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국사 무의자 선시의 미학

2016. 2. 25. 06:01



      

진각국사 무의자 선시의 미학
학해스님 선운사 승가대학 학감
[27호] 2006년 09월 10일 (일) 학해 스님 선운사 승가대학 학감

1.들어가며


   고려말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 1178~1234) 무의자(無衣子)의 선시는 우리나라 불교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진각국사어록『무의자시집』을 통하여 드러난 그의 시 세계는 탁월한 선취(禪趣)를 얻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선 문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의자 혜심은 여말 무신란과 몽고군의 침략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한 격변기에 선종의 대선사이며 유불에 정통한 시승(詩僧)이었다.

   그가 남긴 시에서 다양한 선시의 미학을 살펴볼 수 있는데, 본고에서는 어록과 시집에서 드러난 선시의 아름다움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개략적으로 논의해 보겠다. 무의자 선시에서 살펴볼 내용은 본지풍광의 진경미, 백척간두의 직절미, 수선교시의 선지미로, 무의자 문학에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선시의 미학을 세 범주로 파악해보고자 한다.



2.본지풍광(本地風光)의 진경미


   무의자 시의 특징 중의 하나는 마음으로 경물을 읽어내는 탁월한 시안(詩眼)에 있다할 것이다. 곧 마음 밖에 따로 한 물건도 없으니 눈 가득한 청산을 있는 그대로 읊어내는 선기(禪機)는 다음에 보이는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그림자를 마주하고(對影)”란 제목의 시 전문인데, 못의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본래면목의 자성을 표출한 작품이다.


홀로 못가에 앉아서
우연히 못 아래 한 중을 만나네.
잠자코 서로 웃으며 바라보니
잘 알아 말 걸어도 대답하지 않네.


池邊獨自坐 池低偶逢僧
笑相視 知君語不應


   이 시는 이백(李白 ; 701~762)의 “달밤에 홀로 술 마시며(月下獨酌)”을 생각나게 한다. 이백의 시에서도, “꽃나무 사이에서 한 동이 술, 친구 없이 홀로 마신다. 잔 들어 밝은 달을 맞고, 그림자 마주하니 셋이 친구 되었네(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란 어구가 나오는데, 그림자는 오랫동안 불가에서 청정무구한 본래의 성품을 드러내는 시의 소재로 즐겨 차용되어 왔다.

그림자의 어낼러지(analogy)는 즉자(卽自)와 대자(對自)의 만남이다. 심외무물 만목청산(心外無物 滿目靑山)의 경지에서 보면 한 물건도 차별이 없으며 너와 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대비동체인 것이다. 무의자 시에서 보이는 본지풍광은 오롯한 깨달음의 경지를 단아한 모습으로 육화하여 드러낸 것이다.

다음의 시, “냉취대(冷翠臺)” 란 제목의 시를 살펴보자.


드문드문 소나무 달빛 또한 밝아
그윽한 골짜기 바람 족히 맑아라.
웃고 즐기며 마음대로 노니니
높으나 낮으나 머무는 데마다 평안해.


疎松月白 幽峽足風淸
笑傲縱遊戱 高低隨處平


   이 시에서 나온 ‘수처평(隨處平)’이란 말은 원래 임제종의 개조(開祖)인 임제(臨濟 ; ?~867)스님의 『임제록』에 “어느 곳에 가든지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여기가 모두 진리이다(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말에서 나온 것이다. 즉 외물의 경계에 끌려 다니지 말고 지금 여기 자신이 있는 이 자리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중심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며 화평한 연화장인 것이다.

산중에 사는 승려로서 마음가는대로 소요하며 노니는 정경을 지극히 담담하게 읊고 있는데, 외물이래야 그윽한 산골에 지천인 솔, 바람, 달빛이 고작인데 마음은 ‘처평’하니 참으로 담박한 풍광 그것이다. 마음 밖에 진경은 더 있을 수도 없고 따로 더 그려낼 것도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산에 노닐며(遊山)”란 시에서 보이는 물외초탈(物外超脫)의 경지는 이미 저 멀리 맹자와 굴원에 잇닿아 있으면서도 무의자 자신의 선취(禪趣)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시내에 가서 내 발을 씻고
산 바라보며 내 눈을 맑게 하네.
부질없는 영욕은 꿈꾸지 않으니
이밖에 또 무엇을 구할까.


臨溪濯我足 看山淸我目
不夢閑榮辱 此外更無求


   이 시에서 명리(名利)를 멀리하겠다는 의지는 “내 발을 씻는다”는 말에서 곧 의미가 드러난다. 탁아족(濯我足)이란 말은 이미『맹자(孟子)』이루상(離婁上)에 보인다. 작자는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내 발을 씻는다.(有孺子歌曰, 滄浪之水兮,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可以濯我足. 孔子曰, 小子聽之, 斯濯纓,濁斯濯足矣,自取之也)”라는 어구에서 뜻을 취하여 속진(俗塵)에 초탈한 한정(閑情)을 드러내었다. 이 시에서 드러낸 산중살림의 정서는 또한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楚辭)』“어부사(漁父辭)”에도 나온다.

   영욕이야 꿈속에서라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이미 모든 외물을 포섭한 선의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그럼으로 그밖에 더 구할 게 없으니 꿈에서라도 남은 찌꺼기로 덧붙이는 일조차 도인의 눈에는 군더더기로 비칠 것이다. 이 시에서 보이는 알레고리(allegory)는 구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일예로 시내와 발, 산과 눈이다. 이러한 대립적 구조의 결합은 시적 이미지를 탄탄하게 연결하여 ‘심외무물 만목청산(心外無物 滿目靑山)’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 다음에 보이는 제목의 시는 “천거상인이 비갠 뒤에 산을 보고 화답(和天居上人雨後看山)”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사물마다 자재하는 진경산수를 그려냄으로써 시방세계가 곧 불성으로 가득한 대화엄장임을 표현해내고 있다.

비 갠 뒤 봄 산은 만 가지 모습인데
푸른 숲 흰 구름 한가해 사랑스러워.
흰 구름 흩어진 곳 두물마다 모습 드러나
멀리 산 바라보니 산 너머 산이로다.


雨後春山勢萬般 最憐翠白雲閑
白雲散處頭頭露 望盡遠山山外山


   비가 개고 나니 청신한 산경은 펼쳐진 그대로가 장광설이다. 유정물이거나 무정물이거나 산색 그대로가 청정한 법신이다. 달리 더 무엇을 끌어다 덧칠을 할까. 두두물물마다 본래면목 그대로 제 모습을 갖추니 산 그대로 산이다. 그러므로 차별이 이미 끊어졌으니 달리 내세울 필요도 없으며 따로 고집하지 않으니 온 산 모두가 한 몸으로 온전한 우주법계의 연화장 세계이다. 하나의 액자 속에 진경을 담아 불법을 그대로 그려냈으니 천의무봉의 화공(畵工), 바로 이 경지에 들었다할 수 있겠다.

다음의 시, “연못가에서 우연히 읊음(池上偶吟)”에서는 교교한 달빛 아래 연못가를 거닐며 읊은 시로 달과 마음이 알레고리를 이루며 하나로 포개지는 절창이다.


산들바람 솔바람소리 불러 와
쓸쓸하여 맑고도 애처롭다.
밝은 달 마음결에 떨어지니
해맑고 깨끗해 티끌 한 점 없어라.

보고 듣는 게 유달리 상쾌하여
시 읊조리며 홀로 거닌다네.
흥이 다하여 고요히 앉았노라니
마음조차 싸늘해 식은 재와 같아라.


微風引松 肅肅淸且哀
皎月落心波 澄澄淨無埃
見聞殊爽快 嘯獨徘徊
興盡却靜坐 心寒如死灰


   티끌 한 점 없는 달과 마음은 중층 구조를 이룬다. 마침내 달빛도 가라앉아 마음은 식은 재처럼 싸늘하게 식으니 얼음 같은 선기가 정수리에 뻗치는 느낌이 드는 시이다. 이 시에는 작자의 의도된 시적 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시적장치는 선가에서 냇가에 비친 수면과 더불어 거울 또한 유용한 도구로 자주 차용되어왔다. 달빛과 마음이 내외의 이중구조를 이루어 시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서로 포개져 하나로 동일화되고 있다.

수면은 내외를 아우르는 중개자로 외물인 저 달을 끌어오고 안으로는 마음을 비추어 서로 관통하며 원융한 경지를 드러낸다. 곧 달과 마음은 수면을 매개로 하여 파이작삼(破二作三)의 경지를 넘어 하나로 통합되어 모든 경계가 일거에 무너지고 만다. 이 시에서 보이는 탁월한 알레고리는 선지의 경지를 잘 드러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백척간두(百尺竿頭)의 직절미


무의자의 선시에서 두드러진 한 특징은 벽립천인(壁立千)의 기상이다. 이는 백천간두에 서서 물러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내딛는 수선(修禪)의 결의를 다짐과 동시에 언외의 선지를 갈파하는 용처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말을 여의고 생각조차 끊어버린 선경에서 나온 시는 무의자 선시의 한 특징이라 할 만하다. 다음에 보이는 “폭포(瀑)”란 시에서는 이러한 기상이 매우 잘 드러나 있다.


아득한 절벽에서 와르르 떨어지니
차가운 물소리 계곡에 메아리치네.
작디작은 한 점 티끌도 여기,
그 어디에도 머물 곳 없어라.


迅瀑落危層 冷聲聞還壑
纖纖一點塵 無處可栖泊


   아슬한 벼랑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는 수직의 역동성을 내포하며 선경에 다달은 깨침의 포효와도 같다. 차갑게 내려 쏟는 물소리와 한 점 티끌도 용납하지 않는 수직의 방향성은 글자 그대로 은산철벽을 깨는 장쾌한 외침으로 형상화된다. 백척간두에 선 출격장부의 기상이 잘 드러난 이 시는 무의자 자신의 자부이기고 하다.

   선승으로서 생사를 여의고 저 폭포처럼 줄기차게 떨어지는 결연한 의지는 우뚝한 자신의 기봉(機鋒)을 펼쳐 보인 선시로 평가된다. 한 점 티끌조차 용납 않는 저 폭포의 경계는 범부가 쉽사리 접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폭포는 모든 걸 버리고 그 어느 것도 일체 머물게 하지 않는 속성을 가짐으로 해서 종종 유가 시와 더불어 선가의 보도(寶刀)로 채용되어 왔다.

다음에 보이는 시는 무의자가 출가 득도할때 지은 시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가 출가하며 결심한 초발심을 유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긴 서(序)로 되어있는 시의 원문에 보면, 1221년 임오년 음력 11월 고려 조계산 수선사 무의자 진각이 득도 출가할 때 지은 시로, 이능화가 펴낸 『조선불교통사』 가운데서 옮겨 실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시에서 그는 세속에서 말하는 부귀나 공명 따위를 “깨진 시루” 라고 말하며 모든 외물을 툴툴 털어버리고 대장부의 길로 나섬을 일갈하고 있다.


불문에 뜻을 두고 사모하여
식은 재처럼 좌선을 배우리라.
공명이야 한갓 깨어진 시루며
사업이야 이루고 나면 덧없어라.

부귀도 그저 그렇고 그런 것
빈궁도 또한 그러한 것.
내 장차 고향을 버리고
소나무 아래 편안한 잠이나 자려네.


志慕空門法 灰心學坐禪
功石一墮甑 事業恨忘筌
富貴徒爲爾 貧窮亦自然
吾將捨閭里 松下寄安眠
-貞祐九年壬午仲冬 高麗曹溪山 修禪社無衣子眞覺述 得度時辭家詩, 此下朝鮮佛敎通史中轉集.


   깨진 시루, 즉 타증(墮甑)이란 말은 이미 그르친 일은 애석해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로, 『사기(史記)』 후한서(後漢書) 맹민(孟敏)편에, “타증불고(墮甑不顧)”란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후한 때 맹민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가난하여 어느 날 시루를 팔기 위해 지고 다니다가, 그만 잘못 발이 걸려 넘어져 시루가 다 깨져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훌 털고 가던 길을 그냥 가버렸다. 그 날 마침 당시의 명사로 존경받던 곽임종이 지나가다 가까이에서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맹민이 다른 사람과 다름을 알고 그에게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십년이 지난 뒤 맹민은 천하에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무의자는 불문(佛門)에 들면서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하여 속가의 규범이나 척도를 아예 버리고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동시에 속가의 사업이란 게 망전(忘筌)과 같아서 이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언명하고 있다. 망전이란 말은 원래 『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 “득어망전(得魚忘筌)”이란 말에서 유래한다. 물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을 잊는다는 말인데, 곧 목적을 이루면 수단은 잊는다는 뜻이다.

『비유경(比喩經)』에도 “사벌등안(捨筏登岸)”, 곧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면 뗏목을 버린다는 비유가 있다. 구경의 절대 진리에 도달하고 나면 수단은 물론 그 절대경지 조차 잊는다는 뜻으로 무의자 자신은 이러한 언표를 통하여 자신이 평생 기탁한 불법의 세계관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지향한 소나무 아래는 바로 공문법(空門法)임을 말한 것이다.

이어서 다음의 시, ‘소요곡(逍遙谷)’을 살펴보면 산중에 숨어사는 도인의 풍모를 잘 그려내고 있다.


대붕은 바람타고 몇 만리 날아가지만
메추리는 숲 속 한 가지에 만족해 사는구나.
길고 짧음은 비록 다르나 유유자적하나니
야윈 지팡이에 헤진 누더기 나에게 마땅하여라.


大鵬風翼幾萬里 斤林巢足一枝
長短雖殊俱自適 瘦殘衲也相


   무의자 자신은 대붕이라기보다는 숲 속 한 가지에 깃들어 사는 메추리에 비유하면서 걸림이 없이 자적하게 노닐며 청빈한 삶을 이끌고 있음을 겸허한 문장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야윈 지팡이와 헤진 누더기는 청빈한 삶을 가리키는 승가의 무소유를 나타내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 대붕(大鵬)은 『장자(莊子)』, 내편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새 이름으로, 북쪽 바다에 사는 데 넓이가 몇 천리가 되며 한번 날을 때는 그 날개가 구름같이 하늘을 가린다는 상상의 새이다.


   사실 이 시는 대붕과 메추리의 비교를 통하여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데, 무의자가 진술한 “유유자적”에서 ‘자적’이란 바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삶으로 처중(處中)에 부합하면 그것으로 족함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지극한 하심(下心)이며 겸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자의 한가로운 심경을 드러낸 것이다.

다음에 보이는 시는, "대나무(竹尊者)"는 무의자 자신을 의탁한 시로 선승으로서 자신이 지향하는 굳은 기절(氣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풍상이 더욱 거셀수록 마음공부는 수선의 공력을 더하고 빼어난 절조는 스스로 비움으로써 더욱 굳센 의지를 표상하고 있다.


내가 죽존자를 사랑함은
추위와 더위에 아랑곳 하지 않네.
풍상 겪을수록 절개 더 굳세고
온종일 스스로 마음을 비우네.

달 아래 맑은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결에 부처님 말씀 전하네.
하얗게 눈을 머리에 이고
뛰어난 운치 총림에 났도다.


我愛竹尊者 不容寒暑侵
經霜彌勵節 終日自虛心
月下分淸影 風前送梵音
皓然頭載雪 標致生林


   이 시는 무의자의 다른 가전체(假傳體) 작품인 “죽존자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죽존자는 무의자 자신이 그려내는 자화상인 셈이다. 죽존자전에서 그는 존자의 미덕은 다 말할 수 없으나 대략 열 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첫째, 나자마자 우뚝 자란다. 둘째, 늙을수록 굳세다. 셋째, 조리가 곧다. 넷째, 성품이 맑고 싸늘하다. 다섯째, 소리가 사랑스럽다. 여섯째, 외모가 볼 만하다. 일곱째, 마음을 비워 사물에 잘 대응한다. 여덟째, 절개를 지켜 추위를 잘 참는다. 아홉째, 맛이 좋아 사람의 입맛을 기른다. 열째, 재질이 좋아 세상에 이로움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대나무는 꼿꼿한 기상과 허심의 표상으로 선가의 시나 유가의 시에서 즐겨 다루어지는 소재이다. 대나무를 높여 무의자는 존자라 부르고, 그 뜻과 몸가짐이 매우 고상하기에 이를 좋아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우의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4.수선교시(修禪敎示)의 선지미


   무의자 선시의 다른 한 특징으로는 수선(修禪)과 교법을 시의 형식을 취하여 선지(禪旨)를 드러내고 있다. 언외시교(言外示敎)의 선리시(禪理詩)에서 시는 자칫하면 그 참 뜻을 그르치기 쉽다. 그만큼 지향하는 선의 골수가 말 안에 갇힘으로써 전심(傳心)의 체용을 훼손하기에, 선가에서는 시황계(詩荒戒)를 경계하여온 게 사실이다. 무의자는 어록과 시집을 통해 시자들이나 지인에게 많은 시법시(示法詩)를 지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다음은, “시자에게 눈꺼풀이 얼마나 되는가를 묻자 대답이 없어 시를 지어 보임(問侍者眼皮多少無對作詩示云)”이란 제목의 시이다. 이 작품에서는 문수라는 시자가 자주 졸기에 참선을 독려하면서 경책하는 뜻을 보여주고 있다. 시자의 도가 아무리 높다고 할지라도 참선에 수마를 못 견뎌서는 물먹은 종이로 범을 묶는 꼴이라고 경책하면서 참선공부에 더욱 매진할 것을 우의적으로 희롱하여 지은 것이다. 시자를 나무라면서도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시적 여백이 매우 경쾌한 시로 자신의 도가 가볍다고 너스레를 뜨는 무의자의 여유가 인상적인 시이다.


구지선사 한 손가락은 길이가 얼마인지
아무개 눈꺼풀은 그 얼마나 무거운가.
곧 너의 도 깊어 세상을 덮어도
나의 도는 보잘 것 없어 꿈에서나 보일런가.

억지로 오대산 문수보살에게 여쭈어도
물 먹은 종이로 호랑이 묶는 꼴 일세.
어느 날 우바리 존자가 인도한다면
무수히 현신하여 허공을 채우시게.
(이 시는 문수한에게 희롱하여 보인 것이다.)


俱低一指長多少 某甲眼皮幾何
直饒道該天地 我道驢年夢見
强安排向五臺中 濕紙徒勞大蟲
當日優婆離欲 現身無數滿虛空
(右示文殊漢)


   이 시에 나오는 구지일지(俱低一指)는 구지화상에 관한 일화에서 끌어온 것이다. 구지는 마조 문하의 대매법상법과 항주 천룡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선사로서 손가락 하나를 세우는 선(禪), 곧 ‘일지두선(一指頭禪)’을 평생 써서 불법의 진리를 모두 드러내었다. 『벽암록』 제19칙에 나오는 이 고화(古話)를 통해 문수시자에게 내려앉는 눈꺼풀를 경계하며 참선공부에 진척이 없음을 엄하게 경책하고 있다.

이런 근기로 공부하다가는 여년(驢年)에라도 성취를 못할 것이 뻔하기에 시로서 매운 죽비로 경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년은 십이지(十二支) 가운데 당나귀 해가 없으므로 미래 영구하다는 의미로 결코 오지 않는 때를 가리킬 때 쓰는데, 시자의 공부가 미진함을 우의적으로 끌어다 썼다.


   다음은 “당에서 대중에게 보임(禪堂示衆)”란 시이다. 『진각국사어록』가운데 시중(示衆)에 실린 것으로, 벽안은 중층의 의미로 겹쳐져 수승한 선의 경지에 든 무의자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벽안(碧眼)은 원래 벽안호승(碧眼胡僧), 곧 푸른 눈을 가진 달마대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데, 무의자의 시선과 달마의 시선이 동일시되는 경지를 함의한다 볼 수 있다. 이러한 선경에 들면 이미 심경무애(心境無碍)의 경지로서 진여의 본체계(本體界)가 확연히 드러나고 만다.


푸른 눈으로 청산을 마주하니
티끌 한 점 들어올 틈이 없구나.
맑은 기운 저절로 뼛속에 스미니
무엇 하러 새삼스레 열반을 찾을까.


碧眼對靑山 塵不容其間
自然淸到骨 何更泥洹


   이 시에서 청산은 그 자리 그대로 있는 자성의 청정근원을 상징하는데, 흔히 백운과 대구(對句)를 이루는 시어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오롯한 법신을 표상하여 티끌 한 점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열반이니, 진여니 하며 시끄럽게 더 구할게 없다는 것이다. 눈 가득한 청산이 그대로 비추기에 새삼스럽게 열반을 구한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 셈이다. 무의자가 도달한 그 자리에는 이미 뼈 속까지 환하게 법신과 맞닿아 원융회통한 선지라 할 것이다.


   다음에 보이는 시는, “종민상인에게 보임(示宗敏上人)”이란 선시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화두를 들 때 주의할 점과 공부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병통을 지적하고 있다. 언어나 이론에 의한 개념적 분별을 경계하며, 일상에서 참선이 아닌 고요함만 추구하는 좌선을 부정한다. 스승이 제시하는 말 아래에서 깨우침을 얻으려는 그 자체마저 버리고 은산철벽과 같은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명을 타파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말이나 이치로 헤아리지 말고
아무 일없는 속에서 앉아있지도 말게.
들어 보이는 곳에서 깨달으려 하지 말고
미혹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게.

마음 쓸 곳마저 없는 경지에 이르러서
끝까지 물러나지 아니하면
홀연히 칠통을 타파할 때가 오려니
상쾌하고 상쾌하도다.


語路理路不得行 無事匣裏莫坐在
擧起之處勿承當 亦莫將迷要悟待
恰到無所用心處 終不於此却打退
忽然打破漆桶來 快快快快快快快


   이 시는 간화선을 주창한 송대 대혜종고『서장(書狀)』에서 인용한 것으로 화두를 드는데 주의할 점을 제시하고 있다. 즉 “여사인에게 답하는 편지(答 呂舍人 巨仁)”에서 간시궐(乾屎)이라는 화두를 일상에서 들되, 말이나 이치로 헤아리거나 분별하지 말고 적적한 선정에도 머물지 말며 아무 단서도(沒巴鼻)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가슴속에 답답함을 느낄 때가 좋은 소식이다.

선지식이 한 마디 일어주는데서 깨우침을 구하려 하지 말며 다만 의정(疑情)에 투철하면 홀연히 깨달음이 올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으로 깨달음을 기다린다고 하면 영겁토록 미망에 떨어짐을 경계하고 있다. 우리나라 간화선 종장으로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이며 간화선의 맥인 송대의 원오극근과 대혜종고에 이어 고려시대 보조지눌과 진각혜심의 관계성을 살펴볼 수 있는 시다.

칠통(漆桶)이란 중생의 청정자성이 무명(無明)에 덮여, 불법의 이치를 보지 못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언어의 길(語路)과 이치 길(理路)은 수행자를 묶는 사슬이 될 뿐이기에 이를 막고 끊어야 올바른 정견을 가질 수 있고 나아가 정진의 과덕으로 깨침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나아가 깨침을 구하고자 하는 그 생각에도 갇히지 말 것을 말하면서 곧장 칠통을 타파할 것을 권하고 있다. 무의자가 내보인 다수의 시법시(示法詩)는 이러한 삼엄한 경계의 뜻을 표현한 시가 많다는 점은 유념해야할 것이다.


   다음에 보이는 “진병식에서 법좌에 올라(鎭兵上堂)” 란 시는 당시의 시대상과 연관 지어 볼 수 있는 것으로 진병도량(鎭兵道場)에서 대중에게 설법한 뒤에 게송으로 읊은 것이다.


싸우지 않고도 적병을 굴복시키니
지극한 어짐은 다툴 자 누구인가.
태평하여 한 가지 일도 없으니
바다는 평온하고 물은 맑도다.


不戰屈人兵 至仁誰與爭
太平無一事 海晏復河淸


   이 시는 무의자가 54세 되던 해(1231) 몽고군이 침입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불법을 선양하여 전쟁을 종식하길 기원하는 진병도량을 설치하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상당법문 끝에 보인 글이다. 싸우지 않고도 적을 이길 수 있다는 소망을 피력하면서, 대자비로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지극한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당시 시대상을 엿보면 안으로는 무신란과 밖으로는 몽고군의 침탈로 혼란한 시기였기에 수선사(修禪社)의 대선사로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백성과 군병들을 위로하고 있다. 어짐(至仁)으로서 승리가 최선책이며 태평으로 나가는 길임을 말하고 있다. 승가로서 비록 적일지라도 싸우지 않고 대자비로 물리칠 수 있다고 진병도량에서 행한 상당어(上堂語)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5.나오며


   무의자의 문학적 성과는 방대하며 한국 불교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펴낸 『선문염송』과 더불어 『진각국사어록』 『무의자시집』은 수선사의 대선사로서 무의자의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한정된 지면으로 무의자가 남긴 시편에서 간취할 수 있는 선시의 미학을 본지풍광의 진경미, 백척간두의 직절미, 수선교시의 선지미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이상으로 그의 선시에 드러난 미학적 검토는 외형적 문체의 아름다움과 내용상의 아름다움을 병행하여 극히 제한된 몇 편에 한정하여 살펴보았기에 앞으로 다양한 시각에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남긴 전반적인 문학적 성취에 대하여는 다른 통로를 통하여 심층적으로 논의할 여지를 남겨두기로 한다.


학해 스님
선운사 승가대학 학감.1985년 출가. 자운 스님을 계사로 90년 비구계수지. 실상사 화엄학림 졸업. 현 선운승가대 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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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1일 - 수정됨


진각국사 혜심의 정신세계와 그가 남긴 차시茶詩 이야기 
 
시냇물은 왜 그리 바삐 달리나
소나무 아래에서 솔방울 주워
달이는 차맛은 더욱 향기롭구나  
 
우뚝솟은 바위 몇길인지 알수없네
드높은 누대는 하늘끝에 닿았네
북두로 은하수 길어 달이는 한잔의차
차달이는 연기 달속 계수나무 감싸네 
 
솔방울을 주워 무쇠솥에 찻물을 끓인다.밤하늘의 칠성별을 국자삼고 은하수 물을 길어 깊은 밤에 홀로 차를 마시며 선심禪心을 다시茶詩로 남긴 스님이 있다.화순출신의 위대한 스승이신 진각국사 혜심이다. 
 
진각국사가 역대 선사들의 선문답을 정리하여 간화선의 교재로 쓰인 선문염송은 한국불교 선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눈다.중국의 학자들은 중국에 만리장성이 있다면 한국에는 선문염송이 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선문염송은 중국에서 편찬된 경덕전등록이나 벽암록.종용록을 능가하는 탁월한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30권 선문염송은 혜심스님이 송광사 광원암에서 집필하셨고 송광사 16국사중 제 5세 원오국사께서 대원사에서 판각하였다.원오국사는 고려말 몽골 침입을 불심으로 물리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강화도 선원사의 주지를 지낸분이다.대원사판 선문염송은 현재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한질씩 소장되어 있다.대원사에 내려오던 국보급 선문염송 판각은 려순사태때 우리 토벌대의 방화로 한줌재로 사라졌다.안타까운 일이다. 
 
진각국사는 출가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갈 정도로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어머니의 병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간병하였다.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출가하여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1205년 지금의 광양 백운산 상백운암에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수행하고 있었다.보조는 간밤에 중국의 고승 설두중현선사가 찾아오는 신비한 꿈을 꾸고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데 혜심이 찾아왔다. 
 
지눌스님이 동자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혜심은 시한수를 지어 올린다. 
 
동자를 부르는 소리는 안개낀 송라에 사라지고
차를 달이는 향기는 돌길의 바람에 퍼지네
백운산 초암 접어 들자 마자
내가 모실 스승을 바로 뵈었네.. 
 
이시를 받아본 지눌은 만족해 하면서 들고 있던 부채를 혜심에게 주었다.스승의 부채를 받은 혜심은 다시 시한수를 올렸다. 
 
스승님 손안에 있던 부채가
이제는 제자의 손에 있구나.
만약 번뇌망상이 뜨겁게 일어 난다면 마음껏 맑은 바람 일으키려네 
 
향기로운 곳에서는 함부로 열지말고
냄새속에서는 억지로 막지 말라
향천의 부처도 되지 않겠거늘
하물며 송장썩는 나라가 되겠는가?
솥에는 녹명을 달이고
향로에는 안식을 사른다. 
 
혜심은 보조국사의 뒤를 이어 송광사의 법통을 이어 받아 2대 조사가 되었다.스승과 제자는 그렇게 만났다.혜심은 출가후에  고행을 하고 깊은 선정을 체험하여 고려불교의 빛나는 별이 되었다. 
 
무신정권의 최우와 고려 조정은 혜심을 중앙으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대고 수행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최우는 두 아들 만전과 만항을 보내 스님의 가르침을 듣게 했으며 고종은 대선사의 품계를 내려 선사의 덕을 찬양하였다.국보 43호로 내려오는 고려고종제서가 그때의 문서이다. 
 
1234년 고종 21년 6월 선사는 제자들을 불러 말했다...늙은 내가 오늘 바쁘다.먼길 떠나니 준비해라...마곡등 제자가 영문을 몰라 멍하니 있으니 가부좌한채 미소지으며 육신을 떠났다.선사의 나이 57세 법납 33세 되던 해이다 
 
고종이 진각국사라 시호를 내리고 이규보에게 명하여 비문을 써서 행장비를 세웠다.월출산이 바라보이는 강진 월남사지의 비석이 그것이다.송광사 광원암에는 진각국사의 사리를 모신 원조탑이 있다. 
 
진각국사가 남긴 시문은 무의자시집으로 전한다.그의 시와 어록은 뛰어난 문학이며 깊은 철학이다.특히 차에 관한 많은 시들은 선사의 정신세계와 고려 차문화를 엿볼수 았는 소중한 자료이다. 
 
진각국사는 중국의 설두중현선사의 환생으로 생각하였다.부모가 죽어 자식으로 태어나고 스승이 죽어 제자로 태어난다.시절인연이 다가오면 출가하여 다시 불도를 닦는다. 
 
자식은 부모를 깨우치러 오신 조상이다. 스승은 제자의 모습에서 스승의 자취를 찾을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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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학다리…자치샘의 참외(진각국사)
       
 글쓴이 : 팔공동화
         작성일 : 14-11-22 17:02
아래의 진각국사의 탄생설화에 얽힌 설화는 2가지가 전한다.
[설화-2]는 ‘차천과 배씨 처녀’라는 제목으로도 전해진다.
 
자치샘.jpg
 
[설화-1]
고려 중엽 전라도 화순 고을에는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땀을 식힐 정도로 시원한 물이
솟아나는「자치샘」이라는 샘물이 있었다. 이 고을 사람들은 역경에 처하거나 불행을
만나면 으례 샘물을 화수로 떠놓고 신령님께 소원을 빌었다. 이 고을에 조씨 성을 가진
한 상민이 살고 있었다. 는 어느 날 양반의 말에 대꾸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에게는 품행이 조신하면서도 미모가 특출한 「분이」라는 외동딸이 있었다.
아직 출가 전인 그녀의 효심은 지극했다. 분이는 아버지가 옥에 갇히자 날마다
첫새벽이면 자치샘의 정화수를 길어다 신령님께 아버지의 석방을 축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의 어둠 속을 더듬으며 샘터에 다다라 보니 웬 중년 부인이 자기보다
먼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분이는 내심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듯 싶은
자책감에 내일은 더 일찍 오리라 다짐했다. 음날 새벽. 분이는 어제보다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캄캄한 산길을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음을 재촉해 자치샘에 당도하니 뜻밖의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에도 먹음직스런 큰 참외 한 개가 둥둥 샘물 위에
떠 있는 게 아닌가. 으응? 웬 참외일까? 간밤에 누가 따다 넣은 건가, 아니면 나보다
먼저 누가 다녀갔나?』 이는 이 참외를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새벽 공기를 울리며 이상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소녀야, 참외를 먹어라. 그 참외는
너 먹으라고 놓아둔 것이니 주저치 말고 어서 건져 먹어라.』
분이는 깜짝 놀라 말소리가 들리는 곳을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필경 산신령의 계시인가 보구나. 왜 먹으라고 했을까. 아무튼 먹으라고 하시니 먹어야지.』
분이는 조심스럽게 참외를 건져 먹고는 여느 날처럼 물을 길어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분이는 그날부터 태기가 있더니 배가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가 아기를 잉태하다니. 실로 기막힐 노릇이었다. 분이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생죄인이 되고 말았다. 달이 차자 분이는 옥동자를 순산했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수치감 때문에 아이를 기를 수 없다고 생각하여 솜보자기에 아이를 싸서
지금의 학다리 마을 근처 논두렁에 버렸다. 다음날 저녁, 이곳을 지나가던 한 길손이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 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학 한 마리가 이상한 물건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이하게 생각한 길손은 학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사람 기척이 나자 학은 날아가고 그 자리엔 갓난아기가 솜에 싸여 있었다.
『아니 이건 어린아기가 아닌가? 못된 것들, 천벌을 받을 줄 모르고.』
길손은 아기를 안고 관가로 갔다. 그는 원님 앞에 나아가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소인이 먼 길을 다녀오다 논두렁가에서 이 갓난아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옥동자를 학이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인이 가까이 다가가자
학은 날아가고 제가 이 아기를 데려오게 된 것입니다.』 『허어! 학이 품고 있었다고.
필시 이 아이가 자라면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징조로구나. 이방은 이 아기의 어미를 찾아
데려오도록 해라.』 마침 슬하에 손이 없던 길손 최씨는 이 아기가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는
원님의 말에 자기가 기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원님께 간청했다.
『소인이 자식이 없어 적적하오니 이 아기를 기르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음 그렇다면 분부 있을 때까지 우선 데려다 기르도록 해라.』
 
길손은 어린아이를 안고 돌아갔고, 이방은 아기 어머니를 찾아나섰다.
이방은 아기 어머니 분이를 쉽게 찾아 관가로 데려왔다. 분이는 원님 앞에 대령하여
국문을 받기 시작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은 죄, 벌하여 주옵소서.』
분이는 원님의 분부를 기다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기를 낳게 된 연유를 소상히
아뢰어라.』원님은 아기가 비범치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관대한 어투로 물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녀의 아버님은 양반에게 말대답을 했다는 죄로 한산리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방면을 축수하느라 새벽마다 자치샘으로
정화수를 길러 다녔는데 어느 날 샘물 위에 떠 있는 참외를 신령님 분부로 먹었습니다.
그날 이후 배가 부르기 시작하여 아기를 낳게 됐습니다.』 『음, 예사로운 일이 아니로구나.』
『원님, 간청하옵나니 죄 없으신 저의 아버님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방면하여 주십시오.』
『음, 네 효심이 정녕 갸륵하구나. 알겠으니 염려하지 말아라.』
 
딸의 효성으로 조씨는 옥살이를 벗어났다. 이 소문이 고을에 퍼지자 마을 사람들도 분이의
효심을 산신령이 가상히 여긴 것이라며, 학이 아기를 품고 있던 곳을 학다리 마을이라 불렀다.
참외를 향과(香瓜)라고 하는데 과일이 깨어졌다는 뜻의 파과(破瓜)는「처녀성을 잃었다」라는
뜻이며, 여자의 성숙기를 뜻하는 파과지년(破瓜之年)이란 말의 과(瓜)자는 두 개의 팔(八)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16세를 뜻한다고 한다.  학의 보호를 받고 생명을 부지하였던 아기는
최씨 집에서 정성껏 양육되어 후일에 우리 불교사의 명승 진각국사(1178~1234)가 되어
송광사 2대 주지로서 그 해박한 지식과 불법으로 많은 명승을 길러 낸 장본인이다.
 
노거수.jpg
 
그 후로 이 샘을 진각국사의 자취가 깃든 샘이라 하여「자취샘」또는 적천(跡泉)이라
한 것을 세월이 흐르면서 와전되어 자치샘이라 부르고 있는데 지금도 화순읍 향청리
광주은행 사거리에 비석과 함께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학이 날아와서 진각국사의
어린 생명을 보호한 곳에는 직경 3m 둘레 9m의 천년수령을 자랑하는 큰 당산나무가
지난날의 산 증인처럼 서 있었는데 1927년 5월 한 아이의 실화로 소진되었다.
학이 날아와 살았기에 학서도(鶴棲島) 또는 학사리·학정자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
 
화순읍(和順邑)에서 보면 남산 입구에 사거리가 있는데 여기 자치샘이란 빗돌이 서 있다.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오랜 이 고을의 역사를 말해 주는듯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이젠 그조차도 지난 세월에 시달리다 지쳐서 말라죽은 고목이 되어 버렸다.
이 물로 빨래를 하면 옷이 깨끗하고 술을 빚으면 술맛이 좋다고 하며 이 속에는 철분과
염분이 없어서 물맛이 좋고 오랜 가뭄에도 샘물이 끊어지지 않은 명천(名泉) 이었다.
옛날에는 이 고장의 명물로 손꼽힌 두부와 초병(기정떡) 이 모두 이 샘물 때문에
유명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에 얽힌 전설로는 관직(官職)은 모르나 옛날 오자치(吳自治)라는
지리술수(地理術數)에 밝은 분이 화순을 지나는데, 그 해에 큰 가뭄이 들어 주민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긍휼히 여겨 이 곳을 파도록 하였다고 한다. 옥수(玉水)가 솟아
올라 그 샘을 그 분의 이름을 따라 자치샘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설화-2]
진각국사(眞覺國師)의 태생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이다. 옛날 고려중엽의 일이었다.
화순읍에 배씨성을 가진 아전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관속(官屬)인 만큼 그 고을에선
어느 정도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으며 가산도 넉넉하여 잘 지내고 있었다.
배씨 부부는 늦게 얻은 무남독녀 외동딸을 금지옥엽 여기며 자라는 것에 희망을 걸고 삼았다.
딸이 열여섯살이 되던 해에 배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별안간 당한 일이었으므로 온 집안은 근심 걱정으로 가득했고, 더욱이 딸과 아내는 날마다
눈물로 지내는데 효심이 지극한 딸은 하루도 빠짐없이 손수 미음을 끓여 아버지께 바치었다.
하루는 물동이를 이고 샘으로 가는데, 아직 이른 새벽이라 먼동이 텄을뿐 어슴프레한
아침이었다. 하늘에는 샛별이 떠 있고 주위는 죽은듯 고요할 따름이었다.
 
배씨처녀는 샘가에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맑은 물을 뜨려고 바가지를 든 순간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저게 무엇일까?」 배처녀가 놀라 물위에 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분명히 참외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에 참외가 있다는 것은 당시 사람으로서는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그머니! 한겨울에 참외가 왠일일까?」배처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참외를 건져 들었다.
그것은 아무리 달리 보고 냄새를 맡아 보아도 틀림없는 참외였다. 신기하듯 한참 들여다
보다가 먹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 무심결에 참외를 먹고 말았다. 순식간에 맛있는 참외 한개를
다 먹어 치운 다음 물을 길어 미음을 쑤어 아버지가 갇혀 계시는 옥(獄)으로 갖다 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참외를 먹고 난 뒤, 배처녀는 배는 달이 갈수록 불러만 갔다.
처녀의 몸으로 수태를 하게 된 배처녀는 이상하기도 했지만 부끄러워서 누구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근심속에서 날을 보내었다.「이 일을 어쩌면 좋담! 차라리 죽어 버릴까?」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무심한 배는 날이 갈수록 더 불러만 갔다.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된 그녀는 어느날 저녁에 어머님 앞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저어...」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얼굴을 숙인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니, 왜 그러느냐? 어디 몸이 아픈 모양이로구나.」「아니예요, 어머님, 흑흑...」
「왜 말은않고 울기부터 하느냐? 네가 내 앞에서 못할 말이 뭐란 말이냐?」
「저... 저에게 태기가 있어요.」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처녀의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뭐? 그게 웬말이냐! 그럼 도대체 그게 뉘애란 말이냐? 어서 바른대로 말하여라.」
딸을 다그치는 어머니의 전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배처녀는 잠시 잃었던 이성을
되찾은 후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딸의 말을 다 듣고 난 어머니는 어이가 없었다.
 
「참 해괴한 일이로구나. 어찌됐던 범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남들의 이목도 있으니
문밖 출입을 금하여라.」 어느덧 만삭이 되어 옥동자를 낳았고, 때마침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이 되었던 배씨가 혐의가 없음이 판명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시집도 안간 딸이 옥동자를 낳은 것을 보고 몹시 놀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행실을 못되게 해서 낳은 아이인가 의심하여 철저히
힐문하였다. 그러나 배처녀는 전혀 그런 일이 없고, 차천(車泉) 으로 물을 길러 갔다가
샘물에 뜬 참외를 한개 건져 먹고 잉태하였다는 이야기를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아버지도 참으로 해괴하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딸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남보기에도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집 뒤에 방 하나를 새로 들이고 그곳에서 얼마동안 아기를 길렀지만
동네 밖으로 누설이 될까 두려워 하는 수 없이 아기를 아무도 모르게 읍에서 서쪽으로
3㎞쯤 떨어진 숲속의 큰 정자나무 밑에다 버리고 돌아왔다. 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기를 갖다 버리기는 하였으나 배처녀는 모정의 아픔을 걷잡지 못하고 남모르게
울기만 하였으며, 또한 그녀의 어머니도 마음이 언짢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밤에 배처녀의 어머니는 어린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 남몰래
등불을 들고 숲속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아기는 한마리 학의
날개 속에 품겨 있었다. 그것을 보고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한편 다소나마
안심을 하고 그대로 되돌아 왔다. 그 이튿날도 배처녀의 어머니는 또 숲속에 가보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몇마리의 학들이 나무밑에 모여 발로 땅에 우물을 파가지고
물을 머금어다가 아기에게 먹이기도 하고 다른 큰 학은 날개를 펴서 어린애를 품고
간간이 입으로 젖을 토하여 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도 가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씨부인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 참! 이상한 일이로고...」 배(裵)씨도 부인의 말을 듣고 몸소 그 숲속으로 가보았다.
역시 학이 날개를 펴고 어린애를 품고 있는것이 아닌가! 참외를 먹고 수태하여 아이를
낳은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거니와 어린애를 내다 버려도, 학이 보호한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이는 범상한 아이가 아닌 모양이오. 그러니 다시 데려다 기르는 것이 어떻겠소.」
배씨는 아내에게 아기를 기르자고 했다. 그러자 아내도「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첫째, 인생이 불쌍해서 안됐고, 둘째는 날 때부터 보통 다른 애들과 다른 데가 있어요.
내다 버려도 새가 와서 보호하는 것을 보아 아마 큰 사람이 태어난 것 같으니,
우리가 그대로 두었다간 천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딸애도 늘 슬퍼서 울고만 있으니
보기에 안되었구려...」아내도 남편의 뜻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귀한 딸의 장래를
생각하면 아버지 없는 자식을 낳았으니 앞날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태연히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는 수가 없을까 하고 의논해 보았다.
「여보, 당신이 어디 갔다 오다가 길에서 얻은 것처럼 데려와 기르면 되지 않겠소.」
「참,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이튿날 배씨부인은 일부러 능주에 있는 일가집을
다녀오는 길에 짐짓 놀란 표정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동행하던 아낙네들에게 말했다.
「저 소릴 좀 들어보오. 저기 정자나무 밑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나질 않아요.」
아낙네들도 모두 한마디씩 떠들었다.「그러네요. 아기 소리군요.」 「어디 가 봅시다.
누가 이 숲에 어린애를 버렸는가 보네요.」배씨부인은 동행하던 부인들과 함께
정자나무 밑으로 갔다. 거기에는 과연 전과 다름없이 학이 어린애를 품고 있었는데,
그들이 가까이 가자 어린애를 남겨둔 채 푸드득,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다.
「에그머니! 이런 곳에 웬 아기가...?」「정말 웬 아기일까? 가엾어라. 쯔쯔...」
배씨부인은 달려가서 어린애를 안아 들었다. 같이 갔던 부인들도 가엾이 여기며 어린애를
어르고 야단이었다.「참, 잘도 생겼네.」「몹쓸 사람들도 다 있지. 누가 아기를 낳아서
이런데다 버렸을꼬?」그들은 이렇게 주고 받으며 어린애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길에서 내버린 아기를 주워 왔다고 소문은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가듯 인근에 널리 퍼졌다.
이렇게 하여 배처녀가 내다 버렸던 어린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들은 정성껏
아기를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갈수록 얼굴이 뚜렷해지고 총명이 넘치니
엄마격인 배처녀는 물론이고 배씨부부의 극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럭저럭 아이의 나이가 열살이 되는 어느날 배씨의 집에 스님이 찾아 왔다.
스님은 어린애를 보자 몹시 놀라며 혀를 차는 것이었다.「참으로 비범한 아이로군.
허나 애석한 일이다.」 이 말을 들은 배씨는 「스님, 무엇이 애석합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좀처럼 말하려 하지 않다가 자꾸만 따져 묻는 배씨부부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스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아이를 댁에서 그냥 기르면 단명해서
열다섯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요, 그러나 내가 데려다 불공을 드리고 기르면 수명을
누릴 수 있소만...」 스님은 또 다시 애석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배씨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스님에게 물었다.「오래 살고, 잘 되게 하시려면
그 애를 나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절에 데려다가 수양을 쌓게 하고 공부를 가르치면
후일 크게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배씨는 가족들과 의논을 했다.
기른정으로 보아서는 차마 내주기가 어려웠으나 단명한다는 말과 후일 잘되게 해 준다는
말에 그들은 아이를 스님에게 맡기기로 했다. 아이를 데리고 떠난 이 스님은 당대에
유명한 보조국사였던 것이다. 보조국사는 그 아이를 열심히 가르쳤다.
워낙 총명한 재질이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통해 날로 학식이 넓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슴에는 감각(感覺)의 바탕이 숨어 있어 드디어 묘공(妙空)의 법을 얻었으니
이 아이가 바로 후일에 진각국사(眞覺國師)가 되신 분이었다. 진각국사가 출가한지
얼마 후 배씨부부는 세상을 떠났고 진각국사 어머니 배처녀도 홀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화순의 만연산 성주암(聖住庵)에는 몇 십년 전까지도 진각국사 영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 없고 다만 순천 송광사의 국사전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이요, 진각국사 어록(語錄) 등 여러 기록에서 좀 더 자세한
국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진각국사는 고려 명종8년(1178)~고려 고종21년(1234)의
스님으로 속성(俗姓) 은 최씨(崔氏), 이름은 식(寔)이며 호(號)는 무의자(無衣子) 자(字)는
영을(永乙)이다. 나주속(羅州屬) 화순현인(和順縣人)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부친은 휘(諱) 자는 완(宛)으로 되어 있으며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그리고 그 어머니께서는 배씨(裵氏)였다. 꿈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번개 우뢰가
세번 치는 것을 보고 임신(姙娠)이 되었는데 12개월 만에 낳았고 태포(胎胞)가
몸을 감아 흡사 연(蓮) 잎과 스님의 예복인 가사와 같았다 한다.
태어난지 7일 후에 눈을 떠 맑아졌으며, 어머니의 젖을 먹고 난 즉시 몸을 돌아 눕고 앉았다.
부모께서는 심히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고 생계가 어려워
품팔이를 하려 할 때 어머니께서 꾸중을 하시며 글 공부를 권하였다.
 
항상 불경과 주문(呪文)을 독송(讀頌)하다 마침내 득력(得力)하여 요사스런 무당과
음탕한 복자(卜者)들을 물리치고 왕왕히 병자를 구하였으며 고려 신종4년(120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대학(大學)에서 공부하다 어머님의 병환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의 친가이고 외종형(外從兄)인 배광한(裵光漢)씨 댁에서
어머님의 병환치료를 할때 관불(觀佛) 삼매지경(三昧之境)에 들어 성심껏 기도를 드리자
어머 님 꿈에 제불(諸佛) 보살이 사방에서 나타나 보호하였다고 하며
그 후 즉시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외종형 무부(外從兄 武富)도 같은 꿈을 꾸었다.
어머님은 그 후 일년이 지나 돌아가셨다. 그때 마침, 보조국사께서 조계산에
수선사(修禪寺,현재의 송광사)를 새로 지어 도(道)를 세상에 널리 펴고 있었는데
여기 수선사에 어머니의 제(祭)를 모셔 구천명도(救遷明途)를 밝혀 드리고자
참례(參禮)하여 지성껏 기도를 드렸다.
 
이날 밤 그의 외숙(外叔)은 꿈에 그녀가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삭발하여 중이 될 것을 보조국사께 청하였는데 쾌히 허락을 하였다.
보조국사가 처음 진각을 볼때 중으로 보였는데 다시 보니 속인(俗人)으로 보이었다.
먼저 꿈에 설매헌(薛梅軒)선사께서 입원(入院)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상히 여겼는데 다음날 진각이 찾아오니 더욱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일찌기 오산(鰲山)에 머무르면서 수도할 때 한 반석(盤石) 에 앉아 주야정진
매일 새벽 오경(五更)의 계송이 십리밖에까지 들려 새벽시간을 계송과 목탁 소리로
마을 사람들이 짐작하였으며 또 지리산(智異山) 오대암(五臺庵)에 자리하고
대상(臺上)에서 정진 할 때 적설(積雪)이 목에까지 덮어 있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혹시 얼어 죽지 않았는지 흔들어 보면 숨을 쉬고 있었다고 한다.
 
용맹으로 정진한 각고는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생과 사, 형(形)과 해(骸)를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어떻게 이 경지를 이르랴. 그 후 을축(乙丑)의 가을에 보조국사께서
억보산(億寶山)에 계실때 선문도화(禪文道話)로 통하여 무의자 제서도 대오(大吾)의
경지에서 달관함을 바르게 보시고 국사께서 깔깔 웃음으로 대소하시며, 무의자를 모시고
지리산에 들어가 다시 모든 법을 밀전(密傳)하시며 왈, 「오기득여사무한의
(吾旣得汝死無恨矣)!」(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하시었다.
보조국사께서 국사의 자리를 물려 이어주시고 무등산 규봉암(圭峰庵)에 안주(安住)하니
진각께서 굳이 사양하여 지리산으로 자취를 감춰 그림자까지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 대안경오(大安庚午)에 국사께서 입적(入寂)하신 후 부득이 그 자리를 받들게 되어
입원계당(入院啓堂)하였는데 사방에서 도학일사(道學逸士)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고
팔도의 귀족, 공경(公卿)들이 모두 큰 스님의 도풍(道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각국사에 대한 기록은 그 외에도 많다. 고종께서 선사(禪師)로 제수(除授)하였고
그 후 다시 대선사(大禪師)로 제수되었다. 그 후 기묘년(己卯年)에 단속사
주지(斷俗寺 主持)를 하였다. 여러차례 사양하여 그 이듬해 송광사(松廣寺)로 돌아왔다.
그 후로 항상 송광사를 자기 처소로 삼았다고 한다. 계사(癸巳) 11월에 병으로 눕게 되니
고종께서 들으시고 즉시 어의(御醫)를 보내 치료(治療)케 하였다.
이듬해 봄에 월등사(月燈寺)에서 정양을 하였으나 선사께서 몸이 더욱 통심(痛甚)하니
이에 게0왈(偈曰), 중고부도처( 衆苦不到處) 별유일건곤( 別有一乾坤) 차문시하처
(借問是何處) 대적열반문( 大寂涅槃門) (중생의 고통이 이르지 못한 곳에 별유의 天地가 있네.
묻건데 이곳은 다름아닌 깨달아 찾아가는 문일지라.) 이라고 하였다.
「이 늙은 몸 금일로 고통을 잊으리라.」고 말씀하시며 선사께서는 미소지으며
가부좌로 열반(涅槃) 에 드셨으니 갑오(甲午) 유월 이십 육일이었다.
 
이십칠일 월등사(月燈寺) 북봉(北峰)의 다비식(多毘式)에서 영골(靈骨)을 모시어
본산으로 돌아왔다. 고종(高宗)께서 들으시고 심히 슬퍼하시며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셨다. 을미년(乙未年) 중엽(中葉) 송광사의 북쪽에 부도(浮屠)를 세워
고종께서 사액(賜額)하시되 원소지탑(圓昭之塔)이라 하셨다. 향수(享壽)는 오십칠세요,
법랍(法臘) 삼십이세이다. 국사께서 질병을 얻으시자 계시던 곳에 홀연(忽然) 바위가
무너지면서 굴러 떨어져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참새떼들이 이 골짜기에
찾아들어 하늘을 가릴 듯이 많이모여 십여일을 슬피 울었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사는 평생을 통하여 신이(神異)한 이적(異蹟)이 많았으니 거북이가 계(戒)를 받고
두꺼비가 설법을 들었으며 작오(雀烏)는 합주(合奏)를 하였고 특히 선사께서 지나가면
소가 길가에서 무릎을 꿇고 일어서지 않고 있다가 지나간 뒤에 일어서는 이적등은
모두 어록에 전하는 사실로서 옛 사람들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선문(禪門)의 정안(定眼)이며
육신(肉身)은 대보살이었다고 높이 찬(讚)하였다. 이 글은 당시 명세적(鳴世的)인
문장(文章) 이규보(李奎報)의 찬으로 되었던 진각국사(眞覺國師) 비문내용(碑文內容)을
요약한 것이다. 이 비는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에 세워졌으나 그 후 병란(兵亂)으로
결손(缺損) 되어 모두 읽을 수 없어 동국(東國) 이상국집(李相國集)의 소재(所載)를 옮겼다.
 
전후의 글을 보더라도 아버지의 성은 최(崔)씨 였으며 모성(母姓)이 배씨(裵氏)였음은
틀림 없고 아버지의 성명(姓名)까지 밝혔던 것으로 보아 최씨집으로 출가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학서도(鶴捿島)에 천년 묵은 노목(老木)이 있었는데
1927년 정묘(丁卯) 정월 2일 오후8시쯤 목동(牧童) 김백만(金栢萬)의 실화 (失火)로
소진(燒盡)되었다고 한다. 수령(樹齡)은 약 천년쯤 되고 직경(直徑)이 3미터 둘레가
9미터 쯤 되는 거목(巨木)이 천년의 역사를 산 증물(證物) 로 서 있었는데
이제는 진각국사(眞覺國師)의 기이하고 신통하며 위대한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주인공이 이 세상에서 흔적을 감추고만 셈이다. 또한 자치샘 물마저 이제는 먹을 수도
없게 되어 쓸쓸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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