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시(寄內詩)의 맥락에서 본 백광훈의 「용강사(龍江詞)」

2016. 1. 17. 03:37

 

 

 

 

 

기내시(寄內詩)의 맥락에서 본 백광훈의 「용강사(龍江詞)」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장흥타임스 기자 webmaster@jhtimes.net

 

기내시(寄內詩)의 맥락에서 본 백광훈의 「용강사(龍江詞)」(상)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목차」


1. 머리말
2. 「용강사」의 독법
3. 「용강사」의 창작 시기와 주변 정황
4. 맺음말

[국문요약]

   백광훈의 「용강사」는 그동안 남성들의 이기적인 태도로 인해 버림받은 여성이 남편을 향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로 이해되어왔다. 당시 유행한 민요풍 한시의 맥락에서 관습적으로 읽은 결과다. 한시는 관습성이 강한 보수적인 장르지만, 「용강사」의 경우처럼 관습성의 코드로만 읽을 때 심각한 오독으로 이어질 염려가 있는 작품도 있다. 「용강사」는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기내시(寄內詩: 객지의 남편이 고향의 아내에게 보내는 시)의 성격을 띠는 작품이다.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 대한 미안한 감정의 토로가 시인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한 핵심 주제다. 용강(龍江)은 자신의 고향 앞으로 흐르는 용호(龍湖)를 우의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표현 방식은 중국의 악부(樂府)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내용은 관습적 주제를 반복하지 않고 자신의 실제 삶을 녹여냈다. 백광훈의 작품 속에는 객지에서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가족애를 토로한 시들이 적지 않다. 백광훈은 조선 중기 시단을 이끈 뛰어난 시인이다. 낭만적인 시풍을 추구하여 서정적 가락에서 아주 우수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그의 문학 속에는 남도(南道)의 애틋한 정서와 리듬이 살아 있다.

1. 머리말

   寄內, 혹은 贈內詩란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시다. 귀양지나 객지에서 고향의 아내를 그리며 지은 것이 많고, 때로는 함께 살며 평생 고생만 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은 것도 있다. 唐詩에는 李商隱의 「夜雨寄內」를 비롯하여, 白居易의 「贈內」와 같은 작품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우리 역대 문집 속에도 기내, 혹은 증내시는 지속적으로 창작되었다.
이 글은 백광훈의 「龍江詞」를 寄內詩의 맥락에서 살펴보고, 객지에서 고향과 가족을 그리며 지은 그의 작품들을 함께 읽음으로써, 그의 시에 나타난 가족애의 정서를 아울러 검토키로 하겠다. 백광훈은 조선 중기 학당풍을 선도했던 삼당시인의 한 사람이다. 낭만적 당시풍을 배워 서정적 가락에서 빼어난 성취를 보여준 그의 한시에는 보기 드물게 南道唱의 애틋한 情恨과 구성진 가락이 절절이 배어 있다.


   한시에서 여성정감의 표출은, 특히 창작 주체가 남성일 때 관습성을 띠는 것이 일반이다. 많은 경우 고악부풍의 버림받음, 기다림, 그리움을 주조로 하는 관념적 주제의 복제로 나타난다. 이때 시 속의 여성은 실존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낭만성을 제고키 위한 문학적 장치거나, 시인 자신의 정서를 가탁·여과 또는 교훈적 의미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편적 성격을 띤다. 따라서 시적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여 남녀의 애정 문제를 이야기하거나, 여성의 삶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그리고 있는 경우에도, 그 형상은 구체적 실재로 다가오지 않고 다분히 관념화된다.


   조선 후기로 이행하면서 여성의 실존적 삶은 시인의 붓끝에서 비로소 핍진한 형상을 얻는다. 하지만 조선 전기 한시의 목소리는 採蓮曲·宮詞 風의 낭만적 사랑 노래 아니면, 관념화된 妾薄命·征婦怨 類의 棄婦 모티프의 되풀이일 뿐이다. 이들 시 속의 여성들은 중국 고대의 여성으로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시공이 진공화되어 있다. 상황 또한 개연성에 입각한 관습적 설정일 뿐이어서, 거기서 특정 개인의 구체적 정황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16,7세기에 성행한 학당풍은 중국 악부시의 擬作을 더욱더 부추겼다. 이는 갈수록 도를 더해 나중에는 김창흡의 비판대로 심하게는 百家一套, 千篇一律의 모방 복제로 치닫고 만다. 하지만, 학당풍의 출발점에 서있는 삼당시인의 시에서도 단순히 중국 악부시풍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당대 인물과 사실에 입각한 자기화 과정의 추구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 정민, 「16,17세기 학당풍에서 낭만성의 문제」,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태학사, 1999) 66면에서 이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 좋은 예의 하나가 이 글에서 읽으려고 하는 백광훈의 「龍江詞」다.


2. 「용강사」의 독법

   「용강사」는 앞선 여러 연구자들이 거론한 바 있다. 임형택은 "봉건적 질곡 속에서 고달픈 여성의 처지를, 한 여자가 자기 신세를 술회하는 형식으로 엮은 것"이라 하고, 벼슬자리에 연연한 나머지 처자식을 불고하는 남편을 탓하는 뜻을 담은 작품으로 읽었다. 나아가 "봉건사회 여성들은 남자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처지에, 남성들의 출세주의적 생활태도 및 인간애의 망각으로 인해서 삶이 무한히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을 짚어냈다. < 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 하, 116면(창작과비평사, 1992) 참조.>


   이혜순은 "백광훈의 「용강사」도 「첩박명」과 마찬가지로 여성화자가 버려진 자신의 신세를 독백체로 자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보고 처자를 외면하고 벼슬에 집착하는 남편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었다. 또한 님에 대한 여성화자의 비판의식이 대사회적인 것으로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고 보아, 남성작가와 남성으로 이루어진 독자의 일치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해했다.< 이혜순, 「여성화자 시의 한시 전통」, 『한국한문학연구』 학회창립20주년 기념특집호(한국한문학회, 1996), 27면.>


   박영민에게서도 이러한 시각은 지속된다. 연구자는 이 작품에서 자식을 방치하는 무정한 부정, 가족을 저버리는 무책임한 가장에 대한 원망을 읽는다. 남편은 "'집을 떠남으로써 가족을 비극에 빠뜨리는 자" '이고, 그는 금은보화나 부귀를 바라고 부질없는 헛된 꿈을 쫓아 가족도 버리는 가여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 박영민, 「사대부 한시에 나타난 여성정감의 사적전개와 미적특질」(고려대 박사논문, 1998), 83-86면 참조.>


   대개 이러한 관점은 논자마다 조금씩 다른 맥락에서 나온 것이긴 해도 대체로 「용강사」를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점은 일치한다. 실제로 조선시대 여성의 삶이 남성들의 출세주의적 생활태도 및 인간애의 망각으로 인해 무한히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또 작품 속에 그려진 여성의 목소리를, 버려진 자신의 신세에 대한 독백체의 자탄으로 읽거나, 여성화자의 비판의식이 대사회적인 것으로 확대되지 않았다고 본 것은 어느 일면에서 타당한 지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용강사」를 부귀권세에 대한 부질없는 헛된 꿈을 쫓아 가족을 비극에 빠뜨리는 무책임한 가장의 출세주의적 생활태도를 여성의 시각에서 제시한 작품으로 읽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버려진 자신의 신세에 대한 독백체의 자탄에 비중을 두어 읽는 것이 적절한가? 다른 방식의 읽기는 없을까? 뒤집어 읽으면 어떻게 읽히는가? 이 글은 이런 단순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백광훈의 한시 중에는 「西樓篇」「西臺篇」「東郭美人篇」 같이 전형적인 樂府題의 문법에 충실한 작품으로 버림받고 기다림에 지친 여인의 처지를 관습적으로 노래한 작품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용강사」는 이들 작품과 다르다는 것이 논자의 판단이다. 먼저 작품을 본다.

저는요 용강 어귀 살고 있는데
날마다 문 앞에는 강물 흘러요.
강물이 흘러 흘러 쉬임이 없듯
님 그리는 제 마음도 끊임없지요.
9월이라 강변엔 무서리 찬데
갈대꽃 희게 피고 단풍잎 붉네.
줄지어 기러기는 북에서 와도
서울 계신 님에게선 편지가 없네.
누에 올라 달 보시며 괴로우시리
이 내 몸 강 위 산에 오르게 하네.
가실 제 뱃속에 있던 아이가
이제는 말도 하고 죽마 타고 다니누나.
다른 아이 따라 배워 아버지라 부르지만
만리 밖 네 아버지 그 소리 어이 듣나.
인생의 궁달은 하늘에 달렸는데
슬프다 괴로이 헛된 세월 보내네.
베틀에 비단 짜 겨울 옷 지을만 하고
강 위 몇 뙈기 밭 추수할 수 있지요.
집에서 마주할 젠 가난해도 기뻤거니
금은을 두른대도 귀하다 할 것 없네.
아침에 까치가 뜰 앞 나무 우짖길래
문 나서 강가 길을 자주 바라보았지.
곁의 사람에게도 마음 속 일 말 못하고
내 낀 물결 애를 끊다 날이 또 저무누나.
붉은 굴레 금 고삐 한 어느 곳 낭군인지
말이 힝힝 울더니만 서쪽 집에 드는구나.

妾家住在龍江頭 日日門前江水流
江水東流不曾歇 妾心憶君何日休
江邊九月霜露寒 岸葦花白楓葉丹
行行新雁自北來 君在京河書未廻
秦樓望月幾苦顔 使妾長登江上山
去時在腹兒未生 卽今解語騎竹行
便從人兒學呼爺 汝爺萬里那聞聲
人生窮達各在天 可惜辛勤虛度年
機中織帛寒可衣 江上仍收數頃田
在家相對貧亦喜 銀黃繞身不足貴
朝來鵲 庭前樹 出門頻望江西路
不向傍人道心事 腸斷烟波日又暮
紅羈金絡何處郞 馬嘶却入西家去

   7언 26구에 달하는 긴 시다. 처음 네 구에는 용강 어귀에 사는 여인이 집 앞을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임을 향한 그칠 뉘 없는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어지는 5구에서 10구까지는 9월, 가을의 끝자락에서 추운 겨울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아무 소식없는 임에 대한 막막한 기다림을 노래한다. 秋收冬藏, 남들은 가을걷이를 끝내고 겨울의 안온한 휴식으로 들어가는데, 정작 그녀는 임의 소식도 몰라 애를 태운다. 임도 고향을 그려 누각에 올라 저 달을 보시며 괴로워 하시겠지. 이런 생각에 그녀는 임이 바라보고 계실 그 달을 마주 보려 강 위 산으로 올라가곤 한다.
다시 17구에서 20구까지가 이어진다. 길쌈하여 옷 짓고, 밭 갈아 밥 먹어도 함께 있을 땐 기쁘기만 했는데, 이제 멀리 헤어져 있자니 금은을 몸에 두른대도 하나도 기쁘지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벼슬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어서 빨리 돌아오기만 해달라는 간청이다.
21구에서 26구로 마무리했다. 까치 울음소리에서 그녀는 임이 돌아오실 희망을 읽었다. 두근대며 혼자 끙끙 앓다가 또 하루가 그렇게 하릴없이 저문다. 저 멀리 근사한 차림으로 말 위에 걸터앉은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인다. 그녀는 숨이 멎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저만치서 길을 꺾어 다른 집으로 들어가버리고 만다.


   이 시의 문학적 우수성은 그 형상화의 솜씨에 있다. 집 앞을 쉼 없이 흘러가는 용강의 물과 임 그리는 자신의 마음을 한데 잇대어 놓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바로 9월의 霜露와 흰 갈대, 붉은 단풍의 색채를 앞세워 "書未廻'의 안타까움으로 내달았다. 다시 '秦樓望月'로 서울 계신 임 또한 가족을 그려 '苦顔'을 가누지 못할 것이기에, 이 생각이 자신으로 하여금 '江上山'을 늘 오르게 한다고 해서, 임에 대한 원망에 앞서 애틋함을 실었다.


   < 이 구절의 해석에서 임형택은 "다락 마루 올라서 둥근 달 바라보며 얼굴 찌푸리기 몇몇 번이었던고? 이내 몸 언제까지 언제까지 강가 산마루 올라가야 하나요?"로 옮겼고, 박영민은 "다락마루에서 달을 바라보며 몇번이나 얼굴을 일그러뜨렸던가? 첩으로 하여금 길이 강가 산에 오르게 할건가요"로 옮겼다. 9구 " '多苦顔" 의 주체를 아내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이백 「關山月」의 9,10구 "戌客望邊色, 思歸多苦顔"에서 따왔다. " 秦樓望月"의 주체는 서울의 남편이다. 남편의 "幾苦顔"을 떠올려 그녀는 자꾸만 그 달을 보려고 "江上山\"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이렇게 보아야 호응이 온전해지고, 무엇보다 '使妾\'의 '使\'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일반적으로 '秦樓'는 여성적 공간을 가리키므로 주체를 여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진루가 여성적 공간이기는 해도 일반적으로 妓院의 뜻으로 쓰였지 규방의 뜻으로 쓰인 예가 없다. 또 '秦'에는 '서울'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주체는 남편이 되어야 마땅하다. >


   시상의 전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고저완급이 절로 절주를 이루었다.
11구에서 14구까지는 앞서 고조된 감정을 한번 추슬러 원망을 토로하는 대신, 아버지를 한번도 못본 채 어느덧 아버지란 말을 배울만큼 자란 어린 자식 이야기로 방향을 돌렸다. 이른바 聲東擊西의 수법이다. 그리고 나서 15,6구에서는 窮達在天임을 알면서도 '辛勤虛度'하는 남편을 향한 원망을 비췄다. 17구 이하에서는 다시 정을 거두어 경으로 추스렸다. 까치 울음에 두근대며 기다린 하루가 보람없이 저무는 것을 이웃으로 드는 '紅羈金絡'에다 슬쩍 가탁하였다.


   읽고 나면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애절한 심사가 잡힐 듯 그려진다.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그녀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읽자면 작품의 주제를 부귀권세의 헛된 꿈을 쫓아 가족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남편에 대한 원망과, 버려진 자기 신세에 대한 자탄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怨望 보다는 재회에 대한 願望이, 자탄에 앞서 남편에 대한 안타까운 기다림의 정서가 더 강하게 묻어난다.
그녀에게 서울 계신 임은 무정하고 무책임한 가장이 아니다. 비록 편지는 없어도, 그녀는 남편이 서울에서 달 보며 가족을 그려 괴로워 할 것을 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애쓰는 남편을 동정하고 연민한다. 가난해도 기뻤던 지난 날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이 기다림 속에 저물어도 재회의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앞에서 「용강사」에 대해 비슷한 시각을 견지한 것은 시인의 상황 문맥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고, 관념적 여성화자시의 맥락으로 읽은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 이에 반해 최낙원은 「옥봉 백광훈의 한시 연구」(단국대 석사논문, 1986), 38면에서 "이 작품이 비록 작자가 여인의 입장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라지만, 다분히 작자 자신의 자전적인 면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고달픈 객지의 생활에서도 그 자신이 항상 고향에 있는 처자를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을 바탕으로 그는 고향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을 묘출해냈던 것"이라고 적절히 지적한 바 있다. 김종서도 「옥봉 백광훈 시 연구」(연세대 석사논문, 1994), 108면에서 같은 취지의 언급을 남겼다.>


   사실 평범하게만 본다면 이런 독법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백광훈의 「용강사」는 좀더 섬세한 고려가 요구되는 작품이다. 시인 개인의 눈물겨운 가족사와 젊은 날의 갈등이 그 갈피에 서려있는 까닭이다.
우선 제목부터 문제다. '용강사'는 현대어로 옮기면 '용강의 노래' 쯤 된다. 용강은 실재하는 구체적 지명이다. 또 시에서 제시한 상황은 당나라이거나 송나라이거나, 아니면 중국이거나 조선이거나 아무래도 관계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점에서 「용강사」는 「첩박명」류의 관습적 악부체시와는 다르다.


   용강은 어디인가? 용강은 龍湖 또는 汭陽江으로 불리는 전라도 장흥 땅을 흐르는 탐진강의 지류다. 실제 백광훈의 고향집 앞을 흘러가던 강물이다. 백광훈의 『옥봉집』속에는 龍湖와 汭陽江을 노래한 한시가 많다. 지금도 장흥의 富春亭 아래 물가 바위에는 백광훈이 초서로 쓴 '龍湖' 두 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이 용호가 바로 용강이다.

< 『文林고을 長興』(장흥문화원, 1999), 30면에 관련 내용이 있고, 이밖에 『長興의 亭· ·臺』(장흥문화원, 1998)에는 관련 시문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아내가 살고 있던 곳은 장흥의 용호가 아니라 해남군 옥천면 원경산 아래였다. 그러므로 용강이 바로 용호라 하더라도 아내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두 곳의 거리는 불과 몇 십리 떨어져 있지 않고, 용호가 그에게 고향을 환기시키는 어휘임을 떠올리면 작품 속의 설정을 크게 문제삼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직접 용호라 하지 않고 용강이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이 시가 풍기는 악부풍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용호라 하여 고향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임을 명백히 할 경우 시의 함축은 약해지고 시는 금세 시인 자신의 신세 타령으로 전락하고 만다. 용강이라 하면 공간 배경은 구체적 구상성보다는 추상성을 띠게 되어 시의 행간을 그만큼 더 넓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그는 몰취미하게 용호를 직접 문면에 드러내는 대신, 용강이라 하여 기실은 용호를 가리키는 것임을 암시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 시는 백광훈이 과거를 준비하며 서울에 머물던 시기에 지은 작품이다.
시속의 여인은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다. 그는 당시 출세에 눈이 멀어 고향의 아내를 버리고 서울 생활의 도락에 빠져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는 가세를 일으켜 보려고, 생계의 도리를 마련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허구헌 날 고향 생각만 하며, 재회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아니 그는 일생을 따라 다닌 곤궁 속에서 서울 생활의 도락에 빠질 겨를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요컨대 「용강사」는 고향에서 마냥 자신이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아내의 심경을 자신의 입장에서 헤아려 본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고향의 아내이지만 발화자는 시인 자신이다. 이런 특수성을 감안하고 시를 다시 읽으면 이 시의 독법은 그저 관념적 여성화자로 읽을 때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14구 '汝爺萬里那聞聲'의 원망은 애비 노릇도 못하는 자신을 향한 자책이 되고, 16구 '可惜辛勤虛度年'의 탄식은 이룬 것 없이 계속 머물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낭패감을 스스로 못 견딘 토로가 된다. 집에서는 가난해도 기뻤다는 말은 기실 아내의 말이기 보다 외롭고 고단한 객지 생활에 지친 시인 자신의 독백이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얼굴도 못 본 자식 생각, 앞길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서울 생활, 살길이 막막한 생계와 무능력한 家長의 슬픔, 이런 착잡한 심경들이 시의 구절구절 마다 절절이 배여 있다.


  「용강사」는 아내의 입장에서 출세에 눈이 멀어 가족을 비극에 빠뜨린 출세지상주의적 가장의 행태를 제시한 작품으로 읽을 수는 없다고 본다. 버려진 자신의 신세에 대한 독백체의 자탄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 아내는 이런 심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부족한 남편의 못난 가장 구실을 절절히 고백한 노래로 봄이 사실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이 시의 주제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가 아니라, '여보! 미안하오'다.
< 계속>



2004년 04월 23일
장흥타임스 기자의

 

 

 

      

기내시(寄內詩)의 맥락에서 본 백광훈의 「용강사(龍江詞)」(하)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장흥타임스 기자 webmaster@jhtimes.net

 

기내시(寄內詩)의 맥락에서 본 백광훈의 「용강사(龍江詞)」(하)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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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용강사」의 창작 시기와 주변 정황 

 「용강사」는 언제 지어졌을까? 좀더 구체적으로 작품의 창작 시기와 그 주변 정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백광훈은 20세 나던 해 하동 정씨와 결혼한다. 하지만 그녀는 2년 후 자식 없이 세상을 떴다. 24세 나던 해 백광훈은 다시 하동 정씨를 얻어 續絃했다. 이해에 그는 靈巖郡 玉泉面 元敬山 玉峰 아래로 이사한다. 이때 일을 연보는 "대개 집이 가난한지라 영암 땅에서 데릴사위로 지냈다(盖以家貧, 贅居于靈巖地)"고 적고 있다.
< 백광훈의 연보는 『옥봉집』(문집총간 47), 159-167면에 수록되어 있다.>


   재혼을 하면서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던 것이다.
25세 나던 신유년에서 28세 나던 갑자년까지의 기록은 연보에 자세치 않다. 처가에 더부살이하는 처량함과 그럼에도 헤어날 길 없던 가난에서 벗어나려, 그는 서울로 와서 과거 공부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로 올라오며 지은 시 「別家」는 당시 백광훈의 내면을 잘 그려 보인다.

뜬 인생 백년간을 괴로워하며
웃는 얼굴로 처자를 달래었지.
금릉성 아래 와서 올려다보니

흰 구름만 구봉산에 걸려 있구나!

浮生自苦百年間 說與妻兒各好顔
却到金陵城下望 白雲猶在九峯山 

   좋은 낯으로 금세 돌아오마고 가족과 작별했지만 괴롭기만 한 浮生을 먼저 떠올렸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릉성 아래까지 단숨에 이르렀다. 참고 참다 그제서야 구봉산을 돌아보니, 올라올 때 걸려있던 흰 구름이 여태도 그대로 걸려 있는 것이다. 白雲은 제가 무슨 바위라도 되는 양 산 위에 꼼짝 않고 걸려 있는데, 浮生은 왜 이다지도 괴롭게 떠도는가 하는 탄식을 삼켰다. 그 구름은 기실 고향에 남겨두고 온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 「贈朴無競」에서는 고향에 두고 온 그 '白雲'을 두고 "봄바람 서울 길에 불어오더니, 꽃 버들 곳곳마다 흐드러졌네. 흰 구름 하늘가 서성이누나. 나그넨 하릴없이 고개 돌린다.(春風洛陽陌, 何處非花柳. 白雲在天涯, 遊子長回首"라고 노래하여 객지에서 봄을 맞아 고향의 봄 소식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을 얹기도 했다. >
다음 「洛中秋夜」는 서울에서 가을밤에 고향의 아내를 그리며 지은 시다.

이 밤 서루에 가을 생각 스며드니
성근 주렴 내리잖아 이슬이 맑았구나.
한 소리 이십사교 위에 뜬 저 달
강남 땅 그 임은 먼 이별 상심하리.

此夜西樓秋思生 疎簾不下露華淸
一聲二十四橋月 人在江南傷遠情

가을 밤 주렴도 내리지 않고 맑게 맺히는 이슬을 본다. 이십사교 다리마다 달빛은 흐른다. 그 위로 남녘 가는 기러기 울음이 슬프다. 저는 가는데 나는 왜 못 가나. 사랑하는 아내는 멀리 강남 땅에서 이 밤 遠情에 마음 아파하며 날 그려 저 달을 보고 있겠지. 더 뒷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長城道中」에도 떠나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사무친다.

길 위에서 단오를 만나고 보니
지방은 달라도 풍물은 같다.
슬프다 고향집 어린 딸애는
하루 종일 뒤뜰서 혼자 놀겠지.

路上逢重五 殊方節物同
遙憐小兒女 竟日後園中

   길을 가다가 단오의 떠들썩 흥겨운 놀이 마당을 만났다. 매일 제 엄마의 치마 꼬리를 붙잡고 "아빤 언제 와?"하던 딸아이가 풀이 푹 죽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뒤뜰에서 혼자 소꿉놀이를 하고 있을 정경이 떠올라 목이 메이고 말았다.
< 이 시의 제 3구 '遙憐小兒女'는 두보가 안록산의 난 때 포로로 장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州에 있던 가족을 그리며 지은 「月夜」의 제 3구와 꼭 같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밤 州의 달, 규중에서 홀로 보리. 가엽다 어린 딸은, 장안 그리는 그 뜻 모르리. 안개는 귀밑머리 적시고, 달빛은 옥같은 팔에 시리리. 언제나 침상 휘장 기대어, 마주 보며 눈물 자욱 마르게할까? (今夜 州月, 閨中只獨看. 遙憐小兒女, 未解憶長安. 香霧雲 濕, 淸輝玉臂寒. 何時依虛幌, 雙照淚痕乾.)">


   큰 아들 亨南은 26세 때인 임술년에, 둘째 振南은 2년 뒤인 갑자년에 태어난다. 백광훈은 둘째 아들이 태어나던 갑자년에 마침내 진사시에 급제한다. 하지만 진사시에 급제한 갑자년에 정작 백광훈은 擧業을 포기하고 만다. 이러한 앞 뒤 사정을 헤아리건대 「용강사」는 바로 앞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서울 생활에 한참 갈등을 겪으며 낙향을 결심하고 있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떠날 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말을 배워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도 갑자년에 맏아들 형남이 세 살이 되는 사정을 헤아리면 다소 시적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시 속의 정황과 그런대로 맞아 떨어진다. 이런 전후 사정을 추찰컨대, 논자는 백광훈의 「용강사」가 28세 나던 갑자년의 작품으로 보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한편 「용강사」의 창작 배경에는 또 다른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광훈과 최경창은 어릴 적 함께 이후백에게서 시를 배웠고, 17세 때 伯氏를 따라 서울로 와서 함께 梁應鼎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막역의 우정을 나누었다. 「용강사」는 최경창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李少婦詞」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용강사」의 23구 '不向傍人道心事'가 「이소부사」의 25구에 그대로 나오고, 「용강사」의 11구 '去時在腹兒未生'이 「이소부사」 33구에서는 '當時未生在腹兒'로 반복된다. 또 시간 배경을 9월로 설정하고 있는 것도 두 작품이 일치한다. 이러한 相似는 두 작품이 서로 모종의 상호 관계 아래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었음을 시사한다.


< 결혼 이후 최경창과 백광훈이 서울에 함께 머물렀던 것은 대개 이 시기와 42세 나던 1578년 봄 상경한 이후 1580년 봄 최경창이 關西로 벼슬살러 갈 때까지의 시기이다. 그 전후로는 최경창은 북변으로 남쪽으로 고을살이를 전전했고, 백광훈은 실의의 낙향 등으로 길이 늘 엇갈렸다. 『옥봉집』에는 최경창을 그려 지은 시가 20수 넘게 실려 있다. 하지만 1581년 2월에 백광훈은 차남 振南을 해남 윤씨에게 장가 보냈음을 상기할 때, 뱃속에 아이 운운하며 아버지란 말을 배운다고 말하는 정황은 아무래도 「용강사」의 창작 시기를 1564년, 갑자년 쪽으로 내려잡게 하는 유력한 단서가 된다. 40대에 지어진 작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시 속의 정황은 허구적 설정이 되어 시적 긴장이 현저히 감쇄된다.>


   최경창의 「이소부사」는 멀리 시아버지를 뵈러 떠난 남편이 불의의 변을 당해 끝내 돌아오지 못하자 뱃속에 든 자식과 함께 죽고 만 양씨 집안 이소부의 실제 사건을 제재로 시화한 작품이다. 정황으로 보아 최경창이 당시 실제 상황을 목도하고 그녀의 애틋한 사랑을 형상화 한 「이소부사」를 먼저 지었고, 이를 본 백광훈이 고향에서 자신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떠올려 「용강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제가 가능하다면,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끝내 죽음으로 치닫고 만 이소부의 이야기는 백광훈의 내면에 상당한 파문을 던져 주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백광훈은 「용강사」를 지은 후 낙향의 결심을 굳힌 듯 하다. 서울 생활에서 느낀 고립무원의 절망감도 적잖게 작용했을 터이다. 그의 과거 포기 이유는 당대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도 무관치 않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마침내 백광훈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감격이 자못 컸던 듯 문집에는 귀향 도중 지은 시가 몇 수 남아 있다.
< 『옥봉집』에는 벗의 歸鄕 혹은 還鄕에 즈음하여 지어준 시가 유난히 많다. 「贈友南還」, 「贈鄕僧水澄」, 「送羅仲孚解官歸鄕」, 「次李內翰仲高贈澄歸山」, 「送文仲郁還鄕二十韻」등의 작품이 그것인데, 모두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는 벗들을 전송하며 고향 생각에 젖는 내용이다. >
먼저 「還鄕路中」이다.

호서길 가고 나면 호남길인데
천리 산하에 병든 몸일세.
낡은 여관 등불 없이 비바람 치는 밤
지나온 반평생이 옛 사람에 부끄럽다.

湖西路盡湖南路 千里山河一病身
古店無燈風雨夜 半生形影愧前人

   얼마나 손꼽았던 귀향 길인데, 막상 이룬 것 없는 발길은 무겁기 짝이 없다. 길은 왜 이다지 멀고도 고달프냐. 호롱불 하나 없는 낡은 여관 방, 창밖에선 비바람이 울부짖는다. 주마등 같이 스쳐가는 반평생을 떠올리니 이런 인생도 있나 싶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몸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고향 땅에 다달아 멀리 월출산이 보이자, 낙담은 두근대는 설렘으로 바뀐다. 「到女院望月出山」이란 작품이다.

서울 땅 나그네로 두 해 떠돌 땐
꿈에 뵈던 고향 산 각별했었지.
오늘에 진면목을 만나고 보니
꿈일까 걱정되어 고개를 드네.


二年辛苦客秦城 夢見鄕山別有情
今日却逢眞面目 擧頭猶 夢中行

   천리 길, 고향을 두 해 만에 돌아온다. 女院에 이르니 먼 눈에 자욱히 월출산이 보인다. 떠돌이 신세로 꿈에서만 자로 뵈던 산. 월출산 그 너머가 고향 집이다. 설렘을 가눌 길 없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 고향 산을 마주 하다니 이 진정 꿈은 아닐 것인가. 타향을 辛酸으로 떠돌아 본 자만이 먼 눈에 짚히는 고향 산의 두근거림을 알 수가 있다. 또 「回鄕」에서는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 길 아득타 몇 천리더뇨
고향 땅 돌아오니 변함없구나.
내 얼굴 변했다고 괴이타 마라
타향 땅의 하루는 일년이란다.

江海茫茫路幾千 歸來隣曲故依然
兒童怪我容顔改 異地光陰日抵年

   江海 사이 아득한 길을 얼마나 헤맸던가. 돌아와 안기고 보니 고향만 세월이 빗겨 지나 간 모양이다. 동네 꼬마들은 그새 낯이 설어 긴가 민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타향서 보낸 날이 손을 꼽아도, 몇 해가 지난 듯이 까마득하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란 말은 고향 잃은 길손의 푸념일터이다.
< 이 시는 유명한 賀知章「回鄕偶書」, "젊어 고향 떠나와 다 늙어 돌아오니, 사투린 그대론데 터럭만 세었구려. 아이들 쳐다봐도 알아보지 못하고, 어디서 온 손이냐고 웃으며 묻는구나. 少小離鄕老大回, 鄕音無改 毛衰. 兒童相見不相識, 笑問客從何處來"를 환골한 것이다.>
다음 「巴山夜話」는 그렇듯 그리던 아내와 재회한 후,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며 지은 시다.

어드메서 헤어져 괴로이 그렸던가
파산의 가을 비를 밤 깊어 들었더니.
서창에 등불 밝혀 얘기할 줄 알았으랴
옛 절 종소리에 새벽 구름 이는데.

何處離君苦憶君 巴山秋雨夜深聞
那知共話西窓燭 古寺殘鍾又曉雲

   사실 1구의 '君'이 벗을 말하는지 아내를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시 어디에도 고향에 돌아와 아내와 밤을 새우며 얘기하고 있는 정경임은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파산의 밤비는 당나라 李商隱「夜雨寄內」에서 따온 것이다.
< 그 시는 이렇다. "올 기약 그댄 묻고, 돌아갈 기약 없어, 파산에 밤비는 가을 못에 넘치누나.언제나 서창 등불 함께 심지 자르며, 파산 밤비 내리던 때 그때 얘길 해보나.(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剪西燭, 却話巴山夜雨時.)" 3구에 '西窓燭'이 위 백광훈의 시에도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2구의 '巴山夜雨'의 자리에는 '巴山秋雨'를 놓았다. 백광훈의 위 시는 이상은의 시를 모르고 읽게 되면 그저 벗에게 준 시로 읽기 쉽다. 이후 \'파산의 밤 비\'는 멀리 객창에서 고향집의 아내를 그리는 마음을 상징하는 의미를 띄게 되었다. 최근의 연구에서 위 시가 아내가 죽은 뒤에 지은 작품이며, 따라서 벗에게 준 시로 보아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으나, 전통적 독법은 기내시로 보아 왔다. 조운의 시조 「안해에게」"새로 바른 窓을 닫고 수수들을 까는 저녁/ 요 빗소리를 鐵窓에서 또 듣나니/ 언제나 등잔불 돋우면서 이런 이약 할까요."라 한 것을 보아도 이러한 영향이 감지된다.
赤貧의 생활은 낙향 후에도 더욱 가중되었던 듯하다. 31세 나던 정묘년의 기사는 "공의 거처가 親庭과 80리 떨어져 있었는데, 늘 아침 저녁으로 定省치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비록 하인이나 말을 빌리더라도 다달이 꼭 찾아뵈었고, 하인을 보내 안부를 여쭙는 것을 한 달에 세 번으로 정식을 삼았다"고 적고 있다.
< 『옥봉집』 160면 : "公所居, 去親庭八十里. 嘗以不能朝夕定省爲恨, 雖借奴借騎, 逐月必覲. 替奴問安者, 一朔以三巡爲定式.">

   또 「長興地買基田得地主助田價」의 1,2구에서는 "어버이 떠나 멀리 삶은 춥고 주려서이니, 그리는 정 깊건만 베풀 길이 없어라. 離親遠寓爲寒飢, 狐兎情深計莫施"라는 시를 지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 이 작품은 제목에서 보듯 땅 주인의 도움을 받아 싼 값에 부모님 집 앞의 텃밭을 사고 나서 그 기쁜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이후 36세 때인 임신년(1572), 백의로 제술관에 선발되어 접빈의 행차에서 詩名을 드날렸고, 40세 이후 여러 번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다가, 어려운 집안 형편을 못 이겨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벼슬이래야 고작 참봉의 미관말직이었다. 아내 정씨는 약질로 병치레가 잦았던 듯, 이 시기 서울서 보낸 편지에는 아내의 병을 염려하는 내용이 잇달아 보인다.


   45세 때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네 어머니가 여러 날 唐 을 앓는다한다. 오랜 병을 앓던 사람이 이런 증세까지 얻게 되니 그 괴로움이 어떠하겠니? 근심스럽고 염려되는구나"
< 「答亨南振南書」辛巳, 『옥봉집』 151면 : "連得書, 爲尉. 但見兄主簡, 汝母氏累日患唐 云. 久病之人, 又得此證, 其苦如何. 悶慮悶慮.">
라 하였고, 이듬해 형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편지를 받고 네 어머니의 증세가 여태도 깊은 줄을 알았다. 어리고 약한 여러 자식들이 집안 가득 신음하고 있을텐데, 네가 혼자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어떻겠니? 이게 모두 내가 하늘에 죄를 얻어 복이 없는 까닭이다.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答亨南書」, 『옥봉집』 153면 : "見書, 知汝母氏證體, 尙爾沈綿. 稚弱諸兒, 呻吟滿室. 念汝獨處, 何以爲心? 是皆吾獲戾于天, 不福之致. 痛哉痛哉.">
라 하여, 아내의 깊은 병을 염려하고 있다. 둘째형에게 보낸 편지에도 "다만 집사람이 또 학질에 걸렸다고 하니 정신이 산란스러워 나는 듯 떨쳐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데 병든 아내를 위해서라도 자식들을 머물려 가르쳐 주셔서 그 마음을 위로해 주십시오. 진남이가 왔길래 집사람의 병세를 자세히 물어 보니, 날로 더 위중해 가는 듯 합니다. 돌아가는 말을 얻게 되면 내려가려고 삼가 애쓰고 있습니다"
< 「答仲氏書」, 『옥봉집』 154면 : "但室人又得唐 , 心神散亂, 卽欲奮飛而不得也.....伏願爲病妻, 勉留敎督, 以尉其心. 大望大望. 振兒來, 細問妻證, 若緊重日甚. 則得回馬, 下歸伏計." 라고 하였다. >


   백광훈은 이렇듯 다정다감한 시인이었다. 특히 그의 아내에 대한 정은 실로 애틋한 바가 있다. 첫 아내를 병으로 잃었던 아픈 경험이 있던 터에,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얹혀 사는 처지, 그나마 늘 병치레를 하는 약질의 아내에 대한 안스런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져 살 수 밖에 없던 형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확인한 것처럼 「용강사」는 백광훈이 생계의 방도를 마련키 위해 한양에 머물던 시기 고향의 아내를 그리며 지은 思婦歌다. 물론 아내에게 주기 위해 쓴 것이기 보다는 아내의 입장에서 쓴 작품이다. 「용강사」는 당시 성행한 악부체 한시의 棄婦 모티프를 관습적으로 반복한 작품이 아니다. 작품의 주제 또한 일신의 영달에 눈 먼 나머지 가족을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가장에 대한 비판일 수는 없다고 본다.


   한시는 관습성이 강한 보수적인 장르이다. 더욱이 여성 정감을 노래하고 있는 한시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용강사」의 경우처럼 관습성의 코드로만 읽을 때 심각한 오독으로 이어질 염려가 있는 작품도 있다. 본고는 「용강사」를 단순히 여성 정감의 입장으로만 읽어 작품의 본의에서 멀어진 기왕의 편향적 독법을 뒤집어 읽음으로써 작품의 本旨에 다가서려 하였다.


   「용강사」는 문학적 형상화에서 뛰어난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고, 아울러 관습적 모방을 벗어나 자신의 현실 삶을 녹여 내는 성과를 이룩한 작품이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판단되는 최경창「李少婦詞」나, 이 작품과 연관지어 김만중이 높이 평가한 바 있는 李植「挽沈熙世妻」와 같은 작품들은 여성의 삶을 악부풍의 필치로 노래한 작품들이다.
< 김만중『서포만필』하에서 "「十五嫁沈郞挽歌」는 크게 악부의 풍미가 있다. 전배의 「이소부애사」가 비록 청려하나, 담긴 뜻이 깊고 길며, 가락이 질탕함은 여기에 미치지 못함이 많다. (十五嫁沈郞挽歌, 大有樂府風味, 前輩李少婦哀詞雖淸麗, 意致之淵永, 節奏之跌蕩, 不及多矣.)"고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 내용은 沈熙世의 아내인 숙부인 朴氏의 일생을 기려 예찬한 내용인데, 후반부에 東隣老女와 西家娘子를 대비한 악부풍의 장치를 두어 주제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관념적 여성상이 아닌, 실제의 인물과 상황을 노래하되 악부의 가락으로 서정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을 아울러 살펴, 이 시기 여성의 삶을 노래한 한시의 특징적 국면을 해명하는 것은 계속되는 과제로 남긴다.


참고문헌

백광훈, 『옥봉집』, 한국문집총간 47, 민족문화추진회, 1990.
김만중 저, 홍인표 역주, 『서포만필』, 일지사, 1987. 3-419면.
김종서, 「옥봉 백광훈 시 연구」, 연세대 석사논문, 1994. 3-105면
박영민, 「사대부 한시에 나타난 여성정감의 사적전개와 미적특질」, 고려대 박사논문, 1998. 3-234면.
이혜순, 「여성화자 시의 한시 전통」, 『한국한문학연구』 학회창립20주년 기념특집호, 한국한문학회, 1996, 21-45면.
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하, 창작과비평사, 1992. 3-356면
정민,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 태학사, 1999. 3-776면.
최낙원, 「옥봉 백광훈의 한시 연구」, 단국대 석사논문, 1986. 3-97면
『文林고을 長興』, 장흥문화원, 1999. 3-243면.
『長興의 亭· ·臺』, 장흥문화원, 1998. 3-175면.
[핵심어] 옥봉, 백광훈, 용강사, 寄內詩, 여성화자, 學唐風,
Baek Kwang-Hun\'s白光勳 "Yongkangsa龍江詞"
as a Kinaysi寄內詩

Jung, Min(HanYang univ)
Baek Kwang-Hun is one of the leading poets in the middle of the Chosun dynasty. one of his works, "Yongkangsa" has generally known as a lamentation of a woman complaining her abandoned life by her husband and his selfishness. However, that is wrong understanding caused by people who generalized this as one of those folk style poems regarding the popularity of the style around the time it was written, but they didn\'t give enough consideration about its writer. Sino-Korean poetry is inherently conservative genre based on the customs of its society. Moreover, when it comes to describing women\'s feeling, these characteristics of the genre become even more prominent. However, trying to understand one\'s poem only based on typicalities of its time can lead readers to serious misunderstanding, as it did in the case of Yongkangsa.
There are many of his works describing man\'s loneliness and homesickness far away from his family and hometown. I studied his other works for this essay to go over family love which was largely exp



2004년 0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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