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의 찻자리 ④│경주 삼화령

2016. 2. 3. 21:11茶詩



      

원광디지털대학교 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 후원 - 명문가의 찻자리 ④│경주 삼화령


충담 선사를 기리며

 

김종희(국제차문화교류협력재단)


   신라의 숨결과 역사가 묻힌 경주, 우리 차문화가 부흥했던 신라를 떠올리며 봄 향기와 함께 다가오는 삼월 삼짇날의 충담(忠談) 선사가 그려진다. 차를 통해 시대적 고뇌와 중생 구제를 염원했던 충담 선사를 기리며 원광디지털대학교 차문화경영학과 학생들이 경주 남산을 찾았다. 그들과 함께 충담의 정신을 다시 새기며 신라의 차문화를 짚어보았다. 



충담 선사가 매년 삼월 삼짓날 미륵세존에게 차를 올렸던 공간.

삼화령이라고 부른다.
경주의 향토사학자 유경렬 옹이 비정한 이래 이곳은 삼화령으로 굳어졌다.






























   차문화는 차와 관련되어 나타나는 관습과 제도, 사상과 예술 등 정신적인 면과 생활적인 면이 통합된 고도의 종합문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차문화는 오랜 전통 속에 이어져 온 격조 높은 음다문화(飮茶文化)로서 유(儒), 불(佛), 도(道)의 심오한 사상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선(禪)과 함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이 구축되었으며, 차(茶)는 승려들의 수도 정진에서 표상적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차(茶)의 전래에 대한 자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흥덕왕 3년(서기828) 조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널리 성행하였다.1) 이 기록을 통해서 삼국시대 말기인 선덕여왕 때부터 우리나라에 차나무를 심고 가꾸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당(唐)문화의 수입과 함께 차가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불교의 공인과 중국과의 문화교류 확대로 9세기에는 왕족, 귀족, 승려, 화랑, 서민들에게까지 음다풍속(飮茶風俗)이 성행하였고 불교사원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헌다의식(獻茶儀式) 행사와 각종 궁정행사에도 차가 널리 쓰였다.


   진흥왕(579~632) 이후에는 인재 양성을 위한 화랑(花郞) 조직을 통해 신라의 차문화가 발전되었다. 통일신라(676~935)의 차문화는 불교문화의 융성과 화려한 귀족사회의 발전으로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쳐 차문화의 보급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경덕왕(742~764) 충담사 표훈대덕> 조에 의하면 미륵신도인 충담 대사가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공양하고 난 다음 귀정문(歸正門)의 누상에서 차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담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경주 남산의 삼화령(三花嶺)에 있는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곤 했는데, 삼화령은 화랑의 유오지(遊娛地)로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 생의사(生義寺)가 세워지고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봉안된 것은 화랑의 유오(游娛)를 통한 수련에 있어 미륵신앙이 항상 함께 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또한 충담사가 삼짇날(3.3)과 중양절(9.9)에 미륵세존에게 차(茶)를 올린 것은 불교적 헌다(獻茶) 의식만이 아니고 신라의 하층민 대중(下層民 大衆) 구제에 대한 염원이 담겨져 있으며 지난날 통일 전쟁에 희생된 신라 장정(壯丁)들의 넋을 위로하는 뜻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삼월삼일(三月三日), 중삼중구일(重三重九日)은 액을 막는 날로 믿어온 세시풍속(歲時風俗)과도 유관하며 당시에도 중삼(重三), 중구(重九)의 양이 겹치는 날에는 액을 막고 복을 비는 민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충담이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고 온 경주 남산(南山)은 신라 시조 혁거세왕의 궁이 있던 곳으로 귀족들의 회의기구로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고 국가의 존망에 지대한 역할을 한 신성한 곳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경주향교의 샘물. 이 샘로 차를 우렸으리라.

























   경덕왕은 난세(亂世)를 극복할 방책을 화랑도(花郞徒)에서 찾고자 했다. 남산 삼화령 미륵불(彌勒佛)께 차공양(茶供養)을 드리고 오던, 납의(納依)를 입은 서민적 대중승의 모습을 한 승려 충담을 경덕왕은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대도(大道)를 읊을 수 있는 적격자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충   담이 지고 있는 앵통 속에는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헌다공양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하였으므로, 경덕왕은 충담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차 한사발을 청하였다. 경덕왕과 충담은 동시대인으로 시대적인 고뇌를 함께 한 사람이었다.
왕에게 차를 달여 올리니 차의 향기에 감도는 신령스러운 감동 또한 깊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차를 우려 마시면서 자연히 <안민가(安民歌)>를 짓는 계기가 마련되었다(충담은 <안민가>를 창작하였다). 충담은 일찍이 화랑도에 몸을 담아 기파랑(耆波郞)의 고매한 인격을 찬양한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짓기도 했다. 




   < 안민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신다면
백성이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중생이
이를 먹어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시렵니까? 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 알리라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늘 태평할 것입니다.


   위의 내용에서 <안민가>는 군주에 대한 충담의 노래로서, 임금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 어린아이로 비유하여 정치를 잘해서 백성을 자신의 자식을 양육하는 것처럼 잘 보살펴야 백성들도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다스려야 이 나라를 최고로 여겨, 버리고 떠나지 않게 되므로 정치를 잘 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와 유교 사상에 바탕을 둔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충담의 비판적 태도와 개선을 향한 강한 의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경덕왕이 충담을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그가 거듭 사양하였다. 진리,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충담의 높은 절조와 사무사(思無邪)한 경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와 같이 충담은 <안민가>를 통해 민생안정의 방도를 제시하고 미륵에게 헌다의식을 행하여 하층민 대중(下層民 大衆) 구제에 대한 염원과 신라의 안정을 기원하였다. 또한, 다구가 들어있는 통, 차를 우리는 전다(煎茶)와 팽다(烹茶)의 기록을 통해 신라의 차는 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차를 다리는 충담 선사의 형상을 그리며 삼월 삼짇날 숭경(崇敬)의 정신으로, 충담이 신라의 안녕을 기원한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의 평안과 행복을 감사하며 정성껏 다린 차 한 잔을 미륵세존께 올리리라.


-《차의 세계》2007년 4월호 참조

기사 작성일 : 4/10/2007 2:47:3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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