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6) ‘인간 자율성’ 침해한 강제 급식

2016. 3. 12. 02:08건강 이야기


      

[황상익의 의학 파노라마](6) ‘인간 자율성’ 침해한 강제 급식

황상익 | 서울대 의대 교수·의사학

ㆍ시국사범 단식 때 했던 ‘강제 급식’ 고문, 전두환에게도 할 뻔


영국 여성운동가들이 처음으로 강제 급식의 폭력성을 폭로한 1909년 10월29일자 ‘여성 참정권 신문’. 한 피해자는 이렇게 진술했다. “고막은 터져나가는 것 같고, 목과 가슴에 끔찍한 통증이 있었다. 급식 튜브는 가슴뼈 아래 50㎝ 속으로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강간당하는 것 같았다.” .

영국 여성운동가들이 처음으로 강제 급식의 폭력성을 폭로한 1909년 10월29일자 ‘여성 참정권 신문’.

한 피해자는 이렇게 진술했다. “고막은 터져나가는 것 같고, 목과 가슴에 끔찍한 통증이 있었다.

 급식 튜브는 가슴뼈 아래 50㎝ 속으로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강간당하는 것 같았다.” .



▲ 일제 잔재로 투쟁 의지 꺾기 위한 일종의 고문… 공교롭게 전두환 수감 시절 단식에 적용하려다 중단…그 과정 통해 정부서 처음으로 실체 시인


1981년 5월5일 영국 하원의원 보비 샌즈(Bobby Sands, 1954~1981)가 북아일랜드 메이즈 교도소 병원에서 사망했다. 영국으로부터 북아일랜드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급진적인 ‘임시 에이레 공화국군’ 활동가인 샌즈는 3월1일부터 정치범 인정과 처우 개선이라는 조건을 내걸고 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개시했다. 단식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아일랜드 한 지역구의 하원의원이 사망하는 일이 생겼고, 거기에 샌즈가 옥중 출마해서 4월9일 당선되었다.


단식을 계속하다 혹시 사망이라도 한다면? 샌즈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진 만큼 세계인의 관심과 우려도 커졌다. 우리나라 언론도 4월 하순부터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이성적 대응을 기대하는 세계 여론과 달리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샌즈의 요구를 깡그리 무시하고 왜곡했다. 샌즈는 정치범이 아니라 불법으로 총기를 소지한 폭력사범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전해 이미 남성 7명, 여성 3명의 수감자들이 53일간 1차 단식투쟁을 벌였다. 동지들이 이루지 못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2차 투쟁에 나선 샌즈의 퇴로는 없었던 셈이다. 어깨까지 드리운 금발 고수머리에 미소 띤 얼굴로 자못 호감을 자아냈던 27세의 청년은 단식 66일 만에 평소 71㎏에서 39㎏의 피골만 상접한 ‘90세 노인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았다. 단식 중단을 호소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특사가 며칠 전 전달한 금 십자가를 손에 꼭 쥔 채. 그리고 샌즈와 마찬가지로 모두 20대인 동료 9명이 5월12일부터 8월20일까지 뒤를 따랐다. 단식 기간은 46일부터 73일까지였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북아일랜드의 진정한 평화를 소망하는 발걸음과 행사가 전 세계적으로 그해 내내 이어졌다.


14년 뒤 한국에서도 옥중 단식투쟁이 있었다. 제11대와 제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시민 학살 주범으로 1995년 12월3일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자마자 항의하는 뜻으로 단식을 시작한 것이다. 전두환의 단식은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다. 전두환이 창당한 민정당 후신 신한국당(현 새누리당)도 “학살로 정권을 찬탈한 자가 정당한 법집행을 정치보복으로 주장하는 것은 국민 모욕”이라며 자신들은 무관한 양 비난을 퍼부었다. 단식이 며칠 계속되자 정부는 전두환에게 강제로 급식할 의사를 내비쳤다.


“법무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7일 ‘전두환씨의 단식이 계속된다면 재소자를 건강하게 보호해야 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행형법에 따라 강제 급식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전씨에게 강제 급식을 할 땐 교도관 10여명이 전씨의 팔다리와 머리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코를 막아 숨을 쉬지 못하도록 한 뒤 고무호스를 입에 넣어 미리 준비한 죽을 넣는 통상적인 방식을 적용할 계획이다. 이 관계자는 강제 급식을 할 땐 재소자의 나이와 건강상태 등을 미리 점검해 탈진상태에 이르렀는지를 먼저 알아보며, 보통 단식 시작 10여일 뒤 강제 급식을 하나 전씨는 고령인 점을 고려하면 더 일러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강제 급식은 과거 시국사범들에게서 고문의 일종이라는 등으로 거세게 비난받았던 점을 고려해 전씨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는 경우에만 할 것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한겨레 1995년 12월8일자)



■ 고무호스에 죽물 묻혀 넣었다 뺐다 괴롭혀


전두환은 12월24일 식사를 재개해 단식은 21일 만에 끝났다. 그에 따라 정부가 강제 급식을 할 필요도 사라졌지만, 이 과정을 통해 적지 않은 진실이 드러났다. 그때까지 정부가 한 차례도 시인하지 않았던 교도소 내 강제 급식이 사실일 뿐만 아니라 ‘통상적인 방법’까지 법무부 고위관계자의 입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또한 정부가 강제 급식의 시행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점도 알려졌다.

샌즈의 단식 때 영국 정부도 강제 급식을 고려했을 것이다. 사망으로 인한 여론 악화와 강제 급식이 낳을 파문을 저울질하다 결국 사망 쪽을 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국에서는 그만큼 강제 급식이 정치적으로 크게 부담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에서 수감자들이 옥중 항거의 수단으로 단식을 감행하고 거기에 대해 당국이 강제 급식으로 대처한 가장 유명한 일련의 사건은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활동이다.


남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영국 여성운동가들은 1909년쯤부터 투옥되면 단식투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여성 단식자들의 건강이 악화되면 석방하곤 했던 당국이 단식자 수가 늘어나자 강제 급식 조치를 취했다. 극적인 것은 인도 총독을 지낸 로버트 리튼의 딸 콘스탄스 리튼의 경우다. 콘스탄스는 두 차례 체포되었지만 집안 배경 덕분에 곧 풀려나는 특별대우를 받곤 했다. 1910년 그녀는 초라한 복장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체포되자 제인 와튼이라는 노동자로 위장했다. 그녀가 단식을 하자 교도소 당국은 건강상태도 확인하지 않은 채 강제 급식을 시행했고 심장이 약했던 그녀는 얼마 뒤 심장마비와 뇌졸중이 오면서 오른쪽 반신마비가 되었다. 이전 뉴캐슬 감옥에 콘스탄스로 갇혔을 때 감옥의사는 그녀의 심장이 허약하다고 진단한 반면, 제인으로 수감된 리버풀 감옥의 의사는 심장이 완전히 정상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콘스탄스가 옥중 체험을 왼손으로 써서 ‘타임스’에 기고하고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들의 폭로가 이어지자 강제 급식에 대한 비난이 거세게 일어 1913년부터 강제 급식은 중단되었다.


영국에서 강제 급식이 중단되었지만 식민지 아일랜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다 기어코1917년 토머스 애쉬라는 아일랜드 독립운동가가 더블린 감옥에서 강제 급식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생겼고, 애쉬의 죽음은 독립투쟁에 더욱 거센 불길을 지폈다. (북)아일랜드 저항운동에서 강제 급식은 이렇듯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라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비전향 장기수 손윤규씨 ‘강제 급식’ 사망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자. 앞서 언급했듯, 1995년 전두환의 단식 과정에서 정부는 강제 급식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그때도 구체적인 사건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기관이 강제 급식으로 인한 사망을 확인한 사건은 단 한 건뿐이다. 2004년 7월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비전향 장기수’ 3명이 유신정권 시절 교도소 내 ‘사상 전향 공작’ 과정에서 사망했으며, 그 가운데 손윤규(1923~1976)의 사망 원인은 강제 급식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위원회에 따르면, 대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손윤규는 1976년 3월25일 전향을 강요하며 벌이는 폭행에 항의해 단식에 들어갔으며 3월27일부터 4월1일까지 세 차례 강제 급식을 당한 뒤 건강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어 4월1일 오후 7시쯤 사망했다. 당시 강제 급식에 참여했던 교도소 직원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철제의자에 몸을 묶고 오리주둥이같이 생긴 개구기(開口機)를 강제로 쑤셔넣어 입을 벌린 후에 깔대기가 달린 고무호스 끝에 죽물을 묻혀 목구멍에 여러 번 넣었다 빼었다 반복해서 숨을 못 쉬게 괴롭힌다. 그래도 항복하지 않으면 고무호스를 위장까지 집어넣어 왕소금이 들어간 죽물을 부어넣는다.”(1사하 담당 I씨), “당시 강제 급식은 행형법에도 없는 일제 잔재였다. 비전향 장기수가 항의할 수 있는 방법은 단식밖에 없었다. 그 단식을 꺾어버리기 위해 일종의 고문수단인 강제 급식을 행했다.”(의무과 직원 H씨)



■ 폭력성과 야만성에 ‘도쿄선언’서 금지


의학적으로 강제 급식의 위험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강제’ 급식은 의학과 의사의 기본적 윤리를 규정한 ‘뉘른베르크 강령’(1947년)‘헬싱키 선언’(1964년)에서 가장 강조한 인간의 ‘자율성’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회에서 언급한 ‘도쿄 선언’(1975년)도 강제 급식을 금지했다. 세계의사회는 그 뒤에도 ‘단식 투쟁자들에 대한 몰타 선언’(1991년)을 비롯해 여러 차례 같은 입장을 천명했다.


우리나라의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에는 다음 조항이 있다. “제40조(수용자의 의사에 반하는 의료조치) ① 소장은 수용자가 진료 또는 음식물의 섭취를 거부하면 의무관으로 하여금 관찰·조언 또는 설득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 ② 소장은 제1항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용자가 진료 또는 음식물의 섭취를 계속 거부하여 그 생명에 위험을 가져올 급박한 우려가 있으면 의무관으로 하여금 적당한 진료 또는 영양보급 등의 조치를 하게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강제 급식을 금지한 ‘도쿄 선언’에 부합하는가. 손윤규에게 행했던 강제 급식은 이 조항에 비춘다면 정당한가. 재판도 없이 관타나모 미군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들에게 행해지는 강제 급식은, 미국 정부의 주장처럼 생명을 존중하는 조치인가.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