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윤혜영의 문화산책] (4) 문학과 미술의 만남 - 오복이

2016. 1. 17. 02:30美學 이야기

 

 

      [수필가 윤혜영의 문화산책] (4) 문학과 미술의 만남 - 오복이

 

                      2015/08/24 08:31 등록
  (2015/09/07 17:25 수정)
 

 

 

 


(뉴스투데이=윤혜영 선임기자)  “허! 여기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는데, 여기다 자리를 잡았구먼.”

고개를 들어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니 회색 승복을 입고 홀쭉한 바랑을 걸친 탁발승이 마당 한가운데 들어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세의 나이 매기기로 대략 60대 후반으로 보였다.

여름이 무르익어 가는 6월 중순이었다. 정애와 나는 오복이가 건진 통발에서 꺼내 온 문어 3 마리를 삶아 막걸리를 반주로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노승이 햇빛에 눈을 찡그린 채 손차양을 하고는 건너편 신선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님요, 날도 더운데 여기 평상에 앉아서 시원한 막걸리나 한 사발 자시소.” 하고 오복이가 양철 대접에 젖빛이 뽀얀 막걸리를 찰랑찰랑 넘치도록 들이부었다. 곧 하얀 이슬방울이 양재기 표면에 돋아났다. 노승은 두말하지 않고 받아서 한숨에 주욱 달게 비우고는 수염에 방울진 찌꺼기를 소매로 슥 훔쳤다.

“근데 사람이 못 사는 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라예?”

“여게는 땅심이 너무 쎄서 사람 정기를 다 빨아 묵는다. 뭘 해도 안 되는 땅인 기라. 듣기 안 좋겠지마는 참고하고 미리 조심을 하소.” 하고는 벌떡 일어나 휘적휘적 걸어 메마른 대궁만 남은 유채밭을 지나 아지랑이 미열에 흔들리며 멀어져갔다.

 


 

 


   이제 막 도배를 끝낸 참이었다. 오복이가 거제도 남부면 도장포 마을에 자리 잡은 지 일주일째였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이라 ‘바람의 언덕’이라는 마을의 별칭이 있었다.

오복이는 대학교 동문으로 당시 B대 미술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얼치기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동아리 주최의 시화전을 통해 만나게 되었다. 오복이가 그린 그림에 내가 시를 써 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오복이의 그림은 당시의 또래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네모난 캔버스가 비좁은 듯 고통과 절규가 아우성치며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예수의 모습, 참수된 어느 나라의 왕, 머리가 날아가고 몸통만 남아 의자에 앉은 시체.

 


   풍경과 정물이 주를 이루었던 새내기들의 말랑말랑한 그림과는 확연한 대조를 이루었다. 왜 이렇게 아픈 그림만 그리는지 물어보았더니 붓을 들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손이 따라가다 보니 이런 그림이 나온다며 웃었다.

하여간 범상치 않았다. 외모도 그러했다. 165cm를 겨우 넘는 키에 왜소하고 마른 몸, 형형히 살아 있는 눈은 항상 희번덕거려 흡사 배를 뒤집고 죽은 생선의 하얀 절규를 연상케 했다. 친해지고 싶다기보다는 차라리 멀리하고 싶은 인상이었다.

모진 놈 곁에 있으면 벼락맞는다고 가까이 하면 불길한 기운이 옮아오거나 일진이 안 좋을 것 같은 그런 기운 말이다.

 


 

 


   오복이는 고아였다. 부모가 누군지도 몰랐다. 갓난아기 때 광주리에 담아 절 앞에 버려놓은 것을 스님이 데려다 키웠다. 세상의 많은 복을 받고 나눠주며 살라고 오복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고 했다. 남들이 외려 듣기 민망스러운 그런 과거를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쉽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마치 오늘 점심 때 뭘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럽게 말이다. 일정한 주거지도 없는 듯 동아리방에서도 자고 공사판 현장에서도 자고 그러는 듯했다.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일한 대가로 번 돈으로는 모조리 술을 마셔 날리는 것 같았다.

힘들게 벌어서 너무 쉽게 쓰는 것을 보니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속이 상했다.

 

   얌체 같은 대학 동기들은 오복이에게 빌붙어 술을 얻어 마시면서도 자기들은 좀체 돈을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1차, 2차, 3차까지 빈대를 붙었다. 무슨 혈육이나 되는 것 마냥 당당하게 얻어먹었지만 오복이는 그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심지어 돈을 꾸어 갚지 않는 녀석들도 있었다.

“애들한테 베풀어도 고마운 것 모른다. 너도 네 실속 좀 차려라.” 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충고하면 “친구끼리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라노.” 하며 실실 웃으며 눙쳤다.

돈이 아까운 것 보다 돈을 쓰면 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남에게 베풀며 생색내고 주목받는 것, 그런 기분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름의 끝 무렵, 주말을 목전에 두고 나는 고향 집에 내려가기 위해 가벼운 짐을 꾸리고 있었다. 아버지 생신인 토요일에 가족들끼리 모여 저녁을 먹자고 엄마가 전화해온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시골이나 다름없는 성주에서 대구로 대학교를 오게 되면서 학교 인근 원룸에 방을 구해 살고 있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정애와 함께 반반씩 집세와 생활비를 부담하며 같이 살았다. 정애는 참외농사를 크게 짓는 이장댁 딸이었다.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있고 하얀 얼굴과 단정한 외모에 말수가 적었다. 내가 짓궂은 농담을 하면 어깨를 치며 조용히 웃곤 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으려니 하늘의 안색이 심상찮았다. 검은 구름이 하나 둘 시나브로 몰려들며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더니 이내 차갑고 세찬 소나기가 쏟아졌다. 메마른 대기에 먼지 냄새를 풀썩이며 비는 땅을 시원하게 두들겼다.

“외출하려니 웬 비가 내리고 그러냐? 정애야 나 다녀올게, 문단속 잘하고 있어.”

정애가 가방을 들어주며 대문 밖으로 마중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모퉁이를 돌려다 갑자기 맞닥뜨린 검은 형상에 놀라 우리는 순간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정애는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누. 누구세요?”

“내다, 오복이.”

놀란 정신을 수습하며 눈앞의 상황을 바라보니 오복이가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니 와카노? 뭔 일 있었나?”

오복이가 오른쪽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손바닥 위에 누런 이빨을 한 개 올려놓고 있었다.

“병원 가게 돈 좀 빌리도라.”

길을 가다가 불량배들이 행인 하나를 두고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고 옆에서 말리다가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5대 1이었다며 자랑을 했다.

“두 놈이 내 선풍각에 나가 떨어졌다.” 허풍을 떨더니 이내 새치름해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비가 오는데 돈도 다 떨어졌고 달리 갈 곳도 없고, 그래서.”

정애가 슬픈 눈으로 오복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휴 하며 한숨을 쉬고는 지갑에서 5만 원을 세어 건네주었다.

“얼른 가봐라, 난 차 시간에 맞춰서 터미널에 가야 한다.”

“그래, 미안하다.”

 


   고향 집에서는 아버지 생신에 맞춰 고모와 이모, 할머니와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까지 가세해 떠들썩한 잔치를 이루었다. 푸근한 며칠을 보내고 돌아올 때는 엄마가 싸놓은 김치와 장아찌 등의 밑반찬 꾸러미를 바리바리 짊어지고서였다.

 


 

 


   “나 왔어!” 하며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 거실 한가운데에서 오복이가 라면을 먹고 있었다. 낡은 개다리소반 위에 냄비째로 엊은 라면 외에도 묵은 김치와 오이지, 김과 멸치볶음, 열무김치까지 냉장고에 있는 반찬은 전부 꺼내어져 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소복이 쌓아 올린 쌀밥 한 공기!

“엇, 너 웬일로?” 하며 놀라워하자 부엌 어딘가에서 정애가 황급히 걸어 나오며 “응, 내가 뭐 고칠 것도 있고 해서 불렀다. 까스렌지 고장난 게 안 된다 아이가.” 하곤 당황해 하며 잘 다녀왔느니 어떠니 하며 두서없는 말들을 마구 늘어놓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저녁에 오복이는 이빨을 들고 병원으로 가지 않고 정애 혼자 있는 집으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틀을 같이 있었다.

 



   마당 한구석에 주인도 모르는 새 새싹이 조용히 돋아나듯 두 사람의 마음에도 서로가 미처 몰랐던 감정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는가 보다.

 


 

 


   어느 날 정애와 같이 목욕탕에 갔는데 샤워를 하는 그녀의 젖꼭지가 오디처럼 검었다. “원래 저랬었나?” 하며 둔감하기가 뚝배기 같던 나는 고개만 갸웃하고 곧 잊었다.

후에 알았지만 그건 임신의 징후였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자 정애가 오복이랑 결혼했으면 한다고 조용히 이야기를 해왔고 그제야 나는 그동안 외출이 부쩍 잦고 가끔 안 들어오는 날이 있던 정애의 일상이 짐작이 갔다. 오복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실성한 이처럼 흐흐흐 웃음을 흘리며 돌아다녔다. 다물려 해도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행복한 웃음이었다.

 


   결혼식은 고향의 작은 예식장에서 조촐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신랑 측의 자리는 신부 측과 대비되도록 텅 비어 있어 친구들이 그쪽으로 가서 몰려 앉아 자리를 채웠다.

거무튀튀한 오복이의 옆에서 정애는 목련처럼 환했고 눈부시게 웃었다. 두 사람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흡사 주인집 마님과 노비가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았다. 신부 측 친척들은 너무 기우는 결혼을 하는 것 같다며 조용히 쑥덕거렸고 정애 어머니는 미소를 띠며 손님을 챙기는 와중에도 눈알이 꽈리처럼 붉었다.

후에 나는 정애에게 물어보았다. 그날 밤 돌아온 오복이를 왜 받아주었느냐고.

“나조차 그 사람을 거절해버리면 그 사람이 너무 상처받을 것 같았어.” 곱게 자라 마음이 한없이 착하고 여린 정애의 변이었다. 만약 정애가 오복이와 같은 가난한 사람이었다면 그를 거절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혼자 생각을 하였다.

 




 

   정애와 오복이는 거제도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정애가 초등 미술 기간제 교사로 나가고 오복이는 계속하여 그림을 그렸다. 오복이가 아는 누님이 배려를 해주어 신선대 맞은편의 도장포 마을 언덕에 민박과 식당을 겸하는 건물은 초라하지만 멋진 경치를 가진 가게도 생겼다.


그러나 멋진 외양의 펜션이 즐비한 해금강 근처라 민박으로 수입은 전혀 올리지 못했다. 그나마 오는 손님들도 낚시와 여행을 겸해 내려온 동문이었다. 방값 형식으로 얼마간 추렴하여 계산을 해주려 해도 오복이가 펄쩍 뛰었다.

 


   둘 사이에 예쁜 딸도 태어났다. 세상에 가장 귀한 존재라는 뜻으로 ‘보배’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보배가 아팠다. 선천성 심장병이었다.

오복이와 정애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드리워졌다. 아이는 작고 쭈글쭈글했으며 우는 소리도 모기처럼 앵앵거렸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 즈음에 정애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절에 열심히 다녔다. 지세포에 있는 작은 절 영은사였다. 나도 정애를 따라 몇번 다녀갔다. 지세포 바닷가에 면한 좁은 골목으로 15분 정도를 올라가면 작고 아담한 절이 나온다. 지대가 높아 절 마당에서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정애와 함께 살 때는 그 애가 종교를 의지하여 절이나 성당에 나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사람의 의지로는 너무나 힘에 부치는 일이 생길 때 어떻게 해도 방도를 찾지 못할 때 그때는 신을 찾게 되는가 보다.

 


 

 


   무슨 일이든 한꺼번에 닥친다. 불행은 사람이 한숨 돌리며 차례로 맞을 기회를 주지 않고 폭풍처럼 몰아서 들이닥친다. 정애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홧병을 얻어 세상을 등진지도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몇년 전에 도배를 막 마친 민박집에 노승이 들러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고 해준 말이 화근이 되었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말에는 주술이 있어 악한 말은 사람을 해한다. 물론 노승은 단순히 풍수지리에 근거해서 귀띔해 준 것이리라. 인생은 누구에게나 예측 불가능하다. 운명이나 팔자라는 족쇄도 있다. 돌아가려면 미리 알고 불시에 덮쳐온다. 나는 대웅전에 들러 절을 하는 정애를 바라보며 “땡중 새끼!” 하며 괜히 혼자 욕설을 하였다.

 


   보배는 부산대학병원에 다니다가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 치료하러 다녔다. 그들의 가정이 더 어려워지고 힘들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원래 땅주인인 오복이 아는 누님이 그 터에 펜션 지을 사람이 생겼다고 나가라고 했다. 이쪽의 사정은 듣지도 않고 언제까지 날짜를 말해주고는 끝이었다. 속상해하는 오복이에게 “그러게 왜 처음부터 계약서를 쓰라고 했더니 말 안 들었느냐.” 라고 화를 내자 그는 예의 그 싱거운 미소를 띠며 머리를 긁적이기만 했다.

처음에 그 터에 건물을 지으라고 했을 때 내가 계약서로 약속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고 하자 오복이는 단호히 “누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라고 했던 것이다.

정애의 친정에 얼마간 돈을 끌어다 대어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보배를 위해서도 치료를 계속하려면 서울에 사는 것이 수월하긴 했다.

 

 


   이사 가기 전날의 마지막 밤을 정애와 보배와 함께 하였다. “보배야, 서울 가서도 치료 잘 받고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씩씩하게 자라라.”하고 말하자 입을 오므리며 수줍게 웃었다. 어린 나이에 장거리를 오가며 받는 치료가 힘들 법한데도 보배는 엄살이 없다. 아이들은 눈치코치로 부모의 사정을 짐작하고 내면으로 성숙해간다. 어린아이의 몸에 눈빛은 노인처럼 깊어진 보배를 보면 항상 가슴이 아팠다.

 


   그날 밤은 태풍이 불었다. 거센 바람과 비가 미친 듯이 지붕과 창을 두드렸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소리를 보아 정애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했다.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한밤중에 강물을 아홉 번 건넌 사내가 말하기를 ‘물은 그냥 흐르는데 듣는 이의 심경에 따라 오만가지 소리로 변용된다’ 라고 하였다.

그날 밤의 빗소리는 보드랍고 약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려는 자비심 없는 야수의 포효 같았다. 그들이 얼마 안 되는 짐을 꾸려 거제도를 뜬 이후 나는 한동안 섭섭했지만, 곧 본연의 일상에 익숙해졌다. 간혹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오복이가 새벽 세차를 하면서도 그림을 손 놓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가 맡은 쳇바퀴를 열심히 돌리며 세월을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몇 년이 흘렀다. 어느 날 나는 볼 일이 있어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들렀다가 신촌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는데 내 옆에 앉은 아가씨가 얇은 두께의 도록을 보고 있었다. 시퍼렇게 출렁이는 바다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조그만 쪽배를 탄 남자가 힘차게 노를 젓고 있었다. 역동적인 힘이 캔버스 밖으로 분출하는 듯하였다. 아래에 조그맣게 작가의 사진과 이름 ‘이 오복’이라 적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반가움과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 전 ‘Antoine De Saint- Exupery’의 인간의 대지를 읽다 보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들은 어딘지는 몰라도 어떻든 어디에든지 있어, 말이 없고 잊어버려 져 있지만, 몹시도 충실하게 있는 것이다.”

 


 

 


   지난 주말 후배들이 거제도에 휴가를 와 2박 3일간 가이드를 해주며 섬을 한 바퀴 돌았다. 폐왕성, 청마 유치환 시인 묘소,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옥포대첩 기념공원, 거제문화예술회관, 학동 몽돌해수욕장 등을 둘러보고 해금강과 여차, 홍포로 가는 길, 옛날 오복이가 살던 바람의 언덕에도 가보았다.

그동안 그곳은 펜션과 낚시장비 가게, 슈퍼 등을 거쳐 여러 번 업종을 바꾸었다. 그러나 매번 1년을 못 넘기고 폐업을 하였다. 문득 오래 전 노승의 예언이 생각나서 쓴웃음을 삼켰다.

바다 아래에는 초라한 외양의 낚시꾼과 주민 몇몇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퍼런 청색의 바다에 가느다란 낚싯대를 꽂은 채 앉거나 서 있는 그들은 바다의 힘찬 기운을 수혈받으려는 환자들 같았다.

주나라의 강태공은 낚시하며 ‘때’를 기다렸다고 하지 않는가. 낚시꾼들이 기다리는 ‘때’가 고기인지 인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살이 자체가 한없는 기다림이다.

그 ‘때’를 만났는지 놓쳤는지는 마지막에 가서야 스스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오복이의 항해가 평화롭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더불어 우리 모두의 항해도.

 



그림 : 이동국(李東國)

화가. 부산공예고교,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를 졸업. 서울, 부산, 거제에서 22회 개인전 및 다수의 그룹전 참가. 바다를 즐겨 그리며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을거라고 하였다.

* 위 글은 김주영, 박상우, 김별아, 구효서, 권지예, 전경린 등 소설가들의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경향미디어 출판)'의 윤혜영 글 전문 '오복이'임.
 

<글 : 수필가 윤혜영
geo0511@hanmail.net  >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남 통영 출생

계간 '문학나무(발행인 황충상 소설가)'겨울호를 통해 신인문학상 중 수필 부문 수상자로 등단.
주요 저서로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화가들이 만난 앙코르와트' 외 항공사와 증권사, 신문사 및 문화예술지등 다수에 문화칼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