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당신 /송준호 교수의 글쓰기 // 전북일보 기사 外

2013. 8. 2. 16:01

 

 

 

△고독 혹은 쓸쓸함

누구나 지축 위에

홀로 서 있나니

햇살 한 줄기 뻗쳤는가 하면

어느덧 황혼이 깃든다

살바토레 콰시모도, 〈황혼이 깃들고〉 전문  /    1959년 노벨 문학상 수상, 이탈리아 시인

우리들 각자는 세상의 지축/중심에 서 있으되, 이처럼 '누구나' 항상 '홀로 서 있'다. 어디 그뿐인가. 햇살이 머무는 시간은 언제나 짧고, 어느덧 깃드는 황혼처럼 우리의 삶/인생 또한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느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새근새근 잘 자던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자지러지게 터트린다. 장난감 가게에서 유치원생 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고, 남루한 옷차림의 엄마는 철없는 아들에게 망연한 눈길을 주다 말고 한숨을 푹푹 내쉰다. 중간고사가 있는 날인데 시험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아서 학교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무엇 때문에 자지러지게 울고, 떼를 쓰고, 한숨을 쉬며, 발걸음이 무거운가.

짝사랑하던 국어선생님의 결혼 소식을 듣고 사흘이나 무단결석을 한다.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걸 발견하고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린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다. 사업실패를 비관한 남자가 한강다리에서 몸을 던진다. 자, 또 묻는다. 무엇 때문에 무단결석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광장에 모이고, 한강에 몸을 던지는 것인가.

외로워서다. 앞서 예를 든 갖가지 행동을 하게 만든 원인으로서 그 '무엇'을 하나로 묶는 말이 바로 '외로움'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서 울고, 깊은 한숨을 쉬며, 외로워서 슬픔에 잠긴다. 때로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자신을 외롭게 만든 그 어떤 것에 온몸으로 항거하기도 한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 또한 외로움이 극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도대체 '외로움'은 무엇인가. '외로움'이란 본디 '홀로 있는 듯이 쓸쓸한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홀로 있다니, 사람이란 본디 홀로인 존재 아닌가.

그렇다. 사람이란 늘 혼자여서 고독한 존재다. 곁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도 우리는 결국 누구나 혼자고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외로움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이 '외로움'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나다. '나' 자신이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물론 소중하지만 '나'보다 더할 수는 없다(그들은 어디까지나 '나'가 소중하게 인지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 심지어 '나'가 당장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만 돌아간다. 결국 '나'가 제일 소중하므로 세상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나'가 성취하려는 것들도 모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 속에 있다. 그런데 아무리 간절히 소망하면서 발버둥을 쳐도 '나'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바라는 만큼에 턱없이 모자란다. 당연하다. 세상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나'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대와 달리 '나'는 세상의 중심에 있지도 않고, 세상과 하나일 수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 '나'와 세상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인식 혹은 그렇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외로움'이고 '고독'인 것이다. 그건 각자의 낭만적 바람과 사실적 좌절의 괴리에서 비롯된 감정의 일종이기도 하다.

'낭만'과 '사실'은 무엇인가. 비유컨대 '낭만'이 술꾼들의 저녁 술자리를 지배한다면 '사실'은 다음날 으레 닥쳐오게 마련인 신체와 정신의 고통 같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러므로 '사실'은 모든 외로움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비교해보자.

친구든 선후배든 죽이 잘 맞아 돌아가는 이들과 어울려 차수와 주종을 바꿔가며 새벽이 당도하도록 부어라 마셔라 한다. 과음으로 건강이 나빠진다든가,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는다고 부아가 난 마누라의 배배 꼬인 심사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다음날 첫 시간 강의가 있다는 것쯤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다. 마셔서 즐거운 개인의 감정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둥실둥실 떠다닌다. 바로 낭만적 철없음의 시간이다.

전날의 숙취 때문에 속이 쓰리고 둔기에 찍힌 듯 뒷골이 쩍쩍 갈라지는 사실적 고통의 시간이 바야흐로 도래한다. 그놈의 술 때문에 내가 못 살아, 못 살아를 연발하는 마누라의 잔소리는 숙취의 고통에 염장을 지른다. 결국 첫 시간 강의를 휴강 처리한 일로 술꾼의 착하디착한 심기는 두통보다 더하다. 어젯밤의 그 자유분방했던 상상의 날개는 맥없이 꺾인다. 급기야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성을 바꾼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사실적 아픔과 후회의 시간이다.

세상이 낭만적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나를 외롭게 만드는 '사실'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살아 있는 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아픈 삶의 무게

'외로움'은 장르를 막론하고 모든 예술 분야의 핵심이 되는 주제다. 예술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게 사람의 삶인데, 이 외로움이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크든 작든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지내는 날이 하루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외로움에 때로는 맞서 싸우기도 하고, 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고민도 하고, 또 때로는/대부분의 경우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그걸 순순히 받아들인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고, 박인환은 그의 〈목마와 숙녀〉에서 읊조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떠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쓸쓸한 인생이고 사람살이인 것이다.

물론 이 외로움의 감정은 미래의 방향을 정해주어서 하루하루 고단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기도 한다. 이 경우 각자 느끼는 외로움이 지독할수록 삶의 방향도 확고해진다.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감을 찾아내는 좋은 방법이 여기 있다. 우선 과거에 나를 외롭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요즘 나를 외롭게 만드는 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람이든 주어진 현실이든 뭐든 나를 힘들게/외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면 그것이 바로 훌륭한 글감이 되고 주제도 된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제를 먼저 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글에서 주제는 전체 이야기를 통일성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고 주제를 앞세우면 글쓰기는 시작조차 어렵다. 거기에 딱 들어맞는 글감을 찾기가 어려워서다. 그렇게 쓴 글은 억지로 짜 맞춘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다.

이제부터는 글감이 될 만한 이야기부터 찾아보자. 바로 '나를 외롭게 하는 것들'이다. 지금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들, 나를 힘겹게 만드는 것들, 내가 불만을 갖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첫눈이 펑펑 쏟아져서 친구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남자친구와 약속이 있다면서 다음에 만나자고 하지 않았는가. 새벽에 일어나 밥상을 차렸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입맛이 없다며 밥숟가락을 드는 둥 마는 둥하고 집을 나갔는가. 그래서 기분을 잡쳤고 또 속이 부글부글 끓는가.

그걸 쓰면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만의 삶의 모습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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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한 기타

                               살바토레 콰시모도

                                          :   처음 토목기사    후에 밀라노 음악학원이탈리아 문학교수

                                              1901 8.20. 식민지 시칠리아 출생

                                              1969. 6.4.  이탈리아 卒

                                              1959. 노벨 문학상 수상

 

 

나의 고향은 강가, 바다를 맞이하는 곳

어디서도 들을 수 없지

이 경쾌한 노래 같은 속삭임의 음률은

달팽이들이 살고 있는 갈대숲을

나는 불안하게 서성인다.

 

또다시 가을이 왔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기타의 현을 끊고

조용한 몸체를 조각내지만

한 손으로 끊어진 현을 튕긴다.

불꽃같은 손가락으로

 

 

거울 같은 달빛 아래

소녀들은 몸치장을 하고

우윳빛 젖가슴은 황금빛 노을로 목욕을 한다.

 

누가 흐느끼는 소리인가?

누가 희미한 안개 속에 말을 달리는가?

우리는 파릇파릇한 풀밭 길을 지나

해변에서 멈춰 선다.

내 사랑아, 나를 그 거울 앞으로 데려가지 말아다오.

거울같이 맑은 달빛 속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잎을 흔들고

잔잔히 흐르는 물결과 노래하는 소년

 

 

누가 흐느끼는 소리인가?

믿어주시오. 나는 아니라오.

강물 위에 울리는 조급한 채찍 소리

총총한 불꽃 사이로 나는 듯이 말을 달린다.

나는 절대 울지 않소.

나의 동포들이여 검을 들게나.

은색의 달빛 아래 검들이 번쩍이고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라

 

 

 

 

신사실주의

新寫實主義

Neorealismo

(영)Neorealis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에서 꽃핀 문학·영화 운동.

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과 전쟁 전후에 생겨난 사회문제를 사실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문학

1920년대에 뿌리를 둔 신사실주의 문학운동은 20년 가까이 파시스트 지배로 억압당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말 파시스트 정권이 몰락하자 다시 힘차게 등장했다. 신사실주의는 그 바탕이 된 이탈리아 초기 사실주의 운동과 전체적인 목표는 비슷하지만, 파시스트 정권의 탄압·저항·전쟁 등이 재능 있는 작가들에게 심어준 격렬한 감정·경험·확신을 원동력으로 삼아 힘차게 솟구쳐올랐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1930, 1940년대에 날카로운 사회의식을 가진 미국과 영국의 작가들이 이탈리아 문학작품을 번역한 것도 이 운동을 더욱 촉진하는 추진력이 되었다. 신사실주의의 뛰어난 작가들로는 노벨상 수상자인 시인 살바토레 콰시모도와 소설가인 알베르토 모라비아, 이그나치오 실로네, 카를로 레비, 바스코 프라톨리니, 카를로 베르나리, 체사레 파베세, 엘리오 비토리니, 카를로 카솔라, 이탈로 칼비노,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전쟁 이후의 작품), 카를로 에밀리오 가다 등이 있다.

파시스트 시절에도 신사실주의 작품이 이따금 있었으며, 그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최초의 작품은 아마도 모라비아〈무관심한 사람들 Gli indifferenti〉(1929)일 것이다. 이그나치오 실로네는 〈폰타마라 Fontamara〉(1930)를 위시하여 스위스 망명 때 쓴 반(反)파시스트 작품들로 구체적인 명성을 얻었다. 엘리오 비토리니는 헤밍웨이풍의 훌륭한 작품 〈시칠리아에서 나눈 대화 Conversazione in Sicilia〉(1941)에서 파시스트 정권에 대해 간접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많은 신사실주의 작가들은 숨거나(모라비아), 감옥에 갇히거나(파베세·비토리니), 추방당하는(실로네·레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비토리니·칼비노·카솔라)이 저항운동에 가담했으며, 일부는 헤르메티시즘(콰시모도) 같은 내성적(內省的) 운동이나 다른 사람들(파베세·비토리니)의 작품을 번역하는 데서 피난처를 찾았다.

전쟁이 끝나자 신사실주의 운동은 힘차게 일어났다. 바스코 프라톨리니는 자전적인 작품을 뒤로 하고 피렌체 빈민들의 삶을 감동적으로 생생히 묘사한 〈거리 Il quartiere〉(1944)와 신사실주의 작품의 정수로 손꼽히는 〈가난한 연인들의 이야기 Cronache di poveri amanti〉(1947)를 발표했다.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는 초기에는 파시스트당에 충성을 바쳤지만, 얼마 후 그들과 관계를 끊고 전쟁에 대한 2편의 힘찬 소설 〈카푸트 Kaputt〉(1944)와 〈피부 La pelle〉(1949)를 썼다. 엘리오 비토리니는 자신의 저항운동 경험을 〈인간과 비인간 Uomini e no〉(1945)에서 솔직히 적고 있다. 카를로 레비는 〈에볼리에서 멈추신 그리스도 Cristo si è fermato a Eboli〉(1945)에서 이탈리아 남부(그가 추방당한 곳) 농민들의 참상을 따뜻한 마음으로 묘사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다른 작가들도 그당시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또는 있던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살바토레 콰시모도는 헤르메티시즘에서 빠져나와, 〈하루 또 하루 Giorno dopo giorno〉(1947)를 시작으로 전쟁과 사회 문제에 대한 시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모라비아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여 뛰어난 신사실주의 소설을 많이 발표했다. 체사레 파베세는 파시스트 감옥에서 겪었던 생활을 2권의 소설로 묶었고, 현대의 절망을 다룬 내향적인 소설을 많이 썼다. 이탈로 칼비노는 〈거미집속의 오솔길 Il sentiero dei nidi di ragno〉(1947)에서, 카를로 카솔라는 〈목재 자르기 Il taglio del bosco〉(1959)·〈부베의 연인 La ragazza di Bube〉(1960)에서 자신들의 저항운동 경험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영화

영화에서의 신사실주의 운동은 이탈리아 문학운동과 병행하여 일어났다. 신사실주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객관적인 표현 양식을 갖고 있었다. 배우들은 평범한 상황에 처한 보통 사람이거나 또는 그렇게 보였다. 신사실주의 영화는 서둘러서 조잡하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통적인 영화제작이 갖고 있던 현실도피적인 이상주의에서 과감히 벗어나 현실의 주제를 대담하게 다룸으로써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류의 영화로 처음 나온 것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Open City〉(1945)로, 나치 점령시 이탈리아인들에게 강요된 난폭한 행위를 보여주는 반파시스트 작품이다. 로셀리니의 〈전화(戰禍)의 저편 Paisan〉(1946)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쟁을 6개의 짧은 사건으로 구성한 영화로, 〈무방비 도시〉와 비슷한 종류의 비참한 내용이다. 다른 중요 작품으로는 이탈리아 노동자계급의 일상 생활을 다룬 비토리오 데 시카의 〈구두닦이 Shoeshine〉(1946)·〈자전거도둑 The Bicycle Thief〉(1948)과 시칠리아의 가난한 어부 이야기를 다룬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1948)가 있는데, 이 작품에는 직업배우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1950년 이후 이탈리아 영화는 사실주의에서 환상적이고 상징주의적이며 문학적 주제를 다루는 경향으로 넘어갔다.


신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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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실주의 또는 네오레알리스모 , 네오리얼리즘 (이탈리아 문학·영화) Neorealis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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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실주의"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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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 8. 2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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