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조사〔悲弔辭〕/ 허백당 성현
2016. 3. 19. 23:46ㆍ詩
비조사〔悲弔辭〕 -허백당 성현 명문집성 사(辭 詞)
백이와 숙제를 슬퍼하다〔弔夷齊〕 내 말을 서쪽으로 빨리 몰아서 / 遄余馬而西邁兮 고죽의 옛 동산에 이르러 쉬며 / 憩孤竹之故園 백이숙제 높은 자취 우러러보고 / 仰夷齊之高躅兮 당시의 고상함을 상상하노라 / 想當時之芳蓀 생각건대 부자는 성인으로서 / 惟夫子之爲聖兮 천지간에 홀로 우뚝 섰던 분이니 / 特獨立乎乾坤 아우는 천륜을 중히 여겼고 / 弟天倫之爲重兮 형은 부친 명령을 높이 받들어 / 兄父命之是尊 왕위를 헌 신발짝 버리듯 하고 / 屣萬乘其如脫兮 기미 보고 고고히 달아났어라 / 色斯擧而高騫 아주 떠나 영원토록 안 돌아오고 / 卓長往而不返兮 서산의 언덕에서 숨어 지내며 / 伏西山之丘原 무성하게 자라는 고사리 보고 / 見薇蕨之離離兮 뜯고 또 뜯어 먹어 배를 채웠지 / 爰采采而充飧 내 뜻을 즐기면서 주림 잊으니 / 樂吾志而忘飢兮 주나라 곡식 어찌 먹으려 하랴 / 肯周粟之可呑 주나라 왕 즉위하여 상복을 입고 / 周王興而墨衰兮 만국을 전쟁터로 향하게 하니 / 致萬國之波奔 폭력으로 폭력을 바꾼 것인데 / 是以暴而易暴兮 충성과 의리 어찌 논하겠는가 / 何忠義之足論 요순 시대 멀어짐을 개탄하면서 / 慨唐虞之世遠兮 영원히 변치 않길 맹세했어라 / 永終矢而不諼 이 몸 이제 어디로 돌아갈거나 / 念吾身其何歸兮 은나라 사직 터엔 짙은 구름 뿐 / 殷社墟而雲昏 굶주려 죽더라도 안 돌아보나 / 寧餓死而不顧兮 또 누굴 원수 삼고 원통해하랴 / 又何讎而何冤 이에 인을 구하여 인 얻었다고 / 乃求仁而得仁兮 공자께서 격언을 남겼거니와 / 有宣尼之格言 마치 어제 일과 같은 늠름한 기절 / 凜英風之如昨兮 만고에 길이길이 남게 되리라 / 亘萬古而長存 후인들로 하여금 법 삼게 하니 / 俾後人而取則兮 완악하고 각박한 이 교화되도다 / 頑夫廉而薄夫敦 비간을 슬퍼하다〔弔比干〕 갱가의 선한 기풍 멀어진 뒤로 / 粤自賡歌之風云邈兮 세교가 어찌 이리 추락하였나 / 何世敎之沈沈 임금이 제 신하를 토개로 보니 / 君視臣如土芥兮 누가 나서 바로잡고 충고해 주랴 / 孰相戒而規箴 어리석고 포학한 은나라 수는 / 惟商受之昏暴兮 교만하고 방종하기 이를 데 없어 / 縱一己之驕淫 집을 짓고 꾸미는 데 돈을 퍼붓고 / 旣峻宇而雕墻兮 음악과 술에 빠져 못 헤어나며 / 又甘酒而嗜音 염처를 총애하여 기세부리고 / 寵艶妻而煽處兮 염래의 간악함을 숭상하는 등 / 崇廉來之孔壬 죄악이 밑도 끝도 없이 넘쳐나 / 罪貫盈而莫極兮 민생의 도탄 더욱 심해졌도다 / 火益熱而水益深 충정(忠貞)한 성품 지닌 왕자 비간은 / 惟王子之謇謇兮 가슴 가득 충심과 정성을 품어 / 懷滿腹之忠忱 탕의 통서(統緖) 끊길 것을 통탄했으니 / 慨湯緖之將殄兮 근심을 담당할 자 누가 있을까 / 孰憂思之可任 소사처럼 주나라의 신복이 되어 / 不願少師之適周兮 폐백을 바치기를 원치 않으며 / 爲臣僕而輸琛 태사처럼 노예 되어 산발을 하고 / 不願太師之爲奴兮 거문고를 퉁기기를 원치 않노라 / 苦被髮而調琴 덕에 한 점 부끄러움 없길 바라니 / 願蓀美之可完兮 입 다물고 벙어리 흉내를 내랴 / 肯括囊而佯瘖 왕에게 서슴없이 직언하면서 / 仰批鱗而不止兮 생각을 낱낱이 다 말하였건만 / 寫歷歷而披襟 충고를 받아들일 기미는 없고 / 旣余聽之邈邈兮 도리어 그 심장을 떼어 냈도다 / 反見剖乎厥心 인 행하고 도리어 해를 당하니 / 嗟以仁而蹈害兮 천도를 진정 믿지 못하겠구나 / 信天道之難諶 위대하다 삼인의 애달픈 충심 / 偉三仁之惻怛兮 지금까지 명성이 남아 있도다 / 忠於古而名於今 화상(畫像)을 바라보며 참담해져서 / 撫遺圖而慘澹兮 송을 지어 슬픈 마음 노래하노라 / 聊作頌而悲吟 삼량을 슬퍼하다〔弔三良〕 저기 저 높은 것은 무엇이던가 / 彼高伊何兮 푸른 하늘 끝없이 펼쳐 있도다 / 蒼蒼者天 어찌 이리 선량한 사람을 죽여 / 夫何殲此良人兮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게 했나 / 不獲自全 자거씨의 훌륭한 세 아들이여 / 子車氏之三子兮 보수가 나란히 선 듯했는데 / 若寶樹之相聯 진나라 임금 어찌 잔인하게도 / 何秦君之不仁兮 지체 없이 몰아넣듯 하게 했던가 / 若驅迫而不少延 아버지의 정신 나간 명을 좇아서 / 從厥父之亂命兮 갑작스레 구천에 갇히게 되니 / 奄從閉乎九泉 무덤 앞에 이르러서 사지를 떨며 / 臨其穴而惴慄兮 실의에 차 주저하며 멈추어 섰네 / 悵趑趄而莫前 해가 밝게 비추는 세상 버리고 / 去白日之昭昭兮 캄캄한 땅속으로 들어가는 때 / 入長夜之玄玄 사람들이 백 번 대신 죽고자 하니 / 人百身而思贖兮 눈물 뚝뚝 안 흘릴 자 누가 있으랴 / 孰不爲之泫然 선왕들이 아름다운 법을 만들어 / 先王作爲美法兮 후손에게 남겨 서로 전해 왔도다 / 遺後嗣而相傳 저 목공은 임금 노릇 한 걸로 보면 / 彼穆公之爲君兮 한 시대의 인물이라 할 만한 자로 / 亦一代之英賢 살았을 때 황발에게 자문 구하고 / 生旣詢玆黃髮兮 세 장수의 잘못을 용서했건만 / 赦三帥之罪愆 어찌하여 죽음에 맞닥뜨려선 / 豈有臨死之日兮 잔인하게 선인들을 순장케 했나 / 忍用良善以從遷 알겠도다 진이 동쪽 정벌 못하고 / 知秦之不復東征兮 서융의 패자에서 그친 이유를 / 只霸西戎之一邊 목우(木偶)를 만든 자의 잔인한 마음 / 作俑者之甚不仁兮 마침내 영원토록 해 끼쳤으니 / 竟貽害於萬千 뒷날에 여산 무덤 파헤쳤어도 / 後乎驪山之冢破兮 측은하게 여겨 주는 사람 없었네 / 無過者之傷憐 세 선인의 억울한 죽음이 슬퍼 / 慨三良之枉死兮 〈황조〉 시를 읊조리며 생각에 젖네 / 徒詠思乎黃鳥之篇 신생을 슬퍼하다〔弔申生〕 감초를 캐고 감초를 캐기를 / 采苓采苓兮 어찌하여 수산 남쪽 언덕에서 하려는가 / 胡爲乎首陽之高岡 왜 그리도 어리석게 판단하지 못하고 / 何昏庸之不諒兮 도리어 생황처럼 공교로운 말 믿었나 / 反信巧舌之如簧 교활한 저 오랑캐는 / 惟彼黠戎兮 승냥이와 이리처럼 간악하건만 / 其維豺狼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 낳으니 / 生此懿美兮 막야검의 날처럼 날카로워서 / 鏌鋣鋒鋩 나라에 크나큰 재앙 만들고 / 作厲階於邦家兮 임금의 폐와 간장 파먹었도다 / 屠蝕君之肺腸 제사를 어김없이 잘 지냈는데 / 祀事有序而不忒兮 왜 갑자기 제강 꿈을 꿨다는 건가 / 何遽夢乎齊姜 땅이 솟고 개가 죽게 독을 탔다면 / 墳地斃犬之毒手兮 그 정상을 간파하기 쉬웠으리라 / 信情狀之易詳 포와 굴도 흥기하여 왕이 됐건만 / 彼蒲屈尙能發跡而興業兮 태자는 왜 헤아리지 않았던 건가 / 何太子之不自量 생각건대 군부께서 침소에 들 때 / 念君父之寢處兮 이 사람이 있어야만 즐거워하니 / 賴此人而樂康 진실로 임금께서 편하시다면 / 苟君心之得安兮 어찌 나의 재앙을 꺼리겠는가 / 豈余身之憚殃 그 뜻을 잘 받들어 어김없음이 / 順其志而無違兮 내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건데 / 亦余心之所臧 효성이 극진해도 밝힐 길 없고 / 孝烝烝而難白兮 밝은 충심 드러낼 방도가 없네 / 忠昭昭而未彰 한 목숨 죽는 것을 피하지 않아 / 甘鼎鑊而不避兮 이 한 생애 의양에 붙일 뿐이니 / 付生涯於蟻羊 신성에 새로 나온 파다한 소문 / 隆新城之新語兮 정신이 멍하도록 황당했도다 / 徒恍惚而荒唐 당시 사람 비통함은 말할 게 없고 / 非徒聳當時之痛懷兮 뒷사람들 또한 모두 슬퍼했으니 / 亦後人之衋傷 지금은 천년 세월 지나갔지만 / 至今千載之下兮 흐르는 나의 눈물 멈출 길 없네 / 渙余涕之汪浪 개자추를 슬퍼하다〔弔介子推〕 봄날의 한식일에 / 寒食兮春天 눈이 풀풀 날리고 / 雨雪兮霏霏 노한 듯 거센 바람 휘몰아치니 / 風奔騰而奮怒兮 선생의 남은 위엄 상상되누나 / 想先生之餘威 선생이 진나라에 벼슬하면서 / 惟先生之仕于晉兮 마음 다해 직분을 수행하였고 / 盡厥職而心不違 십구 년간 국외를 떠돌던 때도 / 十九年之在外兮 분주하게 고삐 잡고 말을 몰았네 / 勤奔走而執鞿 조위가 앞뒤에서 중이(重耳)를 돕고 / 趙魏兮先後 한범은 그에게로 의탁했으니 / 韓范兮因依 군자들이 의지하는 대상이었고 / 君子所附兮 소인들은 그에게서 보호받았네 / 小人所腓 그들 모두 은혜 입고 고관이 되어 / 咸承恩而寵顯兮 지척에서 크나큰 총애 입는데 / 近日月之光輝 나는 공로 있음에도 녹훈(錄勳) 안 되니 / 顧余有勞而不見錄兮 미천한 환피(宦披)만도 못한 신세네 / 曾不如寺披之賤微 수행했던 저들 모두 용으로 변해 / 彼群龍之變化兮 구름을 거느리고 하늘 날건만 / 邈雲從而天飛 뱀 하나만 불우하게 버려졌으니 / 獨一蛇之蹭蹬兮 실망만 할 뿐 이제 어디로 갈까 / 徒戃恍其奚歸 우두커니 산속에 홀로 있는데 / 塊獨處乎山中兮 사방에 불길 활활 타들어 오니 / 火烈烈而四圍 마른 포가 되어서 죽을지언정 / 寧爲槁腊而臭腐兮 녹봉 받아 살찌기를 원치 않노라 / 不顧食祿而身肥 통 갈빗대 어찌 그리 잔인했던가 / 嗟騈脅之太忍兮 충고하여 바로잡기 어려우리니 / 難可與啓沃而格非 면전 두어 그의 제사 받들었지만 / 縱置綿田以祀之兮 살았을 때 굶주림을 구제 못했네 / 無救當時之飢 한번 먹은 마음 결코 안 바꿨으니 / 苦直行而不回兮 선생과 같은 사람 흔치 않을 터 / 如先生者幾希 역사책을 들춰 보며 긴 한숨 쉬고 / 撫靑史而太息兮 위대한 선생의 덕 우러르노라 / 仰景德之巍巍 오자서를 슬퍼하다〔弔伍子胥〕 육웅의 나라가 중간에 망해 / 鬻熊之邦中圮兮 미사가 불타 재가 휘날렸는데 / 羋社颺而爲灰 중옹의 실마리는 다시 이어져 / 仲雍之緖重續兮 밝은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았네 / 如白日之方開 문신하는 풍속 변해 의관 차렸고 / 文身化爲冠帶兮 나약하던 사람 변해 재목이 되니 / 綿力變爲長材 누가 이런 부강을 이루었던가 / 誰能致此富强兮 오씨 성(姓)의 걸출한 인물이로다 / 惟伍氏之英魁 난리 피해 외국으로 달아난 뒤로 / 挺身逃亂兮 복수하겠다는 일념 변하지 않고 / 秉志不回 오나라 왕을 도와 패업 이루어 / 助吳成霸兮 온 천하를 압도하고 업신여겼네 / 雄視八垓 초나라의 언과 영을 함락하기를 / 擧彼鄢郢兮 나뭇가지 쳐내듯이 쉽게 했지만 / 如伐條枚 복수의 뜻이 비록 크다고 한들 / 復讎之志雖大兮 어찌 마른 뼈에까지 매질했던가 / 何至鞭冢中之枯骸 오훼가 쓸개 빨며 흘겨보았고 / 烏喙嘗膽而睥睨兮 곤란해진 재비가 그를 미워해 / 宰嚭狼狽而虎猜 당대의 으뜸가는 훈명으로도 / 使蓋世之勳名兮 간악한 모함 면치 못하였구나 / 遭姦邪之孼媒 동문에 걸어 놓은 마른 눈알이 / 掛枯眼於東門兮 달려오는 구천의 군대를 보니 / 見句卒之飛來 그토록 깊은 충심 인정 못 받고 / 忠惓惓而不見察兮 그대 어찌 이곳에서 곤욕당했나 / 子何困乎此欸 참으로 그대 한 말 틀리지 않아 / 信其言之不誣兮 황폐해진 대에 사슴 뛰놀았지만 / 麋鹿遊於荒臺 군자의 도 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 所貴君子之道兮 재앙 피해 물러날 줄 알아서인데 / 能引退而遠災 기미 보고 떠나가지 못하였으니 / 不能見幾而作兮 뒤늦게 분노한들 무엇하리오 / 徒憤怒其何爲哉 물결 머리 바라보며 조상(弔喪)을 하고 / 望潮頭而一弔兮 장한 혼백 향해 나의 슬픔 부치네 / 歎壯魄而寓余哀 예양을 슬퍼하다〔弔豫讓〕 하늘은 어찌하여 조씨를 도와 / 天何佑趙兮 조맹을 제후로 삼으셨던가 / 趙孟爲侯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다고 / 有何罪惡兮 지백의 두개골에 칠까지 했나 / 智氏漆頭 세상에 섭정 같은 사람 없으니 / 世無聶政兮 누구에게 내 계획을 상의할거나 / 誰適與謀 불의로써 부귀를 누리는 것은 / 不義而富兮 결코 내가 추구하지 않는 바라오 / 余無所求 국사로서 나를 후대해 주었는데 / 蒙國士之厚遇兮 얼굴 바꿔 원수를 섬기려 하랴 / 肯反面而事讎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으니 / 所不共於戴天兮 한 번 먹은 마음 결코 바꿀 수 없네 / 志專專其未休 문둥이에 벙어리 행색을 하고 / 癩身呑炭兮 길거리를 돌면서 구걸하다가 / 行乞道周 다리 밑과 변소에서 기회 노리니 / 伏橋塗廁兮 당랑이 수레채에 대항하는 꼴 / 若螳蜋之拒輈 허리춤의 비수를 어루만지며 / 撫腰間之匕首兮 감개하여 홀로 슬피 노래 부르고 / 獨感慨而悲謳 혹시라도 복수할 수 있길 바라니 / 冀萬一之獲復兮 내 힘이 부칠지를 어찌 알리오 / 孰知余力之不侔 세 차례 뛰어올라 옷깃을 베어 / 三踊躍而斬裾兮 그나마 설욕하여 근심을 푸니 / 庶雪憤而舒憂 구렁에 뒹굴 것을 잊지 않음이 / 不忘在溝壑兮 지사가 지녀야 할 자세라 했네 / 志士所由 만약 나의 정성이 부족하다면 / 苟余誠之有缺兮 전현(前賢)에게 어찌 고개 들 수 있으랴 / 寧不有愧於前脩 인정이 배반하길 밥 먹듯 하여 / 人情反覆兮 신하가 돌아서면 원수 되는데 / 朝臣暮仇 선생처럼 의리를 지켰던 이는 / 有如先生兮 아득하여 짝을 찾기 어려우리라 / 邈難與儔 후세에 두 마음을 지닌 사람들 / 使後世二心之人兮 부끄러워 이마에 땀 흐르게 하네 / 咸泚顙而含羞 형경을 슬퍼하다〔弔荊卿〕 진 시황이 칼을 쥐고 천하를 욕심내니 / 秦王按劍兮隘區寰 합종(合縱) 깨져 연횡(連橫) 되자 육국의 힘 약해졌네 / 從變爲橫兮六王孱 탄환처럼 조그마한 유연의 옛 나라를 / 幽燕故邦兮小彈丸 호랑 같은 진나라가 삼킬 기회 엿보는데 / 虎狼貪肉兮不忘餐 태자 단이 경박하고 얕은 계책 세웠으니 / 輕謀淺慮兮太子丹 진무양(秦舞陽)은 멍청하고 완악한 아이일 뿐 / 舞陽小豎兮何癡頑 오직 우리 형경은 철석같은 간장이라 / 惟我荊卿兮壯心肝 어려움을 마다 않고 한마디로 승낙하니 / 一言唯諾兮不辭難 역수에는 거센 바람 놀란 물결 솟구치고 / 易水風急兮驚波瀾 흐느끼는 이별가와 슬픈 연주 뒤섞였지 / 離歌掩泣兮雜哀彈 천리 멀리 서쪽으로 함곡관에 들어가자 / 千里西行兮入函關 하늘 같은 궁궐에는 구경(九卿)들이 서 있는데 / 君門如天兮九賓班 지도 펼쳐 올리는 때 얼굴 먼저 붉어지고 / 披圖奉進兮先赧顔 시퍼렇게 번뜩이는 비수 문득 드러났네 / 匕首忽發兮光芒寒 허둥대다 빗나가서 옷소매만 잘라지니 / 絶袖未及兮空蹣跚 장사가 한번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고 / 壯士一去兮不復還 부자간에 서로 죽여 소사가 망해 버려 / 父子相屠兮召社殘 말하려니 코끝이 시큰하고 매워지네 / 所可言之兮鼻辛酸 가의를 슬퍼하다〔弔賈誼〕 하늘의 뜻 기필할 수 없는 것이니 / 天不可必兮 현우를 분별하지 못하는구나 / 天不辨其賢愚 내치는 자 쓰는 자가 거꾸로 이니 / 賢者擯而愚者庸兮 하늘의 도 어찌 그리 잘못됐던가 / 何天道之多誣 낙양의 재능 있는 위대한 인물 / 偉哉洛陽之才子兮 한 시대의 진정한 유자(儒者)였으니 / 眞一代之醇儒 그가 지어 올렸던 치안 방책은 / 彼治安之爲策兮 실로 나라 경영하는 계책이었지 / 實經濟之嘉謨 황제께서 나의 충정 헤아리시어 / 皇攬揆余之中情兮 웃으시며 온화하게 대해 주시고 / 乃色笑而溫兪 가상하게 여겨 자주 승진시키어 / 蒙嘉奬而九遷兮 국가 정책 우러러 돕게 하였네 / 仰潤色乎皇圖 어찌하여 소인들이 교묘한 말로 / 何佞口之爲巧兮 꾸며 대어 참소하고 아첨을 하여 / 構貝錦而爲諛 나라의 큰 그릇이 될 만한 이를 / 使廊廟之大器兮 끝내 궁한 처지로 빠뜨렸던가 / 竟坎軻於窮途 낮고 습한 장사에서 고생하다가 / 處長沙之卑濕兮 날아든 복조에게 해를 입었네 / 傷鵩鳥之止隅 조정 가득 들어찬 많은 용들이 / 紛群龍兮滿朝 경쟁하듯 붉은 관복 과시하건만 / 競誇詡於紫朱 꼿꼿하게 바른말을 다한 그대는 / 夫何子之博謇兮 비천한 백성만도 못하였으니 / 曾不如樸樕之小夫 제값 받길 기다려도 팔리지 않아 / 求善價而莫售兮 좋은 옥을 품고 있을 뿐이었도다 / 徒懷瑾而握瑜 허나 이는 그대 운명 박복해서니 / 亦惟子命之賤薄 강관에게 죄를 물어 무엇하리오 / 其於絳灌兮何誅 문사가 대중에게 회자되는 건 / 文詞膾炙乎衆口兮 그 누구도 선생에게 비할 수 없고 / 非他人之支吾 하신 말씀 금석보다 무거웠기에 / 所言重於金石兮 후인들의 본보기로 남아 있으니 / 爲後人之範模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 寥寥數千載之下兮 지사의 슬픈 탄식 더할 뿐이네 / 增志士之嗟吁 당고를 슬퍼하다〔弔黨錮〕 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땐 / 我生之初 세도가 아직까지 순박했는데 / 世道淳 그 뒤로 세상이 크게 변하여 / 我生之後 이렇게 어지러운 때 만났도다 / 逢此不辰 황천의 명이 어찌 일정치 않아 / 皇天之不純命兮 이렇게도 잔인하게 침묵하는가 / 何默默而不仁 임금은 임금다운 구실 못하고 / 君非其君兮 신하는 제 본분을 지키지 않아 / 臣非其臣 나라가 날로 더욱 병들어 가서 / 邦國日以殄瘁兮 현인들을 다치고 죽게 하였네 / 乃剝喪于賢人 포효하는 범과 표범 제어 못하고 / 虎豹咆哮而莫制兮 뒤따라서 노구가 사납게 짖어 / 盧狗又從而狺狺 봉새와 난새 잡아 굽고 삶으며 / 炙鳳鳥而烹鸞兮 추우와 기린을 유린하는데 / 躪騶虞而屠麟 화를 피해 달아날 방법이 없어 / 顧飛走之無計兮 갑자기 그물 속에 걸려 버렸네 / 忽罦罻之嬰身 일망타진시키려고 작정을 하여 / 冀一網而打盡兮 남김없이 모조리 전멸시키니 / 不遺微物之毛鱗 해골을 드러낸 채 죽을지언정 / 寧暴骨而萎絶兮 저들과 한통속이 될 순 없도다 / 不忍和光而同塵 의로움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겨 / 義或有重於死兮 다 함께 죽는 것을 꺼리지 않고 / 不憚載胥而沈淪 앞다투어 절의를 숭상했으니 / 爭務尙其節義兮 뜻과 기상 하늘처럼 드높았어라 / 意氣薄乎秋旻 몸은 비록 죽어서 사라졌어도 / 身雖沒而磨涅兮 이름은 만대에 더 새로워지니 / 名萬古而愈新 후세에도 상상하며 개탄하는데 / 後世猶可追想而慨歎兮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어떠했으랴 / 況當世之人民 황제는 왜 살피지 않으셨던가 / 何靈脩之不察兮 그 또한 시운이 꽉 막힌 탓일 터 / 亦時運之孔屯 그대들 위해 한 번 통곡하자니 / 爲子一慟兮 슬픔으로 정신이 아뜩하구나 / 黯然傷神 오왕을 슬퍼하다〔弔五王〕 하늘은 어찌 이리 교활한 인간 낳아 / 天胡生此巨猾兮 끝도 없는 해독을 끼치게 만들었나 / 毒浩浩而無涯 암탉이 새벽에 울어 대더니 / 作牝鷄之鳴晨兮 휘적으로 여와의 지위를 이어 / 踐翬翟於女媧 불륜으로 보위를 더럽게 하고 / 穢宸極而聚麀兮 연꽃 같은 육랑을 더듬었도다 / 探六郞之蓮花 육척의 고아 어찌 의탁할거나 / 六尺之孤何托兮 제비가 황가를 쪼아 댔어라 / 燕啄啄乎皇家 걸출하고 충성스런 다섯 신하는 / 五俊傑之藎臣兮 모두가 비범하고 고결한 인물 / 咸倜儻而脩姱 충성이 내면에서 솟아났으니 / 忠誠之旣內激兮 그 마음 진정으로 가상했도다 / 信中心之可嘉 주발이 왼쪽 어깨 드러내고서 / 袒周勃之左肩兮 대왕(代王)의 수레 맞아들임으로써 / 迎代邸之鑾車 선리의 뿌리에서 / 使仙李之本根兮 찬란하게 다시 꽃을 피우게 했네 / 復燁郁而敷葩 앞 수레의 전복을 왜 교훈 안 삼고 / 何前車之不戒兮 애가에게 재차 발정 나게 했던가 / 嫪再汚乎艾猳 우물 속의 개구리가 / 安知井底之蛙兮 등천하는 뱀이 될 줄 알았으랴만 / 翻作騰天之蛇 동류(同類)가 아닌데도 남겨 뒀으니 / 非其類而不盡鋤兮 커진 뒤엔 없애기가 어려웠을 터 / 蔓難圖於萌芽 모토가 늘었지만 소용이 없이 / 增茅土之何益兮 끝내 뼈가 먼 변방에 버려졌으니 / 竟委骨於荒遐 어찌하여 선한 사람 형벌을 받고 / 善何緣而顯戮兮 악한 사람 떵떵대며 부귀 누리나 / 惡無徵而紛華 공로를 왜 끝까지 갚으려 않고 / 何酬功之未終兮 도리어 죄의 그물 내게 씌우나 / 反罪罟之我加 낭패를 당했지만 뭘 원망하랴 / 縱蹭蹬其何怨兮 시운이 어긋나서 그런 것일 뿐 / 亦時運之舛差 후대에 책을 펼쳐 읽는 사람들 / 使後人之披縹帙者 모두 그댈 생각하며 슬픔에 젖네 / 莫不爲子而傷嗟 장순을 슬퍼하다〔弔張巡〕 비바람이 지붕에 거세게 불면 / 風雨萃屋兮 마룻대와 추녀가 기울어지고 / 棟宇頹傾 모진 바람 바다를 마구 흔들면 / 獰風擺海兮 놀란 물결 더욱 높이 솟구치는 법 / 波瀾益驚 개원에서 천보로 넘어가면서 / 自開元變爲天寶兮 천하가 혼란 속에 휩싸였으니 / 寰宇失其昇平 어찌하여 안녹산이 마구 날뛰어 / 夫何祿兒之跋扈兮 황지에서 무기 훔쳐 장난쳤던가 / 盜弄潢池之兵 신룡이 물을 잃어 거처 옮기고 / 神龍失水而離居兮 시랑이 양경을 차지하였네 / 豺狼據乎兩京 장허는 위대하고 큰 인물로서 / 偉張許之卓犖兮 가슴 가득 나라 향한 충성심 품고 / 藹滿腹之忠誠 강회의 상류 지역 제어하면서 / 控江淮之上流兮 고립된 수양성을 굳게 지켰네 / 嬰睢陽之孤城 구원병을 요청해도 듣는 이 없어 / 諒呼救而無聞兮 외롭고 약한 형세 한스러워도 / 恨援寡而勢輕 날로 세력 커져 가는 반군에 맞서 / 抗方張之寇盜兮 완강하게 적군의 남하(南下) 막았네 / 鯁喉牙而使不得南行 천자의 화상 향해 절하며 울고 / 拜聖像而流涕兮 지친 병졸 불러 모아 맹세했으며 / 會羸瘁而喩盟 애첩의 고기 먹여 사기 진작해 / 食所愛而愈厲兮 작은 성을 지키는데 충성 다했지 / 守尺寸而猶貞 싸우다가 패하여서 죽을지언정 / 寧力不足而自斃兮 절개 꺾고 명예 실추시킬 순 없네 / 余何忍屈節而隳名 어찌하여 하늘이 돕지 않아서 / 胡老天之不助兮 결국에는 반군에게 잡혀갔던가 / 檻車竟赴乎虜營 누구든지 한 번은 죽는 법이니 / 人固有一死兮 귀한 바는 목숨 바쳐 의를 얻는 것 / 所貴取義而舍生 죽은 사람 살아올 수 없는 것이니 / 嗟九原之不可作兮 높다란 쌍묘만이 보일 뿐이네 / 但見雙廟之崢嶸 사당에 여단과 초황 올리니 / 奠荔丹與蕉黃兮 영원한 명성 누가 존경 않으랴 / 孰不企千載之英聲 이백을 슬퍼하다〔弔李白〕 나 이백을 생각하노니 / 我思白也 그는 신선 무리였네 / 亦仙之曹 장경성이 찬란하게 내리비추니 / 粲長庚之下垂兮 절세의 영웅호걸 기상 갖췄고 / 鍾絶代之英豪 문장의 아름다움 비할 바 없어 / 文章之美無度兮 오색 꽃이 채색 붓에 피어났어라 / 五花生於彩毫 남겨 놓은 수천 편의 성대한 시가 / 繽千篇與萬篇兮 국풍(國風)과 이소(離騷)의 여운 이으니 / 續餘韻乎風騷 큰바람이 사나운 기세로 일어 / 若長風之奮發兮 만 구멍이 일제히 부르짖는 듯 / 鼓萬竅之呼號 저자에서 금 거북을 전당 잡혀서 / 典金龜於市上兮 열 말의 술 마시고 취하였는데 / 醉一斛之春醪 홀연 입궐 재촉하는 명이 내리니 / 忽蒙天之促召兮 취한 눈엔 구름이 어른거리듯 / 亂雙眼之雲飄 샘물을 끼얹고야 술이 깼지만 / 泉灑面而始覺兮 흥이 남아 즐겁고 화락하였네 / 猶餘興之陶陶 격조 높은 〈청평조〉의 악장을 짓되 / 作淸平之雅章兮 커다란 고치에서 실을 뽑는 듯 / 若巨繭之抽絲 황제께서 흡족하여 활짝 웃으며 / 動天顔之一笑兮 구름 문양 비단 도포 하사하셨네 / 賜雲霞之錦袍 어찌하여 쇠파리가 옥을 더럽혀 / 何蒼蠅之點玉兮 궁벽하고 먼 시골로 쫓겨 갔던가 / 遂遠竄乎蓬蒿 금계를 바라지만 못 돌아간 채 / 望金鷄之不回兮 채석에서 목란 노를 저어 갔도다 / 掉采石之蘭橈 취해서 바라보니 한 조각 달이 / 醉愛一片之金餠兮 만 이랑의 물결 속에 잠겨 있기에 / 隱萬頃之蒼濤 손을 담가 건지려고 애를 쓰다가 / 手弄之而不已兮 순식간에 고래 타고 떠나갔어라 / 奄騎鯨而遊遨 뛰어난 재능 펴지 못하였으니 / 抱奇才而莫施兮 지우(知遇) 입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 恨當時魚水之難遭 이 사람 아득하게 멀어져 가고 / 歎斯人之邈遠兮 종이 위에 남은 시만 볼 뿐이로세 / 所見者惟紙上之風謠 악악왕을 슬퍼하다〔弔岳鄂王〕 충성하고 화를 당한 사람 있으니 / 世有作忠以罹患兮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네 / 曾不知其所爲 생각건대 장군은 영웅호걸로 / 仰懷將軍之英傑兮 시대를 진정 잘못 타고났었지 / 諒委質之非時 하늘과 땅의 자리 뒤바뀐 시대 / 天地兮易位 백성들은 질곡에서 허덕이는데 / 民物兮瘡痍 흉악스런 알유가 궁궐에 있고 / 殿宇兮猰㺄 여우와 살쾡이가 관복 입었네 / 冠冕兮狐貍 취화가 허둥지둥 북으로 가매 / 翠華愴其北狩兮 울부짖는 신민들 쫓지 못하고 / 極呼籲而難追 더구나 구묘마저 지키지 못해 / 況九廟之失守兮 슬프게도 종거 이미 옮겨졌어라 / 悲鍾簴之已移 무장한 채 잠자 가며 맹세하였고 / 恒枕戈而發誓兮 하늘 보며 복수를 기약했으니 / 指蒼天以爲期 사람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 人皆扼腕而思奮兮 의사들은 분분하게 달려 나갔네 / 義士紛以交馳 머지않아 빼앗겼던 중원 되찾아 / 庶中原之可復兮 요기를 변방으로 흩을 만한데 / 散妖氛於邊陲 웬일인지 화의가 제기되더니 / 夫何和議之一騰兮 이어서 무고하여 죄를 씌웠네 / 讒口從而構之 개돼지를 향해서 절하게 하니 / 指犬豕而使之拜兮 아이들도 수치스런 마음 갖건만 / 童稚猶懷忸怩 어찌하여 당당한 대국으로서 / 豈以堂堂之大朝兮 예물 바쳐 스스로를 낮추었던가 / 奉繒帛而自卑 간사함을 어찌하여 자라게 하며 / 姦何爲而可長兮 충신을 어찌하여 억압하는가 / 忠何辜而見羈 강물 한가운데서 배를 버리고 / 若中流而棄船兮 길 가다가 준마를 묶어 놓은 격 / 若當路而縶驥 어찌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던가 / 夫何至於此極兮 예로부터 이런 일은 다반사였지 / 自古如斯 죽었지만 의롭다는 이름 얻으니 / 死得其義兮 내가 또 무엇하러 슬퍼하겠나 / 余又何悲 문문산을 슬퍼하다〔弔文文山〕 선비일 땐 아름다움 다해야 하고 / 爲士當盡其美 신하 되면 충성을 다해야 하니 / 爲臣當盡其忠 늠름한 충의 변치 않은 사람은 / 凜忠義之不磨兮 오직 문산 신국공을 꼽을 수 있네 / 惟有文山信國公 하늘이 송나라를 돕지 않아서 / 天不助乎我宋兮 속저의 왕업 장차 끝나려 하니 / 屬猪之業將終 금나라의 재앙 이미 하락 덮치고 / 金氛旣已染乎河洛兮 몽골족의 기병이 또 가득하였네 / 蒙騎又何充斥乎西東 도충이 창공 나는 큰 새가 되어 / 桃蟲變爲飛鳥兮 하늘에서 날개를 맘껏 펼치니 / 拚大翼於長空 온 천지에 오랑캐가 뒤섞였는데 / 混六合以左衽兮 누가 새의 암수를 구별하리오 / 誰知烏之雌雄 황옥이 어느 곳을 떠돌았던가 / 黃屋飄飄兮何許 쥐새끼가 범이 되고 물고기가 용이 됐네 / 鼠爲虎而魚爲龍 한 조각의 애산을 보주로 삼아 / 保崖山一片之地兮 배들을 끌어모아 궁을 만들고 / 聚艨艦而爲宮 남아 있는 병졸들을 거두어 모아 / 欲收餘燼兮 성 밑에서 일전을 치르고자 하였는데 / 猶欲背城借一而成功 하늘이 돕지 않아 버티지 못했으니 / 天之所廢不可支兮 이 몸이 어딜 가서 누굴 따를까 / 余何去而何從 여섯 곡의 노래가 이미 끝나고 / 噫六歌之已闋兮 남쪽을 바라보며 슬퍼하는데 / 望南極而忡忡 흰 해가 가리어져 빛을 잃어서 / 白日掩其無光兮 나의 붉은 충심을 비추지 않네 / 不照余之丹衷 공자의 살신성인(殺身成仁)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 / 孔成仁而孟取義兮 언제나 가슴속에 새겨 뒀으니 / 常佩服於心胸 심지가 이미 굳게 정해졌기에 / 顧內植之已固兮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네 / 甘就死而從容 죽음을 새털보다 가볍게 여겨 / 死有輕於鴻毛兮 이름이 영원토록 남아 있으니 / 名萬古而無窮 지금까지 중국과 주변 민족들 / 至今華與夷兮 높은 절개 공경하고 우러른다오 / 敬仰高風
[주C-001]비조사(悲弔辭) : 역사 속 특정 인물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다. 모두 12편으로 되어 있으며, 각 편마다 해당 인물을 뒤에 원주(原註) 형식으로 밝혀 두었다. 그러나 원문의 체재를 따를 경우 해당 인물 및 배경에 대한 주석이 해당 시의 뒤에 놓이게 되므로, 편의를 돕기 위해 원주를 앞으로 옮겨 소제목(小題目)으로 처리하였다. [주D-001]백이(伯夷)와 숙제(叔齊) : 은(殷)나라 제후인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가 동생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숙제는 형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백이가 “부친의 명이다.” 하고 달아나니, 숙제도 즉위하려 하지 않고 달아났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중자(中子)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주(周)나라 문왕(文王) 서백(西伯)이 노인들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주나라로 갔으나, 이르러 보니 문왕은 이미 죽고 아들 무왕(武王)이 즉위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무왕이 문왕의 신주(神主)를 수레에 싣고 은나라 주왕(紂王)을 치려 하므로, 백이와 숙제가 무왕의 말을 붙잡으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무왕이 끝내 은나라를 쳐서 천하를 통일하니,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주D-002]고죽(孤竹)의 옛 동산 : 고죽은 고죽(觚竹)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에서 열하성(熱河省) 조양현(朝陽縣) 일대에 있었다. 난하(灤河)에 청성묘(淸聖廟)라 불리는 백이와 숙제의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 사행(使行)을 가는 사람들이 들러보곤 하였다. [주D-003]주나라 왕 …… 하니 : 무왕이 부친 문왕의 상을 다 마치지도 않고 신주를 수레에 싣고 은나라 정벌에 나섬으로써 주변 제후국들을 전쟁터로 달려 나오게 했다는 말이다. [주D-004]폭력으로 …… 것인데 : 무왕이 폭군 주왕(紂王)을 주벌(誅罰)한다는 명분으로 은나라를 쳤지만, 이 또한 하나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불렀다는 〈채미가(採薇歌)〉에 나오는 말로,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저 서산에 올라가서, 고사리를 뜯도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면서, 자기의 그릇됨을 모르도다. 신농과 우하가 홀연히 사라지니, 나 이제 어디로 돌아갈거나.〔登彼西山兮 採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주D-005]인(仁)을 …… 남겼거니와 :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라고 질문한 데 대해 공자가 “옛날의 성인이었다.”라고 답하고, 자공이 다시 “원망했습니까?”라고 묻자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어찌 원망하였겠는가.”라고 답한 것을 가리킨다. 《論語 述而》 [주D-006]완악하고 …… 교화되도다 :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에 “성인은 백세의 스승이니, 백이와 유하혜(柳下惠)가 그런 분이다. 그러므로 백이의 풍도(風度)에 대해 들은 사람은 완악한 지아비가 방정해지고 나약한 지아비가 뜻을 세우며, 유하혜의 풍도에 대해 들은 사람은 각박한 지아비가 돈후해지고 인색한 지아비가 너그러워진다.”라고 하였다. [주D-007]비간(比干) : 은나라 주왕(紂王)의 숙부로, 주왕이 갖은 학정(虐政)과 음란한 행동을 일삼자 계속해서 강력하게 간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史記 卷3 殷本紀》 《論語 微子》 [주D-008]갱가(賡歌)의 …… 뒤로 : 태평스러웠던 성인(聖人)의 치세(治世)가 끝났다는 말이다. 갱가는 노래를 서로 이어 부르는 것인데, 여기서는 순(舜) 임금의 조정에서 군신(君臣)이 노래를 이어 부르며 좋은 정치를 하도록 서로 경계하였던 일을 가리킨다. 순 임금이 “대신들이 기쁘게 일을 하면, 임금의 정치가 흥기되어, 백관들의 일이 잘 될 것이다.〔股肱喜哉 元首起哉 百工煕哉〕”라고 노래하자, 고요(皐陶)가 “임금님이 밝으시면, 신하들도 어질어서, 만사가 안정되리이다.〔元首明哉 股肱良哉 庶事康哉〕”라고 화답하고, 또 이어서 “임금님이 좀스러우면, 신하들이 나태해져서, 만사가 그르쳐질 것입니다.〔元首叢脞哉 股肱惰哉 萬事墮哉〕”라고 하였다. 《書經 益稷》 [주D-009]임금이 …… 보니 : 토개(土芥)는 흙과 지푸라기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임금이 신하를 토개처럼 보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 보듯이 한다.”라고 하였다. [주D-010]수(受) : 은나라 주왕(紂王)의 이름이다. [주D-011]音 : 대본에는 ‘飮’으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12]염처(艶妻)를 총애하여 기세부리고 : 염처는 아름다운 처인데, 여기서는 은나라 주왕의 비 달기(妲己)를 가리킨다. 주왕이 달기의 미색에 빠져 달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고, 달기를 즐겁게 해 주려고 온갖 학정(虐政)을 일삼다가 멸망을 초래하였다. 《시경》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에 “염처가 기세를 부리며 그대로 있도다.〔艶妻煽方處〕”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3]염래(廉來) : 주왕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받았던 간신 부자(父子)인 비렴(飛廉)과 악래(惡來)이다. [주D-014]소사(少師)처럼 …… 않으며 : 주왕의 폭정을 바로잡고자 간언해도 듣지 않자 은나라를 떠났던 미자(微子)를 두고 한 말이다. 미자는 이름이 계(啓)로, 은나라 왕 무을(武乙)의 아들이자 주왕의 서형(庶兄)이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제기(祭器)를 가지고 군문(軍門)에 나아가 항복하자, 무왕이 그를 풀어 주고 작위(爵位)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성왕(成王)은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의 반란을 진압한 뒤 미자로 하여금 은나라 제사를 받들게 하고 송(宋)에 봉해 준 바 있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소사는 비간(比干)이 맡았던 고경(孤卿)의 직책인데, 여기서 미자를 소사라고 한 것은 작자의 착오로 보인다. 《書經 微子》 [주D-015]태사(太師)처럼 …… 않노라 : 태사는 삼공(三公)으로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기자는 이름이 서여(胥餘)이며, 주왕의 제부(諸父)라고도 하고 서형이라고도 한다. 주왕이 폭정을 행할 때 충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노예가 되었다가, 마침내 몸을 숨기고 거문고를 타며 슬픈 마음을 달랬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주D-016]도리어 …… 냈도다 : 비간이 직언을 올리기를 그치지 않자, 주왕이 노하여 “내 듣건대 성인은 심장에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더라.”라고 하며 비간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보았다고 한다. 《史記 卷3 殷本紀》 [주D-017]삼인(三仁) : 공자가 “은나라에 세 인자가 있었다.”라고 일컬은 미자, 기자, 비간이다. 《論語 微子》 [주D-018]삼량(三良) : 세 명의 선량한 신하라는 뜻으로, 춘추 시대 진 목공(秦穆公)을 장사 지낼 때 순장(旬葬)된 자거씨(子車氏)의 세 아들 엄식(奄息), 중항(仲行), 침호(鍼虎)를 가리킨다. 목공이 죽었을 때 177명이나 되는 사람을 순장했는데, 이들 세 사람도 그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황조(黃鳥)〉 시를 지어 슬퍼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文公6年》 《詩經 秦風 黃鳥》 [주D-019]보수(寶樹) : 옥수(玉樹)와 같은 말로, 훌륭한 자제를 비유하는 데 쓰인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그의 조카 사현(謝玄)에게 어떤 자제가 되고 싶으냐고 묻자 “비유하자면 지란(芝蘭)과 옥수가 뜰에 난 것같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한 데에서 유래된 말이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謝玄》 [주D-020]아버지의 …… 좇아서 : 엄식, 중항, 침호 세 사람의 아버지 자거씨는 진나라 대부였다. 목공이 신하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살아서 이런 즐거움을 함께했으니 내가 죽었을 때도 나와 슬픔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자, 자거씨가 자신의 세 아들을 순장하기로 약속하였고, 이로 인해서 목공이 죽은 뒤 아들을 순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毛詩稽古編 卷7》 여기서는 자거씨가 술에 취해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 아들을 순장시킨 것을 비판한 말이다. [주D-021]사람들이 …… 하니 : 《시경》 〈진풍(秦風) 황조(黃鳥)〉에 “저 푸른 하늘이여, 우리 훌륭한 사람을 죽이도다. 만일 바꿀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제 몸을 백 번이라도 바치리라.〔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라고 하였다. [주D-022]살았을 …… 용서했건만 : 황발(黃髮)은 나라의 원로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진(秦)나라의 백리해(百里奚)와 건숙(蹇叔)을 지칭한다. 목공 33년에 목공이 정(鄭)나라를 치려 하였는데, 백리해와 건숙이 반대하였으나 목공이 듣지 않고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孟明視)와 건숙의 아들 서걸술(西乞術) 및 백을병(白乙丙)에게 정벌을 명하였다. 그러나 진(晉)나라 국경 근처에 이르렀을 때 진(晉)나라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세 장수가 포로로 잡혀갔는데, 진(晉)나라에서 이들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이들 세 장수가 돌아오자 목공이 소복(素服)을 입고 교외로 나가 맞이하고 곡을 하면서 “내가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들이 욕을 당한 것이다. 그대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대들은 마음을 다해 설욕할 각오를 하도록 하라.” 하고는 세 사람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다시 맹명시 등을 보내어 진(晉)나라를 크게 쳐부수어 이전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다시 진격하면서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사람들은 황발의 노인들에게 자문을 구했기 때문에 실수가 없었다. 내가 전에 백리해와 건숙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던 점을 뉘우쳐 이렇게 맹세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과실을 기억하게 하노라.” 하였다. 《史記 卷5 秦本紀》 [주D-023]알겠도다 …… 이유를 : 목공 37년에 융(戎)을 쳐서 12국을 복속시키고 1000리의 영토를 넓혀 마침내 서융(西戎)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2년 뒤에 목공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 177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순장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이 이에 대해 논평하기를 “진나라가 서융의 패자가 되었지만 제후의 맹주가 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목공이 죽으면서 그 백성들을 버리고 선량한 신하들을 거두어 순장하게 하였으니, 진나라가 동쪽으로 정벌하지 못하게 된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5 秦本紀》 [주D-024]목우(木偶)를 …… 끼쳤으니 : 목우는 순장할 때 사람 대신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다. 공자가 “처음으로 목우를 만든 자는 아마도 후손을 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맹자(孟子)는 그 이유를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장례에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였다. 《孟子 梁惠王上》 여기서는 나무 인형을 만들어 장례에 사용했던 것에서 유래하여 사람을 순장하는 극단적인 폐단이 나오게 되었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주D-025]뒷날에 …… 없었네 : 항우(項羽)와 한 고조(漢高祖)가 패권을 다투던 때에 항우가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에 들어가서 진 시황(秦始皇)의 왕릉을 파헤치고 보물을 사사로이 취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漢書 卷1 高祖紀》 죽어서까지 사람을 순장하고 온갖 보물을 함께 묻음으로써 무덤이 도굴되는 사태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불쌍하게 여기거나 동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D-026]황조(黃鳥) 시 : 《시경》 〈진풍(秦風)〉의 편명이다. 시에 “저 푸른 하늘이여, 우리 훌륭한 사람을 죽이도다. 만일 바꿀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제 몸을 백 번이라도 바치리라.〔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라고 하였다. 진 목공(秦穆公)이 죽었을 때 177명이나 되는 사람을 순장했는데, 세 명의 선량한 신하인 자거씨(子車氏)의 세 아들 엄식(奄息), 중항(仲行), 겸호(鍼虎)도 그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이 시를 지어 슬퍼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文公6年》 [주D-027]신생(申生) :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의 태자이다. 헌공이 서융(西戎) 중의 하나인 여융(驪戎)을 정벌하고 여희(驪姬)를 얻었는데, 여희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가 낳은 해제(奚齊)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태자인 신생을 곡옥(曲沃)으로 내보내고, 다른 아들인 공자(公子) 중이(重耳)는 포(蒲)로, 이오(夷吾)는 굴(屈)로 보냈다. 여희가 신생을 죽이려고 계책을 꾸며 신생이 헌공을 독살하려 한 것처럼 누명을 씌우자, 헌공이 크게 노하여 태자의 스승 두원관(杜原款)을 죽이니, 태자가 두려워 곡옥(曲沃)의 신성(新城)으로 달아났다. 어떤 사람이 신생에게 사실을 밝혀 억울한 누명을 벗으라고 권하자, 신생은 “내가 사실을 밝히면 여희의 죄가 드러날 것이다. 아버님은 이미 늙으셨으니, 아버님으로부터 여희를 빼앗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고, 또 국외로 도망치라고 권하자 “아버님을 죽이려 했다는 더러운 누명을 쓰고 내가 다른 나라로 도망친들 그 나라에서 나를 받아 주겠는가.”라고 하고는 자살하였다. 《史記 卷39 晉世家》 [주D-028]감초를 캐고 …… 하려는가 : 진 헌공이 여희의 참소에 넘어가서 신생을 죽인 일을 풍자한 구절이다. 《시경》 〈당풍(唐風) 채령(采苓)〉은 참소하는 사람의 말에 넘어가는 사람을 풍자한 시인데 “감초를 캐고 감초를 캐기를, 수산 남쪽 고개에서 하려 하는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진실로 믿지 말지어다. 그대로 다 버려두고, 옳게 여기지 않는다면, 참소하는 사람의 말이, 어떻게 먹혀들랴.〔采苓采苓 首陽之巓 人之爲言 苟亦無信 舍旃舍旃 苟亦無然 人之爲言 胡得焉〕”라고 하였다. [주D-029]교활한 저 오랑캐 : 여희가 서융(西戎) 출신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30]왜 …… 건가 : 제강(齊姜)은 태자의 죽은 어머니이다. 여희가 태자 신생을 모함할 때 태자에게 “내가 제강 꿈을 꾸었으니 태자는 속히 곡옥에서 제사를 지내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태자가 곡옥의 어머니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 지낸 음식을 헌공에게 올렸는데, 마침 헌공이 사냥을 나갔기 때문에 음식을 궁중에다 두고 돌아오니, 여희가 그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그러고는 헌공이 돌아와서 음식을 먹으려 할 때 여희가 “제사 지낸 음식이 멀리서 왔으니 시험을 해 보고 드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고수레를 하니 땅이 불쑥 솟아올랐고, 개에게 던져 주자 개가 죽었고, 소신(小臣)에게 주니 소신이 죽었다. 여희가 울면서 “태자가 어찌 이리도 잔인한 것입니까. 제 아버지조차 시해하고 대신 왕이 되고자 하니, 다른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라고 하며 태자를 모함하였다. 《史記 卷39 晉世家》 여기서는 제강을 꿈에 보았다는 여희의 계략에 대해, 논리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일을 신생이 무턱대고 따른 것을 한탄한 말이다. [주D-031]포(蒲)와 …… 됐건만 : 포와 굴(屈)은 공자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를 지칭한다.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이 서융(西戎) 중의 하나인 여융(驪戎)을 정벌하고 여희(驪姬)를 얻었는데, 여희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가 낳은 해제(奚齊)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태자인 신생(申生)을 곡옥(曲沃)으로 내보내고, 다른 아들인 공자(公子) 중이는 포로, 이오는 굴로 보냈다. 여희가 신생을 죽이려고 계책을 꾸며 신생이 헌공을 독살하려 한 것처럼 누명을 씌우자, 헌공이 크게 노하여 태자의 스승 두원관(杜原款)을 죽이니, 태자가 두려워 곡옥(曲沃)의 신성(新城)으로 달아났다. 어떤 사람이 신생에게 사실을 밝혀 억울한 누명을 벗으라고 권하자, 신생은 “내가 사실을 밝히면 여희의 죄가 드러날 것이다. 아버님은 이미 늙으셨으니, 아버님으로부터 여희를 빼앗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고, 또 국외로 도망치라고 권하자 “아버님을 죽이려 했다는 더러운 누명을 쓰고 내가 다른 나라로 도망친들 그 나라에서 나를 받아 주겠는가.”라고 하고는 자살하였다. 신생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위험을 느낀 두 공자가 헌공에게 고하지 않고 곧바로 포와 굴로 돌아가자, 헌공이 노하여 포와 굴을 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이들이 각각 국외로 망명하여 떠돌다가 나중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으니, 이오는 혜공(惠公)이 되었고, 중이는 그 뒤를 이어 문공(文公)이 되었다. 《史記 卷39 晉世家》 [주D-032]屈 : 대본에는 ‘棘’으로 되어 있는데, 오자로 판단되어 고쳤다. [주D-033]태자는 …… 건가 : 중이와 이오 두 사람은 공자의 신분이지만 위험을 피해 국외로 나갔다가 뒤에 왕위에 올랐는데, 신생은 태자이면서 왜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국외로 몸을 피하지 않았느냐고 개탄하는 말이다. [주D-034]군부께서 …… 즐거워하니 : 태자가 모함을 받아 신성으로 달아났을 때 어떤 사람이 태자더러 왜 스스로 왕에게 모함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느냐고 묻자, 태자가 “우리 임금께서 연로하신데, 여희가 아니면 잠자리도 불편해하시고, 음식도 맛있는 줄을 모르신다. 또 해명을 하더라도 임금께서 노하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035]이 한 …… 뿐이니 : 자신의 몸을 희생시키겠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양고기는 개미를 좋아하지 않지만 개미는 양고기를 좋아하니, 그것은 양고기는 누린내를 풍기기 때문이다.〔羊肉不慕蟻 蟻慕羊肉 羊肉羶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양이 죽어 개미 떼의 먹이가 되듯이 자신이 희생하여 여희의 무리를 기쁘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주D-036]신성(新城)에 …… 소문 : 《춘추좌씨전》과 《사기》에 실린 허황된 말을 두고 한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자 신생이 죽고 5년이 지나 이오(夷吾)가 진나라로 들어가 혜공(惠公)이 되어 태자를 개장(改葬)하였는데, 가을에 호돌(狐突)이 곡성에 갔다가 태자 신생을 만났다. 태자가 호돌을 수레에 태워 말을 몰게 하고는 “이오가 무례하므로 내가 상제(上帝)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라고 하고, “내가 진(晉)나라를 진(秦)나라에 줄 것이니, 장차 진(秦)나라가 대신 나를 제사 지내 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호돌이 “귀신은 동족이 지내는 제사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고, 백성은 동족이 아닌 신에게 제사 지내지 않는 법이니, 군(君)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또 백성은 무슨 죄입니까.”라고 하며 다시 생각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태자가 “좋다. 내가 상제에게 다시 청해 보겠다. 7일 후에 신성 서쪽에 무당이 있을 것인데, 그 무당을 통해서 내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7일 뒤에 호돌이 무당에게 가니, 태자가 호돌에게 말하기를 “상제가 나에게 죄 있는 자를 처벌하게 허락하셨으니, 이오는 한(韓)에서 패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지역의 아이들이 노래하기를 “공태자를 개장하였으니, 지금부터 십사 년 동안, 진나라가 창성하지 못하리니, 창성함은 형에게 달려 있다네.〔恭太子更葬矣 後十四年 晉亦不昌 昌乃在兄〕”라고 하였다. 그 뒤 혜공이 진(秦)나라 군대와 싸워 세 번 패하여 한(韓)에 이르러서 결국 포로가 되었다. 이때 진백(秦伯)이 호돌이 잠을 자지 않고 태자의 귀신을 만난 ‘요몽(妖夢)’을 실현시킨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10年, 15年》 《史記 卷39 晉世家》 [주D-037]개자추(介子推) :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개지추(介之推)라고도 한다. 헌공(獻公)의 아들 문공(文公) 중이(重耳)가 국난을 피해 19년 동안 국외로 떠돌 때 고생을 함께하며 그를 도왔다. 문공이 진나라로 돌아가서 왕위에 오른 뒤 역경을 함께한 신하들을 시상할 때 개자추를 잊고 빠뜨리자, 개자추가 어머니와 함께 면상(緜上)의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 살며 평생 나타나지 않았다. 뒤에 문공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서 면상을 둘러싼 땅을 모두 개자추의 봉지(封地)로 삼았다. 《史記 卷39 晉世家》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때 문공이 개자추를 찾기 위해 면상의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가 끝내 산에서 나오지 않고 나무를 끌어안은 채 불에 타 죽었는데, 문공이 이를 가련히 여겨 개자추가 죽은 날에 불을 피우지 못하도록 한 것이 한식(寒食)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古今事文類聚前集 卷8 禁火周制》 [주D-038]조위(趙魏)가 …… 돕고 : 조위는 중이가 망명하여 여러 나라를 돌아다닐 때 그와 함께하였던 조최(趙衰)와 위무자(魏武子)를 가리킨다. 《사기》에는 조최, 위무자, 문공의 외숙인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등 다섯 신하를 19년간 문공과 함께 망명하여 국외를 떠돈 신하로 거론하였으나, 《춘추정의(春秋正義)》 및 여러 주석가들은 가타와 선진 대신 사공계자(司空季子)와 개자추를 들고 있다. [주D-039]한범(韓范)은 그에게로 의탁했으니 : 한범은 송(宋)나라 때의 명재상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으로, 훌륭한 재상이 될 만한 인재들이 중이를 추종했다는 뜻이다. 문공이 국외로 떠돌아다닐 때 조(曹)나라 희부기(僖負羈)의 아내가 자신의 남편에게 “진나라 공자의 종자(從者)들은 모두 나라의 재상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라고 하며 중이에게 미리 손을 써 두기를 권하니, 희부기가 음식 속에 귀한 구슬을 넣어 중이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春秋左氏傳 僖公23年》 [주D-040]군자들이 …… 보호받았네 : 중이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 중에 군자들은 그에게 의탁하고 소인들은 보호를 받았다는 뜻이다. 《시경》 〈소아(小雅) 채미(采薇)〉에 “저 네 마리 말에 멍에를 메우니, 네 마리 말이 굳세고 굳세도다. 군자가 의탁하는 바요, 소인이 보호받는 바로다.〔駕彼四牡 四牡騤騤 君子所依 小人所腓〕”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41]환피(宦披) : 환관 피(披)로, 이제(履鞮) 또는 발제(勃鞮)라고도 한다. 피가 헌공을 섬길 때 헌공이 포(蒲)에 있는 중이에게 가서 자결하도록 압박하라고 시켰는데, 중이가 담을 넘어 달아나자 중이의 소매를 잘랐다. 또 혜공 때는 명을 받들고 중이를 살해하기 위해 장사들을 데리고 적(狄)으로 갔으므로 중이가 듣고 적(狄)에서 달아난 바 있다. 중이가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여성(呂省), 극예(郤芮) 등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난을 일으키려 하자, 이를 알아차린 피가 문공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서 찾아갔다. 문공이 예전에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두 가지 일로 꾸짖으며 만나 주지 않자, 임금을 섬기는 데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옛 제도라고 하면서 임금은 옛 원한을 마음에 담아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문공이 그를 접견하여 위험한 상황을 넘겼고, 그 후로 피는 문공의 신뢰를 받으며 그를 섬기게 되었다. 《史記 卷39 晉世家》 《春秋左氏傳 僖公24年, 25年》 [주D-042]수행했던 …… 날건만 : 본래 용(龍)은 성인(聖人)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뜻하나, 여기서는 문공과 함께 국외를 떠돌며 문공을 도왔던 신하들을 가리킨다.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하여 훌륭한 임금과 신하의 만남을 비유한 바 있다. [주D-043]뱀 …… 버려졌으니 : 개자추가 공훈을 인정받지 못한 채 몸을 숨기자 개자추의 종자(從者)가 이를 애석하게 여겨 궁궐 문에 글을 붙이기를 “용이 승천하려고 할 때 다섯 마리 뱀이 이를 도왔도다. 용이 이미 구름 속으로 올라가자 네 마리 뱀은 각각 집을 얻었는데, 한 마리 뱀은 홀로 원망하다가 끝내 종적을 감추고 말았도다.〔龍欲上天 五蛇爲輔 龍已升雲 四蛇各入其宇 一蛇獨怨 終不見處所〕”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본 문공이 자신이 개자추를 잊고 있었음을 깨닫고 개자추를 찾도록 하였다. 다섯 마리 뱀은 문공이 망명하여 여러 나라를 돌아다닐 때 그와 함께하였던 다섯 신하를 가리킨다. [주D-044]통 갈빗대 : 갈빗대가 하나로 붙어 있었다고 하는 진 문공 중이를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僖公23年》 [주D-045]면전(綿田) …… 받들었지만 : 면전은 면상(綿上) 주변의 봉지(封地)로, 개자추가 죽은 후 문공이 개자추에게 봉해 주어 그의 제사를 받들게 했던 땅이다. 《史記 卷39 晉世家》 [주D-046]飢 : 대본에는 ‘苦’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전사(轉寫) 과정에서 앞뒤 글자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주D-047]苦 : 대본에는 ‘飢’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전사 과정에서 앞뒤 글자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주D-048]오자서(伍子胥) : 오원(伍員)으로, 자서는 그의 자(字)이다. 선조 오거(伍擧)가 직간(直諫)으로 초 장왕(楚莊王)을 섬겨 현달한 이후 자손 대대로 초(楚)나라에서 이름을 떨쳤다. 부친은 초나라 대부 오사(伍奢)로, 평왕(平王) 때 태자 건(建)의 태부(太傅)가 되었다. 평왕이 태자를 장가들이기 위해 소부(少傅)인 비무기(費無忌)를 진(秦)나라에 보냈는데, 신부가 절색(絶色)인 것을 본 비무기가 평왕을 충동질하여 며느리 삼으려던 여자를 대신 차지하게 하였다. 비무기는 이 일로 평왕의 사후에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해서 평왕에게 태자를 이간질하여 변방으로 내보내도록 하고, 또 태자가 변방에서 제후국들과 연합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이간질하였다. 오사는 이에 대해 “왕께서는 어찌 참소하는 하찮은 소신(小臣) 때문에 골육을 멀리하십니까?” 하였으나, 비무기가 “왕께서 지금 제압하지 않으시면 나중에는 왕께서 사로잡힐 것입니다.” 하자, 평왕이 노하여 오사를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태자를 살해하게 하였는데, 태자는 누군가 미리 알려 주는 말을 듣고 송(宋)나라로 망명하였다. 비무기는 오사의 두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뒷날 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아비를 볼모로 해서 두 아들을 불러들이기를 권하였다. 평왕이 사람을 보내 “너희가 오면 너의 아비를 살려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니, 큰아들 오상(伍尙)이 가려 하였는데, 오자서가 만류하기를 “평왕이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아버지를 살려 주려는 것이 아니고, 후환이 두려워서 아버지를 볼모로 삼고 우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면 아버지와 함께 다 죽일 것이니, 아버지를 살리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른 나라로 달아나서 뒤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오상은 “나도 가면 다 죽을 것임을 알지만, 아버지가 우리를 불러 살려고 하는데 가지 않았다가 뒤에 복수도 하지 못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하면서 “너는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니 달아나거라. 나는 가서 죽겠다.” 하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오자서는 사자에게 활을 겨누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오(吳)나라로 달아났다. 오자서가 달아났다는 말을 들은 오사는 “초나라 군신들은 장차 전쟁에 시달릴 것이다.”라고 예언하였고, 오상이 가자 평왕은 예상대로 오사와 오상을 모두 죽였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합려(闔閭)를 섬겨 수차례 초나라를 공격하여, 결국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이 국외로 달아나게 만들었으며, 평왕의 무덤을 파 시체를 꺼내어 300차례 채찍질을 하였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가 왕위에 오른 뒤 회계(會稽)에서 월(越)나라 군대를 대파(大破)하였는데, 후환을 남기지 말고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화친을 받아들인 일로 인해 오자서는 부차와 사이가 소원해졌고, 결국 오자서를 모함하는 말을 믿은 부차가 내린 검으로 자결하였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주D-049]육웅(鬻熊)의 …… 망해 : 육웅은 주(周)나라 계련(季連)의 후예이다.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었는데, 그 자손들이 대대로 주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을 도운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 후손 웅역(熊繹)을 초만(楚蠻)에 봉하였으니, 바로 초(楚)나라이다. 초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평왕(平王)이 부정하고 무도한 행위를 일삼아 초나라 왕실을 혼란에 빠뜨리고, 모함하는 말을 믿고 오사(伍奢) 부자를 죽였다가 오자서와 오(吳)나라의 공격을 받아 그 아들 소왕(昭王)이 국외로 달아나게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史記 卷40 楚世家》 [주D-050]미사(羋社) : 초나라의 사직이다. 초나라의 성(姓)이 미(羋)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51]중옹(仲雍)의 …… 같았네 : 중옹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아들이다. 태왕이 막내아들인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계력의 아들인 창(昌)에게 이어지게 하려는 뜻을 가졌는데, 이를 알고 태왕의 장자인 태백(太伯)과 중옹이 함께 남쪽 형만(荊蠻) 땅으로 달아나서 문신(文身)과 단발(斷髮)을 하여 자신들이 쓰일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었다. 태백을 의롭게 여긴 형만 사람 1000여 가(家)가 귀부(歸附)하여 그를 오태백(吳太伯)으로 옹립하였고, 태백이 죽은 뒤에는 중옹과 중옹의 아들로 대를 이어갔는데,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뒤에는 중옹의 후손을 오(吳)나라에 봉하였다. 《史記 卷31 吳太白世家》 오자서가 오나라로 망명할 무렵 오나라 왕 수몽(壽夢)이 막내아들 계찰(季札)을 어질게 여겨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는데, 계찰이 사양하고 받지 않는 바람에 형제들이 차례대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계찰은 여러 제후국으로 사행을 가서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마지막에 왕위 계승의 차례가 되어도 끝내 피해 달아나서 형의 아들인 요(僚)가 왕위를 이어받게 하였다. 즉 오나라 왕실은 선조 중옹 때처럼 왕위 계승권을 형제들이 서로 양보할 정도로 사이가 돈독하였고, 제후국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고 칭송한 말이다. [주D-052]力 : 대본에는 ‘刀’로 되어 있는데, 오자로 판단되어 고쳤다. [주D-053]초나라의 언(鄢)과 영(郢) : 초나라의 수도이다. 문왕 때 영을 도읍으로 정했다가 혜왕(惠王) 때 언으로 천도하였다. [주D-054]어찌 …… 매질했던가 : 오자서가 초나라를 함락한 후 평왕의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어 300차례 채찍질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평왕이 태자를 장가들이기 위해 소부(少傅)인 비무기(費無忌)를 진(秦)나라에 보냈는데, 신부가 절색(絶色)인 것을 본 비무기가 평왕을 충동질하여 며느리 삼으려던 여자를 대신 차지하게 하였다. 비무기는 이 일로 평왕의 사후에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해서 평왕에게 태자를 이간질하여 변방으로 내보내도록 하고, 또 태자가 변방에서 제후국들과 연합하여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이간질하였다. 오사는 이에 대해 “왕께서는 어찌 참소하는 하찮은 소신(小臣) 때문에 골육을 멀리하십니까?” 하였으나, 비무기가 “왕께서 지금 제압하지 않으시면 나중에는 왕께서 사로잡힐 것입니다.” 하자, 평왕이 노하여 오사를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태자를 살해하게 하였는데, 태자는 누군가 미리 알려 주는 말을 듣고 송(宋)나라로 망명하였다. 비무기는 오사의 두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뒷날 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아비를 볼모로 해서 두 아들을 불러들이기를 권하였다. 평왕이 사람을 보내 “너희가 오면 너의 아비를 살려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니, 큰아들 오상(伍尙)이 가려 하였는데, 오자서가 만류하기를 “평왕이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아버지를 살려 주려는 것이 아니고, 후환이 두려워서 아버지를 볼모로 삼고 우리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면 아버지와 함께 다 죽일 것이니, 아버지를 살리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른 나라로 달아나서 뒤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오상은 “나도 가면 다 죽을 것임을 알지만, 아버지가 우리를 불러 살려고 하는데 가지 않았다가 뒤에 복수도 하지 못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하면서 “너는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니 달아나거라. 나는 가서 죽겠다.” 하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오자서는 사자에게 활을 겨누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오(吳)나라로 달아났다. 오자서가 달아났다는 말을 들은 오사는 “초나라 군신들은 장차 전쟁에 시달릴 것이다.”라고 예언하였고, 오상이 가자 평왕은 예상대로 오사와 오상을 모두 죽였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합려(闔閭)를 섬겨 수차례 초나라를 공격하여, 결국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이 국외로 달아나게 만들었으며, 평왕의 무덤을 파 시체를 꺼내어 300차례 채찍질을 하였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가 왕위에 오른 뒤 회계(會稽)에서 월(越)나라 군대를 대파(大破)하였는데, 후환을 남기지 말고 월나라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화친을 받아들인 일로 인해 오자서는 부차와 사이가 소원해졌고, 결국 오자서를 모함하는 말을 믿은 부차가 내린 검으로 자결하였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주D-055]오훼(烏喙)가 …… 흘겨보았고 : 오훼는 입이 새처럼 뾰족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가리킨다. 오왕 부차(夫差)가 회계(會稽)에서 월나라 군대를 대파하자 구천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를 기도하였던 일을 말한다. [주D-056]곤란해진 …… 미워해 : 재비(宰嚭)는 태재(太宰) 백비(伯嚭)로, 초나라 대신으로 있다가 오나라로 망명한 자이다. 부차가 회계에서 월나라 군대를 대파한 후에 오자서는 월나라를 그대로 두면 훗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그대로 밀어붙여 월나라를 멸망시키기를 청하였고, 백비는 월나라의 뇌물 공세를 받고 이를 반대하였는데, 부차가 백비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두 사람 사이가 악화되었다. 백비는 뇌물을 받고 월나라를 깊이 신뢰하여 부차에게 밤낮없이 월나라 쪽에 유리한 말만 아뢰었다. 그런데도 오자서가 계속해서 직언을 올리자 부차에게 오자서를 무고하여 결국 자결을 명하도록 하였다. 즉 뇌물을 받고 월나라 편을 들어온 백비의 입장이 오자서의 직언으로 인해 곤란하게 되었기 때문에 오자서를 미워하여 제거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주D-057]동문(東門)에 …… 보니 : 오왕 부차가 백비의 참소하는 말을 믿고 오자서에게 칼을 내리며 자결하라고 명하자, 오자서가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내 눈알을 뽑아서 오나라 동문(東門) 위에 걸어 놓아 월나라 놈들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바라보게 하라.” 하였는데, 과연 10여 년 뒤에 월나라가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와 백비를 죽였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주D-058]황폐해진 …… 뛰놀았지만 : 오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던 오자서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뜻이다. 월나라를 크게 격파한 뒤 부차는 고소대(姑蘇臺)를 지어 월나라에서 바친 미인 서시(西施)와 함께 황음(荒淫)에 빠져 지내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를 걱정한 오자서가 간언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자, 오자서가 “신이 이제 곧 고소대 아래에 사슴과 고라니가 노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던 고사가 있으므로 한 말이다. 《吳越春秋 卷5 夫差內傳》 [주D-059]예양(豫讓) : 춘추 전국 시대 진(晉)나라의 열사(烈士)이다. 진나라 대부 지백(智伯)의 가신(家臣)이 되어 그를 섬겼다. 조양자(趙襄子)가 한씨(韓氏), 위씨(魏氏)와 함께 지씨(智氏)를 멸망시킨 뒤 지백의 두개골에 칠을 하여 음기(飮器)로 만들자 조양자를 죽여 원수를 갚기로 작정하였다. 성명을 바꾸고 노예로 가장하여 궁중에 들어가서 변소를 수리하는 척하며 조양자를 살해하려고 하다가 낌새를 챈 조양자에게 발각되었다. 조양자가 “지백에게는 아들이 없는데 그 가신이 원수를 갚으려고 하니, 이 사람은 천하가 알아줄 만한 현인(賢人)이다.”라고 하고, “의로운 사람이니 내가 피하면 될 뿐이다.”라고 하며 그를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다. 예양이 또 몸에 옻을 칠하여 나병 환자로 가장하고 숯을 삼켜 벙어리 행세를 하며 길에서 구걸을 하며 다니다가, 다리 밑에 잠복하여 조양자를 살해하려 했으나 또다시 발각되고 말았다. 예양이 지백을 섬기기 이전에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섬긴 적이 있기 때문에 조양자가 예양에게 “어째서 옛날 섬기던 주인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면서 유독 지백을 위해서만 복수를 하려 하는가?” 하고 묻자, “옛날에 범씨와 중항씨는 나를 보통 사람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했지만,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했기 때문에 나 역시 국사의 입장에서 보답하려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당신은 전에 나를 이미 용서했기 때문에 천하가 모두 당신이 훌륭하다고 칭찬합니다. 오늘 나는 당연히 죽어야 하겠지만, 당신의 옷이라도 쳐서 복수하려는 뜻을 이루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라고 하니, 조양자가 매우 의롭게 여겨 자신의 옷을 예양에게 주게 하였다. 예양이 칼을 뽑아 세 번 뛰어올라 내리치고는 “내가 이제야 죽어서 지백에게 보고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한 뒤 자살하였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豫讓》 [주D-060]조맹(趙孟) : 조양자를 가리킨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정경(正卿) 조돈(趙盾)의 자(字)가 맹(孟)이었는데, 조돈 이후로 그 자손인 조무(趙武), 조앙(趙鞅), 조무휼(趙無恤) 등이 대대로 진나라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여 부귀를 비할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자손들을 모두 조맹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주D-061]지백(智伯)의 …… 했나 : 춘추 전국 시대 진(晉)나라의 조양자(趙襄子)가 한씨(韓氏), 위씨(魏氏)와 함께 지씨(智氏)를 멸망시킨 뒤 지백의 두개골에 칠을 하여 음기(飮器)로 만들어 사용했던 일을 가리킨다. [주D-062]섭정(聶政) : 전국 시대 한(韓)나라의 협객(俠客)이다. 자신을 알아준 엄중자(嚴仲子)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한나라 정승 협루(俠累)를 죽이고 자신의 누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기 얼굴의 살갗을 벗기고 눈알을 뽑아낸 다음 배를 갈라 자살하였다. 한나라에서 그의 시체를 거리에 내걸고 많은 현상금으로 그의 신원을 밝히려 하였는데, 그의 누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서 동생의 행적을 밝히고 자신도 그 옆에서 죽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聶政》 [주D-063]당랑(螳蜋)이 …… 꼴 : 자기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대적할 수 없는 상대에게 대든다는 당랑거철(螳螂拒轍)과 같은 뜻이다. 《莊子 人間世》 [주D-064]구렁에 …… 했네 : 공자가 “지사(志士)는 시신이 구렁에 뒹굴게 될 것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죽어서 그 목이 잘리게 될 것을 잊지 않는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孟子 滕文公下》 [주D-065]형경(荊卿) : 전국 시대 위(衛)나라 사람 형가(荊軻)이다. 위나라에서는 그를 경경(慶卿)으로, 연(燕)나라에서는 형경으로 불렀다.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검술에도 뛰어났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연나라로 와서 개백정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진(秦)나라에 복수하려는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진왕(秦王) 정(政)을 살해하기 위해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에서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해 있던 진나라 장수 번오기(樊於期)의 목과 연나라 독항(督亢)의 지도를 바치겠다는 명목으로 진나라 궁궐에 들어갔으나, 지도 속에 넣어 둔 비수가 드러나는 바람에 진왕을 찌르려던 계획이 실패하여 진왕의 칼에 맞아 죽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荊軻》 [주D-066]합종(合縱) …… 약해졌네 : 합종은 전국 시대 때 연(燕)ㆍ조(趙)ㆍ한(韓)ㆍ위(魏)ㆍ제(齊)ㆍ초(楚) 여섯 나라가 힘을 합해 강력한 진나라에 공동 대응한 전략이고, 연횡(連橫)은 진나라가 여섯 나라와 각각 동맹을 맺어 여섯 나라 사이의 동맹을 막음으로써 그 힘을 약화시킨 전략이다. 종(縱)과 횡(橫)은 당시 이들 나라의 지리적 위치에서 나온 말로, 합종은 소진(蘇秦)이, 연횡은 장의(張儀)가 주도하였다. 처음에는 여섯 나라가 진나라의 전횡을 막기 위의 합종하였으나, 진나라가 연횡책을 써서 여섯 나라의 동맹을 막고 각 나라를 개별적으로 잠식함으로써 여섯 나라의 힘이 점점 약화되었다. [주D-067]유연(幽燕)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북부와 요령성(遼寧省) 일대를 가리킨다. 전국 시대의 연나라 땅이고 당(唐)나라 이전에는 유주(幽州)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68]태자(太子) …… 뿐 : 태자 단(丹)이 자객을 보내어 막강한 진나라의 왕을 살해하겠다는 얕은 계획을 세우고도, 주도면밀한 준비 없이 조급한 마음으로 진무양(秦舞陽)과 같이 무식하고 어린 애송이를 먼저 보내려고까지 한 일을 비판한 말이다. 태자 단이 일찍이 조(趙)나라에 볼모로 갔을 때 그곳에서 만난 진왕 정과 사이가 좋았는데, 진왕이 즉위한 뒤 태자 단이 진나라에 볼모로 갔을 때는 자신을 대하는 진왕의 태도에 모멸감을 느끼고 달아나서 연나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복수하려는 뜻을 품었고, 진나라가 제후국을 차츰차츰 잠식하여 화가 연나라에까지 미치게 되자 자객을 보내 진왕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형가를 설득하여 수락을 받은 뒤, 다시없을 만큼 날카로운 비수를 고가(高價)에 사들여 형가에게 주고, 13세에 살인을 저질렀던 진무양을 딸려 보내어 일을 돕게 하였다. 형가가 함께 가기로 했던 사람을 기다리느라고 출발을 조금 지체하자, 조급해진 태자 단이 형가의 마음이 변한 것으로 의심하여 진무양을 먼저 보내자고 말하였다. 그러자 형가가 화를 내며 “저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큰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곧장 출발하게 되었는데, 진나라 궁궐에 들어가서 진왕을 살해하려 할 때에 진무양이 겁에 질려 사색이 되는 바람에 진왕을 살해하려던 계획이 차질을 빚어 실패로 끝나 버렸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卷86 刺客列傳 荊軻》 [주D-069]역수(易水)에는 …… 뒤섞였지 : 형가가 진나라로 떠날 때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때 태자의 빈객과 그 일을 아는 자들이 모두 흰색 의복을 입고 와서 전송하였는데, 역수 가에 이르렀을 때 형가가 평소 교유하였던 고점리(高漸離)의 축(筑)에 맞추어 비장하게 노래하기를 “바람은 쌀쌀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장사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라.〔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라고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주D-070]천리 …… 있는데 : 형가가 진나라에 들어가서 번오기의 목과 독항의 지도를 바치러 왔다고 하자, 진왕이 기뻐서 조복(朝服)을 입고 구경(九卿)의 반열을 갖추어 극진한 예로 형가를 접견하였다. [주D-071]지도 …… 드러났네 : 진왕을 만나 암살하려다가 계획이 어긋나는 긴장된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이때 형가는 번오기의 목이 든 상자를 들고 앞에 서고, 진무양은 지도가 든 상자를 들고 뒤를 따랐는데, 어전의 계단 앞에 이르렀을 때 진무양의 얼굴이 갑자기 두려움으로 사색이 되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형가가 진무양을 돌아보고 일부러 웃으면서 “북방 오랑캐 땅의 촌사람이 천자를 처음 뵙게 되자 두려워서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핑계를 대었다. 진왕이 형가더러 지도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형가가 지도를 가져다 바쳤는데, 진왕이 지도를 펼치자 지도 속에 숨겨 뒀던 비수가 드러나 버렸다. [주D-072]허둥대다 …… 못하였고 : 지도 속의 비수가 드러나자 형가가 순간적으로 비수를 들고 진왕을 찔렀는데, 진왕이 놀라 일어나는 바람에 옷소매만 잘리고 말았다. 이에 형가가 진왕을 쫓고 진왕이 기둥을 끼고 달아나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으나, 결국 형가는 진왕의 칼에 죽고 말았다. [주D-073]부자간에 …… 버려 : 소사(召社)는 연나라 사직으로, 연나라가 주(周)나라 소공(召公) 석(奭)의 후손이므로 한 말이다. 형가가 진왕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후 진왕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치게 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연왕(燕王)과 태자를 급하게 몰아대자, 누군가 연왕에게 태자를 죽여 진왕에게 바쳐 연나라 사직을 보존하기를 권하였다. 이에 연왕이 태자를 죽여 진왕에게 바쳤으나, 진나라 군대가 다시 진격하여 5년 뒤에 결국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荊軻》 [주D-074]가의(賈誼) : 한(漢)나라 낙양(洛陽) 사람이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밝아 문제(文帝) 때 20여 세의 나이로 박사가 되고, 1년 만에 승진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가의가 정삭(正朔)을 개정하고 의복제도를 바꾸고 관명(官名)을 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키는 등 개혁을 요청하니, 문제가 이를 받아들여 법령을 개정하였다. 문제가 가의에게 공경의 직임을 맡기려고 하자, 대신들이 가의를 질시하여 “낙양 사람은 나이 어린 초학자(初學者)인데, 오로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려는 욕심에 일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비판하였다. 문제가 이때부터 가의를 멀리하여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시켜 버렸다. 몇 년 뒤에 문제가 가의를 조정으로 불러 막내아들인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삼았는데, 회왕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 죽자 자신이 직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슬퍼하다가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史記 卷84 賈誼列傳》 [주D-075]그가 …… 방책 : 한 문제(漢文帝) 때 가의가 올린 시무(時務)에 관한 상소로, 〈치안책(治安策)〉이라고도 하고 〈진정사소(陳政事疏)〉라고도 한다. 당시 제후 왕들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성하고 흉노가 변경을 침범하여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가의는 이 글에서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흉노의 침략에 맞서 싸워서 백성들이 생업에 힘쓸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 글은 “살펴보건대 오늘날의 형세는 곡할 일이 하나요, 눈물을 흘릴 일이 둘이요, 길게 탄식할 일이 여섯입니다.〔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는 구절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漢書 卷48 賈誼傳》 [주D-076]而 : 대본에는 ‘之’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77]날아든 …… 입었네 : 복조(鵩鳥)는 올빼미처럼 생긴 불길한 새이다. 가의가 장사(長沙)로 좌천된 지 3년이 되었을 때 복조가 집에 날아들어 앉은 것을 보고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슬퍼하며 〈복조부(鵩鳥賦)〉를 지었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33세로 요절하였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史記 卷84 賈誼列傳》 [주D-078]강관(絳灌) : 한나라의 개국 공신인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을 가리킨다. 가의가 20세에 발탁된 후 빠르게 승진하여 태중대부에까지 오르고 여러 가지 제도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려 할 때 가의를 비판하고 시기하여 조정에서 쫓아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D-079]당고(黨錮) : 후한(後漢) 말엽에 환관(宦官)들이 발호하여 관료들을 탄압하고 금고(禁錮)에 처한 사건으로, 당고의 옥(獄)이라고도 한다. 환제(桓帝) 때 환관들이 발호하자 사대부 진번(陳蕃), 이응(李膺) 등이 태학생들을 거느리고 맹렬하게 공격하였는데, 위기에 몰린 환관들이 도리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비방한다는 명목으로 이응 등을 무고하였다. 이 일로 이응 등 200여 인이 체포되었고, 석방된 뒤에도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도록 처분이 내려졌다. 영제(靈帝) 때 이응이 다시 기용되어 대장군 두무(竇武) 등과 모의하여 환관들을 주벌하려고 하였으나, 일이 실패하여 이응 등 100명이 도리어 피살되고, 감옥에 갇히거나 귀양 간 자가 6, 7백 명에 달하였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주D-080]世道淳 : ‘世道’와 ‘淳’ 사이에 한 글자가 빠졌을 가능성이 많으나, 어떤 글자인지 알 수 없으므로 교감하지 못했다. [주D-081]노구(盧狗) : 전국 시대 한(韓)나라에서 나던 검은 털의 명견(名犬)인 한로(韓盧)와 같은 말로, 사나운 사냥개이다. 여기서는 발호하는 환관 무리를 가리킨다. [주D-082]봉새와 …… 유린하는데 : 봉새, 난새, 추우, 기린은 모두 상서로운 동물로, 의롭고 바른 사대부들이 환관들에게 참혹한 피해를 입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83]오왕(五王) : 측천무후(則天武后) 만년에 측천무후를 황위(皇位)에서 물러나게 하고 중종(中宗)을 영립(迎立)한 평양군왕(平陽郡王) 경휘(敬暉), 부양군왕(扶陽郡王) 환언범(桓彦範), 한양군왕(漢陽郡王) 장간지(張柬之), 남양군왕(南陽郡王) 원서기(袁恕己), 박릉군왕(博陵郡王) 최원위(崔元暐)를 가리킨다. 본래 당 태종(唐太宗)의 재인(才人) 출신인 측천무후는 그 아들 고종(高宗)의 비가 되어 실질적으로 국정을 장악하였다. 그러다가 고종이 죽은 후에는 어린 중종(中宗)을 폐위시키고 예종(睿宗)을 즉위시켰으며, 이어 예종을 폐한 뒤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15년간 황제로서 나라를 통치하였다. 측천무후가 만년에 병석에 있으면서 간신 장역지(張易之)ㆍ장창종(張昌宗)에게만 의존하자, 다섯 사람이 거사하여 장역지와 장창종을 제거한 뒤 측천무후를 압박하여 중종에게 양위(讓位)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중종이 보위에 오르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무삼사(武三思) 등을 처형하지 않았다가 뒤에 이들의 모함을 받고 처형되었다. 《舊唐書 卷7 中宗本紀, 卷91 桓彦範列傳》 [주D-084]휘적(翬翟)으로 …… 이어 : 휘적은 후비의 예복이고, 여와(女媧)는 고대 신화 속의 여자 황제이다. 측천무후가 황후(皇后)로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85]불륜으로 …… 하고 : 고종이 아버지 태종의 재인이었던 무후와 관계를 맺고 황후로 삼기까지 한 것이 사슴 무리의 교미 행태와 다름없다고 말한 것이다. [주D-086]연꽃 …… 더듬었도다 : 육랑은 형제 중의 서열이 여섯 번째인 장창종(張昌宗)으로, 측천무후가 장창종을 가까이했던 일을 가리킨다. 장창종은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당시 양재사(楊再思)가 “사람들은 육랑의 얼굴이 연꽃 같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연꽃이 육랑과 같은 것이지 육랑이 연꽃 같은 것이 아니다.〔人言六郞面似蓮花 再思以爲蓮花似六郞 非六郞似蓮花也〕”라고 아첨한 데서 나온 말이다. 《新唐書 卷109 楊再思列傳》 [주D-087]제비가 …… 댔어라 : 후비(后妃)가 황자(皇子)를 모해(謀害)하는 것으로,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황후(皇后) 조비연(趙飛燕)이 질투가 심하여 다른 궁녀들이 낳은 황자(皇子)를 해쳤기 때문에 ‘제비가 황손을 쪼아 먹는다〔燕啄皇孫〕’는 내용의 동요가 있었던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97下 外戚傳 孝成趙皇后》 여기서는 무후가 어린 아들 중종과 예종을 폐위한 일을 말한다. 《舊唐書 卷6 則天皇后本紀》 [주D-088]주발(周勃)이 …… 맞아들임으로써 : 한 고조(漢高祖)의 사후(死後)에 여후(呂后)가 국정을 장악하여 여씨(呂氏)들을 왕으로 봉하고 왕족들을 해쳐 한나라 종통이 위태로워졌는데, 여후가 죽자 주발이 여씨 일파를 제거하고 대왕(代王)을 맞이하여 보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한나라 사직을 위기에서 구하였다. 주발이 거사(擧事)할 때 북군(北軍)에 들어가서 군사들에게 “여씨를 위하는 사람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유씨(劉氏)를 위하는 사람은 왼쪽 어깨를 드러내도록 하라.”라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왼쪽 어깨를 드러내어 주발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史記 卷9 呂太后本紀》 여기서는 오왕이 측천무후를 보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중종을 즉위시킨 일을 주발이 여후 일당을 몰아내고 문제(文帝)를 영립한 공에 비유한 것이다. [주D-089]선리(仙李)의 …… 했네 : 무후에 의해서 끊어졌던 당나라 왕실의 통서를 다시 잇게 했다는 말이다. 노자(老子)가 자두나무〔李樹〕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자두나무로 자신의 성을 삼았는데, 당나라는 노자를 시조로 받들기 때문에 당나라를 선리라고 부른다. [주D-090]애가(艾猳)에게 …… 했던가 : 가(猳)는 늙은 수퇘지 또는 잘생긴 수퇘지이고, 애가는 수퇘지를 끌어들여 암퇘지에게 행음(行淫)하게 하는 것으로, 춘추 시대에 위후(衛侯)가 부인 남자(南子)를 위하여 송조(宋朝)를 불러들여 간음하게 하자 당시 사람들이 남자를 발정한 암퇘지에, 송조를 수퇘지에 비유하여 풍자한 데서 나온 것이다. 《春秋左氏傳 定公14年》 오왕이 무후의 일을 겪었으면서도 중종을 영립한 후에 무삼사(武三思) 등을 숙청하지 않음으로써 무삼사가 위후(韋后)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조정과 정사를 어지럽히게 한 것을 비판한 말이다. [주D-091]우물 속의 개구리 : 측천무후의 조카 무삼사를 두고 한 말이다. 중종을 영립할 당시 무삼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92]동류(同類)가 …… 터 : 동류가 아니라는 것은 무삼사를 가리킨다. 오왕이 거사하여 장역지(張易之)ㆍ장창종(張昌宗) 형제를 제거하였을 때 설계창(薛季昶) 등이 “두 간흉은 비록 죽었으나 여당(餘黨)이 남아 있으니, 풀을 매면서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끝내 다시 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무삼사를 죽이자고 하였다. 그러나 환언범이 “무삼사는 도마 위의 고기와 같은 신세이니, 천자가 처분하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면서 듣지 않자, 설계창이 “내가 제명대로 살지 못하겠구나!”라고 탄식하였다. 뒤에 무삼사가 위후(韋后)와 결탁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오왕을 반역죄로 몰아넣어 귀양 보냈다가 결국 처형하였다. 《舊唐書 卷91 桓彦範列傳》 [주D-093]모토(茅土) :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내려 주는 흙이다. 이들 다섯 사람이 중종을 옹립한 공으로 왕(王)으로 봉해지고 그에 해당하는 봉지(封地)를 받은 일을 말한다. [주D-094]장순(張巡)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사람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켰을 때 거병(擧兵)하여 싸우다가 수양성(睢陽城)에 이르러 태수 허원(許遠)과 합세하여 군사 6천여 명으로 성을 지켜 반군의 남하(南下)를 막았다. 고립된 성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400여 회를 치르고 적군 12만을 죽였으나, 식량은 떨어지고 구원병도 이르지 않아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많은 군사들이 굶어 죽고 살아 있는 자들도 굶주림에 지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장순이 자신의 애첩(愛妾)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이고 허원은 자신의 종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이면서 고군분투하였다. 끝내 적에게 성이 함락되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살해당하였고, 함께 성을 지키던 허원은 낙양으로 잡혀가서 살해당하였다. 《新唐書 卷192 忠義列傳中 張巡, 許遠》 [주D-095]개원(開元)에서 천보(天寶)로 넘어가면서 : 당나라 현종의 집권 말기를 뜻한다. 현종은 44년간 집권하였는데, 초기에 정사를 바로잡아 성당(盛唐) 시대를 이룬 시기가 개원(713~741) 연간이고, 말년에 양 귀비(楊貴妃)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나라가 어지럽게 된 시기가 천보(742~756) 연간이다. [주D-096]황지(潢池)에서 …… 장난쳤던가 : 황지는 연못으로, 외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무리의 소굴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공수(龔遂)가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황지에서 무기를 가지고 장난친 임금의 적자(赤子)’라고 표현한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 [주D-097]신룡(神龍)이 …… 옮기고 : 안녹산의 난으로 현종이 수도를 떠나 성도(成都)로 피란한 일을 가리킨다. [주D-098]시랑(豺狼)이 양경(兩京)을 차지하였네 : 안녹산의 반군(叛軍)이 수도 장안과 동경(東京)인 낙양(洛陽)을 점거한 것을 가리킨다. [주D-099]장허(張許) :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이 난을 일으키자 장순이 거병(擧兵)하여 싸우다가 수양성(睢陽城)에 이르러 태수 허원과 합세하여 군사 6천여 명으로 성을 지켜 반군의 남하(南下)를 막았다. 고립된 성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400여 회를 치르고 적군 12만을 죽였으나, 식량은 떨어지고 구원병도 이르지 않아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많은 군사들이 굶어 죽고 살아 있는 자들도 굶주림에 지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장순이 자신의 애첩(愛妾)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이고 허원은 자신의 종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이면서 고군분투하였다. 끝내 적에게 성이 함락되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살해당하였고, 함께 성을 지키던 허원은 낙양으로 잡혀가서 살해당하였다. 《新唐書 卷192 忠義列傳中 張巡, 許遠》 [주D-100]강회(江淮)의 …… 지켰네 : 강회는 양자강과 회수(淮水) 지역이다. 장순과 허원이 수양성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을 알고 성을 사수하려 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新唐書 卷192 忠義列傳中 張巡, 許遠》 [주D-101]천자의 …… 울고 : 수양성에서 반군에게 포위되어 조정의 명이 통하지 않자, 대장 6명이 장순에게 “형세가 적을 대적할 수 없고 천자의 생사도 알지 못하니 항복하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항복을 건의하였다. 이튿날 장순이 천자의 화상을 걸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알현하는 예를 행하자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에 장순이 이들 대장 6명을 대의로써 꾸짖고 목을 베니, 사람들이 더욱 권면되었다고 한다. 《新唐書 卷192 忠義列傳中 張巡》 [주D-102]애첩의 …… 진작해 : 안녹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켰을 때 장순(張巡)이 거병(擧兵)하여 싸우다가 수양성(睢陽城)에 이르러 태수 허원(許遠)과 합세하여 군사 6천여 명으로 성을 지켜 반군의 남하(南下)를 막았다. 고립된 성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400여 회를 치르고 적군 12만을 죽였으나, 식량은 떨어지고 구원병도 이르지 않아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많은 군사들이 굶어 죽고 살아 있는 자들도 굶주림에 지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장순이 자신의 애첩(愛妾)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이고 허원은 자신의 종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이면서 고군분투하였다. 끝내 적에게 성이 함락되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살해당하였고, 함께 성을 지키던 허원은 낙양으로 잡혀가서 살해당하였다. 《新唐書 卷192 忠義列傳中 張巡, 許遠》 [주D-103]쌍묘(雙廟) : 수양성에 있는 장순과 허원의 사당이다. [주D-104]여단(荔丹)과 초황(蕉黃) : 중국 남방에서 나는 붉은 여지(荔枝)와 노란 바나나로, 제수(祭需)를 뜻하는 말이다.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이 중국 광서(廣西)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한유가 유종원 사당의 비문에 ‘붉은 여지와 노란 바나나〔荔子丹兮蕉黃〕’라고 쓴 데서 나온 말이다. 《韓昌黎文集 卷31 柳州羅池廟碑》 [주D-105]이백(李白) :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시선(詩仙)으로 일컬어지며,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대의 시인으로 꼽힌다. 성품이 호방하여 세속에 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시를 구사하였다. 정치적 포부를 품고 현종(玄宗)의 궁정 시인이 되기도 했으나, 일생을 불우하게 방랑하며 보냈다. [주D-106]그는 신선 무리였네 : 이백이 처음에 장안으로 왔을 때 그의 명성을 들은 하지장(賀知章)이 객사로 찾아갔다. 이때 이백이 〈촉도난(蜀道難)〉을 보여 주었는데, 하지장이 읽는 동안에 네 번이나 감탄을 하고, 다 읽고 나서는 적선(謫仙)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本事詩 高逸3》 [주D-107]장경성(長庚星)이 찬란하게 내리비추니 : 장경성은 금성(金星)의 별칭으로 태백성(太白星)이라고도 하는데,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 이백의 어머니가 이백을 낳을 때 장경성을 삼키는 태몽을 꾸고 이름을 백(白)으로 지었다는 것과 관련하여 한 말이다. 《新唐書 卷202 文藝列傳中 李白》 [주D-108]오색 …… 피어났어라 : 이백이 젊은 시절 붓 머리에서 꽃이 피어나는 꿈을 꾼 뒤로 타고난 글재주를 드러내어 이름을 크게 떨쳤다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한 말이다. 《開元天寶遺事 卷2 夢筆頭生花》 [주D-109]만 구멍이 …… 듯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거대한 땅덩어리가 기운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모르지만 일어났다 하면 만 개의 구멍이 노하여 부르짖는다.〔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竅怒號〕”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백 작품의 웅장하고 생동감 넘치는 기상을 비유한 것이다. [주D-110]저자에서 …… 취하였는데 : 금 거북은 옛날에 벼슬아치들이 허리에 차던 패물이다.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의 문재(文才)에 감탄하여 허리에 찬 금 거북을 풀어 술을 사다 함께 마시며 즐겼던 적이 있으므로 언급한 것이다. 《新唐書 卷202 文藝列傳中 李白》 [주D-111]홀연 …… 어른거리듯 : 현종이 금란전(金鑾殿)에서 이백을 만나 본 뒤 그의 문재에 탄복하여 한림원 공봉(翰林院供奉)으로 제수하였는데, 이백은 여전히 저자에서 술꾼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밤 현종이 침향정(沈香亭)에서 양 귀비와 꽃을 구경하다가 자신의 감상을 담은 새 악장을 짓게 하려고 이백을 불러오게 했는데, 궁궐로 불려온 이백은 인사불성으로 취한 상태여서 얼굴에 물을 뿌리고 나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곧바로 붓을 들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갔는데, 그 글이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뜻이 정밀하고 절실하였으므로 현종이 매우 만족스러워하였으니, 그 시가 바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이다. 《新唐書 卷202 文藝列傳中 李白》 《全唐詩 李白 淸平調》 〈청평조〉는 당나라 대곡(大曲) 중의 하나이다. [주D-112]구름 …… 하사하셨네 : 현종이 이백에게 비단 도포를 하사한 적이 있는데, 뒤에 이백이 사방을 떠돌던 때 이 비단 도포를 입고 달밤에 술에 잔뜩 취해 뱃놀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D-113]어찌하여 …… 더럽혀 : 이백이 고역사(高力士)의 비난과 참소를 입은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이백은 문재가 뛰어나고 성품이 호방하여 평소 귀척(貴戚)들을 경시하곤 하였다. 한번은 현종이 베푼 연회에 참석한 이백이 잔뜩 취하여 당시 권력자인 고역사를 불러 자신의 신발을 벗기게 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수치감을 느낀 고역사가 양 귀비에게 이백을 늘 나쁘게 말했으므로 이백을 관직에 제수하려 할 때마다 양 귀비가 막곤 하였다. 자유분방한 성품의 이백은 결국 황제 측근들과의 마찰을 견디지 못하고 장안을 떠나 시골로 내려가 사방을 떠돌게 되었다. 《新唐書 卷202 文藝列傳中 李白》 [주D-114]궁벽하고 …… 갔던가 :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장안이 함락되던 756년에 이백은 현종의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막료(幕僚)가 되었는데, 영왕이 군대를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하자 이백도 야랑(夜郞)으로 유배되었다. 마침 사면령이 내려져 풀려났으나, 또 다른 일에 연루되어 다시 감옥에 갇히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과도한 음주로 60여 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주D-115]蓬 : 대본에는 ‘逢’으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16]금계(金鷄)를 …… 채 : 이백이 사면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했지만 끝내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금계는 머리를 황금으로 장식한 닭인데, 옛날에 사면령을 반포할 적에 대나무에 금계를 매달아 두었기 때문에 사면령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新唐書 卷48 百官志》 이백의 〈유야랑증신판관(流夜郞贈辛判官)〉 시에 “시름겹게 나 멀리 야랑으로 귀양 가니, 언제나 금계 걸려 사면받고 돌아올까.〔我愁遠謫夜郞去 何日金雞放赦回〕”라는 내용이 있다. [주D-117]채석(采石)에서 …… 갔도다 : 이백이 조정에서 쫓겨나 사방을 떠돌던 때에, 달 밝은 어느 밤에 최종지(崔宗之)와 배를 타고 채석에서 금릉(金陵)까지 가면서 풍류를 즐겼던 일을 말한다. [주D-118]취해서 …… 쓰다가 : 이백이 술에 취해 강물 속의 달을 건지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 의거하여 한 말이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는 이백이 강물에 빠진 곳이 우저기(牛渚磯)라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처럼 이백의 죽음을 채석강과 연관시켜 말한다. [주D-119]순식간에 …… 떠나갔어라 : 역시 이백이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을 토대로 해서 한 말이다. 송나라 마존(馬存)의 〈연사정(燕思亭)〉 시에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오른 뒤로, 강남의 풍월이 오래도록 한가했네.〔李白騎鯨飛上天 江南風月閑多年〕”라는 구절이 있다. [주D-120]악악왕(岳鄂王) : 남송(南宋)의 명장이자 충신인 악비(岳飛, 1103~1142)이다. 농가 출신으로 12세에 자원하여 금(金)나라와의 전투에 참여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1126년 금나라가 북송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압송해 간 정강지변(靖康之變)이 발생하여 양자강 이남으로 남천(南遷)을 결정했을 때는 글을 올려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남천한 뒤에도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적군을 대파하여 금나라가 점령했던 일부 지역을 수복하는 등, 북진하여 송나라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악비의 이러한 노력은 재상 진회(秦檜)를 비롯한 주화파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악비는 반역죄를 덮어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처형당하고 말았다. 효종(孝宗) 때 복관이 되었고, 영종(寧宗) 때 악왕(鄂王)에 추봉(追封)되었다. 《宋史 卷265 岳飛列傳》 [주D-121]흉악스런 …… 입었네 : 이민족인 금나라가 중국 영토를 침범하여 도성과 궁궐을 차지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알유(猰㺄)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못된 짐승이다. [주D-122]취화(翠華)가 …… 가매 : 취화는 황제의 수레이다. 정강지변으로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로 끌려간 일을 가리킨다. [주D-123]구묘(九廟) : 천자의 종묘(宗廟), 즉 송나라의 종묘를 가리킨다. [주D-124]종거(鍾簴) 이미 옮겨졌어라 : 종거는 종묘에 설치한 종 틀이다. 종거가 옮겨졌다는 것은 종묘를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나라의 멸망을 뜻한다. 당나라 덕종(德宗) 때 주비(朱沘)의 난이 평정된 후에 우공이(于公異)가 글을 올려 “신이 이미 궁궐을 깨끗이 정비하고 공경히 능원(陵園)을 봉심하였는데, 종 틀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고 종묘도 예전과 같았습니다.〔臣已肅淸宮禁 祗奏寢園 鍾簴不移 廟貌如故〕”라고 보고한 바 있다. 《新唐書 卷203 文藝列傳下 于公異》 [주D-125]화의(和議) : 금나라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주화론(主和論)을 가리킨다. [주D-126]문문산(文文山) : 남송(南宋)의 문천상(文天祥)으로, 문산(文山)은 그의 호이다. 1255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259년 몽고군이 악주(卾州)를 포위하자 환관 동송신(董宋臣)이 천도하여 병화를 피하기를 주장하였는데, 문천상은 동송신을 참수하고 몽고군과 맞서 싸우기를 주장하였다. 1275년 의용군을 조직하여 수도 임안(臨安)을 지키며 원(元)나라 군대에 대항하였다. 이듬해 우상으로서 강화(講和)를 위해 원의 진중(陣中)에 파견되어 사로잡혔다가 탈출하여 돌아왔다. 다시 우상에 임명되었으나 좌상과 의견이 맞지 않자 군대를 거느리고 복건(福建), 광동(廣東) 일대에서 원나라 군대와 싸워 여러 주현(州縣)을 수복하였다. 1278년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항복을 거부하였고, 원나라 수도 북경으로 이송되어 3년 동안 억류되어 있으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자신의 절개를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했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주D-127]속저(屬猪) : 송나라의 별칭이다. 송나라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이 모두 해년(亥年)에 태어난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古今釋林 卷5 歷代方言 釋國》 [주D-128]금(金)나라의 …… 덮치고 : 북송이 금나라에게 중원(中原)을 빼앗기고 양자강 남쪽으로 쫓겨 내려간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129]몽골족의 …… 가득하였네 : 남쪽으로 천도하여 명맥을 이어가던 남송이 다시 원나라의 침략을 받아 위태로워진 상황을 두고 한 말이다. [주D-130]도충(桃蟲)이 …… 되어 : 도충은 뱁새〔鷦鷯〕로 작은 새를 가리킨다. 《시경(詩經)》 〈주송(周頌) 소비(小毖)〉에 “처음에는 저 뱁새로 믿었는데, 훨훨 날아가니 큰 새로다.〔肇允彼桃蟲 拚飛維鳥〕”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는 집주(集註)에서 “뱁새의 새끼가 변하여 보라매가 된다.”라고 하였다. 이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것이 끝내 걷잡을 수 없이 큰 화란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원나라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131]桃 : 대본에는 ‘挑’로 되어 있는데, 규장각본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32]황옥(黃屋)이 …… 떠돌았던가 : 황옥은 덮개가 황색으로 된 황제의 수레이다. 1276년 남송의 수도가 원나라에 함락되자, 장세걸(張世傑), 육수부(陸秀夫) 등이 도종(度宗)의 아들인 위왕(衛王) 병(昺)을 데리고 오늘날의 광동성(廣東省) 신회시(新會市) 남쪽 50여 리 지점의 항구 애산(崖山)으로 달아났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宋史 卷451 忠義列傳 張世傑》 [주D-133]배들을 …… 만들고 : 이때 원나라 군대가 추격하여 포위를 좁혀 들어오자, 장수 장세걸이 수군들을 바다에 정박시킨 뒤 거선(巨船) 1000여 척을 서로 연결시켜 튼튼한 끈으로 묶고, 사방에 성곽처럼 누붕(樓棚)을 세우고 위왕을 그곳에서 머물게 하였다. 원나라 군대가 이르러 공격하였지만 배가 워낙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어 꼼짝도 하지 않았고, 배에 진흙을 바르고 긴 나무로 묶어서 화재에 대비한 상태여서 짚더미를 던지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도 배에 불이 붙지 않았다. 《宋史 卷451 忠義列傳 張世傑》 [주D-134]성 …… 못했으니 : 원나라 군대의 맹렬한 공격에도 남송의 장수 장세걸은 끝까지 사투를 벌였으나, 적이 사방에서 공격하고 병졸들은 지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떤 배에서 실수로 깃발을 내리자 다른 배에서도 모두 깃발을 내려 군대가 무너지고 말았다. 장세걸 등이 배를 묶어 놓은 줄을 끊고 10여 척의 배만으로 항구를 벗어났으나, 왕의 배는 너무 크고 또 묶여 있는 배들이 한꺼번에 움직여서 달아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육수부가 왕을 업고 바다로 뛰어들고 후궁 및 많은 대신들도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7일 뒤에 바다에 떠오른 시체가 10여 만 구였다고 한다. 《宋史 卷47 瀛國公本紀 附二王》 [주D-135]여섯 곡의 노래 : 문천상이 북경에 끌려가서 지은 여섯 수의 시로, 아내, 누이동생, 딸, 아들, 첩, 그리고 자신을 주제로 읊은 노래이다. 문천상의 가족들은 전쟁통에 문천상보다 먼저 원나라 군대에 사로잡히고 누이와 딸은 피살되었는데, 문천상은 이 시에서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읊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앞둔 자신의 심회를 읊었다. 《古文眞寶前集 卷9 六歌》 [주D-136]공자의 …… 사생취의(捨生取義)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지사와 인인은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救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라고 하였고,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목숨과 의를 모두 다 가질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라고 하였다. [주D-137]언제나 …… 뒀으니 : 문천상이 죽음을 당한 뒤에 그 부인이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그의 의대(衣帶)에 “공자는 인을 이룬다고 하고 맹자는 의를 취한다고 하였으니, 오직 그 의를 다하는 것이 인을 이르게 하는 방법이다. 성현의 글을 읽었으니 배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제야 내가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다.〔孔曰成仁 孟曰取義 惟其義盡 所以仁至 讀聖賢書 所學何事 而今而後 庶幾無媿〕”라는 찬(贊)이 들어 있었던 것을 말한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
cafe.daum.net/jangdalsoo/YveU/8 장달수 |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민영의 매화사 (0) | 2016.03.26 |
---|---|
매화송 / 조지훈 外 (0) | 2016.03.26 |
〈귀거래사〉에 차운하다〔次歸去來辭〕 (0) | 2016.03.19 |
오성 상공(鰲城相公)이 쓴 〈이백시초(李白詩抄)〉 발 (0) | 2016.03.19 |
태감 강옥이 어주의 진귀한 과실을 보내오다〔太監姜玉送御廚珍果〕/ 허백당시집 제11권 (0) | 2016.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