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19. 07:52ㆍ詩
선(禪)의 깨달음과 무애행(無碍行) |
세상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차별상(差別相)을 보는 눈만 더 밝아진다. 날마다 갖가지 달라진 모습으로 전개되는 세상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면 사회의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강박감에 사람들은 짓눌리고 있다. 그렇지만 낱낱이 펼쳐지는 차별상이 하나의 전체성(全體性)의 현현(顯現)임을 통찰할 수만 있다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고요한 마음의 평온을 얻어서 차별상을 헐떡이며 쫓아다니지 않고도 차별상의 정체를 더 잘 간파할 수 있지 않을까. 전체성을 잊은 채 차별상만 보면, 우리는 피아(彼我)를 나누고 득실을 따지는 소모적인 갈등과 싸움을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 불교의 역사에는 소위 무애행이라는 파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고승들이 있어왔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등 종단의 계율을 깨뜨리는 모습만을 보면 분명 파격이요 일탈이지만, 일체가 하나의 전체성임을 온 몸으로 보여준 그들의 걸림 없는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어 차별상에만 머무는 사람들의 눈을 틔워 주었다. 신라의 원효(元曉), 조선의 진묵(震黙), 구한말의 경허(鏡虛 1846-1912)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종단의 기득권을 버리고 야승(野僧)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민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그 중에서도 경허는 불과 100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라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
스님의 풍모와 생활 모습을 말하자면, 신장은 크고 용모는 예스러웠으며 뜻과 기운은 과감하고 음성은 큰 종소리 같았으며, 세상의 일체 비방과 칭찬에 동요하지 않음이 산과 같아서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어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래서 술과 고기도 마음대로 마시고 먹었으며 여색(女色)에도 구애되지 않은 채 아무런 걸림없이 유희(遊戱)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초래했다. 이는 이통현(李通玄) ・ 종도(宗道)와 같은 옛사람들처럼 광대한 마음으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증득하여 자유로이 초탈한 삶을 산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때를 만나지 못하여 하열(下劣)한 사람의 자리에 자신을 숨긴 채 자신을 낮추고 도(道)를 스스로 즐긴 것이 아니겠는가. 홍곡(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큰 뜻을 알기 어려운 법이니, 크게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한암(漢巖) 중원(重遠 1876-1951)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 《경허집(鏡虛集)》 |
▶경허선사가 기거하며 수도하였던 천장암 (출처: 불교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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