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자사 1---고려청자

2016. 3. 11. 14:20도자 이야기



       [한국사] 한국 도자사1---고려청자| 동양사

전상용 | 조회 1929 |추천 1 | 2007.06.30. 23:08


 

   도자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중에서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조선백자를 떠올리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지금 봐도 아름답고 심지어 도자기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없는 기법들도 개발해냈기 때문입니다. 또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17c이전까지 이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 밖에 없었습니다.(물론 9~10c이전까지는 중국밖에 생산하지 못하지만)게다가 당시는 도자기라는 것이 지금의 반도체와 같은 역할을 할 정도로 고부가 가치 상품이었죠, 물론 우리나라는 국내 수요 대는 것도 모잘라서 중국처럼 많은 수출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가끔 중국이나 일본으로 팔려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럼 이런 도자기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리고 어떻게 변해 가는지 설명하려합니다. 자 전상용의 재미없는 도자기 강의 시간 렛츠 고~~~(처음 시작부터 욕먹을 짓 한다)



   일단 여기서 쓰려는 도자기는 토기와 도기,석기,자기 중 자기를 쓰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흔히 도자기라 부르며 자부심을 느끼는 청자,분청사기,백자는 자기류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위의 분류법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순서를 보면 원료 채취-수비-반죽-성형-정형-초벌구이-시문-유약 입히기-굽기 있는데 원료 채취의 경우 일단 자기의 원료가 되는 흙은 토기와 도기와는 달리 2차 점토보다는 1차 점토에 가까운 흙을 씁니다. 흔히 고령토가 이쪽에 속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본과 중국보다는 약간 2차 점토에 가까운데 이것은 점성은 좋은데 흙의 단단함이 떨어집니다. 아 이건 자기가 만들어졌을 때 강도의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고 아직 굽기 전에 강도만 관계있는 건데 이것 때문에 한국의 자기는 원료 빚었을 때보다 약간 작아진다고 합니다. 뭐 그릇이나 다른 물건들은 일정한 크기로 만들 필요가 없으니 그리 걱정할 것은 없는데 기와 같이 일정한 크기로 만들어야 하는 것들은 어렵습니다.


   수비란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가르키는데 여기서는 불순물 뿐 아니라 철분의 함유량도 조절하는데 청자와 백자의 태토(바탕흙)의 색깔이 다른 이유는 사실 이 철분의 함유량과 관련이 있습니다. 전에 강진 박물관 청자연구소에서는 120목(目)채로 여러 번 채질을 해서 걸러내지만 그쪽 연구자들은 옛날에는 이런 채를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마 나무 관 같은 것을 만든 다음 물에 흙을 흘려보내서 걸렀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합니다.


   반죽은 바탕흙 안에 있는 공기를 빼기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이 공기가 그대로 있을 경우 불에 의해 공기가 팽창해서 자기가 터집니다. 참고로 옛날 토기들이 무늬가 있는 이유 중 하나로 드는 것이 바로 공기 팽창으로 인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더군요(타날문 토기의 경우 특히 그렇죠) .


   성형은 자기의 모양을 만드는 건데 방법으로는 수날법(손으로 빚음 ), 테쌓기(테를 만들어서 쌓음), 서리기, 물레성형(우리가 흔히 보는 성형법), 압출성형(틀로 찍음) 등이 있습니다. 정형은 굽을 깍는 작업입니다. 초벌구이는 약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고 시문은 문양을 만드는 것입니다. 유약을 입히는 것은 자기를 유리화시켜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자기를 단단하게 만듭니다 유약은 나무재가 주재료로 쓰입니다.


구울 때는 온도가 1250도 이상으로 백자가 청자보다 더 높은 온도에서 구워집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자기는 뭐냐??라고 물으면 보통 청자를 듭니다 물론 고려시대에는 청자 뿐만 아니라 백자와 흑유자도 나오지만 이것들은 당시 주력 상품이 아니어서 빠집니다(그것보다 흑유자를 자기에 포함시키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일본도 녹유 같은 것은 17c이전부터 있었지만 자기로 치지 않습니다 참고로 유약은 그 재료가 나무재인데 도기를 굽다가 가끔가다 나무재가 도기에 붙으면서 유약성분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럼 청자란 무엇이냐 그에 대해서는 아래 설명 쭉 들어갑니다(출처:한국 도자사 시간에 배운 한국도자원고)



1. 청자의 개념(槪念)

  철분이 약간 함유된 태토로 특정한 모양을 빚고 그 위에 2, 3%의 철분이 섞인 유약을 발라 1250°내외의 온도에서 환원염(還元焰) 상태로 구워 유약 속의 철분이 청록색으로 바뀐 자기를 청자라 한다. 

환원이 불충분하거나 불순물이 함유되면 유색이 황녹색이나 회녹색을 띠며 또는 산화되어 황갈색을 띠기도 하는데 이러한 유형도 청자로 부른다. 다만 구리 성분의 산화에 따른 녹유(綠釉)는 청자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게 뭔소리여 할 것 같아서 설명 들어갑니다. 환원염이란 불의 종류 중 하나인데 여러분은 산화라는 개념을 알 것입니다 산소와 결합된다는 뜻이죠, 잘 알다싶이 불은 산소를 필요로 하는데 옛날 초기에 토기를 구울 때는 노지에서 구웠습니다. 그러니 산소가 풍부한 상태에서 구웠고 그 때문에 토기에서 산화가 일어납니다(철분이 풍부한 토기들은 붉은 색이 되었죠). 이런 불을 산화염이라고 하는데 이와 반대로 환원염은 산소가 충분치 않게 등요 즉 지금의 가마와 같은 곳에 도기와 자기를 넣어서 굽습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산소가 부족하고 이 때문에 도자기 안에 있는 산소를 불들이 꺼내서 씁니다 이 때문에 색이 변하는데 도자기의 색을 결정하려면 산소와 불의 온도 등을 조절하면서 산화염과 환원염을 자유자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황갈색이 어떻게 청자여~~하는 분이 있을 것 같아서 말하면 제가 본 청자 중에는 백자처럼 흰 색도 있었고 백자 중에는 청자와 같은 색을 내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전자는 청자라 부르고 후자는 백자라 부르냐...이는 전자의 경우 청자에서 쓰는 바탕흙(태토)와 청자 유약을 썼기 때문이고 후자는 백자 바탕흙과 백자 유약을 썼기 때문입니다. 즉 성분에 따라 구분하지 단순히 색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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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연판형 뚜껑 주자[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소장])


 

   녹유의 경우 저도 잘 모르니 패스~~~


하여튼 위와 같은 후덜덜한 개념을 가지신 청자는 과연 언제 만들어졌냐??이에 대해서는 현재 크게 두가지 설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9c설이고 하나는 10c설입니다


   9c설의 지지자는 정양모(鄭良謨), 최건(崔健), 김재열(金載悅), 요시오카 간유우(吉岡完祐), 하세베가쿠지(長谷部樂爾) 등이 있고 10c설의 지지자는 최순우(崔淳雨), 윤용이(尹龍二), 노모리켄(野守健), 미카미쯔기오(三上次男) 등이 있는데 현재는 10c설로 기울고 있습니다(사실 10c설 안에서도 초반이냐 중반이냐 후반이냐의 논쟁도 있지만 패스)


   위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한국도자사라는 책에 몇몇 연구자들의 주장과 함께 잘 나와 있지만 이거 표까지 올리면 필자는 죽어나고 솔직히 독자 분들도 이해하기 힘들어서 간단히 설명하면, 9c설은 우리나라의 초기 청자 중에 대표적인 유물은 해무리굽완(日暈底碗)이다. 이 완은 중국의 경우 당(唐)나라 말기~오대(五代) 초기인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후반 사이에 가장 많이 제작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차를 마시기 위한 찻잔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해무리굽완을 생산하였는데, 우리나라가 당시 중국 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에 9세기경이면 청자가 출현하였을 것으로 파악합니다.(해무리굽은 굽의 모양이 해 주위에 비낀 무리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접지면 폭이 1cm내외의 경우를 가르킨다. 이러한 도자기 굽 형식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중국과 일본에서는 각각 옥벽저(玉璧低), 쟈노메고다이(蛇の目高臺 じゃのめこうだい)로 부른다.)


   10c설은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로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의〈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와, 1989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한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 가마 출토의〈청자 순화3년명 굽높은 잔〉이 있다. 이 유물들은 고려의 시조(始祖)인 왕건을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에 쓰이는 제기(祭器)인데도 질이 좋지 않다. 따라서 왕실 제기의 제작상태가 이 정도라면 청자 제작 상황도 초기일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10세기 후반에 가서야 처음 청자가 발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더 찾아보면 10c설은 위에 보다 더 타당한 이유가 더 많은데 역시 강단 사학 놈들은 어쩌고저쩌고 하는 사람들은 도자사 관련 책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읽기는 하려나??)



그럼 10c시작 이후 청자의 변화는 나중에 설명하고 일단 청자의 종류들부터 설명하겠습니다

 



2. 청자의 종류(種類)

  청자는 장식 기법의 유(有), 무(無)와 그 구체적 특징에 따라 종류를 나눌 수 있다.


순청자(純靑磁)

   순청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청자를 말하며, 청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소멸할 때까지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절정기의 순청자는 티끌 하나 없는 청초한 빛깔, 즉 고려의 하늘빛을 담은 푸른빛 비색(翡色)과 그와 어울린 단아한 형태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상감 청자 전성기에 들어오면 그 특유의 비색이 약간 퇴색됨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직도 만들지 못하는 도자기가 바로 12세기에 만들어진 비색 청자입니다)

 

 

음각청자(陰刻靑磁)

   음각기법은 조각칼과 같은 도구로 그릇 표면에 홈을 내어 무늬를 새기는 것으로, 이러한 기법으로 제작된 청자를 음각청자라 한다. 청자를 제작하기 시작한 다음 얼마 동안은 무늬가 없는 청자가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11세기경부터 그릇 표면에 음각기법으로 무늬를 장식한 청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간단한 식물무늬를 표현하였고 이후 식물이나 동물, 자연, 그리고 상상 속의 동, 식물 등에서 얻은 다채로운 이미지를 도자기 표면에 장식하였다. 음각의 선은 가늘고 예리한 것에서 부드러운 느낌으로 변하는데 11세기 중엽 무렵부터 조각칼을 옆으로 뉘여 새기면서 선이 굵어지고 반쯤 양각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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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자 음각 연꽃넝쿨무늬 매병( 국보 9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양각청자(陽刻靑磁)

   양각청자는 무늬 주변을 조각칼로 파내어 무늬를 도드라지도록 만든 청자이다. 주로 음각기법보다 좀 더 화려한 무늬를 표현하는데 이용되었다. 양각기법 가운데 무늬가 새겨진 틀로 찍어내어 무늬를 나타내는 경우를 구별하여 인각(印刻), 양인각(陽印刻), 압출양각(壓出陽刻), 압인양각(壓印陽刻)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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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양각 모란넝쿨무늬 막새(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형청자(象形靑磁)

   상형청자는 인물이나 각종 동, 식물의 형상을 본떠 만든 청자를 말한다. 형상의 대표적인 특징만을 간결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는 실제보다 좀 더 강한 느낌을 준다. 상형 청자의 형태는 동자(童子), 연꽃, 참외, 죽순(竹筍), 복숭아, 사자(獅子), 오리, 원숭이, 상상 속의 동물 등 매우 다양하다. 고려의 상형청자들은 여러 다양한 소재들을 지나친 장식 없이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표현하여, 고려청자가 지닌 본래의 특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귀족 문화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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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자 투각 칠보무늬 뚜껑 향로( 국보 9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투각은 위에 있는 구멍 뚫린 것을 가르킵니다)    


 

철화청자(鐵畵靑磁)

   철화청자는 산화철 성분의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입혀 구워내어 무늬가 검게 나타나는 자기를 말하며, 철회(鐵繪)청자라고도 한다. 철화청자는 환원염 번조를 기본으로 하는 청자의 범주에 속하지만 산화염으로 번조되어 갈색을 띠는 예가 많다. 이 기법은 4세기경 중국 청자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 고려에서는 초기 청자로부터 나타나서 이후 독특한 장식 기법의 하나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였다. 철화청자에는 사물의 특징을 간결하면서 운치 있게 묘사한 예들이 많다. 철화청자는 기형에서 보이는 섬세한 곡선과 비취색의 색감 등을 특징으로 하는 상형청자나 상감청자와는 또 다른 미감(美感)을 제공한다. 한편 그릇 전면에 철화 안료를 바르고 유약을 입히는 기법으로 제작한 청자가 있는데 이를 철채(鐵彩)청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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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철화 버드나무무늬 병(국보 113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상감청자(象嵌靑磁)  

   그릇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그 파인 부분에 흰색 흙[白土]이나 붉은색 흙[赭土]을 메워 청자 유약을 입혀 구우면, 흰 흙을 넣은 부분은 백색 무늬로 붉은 흙을 넣은 부분은 검은색 무늬로 나타난다. 이렇게 바탕에 다른 물질을 박아 넣는 기법을 상감(象嵌)이라고 한다. 상감기법은 고려시대 이전에 나전칠기(螺鈿漆器)나 은입사(銀入絲) 공예에서 폭넓게 이용되었고, 중국에서도 비슷한 공예기법이 존재하였다. 특별히 상감기법이 고려청자에서 매우 발전된 양상을 보이며 활발하게 적용된 사실은 세계 도자사에서 주목되는 점이다. 뛰어난 수준의 상감청자 제작은 비색 유약과 더불어 고려청자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감기법의 도자편은 이미 고려 왕조 이른 시기부터 발견되는데, 12세기 중엽 이후 상감청자는 매우 화려해지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상감무늬에는 국화, 모란, 당초로부터 물가의 정경 등에 이르기까지 고려인들의 정서와 취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요새와서는 이 상감기법의 등장 시기가 거의 청자 초기로 앞 당겨지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퇴화청자(堆花靑磁)  

   붓을 이용하여 붉은 흙이나 흰 흙으로 무늬를 그리는 점에서 퇴화청자는 철화청자와 같다. 그러나 퇴화는 안료가 그릇 표면에 두껍게 발려져 무늬 부분이 도드라진다는 점에서 철화와 다르다. 고려청자에는 음각, 양각, 상감기법의 무늬 주위에 퇴화기법의 점이나 선을 곁들여 장식하거나 무늬 전체를 자연스럽게 그려준 경우가 있다.

 

동화청자(銅畵靑磁)

   동화청자는 구리가 주성분인 안료를 사용하여 무늬를 그리고 청자 유약을 입혀 구워내어 무늬가 적갈색으로 나타나는 도자기를 말하며, 진사(辰砂)청자라고도 한다. 구리 성분 안료는 번조 조건에 따라 녹색, 검은색, 붉은색 등 여러 종류로 색의 변화가 나타난다. 본래 구리는 청자를 번조하는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는 증발되어 버리므로 낮은 온도의 도기(陶器)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높은 온도에서 번조하는 자기에 붉은 색을 띠는 구리 안료를 사용하여 성공한 예는 고려시대 장인들이 세계에서 처음이었으며, 그 시기는 12세기경으로 알려져 있다. 전면에 구리 안료를 입힌 청자도 있으나, 상감기법과 병행하면서 대개 붉은 색조가 꼭 필요한 부분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비해 중국은 구리 안료의 사용이 명나라 선덕(善德) 연간(1426~1435)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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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상감 동화 모란무늬 매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채청자(金彩靑磁)

   상감청자의 유약 표면에 다시 금(金)가루로 무늬 장식을 한 것을 금채(金彩)청자라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금채청자는 대부분 13세기에 만들어진 것들로, 현재 전하는 예는 매우 드물다. ?고려사? 충렬왕 23년(1297), 원(元)나라에 금으로 채색한 옹기를 바쳤으며, 조인규(趙仁規) (1237~1308)가 원의 세조에게 화금자기(畵金磁器)를 헌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로 <청자 상감 금채 원숭이무늬 항아리>가 있다. 개성(開城) 만월대(滿月臺)의 고려 왕궁 터에서 발견된 이 항아리는 상감무늬의 인접 부분에 선을 음각하고 여기에 금채(金彩)를 하였는데, 금을 붙이는 기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마늘즙 같은 강력한 접착제를 사용하여(마늘즙이라 ㅡ.ㅡ;;;)금가루를 발랐을 것으로 보인다. 사용하면서 금분은 닳아 없어지게 된다.(참고로 유약 위에 또 무늬와 관련된 걸 바르는 걸 유상채라고 하는데 이런 방식은 일본의 청화백자에서도 나옵니다 즉 유약 위에 금가루 뿌렸는데 이게 17~18세기에 유럽을 휩쓸었죠 물론 청나라 도공들의 반격에 결국 GG)

 

연리무늬청자(練理文靑磁)  

   청자토, 백토, 자토를 섞어 반죽하여 성형한 다음 청자 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각각의 흙이 회색, 백색, 흑색으로 나타나서 투명한 유약 속에 마치 대리석 결과 같은 자연스러운 무늬가 형성되는데, 이를 연리무늬 청자라고 한다. 12세기 이후 제작되었으며, 많은 양이 제작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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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 나오지 않은 것 중에 투각청자(透刻靑磁)라는 것도 있는데 이건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 청자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보통 의자와 향로 또는 붓꽂이에 많이 적용 되더군요



   그럼 이제부터 청자의 역사에 대해서 서술해 보겠습니다~~~


일단 도자사를 언급할 때는 먼저 가마변천에 대한 언급해야 합니다. 일단 10c에 고려의 가마는 중국 월주요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벽돌가마가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 등장하고 길이가 중국처럼 40m나 됩니다. 아 일단 먼저 언급할게 흔히들 사극 같은 것을 보고서 도자기 가마가 무슨 숯가마 같이 생긴 걸로 잘못 아시는 분이 계시는데 도자기 가마는 그 내부의 높이는 상당히 낮고(지붕까지 남아 있던 공주의 분청사기 가마는 1m정도)길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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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가마 유적 전경

(가마 옆에 싸인 것은 버려진 자기 파편으로 어떤 곳은 길이 수십 m에 높이만 5m인 경우도 있다는데)

 

 

 

   하여튼 이랬던 가마가 11c~12c에 가면 한반도 남부 지역 흔히 전라북도 부안과 전라남도 강진이 대표하는 진흙가마가 대세로 바뀌고 길이는 대체적으로 20m로 줍니다.


참고로 이렇게 가마가 길면 어떻게 열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그 방법은 바로 가마에 경사를 주는 건데 보통 15~20도 정도 줍니다. 그리고 가마들 측면에 따로 아궁이들이 있는데 여기서도 불을 붙이고 벽돌이나 진흙으로 막고 작은 창 같은 것을 냅니다. 이 창의 역할은 불의 온도를 보기 위해서인데 각 측면의 아궁이들을 따라 가면서 불의 색을 보면서 불의 온도를 재고 온도가 낮으면 조그만 창에 땔감을 넣는데 안에 불의 세기가 장난 아니어서 불이 창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몇m 정도 떨어져서 나무 장작을 던져 넣습니다. 당연히 이렇게 불을 때는 사람은 전문적으로 이 일만 하는 사람들로 여러 가마를 옮겨 다닌다고 합니다.(사극처럼 도공 혼자서 모두 다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가마의 변화에 따라 생산되는 도자기들도 다른데 초기의 벽돌가마가 주를 이뤘을 당시는 중국 월주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중국식의 도자기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해무리굽 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위에서 그 개념에 대한 것은 위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가고 일단. 처음 나온 것은 사실 해무리굽 이전에 선(先)해무리굽이라는게 있습니다. 이것은 해무리굽과 비교할 때 굽 접지면 너비가 좁은 편이고 굽 폭은 해무리굽과 비슷하게 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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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리굽 완

 

   해무리굽의 경우 둘 다 다른 완에 비해 넓은 편입니다. 이 두가지 형식은 전자의 경우 거의 청자가 등장했을 때 나온 형식이고 후자는 10c중~후반에 나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이후 11c쯤에는 한국식 해무리굽이 등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건 선 해무리굽과 다르게 접지면은 넓은데 굽 폭은 좁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한국식 청자완이 등장하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내저원각이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위의 도자기들은 안쪽의 밑면이 다 곡면인데 이것은 안쪽 면이 평평하고 그러면서 꺽인 선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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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안에 검은색으로 표시한 게 내저원각입니다(그림판 만세!!) 그

리고 옆에 접시에 보면 흰 점이 보이실 텐데 제것은 내화토 비짐 자국으로 아래에 설명이 나올겁니다

 

   우리가 흔히 고려 청자의 전성기로 보는 때가 바로 이 한국식 청자들이 등장했을 때인 11c말과 13c초반입니다. 당시 관련 기록 중에는 고려에 대해서 자세하게 쓴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흔히들 고려도경이라 부르는 책으로 청자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연례연의(燕禮燕儀)조 : 그릇은 금이나 은이나 도금한 것이 많고 청도기(청자)는 값진 것으로 친다.

기명도준(器皿陶尊)조 : 도기의 색이 푸른 것을 고려인들은 비색이라고 한다. 근년에 들어와서 제작이 공교해지고 색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 모두 정요의 그릇을 모방했으며

기명도로(器皿陶爐)조 : 산예출향(사자모양의 향로) 역시 비색이다. 위에는 쭈그리고 앉아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는 연꽃이 이를 받치고 있다. 여러 물건 가운데 이 물건이 가장 정절하고 나머지는 월주의 고비색(古秘色)이나 여주의 신요기(新窯器)를 닮았다.


   위의 기록을 통해 알수있는 것은 일단 고려는 중국 남방과 북방 자기의 영향을 두루 받았다는 것과 그리고 중국에서 말하는 청자의 비색과는 다르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중국의 비색은 秘色이고 고려는 翡色입니다)

이런 고려청자의 비색을 칭찬한 것으로 유명한게 청나라 저서<학해류편(學海類篇)>에 송나라 태평노인이 지었다고 알려진 <수중금(袖中錦)>에 나온 것으로 천하제일조라는 구절에 나온 것에 보면 그중 하나가 바로 고려비색(高麗秘色)입니다. 이는 중국의 청자들을 제치고 고려의 청자가 가장 아름답다고 중국인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이 시기 도자기 제작의 중심은 청자로, 순청자(純靑磁) 계열의 무문청자(無文靑磁)와 음, 양각청자(陰, 陽刻靑磁), 그리고 상감청자(象嵌靑磁) 등이 제작됩니다. 그 가운데 질이 좋은 청자의 제작은 이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고 고려 중기에는 초기청자 시기의 제작 기술과 역량을 바탕으로 중국 각 지역의 가마들과 활발한 교류를 함으로써 고려 도자의 전개와 발전에 매우 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중국 북송(北宋)시대에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빼어난 솜씨의 청자를 만들었던 요주요(耀州窯)로부터 영향을 받아 압출양각(押出陽刻)기법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강진 이외 지역, 특히 전라남도 해남(海南) 지방의 가마를 중심으로 철화기법(鐵畵技法)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청자의 종류로는 무문과 음, 양각의 순청자 이외에 상감청자, 철화청자, 철채청자(鐵彩靑磁), 철유청자(鐵釉靑磁), 퇴화청자(堆花文靑磁), 연리문청자(練理文靑磁) 등이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 받고 있는 상감기법은 12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되어 고려 중기 청자의 세계는 한층 화려해졌고 이 시기 다양한 형상의 상형청자(象形靑磁)의 제작도 증가하였습니다. 고려 중기의 도공(陶工)들은 이전 시기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 땅의 자연과 사람들의 순박한 심성을 닮은 작품들을 생산해내었습니다. 한편 12세기에는 세계 최초로 산화동(酸化銅)을 안료로 사용한 동화청자(銅畵靑磁)를 생산하여 도자기의 색감이 한층 다양해졌고 뿐만 아니라 고려 중기에는 청자 이외에도 백자, 흑유자기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비짐 방식도 바뀌었습니다 비짐이란 유약이 바닥과 아래 있는 도자기 내지는 갑발에 늘러 붙지 않게 하기 위해 도자기를 받치는 것으로 일단 고려 초기에는 주로 저급품은 모래 비짐을 사용하고(또는 굽 밑에 유약을 바르지 않는 형식도 있습니다) 고급품은 내화토 비짐이 보입니다. 허나 중기로 가면 특히 12c중엽에는 고급품의 경우 내화토 비짐 대신 규석 받침을 쓰는 것이 확인되는데 이것은 아주 작은 돌 알갱이로 굽 안쪽에 받치고 있다. 구원낸 이후에는 규석을 쳐서 떼어냅니다.



허나 이런 전성기를 맞았고 고려 독자적인 양식을 보였던 청자는 13c중후반에 가면 예전에 비해 예술성이 떨어지고 중국적인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바로 그 이유는 몽골의 침략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려 놈들아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이봐 저건 중국군이야!!--뭐 칭기즈칸도 중국인이라는데 뭐...

 


 


   뭐 이외에도 수요계층의 엄청난 증가로 말미암아 도자기 생산이 늘어나고 그 결과 질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일단 대체적으로 원나라의 영향으로 중국식의 무늬와 기형이 많이 나타나는데 예전에 비해 창작성이 떨어지고 도식화됩니다. 그리고 편병이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군대에서 쓰는 수통의 모양하고 생김새가 같습니다.


문양에서도 용문양과 같은 중국에서 자주 쓰는 문양이 등장하고 또한 청자에 그린 그림들을 원이나 곡선 안에 가둔 액자형식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 왜구의 약탈로 인해 전라도의 강진의 도공들이 전국으로 흩어지면서 결국 고려청자는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걷고 결국은 분청사기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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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 도자기 관련 설명


도자기 쌓는 방법

   우리가 사극 같은 것을 보면 도공들이 자기를 깨는 장면이 많이 나옵는데 이것이 자기 맘에 들지 않아서 깨는 걸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실패한 것을 깨는 것인데 가장 발전된 형식인 조선 후기의 가마에서도 성공률은 10% 이하일 정도입니다. 이렇게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열을 균일하게 자기에 전달할 수 없어서입니다.


이 때문에 최대한 가마에 많은 도자기를 많이 넣는 것이 중요한데 문제는 도기와 달리 자기는 유약 때문에 늘러 붙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나온 비짐이라는 받침이 등장하고 이외에도 도지미와 갑발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이런 것들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쌓임법이 등장하는데 가장 원시적이고 낭비적인 방식은 바로 예번이라는 것으로 도자기를 하나 씩만 쌓아놓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상번(포개어 쌓기)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도자기 위에 도자기를 쌓아놓는 것입니다.(완 들이 이런 방식을 많이 씁니다)


   이것은 저급품에 많이 쓰는데 이런 도자기들의 위에 쌓여 있던 도자기의 비짐들이 자국으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이 고급품에 많이 쓰이는 갑번으로 이것은 갑발이라는 것을 이용하는 건데 갑발은 내화토로 만든 자기를 넣는 상자로 자기들을 갑발 안에 넣고 그 위에 또 자기가 들어있는 갑발을 쌓는 방식입니다.(갑발 안에 있는 자기들도 갑발에 늘러 붙지 않게 하기 위해 비짐을 받쳐야합니다) 이 갑발은 다른 도자기의 비짐 자국이 남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불에 직접 닿아 유약이 마르거나 타는 자국이 남게 하는 불상사를 줄여줍니다

 

 

아 너무 지쳐서 이 정도까지 합니다 무장공비님과 게이볼그님 방식으로 전개하려 했지만 역시 내공이 딸리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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