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분청사기, 백자, 청화백자 비교

2016. 2. 24. 11:58도자 이야기



       도자기

조선의 분청사기, 백자, 청화백자 비교
조선시대 분청사기, 백자, 청화백자에 대해서 비교좀 해주세요..^-^;;
좀 자세하고 정확하게~
DB6713 | 2006.05.17 11:17 수정됨 | 조회 3,132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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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시대에는 청자를 중심으로 도예 문화가 발달했음에 비해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 시대에는 거칠어진 상감청자를 계승한 분청사기와 당시 인접 중국을 비롯한 도자 예술 문화를 가진 나라들의 유행에 따라 백자의 제작이 크게 발전하였다. 백자의 흰 빛을 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 우리 나라의 심성에 맞는 색깔이 이루어졌고 그릇의 형태 또한 특색 있는 조형미를 보여주는데, 특히 크고 작은 항아리가 지닌 둥근 맛은 우리 나라 미술의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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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백자를 서민적 취향으로(특히 후기에 널리 유행하는 청화 백자를 서술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말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백자의 미감이 고려청자에 비하여 덜 귀족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백자를 사용한 수요자들이 일반 서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자는 처음 왕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고 그 외에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 후 일부 사대부들도 사용하게 되어 그 수요가 확대되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여전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던 자기였다.  

  •    고려 말기 정치 사회의 문란과 왜구의 침입으로 청자의 제작이 점차 쇠퇴하여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강진, 부안 등 주요 청자가마가 없어졌다. 그러나 도자기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하여 새로운 도자기를 굽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결과 조선 시대 도자 예술의 특색을 지닌 분청사기와 백자를 굽던 가마가 크게 성행하였다. 광주 무등산 충효동 주변의 가마들은 고려 말기의 청자, 조선초기의 분청사기, 백자로 이어지는 변모를 잘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는 사옹원(司饔院)이 있어 궁중이나 관청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제작하였다. <<세종실록>>의 지리지를 보면 전국에 자기소(백자를 굽던 가마로 추정)가 139개, 도기소(분청을 굽던 가마로 추정)가 195개소나 기록되어 있어 조선 초기에 번성했던 도자기 생산의 양상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모두 만들어졌으나, 상감청자와 백자에서 변모한 분청사기가 특징 있는 도자기로 많이 제작된다. 거칠면서도 자유분방함을 지닌 분청사기는 점차 백자화되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자취를 감춘다. 또한 초기의 백자는 중국 원과 명의 자극을 받아 그 기술이 발전하였고 상감기법이 응용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질이 좋은 백자는 분원이었던 경기도 광주군 일대에서 주로 만들어졌는데,
    15세기 중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17 - 8세기에 오면서 흰색 바탕에 간결한 푸른색 그림과 무늬를 넣은 청화백자는 당시 미술의 동향과 마찬가지로 선비 문화에 바탕을 둔 우리 나라 특유의 풍토 감각이 잘 살리고 있다. 한편 철화백자와 진사백자도 만들어진다.

    백 자
        조선백자는 사대부문화가 뿌리내린 성종 연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건국기의 사대부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그들내부에서도 민중성이 반영된 진취성과 검소함과 소박성을 지녔고, 문화면에서도 이를 반영하는 분청사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점차 물질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후 지배층으로서의 사대부의 미의식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것이 백자이다. 15세기의 백자에는 접시, 대접, 사발, 병, 항아리 등이 있다. 몸체의 선이 부드럽고, 태토에 잡물이 없어서 눈 같이 희며 유약은 약간 푸르름을 머금어 두텁고 깊은 맛을 준다. 굽에 가는 모래를 받쳐 구웠다. 대접과 접시는 주둥이가 밖으로 벌어지고 안바닥을 넓게 깎았다. 병의 주둥이도 밖으로 벌어졌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가마는 광주의 우산리, 번천리, 무갑리, 오전리에 있다. 대접과 접시의 굽 안 바닥에 '天''地''玄''黃'등의 문자를 음각하였다. 15세기 중엽부터 만들어 쓰기 시작한 청화백자는 초벌구이에 청화안료로 무늬를 그린 후에 투명한 유약을 바르고 구워낸다. 청화안료는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토청을 사용한 것과, 수입한 회회청 계열의 두 가지 안료가 있다. 우리의 안료가 흑갈색을 띠는 반면에 수입안료는 고운 남청색을 낸다. '청화백자 매조문와' 는 토청을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16세기의 가마는 정지리, 관음리에 있으며, 15세기와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있다. 청화안료의 수입이 어려워져 15세기보다 청화 백자의 제작이 줄어들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철회백자가 등장하였다. 굽안 바닥에 '左''右'자를 새겼던 17세기 전반의 가마는 탄벌리, 상림리, 선동리 등에 있다. 건국 초부터 명나라의 백자가 들어오기도 하여 백자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나 사대부 사이에 일반화되지는 못하였다. 백자는 양반들의 실생활에 이용된 것이 아니라, 왕이 사용하는 어기, 제사용의 명기, 국가 중요행사에 사용되었던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세종 연간에 명나라에서 백자 조공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백자를 만드는 기술이 수준급으로 발전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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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분청사기(粉靑沙器)
        분청사기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이다. 분청사기는 청자 태토나 짙은 회색조의 거친 태토 위에 백토(고령토)를 물에 풀어서 그릇에 바르거나 덤벙 담근 후 여러 가지 기법으로 무늬를 나타내고 그 위에 유약을 씌워서 구워낸 도자기를 말한다. 이것은 여말 청자가 퇴화하면서 이를 탈피하는 새로운 시도로 제작되었다. 분청사기는 신진 사대
    분청사기 가운데 분청사기의 멋을 은근히 풍기는 장군이다. 입과 굽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서도 굽이 좁아 늘씬하게 쭉 빠진 몸체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철화로 몸체의 양면에 당초 무늬를 넣은 것이 유연하다. 장군에는 똥장군도 있지만 물이나 술 등을 넣어 들고 다니는 것도 있다.

        부들의 미감에 맞는 새로운 공예품으로 조선 초기부터 전국적으로 흔하게 제작되었다. 물론 이것이 일반 민중이 사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분청사기의 종류는 백토 분장과 무늬를 장식하는 기법에 따라 분류된다. 조선 초기(15세기)에는 상감청자와 연결되는 상감무늬와 인화무늬가 주로 만들어진다. 16세기에 와서는 분장한 귀얄자국이 거칠어지며 무늬도 힘차고 추상화하는 경향을 띤 분청사기가 나타난다. 이 때 분청사기는 기법에 따라 귀얄 덤벙분청이 있고 박지 무늬(분장한 그릇표면을 긁어내는 기법), 조화 무늬(날카로운 칼끝으로 만든 무늬), 철화 무늬(분장 위에 철회로 그린 무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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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청사기의 美
    1. 그릇 모양에 힘이 넘치고 두툼한 질감이 특징.
    2. 소박하면서도 '정제되지 못함'의 묘미가 넘쳐 흐른다.
    3. 民窯(민요)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하고 친숙한 맛이 있다.
    4. 신선하고 활달한 귀얄무늬가 큰 매력
    5. 문양이 자유분방하고 대담.대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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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人; "와비 사비" 의 禪美. (적조의 미.)  

  •    " 한국 도자기 역사 2천 년의 자취를 살펴보면 대개 시대가 내려올수록 아름다움의 방향은 더 한국적으로 바뀌어 왔는데, 이 한국적이란 말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 양식에서 우러난 무리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소박한 아름다움, 호젓한 아름다움, 그리움이 깃들인 아름다움, 수다스럽지 않은 아름다움,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 속을 고요히 누비고 지나가는 익살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아울러서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 도자기가 지닌 이러한 한국미의 바탕 속에서 이 잘생긴 아름다움을 때때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우리 한국인이 지닌 가장 행복하고도 존귀한 재산의 한 묶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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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도자기 중에서도 이러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가장 신선하게 성공적으로 표현된 것은 조선시대 초기의 분청사기 종류라고 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고려 상감 청자의 타락에서 싹튼 것이 분명하지만, 새로운 조선 왕조의 새 문화 건설의 기운을 타고 멋지게 변신해서 수치스러운 껍질을 벗어 버린 것이 분청 사기였다. 이 분청사기를 보면서 가끔 느끼는 가슴 밑창부터 후련해지는 멋과 아름다움은 우리 도자기 역사 뿐만 아니라 동양 도자기 역사상에서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색다른 아름다움으로서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시각에 새로운 눈복(眼福)을 누리게 해 주고 있다.
    때로는 지지리 못생긴 듯 싶으면서도 바로 보면 비길 곳이 없는 태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둥근 맛, 그리고 때로는 무지한 듯하면서도 양식이 은근하게 숨을 쉬고 있는 신선한 매력, 그 속에서 우리는 늘 이 분청사기가 지니는 '잘 생긴'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 최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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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그 도자기 공예에 있어서 명예로운 조선이다. 국세는 기울어도 아름다움에 의해 보장받은 이상 국운에 쇠퇴란 없다. 역사에 한 변화가 가해진 지금의 위급한 때를 맞아 이 민족은 예술의 의의에 대해 특히 깊이 인식하고 얻는 바가 없어서는 안 된다. 조선사를 읽고 그 잔인한 정치에 얼굴을 찌푸릴 사람도 있겠으나, 인류는 앞으로 영원토록 조선의 도자기 공예에 예찬을 보낼 것이다. 일찍이 일본의 수많은 도공들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사표(師表;본보기)로서 그 아름다움을 예찬할 자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저 이씨 왕가의 고려청자 진열실은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의 순례의 발길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조선을 보려는 자는 누구나 그 방을 찾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큰 놀라움으로써 조선 도자기 공예사가 편찬될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되는 조선 도자기 공예의 명예를 위해 서울에 조선 자기의 진열실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 민족은 지금 이러한 일을 의식할 겨를도 없고 흥미마저 갖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위대한 것이 자기 나라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오히려 그 민족의 원수로 간주되고 있는 일본인인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옹호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사람은 언젠가 이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 그리하여 특히 자기 나라의 영예로운 도자기 역사에 새로운 한 장을 더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중요한 시기이다. 결코 그 아름답고 위대한 도자기 공예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자각은 조선 사람만이 가져야 할 특권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 ( 야나기 무네요시, 1922년 <시라카바(白樺)>에 실림) 

  •  2. 순백자
       순백자란 흰색 이외에 다른 색깔의 장식 무늬가 없는 것을 말한다. 조선 초기 백자에는 두 가지 계통이 있다. 그 하나는 고려 시대 백자의 전통을 이은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 원과 명의 백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후자가 조선 백자의 전통을 이룬다. 백자는 조선 초부터 세련되기 시작하여 15세기 후반부터는 사옹원이 맡아 도자기를 굽던 광주분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조선 시대의 순백자는 단순한 형태와 흰색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청화백자 등 모든 백자의 기본이다. 특히 이러한 백자의 아름다움은 한국 예술의 독특한 분위기를 잘 나타낸 것으로 손꼽힌다.

    3. 청화백자
        백자에 푸른색을 내는 천연 코발트 안료로 무늬나 그림을 그려 구워낸 것이 청화 백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15세기 중엽부터 청화 백자를 굽기 시작했으나 코발트 안료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가져온 것을 중국을 통하여 수입하여 썼다. 그래서 회청(回靑) 또는 회회청이라 부른다. 따라서 조선 시대 전반기에는 이 회청을 구하기가 어려워 사실적이고 회화적인 무늬로 장식했는데, 후기에는 토청(土靑)이 개발되고 회청의 수입이 원활해져 무늬가 일부 지나치게 번잡스러워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후기의 청화백자에는 진사나 철화를 함께 사용하여 색깔을 내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흰색과 청색의 간결한 무늬가 조화를 이룬 청화 백자에 대한 기호가 매우 컸는데, 이것은 선비 문화의 특징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청화 백자 매죽문 항아리 : 15세기 중엽, 높이 39.9cm, 국보 제 219호==대표작
    이 작품은 그릇의 모양, 유약, 문양의 배치와 표현 등 조선 초기 청화백자의 전형적인 예이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주둥이에서 몸체의 윗부분에 이르러 한껏 부풀었다가 허리 부분이 잘록하게 들어가고 밑바닥이 반전되는 것은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항아리 형태이다. 주둥이에는 원과 연꽃을, 어깨와 그릇의 아랫부분에 환한 연판 문양을 넣은 것은 원나라 도자기에 흔히 나타난다. 그러나 연판 사이에 매화와 대나무를 그려 넣은 것은 한국화풍이다. 이런 회화는 화원의 솜씨로 보인다. 이 항아리는 조선 초기 청화백자가 중국 도자 양식을 따르다가 한국화되는 과도기적 양식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매화와 대나무는 사실적이면서 회화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어, 시원하고 활달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대나무는 윤곽을 짙게 그리고 채색하였으며, 매화는 늙은 줄기는 짙게 그리고 가는 선과 옹이를 절묘하고 섬세하게 중첩하여 흐리게 그렸다. 가는 가지와 꽃은 짙고 옅게 나타냈다. 유약은 담청색을 머금었고 식은테는 없어 표면이 차분하고 매끄럽다.

    4. 철화백자
        백자 바탕에 석간주 등 산화철 안료와 무늬를 넣은 것을 철화백자라 부른다.산화철의 안료는 다갈색, 흑갈색, 녹갈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철화백자 또는 백자철회문이라고도 한다. 철화 백자는 조선 초기부터 그 예가 나타나며 철화 무늬가 일반화되고 세련되는 것은 청화백자와 마찬가지로 17, 8세기였다. 이 철화백자는 그 무늬로 보아 청화백자의 대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지만, 힘차고 추상적이거나 익살스러움을 표현한 철화백자 나름대로의 맛을 지닌 것이 많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철화는 진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백자 철화 포도문호 : 17세기, 높이 53.8cm==대표작
    17세기 중앙 관요에서 만들어진 항아리를 대표하는 수작이다. 알맞게 솟은 입과 둥근 어깨, 대담하게 좁아진 아랫도리가 흔연히 조화되어 항아리의 품격을 더욱 높이고 있다. 유약은 백색이고 전면에 식은테가 있다. 목에서 시작하여 밑으로 늘어진 포도 가지와 포도송이는 화폭에 그린 것 같이 뛰어났으며, 밑에 넓은 공간을 남기는 구도, 철사(철사) 발색의 농담 등에서 화원의 의도가 그대로 나타나 있어 모든 과정에서 성공한 조선 자기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5. 진사백자
    산화동 성분을 안료로 쓰는 진사는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발색한다. 우리 나라 도자기에 진사의 사용은 흔하지 않지만 고려 시대 때 처음으로 청자에 쓰여졌으며 조선 중기에 와서 백자에 조금씩 사용되다가 후기에는 비교적 그 예가 많아진다. 그리고 이 진사는 청화나 철화를 함께 조금씩 사용하기도 하였다

    | 2006.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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