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6회)부안청자와 왕실

2016. 3. 1. 03:31도자 이야기



      

문화기획
<1부>부안유천 상감청자는 국보 - (6회)부안청자와 왕실
승인 2008.01.09  


      
     


  
   왕실은 그 시대의 미의식과 심미안을 유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왕실에서 사용하는 물품은 당대 최고의 명품들로 꼽힌다. 이러한 왕실과 직접 관련되는 유적은 그들이 생활했던 삶의 공간인 ‘왕성’과 사후 공간인 ‘능(陵)’, 그리고 삶과 죽음의 공간을 모두 아울렀던 신앙 공간인 ‘사찰’이 가장 대표적 공간이다.

   따라서 이들 공간에서 사용했던 고려청자는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으로 청자의 변천을 비롯한 도자사와 문화사, 미의식 등을 인식 재현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고려청자는 국가의 흥망성쇠와 함께 조형이 변화하고 있어 고려청자의 연구는 고려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 왕실의 대표적 유적 왕성

   왕실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 유적인 왕성은 개경에 있는 왕성(만월대)과 대몽항쟁시 임시 수도였던 강화 왕성, 그리고 삼별초가 승화 후 온을 왕으로 모시고 천도하였던 진도 용장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만월대로 널리 알려진 개경의 왕성은 최근 문화재청의 국립문화재연구소를 비롯한 남북 학술조사연구 기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발굴조사에서 모두 29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왕실의 도자 관련 물품을 관리하였던 ‘적항’ ‘판적’ ‘월개’ 등의 ‘육요직(諸窯職)’이 새겨진 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왕실용 도자의 공납 관리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기와류와 함께 일상 생활용기인 대접과 접시를 중심으로 고배, 베개, 잔 받침, 의자 등의 고려청자가 출토되었다.

   한성욱 문화재청 감정위원은 “유색은 청록색과 녹색, 암녹색, 황록색 등이며, 규석과 내화토를 받쳐 번조하였고, 문양은 음각, 양각, 투각 등과 함께 부안산으로 판단되는 다양한 상감청자가 확인되어 부안에서 생산된 상감청자가 개경의 왕성에 공납 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삼별초에 의해 축조되어 1270∼1271년 왕성으로 사용하였던 진도 용장성(사적 제126호)은 지척에 위치한 강진의 제품도 사용하였으나 청자투각의자와 청자통형잔, 청자양각연판문완, 청자참외형화병 등 부안에서 생산되는 청자들도 매우 많이 출토되고 있다.
한 위원은 “강화를 출발해 진도에 오기 전 해안에 위치했던 부안을 경유해 부안산 청자를 선적한 후 진도에 도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 곳 역시 생활용기인 대접과 접기를 중심으로 의자와 병 등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다종다양의 청자가 출토되었는데 문양은 간략하지만 단정하며 상대적으로 순청자의 비중이 높다”고 밝혔다.


▲ 왕실 도자문화의 보고(寶庫) 능(陵).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은 대부분 개경 주변에 분포하고 있으며 희종 석릉과 고종 홍릉, 원덕태후 곤릉, 순경태후 가릉, 성평왕후 소릉 등은 대몽항쟁 기간 중 수도였던 강화에 축조되었다. 부안 청자와 관련되는 12세기∼13세기의 자료는 ‘희종 석릉’과 ‘원덕태후 곤릉’, ‘명종 지릉’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나선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은 “능에는 살아 있을 때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생활 용기를 중심으로 부장하고 있으며 이들 물품들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상품을 매납하는데 일상생활 물품의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도자가 가장 많이 제작되어 묻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릉은 장풍군 지릉동에 있는 제19대 명종의 능으로 1202년 축조하였으나 이후 1255년 몽고병의 파괴로 수축하였다.
지릉에서는 청자음각모란문타호와 청자상감여지문대접, 청자양각운학문대접, 청자양각모란문화형접시, 청자음각연판문완, 청자양각문접시, 청자상감국화문화형접시, 청자상감화지문팔각접시 등의 청자가 출토되었다.

   이들 청자들은 부분적으로 좌우대칭의 비례감을 잃고 있으나 기벽이 얇고 날렵한 기형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유는 일부 녹색조가 짙어지고 탁한 색을 띠고 있으나 비색의 여운이 잘 남아 있고 문양구성은 간략하게 도식화되었으나 전성기 양식을 따르고 있다. 굽은 매우 단정하게 성형하였으며 굽 바닥에 규석을 받쳐 전체를 시유한 후 번조하였다.
새로 수축된 1255년에 부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릉 출토 청자 가운데 상감여지문대접과 상감국화문접시, 상감화문팔각접시, 음각연판문접시, 양각여의두문접시, 음각연화문퇴주기 등은 부안 유천리에서도 확인되는 청자들이다.
석릉(사적 제369호)은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번지에 위치한 제21대 희종의 능으로 1237년 축조하였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되어 부장품의 전모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상태. 석릉 출토 청자의 기종은 대접과 접시가 가장 많으며 그 외에 잔과 합, 병, 호, 항, 잔 받침 등이 있으며 이들은 갑발을 사용한 양질의 갑번품이 대부분이며 단독 번조품이 일부 발견됐다.
문양은 병과 호, 잔 받침 등 대형기종에서만 상감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대접과 접시, 잔 등의 소형기종은 양각기법과 퇴화기법을 이용하여 시문하였다.

   나 위원은 “이들 석릉 출토 청자는 12세기대 전성기 청자의 여운을 간직한 청자가 대부분으로 비색의 전통이 13세기 전반까지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석릉 출토품은 강진과 부안에서 생산된 유형이 함께 출토되고 있어 양질 청자의 양대산맥인 이들 지역에서 공납 받아 매납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양각여의두문접시와 퇴화국화문접시, 퇴화국화문통형잔, 상감화문접시, 양각연판문대접, 감국화문잔탁, 잔받침, 청상감운학문매병 등이 유천리 생산품과 유사하다”고 밝혔다.

   곤릉(사적 제371호)은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번지에 위치한 제22대 강종 비인 원덕태후의 능으로 1239년 축조하였다. 출토품은 도굴로 인해 매우 소량 출토되었는데, 청자는 석실 폐쇄석 앞에서 주로 출토되었고 청자삼족상형향로의 동체와 청자음각연화절 지문매병 뚜껑, 청자상감역상감당초문병 뚜껑, 화형접시, 청자상감양인각모란연화당초문대접 등이 있다.
이들 출토품은 2년 전에 축조된 명종 지릉과 유사성이 많아 이 시기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역시 강진과 부안의 특징을 함께 갖추고 있어 비색의 전통이 13세기 전반까지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왕실과 사찰

   생사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던 신앙 공간인 사찰은 개경과 강화를 중심으로 왕실의 원당 사찰이 널리 분포하는데 남한지역에서 조사된 대표적 사찰은 파주 혜음원과 강화 선원사이다.
혜음원(사적 제464호)은 개경과 남경(서울) 사이를 왕래하는 관료와 백성의 편의를 위해 건립된 국립숙박시설이며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행궁)도 축조하였는데 수도를 강화로 옮긴 1232년 무렵 몽고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와전류와 자기류, 토기류, 금속공예 등 매우 다양하게 확인된다.

   한 위원은 “고려청자는 유약과 태토가 정선되고 비색을 띠며 양각포도동자문 등에 일부 내화토 받침이 있으나 대부분 규석 받침의 갑번품이 많아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종은 발과 대접, 접시, 잔, 베개 등 다양하고 이중 양각여의 두문접시와 퇴화문접시, 음각뇌문접시, 상감모란문접시, 상감국화문접시 등은 유천리 출토품과 매우 비슷하여 유천리에서 생산하여 공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선원사(사적 제259호)는 강화 천도시기에 불력으로 몽고를 물리치기 위해 1245년(고종 32) 창건되어 고려대장경이 이운된 1398년(태조 7) 무렵 폐사된 사찰로 강도시기 대표적인 거찰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자는 생활용기인 대접과 접시를 중심으로 잔과 잔 받침, 병, 베개, 의자, 그릇 받침, 장고 등이 있으며 무늬는 상감의 국화문과 연화문, 파도문, 연당초문, 봉황연당초문 등과 음양각의 화문, 국화문, 여의두문 등이 일부 있다. 또 향로와 화분, 도판, 베개, 의자, 기대, 필가, 장고 등 특수 기종은 대부분 강도시기인 13세기대의 것으로 비색청자의 여운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매우 화려한 청자들로 궁성 또는 사찰에서만 출토되는 고급 청자의 대표적 기종.

   한 위원은 “이들 가운데 양각연판문완, 양각모란문대접, 양각여의두문접시, 양각화문접시, 상감국화문과형병, 도판 등이 유천리에서 생산하여 공급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처럼 왕실 관련 유적들은 모두 13세기 부안청자의 전성기에 축조 운영된 유적으로 부안청자의 생산과 유통, 소비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들로, 이 청자들은 유려한 곡선의 기형과 비색조의 맑은 유색, 운학문과 국화문, 모란문, 포류수금문 등 단아한 상감문양이 특징적이다. 또한, 음양각기법의 문양들도 단아함과 정제성을 잃지 않고 시문되어 부안 청자의 우수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좋은 예.
나선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이 시기 유천리 청자는 기형과 태토, 유약, 받침, 번법 등이 매우 정제되고 우수하여 왕실에서 애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며 “우수한 양질 청자의 생산지로 강진 청자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발전하였던 13세기는 부안 청자의 전성기로 그 자취가 다양하게 남겨져 있지만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이 시대의 명품을 후손에게 남기는 것이 더욱 큰 과제”라고 강조했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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