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의 찻자리 ⑤│부안 원효방

2016. 2. 3. 21:01茶詩



      

원광디지털대학교 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 후원 - 명문가의 찻자리 ⑤│부안 원효방


화정사상의 차정신을

일깨워주는 원효

 

조인숙(한국차문화교류협력재단 상임이사)


  

   봄 이맘때 부안 내변산은 온통 꽃밭이 된다. 파르스름한 새싹과 산벚꽃이 어우러져 전체가 커다란 꽃밭을 이루었다. 차인들의 마음에 늘 자라나고 있는 원효방(元曉房)을 다시 찾는다. 천여 년 전 원효 대사와 사포성인을 현재의 자리에서 그려보고자 한다.


원효(元曉) 백제땅 부안을 찾다


循山度危梯     산을 따라 위태로운 사다리 건너고
疊足行線路     발을 겹치며 선로를 다니네
上有百○○     위엔 백 길의 산마루 있으니
曉聖曾結宇     원효가 일찍이 집 짓고 살았네
靈○杳何處     신령의 자취 어디로 사라졌나
遺影留鵝素     남긴 진영 비단에 머물러 있구나
茶泉貯寒玉     다천에 맑고 깨끗한 물 괴었으니
酌飮味如乳     마시니 그 맛 젖과 같구려
此地舊無水     이곳에 옛날에는 물이 나오지 않아
釋子難棲住     스님들이 살아갈 수 없었다는데
曉公一來寄     원효가 한번 와서 산 뒤에는
甘液湧巖竇     바위 구멍에서 단물이 솟아났네
吾師繼高○     우리 선사가 높은 도를 이어받아
短葛此來寓     짧은 갈초(누더기) 입고 이곳에 사네
環顧八尺房     돌아보건대 팔 척쯤 되는 방에
惟有一雙○     한 쌍의 신발이 있을 뿐이구나 
亦無侍居者     시중드는 자도 없으니
獨坐度朝暮     홀로 앉아 세월을 보내누나
小性復生世     소성이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敢不拜○○     감히 굽혀 절하지 않겠는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 제9권에 <팔 월 이십 일에 능가산 원효방에 제하다[八月二十日 題楞迦山 元曉房]>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 시는 “변산을 능가라고도 한다. 옛날 원효가 살던 방장(方丈)이 지금까지 있는데, 한 늙은 비구승(比丘僧)이 혼자 수진(修眞)하면서 시중드는 사람도, 솥·탕반 등 밥 짓는 도구도 없이 날마다 소래사(蘇來寺)에서 재만 올릴 뿐이었다[邊山一名楞迦. 昔元曉所居方丈. 至今猶存. 有一老比丘獨居修眞. 無侍者. 無鼎○炊 ○之具. 日於蘇來寺○一齋而已]”라고 시작한다.



   이렇듯 변산과 원효의 연관성은 원효가 열반한 후 583년이 지난 1200년에 이규보를 통해 기록되었고, 이후 차문화사에 등장하고 있다. 이규보가 1199년 전주목(全州牧) 사록(司祿)에 보임되고 난 후 시간을 내서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기록한 것을 모은 《남행월일기》에서이다. 그해 12월에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벌목(伐木)하는 일을 맡아보는 ‘작목사(斫木使)’를 했다. 그 당시 변산이란 곳은 우리나라의 재목창(材木倉)이었다. 그때의 심경을 이규보는 ‘나는 노상에서 장난삼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라는 글과 함께 남긴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權在擁軍榮可○
官呼斫木辱堪知
以類於擔夫樵者之事故也


군사 거느리고 권세부리니 그 영화 자랑할 만한데
벼슬 이름 작목사라 하니 수치스럽기 그지없네
이는 나의 맡은 일이 담부(擔夫)·초자(樵者)의 일과 같기 때문이다.



사포성인이 차 달여 공양


   이는 이규보가 작목사로서 부안땅에 온 것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며, 경신년(1200년) 8월 20일은 변산 소래사(蘇來寺: 지금의 내소사)에 갔으며 그 다음날 원효방에 갔다는 글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부령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천천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 곁에는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거처하자 사포(蛇包)가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다. 그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쳐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했다.


   원효가 남도땅 부안 바위동굴에서 수도한 때는 백제가 멸망한 통일신라 때라고 하는 설이 보편적인데 그가 백제땅을 찾은 것은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백제인들의 원혼을 달래고 유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화정사상으로 살아나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대략 100여 부 240권이다. 특히,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원효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뛰어난 저술이다.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른다. 이것은 그의 일심(一心)사상·무애(無崖)사상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효는 인간의 마음자리를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 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했다.
또한 《열반경종요서》에서 “다툼[諍]을 좋게 만든다[和]”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서로 다툼을 누그러뜨려 마음을 다스리듯이 좋게 만든다는 것으로, 사람의 다름을 하나 되게 만드는 사상을 말한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효의 체취와 백제 차의 모습


   원효는 원래 스님이었기에 차를 마신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며, 공주와 결혼하여 궁에서 머물렀을 때는 왕실의 차도 접했을 것이다. 원효방에 와서는 사포가 만들어준 차를 마셨을 것이다. 원효가 백제땅 부안에 오면서 평소 즐겨 마시던 차를 가져왔다기보다는 사포가 차를 만들어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사포는 어떻게 차를 구했을까. 다른 지역에서 가져왔다고 보는 견해와 당시 부안지역에 차나무가 자라고 있어 이를 가지고 만들었을 거라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부안에 3군데에서 차가 난다고 적고 있다. 그중 한 곳이 원효방이 있는 상서면 감교리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 일찍부터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원효방 밑에 있는 개암사 주변에는 예전부터 차가 많았다”라고 하는 말들이 구전되고 있는 점에서도 개연성을 찾아볼 수 있다.
작년 여름, 개암사에서는 주변을 말끔히 정비하여 차밭을 만들었다. 과거의 모습을 현재에 되살려 그 물질과 정신을 본받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결과물은 후대에 이어져 우리의 정신문화로 살아날 것이다.


《차의 세계》2007년 5월호 참조

기사 작성일 : 10/16/2007 1:36:02 PM


suncha.co.kr/Article/Article_View.aspx?ArticleSeq=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