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3회)부안청자 중흥과 쇠퇴

2016. 3. 1. 03:10도자 이야기



      

문화기획
<1부> 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3회)부안청자 중흥과 쇠퇴
승인 2008.01.09  


  


  
  
 고려 후기인 13∼14세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대몽항쟁과 원 간섭기, 홍건적의 난 등 잦은 왜구의 침입과 원·명 교체기에 의한 국경분쟁 등 대외적 요인과 내적으로 무인집권층과 권문세족에 의한 파행적 정치와 경제적 수탈이 심했다.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듯 청자의 질적 하락도 점진적으로 계속 진행됐고 공민왕대 ‘정능(正陵·노국대장공주의 능)’ 축조에 따른 국고 고갈과 국방력의 공백으로 사회 경제적 모순이 심화되었던 시기이다. 특히 전문화된 공납품을 생산하던 소(所)의 해체가 가속화되어 전문적 분업화로 제작되던 도자 생산은 점차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따라서 중앙통제에 의해 제작되던 청자 생산은 통제의 해이와 함께 수요층의 증가로 생산과 공급이 확대되면서 점차 그 질이 쇠퇴하고 분청자로 이행된다.
 
 # 몽골침입이 고려도자사 전환기
 
 고려사회를 혼란과 쇠퇴기로 빠뜨린 몽골침입이 도자생산의 중심지인 전라도에 영향을 미친 것은 몽골의 3∼6차 침입 때이다. 특히 3-2차(고종 23년; 1236) 침입 때 전북 전주와 고부, 부안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6-2차(고종 43년; 1256) 침입 때 비로소 ‘해양(海陽·현 광주)’과 나주 등 전남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전라도는 경상도 지역과 함께 무신정권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던 곳으로 비교적 피해가 적어 청자 생산 역시 급격한 하락이 아닌 점진적 쇠퇴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무신정권에 의한 중앙통제가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을 바탕으로 국가재정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즉,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략을 비교적 적게 받았던 오늘날의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관청의 곡식을 이용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여 집권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남해안의 안전한 해상 조운로를 확보하여 江都(강화)로 이들 지역의 물산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강화 집권층은 이를 기반으로 많은 경제력을 집중하였던 ‘고려대장경’을 제작하는 등 대몽항쟁기에도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불만을 품고 원종 11년(1270) 8월 진도를 중심으로 대몽항쟁을 계속하였다. 진도에 본거지를 둔 것은 조운로를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해안과 도서지역에 위치한 김해, 남해, 거제, 마산, 완도, 압해, 제주 등 넓은 지역에 해양세력권을 형성했다. 따라서 이들 지역은 삼별초 세력권 내에 있어 중앙정부의 통제가 매우 힘들어 청자는 점진적으로 그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선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은 “삼별초의 영향으로 청자의 질적 하락이 진행됐다는 사실은 파주 혜음원과 강화 희종 석릉, 강화 원덕태후 곤릉, 강화 최항 묘, 진도 용장성, 완도 법화사, 제주 법화사 등에서 출토된 청자에서도 입증되고 있다”며 “중앙통제의 어려움은 점차 도공(陶工)들의 이탈을 초래해 요장의 확산과 대량생산, 수요층의 확대를 촉진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청자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 13세기 부안상감청자 절정기
 
 부안의 상감청자가 꽃 피웠던 시기는 13세기이다. 이 시기는 12세기대 전성기 청자에 비해 기형과 문양 등에 있어 부분적으로 도식화가 진행됐다. 그러나 여전히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단정하면서도 사실적인 자연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받침은 규석을 중심으로 내화토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유도 비색에 비해 떨어지지만 전성기 비색의 여운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상감문양의 전개 양상에 뚜렷한 변화가 있던 시기는 대몽항쟁이 마무리되는 1270년대를 기준으로 크게 나눠진다.

 한성욱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1270년대까지는 12세기처럼 순청자의 비중이 높고 상감청자는 소량 제작되며, 문양도 간략하면서 단아한 미를 갖추고 있지만 1270년대부터 그릇 전면에 상감 문양이 시문되며 순청자에 비해 상감청자의 비중이 많아진다”고 설명했다. 즉, 1270년대 이후 상감기법이 본격적으로 문양의 중심을 차지하며 부안 상감청자의 전성기를 이룬다는 것.
 한 위원은 또 “상감청자의 발전은 색상으로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순청자의 질이 대몽항쟁 이후 점차 퇴보하자 이를 문양으로 만회하고자 하는 시대적 배경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땔감고갈·장인이탈이 쇠퇴 이유
 
 이러한 전통은 14세기가 되면 실용성과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질적으로는 더욱 퇴화되지만 모양에서 변화를 가져온다. 기형은 매우 두터워져 대형화되면서 둔중해지고 구연은 대접의 경우 대부분 내만되며, 굽도 13세기대 청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어진다. 문양은 간략화되거나 집단문양이 반복되는 등 도식화 양식화되고 있으며 유색도 황색조와 갈색조를 띠는 점차 어두운 색조로 변해가고 있어 매우 퇴화되었다.
 태토 또한 시기가 지나면서 점차 거칠어지고 있다. 특히 충정왕 2년(1350)부터 시작된 왜구의 본격적 침입은 청자의 질을 급속히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한 위원은 “이 시기는 오랜 전란으로 인한 신분제도의 해이와 소(所)의 해체, 신진세력의 등장, 수취 체제의 혼란 등으로 도자를 필요로 하는 신분층이 두터워져 수요층이 확대되면서 장인들의 이탈에 의한 도자 생산의 확산을 더욱 증가시켰다”“이러한 복합적 요인은 시대적 배경과 함께 실용성이 강조되는 도자의 대량생산을 촉진시켜 청자의 질적 쇠퇴가 가속화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14세기는 고려 왕조의 쇠퇴와 함께 청자도 급속하게 퇴락하고 있다. 부안의 상감청자는 13세기대의 양상을 이어받아 1320년대까지 생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330년대 이후가 되면 강진은 지속적으로 청자를 생산하고 있으나 부안은 생산 기반을 상실하고 있다.
 이는 대몽항쟁으로 인한 장인들의 이탈에 의한 후유증으로 발생하였을 가능성도 있으나 몽골의 일본 원정에 필요한 선박 건조로 도자 생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땔감이 고갈되어 쇠퇴하였을 수도 있다.
 한편 부안은 고려시대 국가에서 필요한 목재를 생산하던 곳으로 일본 원정을 위한 선박 건조로 부족한 목재 보호를 위해 강진으로 자기소를 일원화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부안 청자의 쇠퇴는 장인들의 이탈도 원인일 수 있으나 땔감 부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추정된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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