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합 서씨(令壽閤徐氏, 1544 ~ 1610) 차시

2016. 3. 27. 03:40茶詩



       영수합 서씨(令壽閤徐氏, 1544 ~ 1610) 차시| 경주문화답사여행^^

hyang | 조회 25 |추천 0 | 2006.02.16. 00:44




靜夜烹茶 고요한 밤에 차를 달임



幾年文火小茶爐 여러 해 동안 은근한 불로 작은 다로에 차를 끓였으니

一點神功定有無 신기하고 영묘한 공덕이 틀림없이 조금은 있으리

철罷淸琴還自撫 차 한 잔 마신 뒤 거문고를 어루만지다가

看來好月竟誰呼 밝은 달을 바라보니 누군가를 부르고 싶네

春盤椀碧沃瓊露 봄날 다반의 푸른 잔에 붉은 옥같은 차를 올리느라

古壁煙籠作粉圖 오래된 벽은 연기가 서려 얼룩져 있네

滿酌何須待旨酒 잔에 가득한 것이 어찌 꼭 맛있는 술이어야 하리

踏靑明日更携壺 답청가는 내일에는 또 다병을 가져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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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합 서씨는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의 어머니이다.

해거 홍현주는 초의에게 다도(茶道)를 알고자 하여 " 동다송"을 집필하는 동기를 만들었으며,

성리학에 정통한 문장가 홍석주는 서씨의 맏아들이고 홍현주는 셋째 아들이다.



서씨는 관찰사 서형수의 딸로 태어나 뒷날 우부승지을 지낸 홍인모와 결혼하여 3남2녀를 두었다.

서씨는 나이가 들어서 시를 쓰기 시작하여 200편에 가까운 시를 남길 정도로 대시인이었다.

여성으로서의 그의 시세계는 단아하면서도 세속을 벗어나 선비적 기풍이 보인다.

서씨의 집안은 모두가 시인이고 다인이었다.



홍현주의 시집에 초의가 발문을 썼으며, 그의 딸 홍원주도 다시를 포함하여 200편이 넘는 시를

남겼다. 서씨는 자녀들에게 검소함을 엄격하게 가르치고, 때로는 온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술과

차를 즐기며 시 짓는 자리를 마련하는 관대한 어머니였다.



여자들에게는 독서도 허용치 않았던 당시의 경직된 사회 여건으로 볼 때 서씨는 선구자적

인품이었으며, 차를 무척 즐겼고 거문고도 즐겨 탔다.

위는 그의 대표적인 다시이다.



위의 글에서 서씨는 오래 차를 마시면 신기하고 묘한 공덕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니 그의

차생활은 종교에 가까울 정도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맨마지막의 답청은 봄놀이를 뜻하고, 답청절은 삼월 삼짇날을 멋스럽게 이르는 말로서 당시

부녀자의 외출이 거의 없던 사대부 집안도 이 날은 차를 마시고 시를 지었고, 백성들은 들에 나가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을 밟으며 봄을 즐기는 풍속이 전해 내려 왔다.

시문과 수학에 능통한 여성실학자 '서영수각'






문인이자 수학자인 '서영수각'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문인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서영수각이다. 그녀는 192편의 시와 수필을 남긴 문인이면서 수리학자로 역사에 남아 있다.
서영수각(徐令壽閣)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서형수와 안동 김씨 김창협의 증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맑고 자질이 뛰어나고 글읽기를 좋아했다. 특히, 시를 좋아하여 늘 도연명의 '전원으로 돌아가리(歸田園)'를 암송하였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병약하여 입은 옷이 무거울 정도로 파리하고 가냘펐다. 하지만 집안 일이나 웃어른을 모시는 것에 빈틈이 없었고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생활을 하였다.
14세에 홍인모와 결혼하여 3남 2녀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집안은 친정과 시가가 모두 명망 있는 양반가였다.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내고 시집인 홍씨 가문도 재상을 많이 배출한 양반가였다. 그녀는 유교적 사회가 요구하는 유순하고도 순종적인 여성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영수각은 결혼해서 처음은 가풍을 배우고 아이를 기르고 남편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결혼 10년이 넘어 집안이 안정되어서야 자신의 문학적, 수학적 재능을 화려하게 꽃 피웠다. 물론 여기에는 남편 홍인모의 적극적인 외조가 큰 힘이 되었다.

자식에게 정치의 정도 가르친 어머니
남편 흥인모에게 있어 영수각은 도학자적 정신과 시문생활의 반려자였다.
어느 날, 홍인모는 자신이 우연히 던진 시율을 부인 서영수각이 답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재질의 놀라움을 표현했고 이때부터 아들들과 함께 그녀의 시와 산문을 모아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녀의 시와 글 192편은 남편 홍인모의 시집 「족수당집」, 6권에 '부영수각고'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영수각이란 당호도 남편이 지어준 것을 보면 이들 부부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구가한 평등부부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의 다양한 학문적 소양은 자식이라는 거목에게 질 좋은 거름이 되었다. 영수각은 밤이면 아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다. 잠자리에 들때는 조용히 경전을 외워 주고 시문과 격언을 들려주었다. 정치에 몸담을 아들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올바른 도리를 가르쳤다.
"왕에게 곧게 간(諫)하다가 화를 입되 두려워하지 않는 신하보다는 어진 정사를 베풀어 사지(死地)의 백성을 건져내는 신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활민(活民) 즉, 백성을 살게 하는 정치가 정도라고 믿고 가르친 것이다. 맏아들 홍석주는 좌의정을 지냈는데 성품이 겸허하고 언행이 평민과 같아 주위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의 학문적 기초와 도가적 사상, 그리고 슬기로운 몸가짐 모두 어머니 영수각의 가르침에 말미암은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자녀들에게 부귀영화는 화의 근원이므로 항상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수리학자로서 재능 발휘
한편, 서영수각은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공식을 간편히 푸는 방식을 스스로 고안해냈다. 개평방(開平方) 방정식, 삼각형 등 난해한 공식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낸 것이다.
"어머니는 수학을 상당히 좋아하셔서 언젠가 <주학계몽>을 본 일이 있는데 거기에 나온 나눗셈, 분수계산, 가감법 등을 보시고 왜 이렇게 번거롭고도 어리석게 풀었는가 하시고 당신 나름대로 그것을 계산해 내었습니다. 훗날 중국에서 들여온 「수리정온」이란 책을 가지고 어머니가 해놓은 것과 비교하여 보니 그 이론이 똑같았다."
이는 아들 홍석주가 쓴 영수각의 행장의 일부분이다. 이글을 통해 보듯이 영수각은 수학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영수각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자신의 발전은 물론 자녀를 모두 학자와 정치가로 키워 놓았고 71년의 수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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