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2회)부안은 고려시대 도자기 산실

2016. 2. 25. 10:04도자 이야기



      

문화기획
<1부>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2회)부안은 고려시대 도자기 산실
승인 2008.01.09  


      
     



  

 인류가 출현한 이후 많은 도구들이 사용됐다. 그 가운데 물체를 담을 수 있고 익혀 먹을 수 있는 토기의 발명은 인류사의 획기적 전환점이 됐다. 이후 흙을 이용한 그릇의 진화는 계속됐다.
 중국 은대(B.C 1600경 ∼ B.C 1050경)에 원시적 청자가 발생하고, 한대를 거쳐 육조시대 태토 및 유약의 발전을 토대로 하여 만당(晩唐)·오대(五代)에 와서 중국의 화북(華北)과 화남(華南) 등에서 청자를 만들었다. 이 중 절강성 월주요(越州窯) 청자가 중국에서 으뜸이었다.
 이 청자는 오월국(吳越國)이 978년 망하면서 월주요 청자 제작기술이 중국 각지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각지로 흩어진 일부 청자 장인들이 고려에 그 기능을 전수했다고 보여진다.


 내적 요인으로는 삼국시대 이후 발달한 토기 제작기술이 통일신라시대에는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혀 토기를 굽는 등 그 기술적 토대에서 중국의 청자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고려의 독자적인 청자로 재탄생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청자 발달은 부안 줄포만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청자는 고창의 용계리와 부안의 진서리를 거쳐 유천리에서 최고의 청자로 발전됐다.


 부안 유천리 일대에서 발견되는 상감청자의 파편들에는 대형의 기형에 모란 등을 상감한 활달한 문양, 각종의 기대(그릇받침), 용무늬 매병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보편적인 차도구에서 벗어나 인간생활의 일체에서 사용했음은 순청자의 단아함과 청아함에서 상감기술을 이용한 화려하고 세련된 귀족적인 면모를 발휘했다.
 상감청자의 기술력이 부안 유천리 청자에서 최고조에 달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 및 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는 이러한 고려시대의 세계적인 명품인 고려청자가 정작 그 뿌리요 출생지인 부안에는 한 점도 없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말처럼 세계 최고의 상감청자를 만들었던 부안의 유천리에는 깨지고 터지고 덜 익은 청자 편들은 못난이로 왕실과 권문세족의 품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려져 유천리 땅 속에 묻혀 천년 세월을 지나 오늘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의 자료적 가치로 빛을 발하고 있다.


 본보 기획취재팀은 지난 6월부터 고려청자의 해외 출토편 현지조사에 착수했다. 탐사도중 중국 항저우 절강성문물국 자료실에서 만난 상감청자편들은 천 년만의 부안인과의 만나 그 제작지를 가늠해 보는 데 매우 귀중한 잣대가 됐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수 만점의 유천리 출토 파편들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국내외 박물관 및 미술관에서 본 맑고 밝은 빛깔에 셈세한 무늬의 상감청자들의 그 동일함을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 지방에서 출토된 수 백점의 파편들은 취재팀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부안 유천리의 청자가 고려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향해 발전해 나갔던 증거들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 청자를 만들었던 요지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이북에서는 평안남도 강서군 일대와 황해도 송화에서, 이남에서는 경기도, 서울, 충남, 전북, 전남, 경북, 부산 등 주로 서해안과 인접해 있는 지역에 밀집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전북 부안과 전남의 강진은 전체 청자 요장의 반 이상이 분포 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최고의 청자를 만들었던 곳으로 우리나라 청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부안의 요장은 최고의 청자를 만들었던 유천리에서 신복리, 우동리, 진서리 등 해안가를 중심으로 분포됐다. 2002년 비안도 앞 해저에서 다량의 청자가 발견된 이후 상서면, 하서면, 변산면 등지에서도 요지의 흔적 및 청자(분청자 포함)편 등을 발견하고 제보해 오는 것을 보면 부안은 변산 주변의 바닷물이 닿았던 해안 인접지의 많은 구릉에서 자기를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김종운 박사(부안군 청자전시관 건립팀장·문화재전문위원)는 “유천리를 중심으로 서편으로는 진서리까지 동북쪽으로는 변산의 해창에 이르는 도요지가 넓은 띠를 이루고 있지만 유천리와 진서리를 제외하고는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정확한 분포와 그 상태를 알 수 없다”“부안에 이처럼 많은 요지가 있었던 이유는 좋은 원료인 흙, 풍부한 땔감, 그리고 편리한 운송방법인 해로의 발달 등을 뽑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전국의 대부분 도요지가 비슷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지만 부안에서 생산된 도자기 중 청자가 으뜸인 까닭은 왕실용 내지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집단의 수요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유천리 도요지 중 최고의 청자를 만들었던 도요지는 고려시대 성(城)의 하나인 ‘유천리 토성’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성 안에 위치했다. 아직까지 고려시대 부안에 자기소를 두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어 부안 유천요가 관요라고 명백히 말 할 수 없지만 부안 유천요의 최고품이 발견되는 곳이 성내라고 하면 이는 단순히 부안의 해안 방비를 위해서만 축조한 방어 기능의 성이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부안 청자 요장은 11C에서 14C까지 보는 경향이 두드러져 성내에 있는 요장과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안 청자가 진서리를 거쳐 유천리의 유천리 토성을 중심으로 주도된 청자제작은 단순한 민간 수요에 의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 어떤 형태든지 권력기관의 수용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려시대 1m에 육박하는 용무늬 매병, ‘청림사’ 명문의 청자화병과 고려 명종의 묘인 지릉(智陵)에서 출토된 청자들을 통해 당대의 최고의 계급층, 즉 최고의 귀족 집단인 사찰의 승려들과 왕실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청자상감인물문 매병은 중국 당대 최고의 무장가인 조맹부와 관도승 부부를 묘사한 것으로 주장하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다시 말해 중국의 중요인물에 선물로 보내고자하는 청자를 민요에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부안 유천리 도요지의 중요성을 간접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런 면에서 고려시대 최고, 최대의 청자를 생산한 부안 유천리가 민요로만 운영되었다는 기존의 학계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본보 기획취재팀이 내린 결론이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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