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2016. 2. 16. 06:47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잃어버린 우리역사(펌)

빙혼서생 |  2015.11.05. 23:06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용지니요>

 

아직도 고구려 도성이 있었던 고성이 미처 다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작업은 중국에서도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결코 이제까지 밝혀진 고구려성이

전부가 아니구요 현재는 고구려 성의 절반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녀산성의 경우 산위에 산성을 만들어 놓은 거라 큰 성은 아니구요.

 

고구려 수도의 변천

우리가 이제까지 국사 교과서를 통해서 배워 알고 있는 고구려의 수도는 아래와 같은데

믿을 것이 하나도 없다.

1. 고주몽의 졸본부 - 위치 미상 (최근 환인현 오녀산성으로 추정하나 오류이다.)

2. 유리왕의 국내성 - 환도성: 길림성 집안현

3. 장수왕의 평양성 - 평안남도 평양

 

국사 교과서의 토대가 되었던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의거하여 고구려의 수도 이름을 고찰하고, 현재 우리나라와 북한, 중국 학계가 비정한

고구려 도성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1.고주몽의 비류수 졸본성 - 최근에 요령성 환인 오녀산성 추정중

2.유리왕의 위나암성 ------ 길림성 집안

3.산상왕의 환도성 -------- 길림성 집안

4.동천왕의 평양성 -------- 길림성 집안

5.고국원왕의 평양동황성 -- 길림성 집안

6.장수왕의 평양성 -------- 대동강 평양 안학궁

7.평원왕의 장안성 -------- 대동강 평양성

 

[삼국사기]의 기록은 정사(正史)에 가깝지만 정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고구려의 정사가 될 수 있으려면 고구려의 땅에서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발해)

고구려의 자료를 가지고 기술해야 고구려 정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고구려를 뒤이은 나라가 아니고 500년 이상을 건너 뛴 고려 시대에

고구려 땅의 한귀퉁이였던 변경 지방에서 고구려 역사를 서술하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 결과 고구려의 주요 지명이나 수도의 위치가 마치 달나라에서 관찰한 기록처럼 모호해진 것이다.

 

즉 고구려가 망한지 500년 뒤에 고구려 땅의 귀퉁이인, 한반도의 개성에서 쓰여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한계인 것이다. 반면에 고구려의 중심 강역이었던 요동반도의 중심인

오늘날의 요양에 동경 요양부를 설치하고 나라를 경영했던 거란족의 요나라 기록은

[삼국사기]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어도 크게 다르다.

 

우선 [삼국지위지동이전]<예전(濊傳)>에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무려 40세를 전한 역사국가로 적고

있다. 요나라도 이를 빼먹지 않았다. “동경 요양부(오늘날 북경의 동쪽에 있는 난하의 서쪽부터

요동 반도 전체와 길림성 일대 및 흑룡강 유역을 가리킴)는 본래 조선의 땅이다(朝鮮之地)

()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석방하여 기자가 살던 곳인데 팔조(八條)의 가르침으로 예의를

숭상하고 농상(農商)을 장려하고, 대문을 닫지 않아도 도둑이 들지 않았다. 사십여세(四十餘世)

전했다.”

 

[요사지리지]는 놀랍게도 기자 조선을 사십여세를 전한 유구한 역사의 나라로 적고 있는데

발해가 단 12세를 전한 200여년의 국가인데 비하여 상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이 기자(箕子)는 결코 사십여세를 전하지 않았으니 단군 조선 시대에 한 변방인

번한국가에 망명해 왔다가 번한왕이 되어서 기준에 이르기까지 단 6세를 전했다는 것이다.

기자의 청동기 유물이 요령성 조양시 객좌현에서 발굴되는데 반가운 일이다.

번한의 수도가 바로 객좌현으로 비정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사지리지]가 말한 사십여세를 전한 본래의 기자조선은 [단기고사(檀奇古史)]가 전하는 기자(奇子)

서우여(徐于餘)를 가리키는데, [한단고기(桓檀古記)]<번한세가>에 나오는 후기 번한조선을 가리킨다.

 

아무튼 이러한 단군 시대의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 역사나 고구려 역사의 서두에서 단지 신인(神人)

왕검 한분의 신화(神話)로서 치부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단군 조선의 중심강역인

요동반도에서 고려의 중심인 개성이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 실체와 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단군 조선의 중심강역을 차지한 요나라는 간략하게나마

그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단군세기]는 단군 시대 역사로서는 절대적인 기록이고, 고구려나 발해 역사를 통찰해

보는 데에서 필수적이다. 또한 최근에 북한에서 발굴한 강동군 대박산의 단군릉도 [한단고기]

아니면 그 근거를 찾지 못할 것이다.

 

[한단고기]에서는 5세 단군 구을(丘乙)16년을 재위하다가 서기전 2084년경 7월에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송양(松壤) 에 이르러 병을 얻어 돌아가시니 대박산(大博山)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단군릉이 발굴된 대박산의 행정구역인 평안남도 강동현의 옛이름이 바로

송양군이다.

 

[한단고기]에 대하여 아직까지 우리나라 역사가들의 정밀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도 그 서술된 역사 중심 강역이 한반도가 아닌 만주 중심이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단고기]<고구려 본기>에서는 북부여(北夫餘)를 세운 해모수(解牟漱)가 고구려의 시조로 모셔져

있는데 이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차자(次子)인 고진(高辰)의 손자 불리지(弗離支)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해모수를 시조로 계산하는 고구려 역사가 당나라에서 계산한 900년 역사의

고구려가 되기도 한다. 고주몽의 장자인 유리왕(琉璃王)이 고구려를 잇고 유리왕의 이복 동생

온조(溫祚)가 따로 백제를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로, 해모수의 장자(長子) 모수리(慕漱離) 계열은

해부루에게 이어져 동부여가 되고 해모수의 차자 고진의 계열이 훗날 고주몽의 고구려가 된 것이다.

 

이 사이에 제 3의 인물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동명국(東明國, 卒本夫餘)을 세우고 스스로 동명왕

(東明王)이 되어서 해모수의 북부여를 끊었다가 다시 고주몽에게 왕통을 넘기게 되었는데,

이 동명국의 수도가 졸본부여이고 고주몽은 고두막한의 손녀사위로서 졸본부여의 단군에

즉위하였지만 물러나 다시 구려국을 세워 눌현(訥見; 今 西豊縣)에 천도한 것이 추가된다.

 

[한단고기]에만 있는 고두막한 동명왕에 대한 기록은 이제까지 모르던 부분인데, 고주몽의 시호가

역시 동명성왕이어서 고두막한 동명왕과 동일인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고두막한의 손녀 사위가

고주몽이므로 서로 다른 인물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모든 책들의 기록을 하나도 빼지 않고

종합하면 고구려 시대의 수도 변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고주몽의 홀본서성 --------- 쌍료현 동명향

2. 고주몽의 홀본동강(부여성) - 공주령시 회덕진

3. 유리왕의 국내위나암성 ----- 서풍현 양천진

4. 수성왕의 환도성 ----------- 철령시 최진보 남성

5. 신대왕의 위나암성 --------- 서풍현 양천진

6. 산상왕의 환도성 ----------- 철령시 최진보 북성

7. 동천왕의 평양성 ----------- 환인현 오녀산성

8. 고국원왕의 동황성 --------- 집안시 산성

9. 장수왕의 평양성 ----------- 요양시 동경릉(노양산)

10. 평원왕의 장안성 ---------- 요양시 구성

11. 보장왕의 한성 ------------ 평양시

 

<빙혼>

   최근 역사를 국가가 주도하여 집필한다고 반대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반대의 이유가 일제 36년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현대사 때문이다.

 

어떤 이는 역사에 대하여 다양한 사고를 지닐 수 있도록 현재처럼 각 교과서마다

역사에 대한 표현이 다를 수 있다고 하는데

 

빙혼은 역사는 다양한 사고를 지니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역사도 족보처럼 선조들이 수많은 고난들을 극복하고 민족과 나라를 오늘날까지 이어왔던

것에 대하여 국가주도로 사용을 해야 올바른 역사가 된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환인제국, 환웅제국, 단군제국에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는

국가가 주도하여 새롭게 역사를 정리하였으면 싶다.

 

곰이 마늘 먹고 여자로 변신하여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은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며 이런 것을 역사로 배운 한국인들은 모두가 곰 새끼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인류의 시조는 아담이고, 한국인의 시조는 아브라함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이런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역사를 집필하는데 참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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