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星湖李瀷(1681-1763)의 生涯와 思想

2016. 2. 9. 02:40우리 역사 바로알기


      

3-3 星湖李瀷(1681-1763)의 生涯와 思想 조선시대사학보 / 조선탐방

2014.10.09. 05:54

           http://sambolove.blog.me/220145367572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李成茂*                          * 韓國精神文化硏究員敎授.

<目次>
1. 머리말
2. 성호 이익의 생애
3. 성호 이익의 사상
4. 맺음말


1. 머리말


   성호 이익은 17세기 후반기부터 18세기 전반기에 살았던 대표적인 실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畿湖南人에 속해 있었고, 17세기까지 만해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정계와 학계에서 남부럽지 않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호는 1680년(숙종 6) 庚申換局으로 그의 아버지인 李夏(1628-1682)이 평안도 雲山으로 귀향간 다음 해인 1681년(숙종 7) 10월 18일에 그곳에서 태어났고, 1706년(숙종 32)에 그의 둘째 형인 (1660-1706)이 왕세자(張禧嬪의 아들, 景宗)를 모해하려는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가 죽음을 당하는 악운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생 동안 학문에 종사하면서 난마와 같은 국정과 혼탁해진 사회의 문제점들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한편 개혁사상을 주도하였다.

   성호는 어려서 둘째형 李潛(剡溪)에게서 수학하였고 크면서 그의 셋째형 李漵(1662-1723)와 從兄氵震(1654-1706)과 함께 공부하여 家學을 전수받았다. 李潛· 李漵兄弟는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儒學者이던 李玄逸이 이들 형제를 극구 칭찬하면서 교제를 원했을 정도로1) 학행을 통해 사림의 명망이 있었다. 특히 李漵는 사후에 문인들로부터 ‘弘道先生’이라는 私諡를 받는2) 異例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집은 曾祖父 李尙毅(少陵)때부터 家運이 일어나 여러 곳에 田莊과 노비가 있었고, 아버지인 李夏鎭(梅山)이 燕京에서 사온 수천권의 서적을 읽어 풍부한 식견을 가질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뜻맞는 주위의 학자들과 名山大川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국토의 풍물과 문화유적의 내력을 파악하였다.


   성호는 어려서부터 몸이 쇠약하여 10세가 지나서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효행과 형제간의 우애가 뛰어나고 학문에 대한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데다 독실하게 공부하여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었다.
무릇 훌륭한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정에 경제와 학문적 분위기가 좋아야 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질을 타고나야 하며 훌륭한 스승이 있어야 한다. 


   성호는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집안에 경제력과 책이 있었고, 가문에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학문에 대한 개인적인 열의도 뛰어났다. 다만 뚜렷한 스승은 없었으나 이는 가학으로 대신했고, 위로는 退溪李滉을 학문의 宗長으로 私淑하였으며 선배로서 세상일에 밝은 栗谷 李珥磻溪 柳馨을 본받았고, 아래로는 順菴 安鼎福· 邵南 尹東奎· 河濱 愼後聃· 貞山 李秉休등의 문인들을 거느려 이른바 星湖學派를 형성하였다.


   성호학파 가운데는 아들인 孟休(1713-1751) · 조카벌인 震休(1657-1707) · 用休(1708-1782) · 秉休(1742-1802), 손자벌인 重煥(1690-1752) · 吉 喆 煥(1722-未詳) · 晶煥(1786-未詳) · 森煥(1789-未詳) · 九煥(손자) · 家煥(1742-1801)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1)『葛庵集』卷10,〈答權天章〉“李君潛聞是佳士而未曾接一日之款又聞其弟名漵者不事場屋有志尙風致固嘗願交而不可得異時儻不免復入脩門謹當相訪以副敎戒之意但恐淸濁異類無緣得相接耳”.
2)『星湖先生文集』卷32, 弘道先生文集序.



   성호가 살던 시대는 안으로 노론에 의한 주자학 일변도의 정책 대한 반발과 밖으로 西勢東漸의 물결을 타고 들어오는 西學의 도전이 있었던 때였다. 당시에는 정권을 차지한 노론이 尊明事大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임진왜란을 도운 명나라를 극도로 존경한 나머지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에 대하여 復讐雪恥를 내세워 北伐論을 주장하였고, 주자학의 신성불가침을 내세워 일체의 다른 사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동아문화의 중심이었던 명나라가 망하였으니 조선이 중화문화의 중심이고 주자학을 비판하는 사람은 斯文亂賊으로 몰아 타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색되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은 많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른바 실학사상이 그것이었다.


   실학사상은 비현실적인 尊華思想에서 비롯한 北伐論을 비판하고 오히려 청나라에서 발달하고 있는 중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일부의 北學派가 있었고, 명분도 중요하지만 현실은 피할 수 없다는 인조반정공신 계열인 소론陽明學이 있었으며, 정권에서 몰려난 남인계에서는 체제비판의 성격을 띠우는 西學에의 경도, 천주교 신봉 경향이 있었다. 북학론失勢老論 학자들 중에서, 양명학 소론계열 학자 중에서(外朱內王의 소극적 형태로서), 천주교는 失勢南人의 극단론자들 중에서 신봉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다 같이 독선적인 주자학 이론에 대한 비판의식과 미증유의 새로운 경험인 西學에 대한 호기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성호는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기본적으로는 유학자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사고의 개방을 주장하면서 국정의 난맥상을 파헤치고 중국문화의 주변문화로서의 속성을 벗어나 자아의식을 확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치에 있어서 인사제도, 과거제도의 개편과 붕당의 타파를, 경제에 있어서는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農業救國論을, 사상에 있어서는 자국의 역사 지리의 학습을 통한 자의식의 고양과 사상의 개방을 주장하였다. 따라
서 서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 특히 서양과학을 서양인 신부들의 漢譯 西學書를 통하여 익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성호는 모든 학문분야를 섭렵하였으나 성호의 문인들 가운데는 경학연구와 자의식 고양에 치중한 安鼎福· 尹東奎· 愼後聃· 李秉休· 李重煥 등의 星湖右派가 있는가 하면, 서학이나 천주교에 경도된 權哲身· 權日身· 李家煥· 丁若銓 등의 星湖左派가 있었으며, 丁若鏞은 이 두 파를 종합하였다.(정약용은 성호학파 뿐만 아니라 北學派의 이론도 수용하였다.) 


   따라서 성호에 대한 연구는 철학 역사 지리 문학 과학 경세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어 왔다. 李家源· 李乙浩· 金容傑· 權文奉 등은 그의 철학사상을, 韓㳓劤· 宋贊植· 韓永愚 등은 그의 사학사상을, 金龍德· 鄭萬祚· 李成茂· 文喆永 등은 그의 정치사상 및 경세론을, 鄭奭鍾· 元裕漢등은 그의 경제사상을, 李元淳· 李龍範· 朴星來· 趙珖· 車基珍등은 그의 서학 및 과학사상을, 金鍾鎭· 윤문배 등은 그의 문학사상을 각각 연구하였다. 그러나 성호의 학문이 깊고 그의 사상이 시대적 산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연구는 아직도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退溪· 栗谷· 茶山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호에 대한 연구가 좀더 심화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 성호 이익의 생애


   이익의 字는 子新이요, 號는 星湖이며, 本貫은 驪州이다. 廣州郡 瞻星里에 있는 星湖라는 호수가에 살았기 때문에 號를 星湖라 하였다.(‘星湖之濱’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에 星湖라는 호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성호는 1681년(숙종 7) 10월 18일에 그의 아버지인 李夏鎭(1628-1682)이 귀향가 있던 평안도 雲山에서 태어났다. 이하진은 부인이 둘이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龍仁李氏인 開城留守 李後山의 딸이요, 둘째부인은 安東權氏인 權大後의 딸이다. 성호는 하진의 다섯 아들(瀣· 潛· 漵은 용인이씨 소생이고, 沉· 瀷은 안동권씨 소생이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驪州李氏는 본래 중국 隴西에서 와서 驪州에 정착한 성씨라 하는데 고려 중기의 仁勇校尉 仁德의 후예이다.(여주이씨는 별파로서 李奎報의 아버지인 允綏의 후예가 있다.)  仁德의 후예는 여주이씨 족보에 남아 있는 高麗 開城府戶籍에 의하면 鄕吏의 戶長層으로서 고려 중기 이후로 하급관리직이나 무관직을 역임해 오다가 8世祖인 李繼孫에 이르러 文學으로 起家하였다.3)


   이계손(1423-1484)은 1447년(세종 29)에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하여
1455년(세조 1)에 병조좌랑으로서 原從功臣 2등에 오른 뒤로 江原·
永安· 黃海· 京畿 등 4道觀察使, 禮曹叅判· 刑曹判書· 大司憲·
漢城府尹· 兵曹判書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1470년(성종
1)에 永安道觀察使兼永興府使로서 鄕案을 만들고 향교교육을 일으켜
영안도의 유교교육을 부흥시킨 공로를 남겼다. 그리하여 그는 敬獻
公이라는 諡號를 받았고, 安邊․永興․咸興의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
였다.4) 그리고 이계손의 딸은 領議政鄭麟趾의 아들인 鄭敬祖에게 시
집갔고, 그의 종증조부 審(吏曹叅判)의 여동생의 사위는 名門 廣州李
氏인 李仁孫으로서, 그의 아들인 克培․克堪․克增․克墩․克均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현달하였으며, 그의 종고조부인 允琛(中書門下
舍人)의 고손 逖(藝文館直提學)의 사위는 韓明澮(領議政)의 아버지
인 韓起(監察)였다.5) 이로 미루어보아 이계손은 세조공신 계열인 훈구
로서 영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李繼孫이 가문을 일으
키는데 공이 컸으므로 성호는 그를 不遷位로 올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호의 가문을 문벌가문으로 격상시킨 것은 李繼孫의 5世
孫인 李尙毅(1560-1624)때 부터였다. 그의 世系는 繼孫(兵判)-之時
(縣監)-公礪(啓功郞)-士弼(應敎)-友仁(僉正)-尙毅(左贊成)로 이어지는
데, 이상의는 성호에게는 증조부가 되고, 여주이씨의 仲始祖로서 추


3)『驪州李氏族譜』참조.
4)『星湖先生文集』卷58, 大司憲李公神道碑銘幷序.
5)『驪州李氏辛巳譜』.

앙되는 인물이다. 李尙毅는 명종조부터 광해조까지 持平· 校理· 掌
令· 司諫· 執義· 應敎· 直提學· 承旨· 大司諫· 刑叅· 兵叅· 吏
叅· 成川府使· 大司成· 吏判· 刑判· 工判· 大司憲· 判義禁· 右
贊成· 左贊成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612년(광해군 4)에
는 李睟光과 함께 奏請使로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6) 뿐만아니
라 그의 子․女․姪들도 모두 현달하여 여주이씨의 전성기를 이루었
다. 1590년(선조 3)부터 1411년(광해군 3)까지 22년 동안 문과급제자
11인, 무과급제자 4인, 생원진사시 합격자 18인, 합계 33인의 과거급
제자를 배출한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중복합격자를 제외하면 26
인).7) 이상의는 아들 일곱과 딸 넷을 두었는데, 아들 손자 내외손을
합치면 60여인이 되었고, 그 후 曾․玄孫代까지 현달한 사람이 많았
다.8)
〈圖1〉驪州李氏少陵公派世系圖(官歷· 科擧)

6) 韓㳓劤,『星湖李瀷硏究-人間星湖와 그의 政治思想-』, 서울대학교 출
판부, 1980.
7) 앞의 책, 5쪽.
8)『星湖先生文集』卷56, 先祖少陵公簡帖跋.

위 세계도에 의하면 李尙毅의 직계 현손까지 문과 18인, 무과 3인,
생원 8인, 진사 27인, 도합 56인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중
幼學으로 문과에 급제한 3인(志完· 萬休· 重煥), 생원 · 진사에 다
합격한 1인(家煥)을 감안하면 40인이 생원 · 진사시 또는 문 · 무과
에 합격한 셈이다. 실로 놀라운 숫자이다. 또한 尙毅· 元鎭· 孟休·
星煥· 東煥· 家煥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바 있다.9)


   한편 가문이 번창하게 되자 이름난 인물이나 명문가와의 혼인도
늘어나게 되었다.
尙毅는 海平尹氏집안에서 西人名門인 이조전랑 尹晛(영상 斗壽
의 조카)의 딸과,
元鎭은 小北의 領袖였던 吏判 南以恭(宜寧南氏)의 딸과,
叔鎭은 역시 小北으로 禮判을 지낸 金藎國(淸風金氏)의 딸과,
志宣은 幸州奇氏집안의 北人名家인 영의정 奇自獻의 딸과,
志宏은 綾城具氏집안의 西人家門이던 牧使 具思欽의 딸과,
志定은 韓山李氏집안의 北人名門인 知中樞 李慶深(영상 山海의
七寸姪)의 딸과,
志寅은 豊山任氏가문의 大北權臣이던 判書 任就正(戶判任國老
의 子)의 딸과,
志安은 종친인 寧提君 李錫齡(全州李氏)의 딸과,
志裕는 安東權氏집안의 남인 名門인 도승지 權憘(숙종대 남인의


9)『驪州李氏族譜』및 李成茂․崔珍玉, 『司馬榜目』(CD-ROM), 韓國精神
文化硏究院, 1997.

영수인 大載와 大運은 그의 5寸姪임)의 딸과
夏鎭은 龍仁李氏 집안으로 서인명문이 된 개성유수 李後山의 딸
및 위의 權憘의 손자로 通德郞大後(宣祖駙馬東昌尉大恒과는 4촌,
領相大運, 吏判大載와는 6寸間)의 딸과,
斗鎭은 도승지 禹俊民의 아들 別提 禹袛身(丹陽禹氏)의 딸과,
奎鎭은 大北의 權臣이던 영상 朴承宗의 7寸叔인 판서 朴鼎賢(密陽
朴氏)의 딸과,
世鎭은 승지 鄭勝(海州鄭氏)의 딸과,
殷鎭은 宣祖때 우의정으로 己丑獄에 寃死한 鄭彦信의 손자 判書
鄭世規(東萊鄭氏)의 딸과,
國鎭은 同福吳氏집안의 南人系 名門이던 판서 吳竣의 아들 都事
吳挺漢의 딸과,
泳은 東萊鄭氏집안의 당대 제일의 名閥에 속한 참판 鄭萬和(영의
정 鄭太和, 좌의정 鄭知和의 弟)의 딸과,
湜은 陽川許氏집안에서 남인계 명문이던 宣敎郞 許塤(영상 許積
의 祖父潛의 증손)의 딸과,
氵震은 都事權尙規(安東權氏)의 딸과,
潛은 위에서 말한 同福吳氏 吳挺漢의 7寸姪이 되는 판서 吳始復의
딸과,
漵는 참판 鄭錀(草溪鄭氏)의 딸과,
瀷은 신숙주의 후손인 정언 申必情(高靈申氏)의 딸 및 당시의 남
인 명문인 泗川睦氏 進士 睦天健(우상 來善의 孫)의 딸과,
斗鎭의 庶子湛은 영의정 許積의 庶女와,
百休는 참판 宋錫範의 증손인 宋耆相(은진송씨)의 딸과,
億休는 풍산홍씨 집안의 南人系인 부사 洪萬運의 딸과,
學休는 진주유씨의 집안의 南人인 柳命天․ 柳命堅系인 교리 柳裁
의 딸과,
秉休는 진사 許逵(陽川許氏)의 딸과,
孟休는 南人名家인 平康蔡氏 吏叅 蔡彭胤(영상 蔡濟恭의 從祖)의
딸과,
元休는 晋陽姜氏중의 南人名家인 대사성 姜碩賓의 子인 姜㶅(柳
命天의 女와 혼인)의 딸과,
重煥은 위에서 말한 南人名家 泗川 睦氏집안의 睦林一(영상 睦來
善의 子)의 딸과,
晶煥은 진주유씨내의 또다른 南人系인 참의 柳憲章(訓將柳赫然
종손)의 딸과,
東煥은 洪星齡(남양홍씨로 관찰사 洪得一의 손자)의 딸과,
元煥은 金偉(안동김씨 金振의 손자이며 許蘭雪軒의 증손임)의 딸
과 각가 혼인하였다.
반면에, 尙毅의 첫째 딸은 위에서 말한 鄭彦信의 손자 부사 鄭世
美(동래정씨)에게,
둘째 딸은 대사간 李士慶의 아들인 참의 李後天(용인이씨이며 숙종
때 좌상 李世白은 그의 손자임)에게,
셋째 딸은 장령 金盡善의 아들인 輔德金德承(김해김씨로 숙종조
우상인 金宇杭은 그의 손자임)에게,
넷째 딸은 좌의정 李廷龜의 아들인 참판 李昭漢(연안이씨이며 그
아들인 殷相(판서), 弘相(정자), 有相(응교), 翊相(판서)은 모두 文科
에 급제하였다)에게,
志完의 첫째 딸은 磻溪 柳馨遠의 아버지인 설서 柳欽(문화유씨)에
게,
둘째 딸은 판서 李爾瞻의 아들인 대사성 李益燁(광주이씨)에게,
志宏의 첫째 딸은 상의원정 金鼎之(안동김씨)에게(金鼎之의 사위가
徐文道이고, 서문도의 손녀가 英祖妃貞聖王后임)
둘째딸은 판서 李好閔의 손자인 참봉 李命賚(연안이씨)에게,
世鎭의 딸은 좌의정 李行遠의 아들인 李萬最(전의이씨)에게,
夏鎭의 딸은 판서 睦昌明(사천목씨)에게,
萬休의 첫째 딸은 정인지의 후손인 첨지중추부사 鄭尙驥(하동정씨)
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와 같이 李尙毅가문은 海平尹氏, 延安李氏, 全義李氏, 東萊鄭氏,
南陽洪氏, 綾城具氏, 金海金氏, 龍仁李氏 등 서인 명문가문의 인물
뿐만 아니라 廣州李氏, 韓山李氏, 豊川任氏, 幸州奇氏, 宜寧南氏 등
북인가문과 陽川許氏, 泗川睦氏, 安東權氏, 文化柳氏, 同福吳氏, 平康
蔡氏, 晉州柳氏, 晉州姜氏등 남인가문의 인물과도 널리 통혼하고 있
었다. 조선 중기에는 아직 당파간의 분열이 조선 후기처럼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여주이씨의
통혼권은 점차 남인가문으로 좁아지게 되었다. 이는 黨內婚이 일반
화 되던 당시의 관행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광해
군조에 여주이씨는 소북에 속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상의
는 인사를 담당하였을 때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뽑도록 노력한 흔
적이 보인다. 그리고 인조조에 들어와서는 서인정권 하에서 살아 남
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서인들도 스스로의 분열을 막기 위하여 남
인들을 등용하였고 여주이씨는 남인으로 행세하였다. 여하튼 이상의
가문은 광해군조부터 숙종초까지 기호남인의 한 줄기로서 많은 인재
를 배출한 문벌가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이상의 가문의 당시의 정계, 학계에서의 활동도 대단하였
다. 尙毅의 관직은 인조반정으로 삭탈당하였으나 세 아들(志定· 志
寅· 志安)이 진사시에, 한 아들(志宏)이 생원시에, 네 아들(志完· 志
宏· 志定·志安)이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조와 인조조에 관계에서
활약하였으며, 손자 셋(元鎭·奎鎭·夏鎭)이 문과에, 손자 둘(斗鎭·衡
鎭)이 무과에, 증손 중에 문과 하나(湜), 무과 하나(渾), 현손 중에 다
섯(萬休· 震休· 龜休· 國休· 孟休), 그 다음대에서 다섯(元煥· 東
煥· 重煥· 星煥· 家煥)이 각각 문과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을 역임
하였다. 그 중 특히 元鎭은 Hamel 일행이 표류해 왔을 때 제주목사
로서 활약하였고, 여동생의 아들인 磻溪 柳馨遠의 학문에 깊은 영향
을 주었으며, 성호의 아버지인 夏鎭은 1674년 甲寅禮訟으로 남인정
권이 들어서자 許積· 許穆· 尹鑴· 權大運· 權愈· 吳挺昌 등과 함
께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남인淸南(許穆· 尹鑴)과 濁南(許積· 權
大運)으로 갈리자 淸南에 가까이 하면서 大司成· 都承旨· 大司憲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1678년(숙종 4) 3월에는 청나라에 사신으
로 다녀와 吳三桂의 난에 대비해야 한다는 尹鑴의 주장을 지지하였
다. 그후 1680년(숙종 6)에 남인정권이 무너지자 그 해 10월 평안도
雲山으로 귀향가 그곳에서 죽었다.10) 尙毅의 막내 동생인 尙信은 문
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禮曹叅判에 이르렀고, 성호의 둘째형인 潛은
일찌기 문명을 떨쳐 弱冠에 문과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少
年登科一不幸”이라 하여 아버지가 會試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여 그
만두었으며, 1706년(숙종 32) 9월에 幼學의 몸으로 왕세자(後日의 景
宗)를 해치려는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가 杖
殺당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여주이씨는 뒤에 소론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셋째형 는 글씨를 잘 써 ‘玉洞眞體’의 창시자로서
李匡師스승이기도 하였다. 성호는 실로 친형인 潛· 漵와 사
촌형 氵震(素隱)에게서부터 학문을 전수받고 함께 공부하였다. 그리고
元鎭· 夏鎭· 秉休· 震休· 孟休· 九煥· 森煥· 吉 喆 煥· 鳴煥· 重
煥· 家煥등은 당대에 알려진 학자들이었다. 특히 夏鎭과 漵, 震休
는 명필로 유명하였다.11)


   성호는 어려서부터 병이 많아 모친이 항상 약시중을 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공부를 늦게 시작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누가 시키지 않아
도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옆에서 친구들이 떠들고 장난을 쳐도 온종
일 묵묵히 책을 읽었다. 그리고 모친의 뜻에도 순종하였고, 아침 저
녁으로 문안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의 3년상을 입으
려 하였으나 예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만두었다. 성호는 모든 경
전과 程子· 朱子· 退溪의 글을 두루 섭렵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고,
뜻이 명확치 않은 것은 一字一意라도 끝까지 궁구하여 해명하였다.

 
10) 韓㳓劤, 앞의 책, 5-9쪽.
11) 韓㳓劤, 앞의 책, 5-9쪽.


    李夏鎭의 筆帖인「千金勿傳」(10帖李暾衡所藏本)은 이하진이 雲山
배소에서 작성한 것으로 그의 활달하고 유려한 필치가 잘 드러나 있다.
모친도 이점을 높이 평가하여 큰 기대를 걸었다. 또한 사치를 싫어
하여 항상 질박한 생활을 신조로 삼았다.12)


   성호는 25살 되던 1705년(숙종 31)에 增廣文科에 응시하였으나 錄
名이 격식에 맞지 않는다 하여 會試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며,13) 게다
가 다음 해 9월 둘째형 潛이 화를 입게 되자 서쪽 해안으로 피신하
여 科擧를 포기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가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다.14)
그는 학문하는 과정에서 師友의 도움없이 독학하던 시절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학문의 成功을 사우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지하
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15)
성호는 괴이한 행동이나 이름을 내는 일을 싫어하고 항상 스스로
수양하고 힘써 실천하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집안을 바르게 다
스리고 대인관계를 예법에 맞게 하여 士林들 사이에 추종하는 사람
이 많았다.16)


   성호는 先塋이 있는 廣州 瞻星里(지금의 安山市, 당시는 廣州의 飛
地) 星湖莊에 살면서 노비를 시켜 스스로 농사를 짓고 학문에만 몰
두하였다. 성호가 대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중국에서
사온 수천권의 장서와 星湖莊과 같은 농장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양반지주로서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1715년(숙종 41) 성호가 35살 되던 해에 모친마저 여의고 장례를 마
친 직후에 노비와 재물, 서책을 모두 宗家에 돌려 주어 가난한 생활
을 하게 되었다.17) 즉, 모친을 봉양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모친이 사망함으로서 자연적으로 재산이 宗家에


12)『星湖先生文集』附錄卷1, 家狀(李秉休).
13) 위와 같음.
14)『星湖先生文集』卷53, 恧島小窩記.
15)『息山先生文集』「續集」卷9, 雜著〈鶴城問答〉“問吾子有遠大之志用
力旣久所得何事子新曰無師友之益只從古人說話揣度若迷道而行者
雖或遵大道忽然更惑於岐而崎嶇反側也〈中略〉師友資益固不可廢然
其無其人則不可强得而充之所謂古人說話非今日之名師畏友乎曰雖有
師友不讀書何以爲學”.
16)『星湖先生文集』附錄家狀.
17)『星湖先生文集』附錄行狀(尹東奎).

귀속된 것 같다. 성호는 모친의 장례 때에는 죽도 들지 않았으며, 服
喪 중에는 蔬食으로 일관하면서 愼終의 도리를 다하였다.


   성호는 양반으로 태어나 조상의 음덕으로 관직이 없으면서도 노비
를 시켜 농사를 짓고 심부름을 시킬 수 있었으며, 외출시에는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을 늘 고마워 하였다.18) 이러한 생활 기반에
힘입어 그는 부친의 유언으로 숙부와 叔母 吳氏의 제사를 지내 주
고, 누이의 아들이나 庶母의 제사를 지내 주기도 했다. 나아가 고조
의 側室夫人의 묘소를 증축해 주었으며, 형제자매의 자녀 중 가난하
여 생계를 유지하고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에는 몸소 이들를 부
양하였으며, 심지어는 乳母의 제사까지 신경을 써 주기도 했다.19) 그
리고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家廟에 나아가 배알하
였으며,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수준에 맞게 교육하였다. 밥 먹을
때에는 나이순으로 앉아 수저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고, 출입할 때
나 만날 때는 선생이나 부모에게 항상 절하게 하였으며, 친구 사이
라도 늘 揖하게 하였다. 그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서도 성호의 제자
들은 인사를 잘하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노복들도 더러운 말을 입
에 담지 못하게 하였고, 마을에서도 서로 다투지 못하게 하였으며,
장기, 바둑, 술, 담배, 차(茶)나 雜戲를 금하였다.20) 성호는 젊었을 때
는 술을 조금 하였으나 술이 경제적으로도 낭비이거니와 정신을 어
지럽힌다는 생각에 뒤에는 아주 끊어 버렸다.21)


   재산을 종가에 돌려 보낸 후 성호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
나 그는 노비 하나를 시켜 손수 농사를 짓고 養蜂, 養鷄도 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다. 가족들에게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고,
제사상은 풍부한 것 보다는 정결하게 하는 것을 힘썼으며, 반찬 가
지수를 일정하게 정하여 손님이 오더라도 귀천을 막론하고 동등하게
대접하였다.22) 順菴安鼎福이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성호를 찾아 갔는


18)『星湖先生文集』卷12, 知國知天.
19)『星湖先生文集』家狀(李秉休).
20) 위와 같음.
21)『星湖僿說』卷6, 酒.

데 밥상에 반찬 가지수도 적거니와 모두 짰다고 회고하고 있다. 성
호가 “우리 집이 가난해서 반찬이 초라하기 때문에 손님의 입맛에
맞지 않다 보니 더러는 자신이 가지고 온 반찬을 먹는 사람도 있
네”23) 라고 하였다 한다. 또 “나는 가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해서 고
기가 밥상에 오르는 일이 드물지만 그래도 즐겁게 여겨서 싫어하지
않는다”.24) “나물을 씹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25)는 성호의 말을
통하여 그의 安貧樂道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상생활 중에서
먹는 일 보다 더 긴요한 것이 없지만 가장 긴요한 일에서 먼저 자신
의 사욕을 이기는 공부를 해 나가면 오랫 동안 습관이 쌓여 본성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성호는 기근을 해결하는데 콩이 유용하다고 하
였다. 콩죽 한 사발, 콩장 한 접시, 콩나물(黃卷葅) 한 보시기면 온
저녁 동안 환담할 수 있다고 하여 ‘三豆會’를 만들고 半菽歌를 지어
스스로 즐기기도 하였다.26) 아들 孟休가 縣監으로 있을 때 고기를 선
물로 보내자 편지를 보내어 “나는 집이 있고 땅이 있어서 때에 맞추
어 농사를 지어 굶주림과 추위를 견딜만한데 백성들에게 걷은 재물
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잘못이다”27)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성호는 항상 거처를 단정히 하고, 책을 읽을 때는 바른 자세를 취
하였으며, 설 때는 똑바로 서고, 걸음을 또박또박 빨리 걸었으며, 의
관은 정제하게 입고, 세수한 뒤에는 물기가 한 점도 없었으며, 지팡
이는 일정한 곳에 두었고, 하루의 일과는 늘 일정하였다. 상가에는
신분이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반드시 조문하였으며,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답장을 썼다. 매일 매일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곡진하게 정
도에 맞추어 교육하였고, 손님을 맞을 때는 정중하게 대하였다. 틈이
있을 때마다 책을 읽으면서 의심스러운 부분은 궁구하거나 편지를


22)『星湖先生文集』附錄家狀.
23) 安鼎福『順菴先生文集』卷16, 雜著函丈錄.
24)『星湖僿說』卷5, 董茶如飴.
25) 安鼎福『順菴先生文集』卷16, 雜著函丈錄.
26)『星湖先生文集』附錄家狀.
27) 위와 같음.

썼다. 밤에는 늦게 자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되 문인들이나 제자들
과 강론할 때는 몇일 밤을 새워도 피곤한 기색을 찾아 보기 어려웠
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성호는 정력이 다른 사람 보다 뛰어났던 듯
하다. 글을 읽을 때는 句讀를 올바로 띄어야 뜻을 바로 통할 수있다
하여『句讀指南』을 지어 익히도록 하였고, 뜻이 통하지 않을 때는
생각하고 생각하면 홀연히 귀신이 도와 통하게 된다고 하여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궁구해 보게 하고 그래도 모르면 몇마디로 그 뜻을
일러 주었다. 그리하여 성호에게 배운 사람은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효험을 얻을 수 있어 마치 화로불에 물건을 넣어서 녹듯이
하였다.28)


   성호는 六經, 子史 이외에 소소한 漫錄에 이르기까지 구할 수 있
는 책이면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異端에 속하는 佛書, 道家書나
小技에 속한 책, 稗官雜說 세 가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성호는
아들이나 조카들에게 “내 뱃속에는 다소의 지식이 있기는 하나 마음
을 비옥하게 하는 방법이 없어 너희들에게 전할 수 없는 것이 한스
럽다”고 하였다 한다.29)
이와 같이 성호는 천부의 자질과 성실한 학문태도로 세세한 것부
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通儒가 될 수 있었
다. 그리하여 李秉休성호를 退溪 이후의 大儒로 추앙되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어디까지나 朱子와 退溪를 배우
는데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송나라에 程顥· 程頤
의 학문을 朱子가 집대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퇴계의 학
문을 성호가 집대성하였다고 李秉休는 평가하였다.30)


   성호는 宗約과 宗契를 만들어 친척들간에 친목을 도모하였다. 그
는 1726년(영조 2)에 貞洞옛 집에서 宗會를 열고, 1731년(영조 7)에
는 종약과 종계를 조직하였으며, 그의 동갑내기 20인과 同甲契(同修
稧)를 만들기도 하였다. 성호는 본래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


28) 위와 같음.
29) 위와 같음.
30) 위와 같음.

았으나 제자, 친척들 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친구, 제자들과 함께 삼각산 · 관악산 · 청량산 · 월출산 · 금강
산 · 속리산 등의 명산과 도산서원 · 백운동서원 · 화담서원 · 탄금대
· 북한산성 · 박연폭포 · 대흥사 · 관음사 등 유적지를 돌아 보기도
하였다.31) 이러한 유람을 통하여 성호는 산천의 경개와 민심 · 지리 ·
풍습에 대한 지식을 실질적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식은
후일 성호의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성호는 30살이 지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다가 33살 되던 1713년
(숙종 39)에 아들 孟休를 두었다. 맹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742
년(영조 18)에 庭試의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李孟休가 장원으로 급제
할 무렵 元景夏가 罪人 李潛의 조카임을 거론하면서 방해공작을 펴
기도 했으나32) 끝내 장원으로 결정되어 예조정랑에 임명되었고, 1745
년(영조 22)에 萬頃縣令이 되었다. 그리고 성호에게도 1727년(영조
3) 47살 되던 해에 繕工監役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33)
그러나 성호의 부자는 병이 끊일 사이가 없어 약을 쓰는데 가산을
탕진하였으나 1751년(영조 29) 여름에 맹휴는 죽고 말았다. 맹휴는
『春官志』·『接倭歷年考』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居官日記』·『居
官日錄』·『禮說』·『若禮記說』·『經說』등의 책을 지었다. 성호도
황달(痤疸)이 심하여 70세 후반기에는 반신불수가 되다시피 하였다.
말년에는 재산이 고갈되어 땅도 없고 겨우 雇奴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흉년으로 기근이 들어 그 참상은 말할 나위가 없
었다. 이러한 신고 끝에 1763년(영조 39) 12월 17일 성호는 83세의
나이로 서거하고 말았다. 돌아가기 직전에 노인에 대한 恩典으로 僉
知中樞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아무 쓸모가 없었다.34)


31) 한우근, 앞의 책, 19-21쪽.
32)『桐巢漫錄』卷3, 41板.
33) 앞의 책, 21-22쪽.
34) 앞의 책, 21-28쪽.



3. 성호 이익의 사상


   성호는 다른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적인 정치철학으로서 王
道의 확립과 保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호는 수구적인 유학자의
틀을 벗어나 시세에 따라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농촌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王政의 두 기둥이 토지문제와 민생문제
해결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호의 균전론은 그러한 바탕 위에서 주
장된 것이었다. 그는 保民· 便民· 養民· 愛民· 爲民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으나 이는 백성을 위한 정치(for the people)는 될지언
정, 백성에 의한(by the people), 백성의(of the people) 정치는 아니
었다.35) 그는 양반정치를 지양하고 민의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성호는 도덕적 수양을 갖춘 지식인들이 정치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유가의 정치사상을 답습하였다. 이러한 정치사상은 항상 孝에 근본
을 두고 仁· 義· 禮· 智 四德을 체득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
다. 이른바 유교의 仁政, 德治主義가 그것이다. 性善說은 그 논리적
바탕이었다. 덕치를 하기 위해서는 君德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것
이다. 經筵은 군덕을 갖추기 위하여 중요한 것으로 그 토론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36)
성호는 붕당으로 인한 당쟁을 미워하였다. 그는 당쟁을 일어나는
이유를 관직수는 적은데 관직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官員
少而應調多)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과거시험을 너무 자주 실시하여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뽑고 인사행정이 공정하지 못한 것이 당쟁 발
생의 불씨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37) 그러므로 당쟁을 막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을 공정히 실시하고, 관리의 考課를 엄정히 할 것을 주장하
였다. 또한 과거시험에서 경서를 중시하지 않고 문장시험(製述)에 치


35) 앞의 책 73-81쪽.
36) 앞의 책, 73-90쪽.
37) 李成茂,「朝鮮後期黨爭硏究의 方向」,『朝鮮後期黨爭의 綜合的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323-324쪽.

중한 것도 과거의 폐해를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庶
孽을 차별하고, 서북사람을 차별하며, 무신을 업신여기는 것도 잘못
이라는 것이다. 과거시험은 5년에 한번 실시하면 족하고 鄕擧里選法
과 같은 薦擧制를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科薦
合一制’가 그것이다. 천거는 3년에 한번씩 실시하되 卿大夫이상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 사람씩 추천하고, 군현에서 한 사람씩 추천
하여 道에서 뽑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천거하는 사람은 천거된 사람
에게 잘못이 있으면 連坐法에 걸리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구체적으
로 군현의 향교마다 경기 · 경상도는 한사람, 전라 · 충청 · 강원도
는 2년에 한 사람, 황해 · 평안 · 함경도는 3년에 한사람씩 추천하
면 6년에 모두 27인을 뽑아 순차로 서용하자는 주장이다. 성호는 또
한 議政府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言官의 언론평가제를 실시하며, 개
인의 능력을 인사에 반영하기 위한 관청으로 總章司를 두자고 하였
다. 또한 군현에 왕비가 나거나 반역자가 나면 그 지위를 올리고 내
리게 하는 郡縣陞降制를 폐지하고 군현수를 대폭 축소하자고 제안하
였다.38)


   성호는 농촌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사치풍
조가 만연되고 양반지주들의 치부욕을 자극하여 소농민들이 토지로
부터 소외되어 유랑생활을 하거나 고용노동자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
았다. 그리하여 그는 均田制를 주장하였다. 균전제는 가난한 농민이
땅을 팔 수 없게 하면 땅을 보전할 수 있고 부자는 여러 아들에게
땅을 나누어 상속하게 되니 오래 가면 땅을 고르게 가지게 된다는
내용이다.39) 이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규모 이상의 땅을 소유할 수 없
게 하여 땅을 고르게 소유하게 하자는 燕巖 朴趾源(1737-1805)의 限
民名田議와 비슷한 생각이다. 또한 상업의 발달로 화폐가 유통되어
농민에게 해로우니 화폐를 없애야 한다는 廢錢論을 주장하였다. 화
폐의 유통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윤추구에 매달리게 하여 풍속이 나


38) 앞의 책, 155-210쪽.
39)『藿憂錄』均田制.

빠지고 사치풍조가 만연되어 소농민이 몰락하게 된다는 것이다.40)


   財貨는 결국 농민의 노동력에서 나오는데 상업이 발달하면 농민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에 근본이 무너지게 된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민을 농업에 붙들어 매어두고 절검을 미덕으
로 여기도록 하여 열심히 생산노동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노동을 저해하는 여섯 가지 좀(蠹)이 있는데 노비제도 · 과거제
도 · 문벌제도 · 技巧· 僧尼· 遊惰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 좀은 그 해로움이 도적보다 크다는 것이다. 노비의 자식은 노
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악법으로 폐지해야 하
며, 과거제도는 일도 하지 않고 孝悌(제)도 행하지 않으면서 요행이
과거에 합격하면 잘난체 하고 사치와 방탕에 휩쓸려 백성들만 수탈
하는 폐가 있다는 것이다. 문벌자제들은 재주도 없으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하고 차라리 굶어죽더라도 천한 일을 하지 않으려 하니
해독이 크며, 廣大와 무당의 技巧는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니 해가
크고, 국역을 피하여 곡식만 허비하는 중들도 개혁대상이 되어야 하
며, 어려서부터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고 바둑과 장기 두는데만 열중
하는 풍조를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다.41) 성호는 또한 선진적인 역사
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금의 成敗와 興亡이 모두 時勢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일어난 것이지 도덕적 善樂이나 因果應報, 勸善懲惡이
역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천하의 일은 時勢가
제일이요, 僥幸이 다음이요, 是非는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천년이나
수백년이 지난 뒤에 진정한 시비를 어찌 알겠느냐는 것이다.42)


   성호는 또한 華夷論이나 春秋大義도 신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漢
族王朝가 非漢族王朝를 夷敵視하는 排外思想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尊王攘夷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華夷思想은 현
실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명분론에 지나지 않을 뿐만아
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는


40)『藿憂錄』錢論.
41)『星湖僿說』六蠹.
42)『星湖僿說』卷27, 經史門陳迹論成敗, 같은 책 卷20, 經史門讀史料成敗.

밤낮없이 復讎雪恥를 주장하는 노론 사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정면으
로 반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43) 또한 정통론도 실제로 대세를 주도
한 나라를 정통으로 해야지 도덕적 선악을 적용하여 정통을 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三韓 중 馬韓을 정통으로 해야 한다든지,
劉備의 蜀보다는 曺操의 魏를 정통으로 해야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
다. 성호는 직접 역사책을 쓴 적은 없으나 이러한 그의 역사관은 그
의 제자인 順菴 安鼎福『東史綱目』편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성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구태의연한 유학자들
과는 달리 항상 세상일에 관심을 가졌고 세상일에 대한 그의 의견이
쓰이지 않더라도 이는 지식인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그는
經義와 世務를 함께 중시하는 실학자였다.


   성호는 詞章공부 보다는 經書공부에 치중해야 한다고 하였다. 경
서를 바르게 이해해야 修己治人이 바르게 되며 글장난에 불과한 문
장공부에 치중하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문장공부에 치중하여 名
利를 구하는 자는 假道學者로 여겼다.44) 성호는 조선 유학자들이 四
七論에만 집착하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世務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따라서 세무에도 밝아야 한다고 생각
하여『藿憂錄』을 지었다. 국정의 폐해와 민생의 어려움을 개혁하려
는 뜻에서 성호는 堯· 舜· 孔子의 고대유학으로의 복귀를 주장하였
고, 이를 그의 학문적 바탕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고대유학을 새
로이 집대성한 주자와 퇴계를 존숭하였다. 그러나 주자의 견해는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바꾸어서는 않된다는 생각에도 반대하였다. 경
전의 주석은 전적으로 믿기만 해서는 않되고 궁리하고 궁리하여 경
전의 본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성호는 경
전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많이 내놓았다. 예컨대 夏에서는 한 농
부가 井田의 4區중 4방 50步1區를 받았고, 殷에서는 한 농부가 2區
를 받았는데 길이가 100步, 넓이가 50步, 평균 4방 70步를 받은 셈이


43) 宋贊植,「星湖의 史論」,『朝鮮後期社會經濟史硏究』, 1997, 651-666쪽.
44)『星湖先生文集』卷24, 答安百順.

며, 周에서는 한 농부가 4區를 받았는데 길이, 넓이가 각각 100步에
해당하는 땅을 받은 것이지 田法을 다시 제정한 것은 아니라는 해석
등이 그것이다.45) 이러한 점에서 성호는 독창적인 실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성호는『孟子』로부터 시작하여『大學』·『小學』·『論語』
·『中庸』·『近思錄』·『心經』·『周易』·『書經』·『詩經』·『家禮』등
을 20여년에 걸쳐 차례로 읽고 생각나는 점을 그때 그때 적어 놓았
다. 이것이 유명한 성호의 ‘疾書’이다. ‘疾書’라는 용어는 張橫渠 ‘畵
像贊妙契疾書’에서 따온 것이다. 성호가『孟子疾書』를 지을 때 맏아
들이 태어나 그 이름을 孟休라 지었다고 한다.46)


   성호는 특히 退溪를 존경하였다. 그는 퇴계를 중국의 孔子에 비유
하고, “退陶는 동방의 유학을 대성한 祖”, “東土의 學은 마땅히 퇴계
로서 太祖를 삼아야 한다”, “퇴계 이후에 퇴계 없다”는 등 찬사를 아
끼지 않았다. 星湖가 家藏하고 있던 退溪의 手札을 공개한 것도47) 이
황과의 관계를 보다 부각시키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
는 퇴계에게 직접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퇴계 학통의 계승자임을 자
임한 셈이다. 이는 寒岡 鄭逑와 眉叟 許穆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한강 정구는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을 동시에 스승으로 모신 인물이
다. 미수 허목은 청년시절에 부친의 임지인 경상도 居昌에 일시 거
주한 적이 있고,48) 그후로도 桐溪 鄭蘊의 孫壻가 되어 누차 거창일대
에 우거하는 과정에서 그곳의 南冥淵源(북인계)을 퇴계연원으로 바
꾸어 놓는데 기여하였다. 성호의 아버지인 李夏鎭은 許穆· 尹鑴와
함께 淸南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성호가 자신의 부친 이하진과 청남의 영수 허목이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 했음을 강조한 점에서도49) 이러한 면이 어느정도 드러나


45)『星湖先生文集』家狀.
46) 위와 같음.
47)『星湖先生文集』卷9, 答權台仲“瀷家亦有先生手札一紙”.
48)『記言』「年譜」卷一, “丁巳從議政公于居昌任所… 與從兄觀雪先生往
謁寒岡鄭先生于星州師事之”.
49)『星湖先生文集』卷10 答吳永伯(光運) “當時眉老先生主張淸論先人實
左右唯諾”.

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성호는 학문적으로는 퇴계를 사숙하
는 단계로까지 나아가면서『李子粹語』·『李先生禮說』을 지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퇴계를 공자에 비길 정도로 극도의 존모심을 표현
하기도 했다.50)


   이황에 대한 존모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성호는 영남의 尙州
에 거주하고 있던 權相一을 통하여 이황의 문인록인『陶山及門錄』
편찬에도 적극 관여하였고51), 근기출신의 퇴계문인 15명의 略傳을 손
수 지어 退溪門人錄에 반영될 수 있는 기초를 다지기도 했다.52)


   성호는 嶺南을 “조선의 鄒魯之鄕”이라고도 하였다. 영남에는 퇴계
이외에도 南冥 曺植· 寒岡 鄭逑· 旅軒 張顯光· 愚伏 鄭經世 등의
유명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호가 영남을
중시한 것은 비단 유명한 유학자들이 많이 나와서만이 아니라 영남
남인의 본고장이기 때문이었다. 성호는 퇴계와 남명을 영남유학
의 두 기둥으로 여겼다. 경상좌도에는 仁을 숭상하는 퇴계, 경상우도
에는 義를 숭상하는 남명이 양대산맥으로, 여기에서 우리의 문명이
절정에 달하였다고 보고 있다.53)


   한편, 성호의 가계에서 지리지를 많이 쓴 것도 학맥과 깊은 관계
가 있다. 寒岡『大麓志』를 비롯한 여러 邑誌를 쓴 것이나, 眉叟
『三陟志』를 쓴 것을 모본으로 하여 李尙毅『成川府志』를, 李元鎭
『耽羅志』를, 李重煥『擇里志』를 썼고,『東國地圖』를 그린 鄭尙
도 李尙毅의 증손자인 李萬休의 사위였다.
성호의 조카 李秉休(號: 貞山)는 퇴계의 학통을 이어 받은 사람은
성호뿐이라 하고, 퇴계를 공자에 비유한다면 성호는 주자에 비유할


50)『星湖先生文集』卷36,〈退溪禮解跋〉“東方有退陶如周末生聖人”.
51)『星湖先生文集』卷9 答權台仲.
52)『星湖先生文集』卷50「傳」에는〈勿庵金先生傳〉·〈考槃南先生傳〉·〈
金雲甫·成甫二先生小傳〉·〈靜齋南先生小傳〉·〈潛齋金先生小傳〉·〈山
天齋李先生小傳〉·〈壺峯宋判書小傳〉·〈楓巖文先生小傳〉·〈忍齋.松巢
權先生父子小傳〉·〈聾隱趙判書小傳〉·〈石峯韓先生小傳〉·〈顧庵丁先
生小傳〉·〈李承旨小傳〉등 15인의 略傳이 수록되어 있다.
53)『星湖僿說』卷1, 東學人文.

만 하다고 하였으며,54) “내 보기에는 우리나라 학문이 생긴 이래로
제 1인자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사견이 아니다. 뒷날 학문하는 자가
선생의 글을 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55)라고 하였다.


   성호는 “무릇 어려서 배우는 것은 성장해서 행하려는 것인데 편히
앉아서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하나, 내가 알려지도록 하여 반드
시 재주를 구비하여야만 실학이라 할 수 있다”56)고 하여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내놓는 것이 실학자들의 할 일이라 하였다. 그는
그러한 識務者로서 栗谷 李珥와 磻溪 柳馨遠을 들고 있다. “지금 우
리나라에서 근세 조선왕조 이래로 識務者로 손꼽을 사람은 오직 李栗
谷과 柳磻溪 二公뿐이다. 율곡의 주장은 태반이 시행될 수 있는 것
이었고, 반계는 근본문제를 연구 · 파악하여 일제히 혁신하였으니,
王政이 새출발을 위하여 그 뜻이 원래 컸다”57)고 하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주장 중에도 시행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아는 것을 시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王陽明의 知行合一
說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근거를『論語』“學而時習之”
에 두고 있어 주자학자의 면모를 분명히 하였다.58)


   성호는 자기의 학문이 실익을 주지 못한데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
하고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는 말년에 실의와 체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가 믿어 마지 않았던 영남지방의 풍속마저도 퇴폐해진데
대하여 실망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59)



   성호가 살던 17세기 후반기에서 18세기 전반기는 西世東漸의 물결
이 밀어 닥친 시기였다. 이는 중국중심의 세계관, 즉 華夷觀에 사로
잡혀 있었던 조선 유학자들에게는 미증유의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이를 배격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호기심도 늘어 갈 수밖에 없었다.


54)『星湖先生文集』附錄李秉休祭文.
55)『星湖先生文集』家狀.
56)『星湖先生文集』卷17, 答趙正淑..
57)『星湖僿說』卷11, 變法.
58)『星湖先生文集』續集卷13, 答人.
59) 韓㳓劤, 앞의 책, 44-45쪽.

世務에 관심이 깊던 성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중국 북경에 드
나드는 사신을 통하여 들어오는 漢譯西學書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할아버지인 李尙毅는 1612년(광해군 4)에『芝峰類說』을 쓴
晬光과 함께 奏請使로 중국에 다녀 왔으며, 그의 아버지인 李夏鎭
1678년(숙종 4) 3월에 陳慰兼進香使로 북경에 다녀 올 때 청나라 황
제가 주는 饋賜銀으로 수천권의 책을 사왔다. 이 가운데에는『交友
論』·『泰西水法』과 같은 西學書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서학
에 대하여 처음으로 주목한 이수광은 성호의 딸이 시집간 집안으로
두 가문간에는 世交가 있는 터였다.60) 또한 그는 친구들간에 이들 한
역서학서를 빌려 보기도 하였다.


   성호가 접해 본 서학서나 서양문물로는『西洋方星圖』·『星土圻開
圖』·『西國渾天圖』·『渾蓋通憲圖說』·『天問略』·『治曆緣起』·『時
憲曆』·『簡平儀說』·『日月食推步』·『幾何原本』등의 天文· 曆算에
관한 책들과『萬國全圖』·『大地全圖』·『坤輿全圖』·『乾坤體義』·
『職方外紀』등 세계지리에 관한 서책, 七克등의 천주교서,『遠鏡
說』·『泰西水法』·『羅鏡』·『眼鏡』·『西洋畵』·『西洋水車』·

『龍尾車』등의 서양문물이었다.61) 이러한 한역서학서나 서양문물을 통하여
성호의 안목은 크게 넓어졌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 5
대륙에 속하는 하나의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조선은 그 동북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러한 상황에서 화이론이 설 자리는 없게 되었다. 화이론은 非漢族國
家인 원나라를 무너뜨린 한족국가인 명나라에 의하여 강화된 한족중
심 세계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생각은 성호의 자아의식을 자극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호
의 지리관 뿐아니라 역사관도 달라지게 되었다. 자기 나라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중국 역사만 가
르치고 과거시험에도 중국사만을 시험보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인식


60) 앞의 책 47쪽.
61) 앞의 책 49쪽.

하게 되었다. 오히려 자기 나라 역사인 한국사를 연구하고 과거시험
과목에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2) 성호의 선진적인 역사관은 실
로 여기서 싹튼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호는 역사발전에 있어서 時勢
를 중시하였다. 역사는 시세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지 도덕적인 가
치관에 의하여 좌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성호는
유학자들의 도덕사관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역사는 극히 우연한
계기로 바뀔 수도 있으며 勸善懲惡의 관점에서 이해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성호는 특히 서양 과학문명에 관심이 많았다. 항해를 통해서 그려
진 서양지도, 천체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視遠鏡, 일식이나 월
식을 정확하게 맞추는 西洋曆書, 한의학에 못지 않은 서양의학, 실용
성이 높은 龍尾車, 서양총, 안경, 自鳴鐘 등이 그것이다.63) 서양지식을
통하여 그는 천재지변이 자연현상일 뿐이지 인간의 不德 때문이 아
니며, 군왕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잘못된 생각이
라 하였다.64) 또한 서양화의 원근법, 眞景描寫를 통하여 眞景을 그리
지 않고 상상이 넘치는 동양화풍을 비판하였다.65)


   성호는 본질적으로 유학자였다. 따라서 서양 천주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예수의 復活說, 天堂地獄說,
童女孕胎說, 靈異說은 실증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궤변으로 치부하
였다. 그러나 천주교의 천주와 성경은 유교의 上帝와 경서에 해당하
고, 천주를 섬기는 것은 불교에서 부처를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기는 하였다.66) 그러나 성호는 결코 천주교는
믿지 않았다. 다만 천주교도 하나의 종교로서 이해할만 하다는 성호
의 생각은 뒷날 廣岩 李蘖· 鹿庵 權哲身· 錦帶 李家煥 등 성호좌파
학자들에 의하여 천주교 신봉으로 치닫게 하였다. 그러나 성호는 유


62)『星湖先生文集』卷26, 答安百順別紙.
63) 韓㳓劤, 앞의 책, 54-59쪽.
64)『星湖僿說』卷1, 災異.
65) 韓㳓劤, 앞의 책, 63쪽.
66) 앞의 책, 68쪽.

학사상을 바탕으로 서양 과학사상만을 받아 들이려한 東道西器論의
단초를 연 실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성호의 저서는 諸經疾書(『孟子』·『大學』·『小學』·『家禮』·『中
庸』·『近思錄』·『心經』·『周易』·『書經』·『詩經』·『家禮』)·『星
湖先生文集』(68卷)·『四七新編』·『喪威前後錄』·『藿憂錄』·『星湖
僿說』·『星湖僿說類選』(安鼎福)·『自卜編』·『觀物編』·『百諺解』·
『海東樂府』·『李子粹語』·『李先生禮說』등 100여권이 있다.67)




4. 맺음말


   지금까지 성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그 대략을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성호가 실세한 남인가문에서 태어나 농촌에 은
거하면서도 깊은 학문연구와 실용적인 개혁사상을 개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농촌에서 소농민과 함께 살면서 이들과 애환을 같
이하고 이들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앞장 섰으나 그렇게 하기 위하여
는 국가의 정책이나 양반 통치자들의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
하였다. 이른바 위로부터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러므로 성호는 혁명론자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폐정을 개혁하고
양반 통치자들의 독선적이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바꾸어 양반통
치체제를 개선하려는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실세한 몰락양
반의 견해가 실제정치에 이용되기는 어려웠다. 단지 그를 따르는 문
인들에 의하여 조선후기 실학사상이 꽃피게 되고 이로 인하여 간접
적으로 국정개혁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성호는 학문연구에 일생을 보냈지만 그의 학문은 지식의 축적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의 개혁사상
이 쓰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부단히 개혁안을 제시한 것도 그 때
문이었다. 이에 성호는 堯舜· 孔子· 孟子의 고대유학사상을 이상으


67)『星湖先生文集』附錄1, 家狀.

로 삼고, 주자와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으며, 眉叟· 白湖의 학풍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安鼎福· 尹東奎· 愼後聃· 李秉休
· 權哲身· 權日身· 李家煥· 丁若鏞 등에게 전하여 이른바 星湖學派
를 이룩하게 하였다. 한편, 朋黨의 폐해를 없애고 과거제에 있어서의
科薦合一, 생업에 있어서의 士農合一, 병제에 있어서의 兵農合一, 良
賤合一, 신분제에 있어서의 노비세전법 폐지, 庶孼差待· 西北人差待
폐지, 군현제에 있어서의 郡縣陞降制폐지, 郡縣統廢合을 주장하였다.
성호는 서세동점이 시작되던 시기에 살았다. 이는 중국중심세계관,
화이관에 사로잡혀 있던 조선 유학자들에게는 미증유의 경험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성호는 폐쇄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서양을 이해하고
자 노력하였으며, 이를 현실문제 해결에 이용하고자 노력하였다. 한
역서학서를 통한 서양이해가 완벽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학문적인
탐구열은 이 분야를 이해하는 선구자가 되게 하였다. 성호는 서학
이해의 단초를 열었으며, 그의 제자, 孫弟子들은 이를 더욱 발전시
켰다. 그러나 성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 따라서 유학자의 틀을
벗어나는 사고에 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 중
에서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채택하는 東道西器論을 내세우는데 그칠
뿐이었다. 이것은 성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인 한계성이기
도 하다. 성호 자신도 비록 몰락하기는 하였지만 양반지주층에 속하
는 지식인일 따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호에게 배울 점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엄격한 절검사상,
끊임없는 탐구욕, 철저한 자기수양, 지극한 효성, 문인 · 제자들과의
격의없는 토론, 배우는 사람 스스로가 터득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방법, 경전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 모르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궁구하고 궁구하여 그것을 풀고야 마는 탐구정신, 가난하거나 어려
운 일을 당한 족친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돕는 恤養精神,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지도력 등 인간 성호를 배워야 한다는 점
이다. 이는 학자 · 지식인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일 뿐아니라 일반 생
활인들에게도 귀감이 될만하다.



 


  http://sambolove.blog.me/220145367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