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의 현판들 / 문화재 방송

2016. 2. 15. 19:51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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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

[문화유산 답사기] 밤드시 청와대를 거쳐야 관람할 수 있는 사적 제149호 칠궁(七宮)의 현판들

문화재사랑 2016.01.26 01:46

      


사적 제149호 칠궁(七宮)

   조선 역대 왕이나 추존왕의 생모 입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사당( 현재 청와대 경비 구역인 서쪽 담과 붙어 있어 청와대 관람신청을 하면 답사가 가능하다)

 

원래 1725(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된 곳이다. 그 뒤 1882(고종 19)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으며, 1908년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다.

 





칠궁(七宮), 지금에 이르기 까지

 

 



칠궁은 북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일곱 명의 후궁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생모인 숙빈(淑嬪) 최씨(崔氏, 1670~1718)를 위해 북악산 아래에 사당을 세우고 숙빈묘(淑嬪廟)라 했으며, 1753(영조 29)년에는 숙빈 최씨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그 이름을 육상궁(毓祥宮)으로 고쳐 불렀다.
고종은 1870(고종 7)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왕실 사당을 정리하였는데, 이때 경종(景宗, 1688~1724년)의 생모인 희빈(禧嬪) 장씨(張氏, ?~1701년)의 대빈궁(大嬪宮)과 진종(眞宗, 1719~1728년; 영조의 장자)의 생모인 정빈(靖嬪) 이씨(李氏, ?~1764년)의 연호궁(延祜宮), 장조(莊祖, 1735~1762년;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英嬪) 이씨(李氏, ?~1764년)의 선희궁(宣禧宮)을 육상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대빈궁은 1870(고종 19)년에, 선희궁은 1870(고종 19)년 각각 옛 사당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한편, 1908(융희 2)년에 순종은 후궁이었기 때문에 종묘에 안치되지 못하고 각처에 흩어져 있던 역대 왕들의 생모의 위패를 육상궁에 모았다. 이때 원종(元宗, 1580~1619년; 인조의 부친)의 생모인 인빈(仁嬪) 김씨(金氏, 1555~1613년)의 저경궁(儲慶宮), 순조(純祖, 1790~1834년)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씨(朴氏, 1770~1822년)의 경우궁(景祐宮)과 함께 대빈궁과 선희궁을 다시 옮겨 왔고, 그 때부터 기존에 있던 육상궁, 연호궁에 네 개의 사당을 더해 육궁(六宮)이라 불렀다. 그리고 1929년 영친왕의 생모인 순비 엄씨의 덕안궁(德安宮)을 옮기면서 칠궁이라 불렀다.
위패를 모신 일곱 궁의 배열은 동쪽에서부터 육상궁·연호궁, 덕안궁, 경우궁·선희궁, 대빈궁, 저경궁의 순서이다.

 

 

 

 

 

칠궁(七宮)의 뜻풀이


‘칠궁(七宮)’은 ‘일곱 개의 재궁(齋宮: 사당)’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에 왕을 낳은 일곱 명의 후궁 위패를 모신 일곱 개의 사당을 의미한다.


칠궁(七宮) 권역

 

 

 

 

육상궁毓祥宮

 

 

위치와 연혁 : 내삼문(內三門)을 지나 동쪽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다. 연호궁(延祜宮)과 같은 건물이다. 1725(영조 1)년 건립하여 영조의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주를 모셨다.

처음에는 숙빈묘(淑嬪廟)라고 하였다가, 1744(영조 20)년 3월 육상묘(毓祥廟)로, 1753(영조 29)년부터는 육상궁으로 불렀다. 1773(영조49)년 영조의 어진 2본과 초본 1본을 이 곳에 봉안했다.<원전 1> 1882(고종 1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른다.


뜻풀이 :'육상(毓祥)'은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이다. '毓(육)'은 育(육)과 뜻이 통하며 '기른다' 는 뜻이다.

 




 

 

제작 정보 : 현재 현판에는 '毓祥廟(육상묘)'라 되어 있고, 현판 오른쪽에 '御筆(어필)', 왼쪽에는 '癸未孟夏(계미맹하)'라 적혀있다. 여기서 계미년은 1763(영조 39)년이다.

 

 

 

연우궁(延祐宮)

 

 


위치와 연혁 : 육상궁과 같은 건물에 있다. 진종(眞宗: 영조의 장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신주를 모셨다. 정조는 즉위 후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으로 높이고,1778(정조 2)년에 정빈을 위해 경복궁 서북쪽에 사당을 세워 연호궁이라 했다. 1870(고종 7)년에 그 신주를 육상궁 안으로 옮겨와 숙빈 최씨의 신주와 함께 모셨다.


뜻풀이 : '연호(延祜)'는 '복을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延(연)'은 '맞이하다', '祜(호)'는 '복'이란 뜻이다.


 

 

제작 정보 : 현재 육상묘(毓祥廟)와 연호궁(延祜宮) 현판은 모두 한 건물에 걸려있다. 공간이 협소한 까닭에 연호궁의 현판은 추녀 밑에, 육상묘의 현판은 그 뒤인 신실 문 위쪽에 걸려 있다. 옆으로 나란히 거는 방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덕안궁(德安宮)


 

 


위치와 연혁 : 내삼문을 지나 서쪽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다. 영친왕 이은(李垠,1897~1970년)의 생모이자 고종의 후비인 순비 엄씨(淳妃嚴氏)의 신주를 모셨다. 1897년에 순비가 아들을 낳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안에 따로 경선궁(慶善宮)을 세우고 새로운 거처로 하사했는데, 순비 사후에 덕안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9년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뜻풀이 : '덕안(德安)'이란 '덕 있고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제작 정보 : 현판의 '德(덕)'자는 속자로 써서 '心(심)'자 위에 '一(일)'자가 빠져있다.

 

 

 

경우궁(景祐宮)

 

 


위치와 연혁 : 덕안궁 뒤편에 있다. 선희궁(宣禧宮)과 같은 건물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신주를 모셨다. 수빈이 세상을 뜨자 1823(순조 23)년 창경궁 도총부(都總府) 안에 혼궁(魂宮)을 지어 현사궁(顯思宮)이라 불렀고, 이듬 해 양덕방(陽德坊)의 용호영(龍虎營)으로 옮긴 후 경우궁으로 고쳐 불렀다. 1908(융희 2)년 육상궁 안으로 옮겨와 현재에 이른다.


뜻풀이 : '景祐(경우)'는 '큰 복'이라는 의미이다. '景(경)'은 '大(대)'와 뜻이 통하며, '祐(우)'는 '복'이라는 뜻이다.


제작 정보 : 현재 경우궁(景祐宮)과 선희궁(宣禧宮) 현판은 한 건물에 각각 앞 뒤로 걸려 있다. 한곳에 두 사람의 신위를 모시다 보니 공간이 좁은 까닭이나, 옆으로 나란히 거는 방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희궁(宣禧宮)

 

 


위치와 연혁 : 경우궁(景祐宮)과 같은 건물이다.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英嬪李氏)의 신주를 모셨다. 영빈이 1764(영조 40)년 세상을 떠나자 백운동에 그 시호를 딴 의열묘를 지어 모셨고, 1788(정조 12)년에 그 이름을 선희궁으로 높였다. 1908(고종 7)년에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백운동으로 옮겼다. 1908(융희2)년에 신주를 옮겨와 경우궁 수빈 박씨의 신주와 합사했다.


뜻풀이 : '선희(宣禧)'는 '복을 널리 편다'는 의미이다.



대빈궁(大嬪宮)


 

위치와 연혁 : 경우궁·선희궁 건물의 왼쪽에 있다.

  숙종(肅宗,1661~1720년)의 후궁이자 경종(1688~1724년)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신위를 모셨다. 1701(숙종 27)년 희빈이 세상을 떠나자 정동에 있는 사저에 신위를 모시다가, 1722(경종 2)년 교동의 경행방에 사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대빈궁이라 하였다. 1870(고종 7)년에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가 경행방으로 다시 옮겼고, 1908(융희 2)년에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겨 현재에 이른다.



 

뜻풀이 : '대빈(大嬪)'은 '큰 부인' 이라는 의미이다. '빈(嬪)'은 내명부(內命婦)의 정1품 품계인 궁녀로서 왕비 바로 다음 서열이다.

 

 


저경궁(儲慶宮)

 


위치와 연혁 : 서쪽 삼문을 지나 가장 왼쪽 건물이다. 원종(元宗 1580~1619년, 인조의 부친)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 선조의 후궁)의 신위를 모셨다. 인빈이 세상을 뜨자 송현궁에 신위를 모시고, 궁 이름을 저경궁이라 했다. 1870(고종 7)년 계동 경우궁으로 옮겼다가 1908(융희 2)년에 육상궁으로 옮겼다.


뜻풀이 : '저경(儲慶)'이란 '경사를 모아 쌓는다'는 의미이다. '儲(저)'는 '貯(저)'와 뜻이 통하며 '쌓는다'는 뜻이다.

 

 

냉천정(冷泉亭)


 


위치와 연혁 : 내삼문을 지나 동쪽 삼문과 서쪽 삼문 사이에 있다. 영조가 어머니 제삿날에 재계(齋戒)하며 제를 준비하던 곳이다. 1866(고종 3)년 12월 창의궁(彰義宮) 장보각(藏譜閣)에 불이 나자 영조의 어진을 이 곳으로 옮겼고, 이후 1882(고종19)년 육상궁에 불이 났을 때에도 영조 어진을 이 곳으로 옮긴 일이 있다. 건물 뒤 바로 북동쪽에 '냉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뜻풀이 : '냉천(冷泉)'이란 '차가운 샘'이란 뜻이다.

 




제작 정보 : 글씨는 전서체이다. 냉천 벽면에는 1727(영조 3)년 영조가 쓴 '冷泉'이란 어필과 오언 절구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御墨雲翰(어묵운한) 어필글씨
昔年靈隱中(석년영은중) 지난 날 항주의 영은산 속에 있더니
今日此亭內(금일차정내) 오늘은 이 정자 안에 있네.
雙手弄淸漪(쌍수농청의) 두 손으로 맑은 물 어루만지니
冷泉自可愛(냉천자가애) 냉천이 절로 사랑스럽네.
時强圉協洽?月上浣也(시강이협흡병월상완야) 정미(1727)년 3월 초순.

 

 

자연(紫淵)

 




위치와 연혁 : 냉천정(冷泉亭) 앞 뜰에 있는 네모난 연못이다.


뜻풀이 : '자연(紫淵)'은 '자줏빛이 감도는 연못'이란 뜻이다. 자줏빛은 수심이 깊은 연못의 빛깔을 표현한 것이므로, '자연'에는 '깊은 연못'이라는 뜻도 있다.『문선(文選)』에 실린 장경양(張景陽, ?~307?년)의 「칠명(七命)」에 "깊은 연못 속에서 빛나는 비늘을 건져 낸다(出華鱗於紫淵之裏)."는 표현이 나오고, 당나라 때의 여향은 그 주석에서 "자연은 그 색이 깊은 것을 말한다(紫淵, 謂其深色然也)." 고 풀이했다.
한편, 북두칠성의 앞 머리 부분인 제1성부터 제4성까지를 선기(璿璣, 璇璣)라 하고 자루 부분인 제5성부터 제7성까지를 옥형(玉衡)이라 하는데, 특히 선기의 네 개 별이 만들어 내는 네모난 공간을 '자연(紫淵)'이라 한다. 이는 다른 말로 요지(瑤池)·요수(瑤水)라고도 하며, 신선의 세계를 나타낸느 도가적 용어이다.


제작 정보 : 글씨는 전서체(篆書體)이다.

 


송죽재(松竹齋)

 



위치와 연혁 : 칠궁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다. 재실(齋室)로 풍월헌과 같은 건물에 있으며, 육상궁을 지키는 관원들이 거처했다. 송죽재 현판은 건물 서편에 걸려 있다.


뜻풀이 : '송죽(松竹)'은 '소나무와 대나무'를 의미한다. 변하지 않는 절개를 상징하는 말이다. 사철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관원들도 재실에 머물며 늘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을 담은 듯하다.


 

 


제작 정보 : 1882(고종 19)년 8월 육상궁(毓祥宮)에 화재가 났을 때 어진을 냉천정으로 옮겼다가 임시로 송죽정(松竹亭)에 모셔둔 일이 있다. 이 때는 송죽재를 송죽정으로도 부른 듯하다.

 



풍월헌(風月軒)

 

 


위치와 연혁 : 칠궁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다. 재실로 송죽재와 같은 건물에 있으며, 육상궁을 지키는 관원들이 거처했다. 풍월헌 현판은 건물 동편에 걸려 있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 1753(영조 29)년 영조가 육상궁에 행차해, 풍월헌에 나아가 내국제조(內局提
調) 원경하(元景夏, 1698~1761)를 입시(入侍)케 하고, 어머니에게 시호를 올리는 절차를 논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772(영조 48)년에는 대신들을 이 곳에 불러 승지로 하여금 벽 위의 '아첨을 억누르고 예절을 다하면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抑諛盡禮, 復何餘憾)'라는 영조의 어필 현판을 읽게 하고, 팔순(八旬)과 육순(六旬) 때 그린 어진(御眞) 두 본(本)을 걸게 하였으며, 이를 여러 신하들에게 우러러보게 하며 내시들의 힘을 억눌렀다고 한다.


 

 


뜻풀이 : '풍월(風月)'은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란 의미이다. 이 곳이 재계하는 곳이므로 정신을 깨끗하고 고상하게 가진다는 의미를 담은 듯하다.

 



삼락당(三樂堂)


 

 


위치와 연혁 : 송죽재와 풍월헌 뒤쪽에 있는 안채 격인 건물이다. 1753(영조 29)년에 영조가 육상궁에 예를 올리고 난 후, 이 곳에서 이조참판 조명리(趙明履, 1697~1756년)를 불러 풍수를 논의한 일이 있다.


 

 


뜻풀이 : '삼락(三樂)'은 '세 가지 즐거움'이란 뜻이다. 세 가지 즐거움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맹자』의 삼락을 가리키는 듯하다. 맹자가 말한 세 가지 즐거움이란, '부모가 모두 계시고 형제가 무고하며, 위로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논어』에서는 '예악으로 절제하기를 즐기고, 남의 착한 점을 말하기 즐기고, 어진 벗이 많음을 즐기면 유익하다'고 하였고, 증자(曾子, 기원전 506년~기원전 436년)는 '두려운 어버이가 있고 섬길 임금이 있으며 가르칠 자식이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간쟁할 어버이가 있고 떠날 수 있는 임금이 있고 노여워할 자식이 있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타이를 임금이 있고 도와줄 벗이 있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고 하였다.(출처:문화재청)

* 칠궁 관람 방법(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www1.president.go.kr/cwdViewing/guidance.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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