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속명은 도암(道岩)이요, 휘(諱)는 월면(月面)이며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속성은 여산 송씨니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요 어머니는 김씨이다.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에서 출생하셨다. 스님이 출생하기 전 김씨의 꿈에 신령한 용이 구슬을 토하매 광명이 황홀한지라, 그 광명을 받고 잉태한지 열 달만에 낳으니 즉 고종2년(1871) 신미(辛未) 3월 7일 이었다. 스님이 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속세의 세업을 이을 아이가 아니요 장차 불문에 들어가서 고승이 될 아이"라고 하였다. 스님이 열세살 되던 해 계미년 겨울에 전북 김제 금산사에 가서 연말을 보내면 장수하고 만사가 길하다는 말을 듣고 금산사로 가서 처음 부처님의 등상(等像)과 스님네를 보니 환희심이 샘물처럼 솟아오르니 그 뒤부터는 집에 돌아 와서도 출가하여 스님이 될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부모님은 아들을 놓아 줄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사촌형이 더욱 엄하게 감시를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몰래 나무꾼의 지게를 지고 야반도주하여 전주 봉서사로 가서 며칠동안 머무는 중 여러 스님들이 삭발하여 스님이 되라고 권하였으나 그 곳에 인연이 없었던지 마음이 들지 않아 이 절을 떠나 짚신을 벗어 작대기 끝에 매달아 둘러메고 맨발로 걸으니, 하늘에 닿을 듯한 푸른 태산 준령이 눈앞에 우뚝하고 흐르는 시냇물은 소리마다 속세의 잡념을 씻어 주는 듯 즐겁기만 하였으며, 숲 속에 핀 꽃송이들이 반겨 맞아 주고, 재재거리는 산새들 소리는 사람의 미(迷)한 길을 가리켜 주는 듯 하였다. 한 가닥의 오솔길을 따라 피곤한 것도 잊고 한 곳을 당도하니 이곳이 전주 송광사였다. 스님들이 보고, 「네가 어디서 왔으며,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니 여러 스님들이 인자하게 맞아 주며 말하였다. 「이곳은 훌륭한 스님이 없으니 쌍계사에 진암(眞岩) 노사(老師)를 찾아가라.」고 인도하기에 논산 쌍계사로 갔다. 마침 진암노사가 계룡산 동학사로 옮기셨으므로 다시 동학사로 가서 진암노사를 뵙고 거기서 안주하게 되었으니, 때는 스님 나이 열 네 살이 되던 갑신년이었다. 얼마 후 양식이 떨어졌다. 마침 젊은 스님이 동냥을 나가게 되매 아직 행자인 스님도 따라가게 되었다. 젊은 스님이 말하기를, 「중도 아닌 유발동자가 무슨 동냥을 하겠는가?」 하기에 스님이 말하기를, 「얻어먹는 사람이 승속(僧俗)이 따로 있습니까?」하였다. 젊은 스님이 말없이 동행하여 십여일 만에 엽전 여덟냥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매, 진암노사가 스님의 손을 잡고 탄식하여 이르되, 「내가 귀한 집 자제를 중도 만들기 전에 동냥부터 시키니 나같이 박복한 사람은 세상에서 둘도 없을 것이다.」하며 눈물을 흘리니 스님이 말하되, 「순(舜) 임금도 독 장사를 하였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갑신년 시월 초순 어느날, 한 객승이 왔기에 본 즉 육척이 넘는 체구에 위풍당당하고 안광이 대중을 놀라게 하였다. 이분이 천장사에서 온 경허(鏡虛) 화상이었다. 경허스님이 대중과 같이 살던 중 진암노사가 경허스님께 「이 아이가 비범한 기틀이 엿보이니 스님이 데려다가 잘 지도하여 장차 불교계에 동량이 되도록 하여 주시오.」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처음에 경허스님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다가 진암노사의 간곡한 말씀에 결국 따르기로 하였다. 경허스님이 한 젊은 스님을 시켜 스님을 충남 서산 천장사에 계신 태허(太虛) 스님에게 맡기도록 부탁하여 스님은 천장사로 가서 태허스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 해 12월에 태허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스님을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니 법명이 월면(月面)이었다. 그 뒤 스물다섯살 계묘년 11월 1일에 17, 8세 되어 보이는 초립동 소년이 이곳 천장사에 찾아와 하룻밤을 동숙하는데 그 소년이 묻기를,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萬法歸一 一歸何處) 라는 것만 깨달으면 생사를 해탈하고 만사에 무불통지한다 하니 이것이 무슨 뜻이오.」하기에 스님을 대답을 못하였다. 그 뒤로 이 화두에 대하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어른 시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몰래 길을 떠나 온양 봉곡사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을미년(1895)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해 오던 의심은 조금도 흐리지 않고 하룻밤을 지나던 중 새벽 쇳송[鐘頌]을 할 때, 화엄경의 사구게 즉
만약 사람이 若人欲了知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할진댄 三世一切佛 응당 법계성을 관하라 應觀法界性 일체를 마음이 지었느니라 一切唯心造
를 외우다가 문득 법계성을 깨달아 화장세계(華藏世界)가 홀연히 열리니 기쁜 마음을 무엇에 비길 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빈 산 이치 기운 고금 밖인데 空山理氣古今外 흰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고 가누나 白雲淸風自去來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고? 何事達摩越西天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오르네 鷄鳴丑時寅日出
그 뒤로는 누구를 만나든지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이르기를, 「나에게 희유한 일이 있으니 나와 함께 공부함이 어떠냐?」고 권하였다. 사람들은 스님의 경계를 알지 못하고 모두 이르기를, 「어째서 저녁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밤사이에 미쳤다.」고 비웃기만 하므로 스님은 이런 곳에 더 머무를 수 없다 하고 걸망을 짊어지고 지리산 청학동을 향하여 떠났다. 가는 도중 장성 지방에 이르러 한 노인에게 지리산 가는 길을 물으니 노인이 말하기를, 「장성에 기산림이라는 선생이 유학자들을 동원하여 사방에 진을 치고 지나가는 중들을 모조리 붙잡아다가 진중에서 밥짓는 일을 시키니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기에 본사(本寺)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중에 공주 마곡사에 들리니 옹사(翁師)되는 보경화상이 이르기를, 「내가 조그만 토굴을 하나 만들었으니 거기서 공부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기에 그 토굴에 가 본즉 마음에 들므로 파전(坡田)을 일구어 연명하며 지냈다. 토굴서 3년이 되던 해 스님 나이 스물 여섯 살 때, 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스님이 왕림하매 화상을 뵙고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니 화상이 이르되, 「불 속에 연꽃이 피었구나 火中生蓮」하였다. 경허화상이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해야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네가 일찍 다비문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다비문에 '돌사람이 눈물 흘린다 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 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경허화상이 이르되, 「 '돌사람이 눈물흘린다'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하였다. 화상이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다시 조주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또 이르기를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무자화두를 열심히 의심하던 중 날이 갈수록 경허화상을 경모(傾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무술년(1898) 7월에 화상이 계신 서산 도비산 부석사로 갔다. 경허화상을 뵙고 날마다 법을 물어 현현(玄玄)한 묘리를 탁마(琢磨) 하였다. 그 때 경남 동래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화상께 청첩장이 왔으므로 스님이 화상을 모시고 갔는데 침운(枕雲) 스님도 동반하게 되었다. 계명암 선원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화상을 이별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백천 삼매와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걸림없이 통달하여 생사의 큰 일을 마친 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서른 한 살, 신축년 7월 말경에 본사에 돌아와 머무르며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잠자면서' 소요자재 하였다.
스님이 서른 네 살 때, 갑진년 7월 15일에 경허화상이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가는 길에 천장사를 들리게 되었다. 스님을 화상을 뵙고 몇 해 동안 공부를 짓고 보림(保任)한 것을 낱낱이 아뢰니 경허화상이 기꺼이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雲月溪山處處同 수산선자의 대 가풍이여 山禪子大家風 은근히 무문인을 부촉하노니 慇懃分付無紋印 한 조각 권세 기틀이 눈 속에 살았구나 一段機權活眼中
이어 만공(滿空)이라는 법호(法號)를 내리고 이르되, 「불조의 혜명을 자네에게 이어 가도록 부촉하노니 잊지 말라.」하고 주장자를 떨치고 길을 떠났다. 그 때부터 스님은 모든 산천을 돌아다니다가 을사년(1905) 봄에 덕숭산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금선대라 이름하고 보림(保任)을 하니 제방의 납자들이 구름 모이듯 와서 스님에게 설법하기를 청하거늘 사양하다 못해 법좌에 올라 법을 설하니 이것이 개당보설(開堂普說)이었다. 그 뒤로 스님의 문하에서 용상대덕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그 뒤 스님은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여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고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선원에 가서 삼하(三夏)를 지냈다.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안면면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한 칸 띠집을 지어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하고 홀로 둥근 달을 굴리시다가 어느날 목욕 단좌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걸 웃고 문득 입적하니 때는 병술년 시월 20일 이었다. 다비를 모시던 즉시 흰 연기 위에 홀연히 백학이 나타나타나 공중을 배회하고 오색 광명이 하늘에 닿았다. 이 광경을 본 대중은 환희심과 기이한 생각으로 다비를 다 마친 후 영골을 모아 석탑에 봉안하니 세수 75세요 법랍은 62이며 석존 후 76대 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