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7. 03:55ㆍ茶詩
<가계사 기행> (18)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1) 隨筆
갖고계시는 깊이에 새삼 존경의 맘이 듭니다. 역시 대학총장님 출신은 다르구나 싶습니다.
<사주팔자는 토정비결보다 ‘허암비결’이 50년 먼저 맞췄고, 차(茶)맛은 초의선사(草衣禪師 張意洵, 1786~1866)보다 ‘허암선사(仙士)’가 200년 먼저 맛봤고, 방랑길은 김삿갓보다 ‘정삿갓’이 300년 먼저 걸었다>는 허암선생은 누군가 임자 만나면 ,소설가의 좋은 자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구자운 선생, 참 감사합니다. 요새 시력이 뚝 떨어져서 그 모양입니다. 눈이 보밴데 말입니다.
항상 꼭꼭 찝어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강문우회가 아니면 총장님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제 투정 다 받아주시고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안병남
또한 허암 정희량 선생의 내력과 작품 성향도 음미했습니다.
오늘 아침은 소득이 있는 공부를 한 듯 하여 뿌듯합니다. 정태수 총장님의 조예있는 글 솜씨도 존경합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글 더욱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이영혜
대화할 틈이 없는 자식들에게 읽게 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는데,우리 함께 해 봅시다.
이영혜 선생
원로께서 진지한 자세로 읽었다니,또 소득이 있엇다니, 참 기쁩니다. 저도 보람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조현두 선생,
감사합니다. 허암선생은 성리학 주류사회에 뛰어들었다가, 완전 아웃 싸이더로 튕겼지요? 그래서 후손의
좋은 글감이 되어주신 셈입니다. 한번 인생, 奇人인생도 의미있는 인생이지요. 조선생도 몇꼭지 써보시지요.
cafe.daum.net/namgangmunoo/5gNC/630 남강문학회
<가계사 기행> (19)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2) 隨筆
정태수 조회 272 추천 0 2012.09.18. 04:59
<가계사 기행> (19)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2)
정 태 수
이 편에서는 허암선생의 은둔과 관련된 기이한 일화 열두 가지를 간추려보기로 한다. 첫 번째로 우선 선생의 산은설(散隱說)을 살펴보자. “세상을 도피하여 숨어사는 것도, 산에 숨는 소은(小隱)이나 시성(市城)에 숨는 대은(大隱)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철저히 한산하고 적적한 산은(散隱)이라야 한다. 장자(壯子)의 산목(散木)을 보아라. 궁벽한 곳에 꾸부러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처럼, 나도 너절하고 초라하고 버려진 산은이라, 누가 나를 뺏으려 하겠느냐. 태극이 흩어져서 음양 건곤 8쾌 5행 4시가 되어 용도가 무궁해지고, 천지가 흩어져서 일월 성진 강산 풍우가 되어 조화가 무궁해지며, 도(道)가 흩어져 인의예지 부자 군신 붕우 부부가 되어 만사의 근본이 되듯이, 제대로 잘 산(散)해야 한다. 태극에 산 함이 없으면 일기(一氣)에 그치고, 천지에 산 함이 없으면 만물이 없다. 이로써 나는 산은을 즐기고 있다” (東文選)고 설파하였다. 허암은 이 설에 따라 자호(自號)를 산은이라 지어 썼다(허암집).
두 번째로 갑자사화(연산 10년, 1504) 예언 이야기다. 이는 무오사화 6년 후의 일로, 간신 임사홍(任士洪)이 훈구세력과 결탁하여,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출 사사된 일을 연산군에게 고하고, 그것이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 그리고 신진사류들의 소행이라고 밀고한 데서 불이 터졌다. 연산군은 두 후궁과 그 소생들을 죽이고, 김굉필(金宏弼) 등 관련 대신을 처형하고, 한명회(韓明澮) 등도 부관참시 하였다. 무오사화 때 귀양가거나 살아남은 선비들도 거의 쓸어버렸다. 무오 갑자 두 사화에서 연산군의 폭군성은 남김없이 발휘되었다(龍泉談寂記). 선비들은 허암선생이 역술을 풀어 미리 잠적한 일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세 번째로 혼돈주(混沌酒) 이야기다. 허암선생은 귀양살이 이래 집에서 술을 담가 거르지도 짜지도 않고 마시면서 우주 개벽 당시의 혼돈(카오스)에 비유했다. “내 막걸리 내 마시고 내 천성 내가 보전하네. 그 즐거움 즐기는 자는 마음의 즐김이니 늙음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이 즐거움 뉘 얄랴” 하며, 절대적 자유를 외치며 살았다. 대 우주를 생각하면서 소 인간의 허무를 느낀 한 사례라 할 것이다.
混沌酒歌 혼돈주가
一飮通神靈 宇宙欲闢如朦朧 한번 마시니 신령과 통하여, 우주개벽하듯 몽롱하고
再飮合自然 陶鑄混沌超鴻濛 두 번 마시니 자연과 합쳐, 혼돈 빚어 혼몽 넘네
手撫混沌世 耳聽混沌風醉鄕 혼돈세상 손으로 어루만지고, 혼돈바람 귀로 들으니
廣大我乃主 此爵天爵非人封 넓은 우주가 내 세상, 하늘이 주었지 사람 짓 아니야
何用區區頭上巾 淵明亦是支離人 어찌 구구히 두건을 쓰랴, 도연명도 역시 마뜩찮구나. <정태수 졸역>
네번째, 신선로의 발명 이야기다. 공이 산중에 은둔하고 있을 때, 그릇에다 숯불을 담고 그 둘레에 채소를 넣어 익혀 먹었다. 이 그릇화로가 주역(周易)의 63번째 쾌인 수화기제(水火旣濟, 水昇火降)의 이치로 만든 첫 발명품으로, 매 끼 식사를 이 화로 하나로 해결했다 한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져 퍼지면서, 허암공을 신선으로 보고 ‘신선로’라 이름 지어졌다 한다. 나중에는 야채뿐 아니라 고기와 생선에 육수를 넣어 오늘날의 고급 요리로 변했다. (大東奇聞. 1925).
다섯 번째, 퇴계 이황(李滉)이 산중에서 공부할 때 주역을 읽는데, 늙은 중이 곁에서 보고 이따금 구두점(句讀點) 잘못을 정확하게 고쳐주어 해석에 도움을 주었다. 퇴계는 난해한 주역을 그렇게 능통할 사람은 자신의 숙부 친구이신 허암선생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물었다. “지금은 중종반정이 일어나 어진 선비가 모두 나와 벼슬하고 있는데, 유독 허암공은 어찌하여 다시 속세에 나오지 않으시오” 하니, 그 답이 “허암의 이름은 들어서 안다. 그가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하다가 3년 상을 마치지 못했으니 불효요, 임금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으니 불충이라, 불효불충죄가 막대한데 무슨 면목으로 인간 세상에 나가겠나”하고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여섯 번째로, 허암선생의 은둔살이 때 변성명(變姓名)한 이야기다. 점술가 김윤(金倫)이 젊었을 때 묘향산에서 어떤 유명한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를 만나 7~8년간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분 이름이 이천년(李千年)이었다. 김윤이 그 스승의 사주오행을 보관해오다가, 뒤에 서울로 돌아와 역시 복술을 좋아하는 신경광(申景洸)을 만났는데, 그가 가지고 있던 유명인사 사주 일람표를 보니 정희량 선생 사주가 이천년의 사주와 꼭 같아 깜짝 놀랐다. 그래서 정희량과 이천년이 동일인임을 알게 되고, 자기가 허암선생 밑에서 사사(師事)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허암이 생존해 있다는 것도 세상이 믿게 되었다(퇴계언행록). 왜 이천년이냐는 논의도 있다. 이는 이씨조선이 2000년이나 유구하라는, 나라를 송축(頌祝)하는 뜻이라 해석하기도 하였다.(成渾의 牛溪雜記) (金正國의 思齋摭言)
일곱 번째, 허암집(虛菴集)에는 공의 시호가 문양공(文襄公)이라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시호란 국가 유공자가 죽은 뒤에 왕이 내려주는 명예로운 호인데, 34세에 조정을 떠난 공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뒷사람이 추측하기를 평안도 정주지방에 들어가 숨어살면서 학문을 일으킨 공이 크다고 생각한 지방사류들이 만들어 드린 사시(私諡,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친척․제자가 올리는 시호)가 아닌가 한다고 기록하였다.(新安邑誌, 신안은 평북 정주의 옛 이름). 매우 희귀한 예라 할 것이다.
여덟 번째, 수정연산군일기를 만들 때의 사초(史草) 이야기다. 연산군이 죽어 국조실록의 수정연산군일기를 쓰려는데, 두 차례의 큰 사화로 선비들이 많이 죽고 따라서 사료가 일실되어, 자료 구하기에 온 조정이 나섰다. 그때 허암선생 아우 어은공(漁隱公) 정희검(鄭希儉)의 집 벽장에서 많은 사료를 구하여, 연산군일기는 거의 그 사료로 메웠다. 세인들은 허암이 사화 있을 것을 미리 알고 감추어 둔 것이라 했다.(於于野談) (퇴계 언행록 초본).
아홉 번째, 허암공과 한시 시작(詩作) 교류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선배이며 글 친구 매계(梅溪) 조위(曺偉)였다. 그는 허암공과 같은 김종직의 제자로 조의제문을 그대로 싣게 했다는 묵인방조죄목으로 무오사화에 귀양살이한 바 있고, 중종 때 또 적소(謫所)에서 50세에 병사하였다. 그러고도 갑자사화 때에 부관참시 당한 불운의 선비였다. 한 때 사림파(士林派)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그는, 허암선생과의 차운시(次韻詩, 남의 운자를 따서 따라 지은 시)가 많은 문우다. 허암의 남은 시 중 그 여러 수가 조위와의 차운시이다. 그가 무오사화 때 순천에 유배되어 분통이 터져 지은 만분가(萬憤歌)는 유명하다. 안정복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제44책에 실려 있다. 아주 길기에 말구(末句) 한 줄만 떼어 싣기로 한다. 이 가사는 유배가사(流配歌詞)의 효시이다.
아무나 이내 뜻 알리 곧 있으면 百歲交遊 萬歲相感 하리라. <조위> |
열 번째로, 퇴계선생의 숙부인 이우(李堣)는 허암집을 만들고 그 서문을 썼다. 허암은 유물 유고를 흔적으로 남길 필요가 없다는 허무주의자라, 스스로 보관한 글이 없었다. 그런데 잠적한지 한 10년 후에 그가 죽은 줄 알고, 그의 일생과 시문이 아깝다고 생각한 친구 이우가 여러 사람에개 물어 허암의 유고를 수집 출간하였다. 그리고 그 서문에 “군(君, 자네)은 찬바람에 붉은 노을을 먹으며 천길 멧부리에서 옷을 떨칠지니, 나그네의 궁박 곤궁한 삶은 군이 의주 귀양살이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내 장차 지팡이로 구름을 두들겨 충허지관(沖虛之館, 신선이 거쳐간다는 상상의 집)에서 군에게 술잔을 권하고, 군이 저술한 것을 모두 들려주리라”고 하였다.
허암 차 비 (夜坐煎茶) 허암 차 샘 비
열한 번째로, 허암선생의 차(茶)사랑을 빠뜨릴 수 없다. 차를 손수 끓여 맛보며 드시면서 수도와 사색을 깊이 하고, 밤에 차를 끓인다는 「야좌전차(夜坐煎茶) 등 차시(茶詩)도 일곱 수를 남겼다. 그 중 이 야좌전차라는 시는 인천 허암봉의 차샘 옆에 시비로 서 있다. ‘허암 차시’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초의선사(草衣禪師) 장의순(張意洵)의 차사랑은 까만 뒤의 일이다.
흐린 물 얕다 하고 남 먼저 들지 말며 지는 해 높다 하고 번외(藩外) 길 가지마소 어즈버 날 다짐 말고 너나 조심 하여라. 허암 정희량 |
열두 번째로 공의 시조 작품은 희귀하게도 단 한 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남아 전해온다. 허암이 자기 자신에게 경고하는 시조다.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끝으로, 스스로를 불효자라고 낙인찍은 허암 정희량공이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가족끼리 만나게 해드린 일이 있다. 공의 아버지(鄭延慶)는 단종애사를 가까이에서 겪었다. 즉 5촌숙 형조판서 정종(鄭悰,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남편)이 세조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보고서는 철원부사를 끝으로 은퇴하였다. 그 위에 장남 허암공이 무오사화 후에 말없이 곁을 떠난 험한 꼴도 봐야 했다. 허암공은 6형제 중 맏이인데, 맏형노릇을 못하게 되니 둘째인 정희검공이 장남노릇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 동생은 진사에 올라 벼슬자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형 허암공이 벼슬길에 나아가 망가지는걸 보고는, 모든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아호를 ‘어은(漁隱)’이라 짓고 낚시와 시주일생(詩酒一生)을 보냈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가지도 않은 어은공에게, 그 섭섭한 마음을 달래줄 사후 영광이 안겨졌다. 외아들(孤竹齋公, 鄭彦慤)이 입신출세한 덕으로, 이조판서를 추증(追贈) 받은 것이다. 그 어른의 선조 중에는 벼슬 안한 이 하나 없는 집안 내력인데, 유독 어은공만 빠졌다가 사후에나마 벼슬을 얻어, 우리집은 만세청풍(萬世淸風)이 불었다. 나의 직선조(直先祖)는 아우 쪽 어은공이며 형 허암공파는 우리 큰집이다.
기이하게도 허암공의 묘는 평안도 정주의 심원산(속칭 鄭家山)에 있었으나 실전(失傳)되고, 아버지 철원공(鄭延慶)과 동생 어은공(鄭希儉)의 묘는 경기도 고양군의 성라산(星羅山)에 있었으나 역시 실전되었으니, 3부자는 생전 뿐 아니라 사후에도 이별운이 계속되었다. 후손들이 이 불운의 3부자를 의정부 송산의 선영 아래에 설단(設壇)함으로서 3부자의 만남을 이루어드렸다. 후손들은 모두 흐뭇해하며 성묘를 빠뜨리지 않는다. 까마득한 이 후손이 시조 한 수 읊어 올리겠습니다.
중앙에 아버지. 좌측이 형 허암공. 우측이 아우.
부 철원공 淸白府使 鐵原公 端宗哀史 바람맞고
장남 虛菴 사화입고 出仕접은 차남 漁隱
三父子 이제야 만나 지난 세월 달래누나.
형 허암공 生員 장원 進士 차석 文科 급제 허암공
갑자사화 예언하고 祖江 가에 신 한 켤레
老壯과 허무주의學派 태두로 추앙받네.
제 어은공 맏형 허암 사화 입자 뜻을 잃은 어은공
급제 후에 술과 詩 그렇지만 贈 吏判
외아들 孤竹齋公이 가마골서 절 올리네.
< 양해를 구하는 말씀 드립니다 >
저는 당초 나의 후손에게 우리 가계의 역사를 써서 전하려고 「가계사 기행」을 시작했었습니다. 이 말은 가계사에 관심이 없는 요새 후손들에게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가계사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에서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족보 나열 수준은 넘어야겠고, 거짓이나 가공은 금물이고, 하여 많은 준비와 자료가 동원되었습니다. 아무리 출세한 선조라도 스토리가 없는 선조는 그 내용이 족보에 기재된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어, 알차고 재미있는 글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가계사 소설」이 아니라 「가계사 수필」즉, 「가계 수필」이기 때문에 “사실”이라는 제약이 있어, 참 어려운 과제라는 것을 써가면서 새삼 더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제 자료가 떨어져서 족보 수준의 야윈 글이 나오게 생겼습니다. 그냥 나가면 억지로 부풀리거나 거짓을 보태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 이번 19회로서 중단하고, 당분간 자료발굴에 시간과 노력을 돌릴까 합니다. 재출발하는 날 다시 뵙겠습니다. 건필을 기원합니다
월계 정태수
混沌酒歌는 술의 맑은 것과 찌꺼기를 동시에 마시는 그 철학이,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류의 글이 아니라 싶습니다.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생각나게 합니다. 無極而太極(무극이어서 태극인데), 太極動而生陽(태극이 움직이어 양을 낳는다 ) 動極而靜(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하게 되고), 靜而生陰(고요하게 되면 음을 낳은데) ,靜極復動(고요함이 극에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
혼돈이란 요즘 카오스이론과 비슷한 것으로, 정말 깊이있는 사상입니다.
훌륭한 깃발을 꽂으셨습니다 그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휴식을 취하시면서 천천히 자료를 정리하십시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가 선생님과 제일 많이 통화를 하는데 버릇없이 굴때가 많아서 죄송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사랑합니다 선생님 안병남
깃발아라시니 분에 넘치는 찬사입니다. 준비 속히 해서 재출발에 노력하겠습니다. 안심하고 전화 주십시요.
천성산님,
사료 구득이 가장 난제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사료만 확고하면 , 그 자랑은 헛자랑이 아니지요. 역사지요.
창녕성씨는 삼한거족인데다 효자 열여가 많은 집안으로 아는데,발굴해 보시지요, 우리 鄭가 하고는 혼맥도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김현거사나 청다께서도 기다리고 있을껩니다.. 한번 달려보세요.
역사적인 사료내에서 글을 끝내는 것은 힘든 결단입니다. 아마도 양식있는 학자이기에
이런 결심이 섰던 것 같습니다. 자료는 의지를 가지고 찾아보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월계선생님의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조현두.
감사합니다.
길따라 발따라 정여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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