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19. 15:14ㆍ美學 이야기
인정과 풍류가 흐르는 그림…조선 대가들의 색다른 상상력
단원을 비롯해 탄은 이정,겸재 정선,혜원 신윤복,현재 심사성,공제 윤두서,조영석,최북,김득신 등 교과서에 나오는 조선시대 풍속인물화 대가 54명의 명작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은 가을 기획전 '풍속인물대전'에 조선시대 문화재 중 엄선한 서화 100여점을 오는 16일부터 30일까지 2주 동안 전시한다.
조선전기 중국풍의 풍속인물화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의 진경시대 풍속화까지 고유색 짙은 그림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조선 풍속화의 백미로 꼽히는 '혜원전신첩'과 '미인도'.'혜원전신첩'은 국보 제135호로 당시 한양의 풍류를 읽을 수 있는 풍속화 30점을 모은 화첩이다. 이 가운데 '단오풍정' '주유청강' '월야밀회' '월하정인' '춘색만원' 등 15점을 보여준다. 단오날 여인네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는 두 동자승(단오풍정),뱃놀이를 즐기는 한량과 기녀(주유청강),달밤에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월야밀회) 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2008년 간송미술관 70주년 기념전에 나온 뒤 3년 만에 공개되는 '미인도'도 주목된다. 중학교 미술교과서에도 실린 이 작품은 조선 미인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한 걸작.풍류계 여인의 자태를 요염하게 그렸으며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난 버선발과 옷고름 옆으로 흘러내린 두 가닥의 허리끈이 압권이다.
달빛 아래 생황을 부는 모습을 잡아낸 김홍도의 '월하취생',봄 산에서 소를 몰고 돌아가는 두 소년을 그린 김득신의 '춘산귀우',간필법으로 인물을 묘사한 탄은 이정의 '고사망월' 등도 만날 수 있다. 관람료는 없다.
(02)762-0442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馬上聽鶯)'
▶ 김득신 : 춘산귀우(春山歸牛 : 봄 산에 소 몰고 돌아가다)
▶ 석경 : 계산청월(溪山晴樾 : 시냇가 산 속의 나무그늘)
2018.07.23
cafe.daum.net/BKSD/gVzC/41 한국서도협회 부산.경남지회
[조상인의 예(藝)-<58>김득신 '야묘도추']병아리 물어가는 들고양이..스냅사진처럼 생생한 '봄날의 소동'
고양이·닭-주인 영감·아낙 양구도로
어수선한 장면을 안정감 있게 마무리
스승처럼 존경한 김홍도의 화풍 좇아
벼타작 등 서민 일상 다룬 그림 그려
정조 "화원 가운데 으뜸" 최고의 평가
기록화 백미 '화성능행도' 제작 참여
어미 닭은 두 날개를 펼치고 온몸 깃털부터 꼬리깃까지 잔뜩 곤두세우고 땅을 박차건만 도둑고양이는 여유롭다는 듯 뒤돌아보기까지 하니 더욱 얄밉다. 도망가는 고양이를 꼭짓점으로 닭과 병아리가 대각선을 이루고, 주인 영감과 아낙을 향해 또 한 축의 대각선이 이어진다. 어수선한 장면을 생동감있게 표현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구도로 마무리한 작가의 기량에 무릎을 친다. 왁자지껄한 그림 속에서 나 홀로 고고한 살구나무까지도 고양이를 쫓는 이 시선의 흐름에 가세한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 허리 숙이고 고개 내민 옆집 아주머니 같은 나무다. 화가는 둥치에서 뻗어난 가지를 표현하면서 방향을 거꾸로, 그러니까 바깥에서 안쪽으로 붓을 치며 그렸다. 그 결과 봄눈 터뜨린 꽃가지 끄트머리까지 짙은 먹으로 생명력이 꽉 차올라있다.
난리법석의 순간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 긍재(兢齋) 김득신(1754~1822)의 ‘야묘도추(野猫盜雛)’다. 봄날의 고요를 깨뜨린다는 뜻으로 미술사학자 최순우 등은 ‘파적(破寂)’이라고도 불렸던 화가의 대표작이다. 조선의 풍속화로 단원 김홍도(1745~1806 이후)와 혜원 신윤복(1758~생몰년 미상)이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으나 ‘3대 풍속화가’를 꼽으라면 단연 김득신이다. 김홍도가 그린 서민 생활이 구수하고, 신윤복이 주목한 선비문화가 상큼한 반면 김득신이 표현한 해학과 재치는 달콤쌉사래하다. 애타는 장면이건만 미소 짓고 빙긋 웃게 하는 이 ‘야묘도추’가 그렇거니와 길에서 마주친 말 탄 양반 나리를 향해 코가 땅에 닿을 듯 고개 숙여 절하는 상민 부부를 그린 ‘반상도’ 또한 그렇다. 북한의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말 탄 양반 나리를 향해 코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넙죽 허리 숙여 절하는 상민 부부를 담고 있다. 당시 조선의 너무도 당연한 일상 풍경을 잽싸게 그린 것인데 신분 차별의 부당함과 억울함이 패랭이 쓰고 인사하는 사내의 쳐든 엉덩이와 말 볼기짝 치며 따라오는 하인의 넉살 좋은 표정에 그만 웃음으로 무마된다. 그럼에도 돌아서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그림이라 긍재를 탁월한 해학미의 대가로 꼽게 한다.
2018.04.20 서울경제 다음뉴스
김득신 ‘반상도’ ,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소장
김득신 밀희투전
<야묘도추>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참으로 절묘한 구성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먼저 웃고 그 다음에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림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그림 안에서 살아 움직이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그림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먼저 그림 속의 인물들의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주인공과 그 상대자와 엑스트라가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는 왼쪽에 있는 창호 문의 왼쪽은 약간 거무스레한데
오른쪽으로 갈수록 그 색이 점점 옅어져 이것으로 새벽이 희뿌옇게 다가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을 세 개로 그어 이 투전판이 벌어진 곳이 방 안이라는 것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점이 그렇다.
뿐만 아니라 술병 또한 붉은 색으로 처리해 술이 몇 병이 오간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부제를 ‘입체파 화가 김득신, 밤새는 것도 모른 채 투전에 빠져 있는 네 남자를 그려내다.’로
한 것이다.
cafe.daum.net/minhwa2010/WTse/20 용주사 화산 민화회 발췌 ......
김득신의 다른 그림 : 2018.05.14카페 > Daum카페 http://cafe.daum.net/qh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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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alsanja/220987855147
김득신 歸市圖
김득신 游鴨
김득신 游魚
김득신 포대흠신
자료 출처 : https://blog.naver.com/milihe/220132259014
[출처] 김득신 - 그림 02|작성자 미리해
152.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 163.7×53.2)
<화성능행도병>은 정조대왕이 1795년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章獻世子)와 생모(生母)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동년(同年) 회갑(回甲)을 맞이하여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화성(華城;水原)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행차한 뒤 성대한 잔치를 열면서 거행했던 일련의 행사들을 8폭에 담은 기록화이다. 조선시대의 행사 기록화 중에서 가장 풍부한 내용으로 화려하고 장대하게 묘사한 뛰어난 작품으로써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정조대의 난만한 회화 발달이 어울어져 만들어진 걸작이다.
이 <화성능행도병>은 행사가 끝난 뒤 행사를 주관했던 정리소(整理所)에서 1796년에 완성한 계병(禊屛)이며, 김홍도(金弘道)ㆍ 이인문(李寅文)ㆍ김득신(金得臣)ㆍ최득현(崔得賢) 등 많은 화원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디 행사가 끝난 뒤 정조가 정리소에 명하여 행사의 내용을 묘사한 도설(圖說)을 제작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머리에 첨가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 도설작업은 윤2월 28일 의궤청의 건의로 이해 1월 연풍현감에서 파직된 김홍도가 주관자(主管者;‘專管’者)로 임명되어 그의 지휘 아래 제작되었다. 따라서 의궤의 도설을 병풍에 맞게 변형시키고 확대하여 묘사한 정리소 발의의 이 계병은 김홍도가 관여했거나 최소한 김홍도의 화풍이 부분적으로나마 직접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화성능행도병>은 넓은 의미에서 김홍도 등의 집단 제작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이 <화성능행도병>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舊昌德宮), 호암미술관에 동일한 내용의 8폭병이 소장되어 있고, 이 이외에 낱폭으로 전해지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크기와 순서ㆍ도상ㆍ묘법ㆍ채색 등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 제작년대의 편년과 작가의 비정, 8폭의 순서배치 문제가 아직도 미완의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크기의 차이는 중대병(中大屛)으로 나누어 그린 결과이며, 후모본이 아닌 몇몇 그림 상호간의 미묘한 차이는 ≪기사계첩(耆社契帖)≫과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의 예에서 보듯 분업식 집단제작에서 기인된 측면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8폭의 순서 문제는 행사일정과 의궤도설의 순서 및 세 벌의 순서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어떤 원형의 순서를 논증하여 확정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기록화 병풍은 반드시 그 행사 내용을 기록한 묵서(墨書)가 포함되는 것이 상례인데, 이 <화생능행도병>은 묵서가 없다는 점도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다.
호암미술관본은 고식의 양식을 보일 뿐만 아니라 화면상태도 좋고 근세에 개조되지 않은 조선표구 그대로이며 일반에는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특히 원상태를 유지한 이 병풍은 8폭의 순서에 나름대로 하나의 질서가 있어 주목된다. 즉 제1폭에 가장 먼저 행해졌고 가장 존귀한 11일의 공자성묘(孔子聖廟) 배알장면을 배치하고, 제2폭에는 같은 날 동시에 거행되었고 내용상 연관성이 많은 과거장면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제3폭에는 잠시 순서를 바꾸어 13일에 거행되었지만 이 능행도의 핵심적 주제인 봉수당(奉壽堂)의 진찬(進饌) 장면을 배치하여 부각시키고, 제4폭에는 내용상 이와 연관되고 혜경궁이 많은 은혜를 베풀었던 14일의 낙남헌(洛南軒) 양로연(養老宴)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주로 정조와 관련된 일련의 행사들을 날자별로 배치하여 5폭에 12일의 서장대(西將臺) 성조(城操), 6폭에 13일의 득중정(得中亭) 어사(御射)를 배치하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순서대로 담아 7폭에 15일의 시흥(始興)환어(還御) 행렬, 8폭에 16일의 노량주교(鷺梁舟橋) 도섭(渡涉)장면을 배치하고 있다.
현재의 도판순서는 도록의 편집체제상 원작과 역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도판순서에 따라 각 장면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기로 하는데, 참고로 능행의 과정과 행사 내용을 날짜별로 요약해두면 다음과 같다. 윤2월 9일 창덕궁 출발, 시흥행궁 유숙, 10일 화성행궁 도착ㆍ유숙,11일 화성 성묘 배알, 낙남헌 과거시행, 12일 현륭원 전배, 서장대 성조 및 야조, 13일 봉모당 회갑연 거행, 14일 낙남헌 양노연 거행, 득중정 어사, 15일 화성행궁 출발, 시흥행궁 유숙, 16일 시흥행궁 출발, 창덕궁 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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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단원 김홍도 원문보기▶ 글쓴이 : 올리브
2013.06.15
cafe.daum.net/heartwings/Rvgc/701 漢詩 속으로
고산구곡시화도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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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 필 풍속도 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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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글씨의 내용 해독 681개의 글조선 중기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문월도(問月圖) 그림과 글씨의 내용 해독 2016. 1. 25. 17:55
17세기 왕실 작가 탄은(灘隱) 이정(李霆)의 인물도인데 고사망월도(高士望月圖)라고도 불리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원래 18세기 후기 중인 출신의 당시 서화 대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이 수집하고 별지에 제발까지 적은 그림인데, 이후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0년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이 골동상에서 수집한 화첩에 들어 있었던 인물화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제발의 원문과 해석]
[제화글 1]
問月圖 金光國題 男宗敬書
문월도, 김광국이 지었다. 남종을 공경하며 쓴다.
[제화글 2]
灘隱梅竹蘭蕙在在有之 탄은의 매화와 대나무, 난초와 혜초는 곳곳에 있는데
至於山水人物余未嘗見之 산수와 인물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아직 맛을 보지를 못했다.
今得其所作望月圖 이제 그분의 작품 망월도를 얻으니
盖以寫竹之筆法 모두 대나무를 그린 필법으로써
草草爲之極有疎散之韻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소산한 운치가 있다.
昔荊蠻民自題其竹 예전에 예찬(倪瓚)이 스스로 지은 그의 대나무 그림에서
曰聊以寫吾胸中之逸氣 ‘잠시 그려서 내 마음의 기운을 편안하게 한다.’ 라고 말했는데,
灘隱之意其亦類是耶 탄은의 뜻이 또한 이와 같은 것인가?
金光國 김광국
* 蘭蕙(난혜) : 난초와 혜초를 아울러 이르는 말
* 在在(재재) : 여러 곳. 곳곳
* 至於(지어) : ①…의 정도에 이르다 ②…으로 말하면 ③…때에 이르러 ④…한 결과에 달하다
* 所作(소작) : 어떤 사람의 제작(製作), 또는 작품(作品)
* 草草(초초) : 간략(簡略)한 모양(模樣). 바빠서 거친 모양(模樣)
* 疎散(소산) : ①드문드문하다 ②소개(疏開)하다 ③성기다 ④분산시키다
* 荊蠻(형만) : 옛날 중국(中國)의 한족(漢族)의 문명(文明)을 아직 받지 못한 민족(民族)들이 살던 양자강(揚子江)
이남(以南)의 땅
* 荊蠻民(형만민) : 중국 원대 예찬(倪瓚, 1301년~1374년)의 별호
* 聊以(요이) : 잠시. 우선적으로. 얼마간. 그저.
[느낀점]
표현된 화법은 간결하면서도 흑백의 대비가 분명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절파화풍을 나타내면서 그림은 정수리 부분에 머리가 빠지고 없는 고사 한 사람이 달밤에 바위에 걸터 앉아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는 그림입니다.
입고 있는 옷은 긴 소매의 도포 차람인데, 옷을 표현한 기법이 대나무 잎을 표현한 기법과 유사하여 마치 옷이 칼에 베여 찢겨진 느낌이 있으며, 발은 신이 없는 맨발의 상태로 왼발은 바위 밑 땅을 집고 있는데, 오른발은 아마도 바위 위에 걸터앉은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에 표현되어 있는 인물에서 왼손의 표현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 사서의 자료에 따르면 작가인 탄은(灘隱) 이정(李霆)은 임진왜란 시기 왜적의 칼에 의해 한 손이 잘려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그림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의 그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사대부 문인에 의해 제작된 우리의 옛 그림에서 달은 임금을 상징하는데, 고사가 쳐다보고 있는 달은 그믐달로서 달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가는 형상인데, 이를 고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얼굴은 웃는 모습이니, 이는 금상(今上)인 광해군(光海君)의 권능이 땅에 떨어져서 임금의 권위가 점점 약해져 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고사의 머리 부분에서 상투가 잘리고 소갈머리가 없이 보이는 부분은 결국 왕실에 어른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신발은 왕실의 체면을 살려주는 매개체로 볼 때 왕실의 후손인 작가의 체면이 손상당했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니, 결국 그림에서 고사가 달을 보고 웃는 얼굴은 현 임금의 행태와 처사에 조소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작가의 말년에 왕실의 후손에 대하여 핍박을 서슴치 않고 욕을 보이고 있는 임금에 대하여 조소하면서 한편으로는 가련한 마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6.01.25블로그 >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
기다림
풍속화 , 혜원전신첩
근역서화징이란 오세창이 1917년 편찬하고, 1928년 계명부락부에서 간행한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이 있다.
324면의 국판으로 ‘국역’이란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수록된 서화가를 종합하면 신라시대부터 조선 철종까지 화가가 392명, 서가는 576명, 서화가는 149명으로 모두 1,117명이라고 한다.
서예가인 오세창(1864-1953)의 부친인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당시 천죽재란 큰 서화의 수장고를 보유했던 예술품 수집가였다. 조선말기에 역관이었으며 기자 그리고 대한민보의 사장을 지냈던 위창은 예술적 분위기의 가문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서화에 대한 정보와 감식안을 두루 갖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편찬한 ‘근역서화징’ 에서 혜원에 대한 소개로는 ‘화사약보’를 인용하여 겨우 두 줄만 소개하였다 한다.
“신윤복申潤福, 자 입보, 호 혜원, 고령인, 첨사 신한평申韓枰의 아들, 화원畵員, 벼술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 "
조선말기 이창현(1850-1921)이 지은 성씨 계보책으로 , 양반층을 주로 기록한 다른 성씨 계보책과는 달리 , 역관 등 당시 중인계층의 계보를 수록한 점이 특징인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성원록이란 책이 있다.
신윤복의 가계를 보면 신윤복은 신말주(1439-1503)의 11대손이다. 신말주는 계유정란의 공신 신숙주의 동생이다.
세조가 단종을 쫒아내고 즉위를 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 순장에서 은거하다 나중에 대사간, 전주부윤, 수군절도사까지 지낸 분인 사대부집안이다. 다시 말하면 고급관료의 집안으로 어찌하여 양반이 아닌 중인계보인 성원록에 기록 되었을까.
성원록의 고령 신씨조의 혜원의 가계를 보면, 신말주의 4대손인 경뢰는 대원과 백원이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형 경지가 아들이 없어 대원을 양자로 보낸다. 양자로 간 대원 대(代)에서 흥미로운 일은 광해군 1년인 1619년에 자신을 포함해서 두 아들이 모두 역과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를 보면 한번에 양반의 시험 중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서 소과에서 생원과 진사를 각각 100명씩 뽑고 대과에서는 3차로 걸러 33명, 무과는 28명을 선발했다.
그런데 역과(통역)는 율과, 의과, 음양과 함께 잡과로 중인이 보는 시험이다.
그렇다면 경뢰의 부친인 수진代는 두 형제였는데 성원록에 수진 이하의 계보만 실려있는 것을 보면 수진은 서자庶子 출신인 것으로 보여진다.
혜원은 조선후기 풍속화가 중 한 분이다 , 그러면 풍속화란 무엇인가?
정의해 본다면 인간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 중 좁은 의미에서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다룬 그림으로 한정하며, 좁은 의미의 풍속화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士人풍속화와 일반 백성의 다양한 생활상을 다룬 庶民풍속화로 또 나뉘어진다.
그런데 그 소재가 인간의 일상적, 구체적인 생활모습이 화폭 전면에 등장하는 풍속화의 경우에는 조선 계급사회 양반관료들의 모습이 소재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양반가의 여성이 등장하는 일은 더 더욱 없었다.
풍속화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이 화가가 실존하던 당시,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그림의 중심에 있어 그들의 삶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것에 있다면 혜원의 그림에서 우리는 사랑과 욕망의 주체로 등장하는 여성 성을 주재로 일어나는 선정성이 곁들어진 날카로운 해학과 풍자에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행위로서 풍속화는 선사시대에는 암각화나 청동기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간단히 조선 후기(18~19세기)에 한정하여 살펴보자.
조선 고유문화의 절정기는 숙종(재위 1675-1720)에서부터 정조(재위 1777-1800) 때까지 125년간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중요한 변화는 풍속화의 수요가 궁중과 민간에 공히 성행했다는 것 그리고 더하여 풍속화가 속화俗畵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속화는 원래 문인화와 대조되는 가치개념으로 저속하다는 성聖적 가차관에서 보다는 그것을 그린 화가의 사회적 신분으로 작품을 평가 분류되었던 것이었다. 조선후기에 와서는 속화가 문인화의 상대개념이 아니라 풍속화 또는 민화를 의미하는 분류개념의 용어로 그 의미가 바뀐 것이다.
즉 이전까지는 고아하고 아취있는 세계를 숭상하고 통속의 세계를 푸대접한 것이 대세였던 것이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서민 풍속화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조선사람의 관념에 통속의 세계까지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될 정도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는 17세기 이후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명말의 남종화론에서 탈피하여 실재하는 대상과 경험의 중요성을 주장한 예술론인 당시의 '천기론'이 예술계에 대세인 것과 무관하지 않고, 진경산수화에서 보듯 현실과 경험을 중시한 이 시대(18~19세기)의 보편적인 가치관이 문예관 및 예술방법론에 반영되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중국의 문인화 및 명말의 남종화론의 모방에서 벗어나 조선후기 진경산수화 및 조선 남종화, 풍속화를 창안하여 우리만의 고유한 회화의 기틀을 다지고 이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역사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로 사인삼재 士人三齎인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을 꼽는다.
이들은 모두 조선후기 진경문화를 이끈 백악사단인 율곡학파의 동문들로 특히 조영석(1686-1761)은 겸재와 더불어 진경시대에 인물 풍속화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사대부다. 관아재의 ‘그림을 그리되 대상을 직접 보고 그 참모습을 그려야만 한다는 창작관에 비롯된 그의 사생적 풍속화’에 대해 문인 이규상(1727-1799)은 ‘ 우리나라의 그림이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의 풍속화는 주로 화원들이 중심으로 활발하게 그려졌다.
특히 인간이 그림의 주체가 되어 일상의 구체적인 모습이 그려진 인물중심 풍속화는 사대부인 조영석을 중심으로 화원인 단원 김홍도 (1745-1806), 혜원 신윤복(1758-1814?) , 긍재 김득신(1754-1822)이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관아재의 경우는 평범한 우리네 삶의 정경을 소재로 진솔하게 묘사했다.
담백하고 고아한 필선과 맑고 화사한 담채는 그의 특유한 감각과 세련된 문인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김홍도는 조선의 서민층의 소탈한 생활모습을 아주 다양하게 많이 그렸다.
서민층의 풍속을 해학과 풍자를 곁들여 그려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소질이 있다. 그의 필법은 주제로 등장하는 모습에 집중할수 있도록 최소화된 색채 이용과 주재을 앞세우고 배경을 삭제하는 여백의 미를 이용했다.
반면에 혜원의 경우는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사용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인물들의 몸 동작과 표정을 비롯하여 각종 배경을 뛰어난 소묘력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그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몸짓과 표정은 그 속내를 훤히 드려다 볼 수 있도록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했다.
선이 가늘고 유연함으로, 주제를 암시하기 위해 치밀하게 주변 배경을 부각시켰고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을 살리기 위해 부드러운 담채 바탕에 뚜렷한 원색을 사용하여 당시 그들의 복식문화와 함께 풍류생활의 멋과 운치를 실감나게 전해준다.
혜원이 이러한 풍속화를 그릴 수 있는 배경으로는 조선후기 초기 상업화 과정에서 경제력을 축적하여 양반 못지않는 부를 축적한 서민 지주들이 후원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통 사대부와는 다른 취향을 가진 풍속화의 든든한 수요자였다.
혜원은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시대 성리학 이념에 의거 남성위주 계급사회에서 억압되고 차페된 존재감없는 인간 본성인 , 여성 성을 등장시킨다. 상위층인 양반들의 인간 본성에 본질적으로 반하는 위선과 불륜 행위를 화폭에 담아 파헤치고 풍자하고져 천민계급인 기방의 기녀들과 계집종 , 과부 등을 기가막히지만 천박하거나 상스럽지 않게 교묘히 작품에 등장시켜 성을 풍속화의 회화성으로 끌어 올렸다. 그렇게 남녀간 성풍속을 과감하게 화폭에 보여줌으로 , 조선시대 사회풍속의 숨겨진 이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편 그러한 풍속을 도회적인 세련된 감각과 세련된 필치로 형상화하여 조선시대의 풍속화의 영역을 보다 다채롭게 넓혀 주었다.
문제는 정조 사후 자유분망한 사회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 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들고 혜원 자신도 제도권(도화서)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그가 남긴 작품은 대략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지는 데 이때 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의 '혜원 전신첩' 은 1첩 30면으로 , 크기는 28.2 X 35.2cm 이다. 재질은 종이 바탕에 담채로 그려져 있다.
이 화첩도 일본에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오사카에 있는 고미술상에서 구입하여 새로 표구하였는 데, 이때 오세창이 표제와 발문을 썼다고 한다.
1970년 12월 30일 국보 제135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혜원전신첩은 대부분 기생과 한량을 중심으로 남녀간의 춘정이나 정념 또는 양반사회의 풍류를 소재로 그린 것이다.
화첩에는 청금상련, 기방무사, 청루소일, 월하정인, 월야밀회, 춘색만원, 소년전홍, 주유청강, 연소탑청, 상춘야흥, 노상탁발, 납량만흥, 임하투호, 무녀신무, 주막, 쌍검대무, 휴기답풍, 쌍륙삼매, 문종심사, 노중상봉, 계변가화, 정변야화, 삼추가영, 표모봉심, 야금모행, 유곽쟁웅, 이승영기, 단오풍정, 홍루대주, 이부탐춘 30점이 실려있다.
등장 인물들은 남녀가 모두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눈초리가 치켜올라간 선정적인 모습에 맵시와 멋이 넘치는 자태로 그려져 있다. 도시적인 세련미와 함께 낭만적, 색정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 * *
춘정과 유혹
[ 춘색만원 ]
화제를 보면 春色滿園中/ 開花爛漫紅 라했다.
그런데 남녀 주변을 보라 무슨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단 말인가?
그런데 두사람의 얼굴을 보면 남자는 낮술을 마셨고, 여인은 뭔일이 있었는지 얼굴이 붉게 타올라 있다.
남자는 무관의 평상복인 철릭을 입고 있고 부채를 쥐고 있는데, 갓을 쓰고 있고 합죽선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양반임을 알 수 있다.
여자는 봄날 홀로 앞치마를 두르고 나물을 캐러온 어염집 여인이다.
이 양반은 왠일인지 봄나물이 가득한 바구니에 손을 넣고 있고, 그럼에도 얼굴에 색기가 흐르는 여인은 싫어하는 기색이 전혀없다. 바구니 밖으로 나물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초가지붕을 보면 거시기처럼 생긴 것이 불쑥 솟아 있어 바구니와 대조를 이룬다.
[ 정변야화 ]
밤에 아낙네 둘이 우물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여자는 두레박으로 물을 푸고 있고, 한 여자는 머리 위에 똬리를 올려 놓은 것을 봐서는 이제 물동이를 이고 떠날 참인 것 같다. 일각문 위로 달이 뜬 것을 보면 밤중이다.
밤에 물을 길고 나른 것을 봐선 두 여자는 양반집 부녀자가 아니다.
그런데 왠 양반 한분이 담너머에서 뒷짐을 지고는 이 여인네들을 음침하게 흠쳐보고 있다.
붉는 봄꽃이 가자마다 잔득 피어있고 만월이 떠 있어 춘정이 가득 넘치는 봄밤이다.
그런데 서있는 여인을 자세히 보면 앉아 있는 여인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선듯 자리를 못 뜨고 물동이는 멀리 둔 채 손에 턱을 얹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민하는 모양인 것 같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봐서는 이 흰 민짜저고리 복색의 여인은 이 집 양반네 여종인 듯 하다.
혹시 이 젊은 여인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밀고 숨어서 기다리는 상황이 아닌지.
[ 소년전홍 ]
화제를 보면 密葉濃堆綠 / 繁枝碎剪紅 이라 적혀 있다.
'만춘이 되어 녹음이 짙어 지니 번성한 가지에서 붉은 꽃이 떨어지네'
전면을 장식한 꽃 나무는 배롱나무로 흔히 나무백일홍이라는 불리우는 꽃나무다.
그런데 붉은 꽃들이 부셔지고 잘리운다니 무슨 말일까.
화제로 '소년이 붉은 꽃을 자른다'로 이때 꽃은 당연히 젊은 여자다.
그림을 보면, 상투를 틀고 사방관을 쓴 젊은 남자가 완력으로 여자의 손목을 쥐고는 당기고 있고, 짚신을 신고 있으며 고름만 자주색인 저고리를 입고 있는 여인은 뿌리치지 못하고 엉덩이를 잔뜩 뒤로 빼고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괴석이 있고 꽃나무가 있으며 흙담이 둘러져있는 것을 보면 어느 양반집 후원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림 속의 괴석이 터무니 없을 정도로 크다. 더해서 괴석은 분이 아니라 땅에 뿌리를 박고 위로 치솟아 있다. 최대로 발기한 거시기를 닮았다. 거기다 괴석의 윗부분 몸체에 무언가 흰 액체가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이 나게 그려져 있다. 이 젊은 여인의 행색을 보면 분명히 이 양반댁의 계집종이 분명하다.
정리보면, 봄날 행세깨나 하는 양반가의 젊은 서방님이 후원을 거닐다 춘의에 만취한 상태에서 저고리로 가슴을 다 가리지 못한 채 맨살이 드러나 있는 여종을 보자 부기를 못이겨 범하려고 하는 장면인 것 같다.
그래도 정변야화는 채면치레를 하건만 , 여기 갓 장가든 젊은 양반은 젊은 종년의 의사에 반하며 반상을 이용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으려 한다.
* 이상의 세 그림에 등장하는 남자는 예외없이 양반이다.
대낮에 술을 마시고 나물 캐고 돌아오는 아낙의 바구니에 손을 집어넣거나, 달밝은 밤에 넌지시 보낸 유혹의 손길에 여종이 넘어오기를 음침한 눈길로 바라보거나, 후원에서 만난 여종을 춘정을 못참아 손목을 덥석잡아 당기는 손길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양반이다.
성의 문제에 있어 조선은 철저하게 불평등했다. 남성은 타인의 부인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아내 외의 여자와 관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즉 정식부인 이외의 여성에게서 얻은 자식을 서얼이라했다.
서자는 양민 이상의 여성과 관계에서 낳은 자식이고, 얼자는 계집종,기생,무당 등 천민 여성과 관계해서 낳은 자식이다.
고려 때와 달리 조선은 성리학이념으로 위계질서를 정립하며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처제로 고치가며 , 사대부는 처와 첩의 구분을 경국대전에 명문화시켰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서얼들이 받았던 차별이 구체적으로 적혀있는데, 서얼출신은 계급사회에서 문과의 초시인 생원시, 진사시에도 응시할 수가 없었다.
밀회
[ 월하정인 ]
이 그림은 화제에서 시간이 삼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認知 '
(월식이라) 달빛도 어두운데, 두사람의 마음 두사람만 알 뿐.
하룻밤을 오경으로 나누어 가장 야심한 밤인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를 삼경이라 했다
조선시대에 한양 서울 도성내는 통금이 있었다.
매일밤 10시에 28수에게 종을 28번 쳐서, 밤새 안녕을 기원하며, 인정이라 성문을 닫고 통행을 금지하고, 다음날 새벽 4시에 파루라하여 33위 제석천에 타종을 33번치고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통행금지를 어기면 직결처분에 넘겨져 맨살에 곤장을 맞았는데, 3경범은 30대를 맞았다.
이제 그림을 보자.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성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다. 꼭 외출을 하려면 종과 함께 나서는 것이 통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여성의 차림을 보면 기생 같지도 않고 또 가난하게도 보이지 않는다. 남자를 보면 그의 왼손을 옷 속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더듬어 찾고 있는 것 같지 않는가, 헤어지기 전에 무언가를 건네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달의 모양을 보자 희한한 것이 이달은 초생달도 그믐달도 아니다 초승달은 왼쪽이 등글고, 그믐달은 반대쪽이 등글다, 그리고 초승달은 동쪽 지평선에 그믐달은 서편 지평선에 잠깐 떳다가 보이지 않는다. 즉 반달은 낮에 중천에 뜨고 , 보름달은 초저녁에 동편에서 뜬다. 결과적으로 보름에 가까운 달인데 삼경이라 했으니 서쪽편으로 넘어가고 있는 달이다.
지금 처럼 공원이나 여관 혹은 러브호텔 같은 연애할 공간이 있을 턱이 없고 하물며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 이 남녀의 만남은 당시의 사회규범상 합법적인 관계가 아니고 물론 부부관계도 아닌 것이 분명하니 남몰래 만나고 아쉬운 별리를 하는 상황 같다.
* 이 화제는 혜원의 글이 아니고 이황의 문하생이 었고 임진왜란 때 팔도도원수로 참전했으며 후에 좌의정을 지냈던 김명원(1534-1602)의 시에서 발취한 것이라 한다.
정승은 젊은 시절 자기가 좋아했던 기생이 어느 양반집 후처로 들어가자 춘정을 못 이겨 담장을 넘어가 그 여인을 만나다가 붙잡혀 큰 치도곤을 면하지 못하게 된 때에 그의 형이 찾아가 아우가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뒷날 큰 인재로 쓰일 인물임을 알리며 선처를 잘 호소해 그 양반이 용서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原詩를 적어 보면 窓外三更細雨時/兩人心事兩人知/歡情未洽天將曉/更把羅衫問後期
[ 삼각관계 ] 월야밀회 (月夜密會)
위 그림도 한밤중 남녀의 만남을 보여 준다.
그림 오른쪽에 장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 있고, 왼쪽에는 어떤 사내가 여인과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담장 뒤에서 엿보고 있는 또 다른 여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
우선 두 여자의 복색을 비교해 보면 엿보는 여자의 저고리의 깃과 고름이 모두 자주색이고, 위에는 녹색 장옷까지 걸치고 있다. 저고리의 끝동, 깃, 곁마기, 고름을 다른 색의 천으로 꾸미는 것은 회장이라고 하는 데 이 여인은 자주색계 삼회장 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껴안긴 여인의 복색을 보면 깃은 그냥 저고리 색 그대로이고 소매 끝은 남색, 고름은 자주색이다.
그런데 남빛 끝동을 다는 것은 남편이 있다는 표시이고, 자주 고름은 자식이 있다는 표시라고 한다.
그리고 사내는 전립을 쓰고 있고 안에 동달이를 입고 곁에 소매없는 전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군복차림이므로 포도청의 장교인 포교다,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철편이다.
그리고 왼쪽 위편에 달이 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밤 중이다. 길 양쪽의 담장은 모두 기와를 얹었고 앞쪽 오른편 담장 안은 정원이 있는 기와집이다, 고급주택가란 말이다.
이 시간에 시종도 없이 양반집 부녀자가 길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순라도는 포교와의 안면 있다해도 어려운 일, 강명관 교수의 의견에 따르면 이 남자는 주택가를 순라도는 포교이고 복색을 잘 갖춰 입은 기녀와 함께 골목길을 가다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민가의 부녀자인 왼편 여자를 만나자 당혹하여 여인에게 다가가 이처럼 가깝게 얼굴을 마주하며 구차스런 변명을 늘어놓는 장면이라는 것.
* 휴가철 가로등이 없는 시골길을 차를 운전해 본분들은 느끼시겠지만 전기시설 없는 거리는 참으로 어둡다. 조선시대 한양의 밤은 완전한 어둠이고 인적인 끊긴 거리는 다니기가 무섭도록 적막 속에 묻혔을 것. 쟁그랑 쟁그랑 포교의 철편고리 흔드는 소리만이 적막 속에서 들렸을 것이다.
초저녁도 어두웠겠지만 2경을 알리는 인경소리(밤10시)에 모든 것은 어둠과 정적에 휩싸인다.
이 완전 어둠 속에서 남녀의 만남은 이루워진다. 억압적인 제도 하에서도 꿈틀거리는 인간의 본원적 욕망을 '밀회' 와 ' 삼각관계'는 어둠을 빌어 보여 주고 있다.
개울가의 여인
[ 계변가화 ]
조선시대 그림에서 여성의 젖가슴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수유를 위한 젖가슴 ,조선말기 선교사의 사진기에 찍힌 길거리에서 여인네 젖가슴 작품 외는, 충격적인 일이다.
이슬람 문화권의 차도르가 여성의 육체를 차폐하듯 조선시대에는 양반가 여성이 입었던 장옷과 쓰개치마는 여성의 몸을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차폐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했다.
조선시대에 한문학에서 여성의 신체를 묘사하는 것은 금기였다. 한시나 전통산문에서 언급되는 것은 열녀였다.
여성의 신체, 그것도 성을 연상시키는 신체는 언어로 재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문학의 사정이 이럴진대, 시각예술의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계변가화는 마을 뒷산 '개울가변에 핀 아름다운 꽃'이란 이야기인데 '빨래터의 사내'라는 화제가 붙었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름에 소도시 주변 주택가 위.아래쪽 냇가에서 아낙네들이 빨래하고 몸 씻는 것 보는 것이 흔했다.
그만큼 우리 여인네들이 청결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꽃은 여인네들이겠다.
그림 왼편에 체구도 늠름한 젊은 사내가 활과 화살을 든 채 고개를 돌려 오른쪽 끝에 앉은 여인을 보고있다.
이 그림의 한량은 산속에서 사냥 중인 모양이다. 왼팔의 팔찌는 활을 쏠 때 옷소매가 활시위에 걸리지 않게 여미도록 만든 것이다. 젊은이의 복색을 보아 벼슬이 없는 백면서생이다. 아마 산속에서 짐승을 쫒다가 우연히 개울가에서 여인네를 만났다. 맨 위쪽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옷을 털어 펼치다 사내를 보고 얼른 안 간다고 눈쌀을 찌프리고 있는 데 나이가 있다. 그리고 빨래 방망이질을 열심히 하고 있는 중년 여인이 있다.
주제는 한량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다. 가장 왼편의 여성 , 즉 머리를 감고, 목욕은 했는지, 조용히 앉아 가채의 일부를 남겨 놓은 채 긴 머리를 땋고 있다. 그런데 이 젊은 처녀의 젖가슴이 저고리 아래로 드러나있다. 처녀도 젊은 사내의 시선을 인지했는지 양볼이 달아올랐다.
[ 단오풍정 ]
혜원의 그림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그림이 위 단오풍정이다.
음력으로 5월5일은 음양사상으로 보면 양의 수가 겹친 길한 날로 1년 중에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다. 그리고 모내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으로 본격적으로 여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창포를 삶은 물이나 상추에 맺힌 이슬을 받아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여 피부를 맑게하고 부스럼이 나는 것을 예방하였다.
이 그림에는 여덟 명의 여인과 두 명의 까까머리 중이 등장한다.
네명의 여인이 지금 한창 목욕 중이고, 한 여인은 그네를 타고 있다. 오른 쪽 위의 두여인은 목욕을 끝내고 가채로 땋는 큰 머리를 매만지고 몸매를 가다듬고 있다.
오른편 아랫쪽에는 이 여인네들이 마실 술상을 보자기에 싸서 이고 오는 계집종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관객의 시선은 바위 뒤에 숨어서 엿보는 동자들의 시선과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맨 왼쪽의 여자는 치마를 걷어 허리 중간에 대충 걸쳤을 뿐이라 젖가슴과 배, 엉덩이 아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돌섬 위에 앉아서 허리를 굽혀 상반신을 열심히 씻고 있는 여인의 오른쪽 젖가슴, 중심을 잡느라 올린 왼팔 밑 들려 올려진 저고리 밑으로 들어난 계집종의 탐스러운 젖가슴과 나무 그늘 밑에 앉아 땀에 젖은 가슴을 말리고 식히노라 젖혀 논 저고리 앞섶 땜시 노출된 여인의 젖가슴이 그것으로, 모두 다섯 여인의 젖가슴의 젖꼭지가 짙은 분홍색으로 탐스럽게 강조되어 있다.
일전에 천경자 화백의 직계 제자이며 2013년 한국인 대상 미술진흥 부문을 수상하신 서울대.고려대 교수를 지냈던 , 일명 보리밭 화가로 불리우는 이숙자 화백의 '이브의 보리밭' 연작을 본적이 있다.
이화백은 작품에서 가부장 사회에서 수동적, 순종적인 여성의 이미지와 다른 당당하고 도발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내고져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의 창조물인 몸의 아름다움을 만개한 화려한 꽃을 볼 때와 같이 왜곡없는 시각으로 감상해 줄 것을 부탁했다. 모두가 화백의 작품을 보고 한국인의 정서가 내면에 깔린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고 했다.
우리는 '단옷날의 개울가 '란 작품에서 혜원은 왜 목욕하는 여인을 소재로 삼았고 , 그림 속의 여성의 젖가슴을 의도적일 만큼 노출시키며 그것을 통해 전하고져 했던 의미는 무었이었을까 ?
생각해 보면 , 그것 역시도 작품 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작품을 살펴보면 년중 가장 양기가 강한 시기에 음기의 기호들이 강하게 그려져 있다
젊은 여인들, 그네를 매고 있는 나무 밑둥의 옹이, 바위 모양,힘차게 흐르는 시냇가변의 파릇 파릇한 소나무 잔가지 잎들과 풀, 음양( 존재 조건)과 오행(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치)의 숫자 등
양반들의 유흥
[ 봄날흥치 ] 상춘야흥 (賞春野興)
▲ 상춘야흥(賞春野興) - 지본담채 35.6×28.2cm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전신첩 중에서)
무르익은 봄날 야외에서 여흥을 즐김
- 진달래 꽃이 피어난 화사한 어느 봄날 양반가의 후원에서 봄날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 왼쪽의 집주인인 듯한 양반은 자리를 양보하고 초대받은 주빈은 가운데에 앉아있다.
- 관복이 아닌 사복으로 입기는 하였지만 도포 위에 두른 홍띠에서 그의 지위가 드러난다.
- 붉은 색 띠는 당상관 이상의 직위를 말한다. 그 중 오른쪽 구렛나루 수염이 보기 좋은 양반이 더 고위직인 듯하다.
- 그는 연주에만 관심있는 듯 옆에 앉은 기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 두 명의 기생과 세 명의 악공은 연회를 위하여 준비하고 있고 오른쪽 곁에서 창옷을 입은 서성이는 젊은 남자
두 사람은 귀인들의 수행원으로 행여 빠진 것은 없나 주변을 둘러 본다.
- 도포는 선비들의 통상 예복으로 소매가 넓고 길며 주머니처럼 달린 공태가 있다.
- 창옷은 소매가 간편하고 길이도 그다지 길지 않으며 양옆이 트여 아랫부분이 갈라진 옷이다.
- 널다랗게 깔린 돗자리 위에는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기생과 귀인의 좌측에는 한 무릎을 세워 두 손으로 감싸 앉은 붉은색 속고름을 드리운 자태고운 기생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 연주자들의 배치는 왼쪽 대금과 가운데 해금 그리고 오른쪽 거문고로 앉아있다.
- 주빈은 온화한 얼굴로 악공들의 조율을 들으며 바로 시작될 연회를 즐기고 있다.
맨 아래 왼쪽은 조촐한 술상을 받쳐 든 하녀가 음식을 나르고 있다.
그림을 보면 장침(長枕)과 담배합, 화로가 있는 걸로 보아 여흥이 길어질 듯 보인다.
- 혜원의 그림에서는 기생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조선시대 옛 기생의 격조란 사람마다 천양지차로 달랐다고 한다.
- 시문, 서화, 가무에서 예술의 절정에 오른 이가 있었는가 하면, 경전을 줄줄 외고 마상에서 활을 당겨 먼 과녁을 꿰뚫는 여장부도 있었다고 한다.
♣ 다음은 소설가 이정명의 장편소설 '바람의 화원'중에서의 한 부분이다.
『 햇살이 가득한 김조년의 후원에서 호조판서 김윤명을 위한 대규모 향연이 있었다.
호조에서 소요될 양식과 비단, 종이의 납품과 관련된 일이었다.
김조년은 3년 전부터 그일에 공을 들여왔다. 오랫동안 관가 납품은 육의전이 아니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조년은 육의전의 지물전과 면포전 행수들을 포섭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물건을 관에 납품하기로 했다. 이 모든 일은 호조에서 눈감아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향연이 있던 날 집안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종들은 돗자리와 기물들을 들고 후원을 바쁘게 오갔다. 윤복은 그 모든 일들의 주관자였다. 돗자리의 위치와 사람들의 방향, 그리고 화폭을 구성하는 요소의 배치에 세세하게 신경을 썼다.
화사장은 첫 번째 화사장의 반대편 산기슭으로 이어진 정원이었다.
김윤명을 정면으로, 그 옆에는 김조년을 옆으로 앉게 하고 가운데에 기생 둘을 배치했다.
연못의 배 위에서 보면 김윤명의 뒤로 아담한 산세와 붉은 꽃들이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었다.
앞쪽에는 세명의 악공 자리를 깔고 오른쪽에는 젊은 청지기 둘을 선채로 대기하게 했다.
완벽한 구도였다.
김조년과 김윤명이 마주 앉은 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친근한 분위기를 돋울 수 있으면서도 김윤명을 주빈으로 예우할 수 있었다. 아래쪽에는 연못의 석축을 살짝 그려 그곳이 김조년의 집 후원임을 명확히 할 참이었다. 화사는 점심 나절에 시작되어 저녁에 가까워서야 끝이 났다. 』
-'바람의 화원'중에서-
설명 자료 : cafe.daum.net/thdtkstjtlf./YsmL/44 유석서회교실
[ 연못과 가야금 ] 청금상련(聽琴賞蓮)/ 연당야유 (蓮塘野遊)
선유와 유산
[ 유산행차 ]
[ 주유청강 ]
화제로 ' 一笛晩風聽不得 / 白鷗飛下浪花前 ' 라고 쓰여 있다.
늦바람 타는 대금 소리는 안들리고 / 갈매기는 꽃물결만 찾아 날라드네
갓쓴 양반 세명, 기생 3명이 배를 타고 있다. 장소는 한강, 배는 선유도 선 바위 옆을 지나고 있다.
성하의 여름인 듯, 배 위에는 차양이 쳐저있다. 기녀들은 산뜻한 물빛 치마를 입고 있어 싱그러운 계절감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젊은 한량, 둘은 기녀의 어깨를 살포시 안으며 장죽을 잡아 주기도 하고, 강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기녀를 턱에 손을 괴고는 옆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주유하는 젊은이들 관심사는 피리소리가 아니라 꽃물결 찰랑이는 여인네들의 치마폭 속이 아닐지,
그런데 연배가 좀 있어 보이는 수염 기른 양반은 뒷짐을 지고는 먼 데를 바라보고 있고 있는 모습이다.
흥없어 생각에 잠긴 이분 자세히 보면 중치막에 흰 띠를 매고 있는 것을 보면 상중인 모양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상중에도 불구하고 두 젊은이를 접대하기 위해 선유놀음에 나왔다는 이야기다.
기타 풍정
[ 노상상봉]
길 위에서 마주보며 이야기하고 있듯이 보이는 남자 둘과 여인 둘, 모두가 장식이 없는 흰 옷을 입고있다.
남자들이 쓰고있는 패랭이는 집안 사람 가운데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쓰는 모자이고, 여인들이 쓴 삿갓도 그렇다. 오른쪽의 삿갓을 쓴 여인은 치마를 왼쪽으로 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집 여인으로 본다. 오른쪽 여인은 치마 여밈이 다르지만 얹은 머리가 작지 않은 것으로 봐서 서민같이 보인다.
부모 모두에 대해서는 지팡이를 3년상이 원칙이지만, 남자쪽만 지팡이를 짚는 1년상일 경우는 몇가지 경우가 있다 한다. 시집간 딸의 경우 친정부모 모두에게 지팡이를 짚지 않는 1년상을 입는다.
즉 딸의 경우는 시집쪽의 상일 때는 지팡이를 짚지만 시집가서 당한 친정쪽의 상일 때는 지팡이를 짚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왼쪽 여인은 시집에서의 상을 오른쪽의 여인은 친정집이 상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른쪽 지팡이를 짚은 쪽의 남녀는 부부이고 전면의 남녀는 남매인 것으로 추측된다.
즉 남매는 집안이 몰락한 양반집 사람으로 가세가 기울어 서민의 남녀와 결혼한 것 같다.
[ 문종심사 ] (聞鐘尋寺)
[ 쌍륙삼매]
서양장기인 쌍륙놀이는 푸른 말, 붉은 말 각각 16개씩 있다. 주사위(투자) 2개를 굴려서 나온 숫자대로 말을 전진 시킨다. 그림은 남자가 둘, 기생 2명이 야외에서 쌍륙판을 벌리고 있는 장면이다.
그림의 오른쪽 남자는 배자만 입고 탕건을 벗어 왼편에 놓아두고 있다. 놀이 상대편인 기생으로 보이는 여성쪽의 말 두개가 판 밖으로 나와 있는 걸 보면 놀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오른쪽에 써놓은 시를 보면 '기러기 나는 울음소리 역력한데, 인적은 고요하고 물시계 소리만 아득하다'라고 하여 이들이 쌍륙 삼매경에 빠졌음을 말해준다.
[ 선술집 ] 주사거배 (酒肆擧盃)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마지막 그림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원래 있던 '납량만흥'을 ‘주사거배’로, 기회가 되면 납량만흥도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맨 왼쪽에 서 있는 ‘중노미’로 불리는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젊은이를 보세요.
그런데 이 중노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있네요. 뭔가를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
주방에 앉아 술도 따라 주고 손님의 묻는 말에 대답도 해야 되는 여주인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일반 주막하고는 다른, 대청마루 같은 넓은 마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술상도 차려있지 않고, 앉아있는 손님도 없구?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 그림은 기생이 있는 기생집도 일반 주막도 아닌 선술집 풍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화화 중 선술집을 그린 분은 신윤복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중노미는, 서있는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 주다 보면 손님들이 서있는 위치도 바뀌고 그래서 헷갈려 할 주인이 따르는 , 술잔 숫자를 셈하고 것입니다.
중노미가 서있는 옆 벽에 써있는 화제는' 巨盃縣皓月 / 抱擁對淸風'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병을 끌어 안으며 바람을 상대하네’
입니다.
노란 초립을 쓰고 붉은 장의를 입은 관아의 별감이 젓가락을 들자마자 주인은 술을 따르고 있습니다. 술집 주인은 트레머리에 흰색 저고리, 푸른 치마 입고, 소매 끝동은 푸른색이고 깃과 고름은 자주색입니다. 남색 끝동은 남편이 있고, 자주색 고름은 자식이 있음을 보여주는 복색입니다.
술을 주문하면 술통에서 술을 떠 그릇에 담는데 , 이때 쓰는 국자를 ‘구기’라 합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국자로 술을 떠서 바로 술잔에 담아 주는 것이 아니라 술통 앞에 있는 그릇에 먼저 담아 데워 먹는 것입니다. 청주 데워 먹 듯이.
오른쪽 두 사람 중 갓을 쓴 양반은 점잖은 체면에도 불구하고 겉옷을 들추고 있는 모습이 아마도 술을 좀 얼큰하게 취한 것 같습니다. 담뱃대로 술을 가리키며 옆 사람에게 한 잔 더 하자고 하는 듯합니다.일행인 듯한 사람이 흥미를 또 끄는 것은 복장이 아주 특이하네요. 망건도 아닌 원뿔 모양의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고, 겉옷은 소매가 없고 검은 천에 하얀 실로 체크무늬를 새긴 넓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런 모자를 ‘깔때기’ 옷은 ‘더그레’라 부르는데 조선의 관헌 중 이런 복장을 한 사람은 바로 의금부 나장입니다.
그러니까 맨 오른쪽 얼굴이 붉게 타오른 인물은 죄인을 문초할 때 매질 및 압송을 하는 병조 소속의 중앙 서리로 깔때기 쓰고 까치등거리를 입었으며 손에 주장을 들고 다녔다 했습니다.
얼마나 밉게 보였으면 눈은 작게 그려 독하게 보이고 눈썹은 뒤로 갈수록 높아져 매서운 인상을 풍기게 그렸습니다.
한 잔 더 하자는 옆 사람의 권유에 그만하고 가자며 말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
2017.2.22. 한바다.
참고서적
조선풍속사3 "혜원 그림밖으로 걸어나오다" 2010. 강명관 도서출판사 푸른 역사
나를 세우는 옛 그림 조선의 옛그림에서 .. 2012. 손태호 한영문화사
간송 미술 36회화 우리문화와 역사 .. 2014. 백인산 (주)안그라픽스
한국의 풍속화 2000. 정병모 한길아트
2017.02.26블로그 > Daum블로그 http://blog.daum.net/
*** 그림 중복을 피하여 선별하여 게재함
기방무사 (妓房無事)
청루소일 (靑樓消日)
연소답청 (年少踏靑)
노상탁발 (路上托鉢)
납량만흥 (納凉漫興)
임하투호 (林下投壺)
2008.11.24
cafe.daum.net/YSFF/BFk6/40 용성패밀리(YSFF)
쌍검대무 雙劍對舞
휴기답풍 (携妓踏楓)
• 작품명 :
휴기답풍(携妓踏風)
• 작가 : 신윤복
• 제작연대 : 19세기초
• 소장처 :
간송미술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채색,
28.2×35.6㎝
쓰개치마를 두른 여인은 담뱃대를 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생인 것 같다. 쓰개치마는 원래 양반집 여인들만 쓰도록 했지만 이 때쯤에는 별로 이런 법에 얽매이지 않았다. 지붕이 있는 가마는 아무나 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양반집 여인들만 탈 수 있었다. 지붕이 없는 탈 것을 가마바탕이라고 하는데 기생이나 첩이 타고 다녔다.
가마를 멘 두 사람은 어깨에 가마 무게를 지탱하는 줄을 메고 있고 손으로 가마의
자루를 잡고 있다. 이것이 가마를 메는 방법이란다. 뒤에 있는 댕기머리 총각은 단풍잎을 꽂았고, 앞의 가마꾼은 벙거지를 쓴 것으로 보아 결혼한
사람인 것 같다. 벙거지를 쓴 사람은 결혼을 해서인지 아니면 기생을 태우고 다니면서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해서인지 또 다른 멋쟁이에
대한 관심을 접은지 이미 오래된 것 같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기고 있다. 뒤의 댕기머리 젊은이는 아직은 또래의 멋쟁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듯하다. 중치막 입은 멋쟁이 젊은이는 길을 가다 기생의 눈길을 느꼈는지 마주보고 있다. 젊은이는 가던 길을 멈춘 듯 발걸음이 멈칫하면서 약간 옆으로 비켜섰다. 바람이 부는지 갓을 잡은 손과 휘날리는 갓끈에 젊은이의 모습이 더욱 멋있어 보인다.
설명 출처 : cafe.daum.net/ayayasani/MyAo/100 광주 산길따라산악회
삼추가연 (三秋佳緣)
표모봉욕 (漂母逢辱)
야금모행 夜禁冒行
이승영기(尼僧迎妓) : 비구니가 기녀를 맞이하다
홍루대주(紅樓待酒)
이부탐춘(嫠婦耽春)
무녀신무(巫女神舞)
춘야밀회 (春夜密會) 19세기 , 1813년 / 119.7cm x 37.6cm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윤복, 유곽쟁웅도(遊廓爭雄圖), 18세기, 종이에 채색, 28.2×35.6㎝, 국보 제135호인 혜원전신첩에 실림, 간송미술관>
신윤복의 미인도(美人圖)
1758년에 태어났고,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인데, 죽은 연대 또한 미상입니다. 아버지 신한평도 도화서 화원이었답니다.
혜원풍속도 (국보 135호/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풍속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 혜원 신윤복(1758년경∼1813년 이후)이 기녀를 비롯한 여속(女俗)을 주제로 그린 화첩이며, 표지의 제첨(題簽)에 의해 ≪혜원전신첩≫으로 지칭된다.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전형필(全鎣弼)이 오사카[大阪] 의 고미술상에서 구입해 와 새로 표장했으며, 오세창(吳世昌)이 제첨과 발문을 썼다.
>. <춘색만원 春色滿園>. <소년전홍 少年剪紅>. <주유청강 舟遊淸江>. <연소답청 年少踏靑>. <상춘야흥 賞春野興>. <노상 탁발 路上托鉢>. <납량만흥 納凉漫興>. <임하투호 林下投壺>. <무녀신무 巫女神舞>. <주사거배 酒肆擧盃>. <쌍검대무 雙劍 對舞>. <휴기답풍 携妓踏楓>. <쌍륙삼매 雙六三昧>. <문종심사 聞鐘尋寺>. <노중상봉 路中相逢>. <계변가화 溪邊佳話>. <정변야화 井邊夜話>. <삼추가연 三秋佳緣>. <표모봉욕 漂母逢辱>. <야금모행 夜禁冒行>. <유곽쟁웅 遊廓爭雄>. <니승영 기 尼僧迎妓>. <단오풍정 端午風情>. <홍루대주 紅樓待酒>. <이부탐춘 嫠婦耽春> 등 30점이 실려 있다. 이 중 11점에 행서체 로 직접 쓴 제시와 관서(款署)가 적혀 있다.
도시 상공업의 발달과 평민층의 성장 등을 배경으로 조성되었던 시정(市井)의 유흥적ㆍ향락적 분위기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남녀 모두 대체로 갸름한 얼굴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선정적인 모습에 맵시와 멋이 넘치는 자태로 그려져 있어 도시적인 세련미와 낭만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인물들의 동작과 표정을 비롯하여 각종 배경들을 뛰어난 묘사력을 통해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특히 기물들의 양감과 자연스 럽게 꺾이고 굴곡진 한복 옷 주름의 실물감을 나타내기 위해 음영법을 부분적으로 구사하여 더욱 생생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섬세하고 유연한 필선과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을 최대한으로 살린 곱고 화사한 색채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당시의 풍속상과 풍류생활의 멋과 운치를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시대 우키요에[浮世繪]와 유사한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제재와 필묵법, 설채법, 인물 표현 등에서 신윤복의 독창적인 세계 를 보여준다.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의 유운홍(劉運弘)과 유숙(劉淑) 등을 거쳐 1930년대 이용우(李用雨)의 인물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
출처 :해동연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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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동연(東蓮)
2016.09.27
cafe.daum.net/hyunyamseodang/HAue/218 현암서당
cafe.daum.net/2006shv/F4v2/9156 상현컴동호회
이명욱, 어초문답도, 17세기, 173.0 cm ×94.0 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회화 명품전
지난 일요일,
모처럼 문화 혜택을 호사스럽게 누리는 기회를 가졌는데요.
대구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 '조선 회화 명품전'을 관람하였습니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선생께서 부친대부터 평생에 걸쳐 모은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 특별히 조선시대 화화를 가려서 이번에 지방 전시회로는 처음으로 대구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평소에 김정희나 김홍도, 신윤복의 진품 작품을 한점이라도 구경이나 할 수 있을려나 했는데 이번에 조선시대의 여러 작가들의 걸작 작품들을 한꺼번에 보게되니 그 감격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침 방학기간이라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님들과 특별한 전시회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 많은 이들이 찾아서 구경을 하였는데 한 작품앞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들어가 같이 그려보기도 하고 세세하게 묘사된 그림속의 이야기를 꺼집어 내어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는 맛이 정말 좋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이전에 우리 옛 춘화도에 관심이 많아 나름대로 제법 수집도 많이 하였는데 이번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춘화도 작품을 많이 그린 김홍도나 신윤복의 작품들도 많이 전시가 되어 관심이 더욱 많았답니다. 조선 후기 실로 엄격한 윤리관 속에서도 성(性)에 대한 문화가 최고였던 시기.. 춘화도를 그린 손길로 또 다른 시대적 역작을 그린 작품들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 묘한 생각들을 많이 하기도 하였답니다.
간송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하였는데 이 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약탈이 되었는데 이를 되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 분입니다.
이번 전시회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작품들로서 조선초기 안견을 비롯하여 강희안, 신사임당이 있고 중기로는 탄은 이정과 허주 이징, 창강 조속등 이 있습니다. 조선의 문화가 꽃이 활짝 핀 진경시대의 작품으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 단원 김홍도, 긍재 김득신, 헤원 신윤복의 작품이 있고 조선 말기로는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이하응, 운미 민영익, 오원 장승업,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의 그림들이 전시되었습니다.
그림 중에는 문화재 보물로 지정이 된 작품이 13점이나 되어 한꺼번에 한자리에서 중요한 보물들을 감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릴적 꿈이 화가였던적도 있었는데 아득한 세월 저편의 그리움을 끄집어 내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전시기간은 9월 16일까지 입니다.
사진 촬영은 휴대폰만 가능하고 플래시 사용은 금지..
대구 미술관, 대구시립미술관이라고도 합니다.
간송 전형필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사치하지 않고 호의호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서도 우리옷만 입었다고 하네요.
사진은 대학 재학 시절 1928년 사진
지곡송학, 유자미
계산청월, 석경
귀비호접, 신사임당
포도, 신사임당
풍죽, 이정
요당원앙, 이징
어초문답, 이명욱
박생연, 정선
여산초당, 정선
풍악내산총람, 정선
시화환상간, 정선
장안연우, 정선
삼부연, 정선
서과투서, 정선
추일한묘, 정선
현이도, 조영석
포도이숙, 심사정
촉잔도권 일부, 심사정
촉잔도권 일부, 심사정
어약영일, 심사정
옥류동, 이인상
해응영일, 정홍래
자웅장추, 변상벽
하화청정, 김홍도
치희조춘, 김홍도
환선정, 김홍도
마상청앵, 김홍도
과로도기, 김홍도
위 작품 중 인물을 조금 확대한 것입니다.
오류귀장, 김홍도
목양취소, 이인문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본 ..
신윤복의 미인도
얼굴만 디테일하게 ..
고혹적입니다..
조선시대 여인 초상화로서는 백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서 조선시대 풍류계에 몸담고 있는 기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탐스런 얹은머리에 젖가슴이 보일정도로 짧은 저고리를 입고 속에는 무지개 치마를 받쳐 입어 열두폭 치마가 풍만하게 보여 집니다.
여체의 관능미를 은연 중 풍기는 자태에다가 아래로 살짝 들어난 하얀 버선발이 더욱 고혹적이고
왼편 겨드랑이의 흘러내린 두가닥 허리끈은 일부러 고쳐매지 않고 그리한 듯 합니다.
얼굴에 묻어나는 애수띤 자태는 더욱 작품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 듯 하네요.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가장 관심이 많은 작품 미인도 앞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외선향, 김정희
홍매, 조희룡
강호한거, 이한철
동심지란, 이하응
흥선대원군은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정승집의 개처럼 살면서
이렇게 난을 쳐서 먹고 살았다고 하는데(?)
새삼 그 시대의 역사와 견줘 작품을 보니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실제 전시되고 있는 작품의 모습
관매순학, 안중식
전시관 중앙홀에는 3D 감상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만화 영화를 보듯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출처: https://duga.tistory.com/2622 [지구별에서 추억 만들기]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삼덕동 374
[대구미술관]
대구시와 간송미술문화재단은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을 맞아
'간송 조선 회화 명품전'을 지난 16일 전시가 시작되어, 9월 16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TV 뉴스로 보고,
들러봐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운동 다녀온 후 점심을 먹고, 아직은 건강이 완쾌되지 않은 남편은 집에서 쉬기로 하고, 혼자서 대구 미술관으로 향했다.
[대구 미술관 전경]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 박물관으로 국내 3대 사립 미술관의 하나라 합니다.
1938년 개관하여, 올해로 80주년을 맞았습니다.
8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대구에서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이라 합니다.
[대구미술관 간송 조선 회화 명품전 출입구 전경]
이번 전시에는 신윤복, 정선, 김홍도 등 조선 회화 100점과 간송 유작 30여 점이 공개된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후기를 아우르는 당대 최고 거장 신윤복. 정선. 김홍도 등 조선 진품 회화 100여 점과 간송 유작 30여 점도 공개된다 합니다.
가까운 곳에 계시거나 대구에 혹 들리실 일이 계시다면 꼭 한 번을 들려 관람하시고 가셔요.
아참 한가지 더 좋은 소식 전해드립니다.
휴대폰으로 맘껏 담아 가셔도 된다 합니다.
단 후라쉬 사용은 금하시는 조건으로....
전 사진은 담지 못하게 할 줄 알았는데 웬 횡재
신나게 담아왔습니다.^^
다녀가시지 못하실 이웃분들을 위해 많은 귀하고 귀한 작품을 여러편으로 나누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액자에 담긴 작품은 조심해서 담는다고 담았지만, 유리에 반사되어 작품에 해를 끼친 듯하여 조심스럽긴 해도 올려봅니다.
너무 많이 반사되어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전시된 작품]
[三佛庵(삼불암), 亞樂書室(아락서실)]
[방한석봉천자문]
[독립선언문]
[고려청자와 존가스비 간송 육필 원고]
[고고미술 창간호와 간송2주기 기념호]
[전시된 간송 유품]
[백자동화닭그림단지 / 간송 / 높이 18.5cm]
이 단지 역시 북단장 백자가마에서 간송이 빚어낸 것 중 하나이다.
장닭 한마리를 그릇 표면에 가득 차게 그려놓았는데 간송 솜씨가 틀림없다.
1957년 丁酉(정유)년 닭띠해이니 이 해 설날을 경축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 같다.
[백자청화북단산장재떨이]
간송이 직접 빚어낸 재떨이로 '北檀山莊(북단산장)'이라는 楷隸體(해예체)의 청화글씨가 매우 정중하다.
[澗松印章(간송인장)]
[간송 선생이 사용하던 도장]
오세창, 제백석, 전수철 외 간송이 평소에 쓰던 인장들이다.
새겨진 글은 간송의 호와 이름, 거처하던 북단장과 보화각 등이다.
간송도 전각에 능했지만, 이 인장들은 오세창과 중국의 화가이자 전각가인 제백석, 전수철 등이 선물한 것이다.
간송의 교유관계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주는 유품이다.
[葆華閣(보화각) / 위창 오세창]
[전시된 작품]
[葆華閣(보화각) 정초석 / 위창 오세창]
간송은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의 상량식을 거행한다.
당시 75세였던 위창 오세창은 그 기쁜 마음을 담아 정초명을 지어 돌에 새긴다.
보화각의 유물들은 천년의 정수이고 우리 역사와 문화를 살피고 연구할 수 있는 다리이니 세상이 보배로 삼고 자손 대대로 보존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시된 澗松(간송) 작품]
아래는 한 작품 한 작품 크게 하여 소개합니다.
[高士逍遙(고사소요 : 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 / 澗松(간송)]
간송이 추사 김정희가 그린 '고사소요'를 방작한 작품이다.
[布袋和尙(포대화상) / 澗松(간송)]
간송이 설탄 한시각이 그린 '布袋和尙(포대화상)'을 방작했는데 한시각보다 더 세련되고 선기가 감돈다.
일필휘지로 포대화상을 그려낸 운필의 여세를 몰아 '설탄법을 모방했다'고 써 놓았다.
'간송'이라는 붉은 글씨 네모인장과 '전형필'이라는 붉고 흰 글씨 네모인장을 찍었다.
[古塘秋曉(고당추효) / 澗松(간송)]
소나무 한 그루, 단풍 든 활엽수 한 그루가 언덕 아래에 서 있고 연못가에 초가집 한 채가 있는 쓸쓸한 풍경이다.
'古塘秋曉(고당추효)'라고 화제를 쓴 다음 '간송'이라 관서했다.
[仙鶴怪石(선학괴석 : 신선학과 괴상한 돌) / 澗松(간송)]
[秋林村居(추림촌거 : 가을 숲 속의 마을) / 안견]
[靑山暮雨(청산모우 : 푸른 산 속의 저녁비) / 姜希顔(강희안)]
[芝谷松鶴(지곡송학 : 지곡의 소나무와 두루미) / 유자미]
柳自湄(유자미) 조선 文宗(문종)~世祖(세조) 때의 문신.
본관 文化(문화). 문종 때 監察(감찰) 등을 지냈으나 세조의 즉위 후 은거하여 평생 절의를 지켰다.
글씨와 그림에 능하여 유작 '芝谷松鶴圖(지곡송학도)'가 전해짐.
梁山(양산) 龜山祠(구산사)에 제향됨.
[溪山晴樾(계산청월 : 시냇가 산속의 나무그늘) / 석농 김광국]
[野牛閒臥(야우한와) / 김시]
金禔(김시, 1524~1593)는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중 한명으로 소 그림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인물이다.
자신의 혼인날에 부친 金安老(김안로)가 압송되어 사사되는 참화를 겪었던 그는 일체의 부귀와 권세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고, 이후 서화에만 전념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런 그에게 소가 상징하는 은일자적한 삶은 늘상 꿈꿔오던 이상이자 다짐이었을 것이다.
[野牛閒臥(야우한와) / 김시]
앞다리를 가슴팍에 말아 넣고 소 한 마리가 엎드려 쉬고 있다.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데 맥없이 풀린 눈을 보면 바라본다기보다는 그저 눈을 뜨고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다소 따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한가롭고 태평스러운 모습이다.
어지간한 자극에는 반응하지 않는 요즘 우리네 정서로는 참 나른하고 無味(무미)해 보이는 그림이다.
그러나 당대의 거유 퇴계 이황(1501~70)은 그의 소 그림을 보고 '천년전 도연명의 뜻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감탄하게 하는구나'
라고 하여 歸去來(귀거래)의 뜻을 읽어냈다.
퇴계의 마음을 빌려 다시 보자. 인적이 없는 야산 한 자락에 천진한 눈망울로 고삐도 없이 누워 있는 소 한 마리, 과연 無心(무심)과 無碍(무애)를 형상화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그림을 찾아보기 힘들 듯하다.
[葡萄(포도) / 신사임당]
'포도'는 신사임당(1504-1551)의 회화작품으로 종이에 먹으로 그린 것으로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진 포도나무의 한 부분을 그린 것으로서 화가의 세밀한 관찰력과 뛰어난 회화적 표현력을 잘 보여 주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여성다운 필치에 먹빛도 매우 밝아서 그가 그린 포도 그림들 중에서도 제일 잘된 작품이다.
[貴妃虎蝶(귀비호접) / 신사임당 작품]
신사임당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문인으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 났던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그림은 산수, 묵죽, 포도, 영모 등 다방면에 걸쳐 빼어난 솜씨를 갖추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특히 초충도 그림은 현존하는 조선중기 초충도의 상당수가 그의 그림으로 전창될 만큼 화명이 높다.
그의 화명이 이토록 널리 알려지고 상찬되는 것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점 때문에 많은 모작과 위작이 만들어져, 그의 작품들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전시된 작품]
[古梅瑞鵲(고매서작 : 묵은 매화나무에 앉은 상서로운 까치) / 趙涑(조속)]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던 조속의 분야는 묵매화와 영모화였다.
매화나무에 앉은 한 마리 까치를 그린 '古梅瑞鵲(고매서작)' 묵매와 영모가 한데 어우려져 조속회화세계의 정수를 보여준다.
매화는 추운 겨울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봄의 전령사였으며, 까치는 예로부터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吉鳥(길조)'로 알려져 있다.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끝내 기쁨을 전해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
[秘笈展觀(비급전관 : 비결을 펼쳐보다) / 김명국]
수염이 허연 두 신선이 비밀스런 처방이 적힌 족자를 가운데 두고 얘기가 한창이다. 두건에서부터 도포자락에 이르기까지 굵기에 변화를 둔
빠른 필치의 감별법을 구사하였다.
달마대사 그림이 대표적인 도석화이다.
기량이나 규모로 보아 김명국의 도석화 중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漁樵問答(어초문답 : 낚시꾼과 나무꾼이 묻고 대답하다) / 이명욱]
북송의 유학자 소옹은 어초문대를 지어 어부와 나무꾼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천지 사물의 원리와 의리를 풀어냈다.
'어초문답'은 이 책의 내용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이명욱은 숙종대 주로 활동했던 화원 화가로 인물화를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상화풍의 정교한 필치와 채색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양식이나 크기로 보아 궁정용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溪山雲林(계산운림 : 계산의 구름 낀 숲풀) / 이경윤]
이경윤은 성종의 고손자로 선조 연강의 화단에서 크게 활동한 왕실 출신의 문인화가였다. 구름 낀 물가의 정취를 그렸는데, 전통시대
산수화에서 가장 흔히 쓰이던 소재이다.
수변으로 길게 뻗어나온 둔덕을 근경에 배치하고, 원경에는 산을 그려 넣은 형식도 조선 전기와 중기에 걸쳐 상용되었던 수법이다.
[騎牛吹笛(기우취적 : 소 타고 저 불고) / 이경윤]
산수와 인물은 물론 동물 그림도 잘 그렸다.
순한 심성을 가진 소와 천진한 동자를 등장시켜 속세와는 다른 이상적인 풍경을 표현한 작품이다.
아름드리 고목이 있는 언덕에서 두 마리 소가 잠시 서로 쳐다보는 듯 발걸음을 주저하고 있는데, 큼직한 체구를 가진 소들은 우리 황소가 아니라 뿔이 초생달처럼 휜 중국 남방의 물소이다.
실물을 사생하지 않고 화보를 따라 그렸던 시대의 소산이다.
소등 위에 올라탄 피리부는 소년은 소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체구를 지녔다.
두 눈을 껌뻑이는 소와 천진난만한 소년 그러나 과장되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소탈하고 편안한 맛은 중국과는 차별되는 우리의 美感(미감)이다.
[秋渚蘆雁(추저노안 : 가을 물가의 갈대와 기러기) / 蓮池白鷺(연지백로 : 연밭의 백로) / 李澄(이징)]
秋渚蘆雁(추저노안 : 가을 물가의 갈대와 기러기)
선조의 부마 달성위 서경주가 조상했던 '이징산수화조첩' 중 하나이다.
갈대가 무성한 물가 바위 밑에서 앉아 있는 기러기 한 쌍을 그렸다.
안락한 노후와 부부 화합을 의미하는 소재라 예로부터 즐겨 그려지던 그림이다.
蓮池白鷺(연지백로 : 연밭의 백로)
연밭에 백로 두 마리가 날아들어 고기잡이에 열중하고 있다.
한 마리는 사냥에 성공해 물고기를 삼키고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매서운 눈으로 물위를 노려보고 있다.
백로의 서로 다른 모습도 조화롭지만, 세부 묘사가 매우 탁월하다.
그럼에도 사생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중국의 그림이나 화보를 바탕으로 했다는 한계 역시 존재한다.
조선중기 화조화풍의 성과와 한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風竹(풍죽 : 바람에 맞선 대) / 이정]
오늘은 여기까지...
작품명을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알려주셔요.
저도 최대한 알아 보며, 채워가겠습니다.
출처: http://cho-a47.tistory.com/1453 [草阿(초아)의 삶과 문화산책]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삼덕동 374
[楓岳內山總覽(풍악내산총람) / 정선 / 보물 1951호]
[賢已圖(현이도 : 장기놀이) / 趙榮祏(조영석)]
조선 후기를 풍미한 풍속화의 선구자격인 조영석의 많은 풍속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여러 선비들이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장기를 두며 한 여름 더위를 식히는 장면이다.
'賢已圖(현이도)'라는 제목은 공자가 논어에서 "배를 채우고 하루를 마치면서 정신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하다못해 바둑이나 장기라도 하는 것이 현명하다."
라고 말한 데에서 따 온 것이라 한다.
[老僧携杖(노승휴장 : 노승이 지팡이를 짚고 가다) / 조영석趙榮祏(조영석)]
노스님이 시봉하는 사미승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장삼에 굴립을 쓰고 긴 지팡이를 든 노스님이 어깨에 바람을 멘 채 무심히 길을 앞서고, 어깨 짐을 진 사미승은 오랫만에 산을 나섰는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뒤를 따른다.
노스님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걷는 모습은 다소 이색적이지만 키를 넘는 긴 지팡이가 높은 도력을 말해준다.
함께 길을 나선 노스님과 젊은 사미승의 특징적인 모습을 대조적으로 잡아낸 재치 있는 소품이다.
무심하고 담백한 노필의 원숙미로 볼 때 조영석의 나이 50대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老僧歇脚(노승헐각) / 趙榮祏(조영석)]
길을 가던 노스님이 잠시 소나무 등걸에 앉아 다리를 쉬고 있는데,
바랑을 벗어 놓고 노송과 지팡이에 기댄 채 쉬고 있는 모습이 무척 힘들어 보인다.
스님은 법랍이 얼마나 오랬던지 이가 다 빠지고 입과 볼이 움푹 들어가 있지만,
눈빛만은 날카롭고 형형해 노승의 풍모가 살아있다.
조선 스님의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표현한 사실적인 풍속화로 왼편 상단에 '관아재가 그리다'라고 썼다.
[村家女行(촌가여행 : 시골집 여자가 하는 일) / 趙榮祏(조영석)]
초가집 부엌 뒤편 감나무 밑에서 아낙네가 절구질을 한다.
회장도 대지 않은 민저고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맨발에 미투리를 신은 모습이나 빨래줄에 널린 남정네의 저고리로 불 때 민가의 촌부인 듯하다.
[秋日閑猫(추일한묘 : 가을날 한가로운 고양이) / 鄭敾(정선)]
겸재 정선 그림으로는 희귀한 8폭 영모화 중의 한 폭이다.
가을 볕이 따사로운 어느 날. 한 그루 연보라빛 겹국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는 뜨락에 금빛 눈의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멋모르고 날아 내려 앉은 방아깨비의 동작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紅蓼秋蟬(홍로추선 : 여뀌꽃과 매미) / 鄭敾(정선)]
여뀌꽃 한 포기가 무성하게 자라나 마치 벼이삭 같이 생긴 붉은 꽃 타래를 목이 휘도록 줄기줄기 매달고 있는 위에,
가을 매미 한 마리가 깃든 겸재 정선의 草蟲圖(초충도)다.
[瓜田田鷄(과전전계) / 鄭敾(정선)]
한여름 패랭이꽃과 오이 아래 개구리가 넙적 엎드린 모양을 담은
겸재의 또 다른 소품들은 생태 다큐를 찍듯 자연적 일상의 관찰하듯 깊은 내공이 담겨있다.
[西瓜偸鼠(서과투서) / 鄭敾(정선)]
들쥐 한쌍이 큼지막한 청수박을 훔쳐 먹고 있다.
수박 속은 벌써 여러날 들락거린 듯 연분홍 빛으로 곯아 있다.
이제 막 긁어낸 조각들은 선홍빛으로 싱싱하다.
[木覓朝暾(목멱조돈) / 鄭敾(정선)]
목멱산은 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으로 남쪽 산을 뜻하는 순 우리말 '마뫼' 또는 '말미'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도읍 한양을 호위하는 사람의 진산 중에서 남산은 마치 주작이 두 날개를 활짝 펴 남쪽을 가로 막는 모습이다.
그런데 남산은 보는 방향이나 거리에 따라서 그 모습이 달리 보이는데,
이 그림에 보이는 남산의 모습은 한강 하류 양천 현아 방면 즉 지금의 양천구 가양동 방면에서 본 모습이다.
정선이 영조 16년(1740) 겨울 양천현령에 부임하여 5년을 근무하면서 익숙하게 보았던 풍경이다.
[長安烟雨(장안연우 : 서울 장안의 안개비) / 鄭敾(정선)]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한양(장안)을 내려다 본 풍경이다.
연무가 낮게 드리워 산 위에서는 먼 경치가 모두 보이는 그런 날이었던 듯하다.
멀리 남산이 분명하게 보이고, 그 너머로는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의 봉우리들이 아련하게 이어져 있다.
정선이 일생을 살았던 인왕산 아래 동네 부근인 장동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근경에 배치하면서 나머지 부분들은 안개 속에 잠기게 하여 시야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꿈속의 도시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 18세기 후반 한양의 진경이다.
[讀書餘暇(독서여가 : 글 읽다 남은 겨를) / 鄭敾(정선)]
바깥 사랑채에서 독서의 여가에 잠시 더위를 식히며 한가롭게 시상에 잠겨 화리를 탐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사생적인 필치로 그려냈다.
[詩畵換相看(시화환상간 :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다) / 정선 / 보물 1950호]
영천현령으로 발령받은 정선은 단금의 벗인 사천 이병연과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 보자는 굳은 약속을 한다.
그래서 정선은 영천현령 부임 후 이병연의 시찰을 받고 북악산 아래 개울가 노송 아래에서
'시와환상간'의 약속을 하는 정경을 그대로 그려냈다.
정면으로 얼굴을 보이고 앉은 노인이 이병연일 것이고 뒷모습과 옆모습만 보이고 있는 코 높은 노인이 정선일 것이다.
다른 그림에서 정선이라고 생각되는 모습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海山亭(해산정) / 鄭敾(정선)]
고성은 금강산과 동해를 좌우에 두고 있는 대표적 명승 고을인데, 그런 고성의 대표적 명승지가 바로 해산정이다.
원경으로는 금강산 백색 암봉들이 담묵의 서릿발준법으로 아련하게 표현되어 삼엄한 기세를 과시하고
남강 건너편에는 절벽을 이룬 적벽과 그 배후의 토산이 과감한 필법을 보임으로써 몽롱한 분위기의 고성 읍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정선은 해산정에서 바라보는 풍광과 함께 해산정 앞에 즐비한 객사 건물들과
초봄의 연초록빛 숲속에 군데군데 무리저이 있는 마을을 표현했다.
해산이 내포한 음양의 묘리를 남김없이 드러낸 걸작 중의 걸작이다.
[正陽寺(정양사) / 鄭敾(정선)]
정양사는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으로부터 내려오는 금강산의 정맥에 자리한 절이다.
그렇다 보니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명당에 자리한 정양사의 역사와 유래는 매우 오래 되었다.
그런데 정선은 '정양사'에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다 바라다 보이는 시각과는 전혀 무관하게 표현하고 있다.
오직 방광대와 천일대의 토산에 둘러싸여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파묻힌 정양사의 모습만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면서도 우뚝우뚝 솟아난 정양사의 여러 전각들을 陽(양)의 기운으로 표현하며 토산의 숲들과 음양조화를 이루고 있다.
[三釜淵(삼부연) / 鄭敾(정선)]
삼부연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용화동에 있는 폭포다.
겸재 정선의 스승인 김창흡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이곳에 은거해 살기로 결심하고 전 가족을 이끌고 이곳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주역 연구에 몰두하며 진경문화 창달의 방향을 모색했기 때문에 三淵(삼연)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정선에게
삼부연은 단순한 자연절경에 그치지 않고 스승의 학문이 이룩된 역사적인 의미를 지녔다.
정선은 화면 중앙으로 솟아 오른 거대한 돌기둥 모양의 독립 암봉과 그 맞은편 암벽을 특유의 장쾌한 필법으로 강조해 표현했다.
[禾積淵(화적연) / 정선 / 보물 1949호]
화적연은 우리말 볏가리의 한자식 표현으로 三釜淵(삼부연) 폭포 물이 서남쪽으로 흘러
한탄강이 되어 임진강에 합류하기 전에 만든 큰 못이다.
마치 볏단을 쌓아놓은 볏더미 즉 볏가리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나 있고,
물줄기가 이 큰 바위를 휘감아 돌아 떨어지면서 깊은 沼(소)를 만들어 놓았다.
이 화적연은 영평팔경 중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명승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볏가리 주변에도 많은 바위들이 널려 있지만
정선은 이들을 모두 제거하여 볏가리만 돋보이게 하는 집중과 선택의 화면 구도를 사용했다.
[廬山草堂(여산초당) / 정선 / 보물 1953호]
廬山(여산)은 중국 강서성에 있는 명산으로 당나라 시인 낙천 백거이가 초당을 짓고 은거했던 곳이다.
이 그림은 정선이 백낙천의 여산초당 고사를 소재로 하여 그린 것인데,
이 고사를 표현하면서 집의 구조와 형태는 물론 주인공의 모습마저 조선 양식으로 표현했다.
외래 문화의 자기화를 이룩한 정선의 대표작이다.
정선이 진경화풍을 확립하고 그 기법을 정형산수에 응용하는 단계인 70대 중반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朴生淵(박생연) / 鄭敾(정선)]
고려왕조 오백년의 도읍터 개성의 명물인 박연폭포 그림이다.
거대한 암석이 층층이 쌓여서 천길 벼랑을 이룬 절벽 아래로 폭포수가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다.
겸재는 가을 단풍철에 이곳을 찾았던 듯 폭포 좌우의 암벽을 따라 표현된 나무들의 단풍이 절정이다.
선비들이 폭포를 조망하는 주변의 소나무 표현은 정선이 70세 전후해서 그려내던 기품 있는 표현법이라는 점에서
이 그림이 정선이 양천현령에 재직하던 시기인 65세에서 70세 사이에 그려졌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梅月滿庭(매월만정 : 매화와 달이 뜰게 가득하다) / 沈師正(심사정)]
이 묵매는 근엄하지도 않고 단단한 기세도 없으며 꺾이고 뒤틀린 가지와 툭툭 던지듯 찍어낸 꽃들이 있을 뿐이다.
안개를 암시하는 오묘한 담묵의 번짐과 이지러진 달의 모양에서 달밤의 감흥이 아스라이 일어난다.
강직한 志士(지사)의 모습을 닮은 조선중기의 매화 그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명대 오파계 문인화풍을 추구하면서도 강경하고 명징한 조선의 미감을 조화시킨 심사정 그림의 특징이 매화 그림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葡萄已熟(포도이숙 : 포도가 이미 익었다) / 沈師正(심사정)]
포도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던 부친 심정주의 뛰어난 그림 솜씨가 家學(가학)을 통해 심사정에게 전해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포도송이보다 잎이나 넝쿨의 묘사가 더욱 강조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법은 조선시대 포도 그림의 주필묵의 장점을
잘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을 살려내는 데도 적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변화무쌍한 포도 넝쿨의 모습이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불어 넣고 있다.
조선후기 최고의 포도화가로 심사정을 꼽아도 좋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怒應耽雉(노응탐치 : 성난 매가 꿩을 노려보다) / 沈師正(심사정)]
늠름한 매 한 마리가 사냥감을 확인하고 부리를 꽉 다문 채 시선을 사냥감인 꿩에게 고정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른는지 한가로이 먹이를 찾고 있는 장끼의 모습은 마냥 평온하기만 하다.
먹이 사슬의 긴장감 흐르는 광경을 찾고 있는 장끼의 모습은 마냥 평온하기만 하다.
먹이 사슬의 긴장감 흐르는 광경을 안정된 구도와 원숙한 필묵으로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작품이다.
크기는 물론 각각의 세부적인 표현에서도 심사정이 그린 많은 영모화들 가운데 최고의 득의작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魚躍迎日(어약영일 : 물고기가 뛰어 해를 맞이하다) / 심사정]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잉어 한 마리가 몸을 솟구쳐 해를 맞이하고 있다.
수면위를 뛰어오르는 잉어의 모습은 등용문의 고사를 의미하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직이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그림이다.
화보를 참고했지만, 잉어의 수염 하나 비른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려낸 사실적인 표현과 격랑 속에서 기세등등하게 약동하는 잉어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된 심사정의 만년작이다.
[전시장 내부 전경]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 후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서 얼른 한 컷을 담아 보았다.
[玉流洞(옥류동) / 李麟祥(이인상)]
영조대의 문인화가인 능호관 이인상은 대상이 갖춘 모양보다는 대상이 담고 있는 뜻을 옮기는데 충실했던 화가이다.
이인상은 28세 되던 1737년에 금강산을 여행한 뒤 외금강의 절경으로 꼽히는 옥류동과 은선대를 그렸다.
[母狗養子(모구양자 : 어미개가 새끼를 기르다) / 김홍도]
품위 있는 어미개 한 마리가 느긋하게 풀 밭에 배 깔고 앉아서 재롱떠는 강아지 두 마리를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흐뭇한 표정이 얼굴 뿐 아니라 전신에 넘쳐 나는데 철 없는 강아지들은 장난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듯 하다.
[雌雄將雛(자웅장추 : 암수탉이 병아리를 거느리다) / 변상벽]
흑갈색 암탉이 병아리 9마리를 거느리고 풀밭에서 모이를 찾고 있다.
어미 닭이 무슨 벌레 한 마리를 잡아 부리에 물고 꾹꾹 거리며 새끼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모양이다.
새끼들이 어미 곁으로 모여들자 공연히 따라나온 수탉이 덩달아 허세로 풀밭을 헤집고 쪼아대며 더 큰 소리로 꾹꾹 대어
가장의 위세를 과시하려 든다.
병아리 한 마리가 그에 속아 돌아서지만, 곧 허세인 줄 알고 말똥이 바라보고만 있다.
[黃描弄蝶(황묘농접 : 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 / 김홍도]
패랭이꽃이 피어난 것을 보면 초여름이 분명한데
검푸른 긴 꼬리 제비나비 한 마리가 꽃을 찾아 날아들자
이를 발견한 노란 고양이가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놀리고 싶은 심정인 듯 눈동자가 온통 나비에게 쏠려간다.
여차하면 웅켜보려는 자세이나 나르는 나비가 먼저 이를 감지한 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오히려 고양이를 약올리는 것 같다.
[荷花蜻蜓(하화청정 : 연꽃과 고추잠자리) / 김홍도]
홍련 한 송이가 활짝 피어났는데 그 위에서 붉고 푸른 한 쌍의 고추잠자리가 짝짓기를 시도하며 공중잽이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연밥 한 대, 연꽃봉오리가 하나, 연잎 네 대 그리고 수초가 이루어 놓은 연못 풍경에
교미하는 잠자리 한 쌍이 빠졌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용 그림에 눈알을 그리지 않은 것과 같았을 것이다.
[雉戲早春(치희조춘 : 꿩이 이른 봄을 희롱하다) / 金弘道(김홍도)]
매화나무 고목 등걸에서 꽃망울이 터지며 잘 익은 참외 냄새 같은 맑은 향기를 토해 내기 시작한다.
긴 꼬리와 화려한 깃털을 자랑하는 장끼 한 마리가 봄기운을 이기지 못해 얼마나 울어댔던지
까투리 한 마리를 유인해 내어 이곳 매화나무 아래 숲속까지 끌어다 놓았다.
매화향기에 까투리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간 듯 오히려 제 깃을 제가 다듬어 장끼의 환심을 사려 든다.
이제 여유만만해진 장끼는 느긋하게 먼 산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는 척하고 있다.
[鳴淵潭(명연담) / 金弘道(김홍도)]
명연담은 만폭동에서 모아진 내금강 물이 명연폭포가 되어 쏟아지면서 이루어 놓은 연못인데
실꾸리 하나를 다 풀어 넣어도 끝이 닿지 않을 만큼 깊다고 한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담아온 사진이 빛에 반사되어 작품이 많이 훼손된 것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중간 중간 작품명과 글은 옮겨적은 것입니다.
시간을 내어 다시 들려 담아올까 합니다만...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내일은 나머지 작품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출처: http://cho-a47.tistory.com/1454?category=530479 [草阿(초아)의 삶과 문화산책]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삼덕동 374
[馬上聽鶯(마상청앵 :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 / 김홍도 / 보물 1970호]
단원 김홍도는 진경풍속화풍의 대미를 난만하게 장식한 화가로 이 '馬上聽鶯(마생청앵)'이 그런 그림 중의 대표작이다.
신록이 짙어가고, 뭇 꽃들이 피어나는 늦봄.
어느 화창한 날에 젊은 선비가 봄기운을 이기지 못해 문득 말에 올라 봄을 찾아 나섰다가 길가 버드나무 위에 꾀꼬리 한 쌍이 和答(화답)하며
노니는 것에 넋을 빼앗긴 채 말 위에 앉아 바라보는 장면을 사생해 낸 그림이다.
[영상으로 편집한 馬上聽鶯(마상청앵)]
전시회에 가시면 보실 수 있답니다.
말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꼬리를 흔드는 사이 매화 꽃에 앉아있던 꾀꼬리는 하늘향해 훨훨 날으고, 말등 위의 선비는 꽃과 꾀꼬리를 보느라
정신을 놓은 듯한 장면이 화려하게 눈앞에 연출됩니다.
잠시 머물며 변하는 모습을 즐감해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꿈 속의 선비' 이이남 작품은 놓치고 담아오지 못하였습니다.
담아온 작품들도 반사된 빛 때문에 소개할 수 없어서 소개하지 못하고 삭제한 작품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최대한 소개해 드리려 노력하였습니다.
소개한 내용을 글들은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모셔온 글들이거나, 작품 아래에 써놓은 글들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감안하시고 봐주셔요.
[蜀棧圖圈(촉잔도권) / 심사정]
촉은 지금의 四川省(사천성)에 해당되는 지역인데, 사방이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길이 험하고 풍광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시인 李白(이백)은 '촉으로 향하는 길은 하늘을 오르기보다 힘들다'고 말했으며, 당 玄宗(현종)은 피란길에 보았던 그 아름다움을 못 잊어
당대 제일 명화가인 李思訓(이사훈)과 吳道玄(오도현)에게 그려 오게 했다.
[蜀棧圖圈(촉잔도권) / 심사정]
조선 남종화의 대가인 玄齋(현재) 沈師正(심사정)도 촉도를 그렸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험준한 산들은 촉도의 관문을 의미하는데 앞으로 전개될 수많은 奇巖高峰(기암고봉)들의 시작에 불과하다.
워낙 길게 이어지는 그림이라 중간 중간에 각각의 요소로 풍경을 마무리 지으며 다음의 풍경과 구별하여 자칫 지루해 질 수 있는 화면 구성을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있다.
8미터가 넘는 장대한 화면의 끝에는 권말 상단에 '무자년 중추 李唐(이당)의 蜀棧(촉잔)을 방한다.'라는 관서를 남겼다.
심사정이 62세 때인 영조 44년(1768) 8월에 송대의 대화가인 李唐(이당)의 필법에 따라 그렸음을 말하는 내용이다.
[果老倒騎(과로도기 : 장과 노인이 거꾸로 타다) / 김홍도]
당나라 때 신선 張果(장과)가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면서 무슨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신선도이다.
豹菴(표암) 강세황이 그림 상단에 붙인 評語(평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果(과)라는 늙은이 종이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손에는 한 권 책을 들었는데, 눈빛이 글줄 사이로 곧게 쏟아진다.
이는 士能(사능)에게 가장 得意作(득의작)이라 할 수 있으니 중화에서 그것을 구한다 해도 쉽게 얻을 수는 없으리라.
표암이 평한다.
[武夷歸圖(무이귀도 : 무이산으로 노 저어 돌아가다.) / 김홍도 / 보물 1971호]
武夷山(무이산) 계곡을 노 저어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무이산 기암 절벽을 굽이쳐 흐르는 냇물의 물살이 사납다.
사공은 돛을 내려 속도를 조절하고, 앞에 있는 사공은 장대로 계곡을 밀면서 배가 부딪치지 않도록 방향을 잡는다.
총각머리 아이들은 갑판을 움겨쥐고 굳은 자세로 앉아 두려움에 질려있다.
그러나 도포에 복건 쓴 뜸집 앞의 朱子(주자)는 미동의 기색도 없이 태연히 절경을 감상하고 있다.
武夷山(무이산)은 중국의 福建省(복건성)에 있는 명산으로 36峰(봉)과 37巖(암)의 기암절벽이 빼어나게 솟고 굽이쳐 흐르는 아홉 구비의 계곡이 특히 유명하여 '武夷九曲(무이구곡)'이라는 이름을 얻은 복건 제일의 명승이다.
[西湖放鶴(서호방학 : 서호에서 두루미를 풀어놓다) / 김홍도]
이 그림의 주인공인 북송의 임포(967~1028)는 서호의 고산에 오두막을 짓고 은거한 뒤
20년간이나 市井(시정)에는 발길 한번 주지 않았는데, 오직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서호의 산사를 유람할 뿐이었다.
매화가 탐스럽게 피어난 초가집 마당에서 임포가 막 학을 날리고 있다.
안개 자욱한 깊은 골짜기를 건넌 백학은 흰 매화 곁을 지나 푸른 하늘로 솟아오른다.
화면을 거의 공백으로 남겨 詩情(시정)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김홍도의 후기 화풍이 잘 나타나있다.
화제는 '西湖放鶴(서호방학)'이고 관서는 丹邱(단구)이다.
[五柳歸庄(오류귀장) / 김홍도]
五柳先生(오류선생)이 시골집으로 돌아온다는 隱居(은거)의 이야기를 화제로 삼았다.
오류선생은 '歸去來辭(귀거래사)'의 명문으로 유명한 陶淵明(도연명)의 호이다.
집 주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오류선생이라 자호하였다.
흔히 도연명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연명은 字(자)이고 潛(잠)이 본명이며, 挺節先生(정절선생)이라 존칭되기도 한다.
[仙童煎藥(선동전약 : 선동이 약을 달이다.) / 李寅文(이인문)]
더벅머리를 하고 복스럽게 생긴 미소년이 차 끓이는 화로 옆에 쭈그려 앉아서 부채로 숯불을 일궈내고 있다.
다로 위에는 차 주전자가 있고 仙經(선경)이라 생각되는 두루마리 뭉치가 놓여 있으며
두 뿔이 장대한 숫사슴 한 마리가 무릎 꿇고 앉아서 차 달이는 장면을 무심히 바라본다.
소나무 뒤에서는 폭포가 떨어지고 있으며 그 곁으로는 절벽이 병풍처럼 가로막았다.
장송의 큰 둥치 아래에는 연자빛 영지가 무더기로 돋아나 있어 신선세계임을 암시한다.
글은 다음과 같다.
'너와 사슴이 다 함께 잠들면, 약 달이는 불길이 시간을 넘기라'
[牧羊吹簫(목양취소 : 양 치며 단소 불다) / 李寅文(이인문)]
간재 홍의영이 쓴 관서에는 '네가 바로 황초평의 후신이 아닌가'라 하였다.
황초평은 15세의 양치기 소년이었는데 금화산에서 신선도를 닦아 40년이 지나도 여전히 15세 때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소년은 바위에 걸터 앉아 웃통을 벗어 붙인 천연스런 모습으로 단소를 불고 소를 끌고 나온 또 다른 소년은 낚싯대를 드리웠다.
이 장면은 당시 흔히 보이는 전원풍경을 담아낸 듯 하여 신선도라기보다는 오히려 풍속화에 가깝다.
도석인물화 소재를 주변 일상 풍광에 걸맞게 표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이 진경시대의 문화 분위기이다.
[山村雪霽(산촌설제 : 산촌에 눈 개다) / 李寅文(이인문)]
김홍도와 동갑으로 절친하게 지냈던 화원화가 이인문이 눈이 막 그친 산골 마을의 정경을 그렸다.
눈이 그친 후 스산함이 감도는 겨울철 산촌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화면 우측 구석에 나귀 탄 선비와 뒤를 따르는 동자를 숨기듯 그려 넣어 시정을 고조시켰다.
화면 상단에 쓴 시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초당즉사'에서 한 구절을 옮겨 온 것이다.
'황량한 마을 동짓달, 한 그루 나무 서 있는 곳이 이 늙은이의 집이로다'
[山村雨餘(산촌우여 : 산촌에 비 그치다) / 李寅文(이인문)]
산과 숲에 둘러싸인 마을에 비가 내리고 난 후의 정경이다.
물기를 머금은 나무와 수풀의 묘사, 습한 대기의 느낌까지 잡아낸 능숙한 선염,
아스라한 원경에 대비시킨 근경의 나무 묘사에서 화가의 탄탄한 기량을 볼 수 있다.
나귀 탄 선비와 동자를 그렸는데 작은 크기에도 그 동작과 형상을 정확히 묘사하였다.
김홍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솜씨이다.
기원 유한지가 원나라 문인 담소가 지은 시의 일부를 옮겨 놓았다.
'초옥에 비 남으니 구름기운 깊어가고, 문 열자 좋은 산 많은 것이 싫지 않구나'
[秋收打作(추수타작 : 가을걷이 타작) / 金得臣(김득신)]
느티나무 잎에 갈물이 들어가는 가을 벼 타작 소리가 요란하다.
큰 통나무를 뉘어놓고 볏단을 내리치는데 이미 쌓인 낟알이 몇 섬은 된다.
낟알들을 쓸어 모으는 손길도 분주하고 그 중 한 구석으로 날아온 것을 쪼아 먹는 닭들도 있다.
긴 지팡이를 짚고 선 中老(중노)의 한 선비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농부들의 모습이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머리모양만 보더라도 맨상투, 댕기머리, 끈으로 묶은 머리, 고깔머리, 삿갓 등 참으로 다양하다.
[春山歸牛(춘산귀우 : 봄 산에 소 몰고 돌아가다.) / 金得臣(김득신)]
두 마리의 소와 주인들이 땔감을 만들어 새날 도성 안의 땔감 파는 상점에 팔고 높은 고개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니다.
소의 뿔을 굽히거나 곧게 뻗게하거나 사람은 삿갓을 씌우기도 하는 등 변화를 주었으며 소 엉덩이에 붙은 거름덩어리까지 놓지지 않았다.
[盛夏織屨(성하직구 : 한여름의 짚신삼기) / 김득신]
한 여름 늦더위 속에 농가에서 祖子孫(조자손 :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모여서 짚신을 삼고 있는 정경이다.
짚신 삼는 장년 남자나 이를 훈수 두며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 모두 웃통을 벗고 홑잠뱅이만 걸친채 정강이와 허벅지를 있는 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더운 날씨인 듯하다.
곁에서 지켜보고 앉아있는 비쩍 마른 검정개도 혀를 빼어 물고 헉헉대고 있다.
이렇게 더운 날씨지만 일손을 놓을 수 없는게 농촌 살림이라 논일하기에는 너무 뜨거운 오후 시간에
틈을 내어 짚신삼기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모양이다.
노인의 등 뒤에는 키가 겨우 할아버지 앉은 키 만큼도 못 자란 어린 손자가 어깨에 손을 얹고 서서 역시 호기심 어린 눈매로 제 아비
짚신 삼는 행동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다.
삼대가 단란하게 모여 앉아 짚신 삼는 한때를 화폭에 올린 그림이다.
[野猫盜雛(야묘도추 : 들고양이 병아리를 훔치다) / 김득신]
어느 화창한 봄날 갑작스러운 소동이 일어났다.
검은 도둑고양이가 어미 닭과 함께 놀고 있던 병아리 한 마리를 물고 달아나고 있다.
이를 본 어미 닭은 날개를 퍼덕이며 고양이를 쫓아 가고, 다른 병아리들은 정신없이 도망가고 있다.
깜짝 놀란 주인은 "이놈 게 섰거라."하며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고요했던 오후의 정적을 깨뜨리는 봄날의 소동을 재미있게 그렸다.
[月下情人(월화정인) / 申潤福(신윤복)]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3대 풍속화가로 알려진 신윤복은 그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작품들의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일부 작품에 기록된 刊記(간기)를 통해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될 정도였다.
눈썹달이 침침하게 내리 비치고 있는 야밤중에 등불을 비춰 든 선비 차림의 젊은이가 쓰개치마를 둘러 쓴 여인과 담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이들이 어떤 사이이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호젓한 곳에서 남의 눈을 피하여 은밀히 만나야 하는 사람들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美人圖(미인도) / 申潤福(신윤복)]
옷주름과 노리개를 두 손으로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듯한 젊은 미인의 서 있는 모습을 약간 비껴선 위치에서 포착해 그린 것이다.
조선 후기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와 순정이 신윤복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고운 색감, 정확한 묘사에 의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당시의 사치풍조를 대변해주는 큰 트레머리는 맑고 앳된 얼굴과 가냘프게 생긴 목과 어깨를 더욱 단아한 느낌이 들게 하며,
짧은 소매와 좁은 저고리는 부푼 치마폭과 대비효과를 이루면서 당시 여성한복의 유형을 보여준다.
[世外仙香(세외선향 : 세상 밖의 신선 향기) / 金正喜(김정희)]
芝草(지초)와 난초가 함께 향기를 토해내는 '지란병분도' 형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난초는 한 꽃대에 꽃이 무려 5~6송이나 달려있으니 한 꽃대에 많을 꽃을 단다는 蕙草(혜초)이다.
'세외선향'이라는 제사의 글씨는 소위 西京(서경) 古法(고법)이라는 전한시대 古隸(고예) 기운이 짙은 추사체다.
서툰 듯 꾸밈없는 글씨가 탈속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墨蘭(묵란) / 李昰應(이하응)]
흥선대원군이란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石坡(석파) 李昰應(이하응)의 난초 그림이다.
대원군이라는 왕실 출신의 신분적 배경과 19세기 후반 격동의 시대에 펼쳤던 정치적 이력으로 인해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강했던 이하응은 타고난 예술가이기도 하다.
사군자 그림에서 탁월한 빛을 발했는데,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로부터 난초 그림에서 만큼은 최고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묵란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합니다.
[蘭以秋芳(난이추방 : 난이 가을을 맞아 더욱 향기롭다) / 李昰應(이하응)]
이 화첩은 이하응 30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구도나 형식이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蘭盟帖(난맹첩)'과 비슷하다.
오른편 상단으로 벋은 긴 난엽이 여름의 왕성한 기운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여름 동안 성장한 이후 가을을 맞이하여 깊은 향기를 피워내고 있는 듯 화면 상단에 '난이 가을을 맞아 더욱 향기롭다'
'蘭以秋芳(난이추방)'라는 제사를 적었다.
인장은 '石坡(석파)'이다.
[童子洗桐(동자세동 : 동자가 오동나무를 씻다) / 張承業(장승업)]
원나라 문인화가 예찬의 일화를 그린 고사인물도이다.
집에 찾아온 손님이 뱉은 침이 오동나무에 묻자 손님이 돌아간 후오동나무를 깨끗하게 씻도록 했다는 일화이다.
동자는 탁자를 딛고 올라 오동나무를 닦다가 예찬을 바라보고 예찬은 편상에 걸터앉아 이를 지켜보고 있다.
상상도이기는 하지만 갸름한 몸집과 강팍한 얼굴에서 예찬의 기벽한 성품이 보이고 판상에 놓인 책과 서화 두루마리, 다관은 예찬의 일상생활 모습을 말해준다.
[松溪閑談(송계한담 : 시냇가 솔밭에서 한담을 나누다) / 金秀哲(한수철)]
솔숲 우거진 시냇가 언덕 위에 선비들 다섯이 모여 있다.
북산 김수철이 철종 10년(1859) 기미에 석관전사에서 그렸다고 하니 지금의 강북구 석관동 주변의 풍광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간결한 구도와 소박한 필치, 산뜻한 색채 감각으로 요약되는 김수철의 회화적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江湖閒居(강호한거 : 강과 호수에 한가로이 살다) / 李漢喆(이한철)]
추사 김정희의 지도하에 남종문인화풍을 잘 소화한 화원화가 이한철의 산수화이다.
한 칸 초가집에 큰 창 하나가 언덕에 반쯤 가렸는데 방안에는 선비가 앉아 있다.
왼쪽 사립문 밖 마당으로 지팡이를 짚은 선비가 시동을 데리고 초가집을 향해 걸어온다.
매화 꽃 향기를 같이 즐기기 위해 선비가 친구 집을 방문하는 정경일 듯하다.
집과 사람과 산과 물의 조화가 안정되어 강촌 모옥의 소슬한 운치가 있다. '喜園(희원)'이라 관서하였다.
[石林江亭(석림강정 : 돌이 수풀을 이룬 강가 정자) / 田琦(전기)]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웠던 中人(중인) 출신의 화가 古藍(고람) 전기가 원나라 화가 倪瓚(예찬, 1301~1374)의 '소림모정' 풍 그림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를 지녔던 고람은 사대부 문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그윽한 정취와 고풍스런 아취를 표현한 산수화에서
이미 젊은 나이에 수준급 실력을 발휘했다.
전기는 이 그림에서 스승 추사의 '세한도'에 보이는 절제된 감성을 토대로 사의성 짙은 품격과 함께 적막하고 고아한 느낌을 잘 표혔했다.
[片舟滌署(편주척서 : 조각배가 더위를 씻다) / 許維(허유) ]
조각배 한 척이 사공 하나를 태우고 유유히 떠간다.
비개인 여름날 강바람 시원한 강가의 정취를 묵법 위주로 그려낸 남종문인화풍의 그림이다.
여백을 경물보다 더 많이 하여 드넓은 물가의 풍정을 실감할 수 있다.
작은 그림 안에 경물은 최소한으로 표현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더 많이 드러내는 이런 그림이 추사일파의 문인화가가 추구한 경지였다.
허유는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옛법에도 있지 않고, 내 손에도 있지 않고, 또한 옛법과 내 손 밖에도 있지 않다.'
인장은 '小癡(소치)'이다.
[觀梅馴鶴(관매순학 : 매화를 감상하고 학을 길들이다) / 安中植(안중식)]
'화정선생이 매화를 감상하고 학을 길들이는 그림'이라는 제목을 써넣었다.
화정 임포는 항주 서호의 고산에 오두막을 짓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은거한 선비이다.
임포가 매화를 감상하는데 지나가던 학이 걸음을 멈춘 채 임포를 돌아보고 운다.
동자가 술 주전자를 들고 侍奉(시봉)하고 있는 것을 보면 梅花飮(매화음)을 차려 나온 모양이다.
'1915(을묘년) 2월 상순, 심전 안중식 그리다'라는 관서가 있다.
[携妓東山(휴기동산 : 기녀를 데리고 동산에 오르다) / 趙錫晉(조석진)]
스승 장승업이 그랬듯이 중국 고사인물도를 즐겨 그렸다.
그림의 주인공인 謝安(사안, 320~385)은 동진 사람으로 회계의 동산에 은거하며 왕희지, 허후, 지둔과 교유하며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낚시와 산수유람으로 소일했는데 아량이 넓고 바른 생활을 하면서도 매번 유람할 때에는 기녀들과 함께 했다고 한다.
그림은 비파와 거문고를 든 두 명의 기녀와 함께 동산에 오르는 사안을 그린것이다.
중국화보 '詩中畵(시중화)'를 참고하여 그린 것이다.
[松管湛樂(송관담락 : 조송설과 관도승이 풍류를 즐기다) / 趙錫晉(조석진)]
원나라 서화가 부부인 송설 조맹부와 곤도승의 모습을 그림으로 옮겨놓았다.
조맹부는 송나라 종실로 시서화에 능한 통유였고 부인인 관도승은 묵죽과 매란을 잘 그렸다고 한다.
특히 새로 돋아난 대나무를 그리는 것은 관도승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림에서 관도승은 대나무를 그리고 있고 그 뒤에서 남편인 조맹부가 이를 쳐다보고 있다.
남종화풍의 그림이 그려진 삽병과 종려나무, 태호석, 국화는 이 부부의 풍류를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艁山樓觴月(조산루상월 : 조산루에서 달과 마시다) / 劉淑(유숙)]
1870년에 우선 이상적인 옛 거처인 조산루에서 문인 일곱 명과 이상적의 아들 이용림이 달 구경하고 술 마시고 시를 짓고 했던 모임을 화원화가 유숙이 그렸다.
하지만 그림에서는 조산루도 보이지 않고 이들이 입고 있는 옷, 쌍상투 튼 시동 모습 또한 우리 것이 아니다.
모임은 실제 있었지만 그림은 오래 전 중국에서부터 내려온 서원아집도, 죽림칠현도 등의 특징을 가졌다.
그래서 그런지 세 그루의 소나무 옆에 대밭이 있다.
인원은 모두 여덟 명으로 이 날 모임에 참석한 숫자와 같다.
고종대 중인들 모임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두루마리이다.
[風雨竹(풍우죽 : 비바람 맞은 대) / 閔泳翊(민영익)]
화면 중단에 바위를 배치하고 그 주변에 대나무를 그려 넣은 죽석도이다.
바위는 갈필과 윤필, 담묵과 농묵을 적절히 섞어가며 입체감과 질량감을 살렸다.
그 상하로 줄기 몇 개를 담묵으로 그려 넣고 짙은 먹으로 댓잎을 베풀어 놓았다.
바바람에 쏠린 댓잎은 지면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군자의 기백은 살아있지만, 모진 세파를 만나 시달리는 대나무를 통해
이국땅에서 망명객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와 회한을 표현한 듯하다.
[露根墨蘭(노근묵란 : 뿌리가 드러난 난) / 민영익]
혼란과 격동의 시기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민영익은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로 20세 무렵 민씨세도의 중심에 섰으며,
갑신정변(1884)때는 개혁파의 공격을 받아 전신에 자상을 입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위기도 겪었다.
회복한 후에도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속에서 홍콩과 상해를 전전하다가 결국 상해로 망명하여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영욕 교차하는 정치가로서의 삶과는 달리 예술가로서의 삶은 찬연했다 그중에서도 묵란화에 쏟은 애정은 남달랐다 한다.
[石蘭(석란 : 돌과 난) / 金應元(김응원)]
김응원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영향을 받아 난 그림으로 명성이 높았던 화가이다.
이 '石蘭(석란)'에서도 이하응의 자취가 비쳐진다.
군자의 고고한 기상을 느끼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심산유곡의 그윽한 정취를 담아 내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다.
필치가 가볍고 기교가 다소 과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근대기 최고의 묵란화가라는 명성에 걸맞는 대작이다.
거의 담아 온듯 하지만, 빠진 작품과 담아왔지만, 빛에 반사되어 작품이 많이 훼손된 것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작품명과 작품해석을 최대한 담아 함께 소개하려 하였지만, 제 실력이 부족하여 작품명과 작품해석을 못하고 올린 작품도 많습니다.
나중에라도 알게되면 수정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무리 잘 설명하고 자세히 담아왔다 한들 白聞不如一見(백문불여일견)이란 고사처럼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만 못하겠지만, 들리시지 못하시는 이웃님이시라면, 제가 올린 포스팅으로 대리만족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http://cho-a47.tistory.com/1455?category=530479 [草阿(초아)의 삶과 문화산책]
휘파람(이승용) 조회 586 추천 0
출처 - 네이버포스트 감성문화 산책 시리즈
작성자 - 분당친구
지금 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 전시회에는 중국에서 참여한 "고소번화도" 와 " 청명상하도 "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랑스러운 그림들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바로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 화첩과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화첩이다.
이 두 화첩을 비교 · 감상할 수 있도록 아래에 실어 본다.
■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 - - 보물 527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진 이 풍속도 화첩은, 그림책 형태의 풍속화 25점으로 꾸며져 있다.
이 풍속화들은 활기차게 돌아가는 서민들 일상생활의 사실성과 사회성을 주제로 하였으므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종이에 먹과 옅은 채색을 하여 그려진 이 풍속화의 크기는 가로 22.4 cm , 세로 26.6 cm 정도인데「씨름」,「대장간」,「글방」등과 같이 서민 사회의 일상 생활 모습과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이 구수하고도 익살스럽게 표현된 그림들이다.
풍속화의 대부분은 주변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그렸는데, 특히 인물은 웃음을 띤 둥근 얼굴을 많이 그려 익살스러움을 한층 더하였다.
선이 굵고 힘찬 붓질과 짜임새 있는 구도는 화면에 생동감이 넘치게 하는 한편, 서민들의 생활 감정과 한국적인 웃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 무 동(舞 童)」
「 씨 름 」
「 길 쌈」
「 편자박이 」
「 주 막 」
「 기와이기 」
「 고기잡이 」
「 점 심 」
「 우 물 가 」
「 활 쏘 기 」
「 자리짜기 」
「 서 당 」
「 점 괘 」
「 행 상 」
「 빨 래 터 」
「 고누놀이 」
「 벼 타 작 」
「 논 갈 이 」
「 서화 감상 」
「 담배 썰기 」
「 나 룻 배 」
「 장 터 길 」
「 대 장 간 」
「 장가 가는 날 」
「 노상 과안 」
■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 - - 국보 135호 /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후기 화가인 혜원 신윤복(1758 ~ ?)이 그린 풍속도 30 여 점이 실려 있는 화첩으로, 각 그림의 크기는 가로 28 cm, 세로 35 cm 정도이다. 이 화첩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들여, 새로 틀을 짜고 오세창 선생이 발문을 썼다.
미술 작품으로서 뿐만 아니라 18 세기 말 당시 사회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그림으로서, 당시 생활사와 복식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화첩은 주로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 간의 애정과 낭만, 양반 사회의 풍류를 다루었는데, 가늘고 섬세한 부드러운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가 세련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등장 인물들을 갸름한 얼굴에 눈꼬리가 올라가게 표현함으로써 다소 선정적인 느낌이 들며, 인물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주위의 배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이 점은 김홍도와의 차이점이다.
대부분의 작품에 짤막한 글과 낙관이 있으나, 연대를 밝히지 않아 화풍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없어 아쉽다.
「 청금상련(廳琴賞蓮)」 또는 연당야유(蓮塘野遊)
「 기방무사(妓房無事)」
「 춘(청)루소일(春(靑)樓逍日)」
「 월하정인(月下情人)」
「 월야밀회(月夜密會)」
「 춘색(의)만원(春色(意)滿園)」
「 소년전홍(少年剪紅)」
「 주유청강(舟遊淸江)」
「 연소답청(年少踏靑)」
「 상춘야흥(賞春夜興)」
「 노상탁발(路上托鉢)」
「 납량만흥(納凉漫興)」
「 수(림)하투호(樹(林)下投壺)」
「 무녀신무(巫女神舞)」
「 주사거배(酒肆擧盃)」
「 쌍검대무(雙劍對舞)」
「 휴기답풍(携妓踏楓)」
「 쌍륙삼매(雙六三昧)」
「 문종심사(聞鐘尋寺)」
「 노중상봉(路中相逢)」
「 계변가화(溪邊街話)」
「 정변야화(井邊夜話)」
「 삼추가연(三秋佳緣)」
「 표모봉욕(漂母逢辱)」
「 야금모행(夜禁冒行)」
「 유곽쟁웅(遊廓爭雄)」
「 니승영기(尼僧迎妓)」
「 단오풍정(端午風情)」
「 홍루대주(紅樓待酒)」
「 리부탐춘(嫠婦眈春)」 리부는 과부를 말한다.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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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이 사랑한 그림 (10)
2. 강호에 뜻을 둔 사람들
화가들이 사랑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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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뜻을 둔 사람들>
살다가 잠시 멈춰서야 할 때가 있다. 바삐 가던 걸음을 멈추어 서서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봐야 할 때가 있다. 그래야 다시 먼 길을 걸어 갈 힘이 생긴다. 오래 걷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러하다. 설령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멈춰 서 있더라도 잠시 동안만이라도 자신을 돌아보자. 아직 더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지 않은가. 나보다 앞서 걸었던 사람들은 언제,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는 지 그림 속에서 찾아본다. 멈추어 섰다 해서 맥없이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세월을 낚아 올리는 어부>
강호(江湖).
이 단어를 들으면 얼마나 마음이 설레인가. 강호라는 단어를 그대로 풀면 강과 호수이다. 그러나 단순히 강과 호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강과 호수는 바로 물을 상징한다. 물론 또랑과 우물과 계곡물도 있지만 이 물은 강과 호수라는 큰 카테고리에 흡수될 수 있다. 강줄기를 따라 옹기종기 마을이 생긴다. 물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강은, 대지 위를 흐르는 강을 차지하기 위한 사람들의 투쟁으로 얼룩져 있다. 삼국 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피 터지게 싸웠던 것도 물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호는 ‘세상’을 의미하고 역사를 의미한다. 강호는 바로 사람살이다.
그런데 우리가 ‘강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마음이 설레이는 것은 단순히 밭에 물을 대주는 젖줄이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시인 묵객들과 은둔자들이 찾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시인 묵객이야 소위 ‘필(feel)'을 받기 위해 강호를 찾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은둔자들이 찾는 것은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사람이 바로 낚시질하는 사람이다.
이경윤, <낚시꾼>, 10폭화첩 중 하나, 비단에 수묵, 31.1×24.8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이경윤(李慶胤:1545-1611)이 그린 <낚시꾼>(도1)은 강호에서 은둔하고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림을 살펴보자. 버드나무잎이 시퍼런 기운을 바람 속에 내뿜는 날, 한 어부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삿갓을 쓰고 깨끗한 옷을 입은 그는 이끼 낀 바위에 앉아 있다. 너무나 세련되고 말끔한 그의 모습에서 먹고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찌들린 어부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진짜 어부가 아니라 ‘무늬만 어부’인 가짜 어부 즉 ‘가어옹(假漁翁)’이다.
가어옹의 시조격인 사람이 강태공(姜太公)이다. 우리가 한가롭게 노는 한량을 흔히 ‘강태공 같다’고 한다. 원래 강태공은 한대(漢代)에 쓰여진 사마천(司馬遷:145-86 B.C)의 『사기』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여상(呂尙)이었다. 어느 날 주나라의 문왕이 꿈을 꾸었는데 왕의 아버지인 태공이 나타나서 현자(賢子)를 만날 것을 예언한다. 문왕은 사냥하러 나갔다가 위강(渭江)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여상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아버지가 예언한 현자임을 알아보고 스승으로 모셨다. 그리고 여상의 이름을 ‘아버지 태공(太公)이 바라는(望) 사람’이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 지었다. 태공망은 태공의 바램대로 문왕과 후대의 무왕을 도와서 주나라를 키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자는 흔히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한다. 내가 비록 지금은 별볼일없는 처지에 있지만 알고 보면 가슴 속에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어쩌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시대를 잘못 만나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재야인사에게 강태공의 이야기는 얼마나 큰 위안이고 간절한 바램인가.
강태공 설화는 아직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한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문왕같이 자신을 알아주는 ‘눈 밝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준다. 벼슬에서 내침을 당한 사람에게는 강태공처럼 낚시질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면 언젠가는 또 다시 자신의 시대가 찾아올 것이라는 가능성을 준다. 이래저래 강태공은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의 우상이고 멘토였다.
강태공의 이야기는 바람 따라 전설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아 시대를 초월하여 수많은 시인과 화가의 모델로 거듭났다. 현세에서 입신출세를 최고의 목표로 하는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강태공의 이야기는 가장 솔깃한 인생역전 드라마였다. 이렇게 가어옹들이 낚시 바늘 없는 낚시질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굳이 물고기를 잡지 않아도 밥을 굶지 않은 경제적인 여건 즉 토지사유제에서 가능하였고 동기가 주로 '당쟁하의 도피’였다.
조영석, <강상조어도>, 78.5× 49cm, 비단에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이경윤의 <낚시꾼>과 동일 인물을 그렸지만 훨씬 더 강태공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포착한 작품으로 조영석의 <강상조어도>(2)를 들 수 있다. 수초가 무성한 날, 강태공은 나룻배를 타고 강으로 나왔다. 바람은 잔잔하여 낚시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왼쪽 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팔을 턱하니 걸치고 앉은 그의 모습은 낚시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혹은 어떤 자세로 앉아 있더라도 월척을 할 수 있는 낚시의 달인으로 보인다. 물론 작가는 강태공이 문왕을 만났던 강가의 언덕 즉 조대(釣臺)를 그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대는 강태공을 주인공 삼아 그리는 작가들에게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되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갖출 것은 갖추되 작가의 개성이 느껴지는 그림. 그것이 바로 같은 주제, 다른 작가의 그림이다. 화가들은 때때로 자연을 통해 받은 감동을 붓으로 풀어내기도 하지만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사건이 자신의 인생관이나 지향점에 가 닿아 있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똑같은 낚시꾼이지만>
강호는 넓고 넓다. 낚시질하는 사람이 어찌 강태공 한 사람 뿐이었겠는가. 여기 강태공 만큼 매력적인 가어옹이 또 한사람 있다. 그가 바로 엄광(嚴光)이라는 사람이다. 자(字)가 자릉(子陵)인 엄광은 『후한서』에 등장하는데 동한(東漢) 사람으로 양가죽 옷을 걸치고 연못에서 낚시질하며 유유자적한 사람이었다.
그냥 그렇게 살다 갔더라면 이야기가 심심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도 사건이 생겼다. 어릴 적에 함께 공부했던 광무가 황제가 된 것이다. 절친한 친구가 황제가 됐으니 얼굴만 들이밀어도 한자리를 얻을 판에 그는 이름을 바꾸고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광무황제는 권력에 초연한 엄광을 애타게 찾았다. 그러나 엄광은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부춘산에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원나라 말기의 남종화의 대가 황공망이 <부춘산거도>를 그린 것도 엄광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엄광이야말로 진짜 강호의 사나이고 은둔자라고 할 수 있다.
김홍도,<동강조어>, 종이에 담채, 52.6×111.9cm, 간송미술관
김홍도의 <동강조어(東江釣魚)>(도3)는 진짜 은둔자인 엄광에 대한 찬탄이다. 그림은 상단에 강으로 흘러드는 계곡물과 나무 몇 그루만을 배치하고 중단을 넓은 수면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하단 왼쪽 끄트머리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엄광이 앉아 있다. 이쪽으로 건너오려거든 세상사 복잡한 이야기는 모두 넓은 강물에 빠뜨리고 오라는 듯 그림에서 화면의 중심은 강물이다.
그림의 제목을 <동강조어>라 한 것은 엄광이 은거하며 낚시하던 곳이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의 엄뢰(嚴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강수조(桐江垂釣)’, 또는 ‘동강조어(桐江釣魚)’,‘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시와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김홍도가 ‘동강(桐江)’을 ‘동강(東江)’으로 표기한 것은 동음(同音)에서 온 착오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멋진 엄광을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새털처럼 많은데 세상을 포기하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강태공이 유가적이라면 엄광은 도가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어부도는 강태공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엄광은 뒷전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유주의적이고 반예교주의적인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조선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현세적이고 도학적인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에게 정치에 무관심하고 현실에서 벗어난 죽림칠현이 관심밖이었던 것이다. 강호에 은둔한 사람을 존경하되 뭔가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부와 나무꾼의 문답>
강호는 역시 넓고 넓다. 넓은 강호에서 만날 수 있는 은둔자가 많듯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다양하게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어부가 나무꾼을 만났다. 이명욱의 <어초문답도>(4)는 어부와 나무꾼의 만남이 이보다 더 생생하게 표현될 수 없을 만큼 잘 그려져 있다. 무성한 갈대를 배경으로 물고기와 낚싯대를 든 어부와 허리춤에 도끼를 꿰찬 나뭇꾼이 뭔가 지금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거침없는 옷주름 표현이 이들의 이야기만큼이나 살아 있다.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을 효율적으로 배치한 능숙한 솜씨나 강한 대각선 운동을 형성한 변화 있는 포치 등은 인물들의 밝은 표정과 더불어 그림에 생동감을 충만케 한다.
이명욱, <어초문답도>, 17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172.7×94.2cm, 간송미술관
물론 이들도 ‘가어옹’에 ‘가초옹(假樵翁)’이 맞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진짜 어부에 나뭇꾼인 듯한 현장감과 생생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전적으로, 숙종이 특별히 아꼈다는 화원 이명욱의 솜씨일 것이다. 이명욱은 역시 화원을 지낸 한시각의 사위였다. 집안에서 장인과 사위가 함께 화원일 정도로 집안 전체가 그림 그리는 사람들 투성이었으니 이 정도의 그림이 나올 법도 하다.
아무튼 <어초문답도>에서 은둔자의 모습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대화였기에 이렇게 신나게 웃고 가는 걸까. 여기서도 역시 그들의 대화는 ‘세속 영리와의 절연’이지 세속 그 자체와의 절연은 아니다. 강호라 하더라도 영원히 떠나 가서 살아야 할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정선, <어초문답>, 비단에 채색, 33.0×23.5cm, 간송미술관
정선이 그린 <어초문답>(도5)은 어부와 나무꾼의 대화가 자신들의 신변잡기를 떠나 ‘시대’라는 거대 담론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 중간에 ‘어초문답(漁樵問答)'이라고 써 놓은 화제(畵題)처럼 이 작품은 나뭇짐을 가득 담은 지게와 어부의 곁에 있는 낚싯대와 광주리가 이들의 신분을 암시해준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곁으로 계곡물이 콸콸 흐르고 있다. 잎이 무성한 고목과 푸르스름한 빛이 느껴지도록 엷게 물들인 땅은 이들의 대화가 그들이 살고 있는 조선이라는 시대와 공간을 주제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여름의 싱싱함만큼이나 열정적인 대화와 고민이 있었기에 조선은 이 시기에 가장 조선적인 문화를 일구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초문답도>가 병자호란을 겪고 난 17세가 중반에서 18세기에 많이 그려지는 것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명욱과 정선의 두 작품은 물론이고, 전 홍득구의 <어초문답도>, 국립박물관 소장의 작가미상의 <어초문답도>, 이인상의 <어초문답도>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탄생했다. 설령 강호에 은거하고 있다해도 은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과 절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뻐꾸기 은사>
사정이야 어떻든 강호는 강호다. 언제든 지 돌아가서 쉬고 싶은 곳이다. 잠시든 장시간이든 사람에게 쉬는 시간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지식인들이 강호를 ‘도의를 기뻐하고 심성을 기르는 곳’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율곡 이이(1536-1584)는, 선비가 조정에 서지 않은 것은 네 가지 이유에 의해서라고 했다. 그 중에서 ‘스스로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어 집안을 평안히 돌아보고, 스스로 배움이 부족하다 여기어 정숙함을 구하는 것에 익숙하여 자신과 분수를 헤아리고서 감히 벼슬에 나가지 않는 자를 염퇴지사(恬退之士)’라 했다. 반대로 ‘속마음을 감추고 어부나 나무꾼처럼 산수에서 꾸며 살며 헛된 명예를 추구하면서 겉으로는 사양하는 척하고, 내심으로는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넘볼 뿐 아니라 외모는 담담한 척 꾸미나 속은 몸달아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도명지사(盜明之士)'라 일컬었다. 선비의 귀거래가 ‘염퇴’로 인식되는 것은 큰 명예였지만, ‘도명’으로 여겨지면 크나큰 불명예였다. 이것은 모두 명예를 추구하는 속성을 가진 지식인들이 때때로 강호를 자신의 ‘청명(淸名)’을 얻는 방편으로 이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17세기 후반에 주자학적 지식인들의 귀거래 풍조의 위선적인 면을 비난하여 ‘뻐꾸기 은사(隱士)’라고 불렀다. 꼬마들이 술래잡기를 하다가 찾는 아이가 오랫동안 자신을 찾지 못하면 마침내 ‘뻐꾹’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를 들은 술래는 숨어 있는 자기에게 빨리 오라는 뜻이다. 그와 같이, 말로는 은둔의 아름다움에 빠져 산다고 하는 지식인이 사실은 세상이 자기를 몰라줄까 봐 저어하면서 술책을 쓰는 것이 마치 스스로 ‘뻐꾹’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보리밭에 핀 깜부기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강호는 특별한 곳에 자리잡은 별경(別景)이 아니라 선비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상징적이고 내면적인 공간이다. 선비의 내면 속에 강태공도 들어 있고 엄광도 들어 있다. 강호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염퇴지사일 수도 있고 도명지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은 그들이 상정한 강호가 설령 몇 시간만에 돌아올 명상 속의 내면세계라 해도 강호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도 그들처럼 가끔씩은 강호를 향해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아니 강호에 들어가기 위해 바쁜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더 먼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이다. by (조정육)
200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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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금강산을 사랑한 화가
謙齋 鄭敾
지금부터 볼 그림은 우리나라 국보로 매우 널리 알려진 〈금강전도〉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바위로 만들어 놓은 듯한 만물을 품은 경관과 기기묘묘한 바위 봉우리들이 늘어선 천하의 명승지, 금강산을 그린 그림이다. '전도(全圖)'라는 말은 전체를 그렸다는 의미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정선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300년쯤 전에 활동했던 화가인데, 84세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오늘날 전해지는 옛 그림 가운데 정선의 그림이 가장 많을 정도다.
그의 호는 겸재(謙齋)다. 예전에는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선 같으면 '겸재' 하고 호를 이름 대신 불렀다. '겸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금강산 그림이다. 그만큼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다. 왜 그렇게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는지 먼저 그 이유의 하나는 정선이 살던 당시에 금강산 여행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그전부터 무척 유명했는데 고려 시대에 이미 중국까지 소문이 났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다음 생애에 다시 태어난다면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구경해 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정선이 살던 18세기는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가 넉넉해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름나 있던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금강산에 다녀온 사람은 그것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금강산 그림을 찾곤 했다. 마치 우리가 해외 여행지에 가서 엽서를 사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이 특히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솜씨도 솜씨려니와 무엇보다도 정선이 금강산을 그리는 새로운 기법을 찾아냈다는 게 중요하다.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을 보면 마치 실제 산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단발령망금강산〉이란 제목의 그림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금강산을 찾아갈 때 거쳐야 하는 단발령이라는 고개와 그 너머에 펼쳐져 있는 금강산을 그린 그림이다. 정선이 새로운 기법을 발휘해 그린 것으로 금강산을 그린 그림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금강산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수많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래서 아래쪽은 숲이 넓고 울창한데다 위로는 만 2,000봉의 바위로 된 봉우리들이 연속으로 솟아 있다. 정선은 금강산의 특징을 잘 드러내기 위해 바위산을 그리는 기법과 나무가 많은 흙산을 그리는 기법을 함께 썼다. 그 사이에는 구름과 안개를 깔아 자연스럽게 두 세계를 연결시켰다. 이러한 독특한 기법이 정선 그림이 가지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선 그림에는 큰 것과 작은 것을 교묘하게 섞어 놓아서 보는 사람이 그림 세계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신기한 힘이 있다. 이 그림을 봐도 그렇다. 나무가 많은 흙산의 고개 위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서 있다. 자세히 보면 힘든 언덕길을 오른 뒤에 숨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휴~" 하는 숨소리와 함께 "정말 근사 하구나!"라는 감탄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고갯길 중턱으로 시선을 돌리면 짐을 잔뜩 진 노새를 끌고 뒤처져서 올라가는 사람이 보인다. 이것을 보면 누구나 저절로 '아, 가파른 고개인가 보다'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힘든 고개를 다 올라온 사람들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또 갓을 쓴 사람의 손짓을 따라가 보면 구름 속의 금강산을 가리키고 있다. 이 손짓 하나로 그림을 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림 속의 금강산 구경에 따라 나서게 된다.
이처럼 정선은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내고, 또 그림 속에 여러 아이디어를 심어 놓으면서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그가 금강산 그림을 처음 그린 사람은 아니었다.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 초기부터 금강산 그림이 그려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이전의 어떤 화가보다 훨씬 더 잘 그렸고, 또 새롭게 그렸다는 점에서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정말 금강산 그림의 대가라고 할 만하다.
대가는 다른 말로 거장이라고도 하는데, 그림에서 거장이란 강물에 비유하자면 흘러가는 물줄기의 방향을 바꿀 정도의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이 금강산 그림을 그리는 화풍을 만들어 놓자 물줄기의 방향이 바뀌듯이 이후의 화가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 했다.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던 심사정, 김홍도, 김희겸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많은 화가들이 금강산 그림을 그릴 때면 겸재식 화풍을 따랐다. 거기에는 직업 화가나 문인 화가의 구분이 없었을 정도다. 금강산의 만 2,000봉을 그릴 때면 정선처럼 으레 희고 뾰족뾰족한 바위를 그렸고, 바위를 감싸고 있는 산기슭을 표현하기 위해 먹점을 무수히 많이 찍어 숲의 무성함을 나타냈다.
이름난 화가들만 그렇게 그린 게 아니었다. 지방에 있는 무명 화가들도 정선을 따랐다. 금강산 그림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금강산 여행 열풍이 일면서 크게 유행했다. 그래서 지방에서도 금강산에 관심있는 사람이 많았고, 이들 역시 금강산 그림을 원했다. 서울의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은 값이 비싸니까 지방에서는 이름나진 않았지만 손재주가 있는 화가들에게 금강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많았다. 지방의 무명 화가들은 이런 요청이 들어오면 당연한 듯이 정선의 그림을 놓고 베껴 그려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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