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17. 15:04ㆍ美學 이야기
백제인은 석판에 새겨진 부처님을 어떻게 모셨을까? | |||||||||||||||||||||||||||||||||||||||||||||
김대환의 文響 - 28 백제 옥석제 삼존판불상(百濟玉石製三尊板佛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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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의 옛 절터에서 4점의 작은 金銅板佛이 출토됐다. 三尊佛坐像, 半跏思惟像, 二佛竝坐像, 羅漢像(?)으로 이 판불들은 7세기경 백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거푸집을 사용해 주조했다. 이 중 반가사유상은 양 옆에 나한상이 脇侍하고 있는 독특한 형식인데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나한상의 圖像 또한 이채롭다(사진①). 제일 작은 판불은 명확히 보이지 않지만 이불병좌상으로 보이며 이불병좌상은 당시 중국에서도 유행하던 형식이다(사진②). 나한상으로 추정되는 판불은 연꽃 위에 앉아있는 도상으로 化佛에 더 가깝다(사진③). 이 판불들 중에 제일 큰 삼존불좌상은 가로 7.7cm, 세로 7.1cm로 앙련과 복련의 연꽃대좌 위에 앉은 도상으로 가운데 禪定印의 여래상인 主尊佛을 중심으로 양 옆에 두 脇侍菩薩들이 몸을 틀어 꽃을 공양하는 모습이다. 특히 화려한 매듭과 垂飾이 달린 장막형의 天蓋가 상단부의 여백을 꽉 채웠으며 주존불은 협시보살들처럼 頭光만 있고 身光은 없다. 이 판불의 가장 중요한 점은 주존불과 협시불이 모두 앉아있는 도상으로 삼국시대 삼존불상으로는 사례를 찾기 어려운 특이한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사진④).
이 판불들의 정확한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뒷면의 네 귀퉁이에 네모난 돌출부가 있어서 커다란 판에 끼워서 사용한 佛具用品으로 추정된다. 다만 일본 百濟寺에서 출토된 이불병좌상의 작은 塑造板佛과 형태가 유사하며 제작된 시기도 비슷한 것으로 짐작된다(사진⑤).
상단부의 공간을 꽉 채운 天蓋와 띠모양의 寶冠을 쓴 풍만한 몸집의 菩薩들과 禪定印의 주존불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김제 대목리의 삼존불좌상과 거의 동일한 도상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가운데의 주존불에서 찾을 수 있었다. 김제 대목리 출토 金銅三尊板佛은 주존불의 머리가 素髮인데 비해 이 주존불의 머리는 螺髮이다. 相互 또한 엄숙한 모습에서 온화한 모습으로 차이가 난다. 아울러 판불의 재질과 뒷면의 고정방식도 다르다(사진⑦). 그러나 이 두 판불은 주존불의 法衣와 手印, 光背의 형태, 상단부를 메운 天蓋의 垂飾, 선정인의 여래좌상과 풍만한 협시보살좌상등이 거의 동일하며 크기도 비슷해 같은 밑본으로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종류의 고대 판불들은 흔히 출토되지 않으며 그 수량도 매우 제한적이지만 당시에는 金屬製, 玉製, 塑造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세기 이후 풍만해지는 중국 唐나라 불상들과의 연관성도 있으며 백제 말기의 불교미술을 확인해 주는 자료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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