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을 하면서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던 것이다.
25세 나던 신유년에서 28세 나던 갑자년까지의 기록은 연보에 자세치 않다. 처가에 더부살이하는 처량함과 그럼에도 헤어날 길 없던 가난에서 벗어나려, 그는 서울로 와서 과거 공부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로 올라오며 지은 시 「別家」는 당시 백광훈의 내면을 잘 그려 보인다.
뜬 인생 백년간을 괴로워하며
웃는 얼굴로 처자를 달래었지.
금릉성 아래 와서 올려다보니
흰 구름만 구봉산에 걸려 있구나!
浮生自苦百年間 說與妻兒各好顔
却到金陵城下望 白雲猶在九峯山
좋은 낯으로 금세 돌아오마고 가족과 작별했지만 괴롭기만 한 浮生을 먼저 떠올렸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릉성 아래까지 단숨에 이르렀다. 참고 참다 그제서야 구봉산을 돌아보니, 올라올 때 걸려있던 흰 구름이 여태도 그대로 걸려 있는 것이다. 白雲은 제가 무슨 바위라도 되는 양 산 위에 꼼짝 않고 걸려 있는데, 浮生은 왜 이다지도 괴롭게 떠도는가 하는 탄식을 삼켰다. 그 구름은 기실 고향에 남겨두고 온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 「贈朴無競」에서는 고향에 두고 온 그 '白雲'을 두고 "봄바람 서울 길에 불어오더니, 꽃 버들 곳곳마다 흐드러졌네. 흰 구름 하늘가 서성이누나. 나그넨 하릴없이 고개 돌린다.(春風洛陽陌, 何處非花柳. 白雲在天涯, 遊子長回首"라고 노래하여 객지에서 봄을 맞아 고향의 봄 소식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을 얹기도 했다. >
다음 「洛中秋夜」는 서울에서 가을밤에 고향의 아내를 그리며 지은 시다.
이 밤 서루에 가을 생각 스며드니
성근 주렴 내리잖아 이슬이 맑았구나.
한 소리 이십사교 위에 뜬 저 달
강남 땅 그 임은 먼 이별 상심하리.
此夜西樓秋思生 疎簾不下露華淸
一聲二十四橋月 人在江南傷遠情
가을 밤 주렴도 내리지 않고 맑게 맺히는 이슬을 본다. 이십사교 다리마다 달빛은 흐른다. 그 위로 남녘 가는 기러기 울음이 슬프다. 저는 가는데 나는 왜 못 가나. 사랑하는 아내는 멀리 강남 땅에서 이 밤 遠情에 마음 아파하며 날 그려 저 달을 보고 있겠지. 더 뒷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長城道中」에도 떠나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사무친다.
길 위에서 단오를 만나고 보니
지방은 달라도 풍물은 같다.
슬프다 고향집 어린 딸애는
하루 종일 뒤뜰서 혼자 놀겠지.
路上逢重五 殊方節物同
遙憐小兒女 竟日後園中
길을 가다가 단오의 떠들썩 흥겨운 놀이 마당을 만났다. 매일 제 엄마의 치마 꼬리를 붙잡고 "아빤 언제 와?"하던 딸아이가 풀이 푹 죽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뒤뜰에서 혼자 소꿉놀이를 하고 있을 정경이 떠올라 목이 메이고 말았다.
< 이 시의 제 3구 '遙憐小兒女'는 두보가 안록산의 난 때 포로로 장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州에 있던 가족을 그리며 지은 「月夜」의 제 3구와 꼭 같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밤 州의 달, 규중에서 홀로 보리. 가엽다 어린 딸은, 장안 그리는 그 뜻 모르리. 안개는 귀밑머리 적시고, 달빛은 옥같은 팔에 시리리. 언제나 침상 휘장 기대어, 마주 보며 눈물 자욱 마르게할까? (今夜 州月, 閨中只獨看. 遙憐小兒女, 未解憶長安. 香霧雲 濕, 淸輝玉臂寒. 何時依虛幌, 雙照淚痕乾.)">
큰 아들 亨南은 26세 때인 임술년에, 둘째 振南은 2년 뒤인 갑자년에 태어난다. 백광훈은 둘째 아들이 태어나던 갑자년에 마침내 진사시에 급제한다. 하지만 진사시에 급제한 갑자년에 정작 백광훈은 擧業을 포기하고 만다. 이러한 앞 뒤 사정을 헤아리건대 「용강사」는 바로 앞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서울 생활에 한참 갈등을 겪으며 낙향을 결심하고 있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떠날 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말을 배워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도 갑자년에 맏아들 형남이 세 살이 되는 사정을 헤아리면 다소 시적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시 속의 정황과 그런대로 맞아 떨어진다. 이런 전후 사정을 추찰컨대, 논자는 백광훈의 「용강사」가 28세 나던 갑자년의 작품으로 보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한편 「용강사」의 창작 배경에는 또 다른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광훈과 최경창은 어릴 적 함께 이후백에게서 시를 배웠고, 17세 때 伯氏를 따라 서울로 와서 함께 梁應鼎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막역의 우정을 나누었다. 「용강사」는 최경창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李少婦詞」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용강사」의 23구 '不向傍人道心事'가 「이소부사」의 25구에 그대로 나오고, 「용강사」의 11구 '去時在腹兒未生'이 「이소부사」 33구에서는 '當時未生在腹兒'로 반복된다. 또 시간 배경을 9월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두 작품이 일치한다. 이러한 相似는 두 작품이 서로 모종의 상호 관계 아래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었음을 시사한다.
< 결혼 이후 최경창과 백광훈이 서울에 함께 머물렀던 것은 대개 이 시기와 42세 나던 1578년 봄 상경한 이후 1580년 봄 최경창이 關西로 벼슬살러 갈 때까지의 시기이다. 그 전후로는 최경창은 북변으로 남쪽으로 고을살이를 전전했고, 백광훈은 실의의 낙향 등으로 길이 늘 엇갈렸다. 『옥봉집』에는 최경창을 그려 지은 시가 20수 넘게 실려 있다. 하지만 1581년 2월에 백광훈은 차남 振南을 해남 윤씨에게 장가 보냈음을 상기할 때, 뱃속에 아이 운운하며 아버지란 말을 배운다고 말하는 정황은 아무래도 「용강사」의 창작 시기를 1564년, 갑자년 쪽으로 내려잡게 하는 유력한 단서가 된다. 40대에 지어진 작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시 속의 정황은 허구적 설정이 되어 시적 긴장이 현저히 감쇄된다.>
최경창의 「이소부사」는 멀리 시아버지를 뵈러 떠난 남편이 불의의 변을 당해 끝내 돌아오지 못하자 뱃속에 든 자식과 함께 죽고 만 양씨 집안 이소부의 실제 사건을 제재로 시화한 작품이다. 정황으로 보아 최경창이 당시 실제 상황을 목도하고 그녀의 애틋한 사랑을 형상화 한 「이소부사」를 먼저 지었고, 이를 본 백광훈이 고향에서 자신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떠올려 「용강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제가 가능하다면,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끝내 죽음으로 치닫고 만 이소부의 이야기는 백광훈의 내면에 상당한 파문을 던져 주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백광훈은 「용강사」를 지은 후 낙향의 결심을 굳힌 듯 하다. 서울 생활에서 느낀 고립무원의 절망감도 적잖게 작용했을 터이다. 그의 과거 포기 이유는 당대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도 무관치 않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마침내 백광훈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감격이 자못 컸던 듯 문집에는 귀향 도중 지은 시가 몇 수 남아 있다.
< 『옥봉집』에는 벗의 歸鄕 혹은 還鄕에 즈음하여 지어준 시가 유난히 많다. 「贈友南還」, 「贈鄕僧水澄」, 「送羅仲孚解官歸鄕」, 「次李內翰仲高贈澄歸山」, 「送文仲郁還鄕二十韻」등의 작품이 그것인데, 모두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는 벗들을 전송하며 고향 생각에 젖는 내용이다. >
먼저 「還鄕路中」이다.
호서길 가고 나면 호남길인데
천리 산하에 병든 몸일세.
낡은 여관 등불 없이 비바람 치는 밤
지나온 반평생이 옛 사람에 부끄럽다.
湖西路盡湖南路 千里山河一病身
古店無燈風雨夜 半生形影愧前人
얼마나 손꼽았던 귀향 길인데, 막상 이룬 것 없는 발길은 무겁기 짝이 없다. 길은 왜 이다지 멀고도 고달프냐. 호롱불 하나 없는 낡은 여관 방, 창밖에선 비바람이 울부짖는다. 주마등 같이 스쳐가는 반평생을 떠올리니 이런 인생도 있나 싶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몸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고향 땅에 다달아 멀리 월출산이 보이자, 낙담은 두근대는 설렘으로 바뀐다. 「到女院望月出山」이란 작품이다.
서울 땅 나그네로 두 해 떠돌 땐
꿈에 뵈던 고향 산 각별했었지.
오늘에 진면목을 만나고 보니
꿈일까 걱정되어 고개를 드네.
二年辛苦客秦城 夢見鄕山別有情
今日却逢眞面目 擧頭猶 夢中行
천리 길, 고향을 두 해 만에 돌아온다. 女院에 이르니 먼 눈에 자욱히 월출산이 보인다. 떠돌이 신세로 꿈에서만 자로 뵈던 산. 월출산 그 너머가 고향 집이다. 설렘을 가눌 길 없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 고향 산을 마주 하다니 이 진정 꿈은 아닐 것인가. 타향을 辛酸으로 떠돌아 본 자만이 먼 눈에 짚히는 고향 산의 두근거림을 알 수가 있다. 또 「回鄕」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 길 아득타 몇 천리더뇨
고향 땅 돌아오니 변함없구나.
내 얼굴 변했다고 괴이타 마라
타향 땅의 하루는 일년이란다.
江海茫茫路幾千 歸來隣曲故依然
兒童怪我容顔改 異地光陰日抵年
江海 사이 아득한 길을 얼마나 헤맸던가. 돌아와 안기고 보니 고향만 세월이 빗겨 지나 간 모양이다. 동네 꼬마들은 그새 낯이 설어 긴가 민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타향서 보낸 날이 손을 꼽아도, 몇 해가 지난 듯이 까마득하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란 말은 고향 잃은 길손의 푸념일터이다.
< 이 시는 유명한 賀知章의 「回鄕偶書」, "젊어 고향 떠나와 다 늙어 돌아오니, 사투린 그대론데 터럭만 세었구려. 아이들 쳐다봐도 알아보지 못하고, 어디서 온 손이냐고 웃으며 묻는구나. 少小離鄕老大回, 鄕音無改 毛衰. 兒童相見不相識, 笑問客從何處來"를 환골한 것이다.>
다음 「巴山夜話」는 그렇듯 그리던 아내와 재회한 후,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며 지은 시다.
어드메서 헤어져 괴로이 그렸던가
파산의 가을 비를 밤 깊어 들었더니.
서창에 등불 밝혀 얘기할 줄 알았으랴
옛 절 종소리에 새벽 구름 이는데.
何處離君苦憶君 巴山秋雨夜深聞
那知共話西窓燭 古寺殘鍾又曉雲
사실 1구의 '君'이 벗을 말하는지 아내를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시 어디에도 고향에 돌아와 아내와 밤을 새우며 얘기하고 있는 정경임은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파산의 밤비는 당나라 李商隱의 「夜雨寄內」에서 따온 것이다.
< 그 시는 이렇다. "올 기약 그댄 묻고, 돌아갈 기약 없어, 파산에 밤비는 가을 못에 넘치누나.언제나 서창 등불 함께 심지 자르며, 파산 밤비 내리던 때 그때 얘길 해보나.(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剪西窓燭, 却話巴山夜雨時.)" 3구에 '西窓燭'이 위 백광훈의 시에도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2구의 '巴山夜雨'의 자리에는 '巴山秋雨'를 놓았다. 백광훈의 위 시는 이상은의 시를 모르고 읽게 되면 그저 벗에게 준 시로 읽기 쉽다. 이후 \'파산의 밤 비\'는 멀리 객창에서 고향집의 아내를 그리는 마음을 상징하는 의미를 띄게 되었다. 최근의 연구에서 위 시가 아내가 죽은 뒤에 지은 작품이며, 따라서 벗에게 준 시로 보아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으나, 전통적 독법은 기내시로 보아 왔다. 조운의 시조 「안해에게」는 "새로 바른 窓을 닫고 수수들을 까는 저녁/ 요 빗소리를 鐵窓에서 또 듣나니/ 언제나 등잔불 돋우면서 이런 이약 할까요."라 한 것을 보아도 이러한 영향이 감지된다.
赤貧의 생활은 낙향 후에도 더욱 가중되었던 듯하다. 31세 나던 정묘년의 기사는 "공의 거처가 親庭과 80리 떨어져 있었는데, 늘 아침 저녁으로 定省치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비록 하인이나 말을 빌리더라도 다달이 꼭 찾아뵈었고, 하인을 보내 안부를 여쭙는 것을 한 달에 세 번으로 정식을 삼았다"고 적고 있다.
< 『옥봉집』 160면 : "公所居, 去親庭八十里. 嘗以不能朝夕定省爲恨, 雖借奴借騎, 逐月必覲. 替奴問安者, 一朔以三巡爲定式.">
또 「長興地買基田得地主助田價」의 1,2구에서는 "어버이 떠나 멀리 삶은 춥고 주려서이니, 그리는 정 깊건만 베풀 길이 없어라. 離親遠寓爲寒飢, 狐兎情深計莫施"라는 시를 지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 이 작품은 제목에서 보듯 땅 주인의 도움을 받아 싼 값에 부모님 집 앞의 텃밭을 사고 나서 그 기쁜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이후 36세 때인 임신년(1572), 백의로 제술관에 선발되어 접빈의 행차에서 詩名을 드날렸고, 40세 이후 여러 번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다가, 어려운 집안 형편을 못 이겨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벼슬이래야 고작 참봉의 미관말직이었다. 아내 정씨는 약질로 병치레가 잦았던 듯, 이 시기 서울서 보낸 편지에는 아내의 병을 염려하는 내용이 잇달아 보인다.
45세 때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네 어머니가 여러 날 唐 을 앓는다한다. 오랜 병을 앓던 사람이 이런 증세까지 얻게 되니 그 괴로움이 어떠하겠니? 근심스럽고 염려되는구나"
< 「答亨南振南書」辛巳, 『옥봉집』 151면 : "連得書, 爲尉. 但見兄主簡, 汝母氏累日患唐 云. 久病之人, 又得此證, 其苦如何. 悶慮悶慮.">
라 하였고, 이듬해 형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편지를 받고 네 어머니의 증세가 여태도 깊은 줄을 알았다. 어리고 약한 여러 자식들이 집안 가득 신음하고 있을텐데, 네가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떻겠니? 이게 모두 내가 하늘에 죄를 얻어 복이 없는 까닭이다.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答亨南書」, 『옥봉집』 153면 : "見書, 知汝母氏證體, 尙爾沈綿. 稚弱諸兒, 呻吟滿室. 念汝獨處, 何以爲心? 是皆吾獲戾于天, 不福之致. 痛哉痛哉.">
라 하여, 아내의 깊은 병을 염려하고 있다. 둘째형에게 보낸 편지에도 "다만 집사람이 또 학질에 걸렸다고 하니 정신이 산란스러워 나는 듯 떨쳐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데 병든 아내를 위해서라도 자식들을 머물려 가르쳐 주셔서 그 마음을 위로해 주십시오. 진남이가 왔길래 집사람의 병세를 자세히 물어 보니, 날로 더 위중해 가는 듯 합니다. 돌아가는 말을 얻게 되면 내려가려고 삼가 애쓰고 있습니다"
< 「答仲氏書」, 『옥봉집』 154면 : "但室人又得唐 , 心神散亂, 卽欲奮飛而不得也.....伏願爲病妻, 勉留敎督, 以尉其心. 大望大望. 振兒來, 細問妻證, 若緊重日甚. 則得回馬, 下歸伏計." 라고 하였다. >
백광훈은 이렇듯 다정다감한 시인이었다. 특히 그의 아내에 대한 정은 실로 애틋한 바가 있다. 첫 아내를 병으로 잃었던 아픈 경험이 있던 터에,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얹혀 사는 처지, 그나마 늘 병치레를 하는 약질의 아내에 대한 안스런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져 살 수 밖에 없던 형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확인한 것처럼 「용강사」는 백광훈이 생계의 방도를 마련키 위해 한양에 머물던 시기 고향의 아내를 그리며 지은 思婦歌다. 물론 아내에게 주기 위해 쓴 것이기 보다는 아내의 입장에서 쓴 작품이다. 「용강사」는 당시 성행한 악부체 한시의 棄婦 모티프를 관습적으로 반복한 작품이 아니다. 작품의 주제 또한 일신의 영달에 눈 먼 나머지 가족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가장에 대한 비판일 수는 없다고 본다.
한시는 관습성이 강한 보수적인 장르이다. 더욱이 여성 정감을 노래하고 있는 한시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용강사」의 경우처럼 관습성의 코드로만 읽을 때 심각한 오독으로 이어질 염려가 있는 작품도 있다. 본고는 「용강사」를 단순히 여성 정감의 입장으로만 읽어 작품의 본의에서 멀어진 기왕의 편향적 독법을 뒤집어 읽음으로써 작품의 本旨에 다가서려 하였다.
「용강사」는 문학적 형상화에서 뛰어난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고, 아울러 관습적 모방을 벗어나 자신의 현실 삶을 녹여 내는 성과를 이룩한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판단되는 최경창의 「李少婦詞」나, 이 작품과 연관지어 김만중이 높이 평가한 바 있는 李植의 「挽沈熙世妻」와 같은 작품들은 여성의 삶을 악부풍의 필치로 노래한 작품들이다.
< 김만중은 『서포만필』하에서 "「十五嫁沈郞挽歌」는 크게 악부의 풍미가 있다. 전배의 「이소부애사」가 비록 청려하나, 담긴 뜻이 깊고 길며, 가락이 질탕함은 여기에 미치지 못함이 많다. (十五嫁沈郞挽歌, 大有樂府風味, 前輩李少婦哀詞雖淸麗, 意致之淵永, 節奏之跌蕩, 不及多矣.)"고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 내용은 沈熙世의 아내인 숙부인 朴氏의 일생을 기려 예찬한 내용인데, 후반부에 東隣老女와 西家娘子를 대비한 악부풍의 장치를 두어 주제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관념적 여성상이 아닌, 실제의 인물과 상황을 노래하되 악부의 가락으로 서정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을 아울러 살펴, 이 시기 여성의 삶을 노래한 한시의 특징적 국면을 해명하는 것은 계속되는 과제로 남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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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저, 홍인표 역주, 『서포만필』, 일지사, 1987. 3-419면.
김종서, 「옥봉 백광훈 시 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1994. 3-105면
박영민, 「사대부 한시에 나타난 여성정감의 사적전개와 미적특질」, 고려대 박사논문, 1998. 3-234면.
이혜순, 「여성화자 시의 한시 전통」, 『한국한문학연구』 학회창립20주년 기념특집호, 한국한문학회, 1996, 21-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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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 태학사, 1999. 3-776면.
최낙원, 「옥봉 백광훈의 한시 연구」, 단국대 석사논문, 1986. 3-9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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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興의 亭· ·臺』, 장흥문화원, 1998. 3-175면.
[핵심어] 옥봉, 백광훈, 용강사, 寄內詩, 여성화자, 學唐風,
Baek Kwang-Hun\'s白光勳 "Yongkangsa龍江詞"
as a Kinaysi寄內詩
Jung, Min(HanYang univ)
Baek Kwang-Hun is one of the leading poets in the middle of the Chosun dynasty. one of his works, "Yongkangsa" has generally known as a lamentation of a woman complaining her abandoned life by her husband and his selfishness. However, that is wrong understanding caused by people who generalized this as one of those folk style poems regarding the popularity of the style around the time it was written, but they didn\'t give enough consideration about its writer. Sino-Korean poetry is inherently conservative genre based on the customs of its society. Moreover, when it comes to describing women\'s feeling, these characteristics of the genre become even more prominent. However, trying to understand one\'s poem only based on typicalities of its time can lead readers to serious misunderstanding, as it did in the case of Yongkangsa.
There are many of his works describing man\'s loneliness and homesickness far away from his family and hometown. I studied his other works for this essay to go over family love which was largely ex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