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자사 2---분청사기

2016. 3. 11. 14:28도자 이야기



       [한국사] 한국도자사 2---분청사기| 동양사

전상용 |  2007.07.13. 17:33



   전상용의 재미 더럽게 없는 도자사 강의 시간 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고려말과 조선초에 등장한 우리나라 고유의 자기 분청사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장공비님의 글을 읽었던 독자제헌들이여 모두 이쪽으로 주목(탕~~~무장공비님께서 전상용을 저격을 했습니다 )


1. 분청사기란?

   분청사기는 아무리 실록을 찾아봐도 기록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왜 그런지는 분청사기의 정의를 찾아보면 “분청사기는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없는 용어로, 1930년대 미술사학자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이 회청색 바탕흙[태토(胎土)] 위에 백토를 입혀 분장(粉粧)하고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 구워낸 조선 전기의 도자기를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부른 데서 비롯하였다. 즉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를 줄인 말이다.”라고 되있기 때문입니다. 즉 일제감정기에 와서 분류된 도자기인 것이죠.


  만들어진 시기는 제가 한국도자사 수업을 들었을 당시 강사님(경기도 광주에 있는 조선 관요 박물관 학예사더군요 후덜덜)의 구분에 의하면 태동기(1365~1400) 발생기(1400~1432) 발전기(1432~1469) 변화기(1469~1510) 쇠퇴기(1510~1550)  5단계로 구분하십니다 이중 태동기를 제외하면 약 150년 동안 우리나라 도자사를 주름 잡았던 도자기로 의외로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일본인들이 더 좋아했던 도자기입니다 ㅡ.ㅡ;;;


   등장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고려말 왜구님하들께서 남해안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은 것은 다들 아실겁니다. 그 때문에 당시 고급 청자의 주 생산지였던 전라남도 강진(전라북도 부안은 이미 한참 전에 망함)의 도공들의 전국으로 흩어지고 예전에 비해 청자의 질이 떨어지자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청자에 백토 분장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얼굴이 안 팔리니 화장빨로 메우는 것 이죠 ㅡ.ㅡ;;;즉 분청사기는 청자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놈이죠.


   하지만 화장도 잘하면 나름대로 천연미인보다 훨씬 예쁘듯이 이것도 의외로 청자와는 다른 미(美)를 자랑했고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국가의 사기(沙器) 사용 장려로 가마터가 늘어나면서 질이 더욱 좋아지고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사기사용을 장려한 이유는 어쩌면 유기를 제작하면서 사라지는 동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화포를 제작하면서 동이 많이 필요했는데 조선은 구리와 주석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생한 기록이 실록에 자주 등장하더군요 또 흔히들 조선초기 동전이 사용되지 않은 것을 조선정부 탓으로 돌리지만 실제로는 조선 정부에서도 동전 만들어 보급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일단 서민들이 동전보다 무명을 더 많이 화폐로 사용하고 게다가 동전 제작할 동이 모잘랐거든요)



2. 분청사기의 종류


1)상감분청사기
   상감분청사기는 고려 말 상감 청자와 별 다를 바 없는 서툴고 단순한 선상감(線象嵌)의 단계에서 점차 능슥한 솜씨의 면상감(面象嵌)으로 발전하며 과감하게 표현이 이루어졌다. <분청사기 상감 모란 연꽃무늬 대접>과 같이 역상감과 면상감기법을 함께 사용하여 무늬를 나타낸 경우도 많은데, 그릇이 하얗게 분장되어 참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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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상감 모란 연꽃무늬 대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인화분청사기

   인화분청사기의 발전은 조선 전기 거칠고 조잡하던 토산 공물의 질을 개선하고자 한 국가의 꾸준한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장인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이던 상감무늬와 비교하면 인화기법은 규격과 품질 보장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때문에 단정하고 정형화된 인화분청사기는 다른 종류의 분청사기보다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토산 공물로 많이 제작되었다.


   인화기법은 도장과 같은 틀을 사용하여 무늬를 찍고 그 속에 백토를 메우는 기법으로, 크게 보면 상감기법의 범주에 속한다. 인화 기법은 13~14세기 고려 상감청자에도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인화분청사기가 제작되면서부터 비로소 분청사기는 고유한 특징들이 갖춰지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인화분청사기는 조선 초기에는 무늬의 짜임새가 성글게 나타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조밀해진다. 인화분청사기의 발전과정은 1934년 경북 성주군 세조태봉(世祖胎封)을 옮길 때 출토된 <‘밀양장흥고’가 새겨진 분청사기 인화 국화무늬 대접>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항아리 뚜껑 및 ‘정통삼년(正統三年)’(1438)이 새겨진 태지(胎誌)가 함께 발견되었다고 하므로, 대체로 1438년경을 전후한 인화분청사기의 제작경향을 보여주는 대접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무늬의 구성이 인화 기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관청 이름을 새긴 기법과 국화무늬의 구성 등 고려 상감청자의 영향이 남아 있다. 또 인화 분청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인 <분청사기 인화국화무늬 병>은 그릇 전면에 빈틈없이 인화무늬를 베풀었는데 깔끔하고 절제된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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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인화 ‘밀양장흥고’명 접시(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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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인화 국화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조화분청사기박지분청사기(쉽게 말해 음각,양각 기법입니다)

   조화나 박지 분청사기는 상감, 인화기법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무늬 구성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화기법은 그릇에 백토를 입혀 그 위에 무늬를 선각하며, 박지기법은 무늬를 음각한 다음 무늬의 배경이 되는 부분을 긁어내어 회청색 태토와 백색 무늬가 선명한 대비를 이루도록 한다. 조화, 박지 분청사기는 물고기, 모란, 연꽃 등의 무늬가 장인의 의지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변형되거나 추상화되어 매우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느낌을 준다. 조화, 박지 분청사기가 특히 많이 출토되는 곳은 현재까지 부안 우동리, 광주광역시 충효동, 고창 용산리 등 전라도 지방 가마가 중심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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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조화 물고기무늬 납작한 병(국보 178호,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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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박지 연꽃 물고기무늬 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귀얄분청사기 

   귀얄기법은 돼지털이나 말총 등으로 만든 ‘귀얄’이라는 도구로 그릇 표면에 백토를 칠하는 기법을 말하며, 이러한 기법으로 장식된 분청사기를 귀얄분청사기라 한다. 귀얄의 힘 있고 빠른 운동감은 그 자체만으로 경쾌하고 선명한 무늬 효과를 나타낸다. 귀얄기법은 조화, 박지, 철화기법 분청사기의 바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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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귀얄무늬 발(국립중앙박물관 소장)

 

 

5)분장분청사기(=덤벙기법:백토 물에 덤벙 담갔기 때문에 이렇게도 불림)

   분장기법은 백토 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서 분장하는 것으로, 담금 또는 덤벙기법이라고도 한다. 대개 손으로 굽을 잡고 그릇을 거꾸로 담그기 때문에 굽 언저리에는 백토가 묻지 않는다. 이에 백토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자국이 생기는데 그것이 곧 꾸밈없는 격조를 느끼게 한다.

(일본에서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하는 이도다완은 위의 귀얄과 덤벙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참고로 이 두 기법으로 만들어진 도자기는 외국에서 오히려 웬만한 청자와 백자보다 더 비싸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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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덤벙무늬 제기(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6)철화분청사기 

   철화분청사기는 백토 분장한 그릇 표면에 산화철료로 무늬를 그린 것으로 철회(鐵繪)분청사기라고도 한다. 비교적 사실적이면서 해학적인 무늬와 간략하며 극도로 추상화된 무늬의 두 종류가 있다.

   분청사기 제작 후반기에 유행한 일부 철화분청사기는 다소 퇴락한 양식을 지니는데, 거친 태토를 감추기 위하여 백토를 매우 진하게 입히며 제작 기법이 다소 거칠어 굽바닥에 굵은 모래 받침 자국이 있는 예들이 많다. 현재까지 철화분청사기 가마터는 충청남도 공주 학봉리 계룡산 기슭에 많이 분포된 것으로 조사되어 흔히 ‘계룡산 분청’ 이라고도 부른다.(특히 쏘가리문이 특징적으로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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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철화 물가 연화 물고기 새무늬 장군-->장군은 위와 같이 생긴 자기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이외에도 특별한 제작기법은 아니지만 명문(銘文)이 상감이나 인화로 새겨진 분청사기도 많은데, 명문에는 그릇을 사용할 관청의 이름이나(관사명 분청) 생산지와 관청의 이름을 합친 것, 이외에 도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편년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제작지를 알려주는 등 분청사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이렇게 관사명이나 생산지의 이름을 쓴 이유는 일단 자기를 빼돌려서 팔거나 쓰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고 도공들이 대충 제작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종 17년(1417)

“각 관청에 납품하는 사목기(砂木器)에는 해당 관청명을 새겨 상납하게 하여 관물(官物)을 훔치지 못하도록 하라”


세종 11권, 3년( 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4월 16일 무신 5번째기사

공조에서 진상하는 그릇에 장인의 이름을 써 넣을 것을 건의하다


공조에서 계하기를,

“진상하는 그릇은 대개 마음을 써서 튼튼하게 제조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래 가지 않아서 파손되니, 지금부터는 그릇 밑바닥에 만든 장인(匠人)의 이름을 써 넣어서 후일의 참고로 삼고, 마음을 써서 만들지 않은 자에게는 그 그릇을 물어 넣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당연히 이 이후부터는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그릇을 만들고 중간에 그릇을 빼돌리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3. 분청사기의 전개와 양식변천


분청사기의 흐름을 간단하게 위의 5단계로 살펴보면


1)태동기(1365~1400)

   청자 상감문양과 기형의 해체 및 변모, 14C강진 청자가마 전국 확산으로 분청사기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이때 당시 대접과 매병을 보면 대접의 경우 기존의 포류수금문,연당초무늬 등이 생략되고 아예 몇 줄의 선만 돌리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매병은 흔히들 청자 관련 사진에서 자주 보시는 어깨가 정장 입으신 형님(?)이나 깍두기를 닮은 병으로 원나라의 영향으로 어깨선의 높이가 낮아졌는데 이 때는 더욱더 낮아지고 병 가운데 부분이 더욱더 날씬해지고 어깨 부분에는 간략한 만(卍)자문,연판문만 새기게 됩니다.


2)발생기(1400~1432)

   분청사기의 인화문이 발생할 때이고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또 이때는 정부에서 전국의 도기소와 자기소를 파악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온걸로는 도기소는 185곳이고 자기소는 139곳이고 이런 도기소와 자기소에서 생산하는 그릇의 품질까지도 표시해났습니다.


3)발전기(1432~1467)

   일곱가지 분청사기법이 모두 쓰이는 때로 엄청난 분청사기의 절정을 맞습니다. 그리고 이때 집중적으로 관사명사기가 등장합니다.


4)변화기(1467~1510)

   변화기를 맞이한 이유는 조선 조정에서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 분원 즉 관요를 설립하면서부터입니다. 관요란 국가에서 운영하는 도자기 공장으로 1467~1468년경 왕실 진상용 백자의 제작하게 되면서 백자는 더욱더 융성하게되고 분청사기의 질은 떨어지게됩니다.(광주 관요에 대한 설명은 백자때 자세하게~~)기법도 귀얄-덤벙이 증가합니다.


5)쇠퇴기(1510~1550)

백토귀얄만 남고 결국 백자화로 진행합니다.



4. 분청사기 가마터


   당시 가마터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폭과 길이가 들쭉날쭉한데 이는 아직 국가가 혼란스러워 제대로 표준화된 가마터를 만들도록 규제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가마터를 꼽아보면


1)공주 학봉리

규모-길이:18~21m 폭:1.2~1.5m (가마의 경사는 보통 15~20도 사이입니다)

운영시기-1420~1536년

편년자료-세종실록(동학동자기소),묘지석(1487년,1536년)


위에서 말했던 철화분청이 등장하는 곳이 이곳입니다. 이 가마유적의 번조실(도자기를 굽는 방)살펴보면 중간 중간에 불기둥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불 기운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분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2)광주 충효동

규모-길이:20.5m 폭:1.3m

시기-1420~1510년

편년자료-성화 정유년(1477),‘어존’명 마상배(어존이라는 한글이 있음 훈민정음 반포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고창 용산리

규모-길이25.6m 폭1.5m~1.63m

시기-15C중후반

유물-조화,박지 다수 남음


   특징-지붕이 남아있어 당시 가마의 높이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학계의 가설을 깨뜨린 가마로도 유명한데 그 이유는 계단식의 가마구조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계단식 다실 등요는 조선후기에 주로 나오는 가마구조여서 후기에 등장한 줄 알았는데 고창 용산리의 가마는 이미 전기부터 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계단식이 유리한 점은 아까 위에서 말한 불기둥과 같이 열이 빨리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골고루 분산시킬 뿐 아니라 열이 위로 가는 성질을 이용 천장에 열기를 닿게 한 다음 그 열이 천장의 곡면을 타고 내려오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비교될 만한 가마는 중국 경덕진의 가마인데 이 가마는 우리나라처럼 긴 가마가 아닌 높게 만든 가마로 열기가 상승한다는 것을 이용해서 만든 것인데 이는 중국쪽 내화토가 우리나라보다 단단하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형식을 적용하기 어렵기에 이런 계단식 가마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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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왼쪽에 나온게 번조실이 다수인(다실)계단식의 등요(지붕이 있는 가마)입니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옆에 장작넣는 곳은 아궁이 불만으로는 끝까지 온도 유지를 못하기 때문에 옆에서 또 불을 때우는 것입니다. 물론 불을 소성을 할 때는 벽돌 같은 걸로 막고 작은 창에다 장작을 던져 넣죠

 

그리고 오른쪽에 보면 여러 도구가 나오는데 그중 제가 전에 설명했던 갑발이 나올 겁니다. 그 갑발을 이용해 아래와 같이 구울 때 저 안에 넣어서 쌓고 굽는 것으로 고급 자기들은 갑발을 이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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