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7회)부안청자와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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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1부>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7회)부안청자와 사찰

승인 2008.01.09  


      
    


          
    불교 문화권이었던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사찰 문화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거울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사찰은 생사의 안식처와 귀의처 역할을 담당했다. 언제나 특별우대 받아 고급문화의 최대 수요처로 고품질의 공예품을 향유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고려의 사회풍토는 역사상 불교 의례가 가장 활발하게 시행되고 크게 융성했던 시기다.
고려는 스님 가운데 덕망과 학식을 겸비하여 많은 이의 추앙을 받는 대선사 중에서 왕사를 두어 왕의 고문으로 삼았다. 또 국사를 두어 국가의 고문으로 삼는 등 최고위의 승직을 두어 예우했다. 이처럼 특별한 품격의 유지와 대우를 받았던 사찰과 스님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든 최첨단의 청자를 사용하였을 것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 사찰은 왕실과 대등한 권위와 신분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던 최대의 청자 소비처로 절터에서는 다종 다양의 청자가 출토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중 부안 유천리에서 제작된 고급 청자들과 전북지역 사찰들과의 연계성을 통해 부안 청자의 우수성을 살펴본다.


▲ 부안 고려청자와 사찰문화

   고려시대 부안 유천리에서는 화려하고 단정한 의자와 굽에 한층 멋을 부린 그릇 받침, 꽃보다 더 아름다운 무늬를 그린 화분 등 장식성과 실용성을 가진 다양한 기물의 청자들이 만들어 졌다. 단아한 모양에 맑은 색을 지닌 장구와 유려한 문양에 맑고 청아한 소리로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을 피리를 비롯한 각종 악기도 확인되고 있다.
천지를 압도하는 듯한 율동감을 지니고 있는 용머리 당(幢), 널리 퍼지는 소리가 마치 천의(天衣)를 입고 멀리 날아가 고뇌하는 인간들의 마음 속에 부처의 말씀을 설법하는 듯한 종(鐘), 끊기지 않고 곱게 피어올라 탐진치의 삼라만상을 맑고 향기롭게 정화하였을 향로.

   사찰에서 쓰였던 이 모든 아름다운 기물들이 부안 청자 도요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또한 오늘날 고품격을 지닌 건축물의 마감재로 당장이라도 쓸 수 있는 도판과 법당의 지붕을 화사하게 장식하였을 청자기와 등 건축 자재들도 생산되었다.
가장 널리 쓰였을 일반적인 대접과 접시, 잔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다양한 형상과 아름다운 장식성을 가진 매병과 정병 등 각양각색의 청자들도 만들었다.

   김종운 부안군 문화재 전문위원 “이러한 청자의 최대 소비처는 왕실과 귀족, 관료들이었으며 일상생활에 쓰이는 다양한 생활도구를 비롯해 각종 불교의식에 사용한 고품격의 의식구, 부처님께 드리는 공헌품을 담았을 각종 공양구, 불전을 꾸미는 각양의 장엄구 등에 사용됐다”“이러한 예는 왕실과 연관이 있거나 국가에서 관리하였던 개경과 강화의 사찰뿐만 아니라 지방 사찰에서도 확인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의 말처럼 부안도요지가 위치한 전북의 경우 부안에 있는 청림사에서 쓰여진 청자병을 비롯하여 남원 만복사(사적 제349호), 남원 실상사(사적 제309호), 익산 미륵사(사적 제150호), 고창 선운사 등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다량의 각종 고려시대 청자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사찰은 최상의 청자 소비처

   부안의 4대 사찰로 불리는 내소사(전북 기념물 제78호), 실상사, 청림사, 선계사와 인근의 김제 금산사, 논산 개태사(충남 기념물 제44호), 논산 관촉사, 부여 정림사(사적 제301호) 등의 큰 사찰에서도 고려청자들이 발견됐다. 이들 사찰들이 부안 청자의 유통권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성욱 문화재청 감정위원은 “이들 청자는 앞으로 태토와 기형, 문양, 번조기법 등 전문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정확한 제작지를 연구해야 알 수 있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지리적으로 가까워 운반이 쉽고 공급받기에 용이하였던 부안에서 만들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입증하는 단적인 예는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청림사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되는 ‘靑林寺(청림사)’란 글귀가 새겨진 ‘청자화병(국립중앙박물관; 동원기증품)’을 들 수 있다. 또 ‘비천문의 종’(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이라 불리는 청자는 1853년(조선 철종 4) 부안의 신청림사에서 발견된 1222년(고려 고종 9) 제작 동종(내소사 소장; 보물 제277호)과 유사해 청자 전성기에 부안 유천리에서 청자종을 만들어 사찰이나 불교와 관련되었던 곳에 납품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남원 만복사에서 출토된 연화당초문 그릇받침은 왕실 사찰인 파주 혜음원(사적 제464호)과 강화 선원사(사적 제259호)에서도 비슷한 유형이 확인되고 있다.
한 위원은 “이들 그릇받침은 부안 유천리에서 쉽게 확인되는 기종으로 유천리에서 생산되어 왕실 사찰과 주변 사찰에 공급되어 위신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를 통해 유천리에서는 일상 생활용기의 청자뿐만 아니라 청자 제작과 사용에 사찰만의 독특한 조형과 용도가 있었으며 이를 왕성과 주변 사찰에 생산 공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최고급 건축재로도 활용

   사찰과 관련된 청자 가운데 매우 독특한 것으로 건축재 청자를 들 수 있다. 건물을 장식하는 청자 건축재는 반영구적이며 방수효과가 높고 경관성이 좋아 특별한 건축재로 사용되었다.
청자 건축재는 형태와 사용 위치에 따라 평기와와 막새기와, 연목와, 연봉와, 잡상와, 도판 등으로 구분된다. 또 실용적인 기능도 있으나 건물의 장엄과 권위, 벽사의 의미를 지니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이같은 청자 건축재는 고려시대 가장 위엄을 갖추었던 궁궐과 사찰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실상사와 선운사에서는 출토 예가 극히 제한된 청자 건축재가 출토되어 부안 청자의 우수성과 이들 사찰의 격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김종운 부안군 문화재 전문위원은 “건축재 청자는 고려시대 양질청자의 양대 산맥인 강진과 부안에서 주로 생산하였으며, 출토지는 궁성이 있었던 개경·강화와 청자 생산지와 가까운 강진 월남사(전남 기념물 제125호)·고창 선운사·남원 실상사에서만 확인되고 있다”“이는 청자 생산지역이 소비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청자 건축재는 출토지와 출토량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
김 위원은 “평기와와 막새, 연봉와, 연목와, 잡상와, 도판 등이 함께 조합을 이루어 출토되는 예가 없으며, 막새 기와는 이제까지 생산지 외에는 출토 예가 없어 청자 건축재가 매우 한정된 건물의 특정 부분에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청자 기와는 지붕 전체에 덮이지 않고 가장 핵심적 전각의 전면 또는 사면의 앞부분과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등 일부만을 장식하여 권위를 상징했다는 것. 따라서 이들 청자 기와들이 확인된 실상사와 선운사의 격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함께 출토된 다종다양한 청자와 다른 유물들에 의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한성욱 위원은 “부안과 인접한 전북지역 사찰에서 출토된 고려 청자는 당시의 우수한 부안 청자문화를 입증하는 첫 번 자료로서 손색이 없으며 이들 청자 가운데 향로와 정병, 종, 막새 기와 등은 오늘날 재현하여 사용하여도 매우 훌륭한 공양구나 장엄구가 될 수 있는 것도 있다”“따라서 이들 재현 가능한 청자들은 이 시대에 맞도록 조형성을 재개발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고 이를 부안을 대표하는 문화 상품으로 개발해 문화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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