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2016. 3. 15. 19:33美學 이야기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 韓國畵갤러리

芝菴 2010.04.30 09:45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이인문(李寅文)은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로서,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문욱(文郁), 호는 고송류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또는 유춘(有春)이다. 도화서 화원으로서 첨절제사(僉節制使)라는 벼슬을 지냈다. 김홍도(金弘道)와 동갑으로 함께 도화서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고, 당시 문인 화가였던 강세황, 신위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산수, 영모(翎毛), 포도, 도석인물화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당시 크게 유행하였던 진경산수나 풍속화보다는 전통적인 소재를 즐겨 그렸다. 특히 소나무를 많이 그려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길이가 8m 56cm에 달하는 거작으로 그의 회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단발령 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강촌청우도(江村晴雨圖)> 를 비롯한 많은 산수화가 전해지고 있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1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2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3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4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도봉원장



 

송계한담 (松溪閑談)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blog.daum.net/lation/5466201   松 芝 齋






강산무진도 | 미술

억스 2012.07.16 09:33
http://blog.daum.net/kimuks/7533743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강산무진도


조선 후기 도화서에서 가장 뛰어난 화가 중 한 명이었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화가의 관록이 묻어있는 한국 회화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걸작 중 하나입니다.

 

 


   현실은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소중한 터전이지만, 늘 누구에게나 고되고 녹녹치 않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로부터의 잠시나마 탈출을 꿈꾸고 그 꿈은 너무나 달콤하다. 18세기를 살았던 조선의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이상향을 꿈꾸었다. 그 꿈의 여정은 그림 속에서 펼쳐졌다. 그들에게 이상향은 정신적인 도피처이자, 어쩌면 평생 도달할 수 없는 별천지이기도 했다. 이인문(李寅文, 1745~?)은 10m에 가까운 가로로 긴 종이 위에 끝없이 펼쳐지는 자연과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렸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라 불리는 그림은 이상향을 간절히 찾는 조선 사람들의 내면을 반영한 그림이 아닐까 생각된다.

 


강산무진도(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 부분/이인문/

조선18세기/ 43.8cm x 856.0cm/ 국립중앙박물관소장

 

 

한국 회화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걸작, 강산무진도


   [강산무진도]는 횡권(橫卷)으로 비단 바탕에 먹과 담채로 그려졌다. 그림 부분의 크기만 해도 세로가 43.8.0cm, 가로가 856.0cm에 달하는 대작이다. 상당히 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5개의 비단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다. ‘강산무진도’라는 제목은 장황의 겉면 제첨(題簽)에 쓰여져 있으나, 제작 당시의 것은 아니다. 즉 이인문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 붙인 제목은 아니고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그림의 맨 끝에는 ‘이인문문욱도인야(李寅文文郁道人也)’, ‘김정희인(金正喜印)’ 등의 도장이 찍혀 있다. 문욱(文郁)은 이인문의 자(字)이고 도인(道人)은 이인문의 호,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觀道人)’을 줄여 쓴 것이다.

 



   신위(申緯, 1769~1847)는 “왕을 모시던 화사 중 뛰어난 이로 이인문과 김홍도(金弘道, 1745~?)가 있었는데, 덧없이 김홍도는 세상을 떠났고 이인문만 남았다”는 기록을 했다. 이를 통해 18세기중후반경 김홍도와 이인문이 궁중화가 가운데에서는 손꼽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인문과 김홍도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화가로, 비슷하게 궁중의 도화서 화원이 되어 나란히 두각을 나타냈으며 서로간의 친분도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둘의 관계를 그림을 통해 확인된다. 김홍도가 그린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에는 이인문이 감상하였다는 글이 남겨져 있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는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김홍도가 화제를 쓴 합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장기는 달랐다.

 



   김홍도이인문 모두 산수화면 산수화, 인물화면 인물화,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소화해냈지만, 김홍도는 무엇보다도 서민들의 생활이나 정서를 주제로 한 풍속화를 선구적으로 그렸던 데에 반해, 이인문은 필묵의 기량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 산수화에 원숙한 역량을 발휘한 화가였다. 가깝게 지내면서도 상반되는 취향의 그림에 각각 장기를 발휘했던 두 사람은 전대의 ‘겸현(謙玄)’ 이라 일컬어졌던 겸재 정선(鄭敾, 1676~1759)과 현재 심사정(沈師正)처럼 화단의 쌍벽을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 땅을 그린 진경산수화 로 유명한 정선과 우리 현실을 그린 풍속화로 유명한 김홍도의 그늘에 가려, 심사정과 이인문은 그들이 활동했던 당시의 유명세를 지금은 거의 다 잃은 듯 하다. ‘한국적인 미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개성도 약하다는 지적은 김홍도의 그늘에 이인문이 가려져 버린 이유를 말해준다. 그러나 당시에 이인문은 도화서 화원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이인문이 그렇게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지는데, [강산무진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궁금증이 해소된다. [강산무진도]는 이인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그림일 뿐 아니라, 한국 회화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걸작이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필묵, 드라마틱한 장관


   이인문은 해주(海州) 이씨 기술직 중인 가문 출신으로,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觀道人), 자연옹(紫煙翁) 등이다. 그림에 관서된 호는 고송유수관도인이 가장 많으며 줄여서 도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인문은 당대에 유행하였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보다는 관념적인 산수인물이나 정형산수를 즐겨 그렸다. 소나무 아래에서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송하한담’이라는 주제는 이인문이 즐겨 택했던 소재이기도 했다.

 



   [강산무진도]를 오른쪽부터 천천히 그림을 살펴보면, 만고불변의 자연과 그 자연의 섭리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다채롭게 표현되어 있다. 강과 산만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다. 깎아지를 듯한 기암절벽 사이사이까지 터를 잡고 그 안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눈길을 끈다. 적당히 안개를 이용하여 처리할 수 있는 공간에도 이인문은 집을 그리고 사람을 그려 넣었다. 소나무 그림을 많이 그렸던 이인문답게 화폭에는 수백, 수천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매력은 준법의 총망라에 있다. 준법은 산이나 흙더미 등의 입체감과 양감을 표현하기 위한 동양의 회화기법을 말한다. 부벽준과 미점준 등 이렇게 다양한 동양화의 준법이 총동원된 그림도 드물 것이다. 만년에 자신의 기량을 모두 표출해낸 것일까. 오른쪽 부분에서는 나지막한 산과 고요한 강줄기를 따라 얌전하고 평온한 준법으로 묘사되다가 왼쪽으로 진행될수록 점점 산세는 어느덧 험난해진다. 그에 따라 준법도 부벽준 등을 사용하여 거칠고 과단성 있게 변한다.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준법의 구사를 통한 산세의 묘사, 그리고 아주 작고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들의 꼼꼼한 묘사가 어우러져 시선을 옮길 때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장관을 보여준다. 그림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은 이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다. 어느 한 곳도 지루하지 않다. 반복되는 것 없이 구성요소는 다양함을 보여주고 필묵은 변화무쌍하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산천과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조선의 산과 조선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중국의 경치를 그린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는 그림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단순히 ‘중국적인 그림’이라고만 보고 그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과 중국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서, 자연 본연의, 인간 본연의 심상을 반영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안복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이라면, 그것이 우리 땅과 사람을 그린 ‘한국적 미감’의 그림만큼이나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민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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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한국의 전통 고서화방

낭만자객 | 조회 40 |추천 1 | 2015.07.29. 07:46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이인문은 당시 조선 화단(畵壇)의 총아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화가였다. 강산무진도는 그의 대표작으로, 사계절의 대자연의 경관을 그린. 긴 두루마리 이다. 강산만리의 변화무쌍한 풍경이 세화(細畵)로서 끈기있게 그려졌으며. 수산. 농경. 해운에 이르기까지 평화로운 민생(民生)을 감싼 유교적 산수관이 맥맥히 서려있다.

 

한국 그림으로는 드물게 보는 정력적인 대작이라 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가 이인문의 관록을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이 두루마리는 원래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소장했던 것으로서 두루마리 머리에 “추사 김정희씨 노고지인(秋史 金正喜氏 老考之印)” “추사(秋史)” 두루마리 말미에는 “김정희인(金正喜印)” “자손영보(子孫永寶)” “추사진장(秋史珍藏)” 수장인이 찍혀있으며. “이인문문욱도인인(李寅文郁道人印)” 이라 한 작자 도장이 찍혀있다.

 

이인문은 영(英). 정조(正祖) 양대에 걸쳐서 활약한 직업화가였으며. 명대 절파계(浙派系)류의 여운을 이은 작가로서 주로 산수화에 전념하면서 당시 한양 화단에 퍼지기 시작한 남종화풍(南宗畵風) 에도 마음을 쓴 작가였다. 이인문의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또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을 즐겨 썼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언제 : 18세기 중엽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86.3 x 57.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문의 만년의 작품으로. 구도와 준법(皴法) 등 모든 기법이 산수화의 대가다운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비록 화원(畵員) 출신이지만. 이미 문인화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알 수있다. 특히 가까운 경치의 암벽에서 원경으로 보이는 어렴풋한 송림에 이르기 까지 그 배경에 깃든 청아하게 흘러내리는 계곡물의 정취 등은 그의 그림 속에서도 드물게 보는 현실적인 한국 산수의 청정함을 느끼게 한다. 단지. 누각에 모인 인물들의 복식이나 태도 등이 중국풍으로 느껴지는 점에 다소 위화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화면 위쪽의 화제(畵題)에 의하면
이것은 1820년 경신년(庚辰年)의 작품으로 76세 때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송계한담(松溪閒談)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37.3 x 7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원으로 산수에 뛰어났으며. 묵포도(墨葡萄)도 잘 그렸다. 그의 호인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이 시사하는. 소나무와 맑은 내가 흐르는 정경을. 자주 그림의 소재로 삼았음을. 현존하는 작품을 통해서도 짐작할수 있다. 다만 당시 크게 유행한 실경산수에 대해선 외면한 듯. 이 소재의 그림은 드문 편이다. 수옥정(漱玉亭)과 같은 실경풍(實景風)의 그림에 한복을 입은 인물이 등장되기도 하나.
이 풍속적인 성격의 그림 역시 몇점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김홍도와 비교되며 다양한 여러 소재를 택하지 않은 점에서 김홍도 명성에 가려 소흘히 됨을 피할수 없었다. 그러나 산수화에서 그아 이룩한 높은 경지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음은 김정희(金正喜) 구장(舊藏)의 장대한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및 71세 노필(老筆)로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8폭 산수병(山水屛)을 위시해 그 밖의 화적(畵跡)을 통해서 확인된다. 그에 대한 성가(聲價)를 분명히 해주는 평을 살피면 남공철(南公轍)은 이인문을 명(明)의 당인(唐寅)에 비견하고 있으며. 신위(申緯)는 김홍도와 더불어 선조대(先祖代) 화원 중의 묘수(妙手)로 제발(題跋)에 언급하고 있다.

 

   이인문의 산수들은 특히 완숙한 경지에 도달한. 노년시기의 대작들을 통해서 그 진면목을 보게 된다. 박제가(朴齊家)의 화평(畵評) 중에 “ 갈필로 산을 그리고, 발묵으로 나무를 표현해, 명암과 향배(向背)의 묘제(妙躋)를 얻었다” 는 구절은 그의 산수를 잘 대변하고 있다. 고송이 적절히 어우러진 숲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담소를 나누는 세인물이 등장된 송계한담은, 선면(扇面) 외에 소폭 편화(片畵)로서, 또는 대폭의 부분에도 자주 나타나는, 그가 즐겨 택한 소재이기도 하다.

 

적합한 화면구성과 세련된 필치와, 담록가채(淡綠加彩)의 밝은 화면에서 완벽에 이른 화풍임을 알수 있고. 그림 내용이 주는 유현한 분위기는. 이를 넘어 청아함을 불러일으킨다. 왼쪽 하단에 고송유수도인(古松流水道人) 의 관(館) 자가 지워진 관서(款署)는 마치 작품제목 같아 보이기도 한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도봉원장(道峰苑莊)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26.5 x 33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이 작품은 행유도(行遊圖)와 같은 화첩의 한 폭으로 四季山水畵帖 에서는 봄풍경으로 되어 있다. 원산의 표현으로 보아 만장봉(萬丈峯)과 삼각산(三角山)이 비껴보이는 도봉산 계곡 어디에 있는 원장(苑莊)아니면 서원(書院)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성문은 이런 현장감을
강조하는 일종의 에피소드 처리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 역시 이인문의 티없이 맑은 설채가 돋보이는 명품으로. 원장의 한가로운 정경과. 초가 마을 앞 소 모는 농부의 모습이 그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왼쪽 냇물가로 구부러진 선묘(線描)들은 냇가의 버들을 표현한 것인데 이런 묘사법은 이인문의 원경을 그릴 때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이인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공간의 설정이 열려진 구도법으로 전개되어. 화면상의 넓이와 깊이가 대단히 멀고 깊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동시대의 대가이고 그의 벗인 김홍도(金弘道)의 생략을 통한. 집중구도법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그들의 개성인 것이다. 때문에 이인문의 작품은 보다 먼거리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 제 맛이 나며. 담묵과 농묵의 강한 대비와 울림은 그의 이런 조형적인 배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작가 : 이인문(李寅文)
아호 : 유춘(有春).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제목 :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언제 : 18세기 말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98 x 54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신위(申緯)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에 실린 이인문의 제화(題畵) 속에 “영조(英祖)를 모시던 화사(畵師)중 뛰어난

사람은 고송유수관도인(古松遊水觀道人)과 단원(檀園)이었는데. 덧없이 단원은 이미갔고 이인문 만 남았다” 라고 한 대목이 있다.

 

이인문과 김홍도는 같은해에 태어난 동갑으로 같은 무렵에 도화서(圖畵署) 화원이 되어 나란히 두각을 나타 냈는데 김홍도는 남종화풍(南宗畵風)을 절충해서 한국 사실풍경(寫實風景)에 독특한 자기체를 개척하고 국풍화(國風化)된 한국 산수화의 고유한 정취를 정착시켰을 뿐 아니라 서민사회의 생태나 그 서정을 주제로 한 풍속화의 선구자였다.

 

그에 반해, 이인문은 보다 충실히 대륙화풍(大陸畵風)을 익혀서 특히 산수화에 그 원숙한 역량을 발휘한 작가였다. 따라서 산수화는 김홍도에 비해 풍토적인 체취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하경산수도는 그의 산수화중 드물게 보는 대담한 대부벽준법(大斧劈皴法)으로 화면을 압도하듯 호탕한 솜씨를 보여주는 가작(佳作)이다. 암봉 너머로 원산이 담채로 그려졌고 그앞은 한그루의 나목(裸木)이 가로막으면서 공간의 깊이를 더해 준다.



 

 


cafe.daum.net/jkarts/NYzc/18   장계인의 그림 이야기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이인문(李寅文, 1745(영조 21)∼미상)| 國寶寶物 史蹟地

관운 | 조회 24 |추천 0 | 2015.07.20. 19:20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이인문(李寅文, 1745(영조 21)미상)

 

 

 

 

 

   8m가 넘는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다섯 장의 비단을 이어 대자연의 장관을 파노라마처럼 펼쳤다. 화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기암절벽 사이로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과 그들이 이룩한 문명이 목격된다. 화폭 말미에 이인문문욱도인야(李寅文文郁道人也)’, ‘김정희인(金正喜印)’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도 소장했었음을 알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 그곳에 머물렀던 인간의 역동적인 삶. 이인문이 그린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이다.

 

 

늙은 소나무와 흐르는 물처럼 살았던 기술직 중인의 후예

    

   이인문(李寅文, 1745-?)1745년 아버지 이신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고, 어릴 적 이름은 인민(寅旼)이며, 자는 문욱(文旭), 호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舘道人)을 주로 썼다. 해주이씨 집안은 16세기 이래로 의관, 역관, 율관, 산관, 사자관 등을 배출한 기술직 중인 가문이었다. 이인문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부인 온양정씨와, 후실인 강음이씨 모두 역관 집안의 여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산수 그리기를 좋아했던 이인문은 십여 년 동안 열심히 화가 수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해주이씨 가문에서 화원이 배출된 것은 이인문부터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인문의 다섯 아들 중 두 아들이 화원이 되었고, 큰 조카도 화업에 종사하였다.

 

이인문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문인 사대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정조와 순조 연간에 삼정승을 역임했던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은 이인문을 매우 아꼈던 듯 그와의 친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생(李生)은 생김이 깡마르고 마음 또한 기특한데,

의관이 남루하니 때를 잘못 만남이라

두 눈동자 형형한 빛은 늙어도 쇠함 없고

그림은 사람 아닌 자연을 스승으로 삼았네.

 

- 남공철, 금릉집(金陵集)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자 이름난 감식가였던 신위(申緯, 1769-1847)도 이인문의 성격과 화업을 증언했다.

 

 

선대의 임금을 모시던 화원 가운데 묘수로

그대와 늙은 단원(김홍도)을 꼽았더니

눈에 스쳐가는 아지랑이 구름인 양 단원은 보이지 않고

도인만 화실에 퍼질러 앉아 여전히 세상에 있네.

 

도인은 팔십 평생을 티끌 세상에 머물렀어도

늙은 솔 흐르는 물과 같은 몸을 잘도 키워왔구나.

그림 속의 수척한 얼굴은 응당 자신을 그린 것이려니

저기 상대하는 이는 또 무엇하는 사람일꼬.

 

- 신위,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이인문은 마성린(馬聖麟), 서영수(徐穎叟) 등 여항 문인과 신한평(申漢枰, 1726-?), 김응환(金應煥, 1742-1789),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등 전문 화가와도 어울려 지냈다. 1791년 유둣날 마성린과 함께 천수경(千壽慶, ?-1818)이 중심이 된 송석원시사에도 참석했다. 송석원시사의 향연은 김홍도가, ‘아회는 이인문이 맡았다. 바로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에 수록된 [송석원시사야연도][송석원시회도]이다.

 

   1820년에 그린 [누각아집도]이인문, 임희지(林熙之, 1765-?), 김영면(金永冕), 서영수의 아회를 재현했다. 중인 화가였던 이인문, 김영면, 임희지와 규장각에서 근무했던 서영수는 함께 어울리며 시회를 자주 즐기던 친구들이다. 네 사람이 소나무가 우거지고 계곡물이 청정한 누정에 다시 모였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술을 즐기며 그림을 감상하거나 주위 경관에 흠뻑 취했을 것이다. 누정에 놓인 거문고와 주안상이 그들의 휴식과 풍류를 증명한다. 게다가 그림의 상단에는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제시되어 있다.

 

 

늙은 솔 몇 그루 있어

흐르는 물이 그 가운데를 뚫고 가니

푸르고 차갑구나. 골짝 가득 바람인다.

탁 트인 처마와 창문에 아지랑이 영롱한 사이에

책상에 의지하여 축을 펴는 이는 도인(道人, 이인문)이요,

손에 그림 종이를 잡고 물끄러미 보는 이가 수월(水月, 임희지)이요,

거문고를 놓아두고 난간에 기댄 이는 주경(周卿, 김영면)이요,

걸상에 걸터앉아 길게 읊조리는 이가 영수(穎叟, 서영수)이니

이 네 사람은 가히 죽림칠현과도 대적할 만하구나.

그런데 문득 이끼 낀 길 시내 둔덕 위로

이야기하며 나란히 오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 또한 호걸의 기풍 있는 사람이거늘.

도인 76세 늙은이가 그림을 그렸고

수월, 영수가 지켜보았으며 주경이 평을 하였다.

때는 경진년 청화월이다.

 

   청화월이 음력 4월에 있으니, 청명하고 상쾌한 초여름의 아회이다. 화려한 옷차림을 갖추지 않고 기녀도 대동하지 않은 소박한 모임이지만, 중국의 이름난 현자이자 풍류가객들이었던 죽림칠현과 견주었다. 죽림칠현이 대나무 숲에서 맑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이들은 소나무 숲에서 소리와 시와 그림을 논했다. ‘송림사현(松林四賢)의 자부심과 풍류는 이인문의 섬세하면서도 기운찬 필과 묵으로 재현되었다. 76세 노인의 화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솜씨이다.

 

 

끝없이 펼쳐진 산과 물, 강산무진도의 구성

    

   [강산무진도]는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완성되었다. 현재의 표구 규격은 가로 44.4cm, 세로 915.5cm이며, 그림은 856.6cm이다. 표구 겉면에 李寅文筆 江山無盡圖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되는 긴 두루마리에는 산과 물이 반복되면서 무한한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출발점은 아무런 형상이 없는 여백이다. 곧이어 담녹색의 운무와 비스듬한 언덕이 장엄한 의 시작을 알린다. 돌이 켜켜이 쌓인 언덕에는 소나무 예닐곱 그루가 우뚝 서서 멀리 보이는 산과 아스라이 중첩된다. 언덕 끝 지점에서 비로소 건물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두 노인이 나타난다. 자연에서 인간 세상으로 조금씩 진입하는 것이다. 송림 사이로 언뜻 보이는 인가를 지나 우뚝 솟은 봉우리를 한 고개 넘어 가면 집집마다 나귀와 수레를 갖춘 마을이 펼쳐진다. 이는 문물을 전달하기 위한 교통수단이자 거친 자연을 개척하기 위해 고안한 도구이다.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이제 끝없이 펼쳐진 의 세계이다. 초가 어귀부터 시작된 강물은 산세를 굽이굽이 돌아 광활하게 펼쳐졌다. 강의 양쪽 둔덕에는 배가 정박해 있고 중앙에는 미처 포구로 되돌아오지 못한 선박이 무리지어 떠 있으며 멀리 보이는 흐릿한 나루에는 배들이 즐비하다. 장사 물건을 실은 배들일까. 단순히 고기잡이를 위한 일엽편주라 하기에는 줄지어 모여 있고 바삐 움직인다. 아니나 다를까. 배에서 짐을 내리는 어부, 이를 짊어지고 어디론가 가는 인물의 행렬, 잠시 노동을 뒤로 한 채 잠시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촌로가 점경으로 보인다. 중국의 청명상하도를 연상하게 하는 번화한 산속 도시의 풍경이다.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강가의 향연이 끝날 무렵 기암절벽이 위풍당당하게 행렬을 시작한다. 방향을 예측할 수 없이 이리저리 뻗은 봉우리는 추상미술을 넘어 행위 예술을 보는 듯하다. 부벽준으로 세차게 내리그은 절벽과 세차게 흘러내리는 폭포는 강한 에너지를 품어내며 한 치의 여유도 부여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물의 흐름이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연결된다면, 병풍처럼 늘어선 산세는 아래에서 위로 상승된다. 빼곡히 들어선 골짜기마다 개미와 같은 사람의 행렬이 밀집되어, 분주한 인간사를 그대로 드러낸다. 숨 가쁜 긴장감은 도드래의 등장으로 절정에 올랐다가 해소된다. 깎아지른 절벽에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나면서 한숨 돌리게 된 것이다. 높다란 언덕 위에 도드래를 설치한 후 한창 짐을 들어 올리는 중이며, 그 아래에는 사람들이 모여 짐을 꾸리느라 분주하다. 문명과 기술의 상징인 셈이다.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잠시 숨을 고르니, 다시 괴이한 산봉우리의 변주이다. 무협영화에나 나올 법한 절벽은 화면을 이탈하며 기상천외한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 바윗덩어리와 절벽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도 하고,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대치하기도 한다. 수직과 수평, 왜곡과 변형, 과장과 생략, 균형과 편중이 공존하는 세계. 조선의 산천이라 할 수 없는 환상의 공간이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계곡을 올라가는 사람의 행렬에서 대자연에 순응하면서도 그것을 삶의 원천으로 승화하는 인류의 능력이 목격된다.

 

 

이인문, [강산무진도] 부분

 

   한바탕 기암절벽의 회오리가 물러간 뒤 다시 고즈넉한 강촌이 따사롭게 펼쳐진다. 강촌이 봉우리 뒤로 연결되면서 아스라한 강과 운무에 쌓인 먼 산으로 마무리된다. 여백으로 시작하여 여백으로 끝나는 한없는 강과 산의 연속이다.

 

[강산무진도]의 산천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이상경이다. 그러나 사람이 동경하고 경외하는 와유처도, 세속을 버리고 몸을 숨기는 은신처도 아니다. 행복과 번영을 위해 몸소 뛰어들어 개척하고 개발하는 생존의 터전이다. 또한 삼라만상 구석구석마다 인간의 손길이 닿아 풍요로운 생산이 가능하게 된 태평성시의 유토피아이다.

 

기승전결의 뚜렷한 대하소설처럼,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오페라처럼 격동과 여운을 간직한 [강산무진도]. 임진년이 저물어 계사년이 밝았고, 안과 밖의 지도자가 바뀐 이 때, ‘끝없이 펼쳐진 산과 강을 감상하며 소망의 메시지를 되뇌어 본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이 창조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글 송희경 | 문학박사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했고, 조선후기 회화사를 전공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는 [조선후기 아회도][미술의 이해와 감상]이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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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 이인문(李寅文, 1745~1821)| 國寶寶物 史蹟地

관운 | 조회 4 |추천 0 | 2015.07.02. 11:25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 이인문(李寅文, 1745~1821)

 

 

 

   현실은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소중한 터전이지만, 늘 누구에게나 고되고 녹녹치 않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실로부터의 잠시 나마 탈출을 꿈꾸고 그 꿈은 너무나 달콤하다. 18세기를 살았던 조선의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이상향을 꿈꾸었다. 그 꿈의 여정은 그림 속에서 펼쳐졌다. 그들에게 이상향은 정신적인 도피처이자, 어쩌면 평생 도달할 수 없는 별천지이기도 했다. 이인문(李寅文, 1745~?)10m에 가까운 가로로 긴 종이 위에 끝없이 펼쳐지는 자연과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렸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라 불리는 그림은 이상향을 간절히 찾는 조선 사람들의 내면을 반영한 그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 회화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걸작, 강산무진도

 

[강산무진도]는 횡권(橫卷)으로 비단 바탕에 먹과 담채로 그려졌다. 그림 부분의 크기만 해도 세로가 43.8.0cm, 가로가 856.0cm에 달하는 대작이다. 상당히 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하여 5개의 비단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다. ‘강산무진도라는 제목은 장황의 겉면 제첨(題簽)에 쓰여져 있으나, 제작 당시의 것은 아니다. 즉 이인문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 붙인 제목은 아니고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그림의 맨 끝에는 이인문문욱도인야(李寅文文郁道人也)’, ‘김정희인(金正喜印)’ 등의 도장이 찍혀 있다. 문욱(文郁)은 이인문의 자()이고 도인(道人)은 이인문의 호,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觀道人)’을 줄여 쓴 것이다.

 

신위(申緯, 1769~1847)왕을 모시던 화사 중 뛰어난 이로 이인문과 김홍도(金弘道, 1745~?)가 있었는데, 덧없이 김홍도는 세상을 떠났고 이인문만 남았다는 기록을 했다. 이를 통해 18세기중후반경 김홍도와 이인문이 궁중화가 가운데에서는 손꼽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인문과 김홍도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화가로, 비슷하게 궁중의 도화서화원이 되어 나란히 두각을 나타냈으며 서로간의 친분도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둘의 관계를 그림을 통해 확인된다. 김홍도가 그린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에는 이인문이 감상하였다는 글이 남겨져 있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는 이인문이 그림을 그리고, 김홍도가 화제를 쓴 합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장기는 달랐다.

 

   김홍도와 이인문 모두 산수화면 산수화, 인물화면 인물화,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소화해냈지만, 김홍도는 무엇보다도 서민들의 생활이나 정서를 주제로 한 풍속화를 선구적으로 그렸던 데에 반해, 이인문은 필묵의 기량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 산수화에 원숙한 역량을 발휘한 화가였다. 가깝게 지내면서도 상반되는 취향의 그림에 각각 장기를 발휘했던 두 사람은 전대의 겸현(謙玄)’이라 일컬어졌던 겸재 정선(鄭敾, 1676~1759)과 현재 심사정(沈師正)처럼 화단의 쌍벽을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 땅을 그린 진경산수화 로 유명한 정선과 우리 현실을 그린 풍속화로 유명한 김홍도의 그늘에 가려, 심사정과 이인문은 그들이 활동했던 당시의 유명세를 지금은 거의 다 잃은 듯 하다. ‘한국적인 미감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개성도 약하다는 지적은 김홍도의 그늘에 이인문이 가려져 버린 이유를 말해준다. 그러나 당시에 이인문은 도화서 화원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이인문이 그렇게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지는데, [강산무진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궁금증이 해소된다. [강산무진도]는 이인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그림일 뿐 아니라, 한국 회화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걸작이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필묵, 드라마틱한 장관

 

   이인문은 해주(海州) 이씨 기술직 중인 가문 출신으로, 자는 문욱(文郁) 호는 유춘(有春),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觀道人), 자연옹(紫煙翁) 등이다. 그림에 관서된 호는 고송유수관도인이 가장 많으며 줄여서 도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인문은 당대에 유행하였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보다는 관념적인 산수인물이나 정형산수를 즐겨 그렸다. 소나무 아래에서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송하한담이라는 주제는 이인문이 즐겨 택했던 소재이기도 했다.

 

[강산무진도]를 오른쪽부터 천천히 그림을 살펴보면, 만고불변의 자연과 그 자연의 섭리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다채롭게 표현되어 있다. 강과 산만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다. 깎아지를 듯한 기암절벽 사이사이까지 터를 잡고 그 안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눈길을 끈다. 적당히 안개를 이용하여 처리할 수 있는 공간에도 이인문은 집을 그리고 사람을 그려 넣었다. 소나무 그림을 많이 그렸던 이인문답게 화폭에는 수백, 수천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이 그림의 매력은 준법의 총망라에 있다. 준법은 산이나 흙더미 등의 입체감과 양감을 표현하기 위한 동양의 회화기법을 말한다. 부벽준과 미점준등 이렇게 다양한 동양화의 준법이 총동원된 그림도 드물 것이다. 만년에 자신의 기량을 모두 표출해낸 것일까. 오른쪽 부분에서는 나지막한 산과 고요한 강줄기를 따라 얌전하고 평온한 준법으로 묘사되다가 왼쪽으로 진행될수록 점점 산세는 어느덧 험난해진다. 그에 따라 준법도 부벽준 등을 사용하여 거칠고 과단성 있게 변한다.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준법의 구사를 통한 산세의 묘사, 그리고 아주 작고 세밀하게 그려진 인물들의 꼼꼼한 묘사가 어우러져 시선을 옮길 때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장관을 보여준다. 그림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은 이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다. 어느 한 곳도 지루하지 않다. 반복되는 것 없이 구성요소는 다양함을 보여주고 필묵은 변화무쌍하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산천과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조선의 산과 조선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중국의 경치를 그린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는 그림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단순히 중국적인 그림이라고만 보고 그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과 중국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서, 자연 본연의, 인간 본연의 심상을 반영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안복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이라면, 그것이 우리 땅과 사람을 그린 한국적 미감의 그림만큼이나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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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 문인화, 고서화

이보 | 조회 139 |추천 0 | 2010.12.09. 23:14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이인문(李寅文)은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로서,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문욱(文郁), 호는 고송류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또는 유춘(有春)이다. 도화서 화원으로서 첨절제사(僉節制使)라는 벼슬을 지냈다. 김홍도(金弘道)와 동갑으로 함께 도화서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고, 당시 문인 화가였던 강세황, 신위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산수, 영모(翎毛), 포도, 도석인물화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당시 크게 유행하였던 진경산수나 풍속화보다는 전통적인 소재를 즐겨 그렸다. 특히 소나무를 많이 그려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길이가 8m 56cm에 달하는 거작으로 그의 회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외에도 〈단발령 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강촌청우도(江村晴雨圖)> 를 비롯한 많은 산수화가 전해지고 있다.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 세로 44.1㎝, 가로 85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권(長卷)으로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최대의 거작으로 두루마리의 첫부분과 끝부분에 '김정희씨고정지인'(金正喜氏考定之印)과 '추사진장'(秋史珍藏)이라고 찍혀 있어 한때 김정희 소장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계절에 걸친 천봉만학(千峰萬壑)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모습과 이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들의 여러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나 다양하고 변화있는 공간처리가 뛰어나며, 산의 규모에 따라 부벽준(斧劈皴)·피마준(披麻皴)·미점(米點) 등을 적절히 사용했다. 이 작품의 기암절벽 묘사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이, 토산(土山)의 처리에서는 정선의 잔영이 보이는 등 전반적으로 이인문 화풍의 복합성과 당시 회화조류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뛰어난 화면구성, 능숙한 필치, 부벽준을 사용한 점 등으로 보아 50대 이후의 작품으로 보인다.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1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2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3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4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도봉원장



 

송계한담 (松溪閑談)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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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문李寅文(1745~1821) - 연못 위 정자에서 수업하는 두 인물,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Photo, Art & Gallery

비에 | 조회 518 |추천 1 | 2012.02.16. 21:29 
   


 

 

연못 위 정자에서 수업하는 두 인물


이인문李寅文(1745~1821)
조선 18세기

산수 표현에 능숙한 기량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괴석과 다양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연못 위 정자에 두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방석 위에 앉은 인물 앞에 책을 펴놓고 앉아 있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낚시를 하고 있는 인물, 두 마리의 사슴, 빈 배 등의 소재와

맑은 담채가 잘 어우러져 서정적인 분위기로 그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이야기-이인문의 강산무진도



   ‘강산무진도’는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려졌다. 그림 부분만 해도 세로 44.0cm × 가로 856.6cm나 되는 걸작이다. 이렇게 가로로 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를 위해 5폭의 비단을 잇대어 바탕을 만들었다.

이 그림은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그린 것으로 추사 김정희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화면에 찍힌 ‘金正喜印’ 등 여섯 과의 도장으로 알 수 있다.

신위(申緯)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庫)’에는 “영조(英祖)를 모시던 화사(?師) 중 뛰어난 사람은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觀道人= 이인문)과 단원(檀園 = 김홍도)이었는데, 덧없이 단원은 이미 갔고 이인문만 남았다”라고 한 대목이 있다. 이처럼 이인문과 김홍도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으로, 비슷하게 도화서(圖畵署) 화원이 돼 나란히 두각을 나타냈다.

표지에는 ‘李寅文筆江山無盡圖’(이인문필강산무진도)라고 쓰여 있다. 그림의 제목은 이인문이 직접 붙인 것은 아니다. 후대에 장황을 바꾸면서 적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려진 내용을 보면 단순히 산수만이 넓게 펼쳐진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살이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그림의 첫 번째 매력은 시작과 끝 부분에서 보이는 여백의 미다.

화면이 시작되고 나서 50cm 가까이 화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첫 번째 선과 선염이 보이는 순간, 이제 바로 기괴하고 긴장감 있는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 그림의 두 번째 매력은 매우 다양한 준법의 자유로운 구사에 있다. 준법이란, 산과 돌의 형태와 질감을 필묵으로 표현해내는 방법을 의미한다.

화가들은 개성적으로 다양한 준법을 개발해 효과적으로 산과 돌의 느낌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산이 부드러운 토산일 경우와 단단한 암산인 경우 당연히 다른 기법으로 그렸을 것이다. 이인문은 절대(折帶)준, 부벽(斧劈)준, 피마(披麻)준 등을 사용해 때로는 단단한 바위의 느낌을 살리고, 때로는 부드러운 토산의 느낌을 살리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의 그림 안에서 이렇게 다양한 준법을 섞어 사용한 화가는 많지 않다.

세 번째 매력은 험준한 강산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언뜻 보면, 그 안에 묘사돼 있는 인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림을 자세히 보고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림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강산무진’이라는 제목 속에 감춰져 있는 이 그림의 실제 주제가 아닐까 싶다.

<민길홍 학예연구사>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1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2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3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4

 

   이인문의 대표작으로 8.6m나 되는 장권(長卷)으로 조선 후기 최대의 거작이라 하겠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모습과

 그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잘 어우러지게 묘사하고 있다.

구도의 전개나 기법의 다양함은 감상자들의 시선을 끝없이 즐겁게 한다

기암절벽의 묘사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이,

 그리고 산의 표현에서는 정선의 화풍이 다소 엿보이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이인문 자신의 독창적인 구성과 필법을 드러내고 있다.

 명암이 엇갈리고 몸이 뒤틀린 소나무의 표현에서 그만의 특색을 느낄 수 있다.



 

 이인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중 세부적인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중 세부적인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암의 누리사랑방

산수화가 이인문(李寅文) / 이상적인 세계를 형상화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1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2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3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4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이인문의 대표작으로 8.6m나 되는 장권(長卷)으로 조선 후기 최대의 거작이라 하겠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모습과 그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인간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잘 어우러지게 묘사하고 있다. 구도의 전개나 기법의 다양함은 감상자들의 시선을 끝없이 즐겁게 한다.

 

기암절벽의 묘사에서는 김홍도의 영향이, 그리고 산의 표현에서는 정선의 화풍이 다소 였보이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이인문 자신의 독창적인 구성과 필법을 드러내고 있다. 명암이 엇갈리고 몸이 뒤틀린 소나무의 표현에서 그만의 특색을 느낄 수 있다.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98*5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하경산수도>는 그의 산수화 중 드물게 보는 대담한 대부벽준법(大斧劈준法)으로 화면을 압도하듯 호탕한 솜씨를 보여주는 남종화풍의 가작(佳作)이다.

 

이 하경산수도는 장생을 누렸던 이인문이 72세 때의 작품으로 그가 살아온 생애를 대변하듯 계곡사이의 홀로선 노송은 마치 불의와 타협치 않은 기개를 보이며 우측의 높게 솟은 바위는 육중한 기교로써 계속 뻗어나는 조선을 염원한 듯하며, 정자의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는 두 인물의 등장과 한가로이 동자를 앞세워 정자로 찾아드는 노인의 모습 또한 편안함을 보이고, 또한 간결한 표현으로 계곡 사이의 물이 힘차고 끊임없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며 고송유수관도인의 산수화중 드물게 보이는 대담한 기법으로써 화면을 압도하는 듯한 호탕한 솜씨를 보여주는 가작(佳作)이다. 암봉 너머로 원산이 담채로 그려졌고, 그 앞은 한 그루의 나목(裸木)이 가로막으면서 공간의 깊이를 더해준다

 

산수도첩 (山水圖帖), 종이. 수묵담채 各 27.6×31.9cm

 

산수도첩 (山水圖帖)

이 작품은 그림 11폭, 글씨 6폭으로 구성된 산수화첩에 들어 있는 것으로, 경물의 구성과 인물 표현, 수지법(樹枝法) 등이 전형적인 남종화풍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준법(皴法)은 진한 먹으로 그은 부벽준(斧劈皴)을 쓰기도 하고, 갈필의 피마준(披麻皴)을 쓰기도 하는 등 작품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세부 묘사에도 소홀함이 없고, 완숙한 필치와 적절한 담채를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이인문 특유의 맑고 담백한 아취가 감돌고 있다.

 

준법(皴法)이란

동양화에서 산애(山崖)·암석의 굴곡 등의 주름을 그리는 화법. 산이나 흙더미 등의 입체감·양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동양적 음영법(陰影法)이다. 중국에서는 진(秦)·한(漢)시대의 산악도(山岳圖)에서 그 원시적 형태를 볼 수 있으나 거의가 비사실적·관념적이다. 그 후 산수화의 발전과 함께 각종 준법이 나타나 형식화되어 특정한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피마준(披麻皴)은 삼[麻]의 껍질을 벗긴 것 같은 주름이라는 뜻으로 동원(董源)이 시작하였으며, 주로 남종화(南宗畵)에서 사용된 선적(線的)인 주름이다. 이에 비하여 부벽준(斧劈皴)은 도끼로 쪼갠 면과 같은 주름으로 면적(面的)인 성격이 강하며, 북종화(北宗畵)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준 皴 : 주름 준]

 

수옥정도, 견본담채, 77.3x45.2cm,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단발령 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

 

단발령 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

〈단발령 망금강도〉는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그림이다. 단발령은 금강산 남쪽에서 금강산을 여행할 때 가장 먼저, 가장 넓게 금강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개이다. 머리를 자른다는 뜻의 단발령이라는 이름도 '이곳에 오르는 자마다 대자연에 압도되어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는 그림은 여러 폭 전하지만, 이인문의 이 그림만큼 감동적으로 표현한 작품도 드물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마치 구름 위에 둥실 떠 있는 듯, 혹은 보석함을 열어 놓은 듯 안개 속에 아물거린다. 단발령은 진한 먹으로 세밀하게 그려졌다.

 

금강산은 정선의 〈금강전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암산과 토산이 대조를 이루고 있고, 토산은 부드러운 미점으로 처리되었다. 고개 위에서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는 이는 아마도 이 그림을 그린 이인문이리라. 신선한 구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수로한거도(樹老閑居圖), 액자 종이에 담채. 가로 33.0㎝. 세로 26.5㎝

 

수로한거도(樹老閑居圖)

이 산수도는 수려한 경관을 전면구도로 하여 근경에는 수림속에 한가한 기와집에서 노인들이 오수와 독서를 즐기는 모습을 그렸고 원경은 산과 폭포등을 표현하였다. 좌측 상단에 '有春'이라는 낙관이 있다.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종이에 수묵 담채, 24.3*33.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이 그림에는 다섯 그루 노송(老松)이 적당한 간격으로 얽혀 배치되었고 그 아래에 편편한 땅 위에는 세 선비가 편한 자세로 한담하고 있다. 그 왼쪽에는 바위에 부딪치며 흘러내리는 폭넓은 냇물이 시원하게 퍼져 나가며 양편 암벽 사이로 탑과 건물은 안개 속에 희미하게 그려져 거리감을 잘 나타낸다.

 

필치의 대부분이 감각적 갈필(渴筆)로 세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게 솔잎의 배경과 바위 군데군데에 투명한 연 푸른색이 더해졌다.

 

도봉원장(道奉苑莊), 화첩 종이에 담채, 26.5*33cm, 한국 개인 소장

 

도봉원장(道奉苑莊)

이 작품은 원산의 표현으로 보아 만장봉(萬丈峯)과 삼각산이 비껴 보이는 도봉산 계곡 어디에 있는 원장(苑莊) 아니면 서원(書院)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성문은 이런 현장감을 강조하는 일종의 에피소드 처리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 역시 이인문의 티 없이 맑은 설채(設彩)가 돋보이는 명품으로 원장의 한가로운 정경과 초가 마을 앞 소 모는 농부의 모습이 그 정취를 더해 주고 있다. 왼쪽 시냇가로 구부러진 선묘(線描)들은 냇가의 버들을 표현한 것인데, 이런 묘사법은 이인문이 원경(遠景)을 그릴 때 즐겨 사용했던 것이다.

 

이인문(李寅文, 1745∼1824 이후)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로서,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문욱(文郁), 호는 고송류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또는 유춘(有春)이다.

 

도화서 화원으로서 첨절제사(僉節制使)라는 벼슬을 지냈다. 김홍도(金弘道)와 동갑으로 함께 도화서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고, 당시 문인 화가였던 강세황, 신위 등과도 가까이 지냈다. 산수, 영모(翎毛), 포도, 도석인물화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당시 크게 유행하였던 진경산수나 풍속화보다는 전통적인 소재를 즐겨 그렸다.

 

특히 소나무를 많이 그려 이 방면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는 길이가 8m 56cm에 달하는 거작으로 그의 회화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외에도〈단발령 망금강도(斷髮嶺望金剛圖)〉<강촌청우도(江村晴雨圖)>를 비롯한 많은 산수화가 전한다. 독창적인 면에서는 김홍도만 못하다는 평도 받고 있으나 기량이나 격조면에서는 그와 쌍벽을 이루었던 화가로 조선 후기의 회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