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자사 3---조선백자

2016. 3. 11. 15:15도자 이야기



       [한국사] 한국도자사 3---조선백자| 동양사

전상용 | 조회 851 |추천 1 | 2007.07.18. 01:11


 

   후 뭐 언제나 그렇지만 제 글에는 리플이 없군요 역시 재미없는 전상용의 도자사 시간이니 그런가 ㅜ.ㅜ(솔직히 말해서 니 글에 리플이 많이 달린적 있었니??)


뭐 어쨌든 게이볼그님과 무장공비님 짝퉁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번 시간은 바로 두두두두두두둥 조선 백자입니다!!!


조선백자(朝鮮白磁)


----->여기서 지금까지 제가 쓴 도자사 글을 본 독자제헌(무장공비님이 자주 쓰시는 표현이어서 근데 무슨 뜻인가요?)지금까지 그냥 청자,분청사기라고 했는데 왜 백자는 갑자기 조선을 붙이는 겨? 이때까지 다른 자기들은 나라 이름 붙이는 거 까먹은 것 아녀하고 돌 던지실 것 같아서 답을 하자면 청자에서도 언급되지만 백자라는 것은 고려 시대에도 생산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자처럼 당시 주력 자기도 아니고 질도 떨어지기에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습니다.


   허나 시대가 바뀌고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당시 중국의 대세는 백자(그중에서도 코발트 쳐 바른 청화백자)였고 이에 영향을 받은 조선인들도 백자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청자는 이미 쇠퇴할 때로 쇠퇴하여 이미 분청사기로 넘어간 단계였고요 그래서 다른 자기들은 굳이 나라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지만 조선 백자는 고려시대 것과 분리해야 하기에 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1. 백자의 개념(槪念)

  백토(白土)로 그릇의 형태를 만들고 그 표면에 여러 가지 장식을 한 다음 투명한 백색 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도자기를 말한다. 백자의 색은 유색으로 좌우되는데, 유색은 수백 가지가 넘는다. 보통 눈빛과 같이 흰 설백색(雪白色), 뽀얀 우유빛과 같은 유백색(乳白色), 그리고 각각 흰 가운데 푸른빛과 회색빛이 감도는 청백색(靑白色)과  회백색(灰白色) 등으로 구분한다. 백자의 유색은 순백색의 태토에 투명유를 씌운 것이 이상적이지만 포함된 광물질의 성분에 따라 미묘한 색 변화를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으로부터 고려시대 초기부터 청자 제작기술과 함께 백자 제작기술이 전래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백자는 조선시대보다 굳기가 덜한 연질계(軟質系) 백자로 청자와 비교할 때 적은 양이 생산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연질계 백자 전통과 명(明)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경질계 백자가 공존하였다. 이후 경기도 광주의 관요(官窯)를 중심으로 양질(良質) 백자가 생산되었고 광주 이외 지방에서는 다소 질이 떨어지는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일단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백자인데 여기에 안 나온 청자와의 차이를 말하면 일단 백자는 온도의 경우 청자에 비해 약간 높은 1300도 내외(청자는 1250도 내외)에서 굽습니다. 그리고 백자는 청자보다 철분 함유량이 훨씬 적어 자기편을 보면 단면이 청자에 비해 약간 더 회색이나 흰색을 띄고 있습니다.


2. 백자의 종류(種類)


1)순백자(純白磁)

   순백자는 순수한 백색의 자기라는 뜻으로, 그 질(質)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려 백자의 계통을 이른 것으로 유백색의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대략 15세기까지 제작되었다. 다른 하나는 중국 원, 명(元, 明)시대 경질(硬質) 백자의 영향을 받아 희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경질 백자로 약 15세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는데, 현재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백자가 바로 이 계통이다. 단아하며 고상한 기품의 순백자를 선호하였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백자를 평가할 때에 순백색을 우선으로 꼽았으며, 이에 따라 순백자는 조선시대 말까지 조선 백자의 중심을 이루었다.

   조선 초의 학자 성현(成俔) (1439~1504)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백토를 이용하여 자기를 만들었어도 정치하게 번조하여야만 사용할 수 있다. 세종대의 어기(禦器)는 오로지 백자를 사용하였다”는 15세기의 정황을 언급하고 있다.

또 ?점필재집(佔畢齋集)?에서 김종서(金宗瑞)(1390~1453)가 경상도 고령을 방문했을 때 밥상 위에 놓인 백자의 색에 심취하여 몇 번씩이나 고령의 백자가 아름답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조선시대 사람들이 순백색의 백자를 깊이 사랑하였으며 이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자의 색은 품질에 따라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 우윳빛과 같은 유백색, 눈같이 흰 설백색, 회색을 머금은 회백색, 푸른색이 감도는 청백색, 산화되어 적갈색을 띤 백색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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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발(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상감백자(象嵌白磁)

   상감백자는 단단한 정도에 따라 연질(軟質)과 경질(硬質)의 두 갈래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릇 표면에 가는 금이 그물처럼 번져 있고 부드러운 우윳빛을 띠는 연질 상감백자는 고려 백자의 맥을 이은 것으로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가마에서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릇의 모양이나 무늬가 상당히 세련되었다. 반면 경질 상감백자는 경기도 광주 일대 15세기 가마터에서 주로 발견된다. 상감백자의 무늬는 중국 명(明)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은 짜임새 있는 넝쿨무늬와 분청사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탈한 넝쿨무늬, 두 종류의 계열이 있다. 상감백자의 제작 시기는 15세기경에 집중되어 있으며 16세기에는 소멸되었다.

(고려의 상감 청자의 전통을 이은 백자지만 결국 주류로 포함되지 못하고 일찍 소멸하는 백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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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상감 꽃무늬 납작한 병(국보 172호, 삼성미술관 소장)



 

3)청화백자(靑畵白磁)

   청화백자는 코발트가 주성분인 안료를 사용하여 도자기 표면에 푸른색 무늬를 그린 백자를 말한다. 제작 연대가 가장 이른 청화백자로는 세조(世祖)의 장인인 윤번(尹璠)(1384~1448)의 부인 인천 이씨(仁川李氏)(1383~1456)의 묘에서 나온 <백자 청화 묘지석>이 있다. 세조 2년(1456)의 제작 연도가 적힌 이 묘지석은 청화의 발색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연대가 이른 청화 백자이다. 그러므로 이 묘지는 우리나라 청화백자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이러한 자료로 미루어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늦어도 15세기 중반부터는 청화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당시 코발트는 중국에서도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지역에서 수입하는 거였고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해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즉 상당히 비싼 재료이기에 1460년대 세조 연간을 중심으로 재료의 국산화를 시도하고 이는 18c에 국내에서 코발트 광산이 개발되면서 해결이 되고 이 이후부터는 전기에 귀하였던 청화백자가 후기에는 엄청나게 생산되면서 오히려 조선 후기에는 순백자가 더 귀한 현상까지 벌어집니다.(그래서인지 조선 전기에는 청화백자 중에는 궁중의 화원들이 직접 그린 문양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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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청화 묘지석(인천 이씨<1456년> 묘 출토,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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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청화 매화·새·대나무무늬 항아리( 국보 17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철화백자(鐵畵白磁)

   철화백자는 산화철 안료를 사용하여 흑갈색 무늬를 그린 것으로 철회(鐵繪)백자라고도 한다. 철화백자는 15세기 중반경부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되었다. 특히 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로 정국이 불안하였고 전국의 가마가 파괴된 상태여서 청화백자의 안료인 코발트를 구하기 힘들었다. 반면에 철화 안료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17세기에는 철화백자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석간주(石間硃)로 통칭되는 이 적갈색 철화백자는 생활 자기로도 생산되어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 말까지 일반 서민들도 애용하였다. 15~16세기의 철화백자는 대체로 양질 백자에 궁중 화원의 세련된 솜씨로 무늬가 그려진 작품들이다.(하지만 18c 코발트 광산이 개발되고 조선의 경제상황이 나아지면서 청화백자가 대량생산되자 상대적으로 철화백자의 생산량은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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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철화 대나무·매화무늬 항아리(국보 166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5)동화백자(銅畵白磁)

   동화백자는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구리 성분 안료로 그림을 그리거나 그릇 표면에 칠을 한 백자를 가리키며, 달리 진사(辰砂)백자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도자기에는 붉은색으로 장식한 예가 매우 드물다. 고려청자 중에서도 동화청자는 그 수를 꼽을 정도로 희귀하다. 조선시대에는 전기와 중기에 붉은 색으로 장식한 백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실제 남아 있는 작품은 거의 없고, 대체로 18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된 듯하다.


동화 백자가 많이 쓰이지 못한 이유는 동의 경우 번짐이 심하기 때문에 성공확률이 다른 안료에 비해 더 낮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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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청화 동화 장생무늬 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외에도 백태청유자와 같은 특이한 자기도 나오는데 이는 백자 태토(바탕흙)에 청자 유약을 바른 자기입니다.





3. 조선 백자의 산실(産室), 분원(分院)


   분청사기 편에서 잠깐 언급이 있었지만 조선 조정은 1467~1468년에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 분원 즉 관요를 만듭니다.(사옹원 산하 기관으로 종8품의 봉사가 파견됩니다)


   관요란 국가에서 만든 도자기 공장으로 당시 광주 관요에 일하는 도공(당시는 사기장이라 불렀음)은 380명으로 28개 직급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 직급 수비를 잘하는 사람과 성형을 잘하는 사람 그리고 불을 잘 때는 사람 등과 같이 각자 전문 분야에 따라 맡은 일을 하는 분업을 합니다.


   당연히 이 광주 관요는 왕실에서 쓸 고급 백자를 만드는데 주력하는 곳이지만 성종 이후부터는 분원의 백자가 불법으로 서민들에게서 사용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성종 연간(1469~1494)에 사대부와 거상 부호의 사가(史家)에서 중국 청화백자를 무역하여 널리 애용하고, 중종 연간(1506~1544)에는 평안도, 함경도까지 백자의 사용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지방의 집권계층도 분원 백자를 구입하는 상황 즉 백자가 인기를 얻으면서 분원 백자가 유출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초반에는 크게 단속하려 하다가 조정 경제가 어려워진 시기에는 눈감아주기도 합니다.


   경기도 광주가 최상품의 백자를 구워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으로 여러 지방의 질 좋은 백토가 공급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좋은 태토인 광주토(廣州土)와 풍부한 땔감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수도인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완성된 백자는 한강을 이용하여 왕실로 수월하게 운반할 수 있었고 이렇듯 도자기 생산지로서 광주는 최적의 입지를 갖추었고 광주는 조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자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초반에는 광주 내에서도 관요가 계속 이동을 하는데 이는 자기를 구울 때 상당히 높은 온도가 필요하여 많은 땔감을 소모하기 때문입니다(고려시대에 언급은 없었지만 당시 가마도 계속 이동을 합니다)하지만 후기에 와서 한강 상류에 있는 나무를 뗏목으로 만들어 운반하는 방법이 발전하면서 땔감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면서 결국 지금의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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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의 이설(移設)에 따라 관요가 위치했던 광주시 내의 지역들

 


4. 조선백자의 변화


   조선 백자도 전기-중기-후기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데 전기의 경우 관요의 설립으로 인해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이행하기 시작하고 질 좋은 백자가 많이 생산되지만 이곳에서 생산하는 것은 왕실로 제한되어 있었고 주종은 순백자였고 청화백자는 당시에는 상당한 고급품이었습니다. 특히 최고급품들은 굽 아래에 천(天)지(地)현(玄)황(黃) 등과 같은 한자가 써져 있습니다.(물론 천-지-현-황은 화포의 크기나 각궁의 장력 구분과 마찬가지로 품질을 구분하는게 아닙니다. 자기의 경우 어떤걸 기준으로 천,지,현,황으로 구분하는지는 저도 배우질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중기에는 양란의 영향으로 인하여 자기의 질이 떨어지고 17c 코발트를 수입하지 못하면서 청화백자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그에 대한 대체품으로 철화백자가 부상하게 됩니다. 또한 광주 관요는 땔감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하여 10년을 주기로 이설(移設)을 하게 됩니다. 이 당시 문양은 상당히 소박하고(정확히는 간단한)자유분방하게 나타납니다.


   후기 특히 18c 이후에는 조선이 경제적,문화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코발트 광산이 개발되면서 다시 청화백자가 등장한 정도가 아니라 남발이 되면서 청화백자의 생산과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백자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상인들이 관요의 백자생산에 개입하면서 분원 백자의 질이 예전에 비해서는 떨어지고 결국 1884년에 사옹원 분원은 결국 민영화 됩니다.





5. 가마의 변화와 제작변화


   가마의 변화는 그렇게 크게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 사실 분청사기 때 약간 언급을 했습니다. 일단 조선 전기의 가마는 분청사기와 같이 계단식이 아닌 오름 등요가 주종을 이룹니다. 하지만 후기에 가면 15c 공주에서 등장하는 것과 같은 계단식 오름 등요가 주종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종전과 비교해 열이 잘 분산되기에 자기 제작의 성공률을 높여주었습니다.(그래도 10%이하였지만)


   제작 변화에서는 청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구울 때 굽을 받치는 비짐들이 변하는데 15c에는 저급품은 주로 태토비짐과 굵은 모래 비짐을 같이 사용하는데 태토비짐은 13c 이전 고려 청자의 내화토 비짐과는 달리 그 크기가 크기 때문에 비짐을 때려서 떼어내야 하는데 문제는 이때 굽의 일부가 같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안타깝게도 태토비짐에 관한 사진자료가 없습니다)고급품의 경우 고려처럼 규석을 쓰지는 않고 가는 모래를 주로 씁니다.

그러다 후기로 가면 태토비짐이 사라지고 저급품은 굵은 모래 비짐을 쓰고 고급품은 가는 모래를 씁니다.


   기형에서도 차이가 많은데 전기의 경우 고려시대 특징적인 매병(어깨가 큰 병)은 사라지고 목은 짧고 동체는 볼록하고 굽이 위에서 아래로 향할 때 직각이거나 약간 밖으로 향한 것이 나오고 굽의 높이가 높았지만 후기로 가면 목이 길어지고 볼록한 동체는 점점 아래로 내려옵니다.

또한 후기에 가면 고려시대 한국식 청자에 등장했던 내저원각이 나타나는데 고려시대와는 달리 한번 꺽은 후에 안쪽이 완전하게 평평한 게 아니라 안쪽에 곡면이 남아 있는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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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용의 재미없는 도자사 강의는 여기서 끝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배움이 짧아서 부족한 게 많은 글이지만 우리나라 도자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자료를 알고 싶으면 韓國陶磁史(한국도자사)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아래는 추가로 올리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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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청화 동채 금강산 모양 연적(해강도자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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