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훈, 윤근수, 김성일의 한시

2016. 1. 17. 08:28

 

 

      

백광훈, 윤근수, 김성일의 한시  낙서장

 

2014.08.02. 10:46

 

 

 http://blog.naver.com/jaseodang/220079358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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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광훈(白光勳,1537,중종321582,선조15)은 조선 전기의 시인이다. 자는 창경(彰卿)이고 호는 옥봉(玉峯)이며 본관은 해미(海美)로 전라도 장흥 사람이다. 이후백(李後白), 양응정(梁應鼎), 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배웠으며 임억령(林億齡)과 박순(朴淳)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564(명종19)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시서(詩書)에 몰두했다. 1572(선조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의 추천으로 백의(白衣)의 신분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와 글씨로 사신을 감탄케 하고 시명을 떨쳤다. 1577년 처음으로 선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가 정릉(靖陵예빈시·소격서 등의 참봉을 지냈다.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리었는데, 시의 풍조를 송시(宋詩)에서 벗어나 당시(唐詩)로 혁신하였기 때문이다.

 

 

 홍경사에서 (弘慶寺)

 

전 왕조의 절에 가을 풀이요

남아있는 비에는 학사의 글이다.

천년 세월에 물만 흐르는데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본다.

 

 

秋草前朝寺 殘碑學士文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 (玉峯詩集 卷上)

 

 

    신흠<옥봉시집> 서문에서 백광훈의 시는 읽은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는데, 그는 옛사람이 말한 천지의 맑은 기운을 가슴에 품은 시인이라고 하였다.(申欽, 玉峯詩集序. 白子之詩信乎其爲正音也 試擊節而歎之 則渢渢者宮 鏗鏗者商 讀之者心澈而腸潔 古所云乾坤有淸氣 散入詩人脾者 白子其近之歟.​) 이 시는 충청도 직산현에 있던 홍경사를 지나다가 지은 오언절구로 문()운이다. 허균<국조시산>에서 빼어난 작품(絶唱)’이라고 했고, 홍만종<소화시평>에서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옛사람의 시에 가깝다.’라고 했다. 기구는 절의 내력과 계절감이다. 홍경사는 고려 현종이 행인을 보호하고 죽은 아버지 왕욱을 기리기 위해 지었으나 고려 명종 때 망이망소이의 난에 불 타 없어지고 절터와 비각만 남아 있었다. 가을날 황량한 고려의 절터를 제시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이다. 승구는 남아있는 비각의 갈비(碣碑). 비문은 한림학사 최충(崔冲)이 지었고, 글씨는 백현례(白玄禮)가 썼다. 고려 왕조는 망하고 절도 불 타 없어졌지만 비석만 남아서 그 자취를 보여준다고 했다. 말을 응축시켜 당시(唐詩)의 함축미를 느끼게 한다. 전구는 시상을 돌려서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는 시인의 감상이다. 폐허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비석을 보며 옛 왕조의 영화를 생각하고 천년 세월이 물처럼 흘러갔음을 슬퍼한다. 결구는 시인의 행동이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본다. 흐르는 인생과 세월에 대한 비감을 지는 해와 떠도는 구름에 투사한 것이라 하겠다. 기구와 승구에서 풍경을 정적으로 보여주고, 전구와 결구에서 시인의 감회를 동적인 사물에 부쳐 표현하였는데, 맑고 깨끗하지만 인생에 대한 슬픈 정감이 짙게 함축되어 있다.

 

 

 

 

 윤유기와 이별하며 (別尹成甫)

 

천리 먼 곳에 어찌 그대를 보내나

한밤중에 떠나는 것 일어나 보았네.

외로운 배는 이미 멀리 떠났는데

달은 지고 찬 강은 오열하네.

 

 

千里奈君別 起看中夜行 孤舟去已遠 月落寒江鳴 (玉峯詩集 卷上)

 

 

    이 시는 친구인 윤유기(尹惟幾)와 이별하면서 지은 오언절구로 경()운인데 요체시(拗體詩). 기구와 승구, 전구와 결구를 각각 대구상구(對句相救)하였다. 성보(成甫)는 윤유기의 자()라고 제목에 주를 달았는데 윤선도의 양부이기도 하다. 허균<국조시산>에서 하나쯤 없을 수는 없지만 둘이 있을 수는 없다.(不可無一 不可有二)”라고 하여 너무 감상적이라고 지적했다. 기구와 승구는 멀리 친구를 보내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장면이다. 한밤중에 일어나 천리 밖으로 떠나는 친구를 배웅하며 헤어지는 슬픔을 삼키고 있다. 전구와 결구는 친구가 떠난 뒤에 느끼는 이별의 슬픔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친구를 실은 배는 이미 멀리 떠나고 자신은 강가에 남아 달이 지고 물결이 거세어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정감도 상심으로 일렁이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비록 다른 사물에 투사하여 슬픔을 표현하기는 했으나 애상적인 감정이 격하게 표현되었다고 하겠다.

  

 

 강남의 노래 (江南詞)

 

강남의 연밥 따는 아가씨

강물은 산을 치고 흐르네.

연 줄기 짧아 물속에 잠겼으니

뱃노래에 봄이 절로 근심스럽네.

 

江南採蓮女 江水拍山流 蓮短未出水 櫂歌春政愁 (玉峯詩集 卷上)

 

    이 시는 악부시 강남곡(江南曲)’ 을 흉내 내어 당시풍(唐詩風)을 드러내려 한 오언고시로 우()운이다. 악부시 강남곡은 초여름 강남에서 연밥을 따는 아낙들의 연정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백(李白) 자야오가(子夜吳歌)’ 여름노래(夏歌)에도 오월에 서시가 연밥을 따는데 사람들이 좁은 약야계를 쳐다보네.(五月西施採 人看隘若耶)”라고 하여 연밥 따는 여인이 등장한다. 기구는 상황 설정이다. 중국의 양자강 남쪽 강과 호수가 많은 지역에서 초여름 연밥을 따는 아가씨를 등장시켰다. 물론 이런 상황은 당나라 악부시의 전통에서 빌려온 것이다. 승구는 배경이다. 강물은 산을 감고 흐른다는 말을 산을 치고 흐른다고 하였다. 상투어에서 벗어난 충격적인 말로 독자의 시선을 잡으려는 것이다. 허균<국조시산>에서 이 구를 기이한 데 이르렀다(涉奇)’고 평하여 시인이 고심하여 기이한 표현을 붙잡아 내었다고 했다. 전구는 연이 아직 물밖에 나오지 않은 때를 보여준다. 이것을 두고 이수광<지봉유설>에서 연이 물밖에 나오지 않았으면 연밥을 딸 철이 아니다.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李睟光, 芝峯類說 卷10, 文章部 3. 蓋蓮未出水 則非採蓮之時 可謂謬矣.​)라고 지적했다. 이백의 시에는 오월에 연밥을 따는 게 맞지만, 이 시에서는 연이 물 밖으로 자라지도 않았으므로 연밥을 딸 철이 아니고, 따라서 연밥 따는 아가씨가 등장하는 것도 잘못 되었다는 말이다. 결구는 여인의 정감이다. 뱃노래를 들으며 님을 생각하는 모습이다. 봄날의 여인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허균은 당나라 시에 모자람이 없다(不失唐韻)고 평가했지만 당시(唐詩)의 운치를 살리려다가 계절감이 어긋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겠다.

 

 

 봄이 지난 뒤에 (春後)

 

봄이 간들 나그네가 병들었으니 어찌하랴.

문을 나설 때는 적고 문 닫을 때는 많네.

두견새는 부질없이 번화함을 그리워하여

꽃이 채 지지 않은 푸른 산에서 우네.

 

 

春去無如客病何 出門時少閉門多 杜鵑空有繁華戀 啼在靑山未落花 (玉峯詩集 卷上)

 

 

    봄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심정을 드러낸 칠언절구로 가()운과 마()운을 통운했다. 기구는 봄이 가는 슬픔이다. 자신은 병든 나그네가 되어 누워 있는데 찬란했던 봄마저 이제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하여 지극한 애상을 표현하였다. 이 구 <국조시산>, <기아>, <대동시선> 등에 “ '병든 나그네(病客)'로 되어 있다. 승구는 시인의 고적함이다. 병들어 칩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구의 아쉬운 심정을 이어받아 자신의 쓸쓸한 상황을 부연한 것이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두견새를 등장시켜 봄꽃이 화창하게 피었던 계절이 지나감을 아쉬워하여 울고 있다 ."고 하였다. 두견새는 촉나라 망제(望帝) 두우(杜宇)의 화신이라고 해서 잃어버린 왕조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운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에서는 지나간 봄날의 화려함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투사한 상관물이다. 두견새도 봄날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시인의 심정을 아는 듯이 꽃이 지고 새잎이 나는 청산에서 울고 있다고 하였다. 만당풍(晩唐風)의 애상이라고 하겠다.

    

 

 심충겸이 춘천으로 부임해 가는 것을 보내며 (送沈公直赴任春川)

 

서울이 너무 지겨워 맑은 병이 들었는데

관직을 옮기니 평소의 마음에 맞으리.

술과 음식을 산골 관리가 가져다 바치고

봄날의 배를 들꽃이 맞이하겠지.

 

자리에 기대어 일어나는 구름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멈추고 달뜨기를 기다리리.

애달프겠지, 누각 아래 흐르는 물이

밤낮으로 도성으로 향하는 것이.

 

厭劇仍淸疾 移官愜素情 行廚山吏供 春纜野花迎 隱几看雲起 停琴待月明 應憐樓下水 日夜向秦城 (玉峯詩集 卷中)

 

 

 이 시는 심충겸(沈忠謙,15451594)이 춘천으로 좌천되어 가는 것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오언율시로 경()운이다. 심충겸의 자가 공직(公直)인데, 제목 뒤에 주를 달아 이를 밝혔다. 그는 심의겸(沈義謙)의 아우로 이조정랑이 되려했으나 김효원(金孝元)의 반대로 오히려 좌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련은 그를 위로하는 말이다. 서울의 관직생활이 지겨워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춘천으로 관직을 옮겼으니 오히려 평소의 생각과 맞지 않느냐고 위로하였다. 함련은 춘천에 살면서 자연을 즐기는 생활을 가정한 것이다. 산천 유람을 하면서 산골 음식을 맛보고 봄날 꽃 속에 뱃놀이도 할 것이라고 하였다. 허균<국조시산>에서 이 구절이 당나라 시인의 아름다운 흥취가 있다.(唐人雅趣)”고 평했다. 경련도 춘천의 한가한 생활을 말한 것이다. 구름을 보고 거문고를 타며 달이 뜨기를 기다리는 전원의 한가함을 누릴 것이라고 하였다. 구름을 정적(政敵)으로, 달을 앞날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구름이 걷히고 달이 떠오르듯이 그가 머지않아 다시 소환 될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미련은 그의 연군지정(戀君之情)이다. 춘천에서 서울로 흘러가는 북한강의 강물을 보고 서울의 임금을 생각하며 애달파할 것이라고 하여 임지로 떠나는 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최경창을 생각하며 (憶崔嘉運)

 

문밖에는 풀이 수북이 자랐는데

거울 속의 얼굴은 벌써 시들었네.

서늘한 가을밤을 어찌 견디나.

또 빗소리 들리는 이 아침을.

 

그림자만이 남아 때로 위로해 주고

정이 솟구치면 늘 홀로 노래하네.

다정도 해라, 외로운 베갯머리 꿈속에

바다와 산을 멀다 않고 왔으니.

  

 

門外草如積 鏡中顔已凋 那堪秋氣夜 復此雨聲朝 影在時相弔 情來每獨謠 猶憐孤枕夢 不道海山遙 (玉峯詩集 卷中)

 

 

    그는 최경창과 함께 이후백(李後白)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이달(李達)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병칭된 만큼 최경창과의 우정이 각별하였다. 이 시는 최경창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오언율시로 소()운이다. 허균<국조시산>에서 전기(錢起)와 낭사원(郎士元)의 끼친 운치가 있다.(錢郞遺韻)”고 하여 당시풍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수련은 풀과 자신의 대조다. 여름내 수북이 자란 풀과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노쇠한 얼굴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함련은 시인의 고독한 처지와 심정이다. 서늘한 가을밤에도 비 내리는 아침에도 벗해 줄 사람이 없는 고독한 처지를 괴로워하는 심정이 드러난다. 경련은 고독 속의 생활이다. 주위엔 아무도 없어 오직 그림자만이 자신을 위로해 주니 괴로운 심회를 시로 노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 줄에 걸쳐 자신의 늙고 외로운 처지를 말하였다. 미련은 꿈속에서 친구를 만나는 기쁨이다. 바다와 산을 넘어서 멀리 있는 자신을 찾아준 친구에 대한 반가움과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어릴 적부터 함께 배우고 당시풍을 지향하는 친구에 대한 각별한 정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용강의 노래 (龍江詞)

 

 

제 집은 용강 어귀에 있는데 날마다 문 앞에는 강물이 흘러요.

강물은 동쪽으로 흘러 쉬지 않는데 그대를 그리는 제 마음은 언제 그칠까요.

구월 달 강가에는 서리가 찬데 강변의 갈대꽃은 희고 단풍잎은 붉네.

줄지은 기러기 떼 북쪽에서 오는데 그대 계신 서울에선 편지가 오지 않네.

서울서 달 보며 얼굴 얼마나 찡그리실까? 저도 늘 강 위 산에 오르게 된답니다.

떠나실 때 뱃속에 있던 아이 지금은 말도 잘하고 죽마 타고 논답니다.

다른 애들 따라서 아버지라 부르지만 네 아버지 만리 밖 계시니 어찌 듣겠니?

인생의 궁달은 저마다 하늘에 달렸지만 고생하며 헛되이 세월 보내는 일 아쉬워라.

베틀 속의 비단으론 겨울옷 지을 만하고 강 위 뙈기밭에선 먹을 것 거둘 수 있네.

집에 있어 마주할 땐 가난해도 기뻤으니 금은을 몸에 둘러도 귀할 것 없다오.

아침에 까치가 뜨락 나무에서 울기에 문을 나서 강 서쪽 길을 자주 바라보았소.

옆 사람에게 마음속 일을 말 못하고 물결 바라보며 애끊어도 날이 또 저물었네.

붉은 재갈 금 고삐 뉘 집 낭군인지 말 울음소리 서쪽 집으로 들어가네.

 

妾家住在龍江頭 日日門前江水流 江水東流不曾歇 妾心憶君何日休 江邊九月霜露寒 岸葦花白楓葉丹 行行新雁自北來 君在京河書未廻 秦樓望月幾苦顔 使妾長登江上山 去時在腹兒未生 卽今解語騎竹行 便從人兒學呼爺 汝爺萬里那聞聲 人生窮達各在天 可惜辛勤虛度年 機中織帛寒可衣 江上仍收數頃田 在家相對貧亦喜 銀黃繞身不足貴 朝來鵲噪庭前樹 出門頻望江西路 不向傍人道心事 腸斷煙波日又暮 紅羈金絡何處郞 馬嘶却入西家去 (玉峯詩集 卷下)

 

 

    이 시는 가행체(歌行體)의 장편으로 여러 운을 통운한 칠언고시다. 집을 떠나 서울에서 고생하는 남편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읊어서 애잔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처음 다섯 줄은 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강물에다 세월과 그리움을 투사하고 서리와 단풍으로 계절감을 살렸으며, 기러기와 달로 멀리 있는 님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가운데 다섯 줄은 자신의 근황과 심정을 남편에게 전하는 말이다. 떠날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자라서 아버지를 찾고, 길쌈하고 농사지어 지낼 만한데 입심양명을 위해 서울에서 고생하는 남편이 안쓰럽다는 내용이다. 여인은 인생의 궁달이 하늘에 달렸다면서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고 가난해도 님과 함께 지내는 생활이 그립다고 하여 소박한 소망을 드러내었다. 마지막 석 줄은 기다림의 간절함이다. 까치소리에 유발된 기다림의 정서는 이웃집 낭군의 귀환을 보면서 절망으로 떨어진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애끊는 그리움이 사무치는 부분이다. 이렇게 님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통하여 입신양명에 매달린 당시 사대부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면서 규정(閨情)을 즐겨 시화한 당시(唐詩)의 전통을 되살렸다고 하겠다.

 

 

 

    윤근수(尹根壽,1537,중종321616,광해군8)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자고(子固)이고 호는 월정(月汀)이며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두수(斗壽)의 아우이고 이황의 문인이다. 1558(명종13)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주부를 거쳐, 1562년 부수찬으로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65년 이조정랑, 교리를 역임하고, 1567년 사가독서 했다. 이어 집의, 응교를 거쳐 1572(선조5) 동부승지, 대사성, 이듬해 종계변무(宗系辨誣)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 경기감사를 지냈다. 1579년 강릉부사, 개성유수, 황해감사, 이조참판이 되고, 1589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를 바로잡은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져왔다. 귀국 후 형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해평(海平)부원군에 봉해졌다. 1591년 정철이 건저문제로 화를 입자 같은 서인으로서 삭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예조판서, 대제학이 되고, 원접사, 주청사로 명나라와 외교에 힘썼다. 좌찬성, 판의금부사로 1604(선조37) 호성공신이 되었다.

   

 

송광사에서 태헌 고경명의 유묵을 보고 느낌이 있어 (松廣寺見苔軒遺墨有感)

 

 

조계산 흐르는 물은 신선의 산 같은데

돌 비탈 안개 덩굴을 차례대로 올랐네.

임란 후에 여러 부처를 찾아보는 날인데

책 속에서 오히려 고인의 얼굴을 대하네.

 

맑은 시로 길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의로운 넋은 하늘에 올라 돌아오지 않는구나.

이슬 젖은 장미를 보며 몇 번을 읊조리고

슬픈 마음 허망하여 사립문에 의지했네.

 

曹溪流水况仙山 石磴烟蘿次苐攀 亂後試尋諸佛日 卷中猶對故人顔 淸詩驚世應長在 義 魄歸天更不還 露盥薔薇吟幾遍 傷心空復倚松關 (箕雅 卷9)

 

 

    이 시는 제목에서 밝힌 대로 송광사에서 고경명의 유묵보고 지은 칠언율시로 산()운이다. <월정집(月汀集)>에는 제목이 태헌 고경명의 시에 차운하여 의원스님에게 드림(次苔軒韻 贈義圓上人)’ 으로 되었고, 수련 출구의 ()”()”으로, 대구의 ()”()”로 되었고,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같다. 1592년 고경명이 죽은 후에 송광사에서 그가 남긴 시를 보고 추모의 정을 토로한 것이다. 수련은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는 길이다. 조계산의 경치는 신선이 사는 산같이 빼어나고, 송광사에 오르는 길은 돌 비탈을 지나 안개 속 덩굴을 붙들고 올라왔다고 하였다. 함련은 고경명의 유묵을 보게 된 계기다. 임란에 희생된 인물들을 위해 부처에게 명복을 비는 자리에서 그가 남긴 시권을 대하고 생전의 모습을 떠올린다고 했다. 경련은 고경명의 행적이다. 그는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하였음을 추모하고 찬양하였다. 미련은 시인의 슬픈 정감이다. 초여름 이슬 머금은 장미를 보며 죽은 이를 위한 시를 읊조리고 다시 볼 수 없는 그를 생각하며 쓸쓸한 심정을 가눌 수 없다는 것이다. 

 

 

 

 

 김성일(金誠一,1538,중종331593,선조26)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학봉(鶴峯)이며 본관은 의성으로 이황의 문인이다. 1568(선조1)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검열이 되었다. 1572년 단종과 사육신의 복권을 상소했다. 이듬해 전적, 정언, 수찬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 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교리,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579년 함경도 순무어사, 1583년 사간, 황해도 순무어사, 나주목사 등을 지냈다. 1585년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자성록(自省錄)>, <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민심을 우려하여 왜가 침입할 기색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해 대사성,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 경상우병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환되었는데 공을 세울 기회를 주자는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도 초유사에 임명되어 관군과 의병을 독려하였다. 경상좌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의병규합과 군량미 확보에 전력하다가 역병으로 죽었다.

 

 

 기묘년의 느낌을 쓰다 (己卯書感)

 

 

천 년 만에 현명한 임금과 충량한 신하가 모여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네.

고난을 극복하여 형통할 때 큰 일 맡아서

초년에 새 정치 펴려 하였네.

 

하늘의 뜻 높아서 헤아리기 어렵나니

백성의 세상살이 거듭 불쌍하구나.

육십 년 전 그날 일에 마음 상하여

저문 날 강가에서 눈물을 뿌리네.

 

 

千載明良會 遭逢不偶然 亨屯當大任 更化在初年 天意高難測 民生重可憐 傷心舊甲子 揮淚暮江邊 (箕雅 卷6)

 

 

    이 시는 그가 1579(선조12)에 함경도 순무어사로 나갔을 때 함경도 온성(穩城)에서 같은 제목으로 지은 오언율시 두 수 중 둘째 수로 선()운이다. <학봉집(鶴峯集>에는 제목이 온성(穩城)에서 기준(奇遵)을 조상하다(氈城 弔奇服齋遵)로 되었다. 전성(氈城)은 온성의 별칭이고, 기준이 기묘년(己卯年,1519,중종14)에 화를 당했으므로 끝 구절에서 말했다고 주를 달아 놓았다. 그는 강직하고 절개가 있는 성품이라고 그의 졸기(卒記)에서 지적하고 있는 만큼 기묘사화에 희생된 명현에 대해 강개한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수련은 중종 시절을 말한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에서 벗어나 현명한 임금과 충성스런 신하가 뜻을 합친 시절이었다고 했다. 중중이 조광조를 등용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하려 했던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함련은 당시 선비들의 임무와 포부이다. 왕도정치의 큰일을 실천하려 했던 그들의 이상을 되짚어 본 것이다. 경련은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들의 뜻이 꺾인 것을 말한다. 반정공신의 반발과 중종의 우유부단으로 이상정치의 꿈이 꺾였으니 하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고 백성들이 불쌍하다고 했다. 미련은 그의 감상이다. 육십년 전 이상 정치를 이루려 했던 그들을 생각하고 저문 강가에서 슬퍼한다고 하였다.

   

 

 

 한강에서 이별하며 (漢江留別)

 

 

도끼를 메고 남쪽 길에 오르나니

 외로운 신하의 한번 죽음이 가볍도다.

남산과 한강을 머리 돌려 바라보니

무한한 정이 솟아나네.

 

 

仗鉞登南路 孤臣一死輕 終南與渭水 回首有餘情 (大東詩選 卷3)

 

 

 

    이 시는 1592411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되어 임지로 향하면서 한강에서 지은 오언절구로 경()운이다. <학봉집>에는 제목 뒤에 임진년 경상우병사로 도성을 떠날 때 전별하는 친구들에게 준 시(壬辰 以兵使出都時 知舊來餞 以此留贈)’라고 주를 달아 놓았다. 그는 일본통신부사로 갔다가 통신사인 황윤길과 불화하여 왜가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신사와 다르게 보고하였다. 민심을 교란시킬 것을 염려해서였다고 하지만 이것은 빗나간 예상이었다. 그가 전란에 대비하고 전란 중에 애쓴 점은 인정되지만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인심이 무너지면 금성탕지라도 무너진다고 군사들을 독려했지만, 임지로 떠나면서 이 시를 지을 때 죄는 크고 임무는 무겁다. 임금의 은혜가 망극한데 이 몸이 죽지 못했으니 오직 죽도록 노력할 뿐 성패를 말할 수는 없다.(罪大任重 天恩罔極 此身未死 惟當盡瘁 成敗非所道也)”라고 말했다고 그의 연보(年譜)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있다. 기구는 자신의 임무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전란에 대비하고자 임지로 내려가는 것을 도끼를 메고 남쪽으로 간다고 하였다. 승구는 자신에 대한 죄책과 각오다. 당파가 다른 통신사와 불화하여 반대 의견을 낸 것은 국란에 앞서 죽음도 가벼운 죄이며 이를 씻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한다는 말이다. 전구와 결구는 임금이 있는 도성을 돌아보며 자신의 심정을 말한 것이다. 종남산(終南山)과 위수(渭水)는 중국 장안의 산과 물이지만 여기서는 남산과 한강을 대유한다. 임금이 계신 도성을 돌아보며 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목숨을 바쳐 국난에 임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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