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5회)부안청자 바닷길-보물섬의 꿈

2016. 3. 1. 03:31도자 이야기



      

문화기획
<1부>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5회)부안청자 바닷길-보물섬의 꿈
승인 2008.01.09  


      



  

   지난달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양질의 고려청자 6천여 점과 이를 수송하던 ‘보물선’이 함께 발견됐다.
특히 이날 발견된 청자들은 청자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12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들로 고려시대 청자의 생산과 유통과정 및 조선기술 등의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많은 양의 도자기를 가득 싣고 침몰 된 배들은 ‘보물선’이라는 신비를 안겨주며 몇 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발견되고 있다.


   이들 침몰선은 발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엄청난 양의 유물을 선사하여 다양한 연구와 전시 등에 풍성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해저에 침몰 된 배는 당시 선원들에게서는 큰 꿈을 박탈당한 허무함이나 또는 그 꿈과 함께 자신도 바다에 매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바다를 통해 도자를 비롯한 물품을 운반하는 것은 그만큼 항상 침몰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바닷길을 이용하는 것은 많은 양을 물품을 빠르게 운반할 수 있는 효율성 때문. 이는 동서교류에서도 실크로드를 통한 육로에서 바닷길로 교역로를 변경한 것에서도 알 수 있으며 특히 동서 바닷길은 ‘도자기의 길’로 불릴 정도로 도자기 교역이 중심이 되면서 과학의 발달과 함께 더욱 발전했다. 교역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도자기는 당시 교역에서 매우 고가의 물품으로 취급되어 유럽 왕실은 신대륙 발견을 통한 부의 축적을 대부분 중국 도자 수입에 충당했다. 이들 중국도자는 소유량과 조형미에 의해 왕실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는 물품으로 자리매김하여 그 수요는 계속 증가하였다. 따라서 유럽 왕실은 재화의 절약을 위해 앞다투어 도자 개발에 열을 올려 오늘날 유럽 도자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바닷속에서 발견한 보물 고려청자

   바닷길은 고려청자의 주요 운반로였다. 우리 나라도 현재까지 바다에서 발견 또는 발굴된 도자기의 양이 7만여 점 이상이며 그 중에서도 고려청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고려시대 바닷길을 이용하여 도자기를 운반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해저유적에서 출토되는 도자는 그 시대 일상생활에 사용하였던 대접과 접시가 가장 많아 생활 용기를 중심으로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욱 문화재청 감정위원은 “이들은 기종 또는 기형의 구성과 문양, 번법(燔法), 유약, 태토 등 제작기법과 도자의 포장과 선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어 다양한 시대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도자기들은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운송하던 중 매몰된 것으로 도자의 생산과 유통, 소비 과정을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현재까지 해저유적이 발굴조사된 곳은 신안 방축리·신안 안좌도·제주 신창리·완도 어두리·목포 달리도·무안 도리포·진도 벽파리·군산 비안도·군산 십이동파도·군산 야미도·군산 무녀도·보령 원산도·태안 죽도·태안 마도 해역 등으로 주로 서남해안에 집중되고 있다.
해저에 매장된 도자기들은 수중에서 오랜 기간 매몰되었으나 높은 온도로 구운 재질적 특성으로 인해 조형성과 품질 등이 거의 변화되지 않아 육상에서 출토되는 도자기보다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한 위원은 “가마터나 퇴적층 등에서 출토되는 도자들은 번조과정에서 폐기된 것으로 완전한 형태를 갖출 수 없지만, 해저에서 인양되는 도자기들은 완성품으로 운반과정 중에 선박이 난파되거나 좌초되어 매몰된 것들”이라며 “기형과 문양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사람들에게 보물선의 신비를 안겨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해저유적에서 발굴 인양된 도자기들은 한정된 시기에 대량으로 생산된 유물들로 장식의장과 제작기법, 기종과 기형의 조합관계, 편년연구 등 도자사 연구에 더없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해저에서 다량의 청자가 조사되는 것은 도자의 유통이 연안항로를 이용한 바닷길을 이용하여 대량으로 운송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청자가 발견된 해역의 대부분이 고려시대의 ‘조운로’에 위치하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청자가 발견된 해저유적을 연구하는 것은 도자의 운송항로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조운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도 중요하다. 특히 중국 도자의 발견은 한·중무역은 물론 중·일간의 중계무역 또는 중계항로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 바닷길이 발달한 원인과 주요지역

   우리 나라는 산악지형이 많고 여름에 강수량이 집중되는 자연 지리적 특성 때문에 세곡과 같이 부피가 크고 무거운 화물을 멀리 운반하는 데는 수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의 도자유통 역시 대부분 바닷길을 이용한 조운로를 통해 대량으로 운반하였다.
특히 서해안에서 발견된 200여 개소의 해저매장문화재(도자기) 발견지점이 대부분 조운로와 일치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즉, 서해안을 따라 연결된 연안항로를 중심으로 조운과 도자 등의 공물이 운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조운은 조창(漕倉)을 거점으로 국가재정의 근원을 담당하였으며, 성종대(981∼997년)에서 현종대(1009∼1031년)에 이르는 시기에 지방제도와 함께 완비되었다. 이들 조창이 설치된 지역은 모두 수운이 가능한 하천이나 해안을 끼고 있어 운송이 편리한 지점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위원은 “조운창을 중심으로 고려청자 최대 생산지인 전라북도 부안요와 전라남도 강진요, 해남요에서 생산된 청자의 유통구조를 고찰해 보면 강진과 해남에서 생산된 청자는 장흥창의 책임하에 선적되어 장흥(강진)→영암→해남→무안→부안→장진포→원산진(홍성)→안흥진( 태안)→승천포(강화)→벽란도(개경) 등의 서해 연안항로를 따라 개경으로 출항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또 부안요에서 생산된 청자는 부안에 설치되었던 안흥창이나 임피(군산)의 진성창의 책임하에 선적되어 부안→장진포→원산진→안흥진→승천포→벽란도 등의 해로를 이용하여 개경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조운선은 이동 과정 중에 해난사고가 자주 발생했고 이러한 해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자구책들을 인종대(1122∼1146년)와 공민왕대(1389∼1392년)에 연해항로 중 가장 위험한 충청도 서산 안흥량에서 발생하는 사고를 원천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태안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운하 굴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는 군산과 보령, 태안 등 이 해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해저 유적의 통계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바닷길을 통한 도자의 운반은 고려 말(14세기 후반) 극심한 왜구의 약탈로 일시 중지되기도 하지만 그 효율성 때문에 지속적으로 이용되었다.



# 부안유천리 청자 운반의 중심 비안도 해저유역

   해저 유적은 지금까지 서남해 해역에서 주로 발견되었는데 특히, 전북에서는 비안도와 십이동파도, 야미도 등 군산해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가운데 부안 유천리 청자를 운반했던 유적은 비안도 해저유적이다. 비안도 해저유적은 어부의 신고가 계기가 되어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조사했다.
나선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은 “이들 고려청자는 오랜 세월 퇴적층에 덮여 있었으며 최근 인근의 새만금방조제 건설로 인해 물길이 좁혀지면서 물살이 빨라져 해저의 퇴적층이 깎여나가며 발견된 것”이라며 “새만금방조제가 안겨준 예기치 못한 선물로 군산지역 해저유적은 모두 새만금방조제 때문에 발견되었으며 앞으로 새로운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도 많다”고 밝혔다. 이어 “청자통형잔과 청자합이 대표적이며, 특히 청자합에 시문된 단아한 상감문양이 특징으로 비안도 해저유적은 유천리에서 생산되어 개경의 왕실과 관청 등에 사용하기 부안의 줄포항을 출발하여 선박으로 운반되던 중 비안도 근해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비안도에서는 배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부안 유천리 7구역 청자요지에서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에 생산하였던 3천여점의 청자가 출토되었으며 접시류와 대접류가 주종을 이루고 소량의 청자발과 완, 잔, 뚜껑도 인양되었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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