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메디치가 - 안동김씨

2016. 1. 22. 00:06美學 이야기



      

쿡! 조선시대 미술 컬렉터등록일 | 2010.01.14


조선의 메디치가 - 안동김씨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 겸 화가, 미켈란젤로(1475∼1564)에 관한 일화다. 그날도 그는 정원에 버려진 목신(牧神; 목축을 관장하는 신) 조각상을, 대리석을 재료로 해서 따라 새기고 있었다. 메디치가 정원에 놓인 진기한 고대 미술품을 복사하고 복원하는 게 그의 일이었던 것. 그때 그의 예술적 후견인으로서 그 대저택에 살게 해준 로렌쪼 대공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이보게, 미켈란젤로.  노인의 이빨은 대개 몇 개는 빠지는 법이라네.”
 
미켈란젤로는 순간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그래, 이것이야.’  그는 로렌쪼 대공이 지나가고 나서 얼른 목신 조각상의 이빨 한 개를 부러뜨렸다. 그랬더니 이빨이 빠진 것으로 보였다. 영락없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로렌쪼 일 마니피코(1449∼1492). 그는 1469년부터 20여 년 간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가의 권력자였다. 관직은 하나도 맡지 않았다. 그런데도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도시국가 피렌체의 정관계를 쥐락펴락하는 막후 실세였다. 예술에 조예가 깊어 ‘대공’으로 불렸던 그는 젊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곤 자신의 대저택에서 함께 살게 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후원했다.   

메디치 가문 없는 르네상스는 상상하기 어렵다. 중세의 암흑기를 걷어내고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유럽 전역에 걸쳐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일어났던 문예부흥운동, 즉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피렌체가 발상지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힘차게 시동을 걸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가의 예술적 후원 덕분이다.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르네상스 대표 화가들이 모두 메디치가의 지원을 받았다.   




척화의 상징에서 최대 관료 집안으로 

  조선 땅에도 메디치가에 버금가는 예술 후견인 가문이 있었다. 안동김씨, 반남박씨, 풍양조씨…. 누대에 걸쳐 수도 한양에서 관료생활을 했던 벌열가이자 세도가들이 그들이다.      

벌열가문들의 예술 후원 활동은 한양의 급속한 도시화와 관련 있다. 한양은 17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함께 하루하루 세련되어지고 번창했다. 길은 넓어지고 저잣거리엔 물건들이 넘쳐났다. 서울과 그 근교에 살면서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던 이들 벌열가문, 즉 ‘경화사족(京華士族)’ 의 자제들은 한양의 도시문화를 이끌었던 주역이다. 미술과 문학도 그렇게 그들에게서 사랑받았다.  
  


   이 가운데 안동김씨 ‘조선의 메디치가(家)’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16세기 이후 서울에 세거한 안동김씨 가문은 특히 ‘장동 김문(壯洞 金門)’으로 불리며 조선 후기 최대의 예술 후원 가문으로 평가받는다. 
 
장동 김문은 본거지 안동 소산에서 서울 청풍계((淸風溪: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뒤쪽 계곡)로 이주한 이후 유력 문벌로 성장한 김상용(金尙容 1561∼1637), 김상헌(金尙憲 1570∼1652) 형제의 후예를 가리킨다. 
  

   장동 김문은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순절하고 김상헌이 척화삼학사가 됨으로써 척화와 충의를 상징하는 집안으로 이미지를 굳히며 정계에 무게감을 드러냈다. 이후 장동김씨 문중은 사화로 대변되는 양반 계급의 격렬한 권력투쟁 와중에서 극심한 부침을 겪지만 순조대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최대 세도 가문으로 등극한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증손 김창집(金昌集 1648∼1722) 부자는 숙종 때 연이어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영광은 늘 잠시였다. 노론의 핵심인물었던 김수항은 기사환국 때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진도로 유배를 보내져 사사된다. 김창집 역시 부친의 사후 벼슬을 멀리하고 지냈으나 남인이 실권한 갑술환국 이후 관직으로 돌아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다. 하지만 그 역시 신임사화로 죽임을 당하고야 만다.
 
가문은 부활한다. 19세기 초반 순조 때 김창집의 현손 김조순(金祖淳 1765∼1832)임금(순조)의 장인 자리까지 오르면서 장동 김문은 조선 양반 사회 권력 사다리의 최정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실경산수에 영혼을 불어넣다

   장동김씨 사람들은 권력의 한가운데 있거나, 권력을 멀리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예술을 가까이했다. 메디치가와 같은 그들의 미술 후원 활동을 살펴보자.   
 
우선 김상용 김상헌 형제가 서화에 조예가 깊었다. 김상용은 청풍계에 정자를 지어놓고 글씨와 그림을 즐겨 감상했다. 정자 이름부터가 유유자적하다. 와유암(臥游庵)이다. 당시 대표적 화가 이정이징이 그의 사랑을 받았다.  

김상헌도 그림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유명한 그림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단번에 달려가 빌려보았을 정도.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정도가 고개지와 미불을 뛰어넘는다고 자부했다. 무엇보다 ‘학예일치’는 사대부의 기본 덕목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화단에 끼친 안동김씨의 진짜 위력은 이제부터다. 그들은 단순한 서화를 즐기고 모으는 수준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정신과 조류를 탄생시켰다. 
  

진경산수의 시대를 열다

    조선 후기, 우리 회화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다. 조선에는 중기까지만 해도 중국화의 영향을 깊이 받아 산수를 그려도 이 땅의 산천이 아니라 중국 산수화를 모사한 관념 산수가 지배적이었다.  조선 중기 묵화 속 산수는 우리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라. 그건 우리의 산하가 아니지 않는가. 이런 분위기를 뒤엎고 우리나라 산수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리자며 등장한 전위 미술이 진경산수(혹은 실경산수)였다.   
 
그 진경산수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고 서막을 연 것이 안동김씨였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金壽增 1624∼1701). 그는 서예에 두각을 드러냈고 지식인 사회의 대유행했던 금석문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동생 수항이 스승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함께 유배되자 과감히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화천에 들어간 것. 그곳에서 농사지으며 은일했다.
 
은둔의 삶 속에서 멋을 추구했던 그는 주자의 행적을 모방한다. 그곳을 곡운(谷雲)이라 부르고 경치 좋은 9곳을 평양 출신 문인화가 조세걸(曹世傑)에게 그리게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다. ‘곡운구곡도’에는 생생한 우리 산수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띠집과 백성들의 농사짓는 모습, 닭 개 소 나귀 등 동물의 행동까지 빠짐없이 사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 조세걸, <곡운구곡도> ‘곡운구곡도첩’




  이 그림을 제작할 때 김수증은 화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 것인지 지도했다. 거울에 반사되듯 사실적으로 그리게 했다는 것. 현실의 있는 그대로의 재현, 이것이야말로 진경산수가 갖는 사실정신의 핵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곡도’는 당시 지식인 사회의 유행이었다. 중국의 주자를 흠모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의 무위구곡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많은 이들이 구곡도를 그렸다. 이 때문에 앞서 율곡이 황해도 해주 석담을 담은 고산구곡을 그리게 했지만, 거기에는 우리 산천을 사생한다는 개념은 없었던 것이다.
 
김수증의 조카 김창협 ‘곡운구곡도’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서 좋은 그림을 보면 핍진하다고 말하고 또한 좋은 경치를 보면 그림과 같다고 한다. 그리는 자가 뜻이 이르는 곳을 따라 대상을 배치해 때로 붓 아래에서 절정의 좋은 경계를 환상처럼 내기 때문이다. 그런즉 선생(김수증)이 산에 있을 때는 각건에 지팡이 짚고 구곡을 노닐었으니 이것이 곧 ‘화경계(畵境界)요, 산을 나와서는 문 닫고 집에 틀어박혀 그림에서 상상했으니 이것이 곧 ‘진구곡(眞九曲)’이다. 진(眞)과 화(畵)가 어찌 나뉘겠는가? 이 그림을 보는 자들은 마땅히 먼저 이 공안(公案)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곡운구곡도’를 통해 김수증이 진경산수의 개념을 실천으로 보여줬다면, 조카 김창협은 이렇듯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것이다. 
 
실제 김창협의 동생 김창업(金昌業 1658∼1721) 등 그의 여섯 형제들이 18세기 조선 화단에서 각각 풍속화와 산수화를 대표해 사실주의를 구현했던 조영석(1686∼1761)정선을 후원했다. 조영석은그림을 보고 그림을 옮겨 그리는 것은 잘못이며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야만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삼연 김창흡은 형인 창업 등 여섯 형제와 함께 백악사단을 만들어 시인 묵객들과 함께 문학과 예술을 논했다. 여기에 화가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 시인 사천 이병연(李秉淵 1671∼1751) 등이 가세했던 것이다.   
 
이들 시인과 화가들이 인왕산 아래 모여 서로 교유하면서 예술적 영감을 주는 삶을 상상해보라. 그들이 있어 겸재는 행복했을 것이고, 예술세계는 풍성해졌을 것이다. 






↑ 겸재 정선, <청풍계도> ‘장동팔경첩’. 
인왕산 동쪽 기슭에 있는 김상용의 별장 청풍계를 그린 것이다.






↑ 겸재 정선, <청휘각도> ‘장동팔경첩’.
청휘각은 김수항의 정자로 인왕산 기슭 옥류동 저택의 후원에 위치했다.




    특히 김창흡은 겸재를 대동하고 묵객들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기도 했다. 이때 겸재의 친구로서 금강산 초입의 금화 현감으로 가 있던 이병연도 여행에 동참한다. 이병연은 이때 그린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모아 ‘해악전신첩’이라는 화첩을 만들고 폭마다 제시를 붙인 다음 스승 김창흡에게 보인다. 여기에 김창흡도 글(제사)를 붙인다.  






↑ 겸재 정선, <금강내산총도> ‘해악전신첩’. 
비단에 담채, 49.5 뻂 32. 5㎝, 간송미술관 소장.






↑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총도>에 부친 김창흡의 제사.





이렇게 해서 탄생한 ‘해악전신첩’이야말로 진경산수의 정수였다. 그러고 보면 진경산수의 뿌리는 노론이라는 일부 시각이 지나친 것만은 아니다. 




수백 년에 걸친 예술 사랑과 후원 활동
 
   19세기로 넘어오면 장동김씨 집안 예술적 후원가로는 풍고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을 빼놓을 수 없다. 김조순은 경화사족 출신 정치인이자 예술가 사상가의 전형적인 삶을 살았다. 김조순은 정조가 키운 친위관료로서 정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정조는 김조순의 원래 이름 ‘낙정(洛淳)’을 ‘祖淳)‘으로 바꾸어 내리고 ‘풍고’(楓皐)라는 호까지 지어줬다. 정조가 곁에 두고 싶어 지방관으로 파견하지 않았을 정도로 사랑받았다. 급기야 1780년 정조에 의해 당시 세자 순조의 장인으로 간택되기에 이른다.  
   
김조순시서화 및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판소리 공연과 기악 등에 흥미를 느껴 이에 대한 시를 지었고, 거문고를 배웠다. 글씨와 그림에 능해 정조가 그의 글씨를 궁궐 내 부용당(芙蓉堂) 현판에 쓰기도 했다. 그림을 감상하면서 평문을 짓기도 했는데, 조선의 산하를 그린 사실적으로 그린 정선보다는 중국색이 짙은 심사정(沈師正 1707∼1709)을 더 선호했다. 19세기 들어서는 청조 문물이 적극적으로 유입되면서 실경산수가 밀려나는 시류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19세기 중후반 안동김씨 중에서 예술 후견인 반열에 오른 이로는 김이도(金履度 1750-1813), 김흥근(金興根, 1796∼1870), 김유근(金유根, 1785∼1840)등이 있다. 
 
김이도는 중인 컬렉터 석농 김광국, 문인 서화가 신위(申緯 1769∼1847)와 어울렸다. 신위는 집안에서 대대로 간직해오던 황공망‘부춘산거도’를 김이도가 간절히 원하자 몰래 주었다는 아름다운 일화도 전해진다. 

헌종 때 안동김씨 세도를 믿고 방자하게 굴어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도 했던 김흥근은 골동서화를 많이 간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김흥근은 당시 이름을 날리던 화가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3)과 절친했다. 김흥근은 전남 진도에서 서울에 올라온 추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3)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창작활동을 독려하는 후견인 노릇을 했다. 허련은 김흥근의 서화 수장고 역할을 했던 서울 근교 별장 현대루(玄對樓)에 놀러가 컬렉션을 감상하고 감식해줬다. 
  
김조순의 아들 김유근신위 권돈인 김정희와 친분을 나누며 서화를 즐겼다. 메디치가와 안동김씨. 둘의 공통점을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을 향유하고 지원하는 일은 권력과 부를 지닌 이들의 몫이었던 것 같다.









칼럼니스트 상현재

그림 사 본 적 있으세요? 저도 저렴한 판화 말고는 사 본 적이 없어요. 한데 그림을 사랑하는 자, 그림을 사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조선시대 최고 컬렉터, 석농 김광국의 화첩에 나오는 얘기지요.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보게 되고, 보게 되면 소장하게 된다' 그 문장에 반해, 진정 그림에 미쳤던 조선의 컬렉터들을 찾아나서게 됐습니다. 저랑 그들을 만나보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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