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의 처남 유경종(柳慶種)이 명나라의 유명한 화가인 심주(沈周)의 그림을 표암에게 보여주었는데, 이 시는 그 그림에 있는 제화시의 운자를 따라 지은 작품이다. 해암은 유경종의 호이고 석전은 심주의 호이다. 유경종은 강세황보다 한 살 적은데 대단한 장서가로 안산에서 10리 안에 이웃해 살며 늘 문장과 서화로 담론을 나누었다. 운자가 다른 시가 6편이나 되는 걸 보면 그림도 여러 폭이었을 듯하다.
무더운 여름철 소나기가 지나가자 기온이 뚝 떨어지고 집 주위의 풀이며 나무에 바람이 불어와 신록의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서늘한 북쪽 창문 아래서 책을 읽으며 긴 여름날을 보내노라니, 이 청량한 기분을 혼자 누리기 아까운 생각이 든다. 처남이 그립다.
3구에서 북창은 도연명의 고사를 썼다. 도연명이 오뉴월에 북창 아래에 누워 서늘한 바람의 감촉을 즐길 때면 내가 복희씨 이전의 태곳적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해 질 녘 바람과 저녁노을은 원래 주인이 없으니, 이 청량한 기분을 그대와 나누는 것을 아끼지 않으리[晩風落日元無主, 不惜淸凉與子分.]”라고 한 소동파의 시에서 온 것이다.
올해는 마침 표암 강세황 탄신 300주년이 되는 해라, 지난 5월에 간송미술관에서 표암을 중심으로 조선남종화를 전시한 데 이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진행 중이고 최근 학술 심포지엄도 열었다. 이 전시회에는 기존에 소개되지 않았던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가 소개되었는데, 김홍도ㆍ심사정ㆍ최북ㆍ허필 등이 한자리에 모여 노는 광경이 퍽 눈길을 끈다. 안산에서 처남 유경종을 비롯한 여러 인사와 노는 장면을 그린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 북경을 다녀와서 그린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등 보기 어려운 그림들이 상당수 전시되어 표암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과옹십취도(瓜翁十趣圖)>가 마음에 들었다. 과천에 사는 어떤 노인이 자기가 사는 곳의 경치 10곳을 시로 쓰고 이것을 서화가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자취를 남기려 하였으나 뜻을 못 이루고 집안사람에게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유언을 전달받은 재종질이 결국 표암에게 부탁하여 첩으로 만든 것인데, 유려한 행서체의 글씨가 보면 볼수록 마음이 즐겁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게 한다.
표암은 서울에서 살다가 살림이 어려워져 32세에 처남이 사는 안산으로 이주하여 오랫동안 시서화의 세계에 몰두하며 공부를 하다가 61세 되던 1773년에 자제들이 과거에 잇달아 급제하고 자신도 관운이 트여 서울로 이사를 한다.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는 안산에 살 때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에 실린 심주의 그림을 모방해 그린 것인데 원래의 그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여름철의 시원한 청량감을 안겨준다. 다소 답답해 보이는 화보의 그림과는 달리 툭 트인 공간을 창조하고 푸른 계통의 옅은 색을 입혔기 때문일까. 앞에서 소개한 시는 원래 이 그림과는 무관하지만, 이 그림의 화제로 써넣으면 맞춤할 듯하여 시의 제목으로 소개해 보았다.
우연히 보니 <칠탄정십육경도(七灘亭十六景圖)>가 있는데 그 중 <언덕 앞에서 꽃을 감상하다[臨崖賞花]>라는 작품이 이 그림과 운치가 비슷하다.
푸른 언덕이 작은 집 앞에 있어 蒼崖當小屋 봄이 오자 꽃이 난만히 피었네 春來花亂開 창문을 밀고 그윽한 감상을 다하니 推窓極幽賞 굳이 지팡이와 신발이 필요하리오 何必費筇鞋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승경을 그린 그림이나 유람기를 통하여 와유(臥遊)를 하는 것과 달리 이 시는 집 앞에 있는 언덕이 아름다워 굳이 멀리 나돌아다니고 싶지 않다고 한다. 시 자체만 떼어놓고 보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림과 어울려 고상한 세계를 연출한다. 창문으로 산수가 들어오게 하는 발상을 통해 주변의 경관을 자연스럽게 자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느긋한 마음이 감상자를 편안하게 해준다.
표암의 그림과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아, 이것이 바로 문기(文氣)로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들 정도로 오랫동안 단련을 한 문인의 격조 같은 게 느껴진다. 그가 그린 산수화나 묵죽도뿐만 아니라 옅은 채색을 가한 무나 봉선화 등을 그린 화첩을 봐도 일반 정물화와는 전혀 다른 문인화의 기품이 있다. 신선한 감각 속에 어떤 화격이랄까, 표암이 말한 대로 독특한 취향과 고상한 생각[奇趣遐想]이 담겨져 있는 듯하다. 표암이 북경으로 사신을 갔을 때 청나라 황제가 ‘미불보다는 아래이고 동기창보다는 위이다.’라는 뜻으로 ‘미하동상(米下董上)’ 4글자를 편액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며, 연경의 명사 중에 어떤 이가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와 같고, 그림은 고개지(顧愷之)와 같으며, 풍채는 두목지(杜牧之)와 같으니, 광지(光之)는 이 사람들을 겸하였구려. [文之退之, 筆之羲之, 畫之愷之, 人之牧之, 光之兼之.]”라고 하였다 한다. 광지는 표암의 자인데, 갈 지(之)자가 10번 들어가 ‘십지평(十之評)’이라 한다.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잘 알려진 표암의 서화를 좀 더 깊이 감상하자면 그의 문집을 보아야 할 텐데 연구자들의 지적처럼 누락된 시와 글이 다수 있는 것 같다. 아마도 표암의 한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을 법한 「길에서 만난 여인[路上有見]」 같은 시는 『병세집(並世集)』과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있지만, 문집에는 없다.
물결 걷듯 비단 버선 사뿐사뿐 가더니 凌波羅襪去翩翩 중문 한 번 들어가선 감감 보이지 않네 一入重門便杳然 그래도 다정하여라 잔설이 남아 있어 惟有多情殘雪在 낮은 담장 가에 발자국이 찍혀 있네 屐痕留印短墻邊
이 시는 작고한 김도련 선생이 애정 한시를 모은 『꽃피자 어데선가 바람불어와』의 가장 앞부분에 소개한 시라 나는 잊혀지지 않는데, 표암 그림에 보이는 옅은 채색과 그리다 만듯한 그림이 이 시를 보면 더욱 격조가 있다는 것을 절로 알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