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무릇 본읍(本邑)에서 나오는 진귀한 물건은 ...

2016. 3. 26. 18:14다산의 향기



      

목민심서 목록열기 (671)      

목록열기              
[55] 율기(律己) 제2조 청심(淸心) 무릇 본읍(本邑)에서 나오는 진귀한 물건은 반드시 고을에 폐단이 될 것이니, 하나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아야만 청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민심서 / 일표이서

2015.02.04. 18:13

           http://sambolove.blog.me/220262844983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예를 들면, 강계(江界)의 인삼과 초피(貂皮), 경북(鏡北)의 다리〔髦〕와 베, 남평(南平)의 부채, 순창(淳昌)의 종이, 담양(潭陽)의 채색 상자, 동래(東萊)의 담뱃대〔煙具〕, 경주(慶州)의 수정(水晶), 해주(海州)의 먹, 남포(藍浦)의 벼루 같은 것들을 돌아가는 날에 행장 속에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면 청렴한 선비의 행장이라 할 수 있다.
매양 보면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온 자는 그것들을 좌우에 늘어놓으니, 그 탐욕하고 비루한 빛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뻗쳐나와서 남이 대신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한다.


백향산(白香山)이 스스로 말하기를,

“오래도록 소주(蘇州)에서 벼슬 살았으나 태호(太湖)의 돌 한 개도 곁에 놓아두지 않았다.”

하였다.
운남(雲南)의 대리부(大理府)에서는 석병(石屛)이 나는데, 이 지방에 벼슬살이하는 자는 매양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허비해가며 그 석병을 실어다 남에게 선물한다. 이방백(李邦伯)이란 사람이 홀로 이에 뜻을 붙여 다음과 같은 송행시(送行詩)를 지었다.

서로 그리워도 석병 보내지 말고 / 相思莫遺石屛贈
남겨서 남쪽 지방 덕정비(德政碑) 새기게 하라 / 留刻南中德政碑

하남(河南)에서 표고〔蘑菰〕ㆍ선향(線香)이 나는데, 이곳에 벼슬살이 온 사람들은 매양 그것을 갖다가 요로(要路)에 선물하였다. 우 숙민공(于肅愍公)이 그 지방을 순무(巡撫)할 때에 그것들에 조금도 손을 대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싸보내는 표고와 선향은 / 手帕蘑菰與線香
본디 백성의 소용이던 것이 도리어 재앙이 되었네 / 本資民用反爲殃
청풍(淸風)을 두 소매에 넣고 임금 뵈러 가니 / 淸風兩袖朝天去
민간의 시비 장단 없으리 / 免得閭閻話長短

정선(鄭瑄)은 이렇게 말하였다.

“슬프다. 대체로 지방에서 토산이 나오면 그 지방의 재앙이다. 휘(徽) - 휘주(徽州) - 는 메마른 고을인데 정규묵(廷珪墨)용미연(龍尾硯)이 지금도 누를 끼치는 일이 많다. 그것을 남겨 덕정비(德政碑)를 새기게 하고 청풍을 소매 속에 가득히 넣고 돌아가는 것이 수령에게 바라는 바이다.”

포증(包拯)이 단주(端州)의 수령이 되었는데, 해마다 고을에서 벼루를 공물(貢物)로 바쳤다. 전의 수령들은 공물을 핑계로 수십 배를 거두어 들여서 세력가들에게 선물하였는데, 그는 만드는 자에게 공물 숫자만 맞추어 만들게 하였다. 그는 임기가 차서 돌아갈 때에 벼루 한 개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은 그의 조카 통리(通理)에게 보내는 편지에,

“어제 보내온 편지에 주사(朱砂)를 사가지고 오고 싶다는 말이 있는데, 내게 그 물건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네가 벼슬살 때는 청렴을 지켜야 하는데 어찌 벼슬사는 그곳 물건을 살 수 있겠느냐. 내가 벼슬살 때는 물 마시는 것 외에는 한 가지도 산 적이 없었다. 이것을 경계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당개(唐介)가 담주통판(潭州通判)으로 있을 때에 한 큰 상인(商人)이 진주〔蚌胎〕를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다가 관리(關吏)들에게 수색을 받게 되었다. 태수(太守) 이하가 그 값을 낮추어서 모조리 스스로 사들였다. 뒤에 진주를 나누어 가진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인종(仁宗)이 근시(近侍)에게

“당개는 결코 사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다시 조사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당(唐)나라 계주 도독(桂州都督) 이홍절(李弘節)이 죽자 그 집에서 진주를 팔았다. 태종(太宗)이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재상이 청렴하다고 말했던 사람인데 이제 진주를 팔고 있으니 그를 천거한 사람이 어찌 죄가 없겠는가.”

하였는데, 위징(魏徵)이 그 천거한 사람을 구해 풀어 주었다.
토산물의 두려움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합포(合浦)에서는 진주(珍珠)가 나는데, 수령 되는 사람이 탐예(貪穢)하여 사람을 속여서 진주를 채취해 가니, 진주가 드디어 점점 교지군(交趾郡) 군계까지 옮아가 버렸다. 그래서 행려(行旅) - 나그네와 상인 등. - 가 오지 않고 사람과 물건이 힘입을 데가 없게 되었다.
맹상(孟嘗)이 합포 태수(合浦太守)가 되어 전날의 폐단을 고쳐 없앴다. 그러자 1년도 채 못 되어 전에 없어졌던 진주가 다시 돌아오고 상인도 왕래하니, 사람들이 맹상을 신명(神明)이라고 일컬었다.


유자후(柳子厚)의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연주(連州)는 석종유(石鍾乳)가 나는 곳이다. 연주 백성들이 이제 다 없어졌다고 고(告)한 지도 5년이나 되었고, 공물(貢物)은 다른 부(部)에서 사다 바쳤다. 자사(刺史) 최공(崔公)이 부임한 지 한 달이 넘자 석종유를 채취하는 사람이 와서 석종유가 다시 나온다고 고하였다. 그러고는 지난번 자사가 탐욕스럽고 사나워서 부역만 시키고 값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워서 나오지 않는다고 속였던 것이며, 이번 자사는 법령이 밝고 뜻이 깨끗하며 신의가 흡족하기 때문에 성심으로 아뢴 것이라고 하였다.”

여정(余靖)이 이광(二廣)의 수(帥)로 있을 때 법을 만들어 관리들을 경계해서 남방의 약품을 팔 수 없게 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북으로 돌아갈 때에는 남해(南海)의 물건은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왕승유(王僧孺)가 남해 태수(南海太守)가 되었는데, 외국에서 배로 온 물건은 결코 갖는 일이 없었으며, 말하기를,

“옛사람은 촉(蜀) 땅의 장사(長史)가 되었는데도 평생토록 촉 땅의 물건을 갖지 않았다. 나는 자손들에게 남방의 물건을 가지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기고 싶다.”

하였다.


당나라 주경칙(朱敬則)이 부주 자사(涪州刺史)로 좌천되었다. 돌아올 때 회남(淮南)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타는 것은 말 한 필 뿐이어서 아들들은 걸어서 따라왔다.
동사의(董士毅)가 촉주(蜀州)의 수령이 되어 부임할 때 여러 자제들이 청하기를,

“아버님의 지절(志節)은 저희들도 다 잘 아는 일이니 일체 생계(生計)에 대해서는 조금도 넘보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아버님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촉 땅에는 좋은 재목이 많으니 노후(老後)의 일을 대비하시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니, 공이,

“잘 알겠다.”

하였다. 벼슬살고 돌아올 때 자제들이 마중하러 강가에 나와서 노후의 일에 관해 물으니, 공이,

“내가 듣건대 전나무는 잣나무만 못하다 하더라.”

하였다. 자제들이,

“아버님께서 마련하신 것이 잣나무이십니까?”

하자, 공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여기에 싣고 온 것은 잣씨이니 심도록 하라.”

하였다.




[주B-001]청심(淸心) : 맑은 마음가짐. 여기서는 수령이 청렴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주D-001]경북(鏡北) : 함경북도 경성(鏡城) 북쪽.
[주D-002]백향산(白香山) : 당(唐)나라 헌종(憲宗)ㆍ문종(文宗)ㆍ무종(武宗) 때의 문신 백거이(白居易)이다. 자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ㆍ섭유옹(囁嚅翁),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도 했다. 시호는 문(文)이다. 벼슬은 항주(杭州)ㆍ소주(蘇州)의 자사(刺史)를 거쳐 태자소부(太子少傅)ㆍ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문장이 정교하고 특히 시에 능하였는데, 시인 원진(元稹)과 함께 원백(元白)이라 불리며, 유우석(劉禹錫)과 명성이 비등하여 유백(劉白)이라 불린다. 저서에는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ㆍ《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이 있다. 《唐書 卷119 白居易傳》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주D-003]태호(太湖)의 돌 : 태호(太湖)는 중국 소주부(蘇州府)에 있는 호수 이름. 이 호수에서 나는 돌이 유명하여, 분경(盆景)ㆍ정석(庭石)에 많이 쓰이며, 그것을 태호석(太湖石)이라 한다.
[주D-004]이방백(李邦伯) : 미상이다.
[주D-005]송행시(送行詩) : 길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 여기서는 대리 부윤(大理府尹)으로 나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이다.
[주D-006]우 숙민공(于肅愍公) : 명(明) 영종(英宗)ㆍ경제(景帝) 때의 사람인 우겸(于謙)이다. 자는 정익(廷益), 호는 장춘거사(莊椿居士), 시호가 숙민(肅愍)인데, 뒤에 충숙(忠肅)으로 고쳤다. 하남(河南)ㆍ산서(山西)의 순무사(巡撫使)로 있으면서 혜정을 베풀었고,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저서에는 《우충숙집(于忠肅集)》이 있다. 《明史 卷170 于謙列傳》
[주D-007]정규묵(廷珪墨) : 이정규(李廷珪)가 만든 먹이다. 남당(南唐) 때 역수(易水) 사람 이초(李超)가 아들 정규(廷珪)와 흡주(歙州) 즉 휘주(徽州)로 옮겨 와서 만든 먹인데, 대대로 묵관(墨官)이 되었으며, 정규는 송(宋) 이후 제일의 묵공(墨工)이라 일컫는다. 정규의 아버지는 본디 해초(亥超)였는데, 남당(南唐)의 군주가 이(李)로 사성(賜姓)하여 이(李)로 행세하였다. 정규를 정규(廷邽)라고도 한다. 그가 만든 먹에 ‘邽’ 자가 있는 것을 상품으로, ‘圭’ 자가 있는 것을 그 다음으로 ‘珪’ 자가 있는 것을 그 다음으로 삼았다. 《淵鑑類函 文學部 14 墨一, 輟耕錄 墨》
[주D-008]용미연(龍尾硯) : 벼룻돌의 이름이다. 흡주(歙州) 즉 휘주(徽州)의 벼룻돌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무원현(婺源縣) 용미산(龍尾山)에서 난다. 석질(石質)이 단단하여 먹을 갈기에 좋다 한다.
[주D-009]포증(包拯)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사람으로 자는 희인(希仁), 시호는 효숙(孝肅), 단주지주(端州知州)를 지내고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다. 청렴강직하기로 유명하였으며, 염라포로(閻羅包老)라는 별칭이 있었다.
[주D-010]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 송(宋)나라 인종(仁宗)ㆍ영종(英宗)ㆍ신종(神宗) 때의 문신 구양수(歐陽脩)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취옹(醉翁)ㆍ육일거사(六一居士)ㆍ화방재(畵舫齋),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벼슬은 한림원 시독학사(翰林院侍讀學士)ㆍ병부 상서(兵部尙書)ㆍ태자소사(太子少師)를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 청주지주(靑州知州)ㆍ개봉지부(開封知府) 등을 지냈는데 정치가 너그럽고 간편하였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 저서에는 《신당서(新唐書)》ㆍ《신오대사(新五代史)》ㆍ《모시본의(毛詩本義)》ㆍ《집고록(集古錄)》ㆍ《문충집(文忠集)》 등이 있다. 《宋史 卷319 歐陽脩列傳》 《宋元學案 卷4 廬陵學案 歐陽脩》
[주D-011]당개(唐介) : 송(宋)나라 인종(仁宗)ㆍ영종(英宗)ㆍ신종(神宗) 때 사람으로 자는 자방(子方), 시호는 질숙(質肅)이다.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있을 적에 직간(直諫)하였으며, 담주통판(潭州通判), 복주(復州)ㆍ양주(揚州)의 지주(知州)를 지냈다. 신종(神宗) 때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는데 왕안석(王安石)과 자주 논쟁하였다. 《宋史 卷316 唐介列傳》
[주D-012]관리(關吏) : 관문(關門)을 지키는 관리, 또는 관세(關稅) 등을 맡아보는 관리이다.
[주D-013]계주 도독(桂州都督) : 계주(桂州)는 지명으로 광서성(廣西省) 계림현(桂林縣), 도독은 주(州)의 군무를 맡아보던 무장(武將)이다.
[주D-014]이홍절(李弘節) : 미상이다.
[주D-015]위징(魏徵) :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으로 자는 현성(玄成),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간의대부(諫議大夫)ㆍ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내고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이르렀다. 직간하기로 유명하였다. 저서에는 《유례(類禮)》ㆍ《군서치요(群書治要)》가 있다. 《唐書 卷97 魏徵列傳》
[주D-016]맹상(孟甞) : 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사람으로 자는 백주(伯周)이다. 합포 태수(合浦太守)를 지냈는데 치적이 있었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孟甞》
[주D-017]유자후(柳子厚) : 당(唐)나라 덕종(德宗)ㆍ헌종(憲宗) 때 사람 유종원(柳宗元)으로 자는 자후(子厚)이다. 벼슬은 영주사마(永州司馬)에서 유주 자사(柳州刺史)로 나갔으므로 유유주(柳柳州)라 부른다. 문장이 한유(韓愈)와 비등하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하나. 저서에는 《영주팔기(永州八記)》ㆍ《영성록(永城錄)》ㆍ《유선생문집(柳先生文集)》이 있다. 《唐書 卷168 柳宗元傳》 《舊唐書 卷160 柳宗元列傳》 〈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는 유자후(柳子厚)가 영주(永州)에 있을 때, 연주 자사(連州刺史) 최군민(崔君敏)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는 〈연주군복유혈기(連州郡復乳穴記)〉로 실려 있다. 여기에 실은 글은 정약용이 간추린 것이다.
[주D-018]여정(余靖)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 사람으로 자는 안도(安道), 호는 무계(武溪), 시호는 양(襄)이다. 우정언(右正言)으로 있을 적에 직간(直諫)을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담주(潭州)ㆍ계주(桂州)의 지주(知州)로 광남서로(廣南西路)를 경제(經制)하였고, 뒤에 공부 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다음에 나오는 이광(二廣)은 광동(廣東)과 광서(廣西)이다. 여정이 광남서로(廣南西路)의 경략(經略)ㆍ안무사(按撫使)로 있으면서 군무를 맡아 볼 때를 말한다. 《宋史 卷320 余靖列傳》
[주D-019]왕승유(王僧孺) : 남조(南朝) 양 무제(梁武帝) 때 사람이다. 처음에 제(齊)에 벼슬하여 전당령(錢塘令)을 지냈고, 양 무제(梁武帝) 때 남해 태수(南海太守)를 지냈는데, 치적이 있었다.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이르렀다. 저서에는 《십팔주보(十八州譜)》ㆍ《백가보(百家譜)》ㆍ《동남보집초(東南譜集抄)》ㆍ문집(文集) 등이 있다. 《南史 卷59 王僧孺列傳》 《梁書 卷33 王僧孺列傳》
[주D-020]주경칙(朱敬則) : 당(唐)나라 고종(高宗)ㆍ중종(中宗) 때 사람으로 자는 소련(少連), 시호는 원(元)이다. 성균좨주(成均祭酒)ㆍ정주 자사(鄭州刺史)를 지냈다. 《당서(唐書)》에는 “시어사(侍御史) 염조옹(冉祖雍)의 무고로 부주 자사(涪州刺史)로 좌천되었다가 무죄가 밝혀져 여주 자사(廬州刺史)로 개임되었다.” 하였고, 《구당서(舊唐書)》에는 “여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하여, 여주 자사에서 돌아올 때의 일로 적었다. 여주(廬州)는 회남로(淮南路) 소속인데, 정약용은 부주 자사에서 돌아올 때의 일로 인용하였다. 《唐書 卷115 朱敬則列傳》 《舊唐書 卷90 朱敬則列傳》
[주D-021]동사의(董士毅) :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