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사 기행> (19)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2016. 3. 27. 03:55茶詩



<가계사 기행> (18)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1) | 隨筆

정태수 | 조회 249 |추천 0 | 2012.09.18. 04:48


<가계사 기행>         (18)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1)

                                                                                                                   정 태 수


  인천 계양산(桂陽山) 서쪽 줄기의 끝, 해발 80m로 솟은 봉우리를 ‘허암봉(虛菴峰’) 또는 ‘허암산’이라 한다. 또 연산군 때, 여기 한 선비가 은거하였던 집터를 ‘허암지(虛菴址)’라 한다. 이 허암지는 인천시 기념물 58호로 지정되어있다. 그 옆에 찬 약수가 고여 흐르고 있는데 이를 ‘허암찻샘’이라 부르고, 거기 서있는 돌비석에는 ‘야좌전차(夜坐煎茶)라는 ’허암 차시(茶詩)‘가 새겨져 있다. 이 허암지에서는 인천시 서구에서 해마다 ‘허암 청소년 백일장’을 성대히 열고 있다. 또 1996년 11월 2일에는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허암선생 500주년 추모행사’가 개최되었다. 문집도 허암집(虛菴集) 상·하권이 있는데, 돌아가신 줄 알고 친구들이 만들어준 산 사람의 유고집(遺稿集)이다. 우리 후손들이 이 어른을 부르는 애칭은 <정삿갓>이다. 그분은 누구신가.



                       

                      허암 백일장 (인천)                                                  허암 집

           

   허암(虛菴) 정희량(鄭希良, 1469~1530)선생은 해주정씨 7세손이다. 나에게는 14대조가 된다. 아버지 철원부사 정연경(鄭延慶)공과 어머니 청주 경씨(慶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9세에 논어를 읽고 아버지의 물음에 척척 대답하였다. 허암공이 여섯 살 때 지은 한시 한 수를 보자(儒林抄集)(퇴계집)(율곡집).



         虹 <6세작>     (홍)                   무지개

     

     靑紅二段錦 (청홍이단금)      청색 홍색 두 겹 비단

     應出織女手 (응출직녀수)      직녀 손으로 짜내어

     欲作牽牛衣 (욕작견우의)      견우 옷을 지으려고

     洗掛雨後天 (세괘우후천)      비 갠 하늘에 씻어 걸었네.     (정태수 졸역)

 

   아버지가 그런 싹을 보고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넣어 학문을 닦게 하였더니, 23세에 생원에 장원하고 이듬해 진사에 차석급제(1492)하고 그 뒤에 문과에 합격(1495)하여, 불의(不義)와 타협할 줄 모르는 깨끗한 선비로 자랐다. 곧 이어 예문관 검열, 승정원 정자 등의 관직을 거쳤다. 그리고 명예로운 사가독서(賜暇讀書, 1496)를 받아 호당(湖堂)에 올랐으니, 이는 관직은 유지하면서 학문만 전념하는 특별휴가 독서였다. 이 때 함께 독서당에 나간 친구는 김전 김일손 신용개 남곤 등 14명의 장래가 촉망되는 친구들이었는데 모두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이 무렵, 박은(朴誾) 이행(李荇) 홍언충(洪彦忠) 정희량 네 사람을 당시의 문장4걸(文章四傑)'로 꼽았다고 한다.


  허암선생은 정통학문인 정주학(程朱學)에 통달하면서도, 주역(周易)을 위시한 방외학문(方外學問)에도 능통하였는데, 생애의 큰 흐름으로 보면, 전반기에는 성리학적 신념이 강한 벼슬살이에 온 힘을 쏟았고, 후반에 가면 노장학과 음양학, 그리고 허무주의에 심취하여 사물을 미리 예측하고 기이하며 독특한 행적을 남긴 분이다. 우선 초반행적부터 살펴보자.


  성종이 붕어한 연산군 1년(1494)에 궁중에서 불사(佛事)를 일으키려 하자. 공은 즉시 궁중불사 반대상소를 올렸다. 조선은 유교이념으로 건국하여 억불정책(抑佛政策)을 써 왔기에,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유생으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성균관유생 등 1000여명이 동참됐다. 그러나 그 글 속에 과격한 부분이 있어, 해주로 유배(1495)를 당했다가, 그 상소가 사심이 아니라는 정상참작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얼마 후 연산군의 횡포가 시작되어 그 거부감으로 공이 칭병사임(稱病辭任)하자, 왕이 내의(內醫)와 약을 보내오고 승진까지 시켜줌으로 그 뜻을 접은 일도 있었다.


  선생의 곧은 성격이 또다시 드러난 것은 다음해 연산군에게 상소한 십점소(十漸疏, 1497)였다. 그때는 연산군 즉위 4년째가 되는 해로서, 왕의 무리한 자질에 걱정과 우려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십점소란 당나라 충신 위징(魏徵)이 성군의 정치지표 열 가지를 써서 당태종에게 올린 10항목의 상소인데, 왕이 듣기 싫은 말도 직소하는 귀감으로서 선비들에게는 좋은 선례가 되는 소였다. 허암공도 이를 본으로 삼아 치정십조(治政十條)를 상소한 것이다. 모두 4,000자나 되는 장문의 건의서지만 간략하게 요점만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예문관 대교(待敎) 정희량은 상소합니다. 지난 달 27일에 정전(正殿)에 벼락이 떨어져 전하께서 재해를 당하셨는데, 신이 듣기에 나라에서 인사를 그르치면 하늘이 응징한다 합니다. 전하께서는 보위를 계승하신 후 군자와 소인의 진퇴를 정하는  격심한 이때, 아직 선정(善政)의 기틀을 잡지 못했기에 이런 변고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은 필시 하늘이 전하에게 경고하는 것이니, 자각하시고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계기로 삼으심이 옳은 줄로 압니다. 옛날 위징이 당태종에게 올린 십점소 병풍을 보고 배워, 신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십점소’를 올리오니 하람하시기 바랍니다」(요약)


1. 임금 마음을 바르게 하실 것  (正君心)        6. 환관을 억제하실 것    (抑內侍)

2. 경연에 근실하실 것             (勤經筵)        7. 교학을 숭상하실 것    (崇敎學)

3. 간쟁을 가납하실 것             (納諫諍)        8. 이단을 물리치실 것    (闢異端)

4. 어질고 간사함을 변별하실 것(辨賢邪)        9. 상벌을 신중히 하실 것 (愼賞罰)

5. 대신들을 소중히 하실 것      (敬大臣)       10. 재물을 절용하실 것    (節財用)

 

 이 상소를 올린 때의 공의 나이 29세였다. 사실 이 상소는 군주지배체제 하에서의 건의서로서는 개과하고 천선하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매서운 나무람으로 느껴질 정도라고 하겠다. 이에 대하여 어세겸(魚世謙)등 권신들은 젊은 사람이 자기들 노신들을 핍박한 것이라며 왕에게 제재를 요구했으나, 연산군은 이 상소가 쓸 만한 데가 있다 하여 시행토록 전교하였다.


  또 그해(연산군4년, 1497), 선대왕의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이 있었다.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자기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 중국 초패왕 항우(項羽)가 회왕(懷王)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역사를 비난한 글이었다. 사초라는 것은 왕도 봐서는 안 되는 엄중한 것인데도 이극돈(李克燉)과 유자광(柳子光)이 짜고 이 사초를 몰래 열람하고는 왕에게 “이 글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비유해서 쓴 글입니다”고 밀고하였다. 연산군은 대노하여 큰 옥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이다. 김일손은 처형되고 이미 저 세상 사람인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많은 사류들이 처벌을 받았다.


  이 무오사화 때 허암공이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리는 일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불고지죄(不告知罪)로 곤장 100대에 의주로 귀양가게 되었다. 얼마 후 김해로 옮겨졌다. 평안도에 흉년이 들어 유배자들을 먹여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해 유배 중에 수로왕릉이 영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참배하고 귀양에서 풀려나게 해달라고 공을 들였다. 그 기원의 글 말미에 정희량이란 이름 대신 성의 파자(破字)인 奠자와 邑자를 썼다. 그 날 밤의 꿈에 겹눈동자의 신인(神人)이 나타나 “너는 효성이 지극하여 9월 모일에 방면될 것이다”라 하였다(김해읍지). 그해 윤필상(尹弼商)의 건의로 특사(特赦)를 받아 연산군 7년(1501)에 풀려났다. 이 사건은 선생이 정통학문의 길에서 일탈하여 도학을 믿는 첫 사례로 보인다. 그리고 유배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임종을 못 본 것을 몹시 한스러워 하였는데 돌아와서 곧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이후 허암공은 겨우 10여 년간의 벼슬살이를 아주 떠났다. 두 번째 귀양에서 풀려난 허암공은 연산군의 패악을 전해 듣고 비분감개한 데다가 공직에 뜻을 잃고 자기를 다시 살펴본 듯하다. 공은 이미 자기 미래를 점치고 예측하는 일이 있었고, 친구들도 찾아와 장래를 점쳐달라고 한 일이 더러 있었는데 모두 틀린 적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갑자년(甲子年)에 있을 화가 무오년의 사화 보다 더 클 것이다. 그때 나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 예언하였다. 예측대로라면 이는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누를 끼치게 될 것으로 본 것이다. 선생은 여막을 나와 눈물로 배회하였다.


  얼마 후 그는 조강(祖江, 임진강을 만나는 한강 하류)가에 상주가 쓰는 두건과 짚신 한 켤레를 벗어놓고 사라지고 말았다. 물에 빠져죽은듯한 모양(溺水之樣)을 갖춘 것이다. 이날이 그해 5월5일 단오 날이었다. 이를 늦게야 시종과 가족이 알고 찾아보았으나 행적을 알 길이 없었다. 5촌 숙부인 정미수(鄭眉壽, 경혜공주의 아들)가 사람들을 동원하여 물속을 다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그 결과 “자취를 감춘 것이지 죽은 것은 아니다”라고 결말지었다 한다. 승지들이 왕에게 “정희량은 오래 경연에 모시던 사람이니 청컨대 경기도와 황해도의 두 관찰사로 하여금 그를 찾게 하자”고 했으나, 연산군은 “미친놈이 도망하여 죽었기로 뭣하러 찾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한다. 나중에 가족들은 그분의 짚신과 옷으로 경기도 고양 선산에 장사 지냈다. 이상이 허암 정희량선생의 관직에 계실 때의 일들이다.


  선생의 마지막 기록, 즉 허암공이 실종된 지 9일 후의 국가공식기록인 연산군일기 권44, 연산군 8년 5월 14일 조에는, 「고양군에서 어머니 묘를 수묘하면서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 대추 밤 등을 날것으로 먹고, 여러 가지 버섯과 풀들을 먹으며, 한 잔의 물도 마시지 않기를 열흘 또는 한 달이 되도록 하다가, 다음날 도망해버려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그 가족이 찾아서 강가에 이르니 신 두 짝이 물가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이것이 허암선생의 끝이었다.


  선생의 34년간의 삶을 크게 3분해 보면 처음 24년은 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과거 보고, 그 후 10여 년은 관직에서 일한 날이었는데, 그것도 반은 귀양살이로 채웠다. 그리하여 결국 34세에 조강 가에 두건과 짚신 벗어놓고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공이 세상을 버린 뒤, 34세 이후의 공의 세상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공이 버린 현실세계에서는 연기처럼 꺼져갔기에, 죽었다는 가정 하에 친구들에 의하여 유고문집이 엮어지고 있었고, 한 하늘 아래 다른 곳에서는 실지로 인천 허암봉으로 가서 숨어살다가, 다시 평안도 정주(定州) 정가산(鄭家山) 심원동(深遠洞)으로 들어가서 환갑을 넘기신 것이다. 결국 2중 세상을 살고 가신 셈이다.


  그리하여 허암집(4간본)에는 그의 실제의 삶의 마지막 기록이 남겨졌다. 즉,「허암선생은 정주에 살러 온 입향조(入鄕祖)다. 경인년(1530) 11월 27일에 심원동에서 향년 62세로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는 문양공(文襄公)으로 시집 2권이 있다. 첫 부인 강릉최씨는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이 없었고 고양(高陽) 성라산에 묘가 있다. 둘째 부인은 안동김씨로 심원산(세칭 정가산)에 부부 합묘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 심원산이 정가산이라는 속칭을 얻은 것도 정가(鄭家)인 허암이 살았고 묻혔기에 생긴 것이라 생각된다. 또 해주정씨 족보를 위시한 국내 학자들의 어느 문서에도 허암선생의 몰년(沒年)은 의문부호(?)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제는 이것도 《1530》또는 〈1530. 11. 27〉로 찾아드려야 되지 않나 싶다.


  학계에서는 허암선생을 방외인(方外人)으로 분류한다. 방외인은 체제 밖의 인물이다. 유가사회에서 볼 때 도가적 또는 불가적인 경향을 보이거나, 주류인 처사형(處士型)에서 벗어난 반체제적 이역인(異域人) 을 말한다. 사대부적 현세 질서를 부정하고 격렬히 비판하거나, 이를 초탈하여 유랑 도피 또는 잠적 등의 경향을 보이는 이단적 지식인을 말한다. 대체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93) 이러한 방외문학의 창출자로 보며, 남효온(南孝溫, 1454~92)과 홍유손(洪裕孫, 1431~1529)이 그 뒤를 따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외 인문학이 정희량 선생에 이르면 한 번 더 일탈한다. 개인의 절대적 자유와 방일(放逸) 노장음양학(老壯陰陽學)과 점복(占卜), 그리고 시문(詩文)을 쓰는 것은 좋으나 그 흔적을 남겨둘 필요는 없다는 등의 허무주의에 흐른다. 어느 학자는 허암선생을 허무주의학파의 대표라고 주장한다. 실지로 선생은 시나 글을 쓰기는 해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지금 있는 허암집은, 그냥 묻혀버리기에는 아깝다고 생각한 글친구들이 각각 소장하고 있던 허암의 시문들을 모아 간행한 것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것으로 알고 만든 유고집이다. 또한 선생의 음양점복 부분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으로, 방외문학 부분은 이달(李達)과 임제(林悌)로, 다시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1807~63)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연구할 것이 많다.   

    

  우리 후손들은 우스갯소리로, 사주팔자는 토정비결보다 ‘허암비결’이 50년 먼저 맞췄고, 차(茶)맛은 초의선사(草衣禪師 張意洵, 1786~1866)보다 ‘허암선사(仙士)’ 200년 먼저 맛봤고, 방랑길은 김삿갓보다 ‘정삿갓’이 300년 먼저 걸었다며 파안대소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 허암산과 정가산이란 두 개의 산에 자기 이름을 붙여놓은 허암 선조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다음에는 선생의 기행(奇行)을 보기로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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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가계사 기행> (18)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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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 12.09.18. 05:48
깊이가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조상에 대해서 이처럼 풍부한 자료를 찾아서 집필하시니,그런 자료를
갖고계시는 깊이에 새삼 존경의 맘이 듭니다. 역시 대학총장님 출신은 다르구나 싶습니다.

<사주팔자는 토정비결보다 ‘허암비결’이 50년 먼저 맞췄고, 차(茶)맛은 초의선사(草衣禪師 張意洵, 1786~1866)보다 ‘허암선사(仙士)’가 200년 먼저 맛봤고, 방랑길은 김삿갓보다 ‘정삿갓’이 300년 먼저 걸었다>는 허암선생은 누군가 임자 만나면 ,소설가의 좋은 자료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일러무삼 12.09.18. 06:44
오자가 두어군 데 보입니다. 총장님! 요즘 혹시 눈이 나빠지신 건 아닌지요?
돌아긴 줄→돌아간 줄, 사살을 알고도→사실을 알고도
 
 
정태수 12.09.18. 07:19
김현거사님, 수필 대가로 부터 격찬을 받으니 의기충천합니다. 힘을 얻었으니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구자운 선생, 참 감사합니다. 요새 시력이 뚝 떨어져서 그 모양입니다. 눈이 보밴데 말입니다.
항상 꼭꼭 찝어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봉화 12.09.18. 10:33
총장님 영광입니다
남강문우회가 아니면 총장님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제 투정 다 받아주시고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안병남
 
 
정태수 12.09.18. 12:55

고맙습니다. 남강이 흐르는 한, 우리 모임도 흐를 것 아니겠습니까.
 
 
양동근 12.09.20. 09:03
해주정씨의 족보를 잘 읽었습니다.조상을 홍보하는 것은 후손의 역할입니다.
시간나시는대로 조상을 만천하에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리틀 엔젤 12.09.20. 11:34
제목을 보며 방외인(方外人)이 뭘까 했는데 그 뜻을 알게 되어 다행스럽습니다. 이해하려고 애쓰며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또한 허암 정희량 선생의 내력과 작품 성향도 음미했습니다.
오늘 아침은 소득이 있는 공부를 한 듯 하여 뿌듯합니다. 정태수 총장님의 조예있는 글 솜씨도 존경합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글 더욱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이영혜
 
 
timpersi 12.09.20. 12:43
정희량선생의 일대기 잘 읽었습니다.
어떤 단체건 주류에서 비켜서 있으면
이방인으로 몰리는 것 같습니다. 조현두.
 
 
정태수 12.09.20. 19:40
양동근 선생, 고맙습니다.
대화할 틈이 없는 자식들에게 읽게 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는데,우리 함께 해 봅시다.
이영혜 선생
원로께서 진지한 자세로 읽었다니,또 소득이 있엇다니, 참 기쁩니다. 저도 보람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조현두 선생,
감사합니다. 허암선생은 성리학 주류사회에 뛰어들었다가, 완전 아웃 싸이더로 튕겼지요? 그래서 후손의
좋은 글감이 되어주신 셈입니다. 한번 인생, 奇人인생도 의미있는 인생이지요. 조선생도 몇꼭지 써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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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사 기행> (19)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2) | 隨筆

정태수 | 조회 272 |추천 0 | 2012.09.18. 04:59


<가계사 기행>         (19)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2)

                                                                                                                         정 태 수


  이 편에서는 허암선생의 은둔과 관련된 기이한 일화 열두 가지를 간추려보기로 한다. 첫 번째로 우선 선생의 산은설(散隱說)을 살펴보자. “세상을 도피하여 숨어사는 것도, 산에 숨는 소은(小隱)이나 시성(市城)에 숨는 대은(大隱)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철저히 한산하고 적적한 산은(散隱)이라야 한다. 장자(壯子)의 산목(散木)을 보아라. 궁벽한 곳에 꾸부러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처럼, 나도 너절하고 초라하고 버려진 산은이라, 누가 나를 뺏으려 하겠느냐. 태극이 흩어져서 음양 건곤 8쾌 5행 4시가 되어 용도가 무궁해지고, 천지가 흩어져서 일월 성진 강산 풍우가 되어 조화가 무궁해지며, 도(道)가 흩어져 인의예지 부자 군신 붕우 부부가 되어 만사의 근본이 되듯이, 제대로 잘 산(散)해야 한다. 태극에 산 함이 없으면 일기(一氣)에 그치고, 천지에 산 함이 없으면 만물이 없다. 이로써 나는 산은을 즐기고 있다 (東文選)고 설파하였다.  허암은 이 설에 따라 자호(自號)를 산은이라 지어 썼다(허암집).


  두 번째로 갑자사화(연산 10년, 1504) 예언 이야기다. 이는 무오사화 6년 후의 일로, 간신 임사홍(任士洪)이 훈구세력과 결탁하여,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출 사사된 일을 연산군에게 고하고, 그것이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 그리고 신진사류들의 소행이라고 밀고한 데서 불이 터졌다. 연산군은 두 후궁과 그 소생들을 죽이고, 김굉필(金宏弼) 등 관련 대신을 처형하고, 한명회(韓明澮) 등도 부관참시 하였다. 무오사화 때 귀양가거나 살아남은 선비들도 거의 쓸어버렸다. 무오 갑자 두 사화에서 연산군의 폭군성은 남김없이 발휘되었다(龍泉談寂記). 선비들은 허암선생이 역술을 풀어 미리 잠적한 일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세 번째로 혼돈주(混沌酒) 이야기다. 허암선생은 귀양살이 이래 집에서 술을 담가 거르지도 짜지도 않고 마시면서 우주 개벽 당시의 혼돈(카오스)에 비유했다. “내 막걸리 내 마시고 내 천성 내가 보전하네. 그 즐거움 즐기는 자는 마음의 즐김이니 늙음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이 즐거움 뉘 얄랴” 하며, 절대적 자유를 외치며 살았다. 대 우주를 생각하면서 소 인간의 허무를 느낀 한 사례라 할 것이다.


       混沌酒歌                                        혼돈주가


一飮通神靈 宇宙欲闢如朦朧          한번 마시니 신령과 통하여, 우주개벽하듯 몽롱하고

再飮合自然 陶鑄混沌超鴻濛          두 번 마시니 자연과 합쳐, 혼돈 빚어 혼몽 넘네

手撫混沌世 耳聽混沌風醉鄕          혼돈세상 손으로 어루만지고, 혼돈바람 귀로 들으니

廣大我乃主 此爵天爵非人封          넓은 우주가 내 세상, 하늘이 주었지 사람 짓 아니야

何用區區頭上巾 淵明亦是支離人    어찌 구구히 두건을 쓰랴, 도연명도 역시 마뜩찮구나.   <정태수 졸역>

 

 번째, 신선로의 발명 이야기다. 공이 산중에 은둔하고 있을 때, 그릇에다 숯불을 담고 그 둘레에 채소를 넣어 익혀 먹었다. 이 그릇화로가 주역(周易)의 63번째 쾌인 수화기제(水火旣濟, 水昇火降)의 이치로 만든 첫 발명품으로, 매 끼 식사를 이 화로 하나로 해결했다 한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져 퍼지면서, 허암공을 신선으로 보고 ‘신선로’라 이름 지어졌다 한다. 나중에는 야채뿐 아니라 고기와 생선에 육수를 넣어 오늘날의 고급 요리로 변했다. (大東奇聞. 1925).


  다섯 번째, 퇴계 이황(李滉)이 산중에서 공부할 때 주역을 읽는데, 늙은 중이 곁에서 보고 이따금 구두점(句讀點) 잘못을 정확하게 고쳐주어 해석에 도움을 주었다. 퇴계는 난해한 주역을 그렇게 능통할 사람은 자신의 숙부 친구이신 허암선생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물었다. “지금은 중종반정이 일어나 어진 선비가 모두 나와 벼슬하고 있는데, 유독 허암공은 어찌하여 다시 속세에 나오지 않으시오” 하니, 그 답이 “허암의 이름은 들어서 안다. 그가 부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하다가 3년 상을 마치지 못했으니 불효요, 임금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으니 불충이라, 불효불충죄가 막대한데 무슨 면목으로 인간 세상에 나가겠나”하고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여섯 번째로, 허암선생의 은둔살이 때 변성명(變姓名)한 이야기다. 점술가 김윤(金倫)이 젊었을 때 묘향산에서 어떤 유명한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를 만나 7~8년간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분 이름이 이천년(李千年)이었다. 김윤이 그 스승의 사주오행을 보관해오다가, 뒤에 서울로 돌아와 역시 복술을 좋아하는 신경광(申景洸)을 만났는데, 그가 가지고 있던 유명인사 사주 일람표를 보니 정희량 선생 사주가 이천년의 사주와 꼭 같아 깜짝 놀랐다. 그래서 정희량과 이천년이 동일인임을 알게 되고, 자기가 허암선생 밑에서 사사(師事)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허암이 생존해 있다는 것도 세상이 믿게 되었다(퇴계언행록). 왜 이천년이냐는 논의도 있다. 이는 이씨조선이 2000년이나 유구하라는, 나라를 송축(頌祝)하는 뜻이라 해석하기도 하였다.(成渾의 牛溪雜記) (金正國의 思齋摭言)

  일곱 번째, 허암집(虛菴集)에는 공의 시호가 문양공(文襄公)이라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시호란 국가 유공자가 죽은 뒤에 왕이 내려주는 명예로운 호인데, 34세에 조정을 떠난 공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뒷사람이 추측하기를 평안도 정주지방에 들어가 숨어살면서 학문을 일으킨 공이 크다고 생각한 지방사류들이 만들어 드린 사시(私諡,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친척․제자가 올리는 시호)가 아닌가 한다고 기록하였다.(新安邑誌, 신안은 평북 정주의 옛 이름). 매우 희귀한 예라 할 것이다.

  여덟 번째, 수정연산군일기를 만들 때의 사초(史草) 이야기다. 연산군이 죽어 국조실록의 수정연산군일기를 쓰려는데, 두 차례의 큰 사화로 선비들이 많이 죽고 따라서 사료가 일실되어, 자료 구하기에 온 조정이 나섰다. 그때 허암선생 아우 어은공(漁隱公) 정희검(鄭希儉)의 집 벽장에서 많은 사료를 구하여, 연산군일기는 거의 그 사료로 메웠다. 세인들은 허암이 사화 있을 것을 미리 알고 감추어 둔 것이라 했다.(於于野談) (퇴계 언행록 초본).

  아홉 번째, 허암공과 한시 시작(詩作) 교류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선배이며 글 친구 매계(梅溪) 조위(曺偉)였다. 그는 허암공과 같은 김종직의 제자로 조의제문을 그대로 싣게 했다는 묵인방조죄목으로 무오사화에 귀양살이한 바 있고, 중종 때 또 적소(謫所)에서 50세에 병사하였다. 그러고도 갑자사화 때에 부관참시 당한 불운의 선비였다. 한 때 사림파(士林派)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그는, 허암선생과의 차운시(次韻詩, 남의 운자를 따서 따라 지은 시)가 많은 문우다. 허암의 남은 시 중 그 여러 수가 조위와의 차운시이다. 그가 무오사화 때 순천에 유배되어 분통이 터져 지은 만분가(萬憤歌)는 유명하다. 안정복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제44책에 실려 있다. 아주 길기에 말구(末句) 줄만 떼어 싣기로 한다. 이 가사는 유배가사(流配歌詞)의 효시이다. 


 

  아무나 이내 뜻 알리 곧 있으면

  百歲交遊 萬歲相感 하리라.    <조위>


  열 번째로, 퇴계선생의 숙부인 이우(李堣)는 허암집을 만들고 그 서문을 썼다. 허암은 유물 유고를 흔적으로 남길 필요가 없다는 허무주의자라, 스스로 보관한 글이 없었다. 그런데 잠적한지 한 10년 후에 그가 죽은 줄 알고, 그의 일생과 시문이 아깝다고 생각한 친구 이우가 여러 사람에개 물어 허암의 유고를 수집 출간하였다. 그리고 그 서문에 “군(君, 자네)은 찬바람에 붉은 노을을 먹으며 천길 멧부리에서 옷을 떨칠지니, 나그네의 궁박 곤궁한 삶은 군이 의주 귀양살이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내 장차 지팡이로 구름을 두들겨 충허지관(沖虛之館, 신선이 거쳐간다는 상상의 집)에서 군에게 술잔을 권하고, 군이 저술한 것을 모두 들려주리라”고 하였다.



                           

                           허암 차 비 (夜坐煎茶)                                 허암 차 샘 비    


 

      한 번째로, 허암선생의 차(茶)사랑을 빠뜨릴 수 없다. 차를 손수 끓여 맛보며 드시면서 수도와 사색을 깊이 하고, 밤에 차를 끓인다는 「야좌전차(夜坐煎茶) 등 차시(茶詩)도 일곱 수를 남겼다. 그 중 이 야좌전차라는 시는 인천 허암봉의 차샘 옆에 시비로 서 있다. ‘허암 차시’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초의선사(草衣禪師) 장의순(張意洵)의 차사랑은 까만 뒤의 일이다. 



   흐린 물 얕다 하고 남 먼저 들지 말며

   지는 해 높다 하고 번외(藩外) 길 가지마소

   어즈버 날 다짐 말고 너나 조심 하여라. 

                                 허암  정희량 

  

   열두 번째로 공의 시조 작품은 희귀하게도 단 한 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남아 전해온다. 허암이 자기 자신에게 경고하는 시조다.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끝으로, 스스로를 불효자라고 낙인찍은 허암 정희량공이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가족끼리 만나게 해드린 일이 있다. 공의 아버지(鄭延慶)는 단종애사를 가까이에서 겪었다. 즉 5촌숙 형조판서 정종(鄭悰,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남편)이 세조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보고서는  철원부사를 끝으로 은퇴하였다. 그 위에 장남 허암공이 무오사화 후에 말없이 곁을 떠난 험한 꼴도 봐야 했다. 허암공은 6형제 중 맏이인데, 맏형노릇을 못하게 되니 둘째인 정희검공이 장남노릇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 동생은 진사에 올라 벼슬자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가, 형 허암공이 벼슬길에 나아가 망가지는걸 보고는, 모든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아호를 ‘어은(漁隱)’이라 짓고 낚시와 시주일생(詩酒一生)을 보냈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가지도 않은 어은공에게, 그 섭섭한 마음을 달래줄 사후 영광이 안겨졌다. 외아들(孤竹齋公, 鄭彦慤)이 입신출세한 덕으로, 이조판서를 추증(追贈) 받은 것이다. 그 어른의 선조 중에는 벼슬 안한 이 하나 없는 집안 내력인데, 유독 어은공만 빠졌다가 사후에나마 벼슬을 얻어, 우리집은 만세청풍(萬世淸風)이 불었다. 나의 직선조(直先祖)는 아우 쪽 어은공이며 형 허암공파는 우리 큰집이다.


  기이하게도 허암공의 묘는 평안도 정주의 심원산(속칭 鄭家山)에 있었으나 실전(失傳)되고, 아버지 철원공(鄭延慶)과 동생 어은공(鄭希儉)의 묘는 경기도 고양군의 성라산(星羅山)에 있었으나 역시 실전되었으니, 3부자는 생전 뿐 아니라 사후에도 이별운이 계속되었다. 후손들이 이 불운의 3부자를 의정부 송산의 선영 아래에 설단(設壇)함으로서 3부자의 만남을 이루어드렸다. 후손들은 모두 흐뭇해하며 성묘를 빠뜨리지 않는다. 까마득한 이 후손이 시조 한 수 읊어 올리겠습니다.


 

    중앙에 아버지. 좌측이 형 허암공. 우측이 아우.


                             부  철원공    淸白府使 鐵原公 端宗哀史 바람맞고

                                               장남 虛菴 사화입고 出仕접은 차남 漁隱

                                               三父子 이제야 만나 지난 세월 달래누나.


                             형  허암공    生員 장원 進士 차석 文科 급제 허암공

                                               갑자사화 예언하고 祖江 가에 신 한 켤레

                                               老壯과 허무주의學派 태두로 추앙받네.


                             제  어은공    맏형 허암 사화 입자 뜻을 잃은 어은공

                                              급제 후에 술과 詩 그렇지만 贈 吏判

                                              외아들 孤竹齋公이 가마골서 절 올리네.         




                                         < 양해를 구하는 말씀 드립니다 >


   저는 당초 나의 후손에게 우리 가계의 역사를 써서 전하려고 「가계사 기행」을 시작했었습니다. 이 말은 가계사에 관심이 없는 요새 후손들에게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가계사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에서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족보 나열 수준은 넘어야겠고, 거짓이나 가공은 금물이고, 하여 많은 준비와 자료가 동원되었습니다. 아무리 출세한 선조라도 스토리가 없는 선조는 그 내용이 족보에 기재된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어, 알차고 재미있는 글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가계사 소설」이 아니라 「가계사 수필」즉, 「가계 수필」이기 때문에 “사실”이라는 제약이 있어, 참 어려운 과제라는 것을 써가면서 새삼 더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제 자료가 떨어져서 족보 수준의 야윈 글이 나오게 생겼습니다. 그냥 나가면 억지로 부풀리거나 거짓을 보태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 이번 19회로서 중단하고, 당분간 자료발굴에 시간과 노력을 돌릴까 합니다. 재출발하는 날 다시 뵙겠습니다. 건필을 기원합니다


      월계  정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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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8

     

<가계사 기행> (19) 방외인(方外人) 허암 정희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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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현 12.09.18. 06:20
허암공의 산은설(散隱說)은 노자 장자의 철학과 주역의 용어가 점철되어, 한국철학사에서 언급되어야할 가치를 충분히 지닌 글이라 생각됩니다.

混沌酒歌는 술의 맑은 것과 찌꺼기를 동시에 마시는 그 철학이,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류의 글이 아니라 싶습니다.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생각나게 합니다. 無極而太極(무극이어서 태극인데), 太極動而生陽(태극이 움직이어 양을 낳는다 ) 動極而靜(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하게 되고), 靜而生陰(고요하게 되면 음을 낳은데) ,靜極復動(고요함이 극에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

혼돈이란 요즘 카오스이론과 비슷한 것으로, 정말 깊이있는 사상입니다.
 
 
청다 12.09.18. 06:29
잘 읽었습니다.그동안 노익장의 필력을 과시했습니다.휴식하시면서 천천히 자료를 찿아보면 많은 자료가 있으리라 봅니다.가문의 큰길 이야기는 물론 단일 주제로 묶어볼수있는 샛길의 여러 이야기도 많으리라 봅니다. 건투를 빕니다.
 
 
일러무삼 12.09.18. 12:42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구자운
 
 
김창현 12.09.18. 06:33
그동안 정총장님의 가계사 글은 풍부한 역사적 사실을 싣고있어,남강문우 싸이트에 태산북두같은무게를 실어주었는데, 19회로 그쳐서 안타깝습니다.자료발굴이 계속 이어지기 바랍니다. 남강문우회에 정태범 정현주씨도 해주정씨인걸로 아는데, 진주에 이런 훌륭한 가문의 후손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정태수 12.09.18. 07:35
김현거사님, 깊이있는 평가와 지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서양 뿐 아니라 특히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으신 김거사님의 댓글에서도 많이 배웁니다. 지도조언에 따라 진로를 홱 돌려, 도망에서 휴식으로 벅수를 넘었습니다. 조금 쉬었다가 靜極復動 하겠습니다.
 
 
정태수 12.09.18. 07:49
청다 선생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우연히도 꼭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동지를 만나, 얻은 용기가 좋은 열매를 열리게 한 것 같습니다. 결국 역사와 문학이 통섭을 이루어내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편달을 바랍나다.
 
 
정태수 12.09.18. 07:59
具 일러무삼 선생, 내용이.. 내용이...하신 걸 보고, 괜찮았다는 칭찬으로 색여듣었습니다. 시원찮은 저의 글을 정신 써서 읽어주시고 지적과 지도를 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이영성 12.09.18. 18:40
19회의 옥고를 읽어며 오늘날 가계사에 관심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 만으로도 집필수고의 보람이 넘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쉬셨다가 이어지는 글 읽는 날이 어서 오게 해주십시요
 
 
정태수 12.09.18. 20:45
이영성 문우님, 보잘것 없는 글을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 일 조금 더 해놓고 시조부에 놀러 가겠습니다. 거기서 만나뵙겠습니다.
 
 
농암 12.09.18. 20:53
존경하옵는 선배 정총장님! 알찬 내용의 가문사를 잘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으며 조선조에 가장 기품있는 명문가임을 잘 알게되었습니다. 허암공의 8번째 기행에 매계 조위선생과 시작으로 친교가 깊었고 모두 김종직선생의 문하생이라 기록하셨는데 제 집안 9대조 김해부사 최윤신 공도 김일손,조위등과 점필재 선생 휘하에서 수학하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의 9대조와 허암공과도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역시 무호사화로 인하여 환란을 당하여 묘소를 쓰지 못하여 단제로 모시고 있습니다.매계선생은 점필재 선생의 후학이면서 수하 처남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태수 12.09.19. 14:34
농암 최선생, 반갑습니다. 김종직, 조위, 무오사화, 이 셋과 최윤선선생이 동시대에 연결되면, 허암선생과도 같은 선후배간의 문하생으로 연결될 것 같습니다. 조위는 김종직의 손아래 처남인 점도 맞고요. 가만 있자...그럼 최형과 나는 500년 지기가 아닙니까. 하하~ 14~15대조 쯤 되겠는데요? 500년 전에도 동창이요, 지금 우리도 동창이니, 그 인연이 유구한 인연이어서 더욱 기쁩니다.
 
 
봉화 12.09.19. 07:51
재출발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 선생님의 가계수필이 맥을 이어갈 터인데
훌륭한 깃발을 꽂으셨습니다 그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휴식을 취하시면서 천천히 자료를 정리하십시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가 선생님과 제일 많이 통화를 하는데 버릇없이 굴때가 많아서 죄송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사랑합니다 선생님 안병남
 
 
천성산 12.09.19. 10:50
월계 선생님. 지나간 선조님을의 족적을 더듬으시며 사료를 발굴 하시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을 것입니다. 월계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시고 주의하셨다는 자칫 잘못하면 가문의 자랑으로나 비쳐질까하는 염려가 더 힘들게 하셨을 것입니다. 저의 집 가계는 중시조 이후 몰락하다시피한 경우가 되어 더 사료 발굴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가계를 살피는데 주저되게 합니다. 아뭇튼 좋은 사례로 후배들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 성종화
 
 
정태수 12.09.19. 21:27
봉화님, 감사합니다.
깃발아라시니 분에 넘치는 찬사입니다. 준비 속히 해서 재출발에 노력하겠습니다. 안심하고 전화 주십시요.
천성산님,
사료 구득이 가장 난제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사료만 확고하면 , 그 자랑은 헛자랑이 아니지요. 역사지요.
창녕성씨는 삼한거족인데다 효자 열여가 많은 집안으로 아는데,발굴해 보시지요, 우리 鄭가 하고는 혼맥도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김현거사나 청다께서도 기다리고 있을껩니다.. 한번 달려보세요.
 
 
농암 12.09.19. 23:41
정총장님! 오기를 지적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시대는 15세기 말이고 510여년 전이지요. 제의 16대조 이신데 시조로부터 9세이신 것을 잘못 기록하신점 해량하여주시길 바랍니다.성종실록 편찬시 총제관은 어세겸,지춘추관사는 조위였는데 이 두분이 사실상 김일손이 점필재 선생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도록 양해하신 것으로 봅니다. 이로 인하여 김일손 권오복은 참살,어세겸은 파직, 조위는 당시 명나라 성절사라 의주에서 체포후 순천으로 귀양가서 병사하는 등 무오사화의 환란에 양 가문이 다 같이 어려움을 당하셨네요.
 
 
timpersi 12.09.20. 21:20
가계사 뿐만 아니라 글을 계속 적다보면 스스로 도취되어 과장하기도 하는데
역사적인 사료내에서 글을 끝내는 것은 힘든 결단입니다. 아마도 양식있는 학자이기에
이런 결심이 섰던 것 같습니다. 자료는 의지를 가지고 찾아보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월계선생님의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조현두.
 
 
정태수 12.09.21. 10:45
조선생, 맞습니다. 상상과 창작을 하면 "소설"이 되지요. 가계를 쓴다는 것은 1차적으로는 역사 서술이며, 수필이라는 것도 사실을 엮는 거이지 역시 가공은 아니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다만, 역사는 사관에 따라 다른 평가를 하고,수필도 시각에 따라 주관이 작용하는 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조선생의 가계수필 옥고, 기다리겠습니다.
 
 
정여산 14.05.23. 20:24
선조의 발자취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길따라 발따라 정여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