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결혼 / 서프라이즈 /픽션??

2013. 7. 19. 01:42우리 역사 바로알기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결혼

 

 

 

                                                                                                                                                                                                                                                                       (서프라이즈 / 우리역사 / 2013-1-3 08:14)

    고대 이란(사산조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라는 것이 있는데, 이 페르시아의 고전에 신라와 신라 왕, 신라 공주가 등장한다. 국내에도 최근 이 ‘쿠쉬나메’를 간략하게 소개한 책이 출간되었는데 ‘쿠쉬나메’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아랍의 침공으로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기에 이르자 사산조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기르드 3세는 페르시아인들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항쟁토록 한다. 그 페르시아인들의 지도자 중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자 아비틴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아비틴 왕자는 중국 내 정치적 대혼란기에 페르시아인들의 안전이 위협받자 그들을 이끌고 신라로 재망명한다. 신라왕 타이후르는 아비틴과 페르시아인들을 후대하고 그들과 격구와 사냥 등을 즐긴다. 그러던 중 중국이 신라를 침공해 오고 이 때 아비틴 왕자는 신라를 도와 신라-페르시아 동맹을 형성하여 중국군을 물리치는 일에도 기여한다. 그 후 아비틴 왕자는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을 꿈꾸게 되고 신라 귀족들에 의한 이방인과의 결혼 반대의 난관을 넘어 결국 결혼에 성공, 곧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고 아비틴 왕자에게 “너의 아들이 아랍의 폭정자인 자하크를 물리치고 페르시아의 복수를 할 것” 이라는 신의 계시가 나타난다. 아비틴 왕자는 임신한 프라랑 공주와 페르시아로 귀국하고 파리둔이라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신라의 피를 나눈 아들이 태어나지만 아비틴 왕자는 자하크에게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하지만 훗날 아비틴 왕자가 받은 신의 계시가 실현되어 파리둔은 자하크를 죽이고 페르시아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프라랑 공주는 신라와 페르시아 동맹의 결실인 이 결과를 아버지 신라왕 타이후르에게 승전보로 전한다.

 

 

    이 이야기는 현재의 보편적 역사의 인식대로 받아들이면 참 황당한 이야기가 된다. 아시아대륙 반대편의 신라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동맹이라니? 허구의 이야기 같지만 이 고대 서사시는 당당히 문자로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한다. 그렇다면 고대에 실제로 펼쳐졌을 사산조 페르시아와 신라의 동맹 이야기인 이 ‘쿠쉬나메’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 보편적 인식의 반도사관으로는 절대로 해석할 수 없는 이 이야기를 아래에서 풀어 보고자 한다.

 

 

    위의 ‘쿠쉬나메’ 서사시에는 네 나라가 등장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신라 그리고 아랍과 중국인데 그 실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쿠쉬나메’에 나오는 나오는 나라는 네 나라가 아니라 세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쿠쉬나메’에서 신라의 적국은 중국이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적국은 아랍이다. ‘쿠쉬나메’의 시대배경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전후시점(651년 멸망)이므로 당시의 중국이라면 당(唐)나라를 이르며 아랍은 사라센 제국을 이르는 것일 테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보면 이 시기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에서 나당전쟁으로 나아가던 시기이다.

 

    그러니까 ‘쿠쉬나메’는 신라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조로 신라가 당을 물리치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신라의 동맹으로 페르시아가 사라센 제국에 승리한다는 내용인데, 이 ‘쿠쉬나메’에 나오는 신라와 사산조 페르시아, 당과 사라센 제국 네 나라가 실제로는 세 나라를 가리켰음을 알려면 중국사(中國史)가 펼쳐진 실제 배경과 한민족사(韓民族史)가 펼쳐진 실제 배경을 확인해야 하는데 이를 고서를 통해 아래에서 살펴보겠다.

 

    우선 한민족사의 삼국(三國)과 삼한(三韓)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 리 되는 곳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과 접하고,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해 있다. - 후한서

 

    예의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인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서 끝나고,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른다. 예와 옥저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옛 조선의 땅이다. - 후한서

 

    한에는 세 종족이 있다.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요, 셋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 54국으로 북쪽은 낙랑과 남쪽은 왜에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 12국으로 북쪽은 예맥과 접해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 12국으로 남쪽은 역시 왜와 접해 있다. 그들은 모두 78국이며 백제는 그 중 한 나라이다. - 후한서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나왔고 그 선조가 주몽이라고 한다. - 위서

    백제의 선조는 모두 마한에 속했으며 부여의 별종으로 구대가 처음으로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 - 주서

 

    신라의 선조는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 양서

 

 

    위의 기록으로 보면 삼한․삼국시대의 우리 고대 국가는 대체로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북으로부터 부여와 그 남쪽의 고구려가 있고 고구려의 동쪽에는 옥저와 남쪽의 낙랑, 쇠락기의 조선과 예맥이 있었고 낙랑, 조선, 예맥의 남쪽에는 삼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며 백제는 부여계와 삼한의 마한이 결합되어 나온 나라이며, 신라는 삼한의 진한에서 나온 나라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삼한․삼국의 지리적 구도는 반도사관에 기인한 우리의 보편적 인식과도 크게 다를 것은 없는데 과연 이러한 나라들이 한반도와 그 북쪽 지역에 있던 나라들인가? 그게 아님을 아래의 기록에서 단번에 알 수 있는데,

 

 

    한(韓)나라는 대방의 남쪽에 있고, 동과 서쪽은 바다가 경계이고, 남쪽은 왜(倭)와 인접하며 사방이 약 4천리이다. - 삼국지

 

 

    한(韓)나라 즉 78개국을 거느린 삼한(三韓)만 해도 사방이 4천리나 된다고 하였다. 현재의 보편적 사관에서는 삼한을 한반도의 남부로 비정하고 있는데, 한반도 남부는 동서 1천리도 되지 않으며 남북으로도 기껏 1천리 남짓이다. 이 기록 하나만으로도 한반도만의 협소한 삼한과 삼국은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우리 민족의 고대 국가인 삼한과 삼국은 요동의 동쪽에서 북으로부터 부여 남으로는 삼한에 이른다고 했고, 또 위의 기록으로 보면 삼한의 남쪽에는 왜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고대의 왜는 우리민족의 고대국가인 삼한․삼국의 동쪽이 아닌 남쪽에 있었던 것인데, 이러한 지리 구도는 반도나 열도가 아닌 대륙만이 만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고대인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 했고 우리도 그렇게 인식한 듯하다. 동이의 한자 뜻에서 이(夷)는 대(大)와 궁(弓)이 합쳐진 것으로 동방의 큰 활이란 뜻을 담고 있기에, 우리 민족의 특징을 적절히 표현한 것일 테다. 그런데 이 동이의 반대 편 서쪽 민족을 칭하여 서융이라 했는데 동이와 서융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앞의 기록에서 확인했듯 요동의 동쪽은 모두 우리 삼한과 삼국이었으므로, 동이지(東夷地)는 요동의 동쪽 땅을 말할 것이기에 이 요동이 핵심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동은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의 보편적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요동을 (현)중국대륙 동북지역인 요동반도 부근과 요녕성 일대로 확정하고 있고 그 동쪽인 동북삼성 지역과 한반도를 동이의 역사 강역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그 곳은 진실된 역사적 관점의 요동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확인해본 것처럼 동이의 남쪽엔 사방 약 4천리의 한이 있었는데, 한반도 남쪽은 이러한 지리적 구도를 만족시키기엔 터무니없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어디 이뿐이랴!

 

 

    고구려의 땅은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서 2천 리나 된다.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말갈과 이웃하며 천여 리나 된다. - 주서

 

    신라의 선조는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다. 그 땅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고,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의 지역이었다. - 북사

 

 

    고구려의 남쪽에는 백제가 있었고 고구려의 동쪽과 동남쪽에는 신라가 있었는데 그 백제와 신라의 지리적 배경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백제는 동이의 세 한국(韓國)에 있었다. - 양서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6천 리나 되며, 바다의 북쪽에 있다. 서쪽 경계는 월주(越州), 남쪽은 왜(倭), 북쪽은 고구려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야 비로소 이르며 그 동쪽은 신라이다. - 신당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 상태사시중장

 

    백제에서 서쪽으로 사흘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고 한다. - 수서

 

 

    삼한에서 나온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越州)이며 100만의 강한 군사로 월(越)나라를 침범했다고 한다. 월주는 말 그대로 월의 땅인데, 오늘날의 월족(越族)은 (현)중국대륙 남쪽 끝 광동성에 있고 그 이남에 월족의 남쪽 땅인 월남(베트남)이 있다. 그리고 백제의 서쪽에는 맥국이 있는데, 위 기록의 백제는 한반도를 말하고 있지 않으며 대륙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그 나라 사람들 중에는 신라, 고구려, 왜의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으며 그 중에는 중국인도 있다. - 수서

 

 

    백제에 같은 부여․한(韓)계인 신라인과 고구려인 외에도 왜인이 섞여 살았다고 한다. 이 역시 반도사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록일 뿐이다. 고대의 왜국이 백제로부터 문명을 배웠다는 것은 보편적 사관에서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 문명은, 한반도의 서남부에서 한반도의 동쪽인 일본열도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대륙내부에서 이뤄진 것이다. 부여․한(韓)계의 백제가 대륙남부를 지배했으며 그 복속된 지역에 왜가 있었기에, 백제의 남쪽 경계는 왜이며 백제 내에도 일부 왜인이 섞여 산다고 기록한 것이다.

 

   백제에게 문명을 배운 왜의 동쪽 무리 중 먼 훗날 대만과 오키나와를 거쳐 열도로 이주한 것이 오늘날의 일본이며, 대륙 본토에 남았다가 서세동점이 휘몰아치던 근대에 그 기운을 등에 업고 북진하여 우리 선조를 밀어내고 그 흔적을 제거한 왜의 무리가 오늘날 중국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일 테다.

 

   또 위 수서의 기록에서 말한 백제에 거주한다던 중국인, 즉 수나라 사람은 오늘날의 중국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한다.

 

 

    고구려는 이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토산물을 여러 대에 걸쳐 조공하였습니다. 그 중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라고 하는 구슬은 섭라(涉羅)에서 생산됩니다. 그런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涉羅)는 백제가 병합하였기 때문에 신의 국왕 운은 끊어진 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그 모든 백성들을 국경 안으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 북사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托羅) 모두 제주도를 일컬었다는데, 이 섭라를 백제가 병합하기 이전에 고구려가 경영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기록이다. 이는 한반도 삼국과 제주도의 지리적 구도를 고려하면 믿기지 않는 기록인데 과연 역사 속의 실제 섭라는 어디에 있었을지 아래의 기록에서 보면,

 

 

    백제의 남쪽에서 바다로 세 달 동안 가면 탐모라국(耽牟羅國)이 있으며 남북이 천여리이고, 동서는 수백 리나 되며 토산물로는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소속되어 있다. - 수서

 

 

   백제의 남쪽 바다로 탐모라국(耽牟羅國) 즉 제주까지 항해 기간이 무려 세 달이며 제주의 규모는 남북이 천여리, 동서는 수백 리나 된다고 한다. 이 기록 역시 한반도의 협소한 백제에 대입시키면 개그도 허무한 개그가 될 뿐이다. 항해 기간과 규모뿐만 아니라 그 형세에 있어서도 남북이 길고(천여리) 동서가 짧은(수백 리) 탐모라국과 남북이 짧고 동서가 긴 오늘날의 제주도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진(秦)나라의 노역을 피해서 한(韓)나라로 도망간 망명자들이라고 하며 한(韓)나라는 동쪽 경계의 땅을 할애하여 거주하도록 하고 성책을 세웠다. 언어가 진(秦)나라와 흡사하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은 진한(秦韓)이라고 부른다. - 진서

 

    신라의 선조는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다.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지만 실제 거리는 만 리나 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노역을 피해서 도망한 사람이 마한(馬韓)으로 와서 마한(馬韓)이 그 동쪽의 국경 지방을 할애해 주어 이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 양서

 

   신라는 원래 변한(弁韓)의 땅이다. 그 선조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위(魏)의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치자 그 무리들이 옥저(沃沮)로 달아나 그 곳에 의지하여 지켰다. 나중에 고국(故國)으로 다 돌아가고 거기에 남아 있던 자들이 신라로 되었다. 그 나라에는 김(金)․박(朴) 두 성씨가 가장 많고 성씨가 다른 사람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 - 당회요

 

 

    위는 진(秦)나라의 망명자와 고구려, 옥저 그리고 한(韓)이 결합하여 신라가 되었다는 흥미로운 기록인데 그 신라의 위치가 어떠했나 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 - 남사

 

 

    신라가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한반도는 동서 1천리 남북 3천리 가량 될 뿐이다. 신라가 백제에서 5천여리 떨어져 있다면 백제와 신라의 지리적 규모는 엄청나다는 것인데, 이 역시 반도사관으로는 풀어 낼 수가 없다. 차후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신라의 서북쪽 5천여리에 있던 백제는 거짓된 반도사관의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가 아니며, 실재하였을 (현)중국대륙의 백제도 아닐 것이다.

 

 

   신라 지역은 낙타․물소가 자라는 데 적합하다. - 송회요

 

    신라는 지질이 낙타․물소를 기르기에 적합하다. - 제번지

 

    신라 때 북쪽은 대사막(大沙漠)과 거란 때문에 길이 막혀, - 택리지

 

 

    통일된 신라의 북쪽에는 큰 사막이 있고 신라 땅에는 한반도에서는 자생할 수 없고 열대기후나 사막지대에서나 서식할 수 있는 낙타와 물소 등이 자라는데 적합하다고 하였다. 이는 실제의 신라가 한반도 동남부의 협소한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백제와 더불어 대륙의 거대한 나라였기에 각종 고서에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수많은 기록들을 살펴 보건대 삼한․삼국이 협소한 반도가 아닌 넓디 넓은 대륙 그 자체였음을 확인하게 되니 오늘날 요령성 주변의 요동은 거짓임을 명백히 판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동이를 가르는 실제의 요동은 대륙 어디를 가리켰냐가 중요할 텐데 그 이전에 잠시 발해에 관한 몇몇 기록을 살펴보면,

 

 

   발해말갈(渤海靺鞨)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 구당서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하였으며 성은 대씨이다. - 신당서

 

   발해말갈(渤海靺鞨)의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같다. - 구당서

 

 

   발해는 고구려에서 나왔기에 고구려와 그 풍속이 같으며 이웃한 거란 역시 고구려의 영향 때문인지 고구려나 발해와 풍속이 비슷했던 것 같은데 고구려에서 나온 발해의 지경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면,

 

 

   부여(夫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바다 북쪽에 있는 여러 나라를 전부 차지하였다. - 신당서

 

 

   변한(弁韓)은 보편적 반도사관에서 한반도의 동남부로 비정되며 그 곳은 신라가 차지하는데 위의 기록에서는 발해 땅이라고 하였다. 반도사관이 거짓이기에 이러한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며,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로 막혀 있고 북쪽은 옛 거란의 땅과 접하였고 동쪽은 금나라와 맞닿았다. - 고려도경

 

   남쪽은 고려와 이웃하여 있고, 북쪽은 실위(室韋)와 접해 있으며 서쪽의 경계는 발해요, 동쪽으로 바다에 면해 있었다. - 대금국지

 

 

  고려의 동쪽과 북쪽에 금나라가 있었는데 그 금나라의 서쪽에 발해가 있었다고 한다. 금나라는 동북삼성 일대에서 일어나 (현)중국대륙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 나라로 비정되는데, 발해는 그 금나라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발해의 위치는 어디여야 할까? 또 고려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 이 기록대로 보자면 (현)중국대륙 그 자체가 고려이며, 그 동북쪽 일대가 금나라의 서쪽이자 대륙고려의 정북에 발해가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는데 보다 확실히 확인하자면,

 

 

   고려 이북에 지명이 별실팔리(別室八里)라는 곳이 있다. 그 곳은 날씨가 몹시 추워 바닷물도 언다. 8월부터 곧장 살얼음이 얼어 이듬해 4~5월에서야 비로소 풀린다. 사람들이 그 위를 걸어갈 때는 평지를 밟는 것 같다. - 철경록

 

 

   고려 이북에 혹한의 기후지대인 별실팔리(別室八里)가 있는데 이 별실팔리는 신강성 위구르의 비슈발리크(Bishbalik)이다. 이것은 고려의 서쪽이 적어도 신강성 지역까지 이르렀다는 확정적인 기록이다. 고려가 대륙 그 자체였으므로 고려 북방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요(거란), 발해(말갈), 금(여진)이 등이 있었던 것이다.

 

 

   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이다. - 송막기문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합부(哈富)인데 처음 고려로부터 왔다. - 금사 세기

 

   일설에 의하면 금나라의 시조는 원래 신라 사람으로서 완안씨(完顔氏)라고 하고, 여러 대를 거쳐 태조(太祖)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 대금국지

 

 

   신라와 고려가 대륙에 있었으므로 금나라 역시 신라계 고려인이 세운 나라였다는 위의 기록 역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한․삼국과 발해, 고려 모두 대륙에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요동은 어디여야 할까? 삼한과 삼국이 모두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니 요동은 아무리 동쪽으로 갖다 놓으려 해도 (현)중국대륙의 깊숙한 서쪽에 있어야 함이 드러날 뿐이다. 현재의 요령성 부근의 요동은 거짓이며 이는 우리 민족의 거대한 역사를 한반도에 꿰어 맞추어 보잘 것 없이 만드려는 수작이다.

 

   요동은 본래 천산을 기준하여 그 동쪽을 이른 것이다. 천산산맥은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을 가르고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북부까지 연결되어 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이 산을 칸 텡그리 산(Khan Tengri Mt.) 명명하는데 그 뜻은 ‘하늘의 지배자’로 우리의 ‘단군’에 대응된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이름은 아스타나(Astana)이고 이 아스타나(Astana)는 카자흐스탄의 동쪽인 신강성 위구르 지역의 지명으로도 남아 있는데 이 역시 우리 고대사의 ‘아사달’에 대응된다.

 

   천산의 동쪽 지역을 요동이라 일렀고 천산의 서쪽 지역을 요서라 이른 것인데, 카자스흐탄-신강성의 이동 지역 모두가 동이의 땅이요 우리의 역사무대였던 것이며, 중국사(中國史)라는 역사의 정체는 사실 요서 지역의 서융 역사를 다룬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아래에서 풀어보면,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 리에 있었다. 후에 고구려는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였고 백제는 요서를 빼앗아 차지하였다. - 송서

 

 

   이 기록은 백제의 요서 경영설을 뒷받침하는 사료인데 이를 보편적 반도사관에서는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가 (현)중국대륙 동북지역을 점령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은 반도사관의 자가당착적 오류를 드러낼 뿐 역사적 진실과는 무관하다. 위에서 누차 확인했듯 이는 요동 지역 즉 (현)중국대륙에 있던 대륙백제가, 요동을 넘어서 요서인 중앙아시아 이서로 진출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위에서 한번 예를 든 사료를 한번 더 들여다보면 이는 더욱 명백해진다.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 - 남사

 

 

   신라가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떨어져 있으니 바꾸어 말하면 백제가 신라의 서북쪽 5천여 리에 떨어져 있다는 말인데, 이는 한반도 삼국은 물론 (현)중국대륙 삼국에서도 만족시킬 수 없는 기록이다. 그렇지만 신라가 (현)중국 본토에 있었고 백제가 요서 지역인 중앙아시아 이서지역 어딘가를 경영하고 있었다면 ‘동남쪽 5천여 리’라는 방위와 지리를 만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백제의 왕이 사는 곳은 동․서의 두 성(城)에 있었다. - 구당서

 

   백제의 왕은 동․서의 두 성(城)에서 산다. - 신당서

 

   백제의 왕이 사는 곳은 동․서 두 성(城)에 있다. - 당회요

 

 

   삼국 중 백제에만 특이하게 이러한 기록이 있다. 백제는 삼국 중 유일하게 요동과 요서 모두를 경영하였다. 동서 5천여 리가 넘는 먼 거리를 오가면서 나라를 다스리려면 두 개의 왕도(王都)가 필요했을 것 같다.

 

 

   신라는 백제의 통역을 통해야 의사가 소통되었다. - 남사

 

 

   신라와 백제는 서로 동족이니 의사소통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신라와 중국은 서로 의사소통이 안되는 반면 백제는 중국과 의사소통이 가능해 신라와 중국의 통역을 했다고 하였다. 이 역시 한반도 남부에만 신라와 백제가 있었으면 황당한 기록이며 또한 (현)중국대륙 내에만 신라와 백제가 있었어도 모순된 기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백제를 비롯한 고구려와 신라 등 삼한․삼국은 모두 요동에 있다고 했으나 후에 백제는 요동을 넘어 요서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거듭 말하면 백제는 요동과 요서 지역의 전혀 다른 언어권의 영토가 두 곳이 있었던 것이다. 요동의 본래 백제는 부여․고구려․한(韓)계의 백제이고 신라와는 동족이니 당연히 같은 언어권인데, 천산산맥을 넘어서 요서를 경영한 백제는 중국과 같은 언어권의 서융 지역에 있던 백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요서에 있던 백제의 실체는 무엇이고 서역에 있었던 진짜 중국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래에서 보면,

 

 

    인덕(麟德) 3년에 이르러 신라에 빼앗겼던 성 옆에 있던 나머지 무리들은 그 뒤로 점차 그 수가 적어지면서 세가 약해지고 흩어져서 돌궐 및 말갈에 투항을 해버리자 그 나라 왕 부여숭(夫餘崇)은 결국 옛 나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엄두도 못 냈고, 그 땅은 모두 신라․말갈에 흡수되고 말았다. - 태평환우기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백제 패망시, 백제인이 돌궐과 말갈에 투항해 버리고 백제의 영토는 신라와 말갈에 흡수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보편적 인식의 반도사관에서는 그 어떤 논리를 빌려 치장하려 해도 절대 치장할 수 없는 기록이다. 반도사관에 위 기록을 대입하면,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시 통일된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는 돌궐과 말갈의 나라가 들어서 있어야 한다는 황당한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아마도 진실된 역사는 이러할 것이다.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시 신라와 당은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요동 즉 (현)중국대륙에 있던 요동 백제의 본토를 이웃한 신라가 무너뜨리고, 요서 백제는 이웃한 당이 무너뜨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차지한 백제는 요동의 백제 본토이며, 돌궐․말갈에 투항한 백제나 말갈이 차지한 백제는 요서 즉 당나라에 의해 격파된 천산 이서에 있던 백제의 전리물을 돌궐․ 말갈 등이 나누어 가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고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현)중국의 동북지방에 있었다던 돌궐은 실제로는 천산 이서인 요서 중앙아시아 일대에 계속 있었던 것이고, 동이 한민족의 거대한 역사를 한반도로 좁히며 과거 동북아에는 있지도 않았고 현재 있지도 않는 돌궐(투르크․터키)이 동북아로 꿰어진 것이다. 아래의 사료를 보면 보다 쉽게 드러나는데,

 

 

   중고시대에 북적(北狄)에는 흉노(凶奴)와 동호(東胡) 두 종족이 있었다. 흉노의 서쪽에는 월지(月支) 등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탕창(宕昌)ㆍ당항(黨項)은 곧 삼묘(三苗)의 후예(後裔)이며, 동호의 동쪽은 곧 말갈(靺鞨)ㆍ실위(室韋) 등 여러 나라였다. 흉노의 후예가 회흘(回紇)ㆍ혁련(赫連)이 되고 그 별부(別部)는 돌궐(突厥)과 철륵(鐵勒)이 되었다. 돌궐의 별부(別部)는 또 사타(沙陀)가 되고, 철륵의 별부는 설연타(薛延陀)가 되었다. 동호의 후예가 오환(烏桓)과 거란(契丹)이 되고, 그 지속(支屬)이 선비(鮮卑)가 되었는데, 선비의 종족이 매우 번성하여, 토곡혼(吐谷渾)은 요동 선비(遼東鮮卑), 우문(宇文)은 요동 새외 선비(遼東塞外鮮卑), 독발(禿髮)은 서선비(西鮮卑), 걸복(乞伏 서진(西秦) 선열왕(宣烈王))은 농서 선비(隴西鮮卑), 탁발(拓跋)은 별부 선비가 되었다. 토번(吐蕃)은 토곡혼의 서남쪽에 있으니, 이는 흉노의 별부인 듯하다. 이상은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보인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는 “북호(北胡)의 종락(種落 같은 종족이 모여 사는 부락)이 잡다하여, 하(夏) 나라 때에는 훈육(獯鬻), 주(周) 나라 때에는 험윤(玁狁),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때에는 흉노, 당(唐) 나라 때에는 돌궐(突厥), 송(宋) 나라 때에는 거란이라 하였다. 한 나라 때부터 흉노가 강성하였고, 흉노가 미약해지자 오환이 일어났는데, 한말(漢末)에는 선비가 오환을 멸하였다. 후위(後魏) 때에는 유유(蠕蠕)가 강성하였고, 유유가 멸망하자 돌궐이 일어났는데, 이정(李靖)이 돌궐을 멸하였다. 오대(五代)와 송 나라 때에는 거란이 다시 강성해졌고, 그 작은 별부를 몽고(蒙古)라 하였는데, 뒤에 몽고가 강성하여 중국에 들어와서 임금이 되기까지 하였다.” 하였는데, 그 설이 《통전》과 같지 않다. 그러나 흉노 이외에 다시 동호ㆍ거란ㆍ오환 등이 근동(近東)에 있으니, 이는 분명히 동호의 후예인데, 어찌 거란을 흉노라고 지적해서야 되겠는가? 원(元) 나라 이후로는 몽고가 가장 강성하여 북막(北漠)을 겸병(兼倂)하였으므로 사적(沙磧 사막)에서 요동 지경까지를 모두 몽고라고 하였다. 진(晉) 나라 때의 오호(五胡) 가운데에도 저(氐 전연(前燕))는 바로 서융(西戎)이고, 갈(羯 후조(後趙))은 바로 흉노의 별부이다. - 성호사설

 

 

   흉노(凶奴)와 동호(東胡)에서 나온 북적(北狄)이 진(秦)․한(漢)․당(唐)․송(宋) 등 오랜 세월을 거치고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뒤엉키어 조선 후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당시 조선 유학자들도 이들의 뿌리를 구분하기 힘들어졌던 같다. 이에 조선 후기의 대학자 이익이 이를 명료하게 논파하였는데, 그 북적인들의 인종이 어떠했는지를 추측하자면,

 

 

   몽고(蒙古)는 일명 달단(韃靼)으로 사막에 있는데, 천하의 막강한 나라이다. - 삼전고

 

   몽고인(蒙古人)은 청인(淸人)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 문견잡기

 

 

   북적 거란에서 나온 몽고(달단)인의 형상이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고 수염이 붉은 색목인(백인종)의 모습에 가깝게 묘사되고 있다. 몽고의 인종이 이러하다고 돌궐 등의 모든 북적이 색목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이 이 북적을 민족별로 쉽게 구분하지 못한 것을 미루어 보면 돌궐 역시 색목인에 가까웠을 확률이 높다.

 

   또한 오늘날 돌궐이 있는 곳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 소아시아반도(아나톨리아)․그리스 남쪽의 터키와 투르크메니스탄 등 소위 서구인들이 투르키스탄(돌궐의 땅)이라고 명명한 중앙아시아 일대이다. 그들의 외모는 유럽 백인종과 서아시아 아랍인의 모습을 띠고 있으며 동아시아 황인종의 형상과는 그 차이가 매우 심하다.

 

   그러니까 이 서구인의 형상을 가진 돌궐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돌궐의 땅’인 투르키스탄에 역사 내내 있었던 것인데, 거대한 우리 한민족사를 한반도로만 축소시키는 은폐하는 과정에서 본래 삼국, 고려․조선의 서북 경계인 천산 이서에 있던 돌궐이 데칼코마니 역사조작 기법에 의해 찍혀 한반도의 서북 지방인 (현)중국 동북지역으로 꿰어진 것이다. 아래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인데,

 

 

   북계(北界)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 태조실록

 

 

   앞서 달단인(몽고인)은 색목인(백인종)이라고 했는데, 한반도의 북쪽 경계 어디에 색목인이 있는가? 당시의 (근세)조선 초기, 조선 서북쪽의 경계는 달단(타타르)이라 했음은 요서 지역을 수복한 이성계의 공에 힘입어 조선의 강역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가 만나는 지역의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까지 확장되었음을 기록한 것일 테다. 오늘날 한반도의 북쪽에는 실제로는 달단인도 없고 색목인도 없지만 ‘달단의 땅’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있는 타타르스탄은 색목인의 나라다.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 태조실록

 

 

   고려의 동과 서를 이성계가 정벌 했다고 함은 사실상 유라시아를 통일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이성계가 권근에게 명하여 제작케 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세계 지도이자 조선 지도였다. 따라서 태조 이성계 재위시의 조선 북쪽 경계인 달단은 오늘날의 타타르스탄일 수밖에 없다.

 

   이로써 돌궐 등 북적의 본거지는 중앙아시아 일대임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북적인 돌궐․말갈 등에게 흡수된 요서의 백제는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켰으며, 이 백제를 무너뜨린 당나라는 어디를 가리켰을까?

 

   서두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에는 신라와 사산조 페르시아, 당과 사라센제국이 나온다고 하였다. 이 ‘쿠쉬나메’에 요서 백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산조 페르시아가 요서에 있던 백제고 사라센제국이 당나라였던 것이며, 이 ‘쿠쉬나메’는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인 나당전쟁을 다룬 것이다.

 

 

   ‘쿠쉬나메’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전후 시점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 이 시점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산조 페르시아는 226년 아르다시르 1세가 건국했고 백제는 234년 고이왕이 건국했는데 사산조 페르시아는 651년 멸망하고 백제는 660년 멸망한다. 또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사라센 제국과 백제를 멸망시킨 당이 일어나는 시점 역시 흡사한데, 사라센 제국의 건설 연대는 7세기 초, 정통 칼리프 시대를 맞는 것은 632년이며, 당나라 일어난 연대는 618년이다.

 

 

   당시의 사라센 제국은 보편적 관점의 역사에서 볼 때 세계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 중 하나로 그 강역은 서로는 북아프리카와 남유럽에서 동으로는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지중해 문화권의 모든 세계를 통일한 거대 제국이었는데, 중국사에서의 당나라 역시 이민족이 세운 원과 청을 제외하면 진(秦)나라와 함께 가장 강대한 통일 왕조였다. 즉 당나라가 사라센제국으로,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중국과 아랍은 동일한 나라였던 것이다.

 

 

   ‘쿠쉬나메’의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사라센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요서 백제가 중국(당나라)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자 아비틴이 신라로 망명했을때 신라와 공조해 신라를 침공한 당나라를 물리치는 것은 요서 백제에서 신라로 귀화한 이들이 나당전쟁에 참전하였음을 기록한 것일 테다.

 

 

   ‘쿠쉬나메’에 나오는 신라왕 타이후르의 실제 인물은 문무왕일 것이며, 신라 귀족들이 아비틴 왕자와 신라 공주 프라랑의 결혼을 반대한 것의 숨은 의미는 족외혼을 엄금한 신라 골품제의 반영일 것이다. 아비틴 왕자와 프라랑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파리둔이 아랍(사라센)의 자하크를 물리쳤을 때 프라랑 공주가 실제로는 문무왕인 아버지 신라왕 타이후르에게 승전보를 전하는 것의 의미는 백제 지역에서 신라가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쿠쉬나메’는 데칼코마니 기법에 의한 역사 조작이 드러난 아주 좋은 예로 이와 흡사한 것이 페르시아 지역에서 흥기한 미트라 신앙과 우리 고대사에서의 미륵불의 유행이며, 이러한 예는 아주 많은데 이 모든 것들은 19세기 서세동점의 거대한 물결이 밀려온 이후 조작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중국사의 실체는 카자흐스탄-신강성 천산의 이서인 요서의 서쪽 지방, 즉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에서 서로는 북아프리카 등의 지중해 일대에서 펼쳐친 역사의 기록이다. 진(秦)․한(漢)․당(唐)․송(宋)․원(元)․명(明)․청(淸) 등이 모두 그 곳에 있었다. 그 반대편의 동쪽 지역은 전부 한민족의 역사 무대였는데 한민족과 한민족사를 한반도로만 축소시킨 후 (현)중국대륙의 역사가 빈 공간이 되자 대륙남쪽의 왜인들에게 지중해 문명권에서 펼쳐진 역사를 찍어서 도용토록 한 것이다.

 

 

   중국사와 지중해 문명권의 역사가 닮은꼴임은 비단 당과 사라센제국만의 예가 아니다. 진(秦)나라와 알렉산드로스대제국을 비교해보면, 시황제는 부왕이 죽자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했으며, 알렉산드로스대왕은 20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그리스의 폴리스를 통일한 후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까지 평정한다.

 

 

   시황제의 분서갱유는 너무나도 유명한데 알렉산드로스대왕 역시 발길이 닿는 정복지의 모든 도서관과 서적을 불태워 버렸다. 시황제에게는 당대 중국 최고의 현자인 철학자 이사가 조언했고, 알렉산드로스대왕 곁에는 당대 지중해 세계의 가장 권위있는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항시 주위에 있었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시황제는 중국의 문자를 통일했는데, 알렉산드로스대왕은 지중해 문명권의 문자를 알파벳으로 통일했다.

 

 

   시황제 사후 진나라는 붕괴되는데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로스대황 사후 즉시 알렉산드로스대제국 역시 즉각 붕괴되고 만다. 진(秦)․한(漢) 이후 중국은 위, 촉, 오 삼국으로 분열되는데 알렉산드로스대제국 이후 지중해 세계 역시 남유럽(그리스로마), 북아프리카(이집트), 서아시아 등 셋의 알렉산드로스대제국 계승 삼국시대를 맞는다.

 

 

   이후 중국에서는 위에서 떨어져 나온 진(晉)이 위․촉․오 삼국을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에서는 남유럽(그리스로마)에서 떨어져 나온 로마가 북아프리카(이집트)와 서아시아의 알렉산드로스대제국 계승국을 통합한다. 중국에서 삼국 전투 중 위(진)와 촉의 전투는 너무나 유명한데,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합하는 과정 중에 이집트와 치른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와 클레오파트라간의 대결인 악티움 해전 역시 너무나 유명하다.

 

 

   통일된 중국의 진(晉)나라는 얼마 후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으로 분열되는데, 통일된 지중해 세계의 로마제국 역시 서로마와 동로마(비잔틴 제국)로 분열된다. 중국은 통일 진(晉)나라에 의한 평화 이후 4조와 6조 시대, 5호 16국 시대 전국 혼란기를 겪는데, 로마제국에서는 200년간의 로마의 평화(Pax Romana) 이후 거대한 혼란기로 치닫는다. 진(晉)나라는 혼란기를 겪은 후 북위(北魏)와 송(宋)의 남북조 시대를 여는데, 로마제국은 혼란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중해 아래쪽의 북아프리카(이집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로마와 이집트는 분열된다.

 

 

   중국에서 북위(北魏)와 송(宋)의 남북조 시대가 열리기 직전 서진(西晉)은 흉노에 의해 멸망하는데, 지중해 세계에서는 서로마가 훈족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게르마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러한 모든 중국사와 지중해 문명권의 역사는 사실 같은 역사이지만 다른 문자로 기록되었고, 이 동일한 역사를 각각 교열한 후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찍어서 재생산 해낸 것이다.

 

 

   한가지 더 예를들면 명나라 역사와 티무르 왕조 역사 역시 마찬가지인데, 명사(明史)와 티무르 왕조사의 원전은 우리의 (근세)조선사라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티무르제국의 태조 아미르 티무르는 생존년대가 1336년에서 1405년, 재위기간은 1369년에서 1405년인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생존년대는 1335년에서 1408년, 재위기간은 1392년에서 1398년으로 매우 비슷하다. 티무르제국의 아미르 티무르와 조선의 이성계 둘 모두 전설적인 무인 출신의 군주이며, 아미르 티무르는 전투 중 다리를 크게 다쳐 절름발이 장수로 불렸는데, 이성계도 전투 중 다리에 화살을 맞는 큰 부상을 당했다.

 

 

   티무르제국의 3대 황제 샤 로흐는 아미르 티무르의 넷째 아들로 생존년대는 1377년에서 1447년, 재위기간은 1409년에서 1447년인데,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생존년대가 1367년에서 1422년이며, 재위기간은 1400년에서 1418년으로 서로 비슷하다. 티무르제국의 샤 로흐 황제는 군사와 정치, 문무 모두를 겸비했으며 티무르제국의 내란을 평정하고 황제로 즉위했는데, 이와 흡사하게 조선 태종 이방원은 무예는 물론 학문에도 매우 뛰어났으며 강력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평정한 후 즉위하였다.

 

 

   티무르제국의 샤 로흐와 조선의 이방원에 대응되는 것이 명나라의 영락제인데, 영락제의 생존년대는 1360년에서 1424년이고 재위기간은 1402년에서 1424년으로 샤 로흐, 이방원과 매우 비슷하다. 영락제가 명 황제의 재위에 오르는 과정도 4년간의 내전을 평정한 공이 컸는데 이러한 배경은 티무르제국의 샤 로흐나 조선 이방원에게 주어진 여건과 매우 비슷한데, 내전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친조카와 수많은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것은 조선 이방원이 직접 이복동생과 정도전 등의 공신 등에게 행한 행위와 거의 일치한다.

 

 

   이 외에도 티무르제국의 4대 황제 울루그 베그와 조선의 4대 왕 세종 이도 역시 생존년대와 재위기간 등은 너무나 비슷하고 그 업적면에서도 최고의 성군이었다. 울루그 베그는 역사가, 신학자, 천문학자로서 학식이 매우 풍부했는데, 특히 천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천문대를 세우고 천문표를 만들었다. 세종 이도는 이에 대응되게 조선의 대표적 학자군주로서, 수많은 연구서적을 편찬하고 천문·역법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 천체 관측기구 혼천의·해시계·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케 하였다. 울루그 베그 재위시 티무르제국은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열었는데, 문화군주 세종 이도는 정치·경제·문화·국방 모든 방면에서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치적을 남겼다.

 

 

   이렇게 거의 모든 것이 흡사한 티무르제국, 명, 조선의 역사 역시 (근세)조선사를 원전으로 한 데칼코마니 역사 조작기법이 적용된 경우로, 이성계의 조선이 유라시아대륙 대부분을 통일했지만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아미르 티무르의 원정경로를 보면 확인이 가능하다. - 왕자의 난 이후, 이성계의 고향인 천산 이서의 영흥(현 우즈베키스탄 케쉬)인근에 거대한 도시 함흥(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을 조성하고 이방원에 대한 적개심을 불사르면서 생을 마감한 것이 티무르제국의 초기 역사이며 실제의 명사(明史) 즉 근세 중국사로 봐야한다.

 

 

   티무르제국의 역사에서 티무르가 죽는 날까지 동방정복에 의욕을 보이다 성공하지는 못했는데, 이것은 사실 사마르칸트로 함흥차사한 이후 죽는날까지 이방원이 보낸 차사를 죽이며 이방원을 용서하지 않은 역사를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으로 봐야한다. 이성계는 분명 본래 고려인이고 고려 장수 출신이지만 그를 따르던 많은 북적 장수들 중에는 서역인들이 많았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등의 서역을 - 실제 역사의 중국 - 다스리다 보니 함흥차사한 이후의 티무르제국사는 명사 즉 중국사가 된 것이다.

 

 

   반면 천산 이동의 (현)중국대륙에 자리 잡았던 (근세)조선은 본래 동이의 땅이요 고려를 계승한 나라이니 역사적 정통성과 대국적 면모를 갖췄지만, 아버지인 이성계의 나라에 대한 예우를 하려 한 것이, 실제로는 서역인의 나라인 명에 대한 사대로 나타난 것으로 봐야한다. 그래서 명을 중국이라 하고 조선은 동국이라 한 것이지 동국이 (현)중국대륙의 동쪽을 말한 것이 아니다.

 

 

   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예우와 그것을 대변한 정치세력들인 서인에 의해 훗날 조선은 청에 의한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대륙의 서쪽 영토를 차츰 잃고 쇠락하는 것이며, 19세기 거대하게 밀려오는 서세동점 기운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선이 한반도로 축소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긴 공백지역인 한민족의 본토에 중앙아시아 이서 지역에 있던 역사를 교열하여 들여오고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찍어서 완성한 것이 오늘날의 중국사로 자리 잡은 것이다. ‘사산조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결혼’과 같은 얼핏 황당해 보이는 기록도 선입견 없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    역사적 사료와 현실적 지배 지명과 지역 추정에는 무리가 많은 글이므로, 분위기 쇄신용으로만 참고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