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교감의 시詩’를 꿈꾸며 / 박완호

2016. 4. 24. 20:07


램프를 켜다 (331)



프라하 2010.09.16 08:03     
http://blog.daum.net/prahapraha/13416820               


      

p r a h a

 


 

시인조명 │ 박완호 시인의 체험적 시론

 

 

‘황홀한 교감의 시詩’를 꿈꾸며 / 박완호

 

 

 

1.

 

   내가 지금까지 고민해온 것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시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보다는,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를 처음 만났던 순간 내가 서 있던, 모성의 상실이라는 상황 때문일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엄마(한 번도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러 본 적이 없다.)의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던 절망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그때 운명처럼 시가 내게로 왔다. 나는 무작정 책을 읽었고, 무엇인가를 노트에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것은 시의 얼굴을 하고 내 앞에 섰다. 내게 있어 시는 모성이 지워진 세상을 견디게 해준 유일한 힘이었다. 


   또래의 시인들이 모두 마찬가지이겠지만, 나 또한 시쓰기에 대한 고민이 가장 심각했던 때는 이십대를 가로질렀던 1980년대였다. 지난 얘기지만 그때 우리에게는 시를 쓰는 것 말고도 절실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함께 시를 쓰다 죽자고 다짐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펜을 버리고 현장 속으로 뛰어들 때, 그들 가운데 가장 재주가 부족했던 나는 끝내 펜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시를 떠나 살아갈 자신이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써온 시들을 펼쳐 읽는다. 내 손을 떠난 그 순간 이미 세상에서 폐기처분된 것이나 다름없던 시들. 나는 그만큼 외로웠으며, 또 외롭고자 했다. 언제였던가? 목련꽃이 한창 피어나던 교정에서, 선생은 내게 “시인은 끝없이 외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누가 들어도 옳은 말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2.

   시인은 날것 그대로인 직관으로 세계와 교감한다. 진정한 교감은 서로가 동등한 자리에 설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한 교감을 통해 자아는 사물, 혹은 세계와 합일되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기 위해 시인의 정신은 한순간도 잠들어서는 안 된다. 

시인은 불화로 가득 찬 세계와 직면한다. 그것은 시인과의 교감이 끊긴 세계이다. 교감이 사라진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불행한가? 세계의 불화를 깨달은 내 눈이 향하는 곳은 모성이 사라져 버린 세상이다. 나는 타자와 나,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교감을 통해 불화를 넘어 화해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세계의 중심에 흔들림이 있음을 보았고, 그 흔들림과 내 안의 흔들림이 만나 이루는 화음을 꿈꾸었다. 그리고 온 몸의 더듬이를 곧추 세워 두 흔들림이 만드는 팽팽함을 느끼려 했다.

──첫 시집 ‘서문’ 일부


   서정시는 본질적으로 자아와 세계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지닌다. 타락한 현실 때문에 자아와 세계의 공존이 힘들었던 1990년대 이전이나, 다양화된 현실 속에서 더 이상 답답한 서정의 틀에 갇혀있기를 거부하는 자아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지금이나, 서정시는 우리 시의 주된 흐름에서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된 듯하다. 그러나 서정시를 쓰는 것이 마치 촌스런 짓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받는 분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서정시를 고집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나 또한 그렇다.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작은 나뭇잎 하나가

가지를 쥐고 있던 고사리 손을

놓는 그 순간,

제 혈육을 떠나보낸 아픈 설렘으로

나무는 어깨를 들썩이고

보다 못한 다른 나무들이 온몸을 뒤틀기 시작한다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나무들의 춤사위,

산 전체가 한 그루 나무이고

이파리 하나만으로도 산을 이루었다

보라, 양말 속으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때

마음은 이미 춤판 가운데 오른 춤꾼처럼

나뭇가지 하나가 남몰래 손가락을 꿈틀거릴 때

하나의 나무와

마음의 끈으로 묶인

모든 나무들이 한꺼번에 어깨를 흔들며

소리를 받고

오래 전에 한 세상을 이룬

산 전체가 들썩이는 모습을,


    ──졸시, 「춤판」 부분

 

 

   흔들림은 살아있는 존재만이 지니는 생명의 본질이다. 이름 없는 풀이나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도 그러한 존재의 흔들림을 간직하고 있다. 살아있는 존재는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죽은 존재는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생명인 우주는 그렇게 수많은 존재들의 흔들림으로 가득하다. 자아의 흔들림이 흔들림의 본질을 되찾은 세계와 만나는 자리에서 울려나는 화음和音, 그것이 바로 내가 꿈꾸는 시이다. 시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교감이 빚어낸 황홀이다. 상처 입은 존재들이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는 손길 아래 눈부신 황홀경이 펼쳐진다.



산과 산이 / 서로 좋아라 끌안고


내川를 흘려 / 체액을 나누는


기막힌 합방 / 속

 

새새끼가 / 난다.


       ──졸시, 「산山, 산」 전문

 


   내 눈에 비친 세계는 성적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불행한 세계란 바로 성의 조화와 균형이 무너진 세계이다. 모성이 사라진 세계란 결국 성의 조화가 깨져버린 세계가 아닌가? 그러한 세계 속에서 나는 날마다 섹스를 꿈꾼다. 내가 꿈꾸는 섹스는 조화를 되찾은 세계 속에서 너와 내가, 인간과 자연이, 꿈과 현실이 합일을 이루며 즐겁게 생명을 낳는 것이다.

한 조각을 잃어버려 이빨 빠진 동그라미인 나는


덜렁, 자그마한 생명 구슬 두 개

반쪽의 생을 몸 밖에 두고

뒤뚱뒤뚱, 비익조比翼鳥의 꿈을 꾸는 나는


안해야, 안해야

해와 달 같은

내 구슬들 너 줄 테니, 나랑


생명 심으며 살자, 응

생명 낳으며 살자, 응


   ──졸시, 「공에 관한 짧은 생각」 부분

 

 


태국으로 혼자 여행을 떠난 아내는 얼마나 내가 그리웠으면


값비싼 그 마음을 신용카드로 꾹꾹 찍어


내게 보내 주었다, 나는 왠지 맘이 간지러워


휴대폰 화면이 바뀔 때마다 단위가 커져가는 마음을 지우지는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 그리움을 결제하고 있었다

 

           ──졸시, 「그리움을 결제하다」 전문

 

 


   지나친 진지함이 시를 지루하게 만들 때, 재치 있는 발상과 익살스런 표현은 시가 지루해지는 것을 피하고 나아가 시적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주변의 시인들 중에는 해학적인 기질을 타고난 시인이 적지 않아, 그들의 빼어난 시를 읽을 때면 시 읽기의 즐거움이 훨씬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지나치게 되면 시는 중심을 잃고, 시 쓰기는 단순히 장난에 그치고 말 위험도 있다. 나는 진지함과 자유로움이 균형을 이루며 즐겁게 만나는 시를 꿈꾼다.  

시인은 단순히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가 아니다. 시인의 언어는 수단을 뛰어넘어 스스로를 추구하려는 기질을 지닌다. 나는 언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시인이 되기보다는, 언어와 더불어 살과 마음을 섞어가며 한 세상을 살고 싶다. 한 편의 시로 부화할 순간을 기다리며 도처에 숨어있는 키 작은 존재들을 찾아 매순간 길을 나서고 싶다. 이제는 ‘나’의 작은 틀을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자리에서 ‘시’를 고민하고 꿈꾸고 싶다.

외로운들, 삼류인들 어떠랴! 그렇게 시인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참말!


 

「시와 산문」 2009년 여름호

 

출처 / 시와 산문 그리고 녹색 cafe.daum.net/kpoetry  

 

 




 


blog.daum.net/prahapraha/13416820   바람의 궁전