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투자 가치에 눈떴던 시인 컬렉터 - 이병연

2016. 1. 21. 23:38美學 이야기



     

쿡! 조선시대 미술 컬렉터

등록일 | 2010.01.28.



그림의 투자 가치에 눈떴던 시인 컬렉터 - 이병연



‘인왕제색도’ 풍경이 펼쳐지는 청운동 그 집
 
   서울을 대표할 옛 그림을 ‘강추’하라면 주저 없이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꼽고 싶다. 아니, 대한민국 대표 그림으로도 손색이 없다. 붓으로 북북 그어 내린 우람한 암석, 빗물을 머금은 수림(樹林)의 먹색, 산허리를 휘감고 피어오르는 안개, 폭우로 생겨난 폭포의 세찬 물줄기, 그리고 솔숲 속 기와집……. 비 그친 뒤 여름산 풍경을 이보다 더 청신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 정선의 <인왕제색도>, 종이에 수묵, 79.2뻂138.2 ㎝, 국보 216호, 호암미술관




   18세기 그림인데도 고리타분하지 않고 모던한 느낌까지 든다. 중국의 화보를 베껴 그리던 ‘관념 산수’가 아니라, 화가의 눈으로 직접 본 우리 산수를 그린 것이기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봐도 친근하다. 또 고지식하게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실경을 토대로 한 심상의 풍경을 그린 것이기에 더욱 울림이 있다. 그림 주제인 인왕산 주봉우리를 과감하리만치 크고 진하게 그려 넣은 것이 그 예다.  
 
수년 전, 서울 인왕산 자락 어디에서 봐야 인왕제색도에 가장 근접한 구도가 나올까 싶어서 청와대 뒤편 청운동 일대를 누빈 적이 있었다. 경복고등학교 교정 안으로 들어가 언덕 위에서 셔터를 눌러보았다. 인왕제색도 그림이 실린 책을 곁눈질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게 아니다, 싶어서 학교 정문 앞 골목을 빠져나왔다. 

이번엔 버스가 다니는 횡단보도 앞에서 급하게 찰칵. 또 아니었다. 그러다 뭔가에 꽂힌 듯 인근 연립주택에 눈이 갔다. 그대로 3층(5층이었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다)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친절한 주인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문을 열어주고 옥상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해줬다.
 
아, 그것이었다. 서울에 이렇게 전망 좋은 집이 있었구나, 싶었다. 겸재 정선은 이 일대 백악산(지금의 북악산) 자락에서 자랐다. 어쩌면 약 300년 전, 겸재의 생가가 근처에 자리 잡았는지 모를 일이다. 
  


   요즘엔 전망이 좋다고 하면 한강 주변 주상복합이나 고층 아파트를 흔히 떠올린다. 그런 곳의 부동산 가격은 고공행진이다. 하지만 그 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라야 고작 무상하게 흘러가는 강, 그 강 건너 획일적인 아파트뿐이지 않은가.   
 
앞이 확 트인 채 인왕제색도의 풍치가 성큼 다가오는 그 집 옥상에서 나는 생떽쥐뻬리의 소설 주인공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해지는 모습이 좋아 자신이 사는 소행성 ‘b612호’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의자를 뒤로 물러앉으면서 석양을 감상했다는 어린 왕자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곳에 작은 의자 하나를 두고 종일 인왕산을 바라봐도 좋을 일이었다. 




옥상에 서서 겸재와 사천의 우정을 곱씹다

    단언컨대, 그 집이야말로 서울에서 가장 전망 좋은 집이었다. 강골의 귀족 같은 인왕산의 자태도 압권이지만 무엇보다 옛것과 새것이 교직하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 산을 바라보며 반추할 조선의 예술과 옛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겸재가 인왕제색도 속에 그려 넣었다는 죽마고우 사천 이병연(李秉淵1671∼1751)의 기와집이 어디쯤 자리했을까를 가늠해는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인왕산 계곡서 물장구치던 죽마고우였고, 각각 시와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며 평생을 교유했던 화가 정선과 시인 이병연의 우정을 곱씹어 보노라면 괜히 가슴이 느꺼워질 것이다. 
  


   인왕제색도에는 인물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럼에도 삶의 냄새가 난다. 그곳에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일까. 
 
재야 미술학자였던 故 오주석은 인왕제색도와 관련된 수수께끼 하나를 풀어냈다. 그는 인왕제색도에 감도는 왠지 모를 무거움과 비장감의 정체가 궁금했었다. 그러다 겸재가 그림을 그린 날짜에 시선이 갔다. 

‘신미 윤월 하완(辛未閏月下浣)’. 1751년 윤오월 하순이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시기의 날씨를 승정원일기에서 찾아봤다. 뜻밖에 수확을 올렸다. ‘윤오월 초하루부터 18일까지 2, 3일 간격으로 계속 비가 오락가락했다. 그러다 19일부터 25일까지 지루한 장맛비가 계속되었다. 25일 오후가 되어서 비가 완전히 개었다’ 는 것이다. 
 
오주석은 인왕제색도가 긴 장마 끝 날씨가 갠 날 오후에 그린 것임을 밝혀낸 것이다. 평소 인왕산에 없던 폭포가 세 군데나 생겨난 것도 그런 연유였다. 75세의 겸재는 사경을 헤매는 친구 사천이 장맛비가 개듯 쾌유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인왕제색도를 그렸고, 그래서 그림 속에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림 속 기와집은 죽마고우 사천 이병연의 집으로 알려졌었다. 그런 겸재의 바람과는 달리, 사천은 4일 후인 29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나이 80세였다.  
 
   인왕산 밑에서 태어난 두 친구. 한 사람은 시인이 되었고, 한 사람은 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추구하는 것은 같았다. 그림에서 겸재가 산수를 유람하며 직접 사생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개척하고 이 분야 거장이 되었다면, 사천 역시 산천을 누비며 조선의 시어로서 우리 국토를 노래한 진경시(眞景詩: 우리 국토의 경관을 소재로 그 아름다움을 사생한 시)의 최고봉에 올랐다. 
 
둘은 10대부터 스승인 대문장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아래서 동문수학했다. 김창흡은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하는 이른바 진시(眞詩) 운동의 선구자였다.  
  


   두 친구는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시를 짓고 화폭을 펼치는 경험을 공유한다. 서로의 작품에 평을 해주며 자극하고 격려했다.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쓴 시와 그림을 함께 엮은 산수화첩은 당대에도 유명할 정도였다.  
 
각각 80세(이병연), 83세(정선)까지 장수하며 형제처럼 지낸 사이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이심전심이고, 온기가 퍼져 나갔을 것이다. 그런 친구가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오죽 하늘의 먹구름이 내려앉는 느낌이었을까. 인왕제색도는 그런 마음을 담았다. 사천의 집을 호위하는 겸재 특유의 T자형 소나무의 잔 붓질은 사천을 지켜주고 싶은 겸재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금강산 그림, ‘왼편에 이병연, 오른편에 정선’ 

   둘의 관계는 당대에도 화제가 됐다. 김창흡의 아우 김창업(1658∼1721)은 이렇게 증언했다. ‘정선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 금강산이 있고부터 이런 기이함은 없었네.’ 정선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를 일컬어 ‘왼편에 이병연, 오른편에 정선(좌사천우겸재)’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금강산 여행이 상징하는 진경 문화 흐름과 관련해 두 사람이 당시 사회에 끼친 무게감은 그렇듯 엄청났던 것이다. 
 
두 사람의 금강산 여행은 강원도 금화 현감으로 있던 평생지기 이병연의 초청이 계기가 된다. 겸재는 35세에 첫 금강산(1711년) 사생에 나섰다. 이후 이병연의 주선으로 여러 차례 금강산 여행을 갈 기회를 얻었던 겸재는 금강산을 그린 30여 폭의 그림을 고마운 친구에게 보답으로 주었다. 이병연은 여기에 스승 삼연과 자신의 제시를 붙여 화첩을 만들었다. 그 유명한 ‘해악전신첩’(海獄傳神帖)’이다. 말 그대로 시서화가 하나로 어우러진 화첩이다.





↑ 이병연의 제시 ‘정원백이 안개 속에서 비로봉을 그리는 것을 보고’






↑ 정선의 <비로봉(毗盧峰)>, 비단에 담채, 19.2뻂25.0 ㎝, 개인소장





   사천은 금강산을 여행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시에 담기도 했다. ‘정원백이 안갯속에서 비로봉을 그리는 것을 바라보며(觀鄭元伯霧中畵毗盧峰)’이다.



내 벗 정원백(元伯은 정선의 자)은
주머니에 화필도 없어
때때로 화흥이 솟아나면
내 손의 것을 빼앗아가네
금강산에 들어온 후
멋대로 휘갈겨 그려내니
백옥같은 만이천봉
하나하나 점점이 흩어지고
구연의 용은 놀라 꿈틀대고
(중략)
날보고 또 가져가라하니,
관아 서재 창에 걸어두었네.



   세월은 흘러 머리에 희끗희끗 서리가 내려앉은 겸재. 지루했던 장맛비가 어느 날 뚝 그치자 영감이라도 얻은 듯 빠른 속도로 인왕제색도를 그려가던 노화가는 문득 젊은 날,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던 날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어느 개울가에 서 발을 담그고 지친 다리를 쉬면서 ‘이제, 우리 중국 것에서 벗어나 조선의 시어로, 조선의 화풍으로 우리 산하를 노래합세’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어느 날을 회상했을지 모른다. 


  


   이제, 이 글의 본론이다. 시인 이병연은 유명화가 겸재를 친구로 둔 덕분에 당대 유명한 컬렉터이기도 했다. 조선의 화가로는 평생지기 겸재의 그림이 가장 많았다. 중국 유명화가의 그림도 상당수였다. 
 
명말청초 직업화가 맹영광‘어부도’, ‘게적도(憩寂圖)’ ‘산수인물도’, 명나라 구영 ‘청명상하도’, 남송 마원‘산수도’, 원나라 조맹부‘말그림’ ‘산수도’, 원나라 전선‘인물도’ 등 내로라 하는 중국 역대 화가들의 작품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정선의 그림으로는 서울의 명승을 그린 ‘경교명습첩’, 영남의 경치 좋은 곳을 그린 ‘영남첩’ 같은 진경산수뿐 아니라 다양한 주문 그림도 있었다. 정선이 사천의 초상화를 그려준 ‘사천상’, 회갑을 축하해 그려준 ‘천년송지도(千年松芝圖)’, 사천의 서재를 그린 ‘노촉재도(老燭齋圖)’ 등이 그것이다. 
 
컬렉터 이병연은 신정하, 이하곤, 남유용, 조영석, 조귀명 등 같은 인왕산 자락에 살던 문사들과 더불어 그림을 매개로 친분을 쌓았다. 날씨 좋은 날은 정자에 둘러앉아 이병연의 수장품을 함께 감상하곤 했다. 서로의 수장품을 빌려주고 빌려보기도 했다. 그 시절, 그림은 그렇게 나눠 보는 것이었다.  
 
이병연의 소장품을 감상했던 남유용“본 것만 해도 障子 50여 軸(축, 세로로 길게 걸어두는 그림)과 여러 권의 첩(여러 장의 그림을 책처럼 만든 것)에 달한다’며 이병연 수장품의 방대함을 전한다. 




감식안은 어두워도 투자 감각은 중인들 부럽지 않아  

   이병연이 컬렉션을 갖춰가는 데는 정선이 도움이 컸다. 사실 이병연은 유명 컬렉터였지만 감식안은 별로 없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였다.  
 
‘그림을 볼 줄 몰라서 그림을 수집할 때 항상 정선에게 물어보고 정선이 좋다고 하면 그제서야 수장했다’기록도 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컬렉터라고 모두 다 ‘대감식안’일수는 없다. 그런데 감식에는 어두웠던 그가 시쳇말로 치면 투자 감각은 뛰어났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겸재와 담을 이웃하고 살았다는 풍속화의 선구자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1686∼1761)이 남긴 기록(1733년)에 따르면 문생이라는 사람은 3000전(錢)을 주고 겸재의 화권을 샀다고 한다. 

3,000전은 10여 년 뒤 송문흠신소가 화가 이인상을 위해 남산 기슭에 작은 집을 마련해줄 때 치른 돈이다. 조선시대도 유명화가의 그림은 서민들로서는 엄두도 못 낼 비싼 가격이었던 것이다. 

요즘 그림은 새로운 투자처로 주목받는 시대가 됐다. 고객이 맡긴 돈으로 주식 부동산 등에 투자를 대행해주는 은행에도 아트펀드가 등장하지 않았나. 


  
   그래서 조선 시대 컬렉터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드는 의문은 그들은 늘 심미적 가치로만 그림을 대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선비 컬렉터 육교 이조묵, 상고당 김광수, 중인 컬렉터 석농 김광국 할 것 없이 비싼 서화 가격에 등이 휘어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 완상을 즐겼다. 당시 컬렉터들은 모두 그림이 갖는 자산가치, 즉 경제적 가치는 외면한 채 고고하게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에만 푹 빠져 살았을까.    
 
컬렉터 문화에 변화가 생겨난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세상 물정에 밝은 역관 출신의 중인들을 중심으로 그림의 투자 가치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정선의 그림은 당대 국내에서 비싸게 거래됐을 뿐 아니라 이미 중국에까지 널리 소문이 났다. 때문에 중국 사행을 따라가는 역관들은 정선에게 그림을 부탁하는 일이 잦았다. 정선의 그림 하나를 챙겨가 중국에서 팔면 시쳇말로 대박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이 있다.
 
   ‘새벽에 정선과 친한 역관이 좋은 부채를 주면서 연경으로 가기 전에 고별을 하러 왔다고 했다. 이에 정선은 아침 맑은 기운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그려주었다. 역관이 그것을 가지고 연경 가게에 들어가자 주인이 좋아하면서 선향(線香) 한 궤와 바꾸어 주었다. 역관이 돌아와 향을 헤아리니 50매를 얻었는데, 길이가 모두 수촌이나 되었다. 이로써 역관배들은 정선의 그림을 얻으면 모두 기이한 재화로 보았다.’
 
당시 향이 어느 정도 고가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글이 주는 분위기로 봐서는 엄청난 이득을 취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중인이 아니라 선비, 그것도 계산에는 젬병일 것 같은 시인인 이병연에게서 영악한 미술 투자자의 면모가 발견된다. 정선과 같은 마을에 살아 그가 그린 산수화 30장을 가지고 있기도 했던 신돈복(辛敦復; 1682-1766)은 이를 뒷받침할 흥미로운 일화를 전한다.  
 
하루는 내가 사천 이병연에게 가서 그 시렁 위를 보니 중국본 상아꽂이 책을 쌓아 벽 위를 그것으로 둘러놓았다. 내가 물었다. 

“책이 어떻게 이렇게 많습니까.” 

이병연이 웃으면서 답했다. 

이것이 천오백 권이나 되는데 모두 내가 사왔네”. 

한참 있다 또 말했다. 

“모두 정선에게서 나온 줄 누가 알겠나. 북경 그림 가게들은 정선의 그림을 심히 중히 여겨서 비록 손바닥 크기의 조각만한 종이의 그림일지라도 비싼 값으로 사지 않음이 없다네. 나와 정선이 가장 친한 까닭으로 그 그림을 가장 많이 얻었는데 매양 북경 가는 사신의 행차에 크기를 막론하고 곧 그에 붙여 보내 볼만한 책을 사오게 했다네. 그런 까닭으로 능히 이처럼 많은 분량에 이를 수 있었다네.” 

나는 비로소 중국 사람들이 진실로 그림을 알며 우리나라 사람처럼 한갓 이름만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동네 한 집은 일찍이 정선이 그린 금강첩을 이병연의 집에서 샀었는데, 은화 30냥을 썼다고 한다. 좋은 말에 이르면 값이 40냥이 된다고 하니 그 보배로 삼은 바가 이와 같았다.’

그렇게 국제적으로 잘나가는 상품성 있는 화가였지만 정작 자신은 평생 생계 걱정을 했던 물정 어두운 화가, 풍류객의 면모를 가졌지만, 친구의 그림을 중국 시장에 팔아 거둔 투자이익으로 시 공부에 도움이 될 고가의 외국 서적을 사 모았던 영악한 시인. 평생을 시와 그림으로 교유했던 죽마고우의 아름다운 사귐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 불경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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