서술,

                      이후 서예와 그림의 창작과 이론 모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육탐미(~485) : 남조의 화가. 인물화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의 선은 필세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이어지는 것으로

                     이를 일필화 (영기 문양, 아라베스크 문양에서 발전??)라고 한다. 

                     조불흥, 고개지, 장승요 등과 함께 육조4대가로 불린다.

 

장승요 : 남조의 화가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용을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요최(537~603) : 남조이 이론가. '속화품록'을 저술하였다. '속화품록'은 사혁의 '고화품록'에 나타난 작가 우열의 판단에 그릇된것이 있다고 여겨 저술한 책이다.

  

전자건 : 북주 말 수초의 화가. 인물과 산수에 뛰어났으며 현재 가장 오래된 산수화로 일컬어지는 '유춘도'가 북경 고궁박물원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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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입본(~673) : 당의 화가. 아버지 비와 형 입덕과 더불어 인물화에 빼어난 작품을 남겼다.'역대제왕도'가 미국 보스톤미술관에 전하고 있다.

  

오도자 (685~758혹은792): 

          백묘법과 선묘법,

          당의 화가로 후에 도현으로 개명하였다. 

          도석인물과 짐승, 주각 등을 잘그렸으며

          특히 옷주름이 바람에 날리는 표현하여 오대당품이라는 말을 들었다. 

          왕유와 더불어 수묵화의 시조로 거론되며

          당의 장언원은 "산수의 변화는 오도자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사훈, 이소도 부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라고 하였다.(화성,畵聖) 

          현존하는 작품은 없으며 전칭작들은 모두 후대의 모본으로 알려지고있다.

 

왕유(701~761혹은 698~759) :

         당의 시인이자 화가. 

         청록산수와 백묘화법이 성행하던 당시에

         오도자로부터 수묵화법을 배워 수묵선염의 새로운 화법을 창안하여 흔히 남종화의 시조 불린다. 

        '시중유화,화중유시'라는 그림에 대한 소동파의 평은 유명하다.

        유마힐 : 보살의 이름으로 줄여서 유마라고도 한다. 

                이 뜻은 '정명'인데, 정은 청정무구이며, 명은 명성이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당의 왕유는 이를 따 자신의 자로 삼았다.

 

회소(725~785) : 당의 서예가. 현재 대북 고궁박물원에 자서첩이 전하고 있다.

 

안진경(709~785) : 당의 서예가, 전서풍의 해서로 유명하다.  그의 서체는 동양서예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왕흡(~804) : 당의 화가. 일명 왕묵 이라고도 한다.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그림을 그릴 때에는 먼저 술에 취한 후 비단 위에 발묵을 하고 형상을 표현하는 이른바 발묵법 창조하였다고 전해진다.

 

사혁-육법론에서 기운생동을 제창함.

                  고개지의 '전신론'에서의 신의 개념이 비교적 포괄적이었다면

                  사혁은 신을 '기운'으로 발전시켜 대단히 구체적으로 설명함

 

장언원(815~875) :

         당의 서화이론가. 

         저술한 '역대명화기' 중국 최초의 미술사 저술이다.

         모두 10권으로 이루어졌으며 373명에 이르는 작가들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당대 사혁의 사상을 일보 발전시킴.

            형사의 관념과 기운을 같이놓고 보는 견해.

            즉 " 화기는 그림을 그릴때 응당 기운에 주의 하여야 하며,

         만약 기운이 표현되어 나오면 형상은 응당 그안에 자연히 있다 "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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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호 :

         오대의 화가.불상과 산수에 뛰어났으며 태행산의 홍곡이란 곳에 거처하여 호를 홍곡자라 하였다. 

         회화이론에 특히 밝아 '필법기'라는 저술을 남겼다.

                                       '필법기' '산수수필법' 혹은 '화산수록'  등으로도 불린다.

         그림을 논함에 있어서 ( 불교의 육근에서 ??) 기,운,사,경,필,묵의 육요를 원칙으로 하고

               필의 사용에 있어서는 근,육,곡,기의 네 가지를 

               그림의 품평과 표현에 있어서는 신,묘,기,교를 제시한 것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관동 : 오대의 화가. 형호의 제자로 산수에 뛰어났다. 

         오대, 북송시대의 북방계 산수를 대표하는 작가중의 하나로

         형호, 동원, 거연과 더불어 오대, 북송의 4대  산수화가로 불리운다.

 

석각 : 오대, 송초의 화가, 호방하고 독특한 화풍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그의 선화는 일본에영향을 미쳤다.  이조조심도가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전한다.

 

동원(~962) : 오대,남당의 화가, 그의 작품은 수묵을 위주로 하고 담채를 더하는 것으로 담하고 천진한 강남 특유의 화풍을 열었다.  강남은 바위보다도 흙이 많은 곳으로 동원은 완만한 구릉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강남 풍경을 특유의 피마준으로 표현해내었다.  제자 거연과 더불어 강남산수를 창조한 인물로 기록되며 이성, 범관과 더불어 북송3대가로 일컬어진다.

 

거연 : 오대, 북송초의 화가.  동원의 화법을 배웠으며 산봉우리에 나타나는 마치 계란과 같은 바위는 그의 특유의 화풍 중의 하나이다.  특히 파필에 의한 짙은 태점을 즐겨 사용하였다.  형호, 관동, 동원과 더불어 오대 북송의 4대 산수화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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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희(1023~1085) : 북송대의 화가.

형호의 화론을 이어 받아 발전시켜 삼원법 만들어 동양화의 이론적 기초를 세움.

우두준에 의한 산수와 해조묘의 수목 묘사는 그의 특징적인 면모이다.  그의 스승인 이성과 더불어 이곽파로 통칭되며 이론에 밝아 아들 곽사와 함께 저술한 '임천고치'라는 화론을 남기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조춘도'가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전하고 있다.  특히 그이 고원,심원,평원의 삼원법은 산수화의 취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심종건 : 처이 화가. 감식에 뒤어나고, 산수에 능하였다.  저서로 '개주학화편'이 전한다

 

곽약허 : 북송대의 이론가. 곽약허가 지은 '도화견문지'는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의 속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대에서 송 희령 7년에 이르는 시기의 작가와 고사, 화론 등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책은 중국 고대미술사 연구 있어서 중요한 저술이다. 

 

문동(1018~79) : 북송의 화가, 문인, 자는 여가, 호주지방의 관리로 임명되어 문호주라 불리기도 한다.  특히 대나무에 뛰어났으며 짙은 먹으로 앞의 잎을 그리고 옅은 먹으로 뒷면을 그리는 펴현법을 창조하였다.  소동파와 더불어 호주죽파 불린다. 

  

소식(1037~1101) : 북송시대의 시인이자 서예가, 화가. 호는 동파거사이다.  문장에 뛰어나 당송팔대가 중의 하나이며 서예에 있어서도 송사대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문동과 더불어 독특한 대나무 그림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이들을 호주죽파라 이른다.  고목죽석에 특히 뛰어났으며" 그림을 닮았는가 닮지않았는가를 가지고 거론함은 어린아이와 같다 (내 생각... 사실화는 어린이가 그린 그림과 어른이 그린 것이나 차이가 있다면, 능숙하냐 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 추사는 서예를 조선말 당시에 유행하는 진위 여부에 중심을 두지 않고, 조예라는 역사적 사실ㅡ고증학을 중시하였기에ㅡ을 중심으로 평가했다 함.)"라는 그의 화론은 특히 유명하며 사대부화 문인화 제창하여 후대에 큰영향을끼쳤다. 

 

이공린(1049~1106) : 북송의 화가. 백묘에 의한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그의 물이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선묘는 일가를 이룬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북경 고궁박물원에 서역에서 조공 들어온 다섯필의 말을 그린 '오마도'가 있다.

 

미불(1051~1107) : 북송시대의 서화가이자 감식가.

                           미점 산수를 창조하여 원의 고극공, 방종의 등에 영향을 미쳤으며,

                           서예에 있어서는 챠량, 소식, 황정견더불어 송4대가로 불린다.

 

      미씨부자 : 미불과 미우인 부자를 일컬음.이들은 독창적인 미점산수를 창조하였다.

                     화풍은 미가산, 미씨운산,미파 등으로도 불린다.

                     (미점산수가 쇠라의 점묘화법으로 진화된 것 아닌가?ㅎㅎ)

 

조길(1082~1135) : 송의 휘종. 북송의 황제화가로 유명하다. 재위기간에 정치보다는 그림에 힘을 쏟아 나라가 크게 쇠퇴할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나 서화는 크게 성하였다.  화훼에 특히 뛰어났으며 그가 관장한 선화화원은 유명하다. 글씨에도 뛰어나 독특한 필치의 수금체로 일가를 이루었다.

  

왕희맹(1096~): 북송의 화가로 요절한 천재로 통한다.  현재 북경 고궁박물원에 유일하게 전하고 있는 '천리강산도'는 `18세 때 작품으로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마린 : 남송의 화가. 남송의 유명한 화가 마원의 아들로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 사나수, 화조, 인물 등에 두루 활약을 했다.

 

하규 : 남송의 화원화가. 범관과 이당의 필법을 익혀 산수로 일가를 이루었다.  부벽준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특히 구도에 있어서 화면의 한쪽에 사물을 치우치게 배치하고 나머지를 여백으로 남기는 독특한 풍격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를 흔히 하반변이라 일컫는다.  마원과 병칭되어 마하파를 구성하고 유송년, 이당 등과 더불어 남송4대 로일컬어진다.

  

양해 : 남송의 화가. 화원의 대조를 역임하여 황제로부터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사받았으나 화원의 속박을 견디지 못하고 이 허리띠를 벽에 걸어놓고 화원을 뛰쳐 나온 고사는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두 가지의 풍격으로 크게 구별이 되는데 하나는 오도자와 이공린 등의 필법을 따른 세필이며, 다른 하나는 필의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는 감필이다.  특히 양해의 가피화법 명의 서위, 팔대산인, 석도, 김농, 제백석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백구 : 남송의 화가. 동색 백숙과 더불어 이사훈 화풍을 이어받은 금벽산수를 잘 그렸다.  이들 형제의 화풍은 남송원체화풍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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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공망(1269~1354) : 원의 화가. 오진. 예찬. 왕몽 등과 더불어 원말사대가로 꼽힌다.  동원, 거연의 필법을 익혀 일가를 이루었으며 특히 유려한 피마준의 산수는 명, 청대의 산수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말년에 그린 '부춘산거도'는 대표작으로 꼽히며 현재 '무용사권''자명권' 두작품이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산수결'이 전한다. 넓고 광활한 산점투시의 산수화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화가들이 산을 거닐고 물을 즐기면서 얻었던 다방면에 걸친 인상의 종합이다.

 

예찬(1306~74혹은 1301~74) : 원의 화가. 호는 운림이다.  원말사대가중의 하나로 꼽히며 적막하고 인적이 없는 소슬한 산수화가 그의 작품세계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전개되는 일하양안식의 구도는 마치 그의 등록상표와 같이 특히 유명한 것이다.

 

왕몽(~1385) : 원의 화가, 조맹부의 외손자. 조맹부의 화법에 당.송의 명가, 특히 동원과 거연의 화풍을 더하여 산수에 있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특히 수목이 우거진 곡절이 심한 산수 특유의 우모준과 갈묵의 태점으로 표현한 것은 왕몽의 등록상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원말4대가'중의 하나로 손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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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   ~ ; 1593) ; 추상화를 그림.

성격이 독특한데, 자신의 이름의 글자를 분해하여 “전수월(田水月)”이라는 낙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중국 회화사에서 신동(神童)·관료·화가·광인(狂人) 등의 다양한 면모를 지녔던 인물이다. 서위는 중국 미술사에서 행적이 가장 특이한 예술가의 한 사람일 것이다.
서위는 복건 도독 호종헌(胡宗憲)의 막료가 되어 한 때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으나 그에 연루되기도 하여 중년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 자살 기도를 몇 번이나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의처증으로 아내를 살해하였다는 혐의로 한때 감옥살이를 하게 된 적이 있으나 미친 사람으로 행세해 풀려났다.
지독한 술꾼으로도 알려졌으며,  만년에는 그림과 글씨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다가 가난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나중에 절파(浙派) 화가로 꼽혔는데, 대진(戴進)으로 대표되던 절파는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남송원체화(南宋院體畵) 전통을 이은 화파이다. 그러나 기질과 화풍면에서는 석도(石濤)라든가 8대산인(八大山人) 같은 17세기 개성주의 화가들에 더 가까웠다. 그의 화풍은 자유분방하면서도 때로는 폭발적이다.

( 시대를 초월한 독창적 화풍으로 일세를 풍미한 명대 말의 화가, 서위의 광기어린 생애와 작품세계.
서위는 자신과 속인 사이에 넘을 없는 경계를 긋고 불우한 생을 살아간 인물이다. 시운을 만나지 못한 불우한 운명 앞에 탄식했으며, 자신의 귀에 못을 박고, 살인을 저지르는 등 엽기적 행각으로 세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문장가가 되어 세상을 향한 울분을 토로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고, 후세에 '중국의 표현주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서위는 시와 서화에 모두 능했으며 또한 당대 중요한 희곡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서예, 시, 문장, 그림 순으로 순서를 매겼다. 그는 그림에서 독특한 화풍으로 일가를 이루었는데, 산수, 인물, 화충, 대나무와 바위 모두 훌륭하였으며 특히 화훼화가 유명하였다.
이 작품은 수묵으로 대나무, 바위와 화훼를 그리고 있는데 서위 자신의 제발에는 16가지 종류의 꽃이 있다고 한다. 그림 중의 미세하고 다양하게 먹색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큰 붓질로 바위의 표면을 칠하고 백묘(白描)로 대나무를 그렸는데 꽃을 그린 필법은 빠르고 호방하여 구애됨이 없으며 선염과 수묵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먹의 순서의 변화가 매우 많으며, 화면은 활달하고 시끌벅적한 것이 생기가 있다. 화가에게는 붓질과 먹의 표현이 사물의 사실적인 묘사 보다 더 중요하였다.

 

 

~~~~~ 청대(淸代:1644~1911)~~~~

 

팔대산인(   ~1705년):

 같은 시기에 활동한 왕휘(王翬)를 비롯한 정통파와 대조를 이룬다.
 석도와 더불어 초기의 개성주의 화가들 중 하나로 꼽히는 승려화가. 

명나라 황실의 후예로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명나라 멸망 후 1648년에 승려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라의 패망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인 혼란을 일으키게 된 듯한데, 실제로 그는 미친 상태와 열렬한 창조적 상태를 오간 듯하다. 결국 그는 절을 떠나 환속했다. 그후 벙어리를 뜻하는 글자(啞)를 대문 앞에 써붙여 놓고 나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웃거나 술만 마시는 등의 황당한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수묵화가 주종을 이루는데 새나 물고기 같은 대상들에게 생략적이고 긴장감으로 가득찬 농묵(濃墨)의 양식으로 호기심 많은, 찡그린, 혹은 심술궂기까지 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그의 산수화에서 10세기의 거장인 동원(董源)과 거연(巨然)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대부분의 중국화가들과는 달리 어떤 전통적인 범주에 넣기 힘든, 성격이나 특징상 절대적인 기인이면서 '개성주의자'였다.


 

왕휘(1632~1717) : 청의 화가로 자는 석곡, 왕감의 제자로 특히 산수에 능하였다.  화훼화로 이름이 높은 운수평과의 교우는 유명하며 청의 '육대가' 중 하나로 꼽힌다.

 

석도(1642~1718) : 청의 서화가이자 이론가.  출가한 스님으로 성은 주이며 이름은 약극이다.  법명은 원제이며 석도는 그의 호이다.  이밖에 그는 대척자, 혹은 고과화상같은 이 등과 아울려 이른다 황산파를 형성하였다.  홍인, 빙잔, 팔대산인과 더불어 청초4고승으로 불린다.  그의 화풍과 화론은 양주화파는 물론 근대 중국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저서로 '화어록'이 전한다

 

사왕파 : 청의 육대가로 꼽히는 왕시민, 왕감, 왕휘, 왕원기, 오력, 운수평 등 여섯사람 중 오력과 운수평을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을 일컫는 말.  이들 네 사람을 서로 사제지간이거나 친구, 혹은 인척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품과 예술사상면에 있어서 명의 동기창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받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작품경향은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창조 보다는 옛것의 모방과 계승만을 강조했다.  이들의 이러한 경향은 청의 회화가 창조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원인 중의 하나로 지적된다.

 

사왕 ; 청의육대가 중 왕시민, 왕감, 왕휘,왕원기 등을 일컫는 말. 이들은 사제, 혹은 친구, 친척등의 관계로 화풍과 사상 등에 있어서 직간접으로 동기창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 산수화에 큰영향을 미쳤으나 창작을 소홀히 하고 옛법만을 숭상한 이들의 태도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양주팔괴 : 청 건륭년간에 중국 강소성의 양주일대에 살던 여덟 명의 화가들. 일반적으로 왕사신, 황신, 김농,고상,이선,정섭,이방응,나빙 등을 꼽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많다.  이들의 작품들은 모두 옛법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이고 창조적인 것들로 당시 유행하던 그림들과는 분명하게 구별이 되었다.  이들이 팔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파격적인 화풍 때문이었다.  이들의 화풍은 중국의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판교...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조정의 허락없이 식령을 나눠줌으로서 관직을 박탕 당함.

여러 서체를 혼합하여 개성미를 창출해 냈으며, 묵죽그림과 함께 신필로 인정 받음. 언행에서도 구애받지 않고 의연하면서도 풍류가 넘처 일화가 많다. 시서화 삼절로 정평이 나자 많은 이들이 부탁해서 난처하게 되 "내 진작 이런 줄 알았다면 애당초 서화를 익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속을 썩이지 않았을 것을.." 결국 고육지책으로 제자들 중에서 대필자를 두었고, 60세 되던 때에 16세된 오우전이란 어린 제자를 두어 그 자신이 창안한 육분반의 서법을 전수해 주면서 대필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판교의 작품이 만점이 넘게 존재하는데 진품이 몇 점인지 의문이다.

 

난득호도

           정섭(판교)의 시

"총명하기는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聰明難, 糊塗難).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게 되기는 더욱 어렵다(由聰明轉入糊塗更難).

 집착을 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며(放一著, 退一步, 當下心安),

 뜻하지 않고 있노라면 후에 복으로써 보답이 올 것이다(非圖後來福報也).”

 위 구절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인 ‘난득호도(難得糊塗)’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난득호도’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리숙해 보이는 게 어렵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르고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중국인들의 입맛에 꼭 맞는 성어다. 이 말이 나온 유래는 다음과 같다.

산둥(山東)성의 지방관리로 근무하던 정판교는 어느 날 먼 친척 형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옥의 담장을 놓고 이웃과 송사가 벌어졌으니 지방관에게 잘 봐달라는 편지 한 통을 써달라는 청탁이 적혀 있었다. 정판교는 편지를 다 읽은 뒤 시 한 수를 답장 대신 보냈다.

“천 리나 편지를 보낸 것이 담장 하나 때문인가? 千里捎書爲一牆,

 그에게 몇 자를 양보하면 또 어떤가? 讓他幾尺又何妨?

 만리장성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萬里長城今猶在

 어찌 진시황은 보이질 않는가 不見當年秦始皇”

그는 이 시와 함께 ‘난득호도’와 ‘흘휴시복(吃虧是福·손해를 보는 것이 곧 복이다)’이라 직접 쓴 편액을 함께 친척에게 보냈다.

“가득 차면 덜어지게 되어 있고(滿者損之機),

 비어 있으면 점점 차게 되어 있다(虧者盈之漸).

 내가 손해를 보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損於己則盈於彼).

 그러면 각자 심정의 절반씩을 얻는 것이다(各得心情之半).

 나는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얻게 되니(而得我心安卽平),

 이 어찌 바로 복 받을 때가 아니겠는가(且安福卽在時矣).”

 흘휴시복의 해석이다.

   한국은 중국과 달리 재산이 많고 배운 것이 많아도 실력과 재물을 감추고 자신을 낮춰 어수룩하게 행동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임백년(1840~95혹은1896) : 청말의 화가. 이름은 윤이며 자는 백년이다.  인물, 화훼,영모,산수에 두루 능하였으며 특히 인물에 뛰어났다.  세필에 의한 독창적인 인물의 표현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양자강 이남에서 그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해상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손꼽힌다.

51세 때 정섭(판교)의 <죽석도>를 임모 했는데, 정판교의 풍골신운(風骨神韻)과 너무도 흡사해 진위 여부를 모를 정도였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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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침략기부터 문인화가 비판 받기 시작 함.

(내 생각...

문인화 비판이 서양화보다 사실적이지 못하고, 다양하지 못함 등등 이나, 

                     자세히 보면 결국 외형상을 문제 삼은 것이고,

                     내용상으로 보면 결국 서양화법을 통하여

                                                  북종화법이 남종화법을 비판한 꼴이다.

                     왜냐면, 서양화법이나 북종화법이나 차이가 여러가지 있지만,

                     큰 차이는 원근법이냐 삼원법이냐 하는 시각의 차이지

                     화법에서는 방법만  다를 뿐이라 생각하기에..)

 

오창석(1844~1927) : 중국 근대의 대표적 서화가이자 전각가. 석고문 등 서예와 전각에 뛰어났으며 30을 전후한 나이에 입문한 그림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옛법을 통한 새로운 면모를 창출한 그의 작품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의 근대회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의 민영익과의 교류는 유명한 것이다.

 

황빈홍(1864~1955) : 중국의 현대화가이자 회화 이론가. 수묵산수에 특히 뛰어났으며 '오필칠묵'설을 주장하였다.  작품에 있어서 초묵의 사용은 그의 특징적인 풍격이며 그가 살던 항주에 황빈홍기념관이 있다.

 

제백석(1864~1957) : 현대화가, 전각가.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초기에는 초상화를 배웠으나 60세 이후에 화풍이 급격하게 변하여 독창적인 일가를 이루었다.  작품의 소재는 대단히 광범위하여 특히 사의적인 화면에 극히 정교한 화풍을 도입한 것이 특징이다.  오창석과 더불어 중국 근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화가중의 한명

 

 반천수(1898~1971) : 현대서화가이자 미술교육가. 서위. 팔대산인, 석도등과 근대의 오창석의 영향을 받아 파격적인 구도의 수묵화훼화를 남기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은 서예에서 비롯된 필선의 사용으로 금서의 맛이 넘쳐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조화(1904~) : 중국의 현대인물화가.  서비홍 등 중국화 개혁론자들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중국 인물화와는 구별이 되는 새로운사실주의 인물화법을 창조하였다. 그의 '유민도'는 걸작으로 손꼽히며 양지광, 왕지무 등을 비롯하여 현대 중국인물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포석(1904~65) : 중국의 현대화가. 이론가. 서비홍의 도움으로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유학하여 킴바라 세이코로부터 동양미술사를 배웠다.  먹과 색, 그리고 물이 어우러진 그의 산수는 전통적인 산수와는 구별이 되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관산월과 합작한 '강산여차다교'라는 작품은 상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임풍면(1900~89) : 현대 중국화가, 교육자, 독일.프랑스등을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화의 현대화에 공헌하였다.  북경예전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항주국립예술대학을 설립하였다.  야수파적인 색채감과 강gks 표현주의적 경향이 작품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장족 : 중국 티벳 부근에 사는 민족. 이들의 문화는 한족 중심의 중국문화와는 구별이 되는 서방적 성격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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