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연구1~2

2016. 3. 11. 14:13도자 이야기



      

분청사기연구1| 미술사 시간에 배운것들


카페쥔 | 2001.05.25. 15:32

                   


머 릿 말

   분청사기를 떠올릴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한국적인 맛을 듬뿍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과 지금 20세기에 생활용품으로 쓴다 하여도 손색이 없을만큼 현대적인 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말에서 조선 시대까지 약 200여년간 우리 선조들의 옆에서 생활 자기로 사용되면서 건국 초기의 당당함과 활달함이 자유분방하게 표현된것과 더불어 각 지방의 개성미를 잘 살리고 있다. 청자와는 달리 태토 자체가 2차 점토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각지에서 태토의 수집은 용이했지만 조질의 사기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색깔도 청자의 빛깔과는 다르게 회청색을 띠고 있어 이를 감추기 위해 백토로 분장을하였다고도 한다. 분청사기는 기본적으로 청자의 일종으로,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백토로 분장한 것이 많기 때문에 '백토로 분장하였다'하여 명명하였다. 1940년대 초기에 고유섭(高裕燮)이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으면서 우리 도자기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줄임말이다. 고려말기의 퇴락한 상감청자의 기법으로부터 출발한 분청사기는 세종대에는 기법이 더욱 다양해지고 세조대에는 성세기를 맞이하였다가 16세기 전반에는 백자에 흡수, 소멸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그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다. 이 글에서는 분청사기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적 배경과 주요 기법, 편년자료로 이용되는 사기의 관사명에 대해 알아보고, 그 시기적 특성과 지역적 특성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알아보고자 한다. 


 몸 말

1.시대적 배경

   고려 말은 전민변정도감을 통한 토지개혁의 실패, 공민왕 시해 후의 우왕과 창왕대의 친원정책, 관아의 문란, 홍건적과 왜적의 침입 등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국방, 외교가 혼란스러웠다. 이에따라 12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던 고려청자 기술은 13세기 중엽부터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편병이 등장하고, 회금청자가 출현하는 등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14세기에는 지방 향사나 평민층에서 성장한 신진사대부와 무인세력이 중심이 되어 조선왕조를 성립함과 같이 변화된 시대적 미감에 따라 달라진 모습을 띠게된다. 조선을 건국하였던 고려말의 신진사대부들은 지방향사였거나 평민층에서 성장한 무인세력으로 고려의 귀족적인 문화 대신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을 가진 사회계급을 형성하고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서 세계를 보기 시작한다. 이들은 내세보다는 성공이나 출세, 다산 등의 현세적인 부분을 중요시 하며 그릇 역시 일상 생활에 널리 쓰여질 수 있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데 질박하고 검소하여 실용적인 것을 찾게 된다. 그래서 고려 청자에 일일이 상감을 하는 것 보다 간편하게 도장으로 무늬를 찍게 되고, 튼튼한 생활용 그릇을 만들기 시작한다. 또한 15세기에 등장한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등장도 분청사기에 반영이 되는데, 이는 1418년 세종연간 외래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 대신 독창성 있는 우리문화를 찾았던 것과도 연계가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초기에서 말까지 관요의 형태로 남아있던 가마도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14세기 중반부터 40년간 왜구들이 우리나라의 남해안, 서해안, 동해안 일대의 바닷가를 침범하여 식량을 약탈해가고 그 피해가 날로 심하여지자 강진, 부안과 같은 고려청자를 제작하던 곳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도공들이 내륙으로 피신, 전국으로 흩어지면서 상감청자의 옛 형태에서 상감분청사기를 만들기 시작하게 된다.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흩어진 지방 기술자들은 소규모 가마를 만들어 도기를 제조하는데, 1424년에서 1432년의 [세종실록지리지], '토산조(土産條)'에 의하면 전국에 139개소의 자기소와 185개소의 도기소가 있었다한다. 이 때의 분청사기는 각 지방에 따른 미감의 차이가 나는 생활자기로서 제조된다. 또한 고려말 금속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자기와 목기만을 사용하게 함으로 자연히 증가된 수요는 다량의 공급을 필요로 했고, 이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분청사기는 시멘트 색깔이 많이 나고, 문양도 거칠어진다.


 2.분청사기 기법

  ⑴ 상감기법. 

 고려 상감기법의 연속으로 음각선에 백토나 자토를 감입(嵌入)한 다음 번조하면 백색이나 흑색문양이 나오게 된다. 상감기법에는 선상감기법과 면상감기법이 있다. 선상감기법은 초기에 퇴보한 고려상감청자의 문양이 이어지다가 1420년 이후 현저히 조선적 선상감의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예))분청상감초화문사이호-정묘공주묘 출토) 면상감기법은 상감분청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자리잡게된다. 상감기법은 15세기 중엽까지 계속되는데, 주요문양은 蓮唐草, 柳, 모란, 모란당초, 초화, 갈대, 魚, 魚龍, 雷紋 등이 시문되었다.


  ⑵ 인화기법

   시문하고자 한 문양을 양각한 도장으로 그릇 표면에 정연하게 押印, 백토를 메워넣는 기법으로 넓은 의미의 상감기법에 포함된다. 15세기 초기에는 국화문, 육각판문, 삼원문과 같은 도장이 듬성듬성 1줄이나 2줄 정도로 압인되어 단독 화문이 전체를 메우고 있으나 15세기 중엽에는 집단화된 국화문, 연권문, 우점문 등이 기면 전체에 빽빽히 찍혀 그릇 전체가 하얗게 백토로 상감된다. 15세기 초에 발생한 인화기법은 1420년경에는 문양이나 구도가 안정되기 시작하여 15세기 중엽에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화기법에는 관사명, 생산지명, 도공명이 각인되거나 상감된 예가 많다. ㄱ. 관사명 : 공안부(恭安府:1400-1420), 경승부(敬承府:1402-1418), 인녕부(仁寧府:1400-1421), 덕령부(德寧府:1455-1457), 인수부(仁壽府), 내섬시(內贍寺), 내자사(內資寺), 예빈시(禮賓寺), 장흥고(長興庫) 등. ㄴ. 생산지명 : 고령, 내천, 덕주, 안양, 안동, 군성, 성주, 금산, 덕산, 밀양, 창원, 영산, 보주, 진해, 금해, 의흥, 예일, 해주 등, 주로 경상도 지방 이름이 많다. ㄷ. 관사명의 약자 : 長, 內, 仁, 司, 大 ㄹ. 지명의 일부 : 廣, 山, 羅, 果, 光 ㅁ. 도공명 : 李金, 鄭, 良金, 寄, 金 등


⑶ 박지기법

    기면 전체에 백토를 바르고 시문하고자 하는 문양을 그린 후 문양 외의 배경을 긁어내면 문양의 백색과 배경의 素地色이 대조되게 나타나는 기법이다. 백색과 소지색과의 대조를 위해 긁어낸 소지에 鐵彩를 더하기도 하였으며, 세종때 세련되어 가장 활발했다. 박지기법은 광주 충효동,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전북 부안군 부안면 우동리 등에서 두드러진 기법이다.


  ⑷ 음각기법

   고려자기의 음각기법과 같은 것으로 박지기법과 혼용되었으며, 발생시기도 비슷하다. 기면을 백토로 분장한 후에 원하는 문양을 선조하면 회색소토의 소지색이 문양선으로 나타나게된다. 회화적인 사실표현에서 추상화된 문양까지 표현할 수 있으며, 주요 문양으로는 모란, 모란당초, 연, 연당초, 물고기, 버들, 가옥, 인물, 추상물 등이 있다. 


 ⑸ 철화 기법 :

   귀얄로 백토분장한 후 철분이 포함된 안료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흑갈색이나 흑색이 나타난다. 충남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 일대에서 사용되었으며, 15세기 후반에 발전하여 16세기 전반까지 사용된 기법이다. 


  ⑹ 귀얄기법

   귀얄이라는 도구로 백토를 칠한 후 다른 문양을 시문되지 않아서 귀얄의 백토 붓자국만 남게된다. 특히 서민용 분청사기 막사기에 많이 보이는데, 백자와 함게 출토되는 예가 많다. 인화문 위에 슬쩍 귀얄로 바른 경우도 있다. 거의 전국적으로 출토되며 대접인 경우 포개어 번조했다. 


 ⑺ 담금(덤벙)분장기법 :

   백토물에 덤벙 담가서 백토를 입히는 기법이다. 두텁게 분장된 경우 연질 백자로 오인할 정도이며, 굽을 잡고 거꾸로 담글때는 굽과 굽 언저리에는 백토가 분장되지 않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남지방에서 많이 발견된다. 



 3.관사명

  ⑴ 공안부 정종의 상왕부(上王府)로서 정종 2년(1400)에 임시관청으로 설치되었다. 정종이 죽은 이듬해인 1420년에 인녕부에 병합되어 폐지되는 관청이므로 "공안부(恭安府)"나 "공안"이 새겨진 그릇들은 1400년 부터 142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⑵ 경승부 태종 2년(1402) 원자부(元子府)로 출발해서 태종 4년 양녕대군 제( )를 세자로 책봉하면서 세자부가 되고, 태종 18년(1418)에 세자를 추방하고 대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은 뒤 순승부(順承府)가 됨으로써 경승부는 폐지된다. 따라서 경승부는 1402년 부터 1418년 까지 존속한 임시 관청인 세자부이므로 경승부명이 있는 접시는 1402년부터 1418년 사이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⑶ 인녕부 정종 2년에 공안부와 함께 정종의 비를 위한 중궁부(中宮府)로 세워지고 세종 3년에 경순부(慶順府)가 됨으로써 폐지된다. 그러므로 "인녕부"가 새겨진 그릇은 1400년-1420년 사이에 제작된 것들이다. 


  ⑷ 인수부 정종 2년 2월에 아우 정안공(靖安公)인 방원을 왕세자로 세우고 군국중사를 관장케 한 뒤 세자부를 설치하여 인수부라 했으며 정종 2년 11월에 왕세자인 방원에게 왕위를 넘기므로 인수부는 약 10개월 동안 세자부로 존속한다. 이후 세조 원년(1455)에 덕녕부로 개칭되어 단종을 위한 관청의 임무를 띠었으나 단종이 죽자 1457년에 다시 인수부로 복칭되어 명종 1년(15560까지 존속된 세자부이다. 인수부가 새겨진 그릇들은 대개 인화기법의 것이 많은데 초기의 성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없고 대개가 집단연권무늬로 안과 밖의 면을 빈틈없이 압인하였다. 무늬의 구성도 중심 무늬대의 폭이 넓어지고 백토분도 그릇 전체에 듬뿍 발라 백토 분장의 충분한 효과를 발휘한 매우 세련된 모습의 그릇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인수부"가 새겨진 그릇들은 대개 15세기 중엽의 것들이 많다. 


   ⑸ 덕녕부 노산군 단종에 관한 일을 관장케 하기 위해 세조 원년에 세운 관청으로서 단종이 죽은 해인 1457년에 폐지된다. 그러므로 "덕녕부'가 새겨진 그릇은 1455년 부터 1457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⑹ 내섬시 각 궁전에 대한 공상(供上), 2품 이상에게 주는 술,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에게 주는 음식과 직조 등의 일을 맡아 보는 관청으로서 고려의 덕천고가 태종 3년(1403)에 내섬시로 개칭되어 정조 24년(1800)까지 존속하는 관청이다. "내섬시"를 새긴 형태는 대개 장방형의 도장으로 "내섬(內贍)" 두 자만을 대접이나 접시 안바닥에 한 개 혹은 여러 개를 압인하고 백토를 넣는 경우가 많다. 그릇의 무늬는 분청사기 말기에 흔히 나타나듯 얕게 누른 연권무늬에 엷게 백토를 입힌 뒤 닦아내지 않는 것도 있다. 내섬시명 도편이 수집되는 가마터는 주로 전라도 지방에 집중되는 것이 특색이다. 


   ⑺ 내자시 내섬시와 함께 태종 3년(1403) 고려의 의성고(義成庫)가 내자시로 개칭되어 궁중에서 쓰는 쌀, 국수, 술, 간장, 기름, 꿀, 채소, 과일, 내연(內宴), 직조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1882년에 폐지되며, "내자시"가 새겨진 접시 파편이 계룡산 기슭에서 출토되었다. 


   ⑻ 예빈시 고려 태조 4년(921)에 설치되어 조선으로 계승된 관청으로 빈객, 연향(燕享)의 일을 담당했으며 고종 31년(1894)에 폐지된다. "예빈"이 새겨진 파편이 충남 공주군 학봉리에서 수집된 적이 있고, 연기군 전동면 금사리에서도 수집된다.

 




분청사기연구2| 미술사 시간에 배운것들
카페쥔 | 2001.05.25. 15:36 
   

  ⑼ 장흥고

   돗자리, 유둔(油芚:기름먹인 두꺼운 종이), 지지(紙地) 등을 관리하고 궐 안의 여러 관청에서 쓰는 물품을 공급하던 곳이다. 장흥고가 새겨진 그릇은 1419년-1437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리라고 보이는 '분청인화 집단연권무늬 곤남군장흥고명접시', 정통 3년명 태지와 함게 출토된 '분청 인화국화무늬 장흥고명 대접' 등이 있다.


  ⑽ 사옹원

   왕의 식사와 궁궐의 연회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으로서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는 사옹방으로 존속되어 오다가 세조 13년(1467)에 사옹원으로 개칭된다. 



 4.분청사기의 시기구분


   분청사기의 발생에서 소멸까지를 문양과 기형의 변화를 중심으로 구분해 보면 대개 크게는 전기와 중기, 후기의 3개의 시기로, 그리고 각각을 다시 제 1기와 제 2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 (발생기)

   1360-1420 1392년 이후의 분청사기는 상감청자와 비슷해서 구별하기가 어렵다. 시대만 조선시대이지 거의 상감청자와 똑같다. 14세기부터 대접내면의 중요한 문양소재로 등장하는 연당초문과 S자형 병이 출현한다. 


   제 1 기 태동기, 1360-1390 

   고려 상감청자 쇠퇴기와 중복되며 태토(胎土)가 조잡하고 기벽이 두텁고 투박하며 유조(釉調)는 암록색을 띤다. 운학문(雲鶴紋)의 경우에는 운문(雲紋)이 우점문(雨點紋)으로 변형되어 고려상감청자의 명맥을 유지하지만 대접의 경우에는 몇줄의 선만을 돌려 무문(無紋)의 경향을 보이기도하며 매병에 있어서는 굴곡이 심한 기형의 변화와 더불어 저부에는 간략한 卍자문, 연판문 정도가 상감시문된다. 이 시기에 속하는 요지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미산과 당전부락 일대의 14세기 말 청자 가마터이이며 자료로는 '靑磁象嵌蓮唐草紋正陵銘대접', '靑磁象嵌蓮柳紋德泉銘甁', '粉靑象嵌義成庫銘甁' 등이 있다. 


  제 2 기 발생기, 1390-1420 

  조선 왕조의 기반이 다져지는 시기로 분청사기에서도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고려청자의 퇴화된 상감무늬의 여운이 남아있는 한편, 기형, 무늬, 유태가 재정비되어 조선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분청 인화문이 발생한 시기로 연당초무늬, 풀무늬, 重圈무늬, 빗방울무늬, 성긴 인화무늬가 많고, 여의두무늬, 연판무늬, 卍무늬, 방사성 파상무늬 등이 시문되었다. 기형은 대접의 경우 안으로 휜 투박한 모양이 주종을 이루며 대마디(竹節)굽이 많다. 제작방법은 태토비짐받침을 사용하여 포개어 번조했으며, 유약은 청자유 계통의 투명유이지만 태토가 짙은 회흑색을 띠고 있어 유조는 암록색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가마터로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쌍동리, 광주직할시 충효동, 경남 사천읍 구암리, 상청군 신등면 장천리, 경북 상주군 화동면 어산리 등이었고, 주요 자료로는 '청자상감연당초무늬정릉명대접'에 근원을 둔 '粉靑象嵌蓮唐草紋恭安銘대접'과 '粉靑印花菊花紋恭安府銘대접'을 들 수 있다.


  ⑵ 중기(발전기)

   1420-1480 상감기법이 1480년대에 가까워지면 거의 자취를 감추고, 인화기법도 차츰 쇠미해 가다가 1480년 이후 귀얄기법이 크게 유행한다. 


   제 1 기 발전기, 1420-1450 

   세종대왕의 치세 연간으로 민족문화가 융성하던 시기로 상감(선상감, 면상감), 인화, 박지, 음각 등의 기법상 다양한 발전을 보인다. 태토는 밝아지며 유약은 잡물이 없이 투명해지는 등 분청사기의 특질이 뚜렷해진다. 기법은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이 우세하며 인화기법은 대접의 경우 그릇 內側面 듬성듬성하게 찍던 무늬에서 그릇 전체를 가득히 채워져 문양구도의 짜임새가 잡히는 시기이다. 인화기법의 도장으로는 국화, 톱니바퀴, 원, 육각판 등이 있고, 集團蓮圈紋이 기면 전체에 압인되어 인화문의 새로운 특징이 정착되는 시기이다. 대접외면에는 고려 상감 청자의 무늬가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변형된 운학무늬가 상감되어 고려청자의 환원기라고도 하며 이때의 유조는 밝은 회청을 띠며 태토는 정선되어 잡물이 거의 없고 대접의 경우는 대개 태토비짐받침으로 포개어 번조한 것이 많다. 이 시기의 가마터는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있다. 주요 자료로는 '분청상감초화무늬네귀항아리(정소공주 무덤에서 출토)', '분청인화집단연권무늬(集團連圈)네귀항아리', '분청박지연물고기무늬 공봉화상뼈항아리'와 '분청상감 선덕 10년명 묘지', '분청인화집단연권무늬곤남군장흥고명 접시', '분청인화국화무늬장흥고명 대접', '분청상감연물고기무늬정통5년명반형묘지', '분청상감경태원년명 묘지', '분청상감전라도관창사조항지묘명 묘지'가 있다. 


  2 기 성숙기, 1450-1480 세조와 성종 치세의 전반부에 해당되는데, 분청사기의 모든 기법의 성숙함을 보이는 한편, 무늬가 헤이해지고 유태에 잡물이 많이 섞여 막그릇화 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귀얄기법이 현저하게 증가한다. 인화기법은 무늬 짜임새, 압인 상태가 고르지 못하고 얕게 압인되어 백토의 감입의 상태가 지저분하게 나타나 제작의 소홀함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분청사기가 중기 제 2기 후반부터 쇠퇴의 기운을 띠기 시작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세조 연간에 사옹원의 분원이 성립되어 관장제 수공업 체제의 관요적인 성격을 띈 사옹원이 백자생산의 중심지가 되므로 토산공물로서의 분청사기의 생산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양에 있어서는 집단연권무늬의 경우 고도의 기술이 습득되어 그릇의 면에 골고루 시문되고 여백 없이 압인된 곳에 백토가 고루 감입된다. 박지와 음각 기법이 특색을 이루어 전라도 지방에서 크게 유행한다. 가마터는 충남 연기군 전동면 달전리,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 광주광역시 충효동,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경북 사천군 곤양면 송전리, 경북 월성군 현곡면 내태리와 남사리, 고령군 기산동 등이 있다. 자료로는 '분청귀얄무늬항아리와 접시(온녕군 무덤 출토:1454)' 이전, '분청 인화집단연권무늬덕녕부명 대접(1455-1457)', '분청인화국화무늬월산군 태항아리(1454-1462)', '분청상감 천순8년명 묘지(1464)', '분청상감성화3년명 묘지(1467)'가 남아있다. 


 ⑶ 후기 1480-1600 

  제 1 기 쇠퇴기, 1480-1540 

    상감, 인화기법 쇠퇴하면서 철화기법과 같은 개성이 강한 지방 양식으로 발전하여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경까지 유행한다. 유조는 녹색이 짙어지며 태토에는 잡물이 섞이고 백자와 함께 수집된다. 또 담금분장기법(덤벙)이 성행하는 시기이다. 가마터는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 청학리, 충남 연기군 전동면 금사리,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전북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아산면 용계리, 경남 양산군 원동면 화제리, 웅산면 주남리,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리, 진양군 수곡면 효자리 경북 고령군 사부동 등 이고, 자료로는 '분청귀얄철화성화23년명묘지명'1487, '분청귀얄철화홍치3년명묘지편'1490, '분청귀얄철화가정15년명묘지편'1536 이 있다. 

  제 2 기 소멸기, 1540-1600

   귀얄, 덤벙이 서서히 백자에 흡수되고, 소멸된다. 백토의 귀얄기법만이 일부 백자에 영향을 주어 백자 태토 위에 백토분장을 한 경우가 있다. 자료로는 '만력15년명묘지편'이 있다. #.時期區分에의 窯地別 特徵 (도표-자료실, 분청사기연구에서 참조) 마무리말 분청사기는 시기적으로 상감청자와 백자의 중간단계에 해당하지만, 단순히 청자와 백자를 이어주는 과도기적 그릇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기형 분청사기의 기형은 고려말 청자의 기형을 바탕으로 풍만하고 율동적인 변형을 가한 것이다. 이는 조선적 건국이념인 유교를 근본으로 하여 고유의 신앙과 불교의 영향을 가미한 것과 같다. 그릇의 종류별로 기형의 특징을 살펴보면, 매병의 경우 고려말에 비해 구연이 외반되었고, 어깨곡선으로부터 시작하여 굽에 이르기까지 S자형의 굴곡을 이루어 파도와 같은 생동감이 나타난다. 대접은 단순히 구연이 외반 된 것 보다 훨신 늘어난 형태로 동체의 선이 비스듬히 곧게 뻗어 올라가는 것이 분장문에 많고, 굽 위의 동하부(胴下部)를 수평으로 한 번 깎은 것이다. 구연이 외반된 것은 백자와 비교했을때 하동부가 풍만하고, 단정하며 예리한 감을 주는 백자보다 율동감이 있다. 편병은 처음부터 납작하게 빚었던 백자와 달리 둥근 몸체의 양면을 두드려 편평하게 한 것으로 풍만하면서도 자유로운 의지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태항아리의 경우도 같은 15세기의 백자가 홀쭉하게 높은 것에 비하여 풍만하고 비례가 낮은 모습이다. 


    2. 문양 분청사기에 주로 사용되는 문양은 연화(蓮花), 연판문(蓮瓣紋), 모란(牡丹), 모란엽문(牡丹葉紋), 초화문(草花紋), 버들(柳), 물고기(魚), 용(龍), 파선(波線), 인동, 새, 국화, 당초문 등이다. 그중 연화, 연판문은 불교와 관련된 문양이다. 이 문양들은 고려자기에 등장했었으나 고려말 잠적했던 문양으로 조선시대에 부활하여 시문되었다. 같은 인화문 이라도 시문하는 자세에 따라 다르고, 분장법에 따라 지방마다 다양한 변화를 겪게된다. 호남지방의 분청사기 문양은 선종의 영향으로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것이 특징이다. 개체의 시문이 크고, 인화문 자체가 소략하게 시문 된것에 얇게 분장하여, 표면을 깍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이 백색으로 화장한 것 같다. 시문할 때도 치밀하게 하는 것 보다는 소략하여서 대범하고, 여유로우며 자유분방한 맛을 살리고 있다. 또한 지방명이 없고, 관사명도 인화로 나타냄으로 문양과 같은 효과를 낸다. 박지, 조화문이 발전하였다. 영남지방은 대의명분과 명리를 내세우는 성리학이 발전하고, 불교에서도 교종세가 강한것의 영향을 받았다. 호남지방의 분청사기와는 달리 치밀하게 시문하고 분장한 후 표면을 깍아내어 시문이 분명히 나타난다. 담청색의 유약과 회색 경질(硬質) 素土가 잘 어우러져 있다. 관사명 위에 번조한 지방명을 각명(刻銘)하였고, 귀얄을 하지만 조화나 박지처럼 자유분방한 분청사기 발전은 눈에 띄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