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16. 00:10ㆍ야생화, 식물 & 버섯 이야기
[스크랩] 고운 최치원의 학사대 전나무 ♤ 이정웅의 푸른나무
신라 말 대학자 고운 최치원선생이 꽃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수령 1,000년의 전나무 굵기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가 아닌가 한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215호) 외 줄기로 자라는 전나무의 일반적인 특성과 달라 두 줄기로 자란다. 홍류동 계곡에 있는 농산정 농자는 귀머거리 농자로 귀머거리가 되어 더 이상 세속의 소리를 듣지 않겠는 뜻에서 부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심은 전나무가 가야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쉽게 찾으려니 하고 찾아 갔다가 크게 낭패했다. 20여 년 전 나는 가야산을 이 잡듯이 뒤져 암자는 물론 정상, 골짜기 등 거의 안 가본 곳이 없어 안방 같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종전 늘 그래왔듯이 매표소에서 내려 홍류동의 농산정(聾山亭)으로 향했다. 일대는 선생이 지리산, 해운대 등 전국의 경승지를 주유하다가 생애 중 마지막 머문 곳으로 후대 사람들이 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농산정, 유허비와 더불어 사당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뜻밖인 것은 일대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학사당(學士堂) 정문 좌우에 두 그루, 유허비 앞에 한 그루의 전나무가 서 있을 뿐 가지가 두 개로 뻗은 문제의 전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215호)는 보이지 않았다. 망연자실한 나는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면서 그 동안 가야산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자부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전에 이 곳을 답사했다는 책의 저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하다가 공원관리사무소의 자료를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전화를 걸던지 말든지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검색을 했더니 홍류동 입구의 농산정 주변은 학사당이고 학사대는 따로 있음을 알았다. 해인사 내 장경각 부근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절 안인지 밖인지가 또 불분명해 다시 찾아 갈 때는 관리사무소에 묻기로 하고 전화번호를 메모해 두었다. 그런데 어머님 문병을 갔다가 아우 만농을 만나 이야기 하든 중 절밖이기는 하나 장경각 뒤이며 둘러쳐진 담 사이로 작은 문이 있어 올라가면 그 곳이 바로 학사대라고 했다. 나는 다소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두 번째 가야산을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 장경각까지 올라가니 이번에는 공사 중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큰 판자로 더 이상 갈 수 없도록 막아 놓았다. 현장이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왔으면서도 또 실물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구하면 구해진다는 성서의 말처럼 행운이 찾아왔다. 유니폼을 입고 명찰을 단 사람이 있어 물어보았더니 절을 관리하는 분이었다. 고운 선생이 심은 나무를 보러 왔다고 했더니 법당 옆 담 밖에 있으니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해인사는 큰 절이라 관련 건물이 여러 채인데 어느 것이 법당인지 알 수 없고 그 곳도 문이 잠겨있을지 모른다고 하여 또 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가지가 둘 달린 전나무만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마음으로 중심 공간인 대적광전 서편 공사를 하기위해 열어 놓은 문을 나서니 아! 가지가 둘 달린 거대한 전나무가 눈앞에 나타났다. 계단을 오르니 힘들게 찾던 최치원 선생이 꼽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전나무였다. 오대산 월정사입구의 전나무를 보고 감탄한 일이 있지만 굵기로는 그 전나무를 압도해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했다. “이 나무는 높이가 약 30m, 둘레가 5.1m 쯤 되는 수령이 1,000년 이상 된 고목이다. 나무줄기가 지상 10m 높이에서 두 개로 벌어져 있으며 나무 가지는 아래로 향해 뻗어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곳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할 때 찾았던 곳이다. 학사대라는 이름도 고운 선생이 헌강왕 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였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이 곳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있다면 이 지팡이도 살아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 하여라.’는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간 전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일러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린다.” 이상이 안내판의 설명 내용이다. 안내문이나 이 나무를 본 분들의 한결같은 이야기가 한 줄기로 자라는 전나무의 일반적인 특성과 달리 두 줄기로 자라는 점이 신기하다고 하나 내가 본 바로는 원 줄기가 어떤 연유로 죽게 되자 옆에서 돋은 두 가지가 자라 굵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죽은 부분의 줄기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따라서 신기해할 일은 아니다. 흔히 고운(孤雲)으로 불리는 최치원 857년(헌강왕 1)은 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며 글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868년(경문왕 8) 불과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당에 들어가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 견일(肩逸)의 언명을 굳게 지켜 학업에 열중한 나머지 무려 4년 앞당겨 18살에 합격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선주의 표수현위(漂水縣尉)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특히 황소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켜 중국대륙을 어지럽힐 때 그를 나무라는 격문(檄文)을 지어 붙이자 이를 본 황소가 무례한 행동을 멈추고 항복함으로 그의 문명이 중원을 떨치게 된 분이다. 885년(헌강왕 11) 귀국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등 벼슬을 지내며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치다가 국정이 문란함을 통탄하며 외직을 자원하여 태인, 함양태수를 역임하고 894년(진성여왕 8) 시무책 10조를 상소하여 내정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후 아찬(阿湌)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그의 힘으로 이미 기우러진 신라를 바로 세우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관직을 사퇴하고 전국 각처를 유랑하다가 앞서 소개한 전설처럼 가야산 진대밭골로 들어가 생사를 모른다고 하였다. 혹자는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저서로 <계원필경집> 등이 있으며 고려 현종이 문창후(文昌侯)로 봉하였고 문묘(文廟)와 경주의 서악서원 등에 모셔졌다. 2007년에는 국내도 아닌 중국의 강소성 양주에서 그를 기리는 ‘최치원기념관’이 세워져 이를 기화로 한·중 양국의 문화, 경제교류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될 것이라 하니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을 실감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그렇기도 하거니와 함양의 상림, 하동의 푸조나무, 거창 가조 고견사의 은행나무 등은 선생이 심은 나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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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이야기,꽃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 이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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