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이 아름답다 ② 작지만 큰 전시, 일본 근진미술관 ‘조선시대 정호 다완전’__하담

2016. 4. 13. 16:32도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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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닢 | 조회 32 |추천 0 | 2015.09.28. 17:48


[2014년2월호]
작은 것이 아름답다 ② 작지만 큰 전시, 일본 근진미술관 ‘조선시대 정호 다완전’__하담



작은 것이 아름답다 ②
 
작지만 큰 전시, 일본 근진미술관 <조선시대 정호 다완전>
 
조선의 찻그릇이 보여준
자연미학
 
기자에몬 대정호 다완(喜左衛門大井戶茶碗)
일본 국보, 대덕사(大德寺) 소장, 조선 16세기
높이 8.9cm 입지름 15.4cm

   그릇은 모름지기 반듯하고 오래 쓸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굳이 보태면 무엇을 담든 담긴 내용물을 돋보이게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그릇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 있다. 바로 조선의 다완이다. 조선시대의 사발 가운데 다인들의 사랑을 받는 다완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 단연 으뜸으로 치는 것이 정호(井戶)다완이다. 투박하고 볼품도 없는 데다 흡사 만들다만 것처럼 완성도면에서는 형편없는 조질(粗質)의 백자다.

 
로쿠지조 소정호 다완(六地藏小井戶茶碗)
천옥박고관(泉屋博古館) 소장, 조선 15~16세기
높이 7.9cm, 입지름 13.7cm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東京) 미나미 아오야마(南靑山)에 있는 근진미술관(根津美術館)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 <조선시대 정호 다완전(井戶茶碗展)>이 열렸다. 일본 전국의 박물관, 미술관, 개인 소장가가 소장하고 있는 이름난 조선시대의 정호 다완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전시한 것이다. 이른바 명물이라고 불리는 다완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만큼 애호가들의 관심도 지대했다. 일본 아즈치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에 츠츠이성(筒井城)의 성주였던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정호 다완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목숨과 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임진왜란을 정호 다완을 갖기 위한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것은 오래전부터 일본의 다인들이 정호 다완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가 하는 것을 방증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처럼 수백 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찻그릇에 일본의 다인들이 상식 이상의 애정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규 대정호 다완(宗及大井戶茶碗)
일본 중요미술품, 근진미술관(根津美術館), 조선 16세기
높이 8.5cm, 입지름 14.1cm



   다완은 당나라 육우(陸羽)『다경(茶經)』에 언급되는 것이 문헌상으로 상한을 이루며, 다엽(茶葉)을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포다법(泡茶法)과는 달리 가루차에 물을 붓고 다선(茶筅)으로 거품을 내서 마시는 점다법(點茶法)에 쓰이는 다구이다. 이 점다법은 포다법에 앞선 음다법으로 BC 4~5세기 경에 중국 남부 지역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는 안압지 출토의 토기 다완 등으로 미루어볼 때 삼국시대 즈음에 이미 들어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직접 차를 맷돌에 갈아 팽다(烹茶)를 행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미 말차 음다법이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바타 청정호 다완(柴田靑井戶茶碗)
일본 중요문화재, 근진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 조선 16세기
높이 7.0cm, 입지름 14.6cm


   중국의 당(唐), 송(宋)에서 성행했던 말차의 점다법은 1391년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덩어리 고형차인 단차(團茶)의 제조를 폐지하라는 칙령을 내리면서 점차 사라지고 포다법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 역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명나라의 음다 문화를 차용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이로부터 재래의 점다법은 쇠퇴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일본은 송대(宋代)의 말차 문화가 가마쿠라(鎌倉) 시대 때부터 전파되어 무로마치(室町) 시대에 본격적으로 정립되었고 다완 역시 말차 문화의 성행과 함께 발전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완은 점다(點茶)의 용구로 사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음다에 용이하고 다소간 시각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일본식의 점다에서 그 구분이 세밀해지고 완물(玩物)로 여겨지게 되면서 수많은 기준과 나름의 원칙을 만들게 된다. 일본식의 다도를 흔히 ‘와비차(寂び茶, 侘び茶)’라고 하는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공간에 절정에 이르는 하나의 자연미를 더함으로써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미의식의 표현이다. 이러한 미의식은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 다도를 완성했다고 하는 센리큐(千利休)의 정신이기도 하다.
 


가나모리 대정호 다완(金森大井戶茶碗)
일본 중요미술품, 미수미술관(美秀美術館), 조선 16세기
높이 9.3cm, 입지름 16.3cm


   15세기경 흥복사(興福寺)의 승려인 센리큐(千利休)가 다도를 배우기 위해 유명한 스승을 찾아가는데 스승은 젊은 센리큐에게 다도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정원을 가꾸라고 한다. 센리큐는 성심으로 잡초를 뽑고 땅을 고르고 꽃과 나무를 심어 그야말로 완벽한 정원을 만들었다. 그런데 스승에게 보이기 전에 센리큐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원의 경치가 완벽하기만할 뿐 그 이상의 감동이 없는 것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센리큐는 때마침 피어 있던 벚나무 가지를 흔들어 벚꽃이 바닥에 자연스럽게 흩어지도록 한다. 부족해 보이고 허술해 보이는 것을 통해 자연미를 회복하는 정신이 바로 와비(わび)의 정신으로 다도에서 나온 용어이지만 일본 고유의 미의식이 응축된 말이다. 일본 다도에서의 다완에 대한 각별한 탐미 역시 이 와비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그저 투박하고 조형미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사발에 시대를 초월해 그토록 다인들이 몰입했던 이유는 치열한 삶에 위안을 주는 파격이면서 여유였고 단순함으로의 회귀였다. (전재자 주 : 마당에 벚꽃이나 낙엽을 뿌리는 일화는 센리큐가 아들에게 가르쳤다는 설이 전하여진다.)
 
   이번 전시는 다인들에게는 수십 곳에 흩어진 정호 다완을 한곳에 놓고 비교해 볼 수 있었던 천금의 기회였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대덕사(大德寺) 소장의 기자에몬(喜左衛門)으로부터 미수미술관(美秀美術館) 소장의 중요문화재 가나모리(金森), 근진미술관 소장의 소규(宗及) 39점대정호(大井戶) 다완천옥박고관(泉屋博古館) 소장의 로쿠지조(六地藏)를 비롯한 소정호(小井戶) 다완 16점, 근진미술관 소장의 중요문화재 시바타(柴田)를 비롯한 청정호(靑井戶) 다완 19점 등 70여 점의 정호 다완이 전시되어 많은 이들의 안복(眼福)이 되었다.
 
▲ 일본 도쿄 근진미술관 내부


   다완의 기준을 이야기할 때는 시각적 형태미와 실상용에서의 용이함을 모두 갖춘 것만을 명물로 인정한다. 태토(胎土)의 경연(硬軟) 정도, 완의 크기와 무게가 중요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고 나아가 요변(窯變)의 정도, 그릇 내저(內低)와 굽의 형태가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에서는 조선의 다완을 수입했고 좋은 다완을 갖는 것은 곧 막강한 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다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그리 좋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인 미감에서 볼 때도 조선의 정호 다완은 완전한 순수함 그 자체이다. 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흙과 불이 만나 변화를 이루고 터지면 터진 대로 오그라들면 오그라든 대로 수천 수만 번의 찻물이 스며들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마저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