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다완이야기 - 이도다완(井戶茶碗/정호다완)

2016. 4. 13. 16:09도자 이야기



       [스크랩] 조선다완이야기| 자료실1

벽전 | 조회 2 |추천 0 | 2014.05.17. 16:50



 

 

 

 


 
  
이도다완(井戶茶碗/정호다완)| 강릉불교다도대학
혜림화 | 조회 33 |추천 0 | 2013.07.15.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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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다완(井戶茶碗/정호다완)이란 조선에서 사발의 용도로 제작된 자기가 일본으로 전해져 선불교와 연관해 찻그릇으로 사용되며 붙여진 명칭이다.

 

흔히, '조선막사발'로도 불리는데, '막'이란 수식어는, '대충, 마구, 중요하지않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일본식 한자로는 '거친 황/荒'자로 표기 되기도 한다.

아래의 사진에도 나오지만, 대부분의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도자기를 만드는 태토가 "거칠/荒"다, 그래서 이러한 자기들은 '왕실차원에서 관리하던 관요'에서 만든것이 아니라, '민간 가마인 민요'에서 만든 생활용 도자 식기이다. 그러므로 막사발이란, '관요 자기와 비교해 질적으로 다소 거칠게 만든 민요 자기'인 셈이다. 

 

   16세기 말엽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차 담당을 맡았던 '센노리큐/千利休'는 선불교 승려였는데, 그의 스승이 추구하던 비물신적인 선종 사상의 영향아래, 그 이전까지 화려하고 귀족적인 차문화의 대안으로 '와비차/ わび茶'라는 차문화를 육성한다. '와비차/의 성격은, '내면 또는 정신중시, 부족함, 진중함, 청순함' 을 의미한다고 하며, 와비 / わび란, '수심, 걱정, 한가로운 정취'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러한 선종적 차에 대한 사상속에서, 귀족적이고 화려한 찻그릇인 천목다완을 대신할 그릇을 물색했으나, 일본 열도 내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납치한 조선도공들이 열도 일본에서 도자기를 제작하기 전까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인 1300도 내외의 온도에서 제작하는 자기 제작 기술이 전무했고, 기껏해야, '초지로/長次郞' 라는 도공이, 물컵만한 자그마한 크기의 흑유다완류의 라꾸다완/樂茶碗 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고려시대 12세기 이래 최첨단의 도자 기술을 보유한 조선에서 제작된 사발들을 와비차용 찻 그릇으로 애용하게 된다, 그렇게 조선에서 주문 제작하거나 수입해간 조선의 사발을 이도다완이라고 불럿다.

 

이도다완의 명칭이 어떤 연유로 생겼는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어원에 대한 설/說이 몇가지 있다. 첫째는, 형태적 유사성에 의한, '속이 깊은 우물처럼/井 그릇의 속이 깊다는 이유때문에 붙여졌다는 설. 둘째, 생산지와 관련해서, 경남의 지명인 위등/韋登이 일본식 발음으로 '이도'라고 발음되는데, '위등'에서 제작되어 이도란 명칭이 붙여졌다고도 추정. 세째, 인명과 관련해서, 조선사발을 일본에 소개한 이의 이름이 '이도'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네째, 발견처와 관련해서, 우물에서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이도다완은 비물신적인 선종의 영향을 받은 와비차의 특성과 연관해서 다기로 각광을 받는데, 이러한 다완들은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한가한 정취를 즐기기 위한 생활 용기' 이기 보단, 권력 과시용 위세품이었다, 일례로, 이도다완이 전국시대 당시, 전투에서 승리한 사무라이에게 격려금조로 하사되었는데, 그게 성 하나와 맞먹는 가치로 주어졌다니, 이는 고급 이도다완의 경우 전국시대 당시에 성의 가격에 준하는 가치가 있었단 말이다.(이러했으니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 도공의 납치에 혈안이 되었을 테고, 대표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사츠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그러니, 이런 고가의 기물로 한가한 정취를 누리기 위한 차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400여년전에도 성 한채와 비슷한 가치를 지닌 고급 이도 다완은 한가하게 명상이나 묵상을 즐기기 위한 '와비차'의 도구이기엔 너무 물신숭배적이다, 성한채를 강남의 고급 아파트 한동으로 비교를 한다면, 수백억대 가격의 찻잔으로 한가하게 차를 마신다는 것과 비슷할 거다, 

 


   예전에도 물신숭배적인 최고급 명품이었으니,  400여년이 흐른 현재, 일본의 다도에서 일반적으로 다완을 감상할 때 감상자는 다다미에 무릎을 꿇고(일본인의 일반적인 좌식 습관)상체를 구부려 팔꿈치를 다다미에 댄 채, 손에 다기를 잡고, 손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아주 조심스레 감상을 한다.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가 일본의 일반적인 생활 습관이 란것을 이해 한다손 처도, 고가의 다완을 자칫 떨어뜨려 깨트릴까 하는 염려로,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손목만 돌리면서 다완을 감상하고 그 찻잔으로 차를 마시면 와비차가 내포하는 한가로운 정취를 만끽할 수 있을려나? 

 


   다완이라는 물신숭배에 대한 경구로, 단하소불/ 丹霞燒佛 이라는 고사와, 완물상지라는 성어가 떠오른다. "단하소불"이라는 고사는 중국 태생의 천연선사가 사찰의 나무로 깍아만든 불상을 쪼개어 장작으로 사용하며, '목불상은 부처가 아니며, 물질 대상/相에 집착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주장했고, 조선시대, 성리학자/도학자/道學者들은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사물에 집착하면 뜻을 잃는다"라는 경구를 마음에 새겨 물신숭배를 경계했다. 

 


   와비차 풍의 다도가 선종에서 비롯되었는데, 차 음용은 참선이라는 묵상의 시간을 통한 깨달음의 방법이며 수단일 뿐이다, 즉, 차는 깨달음을 증폭되게하기 위한 수단으로 깨달음을 매개하는 각성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차의 음용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참선의 한 방법이며 과정일 뿐인데, 그 과정의 도구(찻잔)에 집착하는 것은 명백한 완물상지/玩物喪志할 가능성이 98프로 쯤 될거다, 그러니 고가의 찻잔으로 차를 마시면서  그 뜻을 얻을(득지/得志) 가능성은 몇 프로 쯤 될런가?

 

 일본 열도에 선종의 전파 이후, 불교 유물들이 제작되지 않는다, 이는 선종의 비물신적 성향이 반영된 결과인데, 불교와 관련있는 다완만은 유독 풍성하다는 점은 역사적 아이러니라 볼 수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타지역의 종교가 유입되면 토착 종교와 혼합되어 정착되듯이, 다완도 선종과 사무라이문화가 혼융되며, 사무라이라는 집권층의 요구와 욕망이 혼합되어 정착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선종의 참선을 위한 한 방법이, 사무라이 문화의 정서에 혼융된셈이다, 불교 선종의 형식에 사무라이의 내용이 담겨진 셈이다, 그렇다면 일종의 사도불기/仕道佛器인 셈인가?  이렇게 정리하면 와비차의 완성자 선승 센노리큐가 사무라이 관백 히데요시에게 살해 당한 이유도 이해되고, 다완이 물신숭배적 특성을 지니는 것도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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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이도다완의 경우, 형태 자체도 현대의 도자기처럼 완벽한 원형이 아니고, 무늬 또한 비대칭이 특성이다, 그래서, 어느 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얼굴?의 생김이 달라 보인다, 그래서 사진 자료로 올려지는 경우, 가장 좋아보이는 면에서 촬영한 사진을 자료로 올린다, 이는 마치 현대 미술의 조각품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다, 또한 기면의 자연스러운 문양은 잘그려진 추상회화와 닮은점이 있다. 다완의 실물은 몇년전, 동경국립박물관에서 상설전시품 몇점만 보았었고, 여기에 소개하는 다완은 왭상에 떠도는 대표적인 다완들이기에, 유명한 조각품을 단 한장의 사진으로 보는거랑 비슷할거다,

 

아무튼 현재는 문화재로 관리되며 감상의 대상이 된 일본에서 보유중인 이도다완들을 개인적인 취향대로 나열해 보았다.

 



 

견수다완

 



   흰색 표면에 은은한 붉은 반점이 아름답다. 왭상에 떠도는 자료라서 실재의 색상은 다소 차이 있겠지만, 은은한 홍차색?이 꽃잎처럼 보인다. 명칭상에는 아래의 경우처럼 분인이라는 용어가 사용 안되긴 했으나, 기면의 흰색과 대조적으로 굽부위는 갈색을 띄는데, 이는 청자토에 백토를 입힌 분청사기의 경우가 그러하니 분청사기로 보인다. 만일 분청이라고 한다면, 이는 덤벙분청이다, 백톳물에 무심히 담갔다가 꺼낸 덤벙분청. 민간 가마인 민요에서 만들었던 까닭으로 거친 태토를 써서, 돌이 표면으로 드러난 부위의  유약이 불완전하게  코팅이 되어 소성되고, 이렇게 유약으로 도포되지 않은 부위가 공기하고 접촉해서 산화된 듯한데, 그러한 부위만 붉은 색계열의 색상으로 변색되었다, 넓은 면적도 있으나 대부분은 둥그스런 점의 형태로 변색되었는데, 이는 제작 후 오랜 시간동안 피어난 자연스러운 꽃인 셈이다,  제작 당시엔  아무 무늬 없는 흰색의 도자였을텐데, 나이를 먹으며 꽃을 피웠으니, 제작당시엔 그리 격조 높게 보이지 않았을 게다. 제작당시의 기술과 세월이 어우러져 생긴 문양으로 이도다완이 사용된 배경과 연관짓고, 만일 분청사기라고 한다면, 덤벙 분청의 무심한 특성이, 와비차의 자연주의적 특성과 닮은 점을 고려하면 가장 이도다완다운 찻사발로 보인다. 만일 위의 도자기를 관요에서 만들었다면, 고운 태토를 써서 유약이 기물의 전면에 코팅이 되었고 그런 이유로 붉은빛의 꽃이 피게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민요에서 거친 태토로 만들었기에 세월이 흐르면서 우연히도 조금씩 피어난 꽃인 셈이다. 아마도 시간이 더흐르면, 그릇의 전면이 붉은색의 유약을 입힌 듯 전면이 붉게 변할텐데, 어찌보면 세월 속에 마치 살아있는 꽃나무이듯, 백토가 은은한 분홍색으로 물들때까지 꽃을 서서히 피우는 생명력을 가진 셈이다, 이 다완과 연관해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봄날 백색으로 창백하지도 않고, 너무 붉어 야하지도 않은 은은하고 옅은 분홍빛의 벚꽃이 봄날 따스한 바람에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연분홍빛 춘설의 풍경이 눈에 아른 거린다.

 



송편분인다완/松平粉引茶碗

 



   이름의 분인/粉引을 참고하면, 분청사기가 확실하다. 그래서 유약이 입혀지지 않은 부위가 흰색 백토가 아닌, 철분이 함유된 흑갈색 토질이 보인다. 전면부의 문양?으로 시유 방법을 추정하면, 초벌구이 후, 백토 유약을 입힐 때, 오른손 엄지로 그릇의 구연부(그릇 맨위 가장자리 부분)을 잡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바닥부위를 잡은 다음, 오른손의 손등이 유약이 담긴 그릇의 표면에  담근 후, 손목을 몸쪽으로 꺽어 올리며 유약을 입히는데, 오른손 엄지 부위가 유약에 닿을 즈음 그릇을 들어올린다, 그래서 화면상으로 처음 담긴 그릇의 우측부위는 거의 직선이고, 좌측부위는 시유를 하는 과정에서 유약이 출렁거려 약간 곡선의 형태로 유약이 입혀지고, 엄지 손가락이 닿았던 부분만 시유가 안되어, 긴 역삼각형의 문양으로 남고, 오른손에 묻었던 유약이 물 튀김의 형태로 두텁게 흘러내린 것이다, 그런데 유약이 입혀진 부위에 도공의 지문이 남아 있을까? 제작 과정상 초벌구이 후 재벌 과정에서 유약을 칠하는 터라, 지문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적지만, 옅은 유약물이 엄지에 묻어있었다면 지문이 남아 있을 수도 있는데, 만일 남아 있다면, 도공은 자신의 지장/指章으로 싸인/낙관을 한 셈이다. 아무튼 유약을 입히는 과정에서 엄지 손가락이 닿은 부분을 축으로 해서 긴 역삼각형의 형태로 유약이 입혀지지 않아, 버드나무잎의 형태가 자연그럽게 그려졌고, 더욱이 손에 묻었던 유약이 기면/器面에 흘러내려서, 마치 수면 위에 닿은 버드나뭇잎에 근처에서 뛰어든 개구리에 의해 물 튀김이 그려진듯 보인다. 아무리 능숙한 도공이라고 해도, 위의 버드나무 잎형태의 무늬를 만들기 위해선, 확률상으로 아주 극소의 것만 만들어졌을 것을 감안하면, 아주 희소한 자기라고 볼 수 있다.  역삼각형의 버드나뭇잎 문양과 푸른빛 유약이 구연부 방향으로 튀어오르는 듯한 문양에서, 마츠오 바쇼오(松尾芭蕉, 1644∼1694)의 대표적 하이쿠가 떠오른다. "적막한 연못, 개구리 뛰어드니, 물소리 '퐁당~'/ 古池や 蛙飛こむ 水のおと/ ふるいけや かはづとびこむ みずのおと / 후루이케야 카와즈토비코무 미즈노오토"




기자에몬/喜左衛門



   가장 유명한 이상형적인 이도다완의 전형이다. 앞서 소개한 것보다 가장 큰 장점은 높이의 비율이 폭보다 다소 길어서, 두손에 얹었을 때 감기는 맛, 안정성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다소 높은 굽도 이런 기형과 잘 어울린다, 높은굽 부위도 이채롭지만 굽 부위에 방울방울 유약이 맺혀 마치 매화껍질같다고 해서 매화피/梅花皮라 불린다, 매화피가 마치 이도다완의 상징처럼 중요시되고, 현재 제작되는 이도다완 중 상당수의 다완에 이러한 매화피가 적용된다, 그 이유로 전국시대 당시 이런 숭글숭글 맺힌 유약 알갱이의 질감이  칼자루의 손잡이와 비슷해서 사무라이들에게 친근감을 줬기 때문이라는 썰/說도 있다, 워낙 유명한 다완이라 컬러 사진 자료가 많이 있지만, 유독 흑백 사진을 올린 이유는 우측에 가로로 놓여진 나뭇잎 형태로 유약이 안 입혀진 사진이, 위의 흑백 사진 뿐이라서 이걸 올렸다. 얼핏 앞에 소개한 분인다완/분청사기류 처럼, 백토가 안입혀진 듯 보이나, 이는 분청사기류이기 보단, 초기 백자로 추측된다,  다소 거친 초기 백자토에 유약을 입히는 과정에서, 조선 막사발이 애용되기 이전, 유행했던 천목다완의 나뭇잎 잎사귀 문양처럼, 시유/유약을 입히는 과정에서 나뭇잎과 유사한 형태로 유약을 지워 내는 방법으로 제작된 듯하다. 그래서 제작 시기상으로 천목> 분인> 위의 다완의 순서가 아닐까하고 추측되는데, 이런 추측이 신빙성이 없다고 해도, 위 다완에는 천목다완과 분인다완의 자취가 남아있다, 비록 사진상 뒷면의 굽부위의 유약이 탈락/파손됐지만, 감상용 문화재이니 그리 문제되진 않을 듯하다. 역사적 배경으로는 다완의 소유자들이 부스럼류의 피부병을 앓았는데, 이러한 이유로 최종 소유자가 사찰에 기증했다고 한다.( 어느 도에가의 공방에 가보니, 이 다완을 복사해서, 폭, 높이의 실측 사이즈가 적혀있더라, 이는 위의 막사발류를 재현을 하며  모본/母本으로 삼으려 했나보다, 그정도로 유명)  





 통정통/筒井筒, 쯔쯔이쯔쯔




   쯔쯔이쯔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소유했던 다완으로 일본식 명칭이 재미있다, 마치 깨어진 자기의 측면이 안타까와서 한국어 의성어로 "쯧쯔~ 이런 쯧쯔"하는 듯한 이름인데, 이러한 명칭이 붙여지게된 배경이 한국어적 어감과 비슷하다.  '이쯔쯔'란 명칭이 붙게된 배경도, 히데요시 소유의 다완으로 차를 돌려마시던 중, 누군가의 실수로 떨어뜨려 다섯 조각으로 깨어진 후, 이런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언급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깨어진 부위를 제살붙임 수리했고, 사진상 구연부 우측의 경우 제살이 아닌 다른 물질로 수리를 했다, 수리한 부위가 없어도 좋았겠지만, 수리 부위의 검은 선이 마치 선형의 문양처럼 보이는데 기형과도 잘 어울린다. 형태도 독특하고 깨어진 면의 수리 부위가 마치 '풀/草"을 실선으로 표현한 문양인듯 보여 자연스럽다. 굽부위가 잘록하고 다소 긴  것도 이채로우며, 가로세로의 비율중, 일반적인 기형보다 세로가 길게보이는데, 이런 형태와 다소 높은 굽이 잘 어울린다.  이 다완은 전국시대 말기 도요토미히데요시와 센노리큐, 그리고 도쿠가와이에야스의 독살 계획에 얽힌 일화를 매개한 다완으로 아주 유명하다, 그래서 일본의 중요문화재( 우리나라 국보급)로 관리되며, 또한 현대에 재현되는 이도다완의 원형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 사발이다,   




장속해고대다완/長束割高臺茶碗



   이것은 깨어진 백자 사발을 수리한 것인데, 큰 조각들로 깨어진 것을 수리해서 붙인 검정색 선/線이 문양처럼 보인다. 다소 이지러진 형태와 수리한 자유곡선 잘 어울리는데, 깨어진 면의 수리선이 보이지 않았다면 상당히 맥이 빠지고, 긴장감이 없어서 볼품없이 보였을 듯하고, 구연부의 손가락 자국이 두드러져 거슬리게 보였을 것 같다, 일본의 경우 고급 도자기가 수리가능할 정도로 손상되면 손상된 부위를 수리 후 금분을 발라 사용했다고 하는데, 백자의 흰색과 관련해서, 검정색 선이 금색의 선보다 잘 어울린다. 가는 잔금도 구성적으로 수리 부위의 검정선과 잘 어울린다. 조각난 부위가 수리된 것은 조선의 풍습인, '깨진 그릇은 복을 뺏아가서 사용하지 않고 버려야 한다'는 풍습과 연관지으면, 수리된 사발이 우리에겐 낯설게 보여진다, 하지만, 도자기의 원류인 중세 중국에서도 도자기 그릇을 수리해서 쓰는 것이 일반화될 정도로 도자기가 고가의 물건이었으며, 일본의 경우 청자완이 깨어지자 똑 같이 만들어 달라고 중국에 보내나, 이미 청자를 만들지 않는 시기라, 철사를 이용해서 수리해서 보낸 청자완을 중요하게 보관하고 있다, 또한 중세 동북아시아에서 권력층들이 사망했을 때 무덤에 부장하던 대표적인 기물이 도자기였음을 감안하면, 고가의 물건을 수리해서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에 그릇의 이가 조금 깨진 것도 버리는 풍습은 아마도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계책인 듯하다,(우현 고유섭 선생의 어느 글에선가, 1920년 무렵, 깨어진 조선 여러 사발의 조각들로 이어붙여, 만든 다완용도의 그릇이 종로 십여칸 한옥 한채와 동일한 고가에 판매된 적이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그릇의 경우엔, 여러종류의 다른 그릇의 파편들로 그릇 한개를 만든 것이였는데, 상당히 독특하고 이채롭게 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 사진 자료를 찻으면 추가할까 한다.)

 

주정분인다완/酒井粉引茶碗



   깊이가 다소 얕은 그릇이어서 다완을 쥐는 맛도 덜하고, 또한 찻물이 흐를 염려도 있어서, 용도상으론 다소 모자란 형태이고, 펑퍼짐한 형태가 긴장성을 떨어트리긴하나, 전체적으로 표면의 느낌이 좋아서 선정해 봤다,  백토를 화장하듯 덧입힌 분청사기이다. 구연부에 흑갈색의 태토가 보이며, 전체적으로 산화?된 누런 색상과 푸르스름한 문양?이 서로 잘 어울린다. 개인적인 견해이나, 조형미 중에서 가장 으뜸인 것이 조화미라고 생각된다. 조화미란, 주제와 배경, 또는 대상과 대상간의 어울림인데, 대부분의 것은 주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특정 사물이 어디에 놓이는가, 어디에 배치되는가, 어디에 구성되는가에 따라서, 본연의 모습이 전혀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위의 다완도, 구연부의 흑갈색 둥근 선이 강조가 되고 그 다음 푸릇하고 누런 부위가 중간 토운으로 바쳐주고 다음으로 백색의 색상이 받춰 줘서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보인다.

 




천종이라보다완/千種伊羅保茶碗



   표면의 거친 질감이 조선막사발을 지칭하는 한자식 표기인 " 거칠 황/荒"자와 관련해, 거친 질감의 맛이 툭툭 떨어지는 자완이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태토로 만들어서, 태토 속의 돌 알갱이가 보이기도 하고, 흙은 건조와 소성과정에서 수축되기 때문에 돌이 섞인 부위의 경우 균열이 생기기도 했다, 거친 태토를 사용해서 질감이 독특한 자기로 전체가 흰색 유약으로 칠해 졌어도 괜찮았을 듯한데, 그릇의 절반은 흰색, 나머지는 갈색빛 흑유?로 입혀져서 이질적인 유약이 만나는 부위가 직선형의 문양을 보인다, 유약에 담글 때도 무심히 반쯤 담궜다가 꺼내서 직선형도 기하학적인 직선이 아닌 자연스러운 직선이다, 그러나 흰색과 갈색의 무심한 경계선이 표면의 거친 질감, 그리고 다소 비정형의 그릇 형태와  나름대로 어울린다. 다만, 위 완이 다완용구로 사용되었을 당시를 고려해보면, 완의 내부도 외부처럼 질감이 거칠면, 분말차를 개어 마시고난 후, 청소하는데 꽤나 애를 먹고, 위생상으로 좋지 않았을 듯 하다, 하지만 현재는 감상용이니 문제될 건 없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