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삶을 그리다 ⑨김희겸, <산정일장>/최북, <수하인물도> “인생이라는 긴 여정, 잠시 게으름 좀 피운들 어떠랴”

2016. 4. 17. 01:16美學 이야기



   


그림, 삶을 그리다 (37)


조정육 2013.03.2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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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삶을 그리다 김희겸, <산정일장>/최북, <수하인물도>

 

“인생이라는 긴 여정, 잠시 게으름 좀 피운들 어떠랴

 

   피곤하다. 사람을 만나도 피곤하고 일을 해도 피곤하다. 버스를 타도 피곤하고 길거리를 걸어도 피곤하다. 나만 피곤한 것이 아니라 앞사람을 봐도 피곤해 보이고 옆사람을 봐도 피곤해 보인다. 지하철을 타면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는데 그들 역시 피곤해보이기는 마찬가지다. 필사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나 전투적으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나 서로 다른 색깔의 피곤에 절어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방에 피곤이 흐벅지게 널려 있다. 오죽했으면 피로사회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을까. 피곤은 자신의 체력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선 일을 과도하게 지속했을 때 오는 현상이다.


   지나친 경쟁이 불러온 결과다.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성과주의가 피곤과 피로를 누적시킨다. 남보다 더 잘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초경쟁사회를 만들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당연한 사회에서 넉넉함이나 여유를 얘기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낙오자 같다. 달리는 열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달려 있는 동안 피로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그 사이 불안과 우울과 좌절이 사람을 지배한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싶어 자신을 되돌아 볼 때쯤이면 몸은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전락해 있다. 피로 사회를 사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김희성, <산정일장>, 종이에 연한 색, 29.5×37.2cm, 간송미술관

 


복숭아꽃 피는 날 낮잠 자기


   김희성(1710년대-1763년 이후)이 그린 <산정일장>은 피곤에 지친 영혼에게 봄바람 같은 그림이다. 산정일장(山靜日長)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라는 나대경(羅大經:1196-1252)의 싯귀절을 줄인 말이다. 번잡한 세상에서 빠져 나와 산 속 깊은 곳에 초막을 짓고 사는 선비의 마음은 조용할 것이다. 그런데 태고처럼 고요한 산이라니.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온갖 소음에 빠져 사는 사람에게 고요의 세계는 잊혀진 지 오래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떠나온 세계다. 하루 종일 가야 말 한마디 건넬 사람이 없는 산 속에서는 침묵이 가장 아름다운 친구다. 침묵만이 태고처럼 들어앉은 고요한 산에 해가 떴다. 노인에게 1년이 하루 같다면, 소년에게 하루는 1년처럼 길다. 1년 같은 해가 고요 속에 떠오른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세상이니 조금 게으름을 피우며 살아도 상관없다. 선비는 편안한 마음으로 낮잠을 잔다. 복숭아꽃이 환하게 피어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도 대꾸도 없다. 깊은 잠에 빠졌다. 찾아 올 사람이 없으니 대문을 잠글 필요도 없다. 주인을 대신해 두 마리 학이 마당을 지킨다. 집에 온 손님을 경계하듯 짖어대는 개가 아니라 학이다. 고고한 선비의 표상 그 자체다. 세 그루 소나무가 넉넉한 시선으로 학을 내려다본다. 소나무도 학처럼 고고한 식물이다.


   한참 잠에 빠져 있는데 서울에서 잘 나가는 후배가 찾아왔다. 후배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선비에게 따진다. 선배님, 여기서 왜 이러고 계세요. 충분히 쉬셨으니 이제 그만 돌아오세요. 밤잠을 줄여가며 치열하게 일한 덕분에 그 나이에 비해 꽤 높은 직급을 차지한 후배다. 그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 여전히 자기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는 중이다. 선비가 묻는다.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가. 후배가 대답한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죠. 어떤 것이 행복인가. 공기 좋은 곳에 멋진 집을 짓고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죠. 지금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출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북, <수하인물도>, 18세기, 종이에 연한 색, 24.2×32.3cm, 국립중앙박물관

 


치유하는 삶은 여유로움에서


   ‘나무 그늘 아래서의 여유라는 해석을 단 <수하인물도>를 지난 겨울 최북 탄신 3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처음 봤다. 댕돌같이 고집 센 최북에게도 이런 낭만적인 감정이 있었을까. 굽이치듯 뻗은 고목 아래 부끄러운 듯 핀 매화꽃을 그려 넣었다. 자존심이 강해 거들먹거리는 양반 앞에서 제 눈을 찔러버린 사람이 최북이었다. 고목 아래 숨 듯 핀 매화가 겉으로만 강한 척한 최북의 속마음을 보는 듯했다. 오랫동안 감추어 둔 최북의 진심이 붓끝에서 피어났다.


   붉은 매화나무 가지 아래 누워 있는 선비를 보는 순간 한 해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모름지기 그림이란 감상자에게 이 정도의 위로와 치유력이 있어야 하는 법. 나 또한 그림 속 선비처럼 꽃그늘 아래 팔을 괴고 누워 다리를 꼬았다. 솰솰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물이 탁한 마음을 헹궈 주었다. 이렇게 누워 꽃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본 지가 얼마나 됐던가. 잊혀진 기억 같은 평화로움이 투명하게 다가왔다. 건듯부는 바람에 매화꽃이 얼굴 위에 떨어졌다. 커피 대신 마신 약주 때문에 기분이 알딸딸했다. 그 정도의 방종은 허락하기로 했다.


   한 때 큰 수술을 앞두고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방을 정리하고 옷장을 정리하고 내 모든 흔적을 정리하면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지나온 시간에 대해 그다지 큰 아쉬움은 없었다. 보란 듯이 폼나게 살지 못한 것도 괜찮았다. 은퇴 후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 돈을 모으지 못한 것도 부끄럽지 않았다. 이 정도 살았으면 됐다 싶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조금 더 많이 놀고 조금 더 많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보고 배우지 못한 것이 걸렸다. 내게 만약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한 달에 한번씩은 만사를 제쳐두고 여행을 다니리라 결심했다. 수술이 끝나고 다시 깨어 났을 때는 정말 새로운 삶이 시작된 줄 알았다. 수술 전에 세웠던 계획대로 행복을 미루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그 결심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보류중이다.


    무턱대고 먹고 놀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림 속 선비처럼 하루 종일 낮잠만 자라는 얘기도 아니다. 적어도 심호흡은 할 수 있을 정도만 조금 천천히 가자는 뜻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죽음같은 겨울을 뚫고 매화꽃이 피고 있지 않은가.

 

*이 글은 '이데일리' 2013년 3월 25일자에 실렸습니다.

 



blog.daum.net/sixgardn/15770591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