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체화풍은 북송 휘종 시대에 시작되어 남송의 화원화가였던 마원, 하규, 양해 등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이후 명대에 들어 복고주의의 유행 아래 다시 등장하면서 조선 전기의 회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화파 3] 마하파
마하파(馬夏派)
원체화풍 가운데 마원과 하규의 화풍만을 따라 부르는 이름입니다.
마원(馬遠 약1140-1225년이후)과 하규(夏珪 생몰년미상)는 모두 남송 화원의 소속된 궁정화가인데,이들의 화풍은 간결한 필치로 광활한 느낌을 주는 산수 표현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원 <산경춘행도>
하규 <관폭도觀瀑圖>
넓고 아득한 자연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그림의 중심을 대각선 아래쪽에 두는 변각(邊角)구도를 택하며
상대적으로 넓은 빈 공간을 여백으로 남겨 시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빈 공간을 대상으로 정교하게 묘사된 나무를 표현해 극적인 효과를 노리기도 합니다.
마원 <춘유부시도春遊賦詩圖>
하규 <계산청원도溪山清遠圖>
<계산청원도> 부분
하규 <임류무금도臨流撫琴圖>
나무의 표현은 철사를 직각으로 구부린 듯이 하는 등 과장된 표현이 많습니다. 또한 일부만을 그려진 산세를 강조하기 위해 먹색이 강한 붓 터치를 자주 구사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화파 4] 절파
명나라 때 중기무렵에 활동한 일부 화원화가와 직업화가의 독특한 화풍 중에 절파 화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들 화가 대부분이 저장성(절강성浙江省) 출신이었기 때문에 절강성파, 즉 절파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공통된 화풍은 강한 흑백 대비와 진한 먹 사용, 거친 필치 그리고 클로즈업하여 표현된 인물 묘사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대진 <춘산적취도> 明
절파 화풍은 기본적으로 남송 원체화를 계승한 화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파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저장성 전당(錢塘, 오늘날 항저우)지방 출신의 대진(戴進)이라는 사람이며,
중기 이후 이재, 오위(吳偉), 장로(張路) 등이 대표적인 절파 화가로 손꼽힙니다.
이재 <산수도> 明
오위 <파교풍설도> 明
장로 <계산범정도> 明
회화적 효과를 강조한 과장된 표현이기 때문에 천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조선 중기 무렵에 전래되었는데, 이후 문인화풍의 그림에도 절파 화풍이 보여 조선식 절파회화의 특징을 이루게 됩니다.
심사정 <파교심매도>
[화파 5] 오파
명나라 중기 이후에 등장한 문인화가들이 이룬 화파 중에 '오파(吳派)'가 있습니다. 이들은 문학적 교양이 풍부한 문인화가를 계승한 사람들로 그 시조는 심주(沈周,1427~1509)라는 사람입니다.
심주 <여산고廬山高> 지본수묵 193.8cm×98.1cm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심주는 쑤저우(蘇州), 오현(吳縣) 출신으로, 오파란 이름은 이 '오현 출신'의 화가들을 가리킨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주요 화가로는 심주를 비롯해 문징명, 당인, 구영, 장굉 등이 손꼽힙니다.
원말 사대가의 화풍을 본받아 온화하고 담백한 기법을 즐겼고, 웅장함이나 화려한 기교는 배제합니다.
문징명(1470~1559) <우여춘수도> 1507 지본채색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이들 세대 이후에 등장한 동기창이 남종화 우위의 문인화론을 주장하면서 오파는 문인화파의 정통으로 인정되며 중국 회화의 주류로 여겨지게 됐습니다.
오파의 화풍은 18세기 전후 무렵에 본격적으로 조선에 전해졌습니다. 강세황 그림 중에 오파 화풍을 수련한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강세황 <벽오청서도碧梧淸署圖> 지본수묵담채 30.5×35.5c, 개인
개자원화전 권5 모방명가화보 제34도 심석전(심주) 벽오청서도
[화파 6] 남종화와 북종화
남종화(南宗畵)와 북종화(北宗畵) 명나라 말기의 이론가이자 문인화가인 동기창(董其昌 1555-1613)은 중국화를 남종화와 북종화로 분류하여 이론화했습니다.
동기창 <산수>
동기창에 따르면 '선(禪)'에 남종선과 북종선이 있는 것처럼 그림에도 두 종파가 있다고 했습니다.
당나라 때 이사훈 부자에서 시작된 채색 산수화의 계보를 북종화라고 이름 지었고
왕유가 처음 시작했다고 전하는 선묘와 담채 그리고 수묵을 위주로 그림을 남종화라고 불렀습니다.
이사훈 <춘산방우도>
왕유 <장강적설도> (부분)
이것은 사실 객관적인 분류라기 보다는 중국 선종이 당나라 이후 남종선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에 비유하여그림 역시 남종화가 북종화를 누르고 번성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종화를 치켜세우고 북종화를 깎아 내리는 이른바 "상남폄북(尙南貶北)", 문인화 우위론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파 7] 명대 남종화
중국에 남종화와 북종화의 두 계보가 있음이 사실화되던 때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걸친 명나라 말기입니다.
이때 이 주장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이 강남의 송강(松江), 화정(華亭)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인 동기창(董其昌), 막시룡(莫是龍), 진계유(陳繼儒)로 이들이 명대 남종화파입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문인화로 본류로 자부하면서 당시의 화단을 비판했습니다.
막시룡, 진계유 <운산도雲山圖> 20.8X233cm
진계유, <운산유취도雲山幽趣圖> 17세기
이들의 기본적인 입장과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정교하게 윤곽선을 그린 묘사보다 선염의 기법을 주로 사용하며,
2) 직업적인 화가보다는 문기(文氣)를 지닌 아마추어적인 문인화가들이며,
3) 양식적으로는 섬세하고 치밀하거나 농후하며 화려하기 보다는 간략하고 거칠며 담백하면서도 청아(淸雅)한 것을 우선하고
4) 정신적으로는 기교를 바탕으로 한 객관주의 보다는 문인적 교양을 갖춘 인격표현을 중시한다.
명대 중기의 오파 문징명, 심주도 명대 남종화 중흥기의 대표 주자로 일컬어지게 됩니다.
[화파 8] 중국과 조선후기의 남종화풍
남종화풍 南宗畵風
남종화에 보이는 특징적인 화풍 전반을 남종화풍이라고 부릅니다. 동기창이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을 주장하면서 당대에서 원말까지의 남종화 계보는 거론했지만 화풍상의 특징을 지적해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후 남종화 스타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있어 사람마다 설명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중국에서의 남종화풍
중국에서 거론되는 남종화적 화풍은, 북종화가 날카로운 윤곽선을 사용한 힘차고 엄격한 구성에 특징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붓 터치를 반복해 사용하면서 주관적인 해석에 의한 표현을 특색으로 하는 것을 꼽습니다. 또한 문인화가가 그린 그림에 자주 보이는 수묵을 위주로 단순한 구도의 선적(線的) 묘사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조선후기의 남종화풍
조선후기에 유행한 남종화풍은 이와 같은 중국 남종화풍의 특징 이외에 화보를 통해 습득한 스타일도 포함되었습니다. 즉 조선 후기에 남종화 이론은 쉽게 유입됐지만 이를 실증해줄 만한 진품은 그다지 많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남종화를 익히기 위해서는 중국화보를 통해 남종화 계보에 속하는 화가의 그림을 익히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을 목판화로 옮길 경우에는 필획이 끊어지는 등 재현에 많은 장애가 생기게 되고, 따라서 목판 그림을 위주로 익힌 남종화는 의도하지 않게 짧은 필선이 나타나서 딱딱한 인상을 주기 쉽습니다. 이처럼 조선에 들어와 변형된 남종화를 조선남종화라고도 부릅니다.
심사정, <촉잔도권> 부분
중국 청대가 되면 남종화는 화단의 주류 스타일이 되면서 직업화가나 궁정화가들도 이를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기존의 소박한 스타일 이외에 보다 풍부한 채색에 복잡한 구도를 지닌 그림까지 남종화풍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도 18세기말부터 간략한 필선과 담묵 중심의 산수화가 문인화가 이외에 직업화가, 화원화가 들 사이에서도 유행했습니다.
[화파 9] 문인화(文人畵)
문인화(文人畵)
중국에서 직업화가의 그림인 원체화풍의 그림에 대하여, 문인들이 여기(余技)로 그린 그림을 문인화라고 따로 부릅니다.
이러한 구분도 명나라 때 화가이자 이론가인 동기창에 의해 제시된 회화 구분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그는 직업 화가가 기법에 속박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리는 사람의 내면성이나 정신성이 표현된 회화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문인들이 그린 그림은 전문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보이게 됩니다.
즉, 채색보다는 수묵이, 그리고 정교한 색채보다는 간단한 선묘가 중심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에는 대상의 완벽한 재현이나 묘사보다는 심오한 정신적 내용이나 철학적 사상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직업화가의 그림 보다 품격이 높은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동기창이 주장한 남북종론에 따르면 원체화의 계보는 북종화와 겹치며 문인화의 계보는 남종화와 거의 일치한다고 보면 됩니다.
"문인화"라는 계보는-동기창에 의하면 - 당나라때 왕유에서 시작되어 송나라때 사대부들에 의해 많이 그려지고, 이후 원말 사대가(黃公望, 倪瓚, 오진, 왕몽)에 의해 양식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원(元) 예찬(倪瓚, 1301-1374) 용슬재도(容膝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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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에서 발췌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