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견디어 꽃피운 동백 같은 삶이여...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 정일근,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중
진실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겨울이었을 것입니다. 강진만 바닷바람이 밀고 올라올 때마다 그이는 떠나 온 한양을 생각하고 헤어진 친족들을 떠올리며 눈물지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배소를 떠도느라 제대로 돌보아 주지도 못한 새에 헌헌장부가 되었을 두 아들에 대한 정은 더욱 애틋했을 것입니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라는 한 편의 시는 그런 정황을 참 잘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이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그 춥고 길고 어두운 배소의 세월동안 자신의 학문과 저술의 길을 진실로 백성을 위하고 보살피는 길로 몰아갔습니다. 눈 쌓여 인적마저 끊어지고 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겨울 밤 문풍지 울음 속에서 그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적어도 떠나온 조정의 아악소리와 벗어버린 금빛 비단 옷의 광채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열심히 땅을 파고 곡식을 심건만 늘 저녁 밥상 한끼가 자유롭지 못했던 불쌍한 백성들에 대한 가이없는 연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랬길래 오백여 권에 이르는 그이의 저서들은 한결 같이 애민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으며 실학의 토대를 떠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과거에도 물론 가난한 백성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긴 했지만 유배를 떠나와서는 정말 이 나라 백성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현실에 보다 절실하게 눈떴을 것입니다. 다산의 고뇌와 다산의 학문적 집대성은 그래서 유배지의 현실과 표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귤동마을 거쳐 만덕산 자락의 다산 초상에 오르는 동안 왜 이곳이 배소가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습니다. 이곳은 멀리 가우도와 죽도를 바라보는 물길을 제외하면 만덕산, 서기산, 주작산이 가로막혀 대처로의 출입이 용이하지 않은 형세입니다. 좁고 가느다랗게 해안선 깊숙이까지 뚫고 들어와 있는 강진만 물길을 타지 않는다면 여러 개의 첩첩 산을 넘고 나서야 비로소 우마 소리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오르내리며 그이는 새삼 호남땅과 자신과의 기이하면서도 질긴 인연을 떠올렸을 법도 합니다. 일찍이 화순 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호남 땅에 와 산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다감한 감성의 현감 자제로 아름다운 풍광의 산하와 명찰들을 주유한 시간이었을 뿐입니다. 장년이 되어 그 호남의 오지에 귀양와 장장 20년 가까운 세월을 갇히는 처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했던 문벌집안의 자제로서 순탄하게 이어지는가 싶던 다산의 삶이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 것은 천주교에 대한 서슬퍼런 금압이 내리면서부터였습니다. 그이의 정신적 후원자였던 정조 사후 신유사옥(1801)의 광풍이 몰아치면서부터 이리 쫓기고 저리 내몰리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셋째 형 약종과 스승의 종손인 이가환 그리고 이승훈 등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면서 마침내 약전, 약용 형제는 공교롭게도 그 옛날 떠나갔던 호남땅으로 다시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산초당에 올라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생각해봅니다. 희미한 등잔불 하나만이 홀로 타올랐을 춥고 쓸쓸한 이 곳에서 저 유명한 ‘목민심서’나 ‘경세유표’ 같은 명저가 쓰여지게 되고 마침내 조선조를 밝힌 실학과 민본 사상의 횃불이 찬연히 타오르게 된 그 묘리 같은 것에 대해 말입니다. 가혹할 만큼 삶을 휘몰아쳐서 그 속에서 한 떨기 꽃을 피워내도록 하는 어떤 섭리에 대해서 말입니다. 혹독한 겨울 지나고서야 화려한 동백이 피는 이치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엉 대신 기와를 얹은 지금의 ‘초당’은 제법 호사한 처소처럼 되었지만 다산이 처음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왔을 때에야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다산의 발길과 손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초당 부근을 거닐면서 나는 그이의 저 차고 맑고 시린 고독의 장면들이 손에 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찬물을 길어냈던 샘 뒤의 바위에 새긴 정석 두 글자는 신선 살던 옛 부용성의 고사를 생각하며 그이가 직접 쓰고 새겼다고 전해지지만 그 깊게 패인 글씨는 아무래도 각고의 흔적이자 고독을 새긴 각고의 표징으로만 다가옵니다. 눈물과 회한으로 돌을 파들어 간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호사가들이 다산사경으로 부르는 약천이며 차를 끓여 마셨던 넓은 바위, 연못 속에 돌멩이를 쌓아 만든 석가산 같은 것들마다 적거의 진한 고독의 흔적들로 다가올 뿐입니다.
그러나 흑산도로 유배와 있던 중형을 밤중에라도 찾아가 그 옷소매 한 번잡아 볼 수 없을 정도의 그 처절한 고독의 기간들을 그이는 정금처럼 단련하여 갔습니다. 그리하여 만덕산보다도 더 높은 ‘다산학’의 크고 우뚝한 산 하나를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왁자하게 몰려왔던 한 떼의 관광객들이 우르르 내려가 버리고나자 초당은 다시 어둡고 적막한 본디 모습으로 되돌아 와 있습니다. 그 때 그 어둡고 쓸쓸한 공간 저편에서 내 눈을 쏘는 붉은 빛을 본 것 같았습니다. 다가가보니 잡목 사이사이에서 동백나무들이 꽃망울을 움트려 머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겨울의 그 혹독한 추위와 덮인 눈 속에서도 동백은 그 꽃망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삼월 말 쯤 저 꽃망울이 일시에 터져 초당을 환하게 물들일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문득 추운 겨울을 견디어 낸 뒤 붉은 꽃을 토해내는 동백이야말로 시대의 겨울 속에서 아름다운 사상의 꽃을 피워낸 선각자 다산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산초당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기슭에 있다.
다산은 장장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가운데 십 여년을 이곳에서 지내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같은 경세서를 비롯해 정치, 문학, 지리 등에 걸친 방대한 저술과 시작 등을 하였다. 초당은 본래 귤림처사 윤단의 소유였다. 1957년에 복원되었고 1974년에 동암과 서암이 다시 복원되어졌으며 새로 천일각이 지어졌다.
- 김병종의 新화첩기행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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